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1 장 | 요나 1장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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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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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

요나. 제 1 장. 요나가 여호와를 피하여 달아나다.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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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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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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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8/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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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 다국어 성경 Holy-Bible

요나 1장 ·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 그들이 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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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4/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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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9(수) “요나 1:1-17” / 작성: 최정운

1장부터 4장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요나서 1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가는 요나가 큰 폭풍을 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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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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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1장 – 네이버 블로그

요나서 1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적 회복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들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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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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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1월 22일. 요나서 1장. – 하늘품은교회

요나서 1장.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산다. 1. 평안한 삶을 누리던 있는 요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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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4/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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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 KLB – 여호와를 피해 도망하는 요나 – Bible Gateway

1 여호와께서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저 큰 니느웨성으로 가서그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쳐라. 그 곳 주민들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사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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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8/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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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장 & 성경주석 – BIBLE STORY

<요나 1장 흐름정리>.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방 민족이 완전히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되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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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2/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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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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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나서 1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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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Q3QEOmze5g

요나 1

요나가 여호와를 피하여 달아나다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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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2019/10/09(수) “요나 1:1-17” / 작성: 최정운

본문 요나 1:1-17

찬송가 406장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요나서는 신기한 큰 물고기 이야기를 통해 흥미를 유발하면서 또한 독특한 선교적인 메시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깨운 선지서입니다. 요나서를 통해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을 점검하고 돌아보게 되며 사람들을 향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요나의 활동 시기는 북왕국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왕하 14:25, 새번역)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다. 이것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인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요나는 북왕국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BC 793-753) 시대에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 북왕국은 큰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영적으로는 심히 부패하여 호세아,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이 때 요나는 이방나라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공격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명령을 요나는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때문에 요나는 순종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 때의 상황을 요나가 4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하나님과 논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니느웨가 이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실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괴롭히던 악한 이 앗수르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그래서 멸망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우리 이스라엘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시 힘을 키워서 우리나라를 쳐들어올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요나의 입장에서는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이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은 니느웨가 죄를 돌이키고 회개하여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우리의 뜻과 계획과는 다를 때가 있습니다. 요나의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1장부터 4장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요나서 1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가는 요나가 큰 폭풍을 만나 바다에 던져지는 장면까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은 요나라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입니다. ‘아미타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이 아미타이에서 헬라어 아멘이 파생되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아멘은 ‘신실, 진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아들 이름을 ‘비둘기’라는 뜻의 ‘요나’로 지었습니다. 비둘기는 보통 용서와 평화 또는 메신저를 상징했습니다. 아밋대는 자기 아들이 비둘기와 같이 평화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살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의 뜻대로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쿰’은 ‘일어나라’는 뜻이고, ‘케라’는 외치라는 뜻입니다. ‘쿰, 케라,’ ‘일어나, 가서, 외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명령에 요나는 불순종하여 도망을 갑니다. ‘그러나’로 이어집니다.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는 니느웨만큼은 결코 가지 않겠다는 자기 철학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선교사님들 중에 ‘하나님, 다른 모든 나라는 괜찮지만, 일본 만큼은 절대 안 됩니다.’ 라고 기도하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우리 민족의 원수와도 같은 일본 땅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용인순교자기념관 건물에 들어서면 정면에 토마스 선교사님의 순교 장면을 담은 그림이 보이고, 왼쪽에는 요나 선지자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 땅을 밟은 많은 선교사님들 중에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흔쾌히 건너온 분들도 있었겠지만, 하나님 명령 앞에 씨름하면서 기도하면서 결국에는 마음을 바꾸고 순종하여 고국을 떠나온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자기 주관이 너무 강하거나 자기 철학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자기 생각을 바꿀 수 있는, 하나님 명령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쁘게 쓰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쓰시려 할 때, 보내시려 할 때 얼마나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때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니느웨가 아닌 지금의 스페인으로 추정하고 있는 다시스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을 피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꿩이 얼굴을 수풀에 숨기고 있으면 자신은 보이지 않지만 뒤에서는 다 보이는 것처럼,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피해 나무 그늘에 숨었을 때처럼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순종할 때에도 순종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을 때에도 그렇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의 눈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시선을 동시에 응시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오늘 요나와 같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또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사명을 저버린 요나를 향해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됩니다.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푹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어디에나 계시며, 그리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추적하시고 그에게 찾아오셔서 큰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을 통해 요나는 물론,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믿던 신을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든 배가 가라앉지 않게 짐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요나는 배 밑층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러자 선장이 요나에게 다가가 왜 자고 있는지 따지며 그를 깨웁니다. 요나는 처음에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배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다음 2장에서는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짐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수면 상태, 영적 침체를 가리킵니다. 영적 침체에 빠진 요나에게 이방인이 다가옵니다.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여기에 앞선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앞에서 하나님은 요나에게 ‘쿰, 케라’, ‘일어나라, 외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일어나라, 네 하나님께 구하라.’입니다. 여기서 ‘케라’는 ‘부르다’, ‘구하다’라는 뜻입니다. 다들 자기 신들에게 구하고 기도하고 있지 않느냐? 너도 잠만 자지 말고 어서 일어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선장이 요나를 깨운 것처럼, 오늘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우리에게 각성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교회가 자정 능력을 잃으면 세상을 통해서도 깨우치십니다.

요나처럼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혹시 지금도 신앙의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때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쿰, 케라’ 나의 만족과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또는 안일함 속에서 헛된 꿈을 꾸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있는 나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꿈, 깨라,’, ‘쿰, 케라!’ ‘일어나라!, 구하라! 기도하라!’ 우리의 영적인 귀를 열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7절에서, 사람들이 각자 기도하던 중에 혹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제비를 뽑습니다. 제비라는 단어는 어떤 몫을 정하는 개념의 단어입니다. 고대에는 작은 조약돌이나 질그릇 조각 또는 나무 조각 등을 사용하여 그것을 던져서 무엇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작은 돌과 같은 것을 던졌는데 요나 앞에 떨어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요나에게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이 재앙이 왜 일어났는지 묻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여기까지 도망쳐 왔다는 것을 이야기함으로 스스로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음을 인정합니다. 바람과 파도가 더 거세지자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잔잔해 질 수 있는지 요나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이 폭풍이 원인이 자신이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제거하면 잔잔해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나는 스스로 책임을 지기를 원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는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배를 육지 쪽으로 돌리려고 힘을 써보지만 폭풍이 더 심하게 몰아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구했지만, 이제 요나의 고백 이후에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14, 새번역) 그들은 주님을 부르며 아뢰었다. “주님 빕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니, 자신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아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곧 바다가 잠잠해졌고 그들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희생제물을 드리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16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16, 새번역) 사람들은 주님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고서, 주님을 섬기기로 약속하였다.

이방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를 믿고 섬기기로 맹세했다는 것입니다. 요나를 통해 몇 사람이라도 그 순간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십니다. 그를 다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추적하셔서 불순종한 그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잠자던 요나를 깨워서,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요나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돌이키고 다시 응답할 수 있는,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그것이 역경과 고난을 통과하면서 깨닫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혹시 인생의 폭풍을 만나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억울하게 다가온 재앙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오늘 내가 있어야 할 부르심의 자리에서,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점검하며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북한 땅에도, 중국 땅에도, 일본 땅에도, 전 세계 미전도 종족 가운데에도 필요하고 하나님은 그들 역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또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기꺼이 그 땅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참 제자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귀한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순종에 대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보내시는 곳으로 기꺼이 순종하여 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찾아오시고 경고하시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환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듣게 하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돌이키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순종함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면 기꺼이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대가를 지불하며, 즐거이 주님을 따라가는 귀한 한 날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요나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인 귀가 열려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려 있습니까? 어떻게 그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의 명령 앞에 불신앙, 불순종으로 잘못된 길을 갔던 요나는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내 인생 가운데 만났던 큰 풍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때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셨습니까?

3. 요나의 사명 감당은 회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에게 주신 십자가, 곧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할 지 생각해 봅시다.

4.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며, 온 열방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기 위해 내가 오늘 기도해야 할 열방의 민족은 어디이며 어떻게 기도하시겠습니까?

(작성: 최정운)

요나1장

요나 1장

요나서 1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적 회복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들이 무엇인지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위하여 시련을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요나를 회개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폭풍을 보내셨고, 또한 회개한 요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물고기를 보내셨다. 여기 폭풍과 물고기 즉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해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들이다.

1:1-3.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성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향하였다. 본문은 어째서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거역했는지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추측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당시 니느웨를 수도로 하고 있는 앗수르에 대하여 그리고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하여 안다면 요나가 어째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향하였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어느 정도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앗수르는 근동의 강국(强國)들 가운데 하나로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정복민들에게 잔인했다.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의 민족성 자체를 없애기 위하여 정복한 나라들 사람들을 서로 다른 나라에 이주시켜 통혼하게 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왕하17장).

선지자 요나(여로보암2세, B.C782)는 당시 앗수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가 이스라엘에게도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선지자 요나가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침략한 적이 있었다(B.C.853, 아합 때). 이런 정황들을 고려한다면 요나가 부르심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향한 것은 앗수르가 자신이 선포한 메시지를 듣고 회개한다면 또 다시 이스라엘을 위협하지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째든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았고 다시스로 향하고자 욥바로 내려갔다. 니느웨는 이스라엘로부터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지만 요나가 가고자 한 다시스는 이스라엘로부터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학자들은 지중해 연안에는 다시스로 불리는 여러 곳 있지만 요나가 가고자 했던 다시스는 과달퀴비르강의 어귀에 있는 스페인의 탈테수스일 것이라고 한다(엑스포지스터 성경 연구 주석). 따라서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정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요나의 불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심에 불순종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자기 논리에 빠져서 그 논리에 지배받는 것”이라는 것을 교훈 받는다. 사람은 의존적 존재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 하나님에 대한 신뢰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요나가 하나님을 신뢰하였다면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랐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결과를 예측하고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다시스로 향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요나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을 것이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욥바에 내려갔다. 그가 그 곳에 내려갔을 때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다. 그래서 그는 선가(船價)를 주고 배에 탔다(1:3). 이처럼 요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1:4-10.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가 다시스로 향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앞에 큰 폭풍을 보내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역하고 살아도 모든 것이 형통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르심에 거역하고 항해 한다면 언제든지 폭풍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보다 앞서 행하신다. 하나님은 요나가 욥바에 내려왔을 때 그곳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지 못하게 하심으로 그의 계획을 취소하게도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의 계획을 허용하셨다. 이렇게 하심은 요나에 대한 더 큰 뜻을 가지고 있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불순종하는 가운데 형통함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폭풍 전의 고요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요나가 탄 배는 항해 중에 큰 폭풍을 만났다. 사공들은 폭풍으로부터 배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력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결국 배는 난파 직전의 위기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은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언제나 겸손히 행할 것이며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할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갈 것이다. 실제로 지혜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유한성을 알고 있었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지혜를 갖도록 권고했다. 델피 신전에 쓰여 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신(神)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교훈해 주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마치 전능자처럼 생각함으로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제국의 황제들이나 또는 독재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그들이 자신을 신격화하므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수많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사실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고 살았더라면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특별한 사람들만 범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동일하게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수고할수록 폭풍의 강도만 더할 뿐이다.

사공들은 폭풍 앞에서 자신들의 유한성을 깨닫고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뢰하고 있는 신에게 나가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1:5)” 그러나 사공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신이 어떤 신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신이라면 모두 그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해 주기를 간청했다.

우리는 여기 사공들의 모습을 통하여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사람이 다신론적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은 그들이 신뢰하고 있는 신에 대하여 불확실함 가운데 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폭풍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신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다른 신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만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확신하고 있다면 어떤 위험에 직면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 구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록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삶의 여정에서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게 도움을 구한다면 그들 역시 다신론적 신앙의 형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공들의 모습을 통하여 주는 교훈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인간의 궁극적 문제는 다신론적 신앙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사공들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신들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폭풍으로부터 자신들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신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해 주기를 구했지만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다. 여기 응답 없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비극들 가운데 가장 큰 비극일 것이다. 다음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1:5)” 그들이 부르는 신들 중에서 폭풍으로부터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신이 있었다면 그들은 물건을 바다에 던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들을 부르며 물건을 바다에 던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신들을 부르고 있었지만 그 신들이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삶 가운데 어떤 능력도 되지 못하고, 또 다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은 전능자를 알기 전까지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지고 갈 수 밖에 없다.

본문이 주는 교훈들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부르심을 받은 자가 불순종 할 때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자가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부르심을 받은 자가 순종 할 때 자신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즉 요나가 순종하였더라면 그 자신과 니느웨성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가 탄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이 고통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그는 세상에 축복의 통로가 되기도 하고 고통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실제로 성경은 수많은 예들을 통하여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다윗의 범죄로 인하여 그와 그의 후손은 고통을 받게 되었고(삼하12:11) 아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패배를 당했다(수7:4).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불순종했을 때 그들로 인하여 함께 하고 있는 믿음의 공동체와 또는 그가 속해 있는 사회 공동체가 모두 고통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기능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 모두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한 지체로서의 기능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지체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을 때 그가 속해 있는 믿음의 공동체 전체는 함께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유기적 관계에 대하여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니라(고전12:26,27)”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두 기능 가운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순종하므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불순종할 때, 그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사회는 모두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와 세상에 대하여 책임적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1:5)” 요나는 폭풍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었을 때 배 밑층에 내려가서 자고 있었다. 요나의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오는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피하고자 함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양심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었다. 선장은 현재의 재난이 신의 진노를 산 자가 배에 탔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찾기 위하여 승선한 모든 사람들에게 제비뽑기에 참여할 것을 명했다. 이때 배 밑층에서 잠을 자고 있던 요나도 선장에게 발견되어 제비뽑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나는 제비뽑기에서 신의 진노를 산 자로 뽑혔다. 이로 인하여 요나는 심문을 받았고, 심문하는 자들이 묻는 말에 대하여 “자신은 히브리 사람이며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임을 말하고, 이 재앙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기 때문에 온 것임을 말하였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으로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요나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피하여 도망가고 있는 것도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요나를 뽑으신 것이다. 시편의 한 시인은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무지 할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요나의 말을 들은 자들은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1:10)”라고 말하며 그를 책망했다.

1:11-17.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폭풍의 위협은 요나에 대한 책망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폭풍은 점점 강도를 더해 갔다. 사공들은 요나를 해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폭풍을 피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노력할수록 폭풍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이란 제비뽑기를 통하여 “신의 진노를 가져온 자”로 뽑힌 요나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이처럼 무리로 하여금 요나를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도록 환경을 섭리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환경을 섭리해 오신 것은 요나에 대한 특별한 뜻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요나에 대하여 가지신 뜻은 죄를 범한 요나를 바다에 던져 죽게 하는 것이었고 죽은 요나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뜻을 행하시기 위하여 요나와 함께 배에 탔던 무리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들은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1:11)”라고 물었고 요나는 그들에게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폭풍이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공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폭풍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이다. 즉 죄로 인하여 온 고통은 죽음으로서 속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다시스로 항해하던 배가 폭풍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게 된 것은 죄를 범한 요나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배가 고통으로부터 자유 해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뿐이었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는 요나를 죽음에 넘김으로 속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하는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 될 때 오는 것이며 또한 죄로 인하여 공동체가 당하는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는 공동체의 죄 문제가 해결 될 때 오는 것이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1:12)” 여기 요나가 무리에게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죄를 범한 자아를 죽음에 넘긴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지 말해 준다. 즉 진정한 회개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죽음에 넘기는 것이다. 우리는 요나의 행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죽음에 넘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요나가 무리에게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배에 탄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지고 죽음으로서 그 죄에 대하여 속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나가 무리에게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을 때 이미 그는 죽은 것이다. 요나의 이와 같은 행동이야말로 스스로를 죽음에 넘기는 것이고 또한 진정한 회개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자기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회개를 원하신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폭풍을 통하여 환경을 섭리하신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 한 요나로 하여금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이처럼 환경을 섭리하셨다. 여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행하신 일은 죄인들을 회개로 인도하시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억지로 우리를 굴복시키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오랜 기다림 가운데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환경을 섭리하심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1:15,17)” 하나님은 요나가 자신을 죽음에 넘기도록 기다리시고, 죽음에 넘긴 그를 되살리기 위해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물고기를 준비하신 것은 회개한 사람들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고통을 허용하시는 것은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은혜인 것이다. 요나는 이 회복의 은혜로 인하여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은 요나서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교훈 받는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요나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느껴졌을지라도 그 길이 요나에게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는 의미다. 만일 요나가 순종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 형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판단한 길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다시스로 향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는 폭풍을 만나 바다에 던짐을 당한 것이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동안 고통을 당한 후 결국은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성으로 향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사는 시간은 삶을 낭비하는 시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둘째, 요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형통하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가 심판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교훈 해 준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욥바로 내려갔을 때 마침 그곳에는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다. 이 배는 마치 요나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 같았다. 이처럼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형통했다. 그러나 이때의 형통함은 요나를 심판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잠시 허용하신 환경이었을 뿐이다. 결국 요나에게 주어진 잠시의 형통은 그를 넓은 바다로 인도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

2020. 5. 3.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매일말씀묵상. 11월 22일. 요나서 1장.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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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1장.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산다.

1. 평안한 삶을 누리던 있는 요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1). 요나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인 여로보암 2세 때, 이미 선지자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던 선지자로 보입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첫 번째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국토를 회복할 것이라는 메시지였고, 그가 전한 대로 모든 일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왕하 14:25). 실제로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국토를 거의 회복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요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가 누리던 안락함을 포기하게 하는 메시지였습니다 .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 앗수르의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니느웨의 죄악은 이미 찼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려고 하셨습니다(2).

2.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칩니다 (3). 물론 어리석은 일입니다 . 누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 그는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인 다시스 ( 스페인 ) 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지만 , 하나님을 피해서 살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 시 139). 하나님께서는 바다 위에 폭풍을 내리심으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4). 폭풍을 만난 배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영적인 무감각에 빠진 요나는 배 밑에서 잠을 자고 있을 뿐입니다(5). 이방인 선장이 그를 깨워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촉구합니다(6).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이 재앙이 왔는지 제비를 뽑게 되고 제비는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7). 요나는 자신이 누구며, 어떤 연고로 이 재앙이 임했는지를 설명하게 됩니다(8~10).

3. 폭풍이 점점 거세지자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12). 하지만 사람들은 요나를 불쌍히 여겨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애를 쓰지만, 풍랑은 더 거세지기만 합니다(13). 결국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잠잠해졌고, 사람들은 요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다(16).

4.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에 , 요나는 목숨을 걸지 않고도 얼마든지 주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평안함과 안락함을 떨쳐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생명을 바쳐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편안함을 누리는 것을 싫어하시거나, 죄로 여기시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우리는 부유함에 처할 수도 있고 가난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5.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요나 선지자를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방식이며 자세여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십니다 . 하지만 슬프게도 요나는 그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면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자기 백성을 쫓아와 그를 다루시고야 맙니다 . 그러하기에 이렇게 인생에 일어나는 폭풍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당신이 명백하게 하나님을 피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폭풍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두려운 일입니다.

6. 그러나 이러한 중에 요나는 매우 특별한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 자신의 죽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이 말은 내가 죽으면 너희가 살 것이라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 말은 복음의 진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 12:24).”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요나가 드러낸 것을 온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 당신의 죽음으로써 자기 백성을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신앙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명예를 생명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홀대 받고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 드러나십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고전 15:31). 본문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의 의는 죽고,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 드러나는 삶, 그 삶이 신자가 살아야 할 마땅한 삶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되, 생명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섬기게 하시며, 인생의 편안함과 안락함 따위에 저희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주옵소서. 저희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삶의 열매가, 저희 인생에 풍성하게 드러나고 경험되도록 오늘도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나 1장 & 성경주석

<요나 1장 흐름정리>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방 민족이 완전히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만인을 초청하고 계신다. 요나가 니느웨에 전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한 것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행위는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자연스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나친 배타주의와 고질적인 선민 사상이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것임을 요나는 깨달아야 했다.\

<요나 1장 줄거리>

1. 요나가 니느웨로 보냄을 받았으나 다시스로 도망감.

4. 그의 신분이 폭풍우로 인해 폭로됨.

11.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

17. 물고기가 요나를 삼킴.

<요나 1장 개역한글>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5.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요나 1장 성경주석>

1:1 아밋대.

이 이름은 “성실” 혹은 “진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에메트(’emet)에서 유래했다. 아밋대는 이곳과 왕하 14:25에만 언급된다.

1:2 그 악독이.

나훔은 니느웨를 “궤휼과 강포가 가득”한 “피 성”(나 3:1; 참조 19절)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그 도성에서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민 전체가 악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선지자와 왕, 265).

1:2 내 앞에.

. 창 18:20, 21과 비교하라. 하나님께서는 나라들의 평가서를 보관하고 계신다. 각 나라마다 시험 기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계획을 수행하심에서 모든 사람의 충성을 얻고 나라들의 협력을 확보하고자 애쓰신다.

1:2 상달하였음이니라.

. 이러한 표현이나 이와 유사한 표현이 홍수 이전 세상(창 6:5, 11)과 소돔과 고모라 거민들의 죄악(창 18:20, 21)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양자의 경우 모두 유예기간이 막 끝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니느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참조 단 4:17 주석).

1:3 일어나.

요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순종하려고 일어났다. 젊은 부자 법관처럼 그는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마 19:21, 22).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그랬던 것처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이 감당하기에 너무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고, 따라서 그들처럼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와 함께”(요 6:60, 66) 행하지 말아야겠다고 느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이행해야 할 짐을 지우실 때에는 그들이 그 짐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질 때마다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이르러 온다. 선지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참조 마 6:33) 제일 처음에 놓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그는 자기에게 수행하도록 맡겨진 사명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려 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자기의 영혼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1:3 낯을 피하여.

. 문자적으로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이루기에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참조 시 139:7~12).

1:3 다시스.

. 일반적으로 다시스는 스페인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전 시대의 타르텟수스(Tartessus)였다는 데 동의한다. 다시스는 그것의 부(富)로 유명했는데, 베니게의 두로 성읍이나 다른 나라들에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을 대규모로 수출했다(참조 겔 27:12). 요나는 자기 의무를 피하여 그렇게 멀리 떨어지고 분주한 곳으로 도망쳐 양심의 소리를 잠재우기를 희망했다.

1:3 욥바로.

.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54킬로미터 해상에 위치한 현대의 얍파(Jaffa)로 세상에서 아주 오래된 도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곳은 유대인들에게 속한, 여러모로 중요하고 유일한 항구였다. 욥바를 통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목재(참조 대하 2:16)와, 그것을 복구하기 위한 목재(참조 스 3:7)가 예루살렘으로 반입되었다.

1:4 대풍.

여호와께서는 그 선지자가 그분에게서 도망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일련의 “시련과 기이한 섭리”를 통해 그분은 요나의 태도와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힘쓰셨다(참조 선지자와 왕 266, 267,).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 단순하고 자연적인 매체들을 주목하라. 바람(1:4), 큰 물고기(1:17), 고통(2:10), 박 넝쿨(4:6), 벌레(4:7), 동풍과 해(4:8).

1:4 거의 깨어지게.

. 이 문장은 “그리고 그 배는 자기가 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런 번역을 채택한다면 이것은 생생한 의인화 비유가 된다.

1:5 자기의 신을.

선원들의 국적이나 종교는 확인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베니게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다른 이들은 다양한 나라 출신으로 다양한 종교를 대표했을 것이다.

1:5 물건.

. 히브리어 켈림(kelim). “용기들”, “그릇들”, “비품.” 연장과 함께 화물도 배 밖으로 던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5 밑층.

. 히브리어 야르카(yarkah), “뒤쪽”, 흔히 가장 먼 부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1:5 깊이 잠이 든지라.

. 히브리어 라담(radam), “코를 골다”, “깊은 잠에 빠지다.” 요나가 깊은 잠에 빠진 이유는 제시되지 않았다.

1:6 선장.

문자적으로 “우두머리 선원.” “선원”이라는 단어는 “묶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유래했는데, 같은 어근으로부터 “밧줄”이라는 명사가 파생되었다. 진술되지는 않았지만 요나는 그 요청에 응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1:7 제비를 뽑아.

선원들은 누군가 신들의 노여움을 샀다고 느꼈다. 여호와께서는 누가 범인인지를 가리기 위한 그들의 방법을 주관하심으로 “제비가 요나에게 당하”게 하셨다.

제비뽑기의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에 관하여는 겔 21:21 주석을 참조하라.

1:8 고하라.

이러한 일련의 짧은 질문은 풍랑에 시달린, 배에 탄 사람들의 동요를 생생하게 느끼도록 해 준다.

1:9 히브리 사람.

이스라엘 종족이 아닌 사람들이 흔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하던 이름(창 39:14; 40:15; 41:12; 출 1:16; 2:7; 3:18; 삼상 4:6). 이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창 14:13 주석을 참조하라.

1:9 지으신.

. 참하나님의 우월성을 보여 주고자 제시된 특색 있는 면모들 가운데 하나(렘 10:10~12).

선원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전(事前) 지식(참조 출 15:13~16; 수 5:1; 삼상 4:5~9)을 통해 요나가 섬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순간적인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틀림없이 여호와의 성품을 그들 자신의 이교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1:9 하늘의 하나님.

. 참조 창 24:7; 단 2:37, 44.

1:9 여호와.

. 히브리어 야훼(Yahweh). 하나님의 개인적인 이름(참조 제1권, 151~153). “하나님”(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이라는 용어는 신에 대한 일반적인 이름이며 “여호와”(히브리어 아도나이[’Adonai])는 호칭이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거짓 신들을 지칭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다(출 18:11 등). 그러므로 야훼라는 이름은 특히 참하나님을 가리킨다.

1:10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알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절규의 외침이다.

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이곳에 사용된 히브리어 관용구는 폭풍우가 점점 더 사나워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1:11 우리가…어떻게 하여야.

.아마도 요나는 여호와를 잘 알고 범죄를 속하기 위한 방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1:12 나를 들어…던지라.

요나가 여기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여간 그의 행동은 남자다웠다. 그는 자기의 파멸에 다른 이들을 연루시키기를 원치 않았다. 요나는 유감스럽게도 도덕적 용기는 부족했으나(2, 3절) 육신적인 면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1:13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아마도 요나의 하나님이 그렇게 극단적인 조치를 요구하시는가의 여부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다.

1:13 육지에.

.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는 것이 고대에 항해하던 선박들의 관습이었으므로 배는 육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1:14 구하오니.

선원들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사람 하나를 죽음에 내어줌으로써 그분을 더 성나게 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들의 기도는 자기들의 신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향한 것이었다.

1:15 그친지라.

마 8:26과 비교하라. 갑자기 잠잠해졌고 선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개입 행위로 인식했다.

1:16 여호와를…두려워하여.

이 사건에서 천연계를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이 매우 명백했고 요나의 말도 매우 현저하게 성취되었으므로(12절), 선원들이 그렇게 반응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1:16 제물을 드리고.

. 그 사람들은 그들의 제한된 지식 안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했다.

1:17 큰 물고기.

물고기가 이 경우를 위해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사람을 삼킬 수 있는 기존의 물고기 종류를 여호와께서 사용하셨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이 점에 대한 추측은 무익하다. 물고기의 종류는 확인되지 않는다. 히브리어는 “물고기”라는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제임스왕역」은 이를 “고래”로 번역하지만, 신약에서 이 경험을 언급하고 있는 마 12:40은 이 물고기를 헬라어 케토스(ke-tos), “바다 괴물”로 칭한다. 「70인역」에는 욘 1:17에 케토스가 사용되었다.

1:17 예비하사.

. 히브리어 마나(manah), “지정하다.” 이 단어는 단 1:5, 10에서도 이렇게 번역된다.

1:17 삼일 삼야.

. 이 표현에 관련된 시간의 길이는 예수께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마 12:40) 선언하셨기 때문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히브리어 용례에 따르면 이 표현이 꼭 총 72시간이 되는 매일 24시간의 옹근 3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쉽게 입증된다.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마 12:40 주석을 참조하라.

히브리 성경과 「70인역」에서 17절은 제2장의 첫 절이다.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앗수르 성읍들 가운데서 매우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가 앗수르어로 니누아(Ninua)인 니느웨였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니므롯이 창설했다(참조 창 10:11 주석). 고고학적 증거 역시 그 도시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증명한다. 수 세기에 걸친 역사를 통해 니느웨는 여러 번 앗수르 왕국의 수도로 사용되었다. 그 도성은 BC 9세기부터 BC 7세기에 이르는 제국 기간에 그 중요성이 최고에 달했는데, 특히 니느웨를 당대의 가장 영화로운 도성으로 만든 산헤립 왕의 통치 기간 중에 그러했다. 그 도성의 일반적인 배치와 궁전들에 대한 그의 묘사를 통해 이 고대 수도 성읍의 분명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BC 612년 바벨론과 메대가 니느웨를 철저히 파괴한 이후로, 그 도성은 폐허로 남아 있었다. 19세기 중엽에 그 성읍이 다시 발견되기까지는 그 위치마저 잊혀져 있었다(참조 제1권, 120, 121). 니느웨는 오늘날의 모술(Mosul)시 맞은편 힛데겔강의 동편 기슭에 위치한다. 고대에 그 강은 도성의 서쪽 성벽을 따라 흘렀으며 따라서 그 방향에 부가적인 보호 장치를 형성하였다. 그 후에 그 흐름은 변경되었으며 지금은 옛날 하상(河床)에서 약 1.2킬로미터 서쪽을 흐른다.

니느웨 지역 내에는 두 개의 토둔이 된 폐허가 고대 도성의 주요한 왕궁들과 신전들을 덮고 있다. 그중 하나가 느비 유누스(Nebi Yunus)인데 그 밑에는 에살핫돈의 왕궁이 묻혀 있다. 다른 토둔인 쿠윤직(Kuyunjik)은 산헤립과 아슈르바니팔의 왕궁들의 폐허들을 포함하고 있다. 느비 유누스에는 고고학자들의 삽이 거의 닿지 않았다. 이 유적지 위에 한 마을과, 전통적으로 회교도들이 선지자 요나의 것으로 여기는 무덤이 있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이 이 토둔에 손을 댈 수가 없다. 한편 쿠윤직은 몇 번의 탐색이 이루어졌다. 이 토둔 발굴 작업은 1840년 보타(Botta)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후로 산헤립과 아슈르바니팔 궁전의 일부가 발굴되었다. 아슈르바니팔 궁전에서 레이어드(Layard)와 랏삼(Rassam)은 대략 20,000개의 점토판이 있는 왕립 도서관을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현재 영국박물관의 주요 보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원본들은 고대 메소보다미아인들의 역사와 문화와 종교에 관하여 많은 것들을 드러내 주었다.

고대 니느웨의 크기는 상당히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성벽들을 폐허가 된 상태에서도 지금도 여전히 명확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민 언덕 형태의 이 성벽들은 문들이 있던 자리는 끊어져 공백이 되었으나 아주 먼 거리에서도 볼 수 있다. 모두 합한 길이는 약 12킬로미터에 달하며, 그 영역은 663.7 헥타르 정도인데, 지도상에는 변칙적이고 기다란 삼각형 모양으로 나타난다(참조 724쪽).

요나의 시대 훨씬 후에 그 도성을 확장한 산헤립의 팔각형 진흙 기둥에는 그 왕의 건축 활동과 15개의 성문 이름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그중에 일곱 개는 남쪽과 동쪽 성벽에 있었고, 세 개는 북쪽 성벽에, 다섯 개는 서쪽 성벽에 달려있었다. 발굴하는 동안 헨리 레이어드(Henry Layard)는 북쪽 문들 가운데서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 문의 측면에는 거대한 황소들이 있었는데 그는 그것들을 본래의 위치에 남겨두었다. 방문객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다. 두 곳의 망대를 덮고 있는 성벽 가운데 언덕들은 그 높이가 대략 18.3미터에 달한다. 동쪽 성벽은 약간 굽어 있는데 길이가 대략 5.1킬로미터이며, 서쪽 성벽은 4.3킬로미터, 북쪽 성벽은 1.9킬로미터, 남쪽 성벽은 800미터이다. 산헤립의 설명에 따르면 그 성벽은 두께가 약 12.2미터이고 높이는 대략 18.3미터였다. 동쪽에서 볼 때 니느웨는 그 성벽들뿐 아니라 성벽과 평행을 이루는 여러 개의 추가적인 제방으로 보호를 받았는데 그 잔해는 아직도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성 안의 거주 가능 인구를 160,000명으로 추산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도성 바깥에서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저술가들은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120,000명에 대한 욘 4:11의 언급을 어린아이들에게만 적용시킨 것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니느웨의 총 인구가 600,000명에서 2,000,000명은 되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그처럼 많은 인구가 니느웨 도성 안에서 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요나서의 니느웨에 현재는 코르사바드(Korsabad)라 불리며 니느웨에서 북쪽으로 19.2킬로미터 떨어진 “사르곤의 성읍”과 니느웨 남쪽 대(大)자브(Greater Zab)와 힛데겔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지금의 님루드(Nimrud)인 갈라(Calah)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 성읍들이 앗수르에 속하기는 했지만 자체적인 방어 성벽과 행정부를 갖춘 분리된 단위들이었으며 고대 역사의 기록들에서 결코 니느웨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 결과 4:11의 “십이만 명”은 단지 어린아이들만을 언급한 것이며 기록자는 니느웨 본성(本城)만을 언급했다고 믿는 현대의 어떤 주석자들은 요나서를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 도성의 실제적인 크기에 비추어 볼 때 4:11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을(참조 해당 주석)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만약 120,000명이 그 본성 자체의 대략적인 전체 인구를 의미했다면 1차 세계 대전 이후 확장되기 전까지는 니느웨보다 약간 컸던 현대의 모술(Mosul)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적당한 수효일 것이다.

3의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라는 진술은 한 사람이 그 성곽 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접하기를 원했다면, 그 시가지들을 오르내리면서 그 전 지역을 답파하는 데 삼 일이 소요되었을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3:4의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라고 진술한 본문은 요나가 경고하는 일을 시작한 그 도성의 어떤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하루 종일 걸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이 본문은 요나가 일을 시작한 것과 첫째 날에 그가 기별을 선포한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 결과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었다(3:5).

더욱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니느웨는 그가 알고 있는 서아시아의 다른 어떤 성읍과도 그 크기를 비교할 수 없는 도성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 사마리아는 그 면적이 7.7헥타르에 불과했는데, 예루살렘을 제외하면 팔레스타인의 그 어떤 성읍도 사마리아보다 크지 못했다(참조 느헤미야 제3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그런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그 면적이 약 40.5헥타르로 추산되는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었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8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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