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기둥 불기둥 | [중앙아트] 중앙성가 24집 05. 구름기둥과 불기둥 합창 97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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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성가 24집
05. 구름기둥과 불기둥 – 작곡가 홍권옥
✔매번 많은 사랑을 받는 ‘중앙성가 24집’이 다양한 절기와 새로운 찬양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성탄, 부활, 어린이, 감사절 등 다양한 절기가 포함된 ‘중앙성가 24집’은
Mary McDonald, Joseph Martin, 진선미, 홍지열 등 구내외 정상 작곡가들의 곡을
박신화 지휘자의 은혜로운 연주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문의 (주)중앙아트 제이앤에이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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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신학 < 기사본문

출애굽기 13장 21절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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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njoy.or.kr

Date Published: 10/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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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목사 설교] 구름기둥과 불기둥 – 크리스천투데이

구름기둥과 불기둥 · 1. 인도자 하나님 첫째로, 저들의 일생을 인도하시고 우리들의 일생을 인도하시는 인도자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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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5/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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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강해(11)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서(출13:17 …

한 마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키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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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lleteia.tistory.com

Date Published: 8/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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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가져야 할 세 가지 확신 (민 9:15-23)

구름이 성막을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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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4/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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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메세지 /출13:17-22 – 네이버 블로그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이 에담에 장막을 치고 있을 때 구름기둥 불기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40년 저 광야생활 내내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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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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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성경 Holy-Bible

구약에 나오는 기둥으로는 기념물로 세운 돌기둥(창 28:18 , 삼하 18:18), 건물의 지주(왕상 10:12),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출 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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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0/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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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40:34]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인가? – 코이네자료실

구름기둥은 불기둥은 성민을 바로의 군대로부터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전도를 위한 선교의 신호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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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inedata.tistory.com

Date Published: 4/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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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주 교수] 구름기둥 불기둥 (출 13:21) – 성경마루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지진이나 화산 등의 자연현상으로 간주된다. 얼른 떠오르는 자연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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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knews.co.kr

Date Published: 1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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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트] 중앙성가 24집 05. 구름기둥과 불기둥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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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구름 기둥 불기둥

  • Author: 중앙아트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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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9.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Kc9iN-7gCU

뉴스앤조이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한 조사 기관에서 기독교인 70% 이상이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본 적이 있다는 통계를 발표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러니한 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이 1,000만이 넘는다며 자부했던 개신교계가 속빈 강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런 의식 없이 조상 대대로 믿어 온 종교니까, 아니면 문화생활의 한 단면으로, 아님 나름대로의 이익의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말만의 종교인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의 삶의 현장 속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가? 나는 과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확실한 대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향하던 광야교회(행 7:38)가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계시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같습니다. 이럴 때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대답은 풍성하였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구름 기둥·불기둥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구름 기둥·불기둥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구름 기둥·불기둥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 계시의 표적입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구름’, ‘불’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징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불과 연기 가운데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출 19:18). 하나님 자신이 살아 계신 분임을 알려주는 계시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천지가 모두 하나님 존재의 증거들입니다. 해와 달, 별과 빛들, 산·바다와 강과 바람,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 보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당신의 존재를 불과 구름 기둥으로 나타내 보이시며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말 없는 실체의 대답인 것입니다.

둘째, 구름 기둥·불기둥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 계시의 표적입니다

본문은 하나님 자신의 이스라엘의 가나안 행군 현장 속에 임재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저들 가운데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저들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본문 13장 22절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하였습니다.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역사와 현장 속에 친히 임재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구름 기둥·불기둥은 하나님 자신의 구원 계시의 표적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430년간의 애굽 종살이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 섬길 자유를 받아,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입성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방향을 바꾸어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출 13:17~18). 저들은 ‘숙곳’에서 발행한 후 ‘에담’이란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이때 갑자기 구름 기둥·불기둥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바로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들이 통과하는 땅이 광야요, 사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막과 광야의 사망성은 무엇이겠습니까? 사막은 참된 길을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욥 12:24). 그곳에는 심한 모래바람 때문에 여행자들이 길을 찾아 헤매다가 길을 잃고, 심지어 죽기도 하는 곳입니다. 사막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없는 곳입니다(창 21:14). 하갈의 모자가 만난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어떤 때는 모래가 햇빛에 반사되는 것이 물결처럼 보이는 이른바 신기루 때문에 받는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막은 도적떼들을 만나는 위험한 장소입니다. 사막은 전혀 생존에 필요한 좋은 조건을 찾아볼 수 없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구름 기둥, 불기둥은 생명성, 구원성을 가지고 나타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기둥은 갈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나타났습니다. 구름이 저들 앞에 떠오를 때 일어나 길을 행하고, 구름이 떠오르지 아니할 때는 발행하지 아니했습니다(출 40:36~37). 이처럼 구름 기둥·불기둥은 사막에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애굽의 바로는 변심했습니다. 그가 다시 추격하여 왔을 때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출 14:19~20).” 이런 경우 구름 기둥·불기둥은 구원의 방패요, 산성이요, 피난처였던 것입니다.

두 기둥은 생명의 보존이었습니다. 사막의 밤은 기온차로 인하여 춥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이때 저들에게 나타난 불기둥은 온기를 주는 생명이었습니다. 사막의 낮은 뜨겁습니다. 저들에게 나타난 구름 기둥은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생명이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 여자와 유아까지 200만으로 추산되는 대민족 이동에 구름 기둥·불기둥의 역할이야말로 저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결정적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넷째, 구름 기둥·불기둥은 오늘의 신약 교회의 예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그들 민족의 구원을 의미한 것입니다. 애굽은 불신앙의 이 세상을 말합니다. 우상숭배를 강요하고, 하나님의 선민을 죽이던 애굽은 본질적으로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계 11:8). 이러한 죄악 세상에서의 구원은 바로 오늘의 영적 출애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기 위하여 구름 기둥·불기둥을 구원 운동의 수단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교회 운동에 또 다른 불기둥·구름 기둥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사람으로 친히 보내어 역사의 현장에서 구원 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생명과 구원의 태양으로서 그는 십자가에서 죄인들의 구속 성취를 선언하셨습니다(요 19:30). 그리고 구약에 나타난 광야 교회의 그것보다 더 뚜렷하고 확실하고 효과적인 바로 오순절에 보낸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다시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내주하시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 성령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입니다. 바로 성경을 가리켜 성령의 검(엡 6:17)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과 말씀, 말씀과 성령은 오늘 교회의 갈 길을 인도하고, 교회의 살 길을 알려 주고 있으며, 교회의 영적 체온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성막이 아닌 오늘의 한국교회를 성령과 말씀, 말씀과 성령으로 덮고 있습니다. 밖의 원수들로부터 성령과 말씀은 검이 되게 하시므로 대적들로부터 생명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 기둥, 불기둥! 거기에는 소리도 없고, 발자취도 보이지 않지만 거기엔 길이 있고, 역사가 있고, 승리가 있으며,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강해(11)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서(출13:17~22)_2018-11-14(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B.C.1446에서1406년까지 무려 40년동안 무엇의 인도를 따라갔던 것일까? 모세와 아론을 따라갔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따라갔던 것인가?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따라갔다고 말씀하고 있다(출13:21~22). 그렇다면, 그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그들이 40년동안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은 무엇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B.C.1446~1406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시적이며, 초자연적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았다. 하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성막과 하나가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은 법궤(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오직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분이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성령께서 믿는 이들을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계신다(요16:13). 그러므로 오늘날 믿는 이들을 인도하고 있는 분은 2가지다. 하나는 보이는 것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인도를 잘 따라가기를 소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나는 어떻게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는가?

2018-11-14 수요기도회

제목: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서(출3:17~22)

https://youtu.be/5ifFPyGZfuc

1. 들어가며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간 곳은 어디였는가? 그들은 곧바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았다 . 그들은 광야로 갔다. 그리고 시내산을 거쳐서 가나안땅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의 광야의 여정은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직접 블레셋사람의 길로 인도하여 곧장 그들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거쳐가는 광야의 생활을 하게 되는데, 왜 그들은 스스로 곧장 가나안땅을 향하여 가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 채 광야에서 40년간을 지내야 했을까?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어떤 길을 통해서 시내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40년동안 광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왜 광야 이곳저곳으로 이동해야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에담 끝 광야에서부터 그들의 인도자역할을 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실체와 그 역할 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광야로 가야 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출애굽직후 가나안땅으로 바로 가지 아니하고 광야로 들어가야만 했을까? 우선, 그 첫번째 이유부터 살펴보자. 첫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에 모세에게 애굽왕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이 나를 섬길 것이다. 그들이 3일길을 광야로 가서 내게 절기를 지킬 것이다(출5:1,3,7:16,8:3)”고 말하라고 했기 때문 이다. 광야로 가서 먼저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양떼를 치고 있던 모세에게도 “네가 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출3:12)”라고 말씀하셨기 때문 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빠져나온 뒤에 먼저 시내산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세번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가장 중요하고도 내면적인 이유 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출애굽은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는 누가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를 시험해보시기 위함이었다(신8:3). 다시 말해, 출애굽과 같은 위대한 역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했기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은 합당한 자격있는 자만을 데려가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1차적으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광야의 여정이 필요했다. 거친 광야같은 교회생활이 필요했던 것 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걸려진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겠지만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을 것이다(마22:14).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성도들은 교회생활을 잘 감당해야 한다. 여기서 구원이 결판나기 때문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라. 출애굽의 기적은 은혜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졌지만 가나안땅은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에 제대로 반응한 자만 들어갈 수 있지 않았는가? 만약 광야에 나왔더라도, 애굽에서처럼 늘 짜증이나 내고 불평이나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송아지같은 우상을 섬기고 사는 자는 결코 가나안땅을 밟지 못할 것이다.

3. 자상하시고 배려하시고 하나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사람의 땅의 길은 가나안땅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지만 그 길로 자기 백성을 이끄시지 아니하시고, 홍해의 광야의 길로 인도하신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들어간지 430년이 되었고, 종살이를 한 지는 한 300년이 넘었기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늘 문제가 생기면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그들이 일상이었기에, 그리로 인도했다가는 그들이 짜증내고 불평할 것은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좀 돌아서가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의 광야길를 인도하신다.

4. 홍해의 광야길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둘러서 간 “홍해의 광야길”이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보편적으로 알려진 “홍해의 광야길”은 수에즈만이 있는 홍해의 광야길이라고 하는 장소다. 그러나만 홍해는 수에즈만의 홍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카바만의 홍해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빙 둘러간 홍해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모세오경에 의하면, 그곳은 아카바만의 홍해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홍해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역과 함께 알려주는 성경구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왕상9:26의 말씀으로서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었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이 빙 둘러 갔던 홍해의 광야길은 아카바만의 홍해길이었던 것 이다. 특히 민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을 떠나 가데스에서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고는 그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정탐한 날수를 1년으로 계산하여 그들을 광야에 죽게 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일 돌이켜(뒤돌아)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고 말씀하셨다(민14:25).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은 에시온게벨이 위치한 홍해에 있는 광야길에서 40년간을 헤맨 것이다. 그리고 아론이 에돔땅의 변방에 있는 호르산에 죽은 이후 그들이 호르산을 출발하여 홍해길을 따라 에돔땅을 우회하려했다는 말이 나온다(민21:4). 이는 홍해길은 에돔땅과 인접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홍해길은 수에즈만이 있는 홍해의 길이 아니라 아카반의 홍해길을 가리키며, 이스라엘 백성이 건넌 홍해도 수에즈만의 홍해가 아니라 바로 아카바만의 홍해였던 것 이다. 나중에 출14장 강해 시간에서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애굽땅의 비하히롯(골짜기들의 입구)이란 현재 이집트의 “누웨이바”라는 항구도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그곳에서 홍해를 건너서 건너편 바알스본에 도착하였고, 에담(수르)광야를 지나 마라와 엘림을 지나서 시내산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5. 홍해의 광야길을 수에즈만의 홍해의 광야길로 주장하는 자들은 왜 그렇게 주장하는가?

그런데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구약학자들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갔던 홍해길 및 그들이 건너갔던 홍해가 수에즈만의 홍해라고 계속해서 주장하기도 한다 .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3일만에 이동하여 절기를 지켰던 장소가 결코 에담광야(에시온게벨 근처) 내지는 수르광야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에담광야 혹은 수르광야까지는 적어도 600Km이상 먼 곳인데,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도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3일만에 미디안땅과 인접해있는 에담광야나 미디안 땅 안의 수르광야까지는 이동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인 시각에는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이 종종 따른다. 사실 성경에는 수많은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 정복했던 여리고성은 천혜의 요새였고 2중성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호수아장군과 이스라엘 군사들이 외치는 소리 때문에 그냥 무너지고 만다. 2중성벽이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소리에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당시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이스라엘의 믿음의 함성과 함께 여리고성을 안쪽으로 무너뜨렸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무조건 과학적으로 검증가능하지 않는 일이라고 해서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나와있는 말씀 그대로를 믿고 따라가야 한다. 성경은 출애굽의 역사는 초자연적인 전능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숙곳을 떠나 에담 끝 광야에 도착하기까지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알아아 햔다. 그것은 출19장에도 나온다. 하나님께서 그때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출19:4)”. 또한 시편기자는 당시 애굽을 빠져나오던 사람들 중에는 비틀거리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시105:37). 이것은 마치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빌립집사가 가자로 가는 길목에서 이디오피아내시를 전도하고 세례를 준 뒤 갑자기 아소도에 나타나 사역했던 것과 비슷한 사건이다. 그때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적인 대이동이 있었던 것이다.

6.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을 가리키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에담 끝 광야에 도착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부터 어떠한 인도를 받았을까?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였다 (출13:21~2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때 보고 따라간 것은 단순한 구름이나 불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가나안 입성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각기 다른 존재는 아니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였던 것이 밤에는 불기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출13:22, 14:24, 민9:15~16).

그렇다면, 에담광야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동안 광야에 이끌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크게 3가지 역할 을 했다. 첫째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심을 보여주는 것 이었다. 한 마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고 있었다(출13:21, 신31:15, 시99:7, 느9: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여주심으로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알게 하셨다. 또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 곁을 떠나지 않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과 임마누엘하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둘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시105:38, 출14:19~20,24). 한 마디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키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사방이 터져있는 광야에서 누구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고 떨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들을 보호해주는 민족의 막대기였던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막다른 길로 들어가서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 불기둥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바로와 그의 군사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출145:19~20). 셋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아무도 몰랐다. 일이십명이 아니라 200만명의 사람들인데, 그들을 한 번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이 떨어지면 목말라 죽일 수도 있고 음식이 떨어지면 굶겨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인도해주었다. 만약 물이 없을 때에는 반석을 쪼개서라도 물을 마실 수 있게 해 주었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면 가면 되었다. 그러다보니 광야에서 그만 40년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빛이시며, 보호자이시며, 인도자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대신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들을 지켜주고 인도하던 좋은 길잡이였던 것이다.

7.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제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으며, 이후 그것의 역할은 무엇으로 대체되었는가?

그런데 이러한 구름기둥과 불기둥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서자 더이상 그들을 인도하지 않았다 .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면서부터 무엇의 인도를 받아야 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법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 당시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관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랬다. 출애굽후 1년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윤리와 법도를 가르쳐주셨다. 그것을 “율법”이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용서를 받게 하는지를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법이었다. 성막에 흠없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때 성막 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십계명의 두 돌판을 법궤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성막이 완성되자,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제 성막 위에 머무르기 시작한다(출40:34~38). 그리하여 에담 끝 광야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인도하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말씀이 보관되어 있는 성막과 하나가 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동하면 이내 성막도 걷어서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멈추면 그곳에 이내 성막을 쳤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위에 구름이 머물러있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성막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다가 40년이 지난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에 비로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사라지게 되고, 제사장이 멘 법궤만 맨 앞에서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광야 40년동안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가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로 대체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 그러므로 민수기 9장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은 것을 두고 “하나님의 명령(입)을 따라” 이동했다고 7번씩이나 기록 하고 있다(민9:15~23).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모든 믿는 성도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동이 대체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으며(요8:12),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주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 이다(요16:13).

8. 나오며

B.C.1446~1406년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안내를 받으며, 가나안땅으로 이동했다 . 그러므로 그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한다는 표적이었으며, 그분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증거였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간다는 표시 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가야 했다 . 그렇지만 성막이 건축되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가 되기에 이른다 . 그러다가 가나안땅을 들어가면서부터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사라진다. 더이상 초자연적이며 시각적인 하나님의 인도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부터는 오직 법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갔던 것이다 .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갈 수 있는가? 그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런 자만이 결국 약속의 땅인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시적인 현상은 B.C.1446~1406을 제외하고는 뚜렷히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법궤로 대표되는 말씀만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기를 힘쓰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그 가운데 기록된대로 지켜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런 자만이 결국 가나안땅인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 말이다.

2018년 11월 14일(수)

정병진목사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가져야 할 세 가지 확신 (민 9:15-23)

+ 설교제목 :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가져야 할 세 가지 확신

+ 설교본문 : 민수기 9정 15 – 2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곧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고 광야라는 험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설교는 크게 두 가지를 다루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났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확신하기를 원하는 세 가지를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광야를 고난의 장소로 이해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광야는 고난의 장소이전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는 광야로 나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셔서 40일 금식을 하시며 하나님을 대면하셨습니다. 세례요한 역시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그 힘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주님을 만난 후에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3년간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삼풍백화점 사고가 났을 때 보니까 몇 일만에 건물 잔해 속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실려서 나오는데 눈을 가렸더군요. 왜냐하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눈이 밝은 세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흑암 가운데 거하는 인간이 완전한 빛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시는 대신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치 목자가 막대기를 두들기거나 피리를 불어서 자신이 양 곁에 있다는 사실을 양에게 알리는 것과 같습니다. 혼자 화장실에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아이를 위하여 화장실 밖에서 헛기침을 하면서 아빠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했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보게 되면 과거의 그가 아닌 완전히 변화되어 새롭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에도 교회를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확연하게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있는 애굽의 속성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출애굽에 성공했으나 그들 안에는 애굽의 속성이 살아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430년간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애굽의 것들이 그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의 속성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처럼 믿는 자 속에 남아있는 세상의 속성을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다고 세상의 속성이 내 속에서 다 빠져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기에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은 받았고 천국시민권을 얻었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것들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군대에 들어가면 입대하는 순간부터 민간인이 아닌 군인입니다. 하지만 이제 막 입대한 이등병이 군인다운 군인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군인이지만 여전히 사회생활의 찌꺼기가 묻어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순간 그는 완전한 신자,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세상의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광야와 같은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갈 믿음을 준비를 시키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은 믿음으로 누리는 땅이었습니다.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열두 명을 보냈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으로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을 누렸습니다. 불신앙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이 준비되어지도록 훈련의 장소로 광야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2.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확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애굽의 속성을 제거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갈 믿음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면 성막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40년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났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애굽의 속성을 제거하시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을 준비시키시는데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사용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살펴보면서 세 가지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집시다.

구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격과 현존에 대한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출 40:34,35을 보면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구름이 성막을 덮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 확신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을 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담대하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담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라고 말하는 베드로마저도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나니 제자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임마누엘’ 신앙,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자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담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본분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실 때가 있고,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상당히 위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이 넘치는 요단강을 밟는 것처럼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고 아주 위험해 보이는 경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면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담대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시선만 의식해도 행동에 주의하게 되는데 만사를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어떻게 함부로 행동하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임마누엘’ 신앙이 확실해서 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상처 입은 사람이고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타국에서 외롭게 종살이를 하는 젊은이에게 시위대장의 아내의 유혹은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보디발의 아내와 자기 자신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이는 세계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이지 않게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낮에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것처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밤은 고통의 시간 혹은 죄악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거나 죄악 가운데 빠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친절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으로만 함께 하시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만약 구름기둥만으로 함께 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녁은 두려움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광야에는 들짐승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주변에는 적들이 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했지만 밤에도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구름기둥으로만 나타나셨다면 밤에는 식별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에도 볼 수 있도록 밤에는 불기둥으로 나타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2)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확신을 가집시다.

시 105:39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라고 노래합니다. 낮에 뜨거운 태양을 막아주시고, 밤에는 불을 밝히셔서 추위를 막아주시고 어둠을 밝혀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낮의 해로부터 보호하셨고, 밤의 추위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광야의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하셨고 주변의 적들로부터 보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늘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었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광야 40년을 버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으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백성들이 길로 인하여 원망하고 불평할 때였습니다. 광야에는 독사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때는 뱀에 물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쓰러졌습니다.

시 121:5, 6에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왜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쪽을 앞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쪽이 앞이면 남쪽이 우측입니다. 우리나라는 남향을 선호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향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데 태양이 가장 뜨거울 때가 남쪽에 있을 때입니다. 유대광야에 가보면 남향의 땅에는 풀이 없습니다. 태양빛이 너무나 뜨거워서 풀이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편에서 그늘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시 121:5에서도 하나님이 그늘이 되신다고 했는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늘이 되신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늘이 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겨울에도 춥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초가을 정도의 기온입니다. 그러니 여름에는 얼마나 덥겠습니까? 저는 겨울에만 이스라엘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여름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여름에 이스라엘을 다녀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굉장히 덥다고 합니다. 너무 더우니까 구토가 나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시원하답니다. 아마 습도가 낮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기후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늘이 되신다는 말씀을 보면 이해가 더 쉬워집니다.

그늘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잘 표현한 시가 시 91편입니다. 이 시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자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16절까지 계속해서 우리의 그늘이 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임을 확신합시다.

3)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갈 길을 몰랐지만 구름기둥이 이동하면 텐트를 정리해서 구름기둥을 따라갔고 구름기둥이 머무르면 그곳에 텐트를 치고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텐트는 요즘 나온 최신형 텐트처럼 던지면 “착” 하고 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일이 땅에 박고, 줄을 당기어 매어야 했을 것입니다. 천이 오늘날의 것처럼 가볍지도 않았습니다.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광야에서 와글거리며 텐트를 치고 걷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17-23절에서는 같은 말을 다섯 번 이상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따라서 순종하고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서 그 말씀을 다시 정리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라 행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분명한 것입니다. 흐리멍텅한 것이 아닙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분명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수증기 잠간 피워놓고 “봤냐 못봤냐?”는 식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분명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확실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움직임만 주목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 주목하면 성령께서 가장 합당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구름기둥을 따르지 않았을 때는 비참한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민 1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이 이동합니다. 모세가 말리지만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이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결국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들이 내려와서 그들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 행동하다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그는 자식을 낳지 못하자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을 취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가정에 평화가 깨어졌으며 그 한번의 실수가 지금까지 중동전쟁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신 1:30-33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을 대신해서 싸워주시고(30절), 그들을 안아주시고(31절), 장막 칠 곳을 찾아 주시고(33절), 행할 길을 지시해 주시는 분(33)입니다.

18-23절을 보면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따르는 것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인도하심은 말씀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도하심이 말씀과 동일할 경우에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입니다. 말씀과 어긋난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유부남인데 성가대원 가운데 예쁜 성가대원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여자가 제 이상형인데 함께 살아도 됩니까?” 그랬더니 기도 중에 유리창에 “그래”하는 답이 나왔답니다. 여러분! 이 응답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응답은 유리창이 아니라 TV 화면에 선명하게 나타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내하고 평생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성가대의 예쁜 여자와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 세 가지 확신을 가집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메세지 /출13:17-22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메세지 /출13:17-22/ 박봉수 목사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만에 애굽을 떠나게 됐습니다. 당시 출애굽 장도에 오른 이스라엘 백성은 장정만 60만, 그러니까 여자와 어린아이들과 노인을 포함하면 족히 200만이나 되는 대 집단입니다.

여기에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다른 족속들도 많은 수가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양과 소 그리고 가축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규모가 거대했습니다.

저들이 출발한 곳은 라암셋입니다. 첫 날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하루를 행군하여 약 52키로 지점인 숙곳에 도착했습니다. 출애굽 이후 최초로 이곳에서 머무르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숙곳을 떠나 또 하루 길을 행군하여 에담이라는 곳에 머무르게 됐습니다.

저들이 이곳에서 장막을 쳤습니다. 이 에담은 애굽의 동쪽 끝 경계지점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저들이 이제 애굽을 빠져나와 본격적인 광야 생활로 접어들기 직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이 에담에 장막을 치고 있을 때 구름기둥 불기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40년 저 광야생활 내내 함께 할 구름기둥 불기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구름기둥 불기둥이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당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증언이 그림처럼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을 종합해 보면, 우선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별개의 두 기둥이 아니라 한 기둥의 이중적인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보였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낮에는 구름처럼 시원한 모습으로 있다가, 밤이 되면 그곳에 빛과 열이 가해져 그 구름이 마치 전기난로처럼 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둥이라는 표현을 보면, 하늘 위에서부터 땅으로 기둥과 같은 구름 형상이 이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태양으로부터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저 위 하늘에서는 펼쳐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송이 버섯이나 우산처럼 생겼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담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은 왜 나타났을까?” 무척이나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들은 이 구름기둥 불기둥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담에 도착하면서 서서히 광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입니다. 그것도 이처럼 거대한 무리가 지나거나 머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서히 불안해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두려워 떠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래서 구름기둥 불기둥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구름기둥 불기둥은 저들의 광야생활에 꼭 필요해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준비해 주신 것은 광야로 나아가기 전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름기둥 불기둥에 담긴 소중한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따라 저 광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름기둥 불기둥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는 오늘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까요?

1.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2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했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 가운데 나타난 기둥은 밤에도 낮에도 언제나 변함없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라고 되어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을 해석해서 설명한 말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기둥 불기둥이 늘 자기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비록 저들이 힘겨운 광야생활을 하는 중이지만 저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번 중국선교 여행 중에 “애심의 집”이란 곳을 방문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다녀가신 정안덕 박사님께서 중국 장애고아를 양육하는 가정입니다. 북경대학 교수시절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중국 장애고아를 데려다 양육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제는 8명의 장애고아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항문이 없고, 어떤 아이는 심장에 문제가 있고, 또 어떤 아이는 다운 증후군, 또 어떤 아이는 손이 없고… 장애 때문에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들을 자녀로 돌보고 있었습니다. 워낙 힘겨운 일이어서 아예 북경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이 일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 북경을 떠나 중국 저 남쪽 광서성 양삭이라는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대단한 것은 사모님의 헌신입니다. 하루 24시간 이 아이들 곁에서 먹이고 재우고 병수발 들고 뒷바라지 하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겨운지… 그 사랑을 먹고 아이들은 정말 밝게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오히려 정상적인 아이들보다 반듯해 보였습니다.

저희가 방문했을 때 사모님은 영은이라는 아이의 심장병 수술차 서울에 가 계셨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없어서인지 시무룩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마침 저희가 떠나는 날 사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아이들은 전날부터 엄마가 오신다고 들떠있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맞기 위해 풍선도 달고, 종이로 플래카드도 만들었습니다.

사모님이 돌아오시는 그 순간 아이들의 그 표정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품에 안겨서 한 없이 울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아이는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전부인 것 같았습니다. 엄마가 함께 한다는 것이 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광야를 행군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마치 이 아이들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이들이 엄마 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잘 양육되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잘 행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 저 구름기둥 불기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우리에게 지금 구름기둥 불기둥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구름기둥 불기둥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이제 믿음의 눈을 열고 영으로 함께 하시는 구름기둥 불기둥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아가야 할 광야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길을 만들 필요도 없었고, 길이 생겨나지도 않았습니다. 잠시 대상들이 지나면서 길이 생길 수 있었겠지만 모래 바람이 한 번 불고 나면 생겼던 길도 모두 모래 속에 묻혀버립니다.

때로는 신기루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향을 착각하여 헤맬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광야는 전문적인 가이드 없이는 잠깐의 여행도 불가능합니다. 전문적 가이드가 있더라도 정해진 곳 정해진 시간에만 여행이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모세는 지난 40년 광야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광야행군을 위한 전문적 가이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만으로는 저들을 이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름기둥 불기둥을 준비하셨습니다.

민 9:15-17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막을 세운 날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장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었는데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것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성막을 세운 뒤에 구름기둥 불기둥이 성막에 기둥을 내린 채 이스라엘 진영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한 때 그 구름기둥 불기둥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 부지런히 행군 준비를 하여 그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 행군을 했습니다. 그러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은 또 부지런히 진을 치고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하게 구름기둥 불기둥을 통한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기둥 불기둥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보다 앞서지 않았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보다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과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방향을 따랐습니다. 철저하게 구름기둥 불기둥이 가면 가고 서면 섰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번 중국선교 여행 중 하남성을 방문했습니다. 이제 당당하게 하남성 기독교 최고 지도자가 된 당위민 목사님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제 곁에서 저를 안내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제 소개를 했습니다.

특히 이양현 교회에서 많은 교인들 앞에서 지난 13년 동안 저와 상도중앙교회가 어떻게 자기들을 도왔는지 자세하게 소개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잊고 있는 것까지 기억하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개를 들으면서 가만히 뒤돌아보았습니다. 하남신학교가 정말 보잘것없고 형편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에서 가장 큰 신학교로 발돋움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저들을 어떻게 도와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갈 때마다 기도하고 또 현지에서 하나님께 묻고 인도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붙여주셨고, 또 그 때마다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인도하심을 따라왔는데 뒤돌아보니 저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우리의 중국선교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여기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이시며 철저하게 인도하심을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이 그 인도를 따르게 되자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됐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길이 그렇습니다. 광야에서처럼 누구도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안다고 해도 잠시 부분적으로만 알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름기둥 불기둥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구름기둥 불기둥은 없을지라도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기도 가운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제 그 인도하심을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지나야 할 광야는 생태환경이 극한 상황입니다. 우선 한 낮의 더위는 살인적입니다. 그 폭염은 잠시도 견디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조차도 견디기 힘들어 거의 다 고사해 버린 땅입니다.

다음으로 저녁의 한기도 문제입니다. 낮에 덥다고 밤에도 덥지 않습니다. 밤에는 급격하게 기온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든든하게 옷을 입어야 합니다. 때로는 불을 지펴야 합니다. 여름이라도 그대로 견디기 힘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광야의 극한의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해 아주 특별한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름기둥 불기둥입니다. 낮에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막은 건조한 곳이기 때문에 아무리 더운 날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갑자기 밀려드는 추위를 막아주셨습니다. 마치 따뜻한 난방장치가 가동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또한 이 구름기둥 불기둥은 적들로부터도 이스라엘을 보호했습니다. 적들이 쳐들어왔다가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기겁을 해서 도망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맹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 121:5-6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 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신 32:10을 보면 모세는 재미있는 비유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눈동자처럼 지키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눈은 아주 특별한 보호 장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그 위치가 아주 단단한 두개골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물질이 들어가지 못하게 여러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눈썹은 물이 흘러 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속눈썹은 먼지가 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게다가 자동세척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누질 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를 밀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동으로 수분이 공급되고 또 자동으로 배수도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응급 대응장치가 장착되어있습니다. 위험 요소가 나타나면 반사적으로 눈꺼플이 닫힙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 뒤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보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기 눈동자를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그렇게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보호하신다는 메시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오늘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셨듯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보호하셨듯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셨듯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비록 우리에게 구름기둥 불기둥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서기 직전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들은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면서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광야를 행군하는 동안 친히 길을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친히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출40:34]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인가?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인가?

(구름기둥 불기둥)

본문/ 출애굽기 40:34-38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를 받읍시다.

지난 5월에 출애굽기 핵심 강해를 주일 저녁과 수요 저녁 예배를 통해 강론하여 9월에 마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출애굽기 전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전반부 1-19장까지는 출애굽 사건을 다루었으며, 후반부 20-40장까지는 시내산 언약을 다루었습니다. 전반부에서 10가지 주제를 다루었으며, 후반부에서 8가지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출애굽기 마지막 강론이 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인 일월 십사일 저녁에 어린양을 잡아먹고(출애굽기 12:6) 출애굽을 하여 한달 보름쯤 되어 시내산에 도착했는데 그때가 삼월이었습니다(출애굽기 19:1). 그들이 시내산에 와서 약 십개월 정도 머물렀는데 그때 모세가 두 차례나 시내산에 올라가서 계시를 받아 내려와서 백성들과 더불어 성막을 만들어 이년 정월 초일일에 성막이 완성되었습니다(출애굽기 40:17). 하나님은 광야를 여행하기에 앞서 그 무리를 시내산에 장기간 머물게 하여 언약의 말씀을 주어서 약속을 붙들고 광야를 여행하게 했습니다.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구름이 성막을 뒤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이전에 백성들 위를 덮고 있던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제는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덮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 사방으로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구름기둥 불기둥은 과연 무엇인가? 오늘은 여기에 숨겨진 비밀한 계시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임재와 영광의 신호입니다.

읽을말씀☞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34-35).

“그 후에”라는 말씀은 「성막이 완성된 후에」라는 말입니다. 성막이 완성되자 성막위로 구름이 덮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성막과 함께 동행한다는 임재의 상징이요, 영광의 신호입니다. 그러면 이 계시가 무슨 뜻인가?

「하나님 임재의 신호입니다」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임마누엘의 신호입니다. 거칠은 광야에 너희들 홀로 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자기 백성들과 함께 했습니다.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애굽기 3:12)고 했으며,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여호수아1:5)고 했으며, 이사야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이사야 41:10)고 했으며,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고 했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신호입니다」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창세기 1:27)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형상이 바로 하나님의 영적인 생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영이 된지라”(창세기 2:7)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으로 생명의 단절인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때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 3:11)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부귀영화를 다 누려 보았던 솔로몬이 노년에 고백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고 했으며,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31)고 했습니다.

둘째: 출발과 정지신호입니다.

읽을말씀☞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36-37).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칠은 광야에 왔을 때 동서남북 어디를 보아도 그들에게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요, 영원한 소망은 하늘나라입니다. 그 하늘에서 신령한 만나인 양식이 내려옵니다. 하늘의 구름기둥 불기둥이 그들에게 참 안식을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를 여행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역을 위한 출발의 신호입니다」구름기둥의 이동은 사역의 시작입니다. 일어나 광야를 행진하라는 신호입니다. 그들이 광야를 여행하면서 피곤하여 지쳐 있어도 구름기둥이 이동하면 따라 가야 합니다. 이사야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이사야 60:1)고 합니다. 세속의 깊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바울은 “또한 너희가 이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로마서 13:11)고 했습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마태복음 13-14)고 했습니다. 지금은 일어나서 어두움을 물리치고 부패를 막을 때입니다.

「안식을 위한 정지의 신호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도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이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합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틀이든지 한달이든지 일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민수기 9:17, 22)고 했습니다. 쉬고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역과 쉼을 반복하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름기둥 불기둥은 광야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무리들을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하는 영적인 신호등입니다.

셋째: 거주과 보호의 신호입니다.

읽을말씀☞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38).

구름기둥 불기둥은 한번도 성막을 떠나 보지 않았고 한번도 일교차를 어겨 보지도 않았습니다. 낮이면 구름기둥이 밤이면 불기둥이 그들을 지켜 주었습니다. 이는 성민이 생활하는 거주지를 지켜주는 보호신호입니다.

「거주를 위한 생활신호입니다」그들은 구름기둥이 머무는 곳에서 생활하게됩니다. 구름기둥이 덮고 있는 그곳이 거주하는 생활 공간입니다. 당신이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 때 구름기둥 불기둥인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성령의 지배를 벗어나면 사단의 권세 아래 사로잡히게 됩니다(에베소서 2:2).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18)는 말은 성령의 지배 아래 있으라는 말입니다.

「보호를 위한 사랑의 신호입니다」그의 사랑은 분초도 어김없는 너무도 정확한 손길입니다. 단 한번이라도 시차의 변동도 없이 추운 밤에는 어김없이 불기둥이 떠오르고, 더운 낮이면 구름기둥이 그늘을 가리워 주었던 것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2)라고 한 확실한 보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이천명의 천부장과 열두 족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움직일 때 날자나 장소을 위하여 한번도 의논하거나 토론하거나 투표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갔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에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시편 121:5-6)고 했습니다.

넷째: 구원과 선교의 신호입니다.

읽을말씀☞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38).

구름기둥 불기둥은 성민에게는 구원하는 신호요, 이방인에게는 선교를 위한 복음의 전도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 불기둥을 통하여 무엇을 깨닫았는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성민을 구원하는 신호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애굽인들이 곧 바로 추격해 오자 구름기둥 불기둥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서니 저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출애굽기 14:19-20)고 했습니다. 구름기둥은 불기둥은 성민을 바로의 군대로부터 건져내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전도를 위한 선교의 신호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널 때 이방의 무리들이 이 사건을 보았습니다.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여호수아 2:10)고 했습니다. 기생 라합과 그 가족들은 성민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깨닫았습니다.

언약의 백성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에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세기 12:3)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 그가 신실하므로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창세기 39:3)고 했습니다. 다리오 왕이 사자굴속에 있는 다윗에게 이르기를 “…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에게서 너를 구원하기에 능하셨느냐”(다니엘 6:20)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신실함을 통해서 다리오왕이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막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막의 중심이요, 핵심부은 거룩한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입니다. 그위에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므로 그 언약궤 위에 시은소 보좌를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성막의 중요한 성물들은 다 오실 메시야 의 모형이요, 상징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막위에 성령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주야로 성막을 덮어 성민을 보호하고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김창주 교수] 구름기둥 불기둥 (출 13:21)

▲ 김 창 주 교수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광야를 행진한다. 구약에 110여 차례, 출애굽기에 39 차례 언급된다. 더러는 ‘기둥’ 없이 ‘구름’과 ‘불’로 표기된 경우도 나온다(출 19:9,16,18; 40:38). 구약에서 불(שׁא)과 구름(ןנע)은 곧잘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된다. 사마리아 오경에는 ‘구름’과 ‘불’ 앞에 정관사(ה)가 없다. 이것은 사마리아 오경이 하나님 현존을 일회적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뜻으로 봐도 된다. 광야유랑 기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야웨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보호한다는 상징성을 확보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지진이나 화산 등의 자연현상으로 간주된다. 얼른 떠오르는 자연계의 이미지다. 고대인들에게 화산폭발이나 폭풍우는 신의 분노나 계시로 간주되어 두려움과 공포를 갖게 했다. 엘리야는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다(왕상 19:11f). 시편은 신의 임재나 현현을 그와 같은 자연현상으로 간간히 묘사한다(시 18:7; 29:3ff; 104:3f). 한편 성소의 향단과 등잔대는 다름 아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제의적으로 구현한 이다.

2) 떨기나무 불꽃이 모세 한 사람의 특정한 하나님 체험이라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경험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세가 ‘꺼지지 않는 불꽃’에서 야웨 하나님을 만나고 출애굽이 비롯되었다면 이스라엘은 신비한 낮의 구름기둥과 밤의 불기둥을 통하여 길고 긴 출애굽의 행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사실 동일한 현상이 낮에는 구름처럼 보였고 밤에는 불처럼 보인 것이다. 따라서 구름과 불은 시인의 노래처럼 야웨가 낮이나 밤이나 항상 이스라엘을 안내하고 막아준다는 뜻이다(시 121:4).

3)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능동적이면서도 다이내믹한 존재의 표현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분이다. 그렇기에 현실 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존은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출애굽 여정에서 하나님은 신비롭게도 무형이며 비물질적이고 투명하지만 안개처럼 가시적인 존재로 비춰진다(출 14:24; 16:10 등). 모세가 율법을 수여받을 때 장면이 흡사하다. 즉 야웨가 불 가운데 내려와 구름 같이 떠오르며 온 산이 크게 진동한다(출 19:18). 따라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낮과 밤에도 그분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는 신학적 장치였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 인식의 역설적인 측면에 대한 이스라엘 신앙인들의 고민을 간파할 수 있다. 곧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위의 세 가지 설명으로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집약한 신학적 개념으로 간주해야한다. 왜냐하면 이 숙어적 표현에는 이스라엘의 경험과 정보로 충분히 묘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면모와 그들과 함께 하며 이끄시는 내재적인 측면이 동시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른 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변증법적인 관계랄 수 있다. 유대 신학자 사르나는 유일신 신앙에서 하나님 인식의 배타성을 지적한다. 어떻게 동일한 하나님이 초월적이기도 하며 또한 내재적일 수 있을까?

따라서 이스라엘 신앙인들에게는 자연현상을 넘어 활동하시는 야웨의 초월성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절묘하게 묘사할 신학적 고안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사실 엇갈리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비단 출애굽 공동체 뿐 아니라 구약성서에 줄곧 이어지는 딜레마였다. 광야에 진입한 후 이스라엘은 위기의 순간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묘사되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늘의 구름으로 은유하고, 만질 수 없는 그 분을 뜨거운 불로 의인화하여 야웨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충족시킨다. 즉 하나님의 초월적 활동은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낮의 구름기둥으로, 내재적 임재는 밤의 불기둥으로 묘사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항상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한 분 야웨로 언급한 것이다.

마침내 성막이 완성되자 낮에는 구름이 그 위를 덮고 밤에는 불이 그 가운데 있었다(출 40:38). 이로써 유일신 하나님의 모순적 혹은 역설적 측면을 해소시킬 수 있게 되었다. 더러는 ‘야웨의 영광’으로 통합되기도 한다(출 16:10; 24:16; 40:34f; 왕상 8:10f).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경험한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형상화되었다면 두 성품의 상호내주(perichoresis)는 그의 영광으로 계시되었다.

한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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