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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오해 – 뉴스앤조이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오해. “예수님께서 과연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친 과부를 칭찬한 것일까?” 기자명 이민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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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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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 설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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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렙돈 헌금한 과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 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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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과부의 두 렙돈을 오해했다. –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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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과부 의 두 렙돈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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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q9NVDe2Wi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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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 대부분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내용으로 이해한다. 도대체 얼마나 신앙이 좋으면 대책도 없이 성전에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가 있을까? 물론 액수로 보면 그녀가 바친 두 렙돈은 지금의 1000원 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이지만, 그것은 그녀에겐 생명과 같은 전부였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마음에 껄끄러운 느낌을 지우긴 어렵다. 정말 하나님은 이렇게 가난한 과부에게도 전부를 요구하시는 것일까? 그렇게 해야 그녀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인가?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말이다.

이 과부의 헌금을 생각하다 보면 마지막 남은 한 줌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해 먹고 아들과 죽음을 준비하던 궁핍한 사렙다 과부에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엘리야가 생각난다(눅 4:25-6; 왕상 17:8~15). 정말 철면피 같은 선지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과부의 마지막 것을 빼앗는 듯한 엘리야의 요구는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 스토리의 결말을 알기에 엘리야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녀의 순종을 보시고 엘리야를 통해 밀가루와 기름을 차고 넘치게 공급하셨다는 것을!

그렇다면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친 과부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도 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 본문은 여기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본문을 보면 그녀의 믿음을 칭찬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과연 본문은 모범적인 헌금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혹시 다른 깊이 있는 내용을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경우에도 성경 해석의 가장 기본은 본문의 문맥과 저자의 전반적인 신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먼저 문맥을 보자. 이 내용을 누가복음 21:1~4절이 아니라 20:45~21:6절로 볼 때 내용은 확연히 달라진다. 원래 성경에는 장, 절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찬찬히 특히 밑줄 친 부분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살펴보자.

20: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본문의 구조는 단순하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 그리고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치는 과부, 그리고 그러한 헌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종교 지도자의 탐욕으로 희생된 과부와 헌물로 화려하게 꾸며진 부를 자랑하는 성전을 심판한 내용으로 변한다.

강도의 소굴에 재산 바친 과부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하여 분노하셨다(막 11:17; 마 21:13; 눅 17:46). 그것은 성전 안에서 성전 당국자들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장사치들의 매매로부터 이익을 챙긴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단죄였다. 그리고 성전 청결을 통해 성전이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 주셨다(눅 19:46; 마 21:12~13; 막 11:15~18; 요 2:13~16).

맙소사! 그렇다면 이 과부는 강도의 소굴에 헌신적으로 전 재산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푼까지 바치게 하는 율법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강도들은 부유해지고 그들의 소굴은 날로 화려해지고 있었다.

당시 성전에 생활비 전부를 바친 그녀는 생명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사렙다 과부처럼 자신도 전부를 바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성전에 헌금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는 생활비를 다 바쳐서라도 신명기적인 하나님의 물질 축복을 받아 내야 한다고 외친 종교 지도자의 희생양은 아니었을까?

종교적 착취는 경제적 압제보다 단수가 더 높다. 종교 권력은 물리적 방법을 동원해 강탈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는 돈뿐 아니라 마음까지 빼앗긴다. 절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과부는 쉽게 탐욕적인 종교 지도자의 먹잇감이 된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전부를 바쳤을 것이다. 아마도 사렙다 과부의 결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말이다. 그러나 탐욕에 물든 종교적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과부는 더 가난해지고 종교 지도자는 더 부유해지기만 한다.

문제는 성전 당국자들과 율법 지도자들의 동기가 하나님의 뜻만을 전하던 엘리야와 달리 탐욕에 근거했다는 사실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과부를 착취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다. 당시 알려진 것으로는 과부가 바친 “한 줌의 고운 가루”를 작은 예물이라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인 제사장의 이야기(Lev. Rab 3.5 [레 1:17에 대한]), 쿰란 공동체의 과부들을 강탈하는 예루살렘 제사장 단을 비난하고 과부들이 경제적 궁핍으로 말미암아 매춘을 하는 현실을 한탄하는 이야기(4Q270 5, 19)가 있었다. 또한, 구약 선지자들의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성전 당국자들에 대한 비판과 심판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렘 7:6).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사회 경제적 결핍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율법은 그들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보호를 명한다. 누구도 “과부나 고아를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으실 것이다(출 22:22). 신명기 언약은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공의를 베푸시는(신 10:18)” 분으로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재판관들은 소외된 자들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한다(신 24:17; 27:19). 고아와 과부는 십일조 복지 제도의 우선 대상이다(신 14:29; 26:12-13).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사 10:2). 초대교회는 이러한 전통을 받들어 과부의 가산을 탐하는 것을 비난하였고(막 12:40), 참된 경건에 과부를 돌보는 것을 포함했다(약 1:27).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저들은(부자들)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눅 21:3~4) 과부의 행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착취당하는 과부에 대한 한탄으로 보인다.

이러한 해석은 성전과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탐욕을 경고하고 종교개혁적인 성향이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 잘 들어맞는다. 탐욕스러운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강도’요, 가난한 자의 헌물로 사치스럽게 꾸민 성전은 사실 그들의 ‘소굴’이라는 실상을 보여주는 예가 바로 이 본문에 나타난 과부의 이야기이다.

당시 성전이 무너지게 된 것은 단순히 로마의 침략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본문의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과한 탐욕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생활비까지 착취당하는 과부를 보며 한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성전의 멸망을 불러온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성전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강도의 소굴이 무너지고, 강도들이 심판받은 것뿐이다.

성공하고 복 받으려면 헌금 많이 해야?

오늘날 만일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인 극빈한 과부가 끼니를 때울 마지막 남은 몇천 원의 생활비를 교회 헌금함에 넣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렙다 과부의 결말처럼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을 바라보며 그녀의 믿음을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그녀는 혹시 일부 탐욕적인 부흥사의 기복적인 설교로 말미암은 희생자는 아닐까?

그녀가 어떤 동기로 헌금하였는지 물론 중요할 것이다. 만일 어려운 중에서도 풍성하고 즐겁고 아낌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금에 동참하는 모습이라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규범이 되는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후 9:7). 그리고 교회는 그녀의 헌금을 어떤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욱 귀히 여기는 동시에 사렙다 과부의 결말을 그녀가 체험하도록 가난한 자의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을 함께 실현해야 한다. 당시 유대 성전처럼 차별하고 착취하지 말고 초대교회가 결핍한 과부들의 생계를 도와주었던 것처럼(행 6:1)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도 초대받고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천국 잔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새로운 신약의 성전인 교회의 참된 모습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 재정을 늘리기 위해 인간의 성공과 부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거나, 가난한 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교묘하게 이용한다면 그 책임을 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와 신학에서 먼저 찾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때 가톨릭교회가 최고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성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해 성경적으로 사실무근인 신학과 온갖 감언이설로 이미 죽은 가족이나 조상에까지 적용되는 죄 사함, 천국 보장, 물질 축복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어 가난한 대중들에게 헌금을 바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 중 특히 부흥사들 가운데 교회 건축과 재정을 늘리기 위해 온갖 세상의 축복과 헌금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를 양적으로 부흥시키고 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고 싶은 목회적 야망으로 말미암아 온갖 기복적인 축복을 받을 것이라 약속하며 헌금을 강조한다면 그곳은 심판의 대상인 강도의 소굴일 뿐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오늘날 절박한 상황에서 전 재산을 성전에 바친 과부의 이야기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라 칭찬하며 성도의 처한 상황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헌금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면 제발 반성해라!

“니가 바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본문의 종교 지도자야, 짜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창조절 11주, 2018년 11월11일

38.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물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기원전 10세기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그 뒤로 두 번에 걸쳐서 재건되었습니다만,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서 파괴된 다음에는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무너진 성전 서쪽 벽의 잔해만 남아 있습니다. 그게 통곡의 벽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월절 같은 절기에 성지순례자들도 붐볐습니다. 예수님 역시 몇 차례에 걸쳐서 성지순례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때 벌어진 어떤 이야기를 오늘 설교 본문이 전하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헌금

막 12:41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헌금함을 대하여 앉아 계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한 공간인 보물창고에는 열세개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습니다. 헌금함에 따라서 헌금의 종류도 다릅니다. 성전을 수리하기 위한 헌금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자연재해를 당한 사람들을 돕는 헌금, 또는 어떤 절기를 맞아서 특별 헌금을 드리거나 개인적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헌금도 있었을 겁니다. 성전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제사장이 헌금하는 사람 이름과 액수를 기록했습니다. 기록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록해야만 헌금 관리의 잘못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헌금에 대한 동기유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자들이 앞 다투어 헌금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들은 헌금함에 뭉치 돈을 넣었습니다. 여유가 있으니 헌금도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성을 담아서 헌금한 부자들도 있었고, 또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서 헌금한 부자들도 있었을 겁니다. 헌금 동기가 어디에 있었든지 그들의 헌금은 예루살렘 성전을 운용하는데 긴요했을 겁니다. 헌금은 어떤 점에서 세금과 비슷합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세금을 많이 내고, 적은 사람은 적게 세금을 내는 게 마땅합니다. 교육이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인 부자들이 자신들의 세금을 깎아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거둬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헌금을 낸 부자들을 칭찬하지 않으셨고, 그렇다고 무조건 비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헌금한 한 사람이 예수님의 눈에 띄었습니다. 부자와 완전히 대비되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 과부는 푼돈에 불과한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너무 적은 액수라서 속으로 부끄러워했을지 모릅니다. 부자들의 통 큰 헌금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를 내리지 않으신 예수님이 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극적인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부자가 넣은 헌금액수와 과부가 넣은 헌금액수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백만 원을 넣었다면 과부는 천원을 넣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그날 헌금함에 들어간 여러 헌금 중에서 액수가 가장 적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많이 넣은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는 44절에 나옵니다. 다른 이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중에도 자신의 모든 소유를, 즉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무슨 이유로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것일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을 수 없으니 차라리 남은 돈을 몽땅 헌금함에 넣고 굶어죽겠다고 작심한 것일까요? 그동안 헌금을 하지 않아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평범하게나마 먹고사는 걱정을 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으로 무리하게 헌금한 것일까요? 우리는 그 속사정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가난한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곧 그녀가 자신의 인생, 즉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신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빠의 손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공중부양을 할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실제로 신뢰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에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선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태도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보통의 경우에는 이 여자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은 형편이 괜찮은 사람보다 더 위축돼서 살아갑니다. 생존이 실제로 위태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생존만은 국가가 책임져주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가난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생존에 대한 염려에 묶여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전반적인 심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상이 파괴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현대인의 무의식까지 지배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 포로 신세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사 51:12,13).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북한 핵에 맞서기 위해서 군사력을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듯이 배금주의(mammonism)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한 증상들입니다.

실제로 가난하고 힘이 없으면 삶이 고단해지는 거 아니냐, 특별히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다. 이해는 가지만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 말은 가난한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이 행복하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비교하는 이야기인데, 가난한 교회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실제로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상투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난은 불편할 뿐이지 행복 여부에 직결되지 않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과 가난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쪽이 많을까요? 어느 쪽이 더 소중할까요? 가난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은 부자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손에 꼽아보십시오. 좋은 집과 자동차, 해외여행, 거액 헌금, 명품 드레스, 일류 호텔 뷔페, 비싼 명화 구입 등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겠지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삶의 목표로 삼는 한 그 사람은 삶에 대한 염려에서 풀려나지 못할 겁니다. 가난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가을단풍과 하늘구름 보기, 야생초 기르기, 밥 냄새 맡기, 공공 도서관에서 책읽기, 외로운 신자들에게 말 걸어주기, 찬송 부르고 기도하기, 교회의 빈자리 채우기 등등,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이런 것들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가난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부자가 되기 위해서 삶을 소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부자로 살아야만 누릴 수 있는 것과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삶을 다 누리고 싶겠지만,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면서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대충 양다리 걸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건 가능하겠지만 확실하게 한쪽을 선택하는 방식으로는 두 가지를 다 누릴 수 없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양다리 걸치는 식으로 삽니다. 저 역시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삶에만 몰두하지 못합니다. 다만 삶의 중심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어서 그쪽 방향으로 더 진도를 내도록 노력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서기관의 위선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이야기 바로 앞에 서기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로 대비되는 이야기입니다. 서기관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도층에 속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로서, 오늘날 교수나 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큼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뜸 그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예수님은 조목조목 대셨습니다.

38,39절이 묘사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닙니다. 자신의 지위를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보게 하는 겁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걸 좋아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치의 상석에 앉고 싶어 합니다. 한 마디로 다른 이들보다 잘났다는 걸 확인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방식으로 삽니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잘난 척하고, 어떤 사람은 세련된 방식으로 교만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어느 기도문에서 이를 가리켜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고 사랑해주기를 바람으로써 어떤 즐거움을 누리려는 욕구’라고 규정했습니다. 정확한 진단입니다. 이런 욕구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혁명적인 변혁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게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대충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 같으나 문제는 그런 방식으로는 영혼의 만족이, 생명 충만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거지가 구걸하듯이 자기를 인정해달라고 평생 두리번거리다가 지쳐버릴 뿐입니다.

40절은 서기관의 문제점을 좀더 노골적으로 묘사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켰다고 합니다. 그들이 과부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정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과부가 필요로 할 때 율법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주고 지나치게 높은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변호사의 고액 수임료 같은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위선으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행동입니다. 당시에도 생각이 있는 서기관들은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가능한 짧게 기도하고, 혼자 있을 때 길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의 위선을 짚으신 다음에 결론적으로 그들이 엄중한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공동번역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기관처럼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우리 자식들도 그런 자리에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이 더 엄한 벌을 받는다면 서기관이 되지 않는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좋은 건지 종잡기가 어렵습니다. 최선은 서기관의 자리에 올랐으나 위선적으로 살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죽을 각오로 노력하지 않는 한 어렵습니다. 죽을 각오로 살지 않으려면 서기관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는 게 차라리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직도 역시 위험스럽습니다. 본문에 나온 서기관은 오늘의 목사라고 해도 좋습니다. 보통 목사라기보다는 큰 교회 목사라고 보는 게 좋습니다. 큰 교회 목사들은 어디 가도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런 대우를 받지 못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목사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다른 이들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심판은 ‘이미’ 일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그걸 각오하지 않으면 목사가 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가난한 과부

다시 가난한 과부로 돌아갑시다. 이 여자는 어디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긴 옷을 입을 수 없고 시장에서 문안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회당이나 잔치 자리에서는 언제나 말석입니다. 민폐의 대상으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신뢰하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보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세상의 작동 메커니즘과 완전히 다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엄청난 반전입니다. 거지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민심을 살피려고 분장한 임금이었다는 동화에 나올만한 반전입니다. 저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이야기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무슨 위로일까요?

우리 중에는 지금 본문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아무리 내려가도 가난한 과부보다 못하지 않을 겁니다. 서기관이나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와 같은 인생만으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으니 지금 자기 신세를 한탄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않아도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하나이고, 서기관처럼 더 존경받고 싶고, 더 인기를 끌고 싶고, 더 넉넉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다른 하나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가난한 과부가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기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여러분도 구원받을 수 있고,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생명 충만, 성령 충만, 영혼 만족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용기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라는 게 아니라 생존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여러분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목사인 저의 경우를 말씀드린다면, 교회 성장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자식 교육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고 전인교육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조금 낭만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아파트 값 오르는 거 생각하지 않고 시골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이 유일한 정답은 아닙니다. 형편에 따라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방식으로 일희일비하지 말고,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두 렙돈을 다 넣은 가난한 과부처럼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결단과 자세입니다.

두렙돈 헌금한 과부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교회에 헌금과 봉사를 강조하는 목사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을 들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인 두렙돈을 연보함에 넣은 과부(막12:42)에 관한 기사일 것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인 두렙돈을 연보함에 넣었던 여인을 헌신의 표상으로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이 왜 그 여인에게 집착하는지 그게 정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전적 헌신을 칭찬하시기 위해 그 여인을 언급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본문에 들어있는 정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단순히 두렙돈 연보한 내용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 앞뒤 문맥과 저자가 왜 그 기사를 거기에 배치하였는지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이 연보 기사가 나오기 전 바로 앞에는 예수님께서

”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막12:38-40)는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다음에 한 과부가 연보를 했는데 그 연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 재산으로 두 렙돈이었습니다. 이 돈은 한끼 밥도 사먹기 힘들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전 재산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그 과부의 남은 여생에 영향을 미칠만 큼의 큰 돈이 되지 못하는 돈이었습니다.

한 끼 식사를 하건 안하건 아마 그 여인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돈 일 수도 있습니다. 굶는 것을 밥먹듯이 해 왔다면 한 끼 더 굶는 것이 그 여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으로 두 세끼 중 한끼의 식사를 하지 못한 들 그 여인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인이 연보를 하고 간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풍족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대비시켜서 말씀하십니다. 헌금함에 헌금한 사람들은 모두가 “풍족한 중”에 넣었고 과부는 “가난한 중”에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소유 = 생활비 전부”에 초점을 맞추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교회에 헌금한 행위만 드러날 것입니다. 두 렙돈이 보잘 것 없는 돈이었지만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이 강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백억원의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그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인색하지 말도록 강요하는 말로 사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전후 사정을 보면 꼭 그런 말씀이 아닌 것을 봅니다. 왜 두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이야기 앞에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서기관을 언급하며 그 서기관이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두렙돈 헌금을 한 과부는 어떤 여인입니까? 바로 이런 서기관들에 의해 가산을 빼앗긴 여인입니다. 실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여인이 먹고살기 위해 토지를 팔았을 수도 있습니다. 정당한 값을 치르고 희년을 지켜 그 여인이 평생을 거지로 살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갖가지 예외 조항을 만들어 이런 율법을 변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변개된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바로 서기관이었습니다. 결국 그 과부의 가산은 이들에 의해 전부 착취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선행을 들어 제자들에게 훈계하고 싶으셨다면 두렙돈 헌금한 그 과부에게 직접 칭찬하였을 것입니다. 열두해 혈우증 앓은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며 칭찬하셨고 향유 옥합을 깨트린 여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한 일도 전파되리라 칭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성경 어디에도 두렙돈 헌금한 그 여인에게 직접 칭찬한 구절은 안 나옵니다. 오히려 그 여인이 떠난 자리에서 제자들에게만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다음 절에서 제자들은 당시 헤롯이 지었던 웅장한 성전을 가리키며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이 어떠하냐?”며 예수님께 성전의 웅장함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그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곳이 무너질 것이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 성전에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전된 자신을 통해 다시 세워질 것을 말씀하셨지만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성전은 결국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사들이 이 “두렙돈 헌금한 과부”의 지금까지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결코 헌금과 헌신의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과부의 전재산 = 전적 헌신”이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풍요한 자”와 “가난한 자”를 대비시킨 예수님의 진정을 깨닫는다면 교회에 헌금을 강조하는 일에 앞장서기보다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만든 사회 구조와 이런 양극화 속에서 고통 받는 과부와 같은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칭찬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막 12:41-44 눅 21:1-4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진심일까, 아니면 재물일까? 복음서에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봉헌합니다.(눅21,1-4) 그 가치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6,21) 누구나 재물은 귀중하며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여인은 기쁨으로 아낌없이 바쳤기에 예수님께서 그 정성에 칭찬 하십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은 가끔 헌금을 강조 할때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소개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그런 뜻에서 여인에게 칭찬을 하셨을까요?

<성경 배경>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면 이방인의 뜰이 있고, 이어서 문으로 들어가면 여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 사이에 미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고 가르치신후 여인의 뜰로 가셨습니다. 여인의 뜰에는 13개의 헌금궤가 있었습니다. 헌금궤중에 7개는 성전세를 내는 헌금궤입니다. 그리고 6개는 낙헌제의 예물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이것들은 나팔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윗부분은 넓고 아랫부분은 좁아서 마치 나팔과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이 헌금궤들은 각각 다른 목적을 위해 헌납하도록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물을 위한 곡물, 포도주, 기름 등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희생 제물을 태우는데 사용되는 나무, 제단위의 번제로 드려질 향료, 금그릇 들의 유지비 등을 위한 헌금궤입니다.

헌금궤 중 7개는 성전세를 내도록 한 것이고, 6개는 자유롭게 봉헌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매일 드리는 제물이나 성전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돈을 넣기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팔궤 옆에 앉아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산헤드린과 사두개인, 서기관들과 논쟁하고 질책하신후 피곤함을 느껴 고개를 떨어뜨리고 계셨습니다.

눅21장 1-2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고 이어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연보궤는 카조퓔라키온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물, 금고라고 번역되면, 헌금궤를 의미합니다. 연보는 불쌍한 과부나 나그네와 고아등을 돕는 물질입니다. 렙돈은 그리스의 최소 화폐 동전입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들은 옷차림으로 구별이 되었을 것입니다.

눅21장 3-4절, [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헌금 액수가 아니라 전체 소유 가운데 바친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를 기준으로 가난한 여인의 헌금을 판단하셨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서 많은 헌금을 바쳤지만 그들의 풍족한 재산에 비하면 적은 양에 지나지 않았고 많은 재산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부를 바쳤기 때문에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헌금을 칭찬한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입니다. 금전상으로 볼 때 그녀의 헌금은 성전의 재정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헌금을 평가할 때 물질주의나 황금만능주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이 아니고 순수한 신앙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헌금 문제로 상처를 받은 성도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과부의 헌금을 칭찬한 것은 많은 것을 배우게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소재로 풍족한 형식적인 희생과 믿음을 지적하십니다. 특히, 이 이야기는 앞 장에서 다룬 바 있는(눅20:45-47) 서기관들의 위선적 경건을 비판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1)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심

성전을 찾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명목의 모금함에 헌금을 넣을 수 있었습니다. ‘부자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란 뜻으로 도라(dw’ra)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도론(dwvron 은사, 예물, 헌금, 선물) 목적격 복수로 사용된 것으로, 부자의 헌금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연히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보시고’라는 말을 막12:41에서는 에데오레이(ejqewvrei)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말은 의도를 가지고 지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누가는 에이덴(eiden)이라는 말을 쓰고 있어, 예수께서 우연히 과부의 헌금 행위를 접하고 알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서기관들의 자기 자랑과 허영심에 의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것에 비하면, 항상 구제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 행위는 비록 우연히 보게 된 장면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2) 가난한 과부의 헌금

성경에서 ‘과부'(chvran 케란)는 가난한 사람으로, 흔히 구제의 대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penicra;n 페니크란)이라는 말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페니크란(penicra;n) 이란 말은 ‘굽실거리는, 거지 같이 보이는’ 것을 의미하며, 광범한 의미에서의 가난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과부의 형편이 그만큼 초라하고 옹색하였다는 뜻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금액은 두 렙돈(lepta; duvo 렙타 뒤오)입니다. 이 금액의 가치는 1페니의 1/16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래 ‘빈약한 것’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렙돈’ 1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렙돈 1개는 허락하지를 않아 2개를 드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연보 궤는 헌금함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들은 많이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자의 동전은 아마 요란하게 헌금함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을 것입니다. 이때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과부인 그녀는 빈민이었습니다. 렙돈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는 화폐 중의 가장 작은 단위였습니다. 두 렙돈은 1/64 데나리온이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입니다.

마가복음서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로마의 화폐단위를 같이 설명한 것입니다. 고드란트는 로마의 화폐단위입니다. 이 여인은 한 렙돈을 내면 되었지만 두 렙돈을 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의 눈에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심지어 그녀는 많이 연보한 부자보다 많이 넣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비록 그녀가 드린 예물은 금전적인 가치는 적었지만 희생적인 관점에서는 가장 큰 것입니다. 예물의 가치는 그 액수가 아니라 그것을 낸 사람의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의 작은 두 렙돈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한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44절) 부자들의 예물은 풍족한 가운데 낸 것이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넣었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서기관의 외식을 설명하시고 이어서 바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설명하셨습니다. 과부의 헌신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의 부정적인 예를 설명하시고 가난한 과부를 긍정적인 모델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 중에 예배당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는 형식과 습관에 얽매여 예배하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일상에서도 윗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외모도 정갈히 하고 의복도 귀중한 것으로 골라 입고 가거늘 하물며 우리를 주관하시는 주님을 예배하러 갈 때에는 어떠한 복장과 어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할지 삼척동자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할려고 예배당에 가면서까지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가슴에 품고 가면서 주님께 그 무엇을 내어 드리고 무엇을 감사하다고 에배당을 찾는지 한심하다 못해 측은한 마음마저 들 때가 한두 번은 아닙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배 자들이 예배에 몰두하는 순간에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전화 벨 소리로 마음이 흩어지게 하는 행위는 어떠한 변명으로 용서가 될는지요? 헌금은 감사한 마음에 주님께 올리는 정성의 표시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은 감사는 물론이며 기쁨과 슬픔 그리고 생명까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예물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마음을 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께 습관처럼 몇천 원 몇만 원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해방감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예배당 문을 박차고 나가지는 않는지요? 많고 적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한 마음인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에 대하여 칭찬하신 것은 부자는 나쁘고 과부는 착하는 것이 아니고, 가진 것의 전부가 아니며, 많고 적음이 아니고, 어떤 마음 가짐이냐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의 소유를 전부 바치라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마음가짐이 하나님께 전부를 드릴 수 있느냐? 와 모든 물질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아느냐입니다. 무작정 가난한 과부를 미화 하거나 부자를 배척하려는 뜻이 아니며, 당시에 가진자의 휭포를 지적하면서 많이 가진 자들이 어려운 자들을 괴롭혀서 착취하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http://cafe.daum.net/ilmak

마태복음18장 23정-35절에 보면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시대의 헌금도 하나님께 드림으로 복 달라고 거래하는 물질이 아니고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가진 자들은 율법이 정한 자유와 해방을 베풀어야 하였음에도 겉으로만 지키는 척하였고 과부와 가난한 자에게 베풀어야할 물질은 오히려 움켜지고 베풀지 않았고 그 물질로 하나님께 드렸을때 하나님께서는 대노하시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말라기 1장 6절-10절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고후9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헌금은 기쁨과 감사로 드려야 합니다. 억지로나 자랑으로 내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이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리는 행동을 하였기에 예수님은 책망하시고 작은 것을 드린 여인이 성경에 기록되며 칭찬을 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물질중에는 가난한 자의 몫이 포함되어 있는데 다 내것이라고 하면 주님께서 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자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물질 안에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할 인금과 구제의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 되시길 원합니다.扈ⓗ

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 (일맥)

메모 :

우리는 지금까지 과부의 두 렙돈을 오해했다.

많은 목회자가 헌금 설교를 할 때 쉽게 예로 드는 이야기가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 이야기입니다.

초대 교부였던 놀라의 파울리누스(Meropius Pontius Paulinus)는 이 본문에서 과부가 하늘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여인은 오로지 다가오는 세상만을 생각했고, 천상 보화를 열망한 나머지 지니고 있는 모든 것, 땅에서 왔다가 땅으로 돌아가고 말 것을 송두리째 봉헌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립시다. 그분에게서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전 존재는 그분께 달려 있습니다. 모든 가난한 사람 안에서 받으시는 분께 내드립시다. 기꺼이 드리자는 말씀입니다.”(Oden ed, p.252)

교부들만 그렇게 해석한 것은 아닙니다.

알프레드 에더스하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 그녀는 이미 믿음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상의 약속도 제시하지 않으셨다. 그녀의 상급은 하늘에 있었기 때문이다.”(Edersheim, p.96)

국제신대 최승락 교수도 비슷하게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무엇이 과연 큰가(big) 보다 무엇이 진정으로 위대한가(great)를 묻는 법을 배운다.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은 결코 크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위대하다. 부자들의 헌금처럼 그 액수가 크기는 하지만 실상은 자투리에 지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비 전부와 더불어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맡기는 위대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런 위대한 신앙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최승락, P.105)

엘리야 시대 사렙다 과부는 한 줌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해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왕상17:8-15).

그게 마지막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 배고프니 마지막 떡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인간이라면 이래선 안 됩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겐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순종을 계기로 그녀에게 풍성한 축복 즉 밀가루와 기름이 차고 넘쳐나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의 과부는 마지막 생활비를 예루살렘 성전에 바쳤습니다.

그 마지막 생활비는 두 렙돈입니다.

학자들마다 조금씩 추정치가 다르긴 하지만, ‘성경 속의 생활풍습’을 연구한 제임스 프리맨은 헬라어의 렙돈은 그리스의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서 동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것의 가치는 1/8 앗사리온이며, 따라서 1센트의 약 1/15의 가치입니다(Freeman, p.147).

누가는 ‘몹시 가난한’, ‘아무것도 없는 궁핍한’ 과부로 표현하기 위해 신약성경에 딱 한 번 사용된 페니크라(penichra, 가난한)를 사용하였습니다(Morris, p.422).

이 과부는 마지막 생활비를 성전에 바친 후 어떻게 살까요?

과부는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까요?

엘리야는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과부에게 엄청난 복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은 그저 말로 칭찬만 하였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3-4)

뭐! 더 없습니까?

그녀에게 생활비를 보태 주었다거나, 제자들을 시켜서 그녀를 도와주었다거나, 복을 베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저는 예수님께서 설마 그녀가 마지막 생활비 전부를 바쳤는데 모른 척 외면하지 않았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런 뒷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누가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의 의도를 연구하려면 앞뒤 구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Marshall, p.519).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누가가 복음서를 쓸 당시에는 장과 절을 구분하지 않고 썼습니다.

누가복음 20장 마지막 절은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눅20:46-47)

예수님은 과부의 가산을 착취하는 서기관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과부의 헌금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은 성전을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눅21:5-6)

데이빗 갈란드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취약한 과부들을 수탈함으로써 자기 재산을 불리는 사람들 혹은 그런 과부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크게 타격을 가하신다’고 하였습니다.(Garland, p.907)

김득중 교수는 앞에선 서기관과 과부를 비교하고, 여기서는 부자와 과부를 대조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약하디 약한 과부의 재산을 삼키는 종교 지도자들과, 약한 과부를 돕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뽐내기 위하여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를 대조합니다(김득중, p.391).

그러므로 조엘 그린 교수는 예수님의 말씀은 칭찬도 포함하긴 했겠지만, 오히려 약한 과부의 마지막 동전까지 집어삼키는 종교 시스템과 지도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과부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는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문제로 종교 지도자들을 고발했던 것처럼, 이제는 과부의 생계비를 삼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종교 시스템의 비극적 모습을 탄식한다. 결코 누가는 예수가 과부의 행위에서 모범적인 또는 칭송받을 만한 모습을 찾았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종교 시스템이 이런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참고 행 6:1-6) 어떻게 이렇게 궁핍한 자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예수의 사명은 이 과부를 포함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지, 가난한 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Green, p.912).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면서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의 십일조는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돌보는 데 쓰도록 하였습니다(신14:29,26:12-13).

이스라엘의 재판관은 반드시 약한 자들을 위하여 판결해야 했습니다(신24:17,27:19)

가난한 자를 없게 하려고 희년과 안식년 제도를 두었습니다.

과부를 토색하고 고아를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하였습니다(사10:2).

그러나 예수님 당시 종교 시스템과 종교 지도자들은 약한 자들을 수탈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헌물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쳐서 과부의 마지막 동전까지 바치도록 가르쳤습니다.

미쉬나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헌금함이 있어서, 각종 명목으로 헌금을 거뒀다고 하였습니다(Bock, p.1013).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받기를 좋아했고, 가난한 자들의 헌금을 받아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했습니다(눅20:46-47).

헌금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기복신앙을 가르쳐서 예루살렘 성전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호화롭게 치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을 보면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여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마땅한 데, 오히려 강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인데, 오히려 불의를 저지르는 본부가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라고 탈을 쓴 악한 자들이 성전을 장악하고 잘못된 메시지로 순진한 백성의 헌금을 갹출하고, 그것도 모라자 성전세와 온갖 세금을 받는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선지자적 심판을 선언하였습니다(Green, p.913).

과부의 두 렙돈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께 헌금하는 아름다운 과부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는 과부가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패한 종교 시스템 속에 착취당하는 한 과부의 헌신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이야말로 무너져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패하고 타락한 성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헌금을 가르치고 강요하는 종교 시스템을 결코 옹호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시행하여 약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제대로 된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셨습니다.

참고도서

Bock L. Darrell,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LukeII(베이커주석 누가복음), 신지철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17

Edersheim Alfred, The Life & Times of Jesus The Messiah(메시아 4. 십자가와 면류관), 황영철,김태곤 옮김, 생명의 말씀사, 2012.

Freeman M. James, Manners and Customs of the Bible(성경 속의 생활풍속 따라잡기), 남송현 옮김, 아가페, 1998

Garland E. David, Zondervan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존더반 신약주석 강해로 푸는 누가복음), 정옥배 옮김, 도서출판 디모데, 2018.

Green B. Joel, The Gospel of Luke(NICNT 누가복음), 강대훈 옮김, 부흥과 개혁사, 2020

Mark(교부들의 성경주해 신약성경 III 마르코복음서), 최원오 옮김, 분도출판사, 2017.

Marshall I.Howard,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Luke(국제성서주석 누가복음), 강요섭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6.

Morris Le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틴델신약주석 시리즈 3. 누가복음), 이정석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Oden C. Thomas &Christopher A. Hall,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New Testament III

김득중, 성서주석 누가복음 II, 대한기독교서회, 1993.

최승락, ‘두 렙돈 이야기의 진짜 뜻은’(그말씀 2003년 7월호), 두란노, 2003

과부의 두 렙돈 (막 12:41-44) — 생명샘교회

과부의 두 렙돈

마가복음 12:41-44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양보다 질을 보시는 주님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신 채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양을 지켜보셨습니다. 당시에는 헌금할 때에 헌금의 액수를 밝히고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의 화폐는 지폐가 아닌지라 헌금함에 돈을 넣으면 헌금 액수가 적나라하게 노래를 합니다. 어떤 헌금은 “땡그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랑”하고 소리를 낼 것이고, 어떤 헌금은 “띠딩”하고 말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갈 것이고, 적게 하는 사람은 헌금을 하는 손이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겨우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의 얘기가 등장을 합니다. 렙돈은 헬라의 화폐로서 가장 낮은 화폐 단위였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친절하게 로마 화폐인 고드란트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고드란트는 로마 화폐 중 최소 단위였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1불도 안되는 돈을 헌금한 것이지요. 마가는 많이 넣는 부자와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부류를 대조하십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가운데 일부를 바쳤지만, 가난한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 자기의 생활비 전체를 바쳤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헌금하였다고 칭찬을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를 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를 남겼느냐를 보십니다. 또한 얼마나 많이 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했느냐를 보십니다. 헌금의 양이 아닌 헌금의 질을 보신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헌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니다. 시간이 남아 돌아 교회에서 더 많이 섬기는 것도 귀하지만, 도무지 섬기기 힘든 상황가운데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섬기는 그 헌신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헌신의 양이 아닌 헌신의 질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2. 두 렙돈이 생활비의 전부여야 하는 과부의 존재가 문제

과부의 두 렙돈 얘기는 헌금 얘기가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시고 무리들이 헌금을 어떻게 하시는 것을 주목해 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전후 문맥과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이전에는 부유하고 권세있는 서기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부유했으며,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 존경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 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이후에는 아름다운 돌들과 화려한 금으로 치장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훼파될 것을 경고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즉 전후 문맥을 통하여 전달되는 전체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의 위선에 대한 지적 – 전 재산을 바치는 과부에 대한 칭찬 – 가난한 자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웅장한 성전의 훼파 경고.”

즉 예수님께서는 지금 헌금을 정성껏 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비 전체가 두 렙돈인 과부가 존재하는데, 서기관들은 부유하게 살면서 그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전의 건물은 금으로 치장되어 있는데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과부는 꼴랑 두 렙돈이 전 재산인데다가 그나마 그것도 헌금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돈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는 서기관들의 부는 과부를 착취한 데에서 나온 돈이었습니다. 화려한 성전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 없이 부의 축적에만 집중하는 성전을 가르켜 “강도의 굴혈”이라고 부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과부는 강도의 굴혈에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것이지요. 이러한 헌물은 성전의 화려한 건물이 되었고, 서기관들의 배를 채우는 자금이 되었습니다.

문맥 상 과부는 하나님을 매우 사랑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가난한 자들의 사랑의 표현을 가로채서 자신들의 배를 채웠습니다.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주시고, 성전을 향해 파괴의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3. 가난한 자를 외면하지 말라

당시 과부는 고아와 함께 결핍과 소외의 상징이었습니다. 율법은 과부와 고아들에 대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보호할 것을 엄중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과부나 고아를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원한을 갚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출 22:22).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 10:2). 고아와 과부는 십일조 복지 제도의 우선 대상이었고 (신 14:29), 추수를 할 때에도 그들을 위해서 곡식을 다 거두지 말고 가난한 자를 위해 남겨 두어야 했습니다 (레19:9-10).

신약시대에 와서도 디모데전서 5장, 야고보서 1장 등은 아예 교회의 책무와 경건생활의 요소에 과부를 돌보는 것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즉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며, 교회의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며, 성도가 해야 할 경건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잠언 19:17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자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돕는 행위는 반드시 갚은 바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돈을 빌려주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도울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빚쟁이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신지라, 반드시 그것을 갚으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돕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은 나만, 내 가정만, 내 교회만 하나님을 예배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경건생활은 성경읽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경건은 성경, 기도, 교제, 전도와 더불어 구제로 완성이 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돌보는 것, 그것은 곧 경건생활의 화룡정점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잘했다고 칭찬하는 말씀인가?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잘했다고 칭찬하는 말씀인가?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잘했다고 칭찬하는 말씀인가?

성경을 읽을때는 장절의 구분에 억매이지 말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의 일화임에도 앞에서 제시되는 주제는 무시하고 뒤에서 벌어진 한 부분만을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하기 보다는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거나 미혹 되어서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후 1500년경에 구분된 장절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취하다가 오해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형제님은 십일조에 관하여 과부의 두 렙돈을 거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견해를 밝히셨지요.

십일조의 전통이 교회를 타락하게 했다는 어떤 분의 칼럼을 읽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 분의 논지는 십일조가 교회의 재정을 풍성하게 하고, 그 많은 돈이 교회를 부패하게 했기 때문에 구약적인 전통에 불과한 십일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 헌금함 앞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한 동안 지켜보신 일이 있습니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고,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신 이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때는 헤롯 성전이 완공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얼마후에 완전하게 파괴될 것이었고, 우리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게다가 이 때는 이미 유대인 지도자 그룹들과 예수님의 긴장관계가 아주 팽배한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맹렬하게 비난하셨고, 특별히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그들의 탐욕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주님께서 그 과부의 헌금을 제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전부를 착취하는 종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신 일도 없습니다.

형제님의 요지는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과부의 생활비 전부를 착취하는 종교의 구조적인 문제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본문을 별 생각없이 읽으면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으로만 보입니다. 또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눅21장을 보더라도 풍족한 중에 적게 헌금한 부자를 책망하며 가난한 중에도 모든 소유를 헌금한 과부를 칭찬하는 것으로 끝나는 듯하죠.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앞의 장면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칭찬하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겸하여 비교해 보면 무엇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성전의 헌금함 앞에 있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막12:38-44, 13:1-2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 를 보실새 여러 부자 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 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눅 20:45-47, 21:1-6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 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 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 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 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성전) 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사건의 발단을 보면 예수님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먼저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을 책망하는 말씀 이며, 가난한 중에 있는 과부가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헌금함에다 가진 모든 것을 넣으므로 과부의 가산이 삼켜짐을 당했음 을 보여 주시는 장면입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착취한 헌금으로 지어진 건물 성전은 다 무너뜨려 버리겠다 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누구를 칭찬하자고 서기관들을 삼가하라고 했을까요? 삼가했으면 과부의 가산이 삼켜지지 않았을터인데 삼켜짐을 오히려 칭찬했다니요? 종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았다구요? 언약궤가 있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던 시대에 그 건물 성전을 헐어버리고 영적인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하시는 대격변의 시대에 구조적으로 변화가 없었다니요? 혈통적인 제사장 시대에 복음의 제사장을 세우고 건물 성전 시대에 영적인 성전을 건축하시는데 헌금은 구약식대로 율법을 따르자는 것일까요? 형제님의 견해는 예수님의 책망과는 완전히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형제님의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당시 성전을 장악한 것은 사두개인들과 제사장 그룹들이었고, 그들은 예수님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과부의 행위를 칭찬하심으로 그 헌금을 정당화했습니다. 그 칭잔의 근거는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과부의 행위를 맹신이나, 어리석음으로 질책하지 않으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님,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의 심판을 말씀하시는데 헌금을 정당화 했다니요? 삼킴 받는 헌금은 칭찬 받아야하는 것입니까?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 보십시요. 삼킴을 당한 자가 칭찬을 받아야할 입장입니까? 아니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할 입장입니까? 심판 받을 자들에게 삼킴을 당하였으나 그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구요? 이게 무슨 궤변입니까… 삼가하라고 하셨음은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하지 말라는 것이며 심판 받을 일에 동조하지 말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가령 그렇케 착취한 헌금으로 꾸며진 건물성전을 칭찬하셨다면 모를까 다 무너뜨려버리겠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어디에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까? 다 넣은 겁니다. 삼키는 자들의 헌금통에 말이죠.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삼가하라고 하신 서기관들에게 미혹되어 자신의 가산을 다 삼킴 받았는데 무슨 칭찬의 근거가 됩니까? 만약 이러한 상황에도 헌금을 칭찬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짓된 진리를 가르치는 거짓된 선지자들 밑에서도 헌금을 진실되게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이 되잖습니까? 노략질하는 자들의 탐욕을 위하여 사용되는데 하나님께서 받으실 헌금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이 그리 부족하여 탐욕자들에게 삼킴을 당하여서라도 헌금만은 꼭 하라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착취하여 지어진 성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나요? 아름다운 미석과 헌물로 꾸며본들 무너지리라는 예수님의 준엄한 말씀에 귀를 기울렸다면 칭찬이 아니라 분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삼가하라 하셨으면 삼가할 일을 생각해야지 헌금은 칭찬했다니요? 삼가하라시면 삼가해야 합니다. 건물을 꾸미기 위하여 과부의 가산까지도 삼켜버리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은 알려하지 않고 율법을 통하여 종으로 삼을 궁리만 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 자기들의 헌금통에서 당신들의 믿음을 증명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영적인 성전을 위해서 하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부동산 투자하고 더 안락하고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하게 건물을 세우는거요? 그래서 십일조가 필요하고 일천번제가 필요하고 각종 명목의 헌금이 필요한가요? 영적인 성전은 헌금으로 지어져가는게 아닙니다. 세상일을 하며 돈을 벌어서 십일조든 십이조든 드렸다해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제물이나 헌물이 되겠습니까? 땅에서 거둔 추수의 열매가 구약시대처럼 그러한 것이 아니잖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7개의 절기를 구약시대처럼 지키지는 않찮아요. 유월절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세요. 또한 계시록 14장에 등장하는 처음 익은 열매들을 생각해 보세요.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하신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시면 진정 드려야할 제물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 과부를 또 이용하여 더 많은 백성들의 가산을 노리고 있습니다. 심판 받을 자들에게 헌금을 하고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 중심을 보시니까 복을 주실거라는 미혹된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무너뜨려버리겠다는 주님의 분개하심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겠습니다.

[마 23: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 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 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 23: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마 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화있다고 하는 저 서기관과 같은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 말씀이라는 미명하에 거짓된 가르침으로 무지하고 가난한 성도들의 가산을 삼키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는 사람들. 영적인 성전을 짓기보다 무너뜨린 건물 성전을 다시 지어보겠다고 십일조며 각종 헌금을 강조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미혹되는 자들도 칭찬의 대상이 아니라 책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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