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의 기도 | [요한복음] 예수님의 기도 | 15-1강 | 김형익 목사 | 나침반 바이블 97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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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의 마지막 책 요한복음
예수님의 애제자, 사도 요한
그가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김형익 목사의 ‘요한복음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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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삶 속의 기도 – 성경의 진리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리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예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희망사항이 이루어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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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wordofgod.kr

Date Published: 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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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7] 기도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시다 (눅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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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ub2.tistory.com

Date Published: 6/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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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예수님의 기도(4)(요 17:20~26) – 기독신문

예수님과 함께 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기를 기도하셔“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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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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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배우라(마가복음 1: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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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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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배경 설명 | 리고니어 미니스트리

예수님은 자신의 의도를 밀어붙이시거나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무언가를 얻고자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오히려 주러 오셨다.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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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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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시리즈】(7) –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 … – 본헤럴드

(1) 제자들이 이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 · (2)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 · (3) 삼위 하나님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도록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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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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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도 – YES24

예수의 기도라는 렌즈를 통해 보는 기독론! “예수의 기도는 우리 주님이 참으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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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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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기도(1) – 아이굿뉴스

질문하신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이어서 하신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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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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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소통, 예수의 기도 < 문화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이 책에서 소개된 ‘예수의 기도’는 독특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을 속으로 쉬지 않고 하는 것이다. 특히 심장 박동에 맞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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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4/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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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예수님의 기도 | 15-1강 | 김형익 목사 | 나침반 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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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수님 의 기도

  • Author: CGNTV 바이블 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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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2. 1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0Qk1FlS6qDU

예수님 삶 속의 기도

성경의 진리

예수님 삶 속의 기도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살펴본다. 성경 속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전서 4:7),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1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로새서 4:2) 등 많은 구절에서 쉽게 볼 수 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 자주 잊혀지거나 뒤로 밀려나곤 한다. 이 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살펴봄으로써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우고자 한다.

1.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누가복음 5:15-16

예수께서 기도하는 모습을 기록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누가복음 5장 말씀을 살펴보자. 이 때, 문맥과 배경, 즉 글의 흐름을 고려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시기와 상황적인 환경에 대해 알 수 있으므로 눈여겨 보는 것이 좋겠다. 누가복음 5장 12절부터 13절은 간질병을 앓고 있던 자가 치유를 받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 뒤를 잇는 15장 말씀은 예수께서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피해 물러나셨으나 끊임 없는 인파가 치유를 받기 위해 예수를 향해 몰려들었다고 이야기 한다 (누가복음 5:15). 이렇듯 예수께서는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바쁜 나날을 보내셨다 – 요즘 보통 사람들보다 더 바쁜 생활을 하셨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기 쉽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살펴보자.

누가복음 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한적한 곳에 혼자 물러가사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이 짧은 구절을 통해서도 예수께서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셨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구절을 원문에서 읽어보면 문법적인 시제를 통해 예수께서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셨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번역문은 간단한 기본적인 시제를 사용하여 마치 예수께서 과거에 한 번쯤 이와 같은 행동을 하셨던 것 같이 받아드려지기 쉬우나 예수께서는 반복적으로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해 기도를 드리셨다2. 좀 더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매번]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이렇듯 15-16절 말씀이 묘사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단 한 번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인파에 쫒겨 바쁜 나날을 보내셨으나 이 와중에도 항상 기도를 위한 시간을 마련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께 기도란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도 생활은 예수의 삶 속에서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한 사역으로 바쁜 와중에도 미루거나 게을리 하지 않으셨을 정도로 치명적인 부분이었다. 또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기도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 만큼의 우선 순위가 주어지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 할 시간이 충분했던 이유는,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이에 적당한 우선 순위를 두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여러 가지 활동에 시간을 투자 한다. 시간이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는 하루에 24시간이라는 같은 양의 시간이 주어져 있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기도 생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큰 우선 순위를 차지하느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삶 속에 기도가 우선 순위인지 혹은 모든 하루 일과(일, 취침, 학교, TV 시청 등)를 마친 후 남는 시간을 차지하는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기도는 우리 삶 속에 가장 높은 우선 순위를 차지해 마땅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남는 시간”을 투자하지 말고, 기도를 위한 시간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이를 위한 시간을 비워둘 수 있어야 하겠다.

2.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가복음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교훈적인 모습을 담은 구절이 또 있다 – 마가복음 1장 35절. 이번 또한 글의 흐름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21절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침을 전파하시는 모습, 그리고 마귀를 퇴취하시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로 인해,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다 (28절). 회당을 나선 후 예수께서는 시몬의 집으로 향하시어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셨다 (30-31절).

마가복음 1:32-34

“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앞에서 살펴 본 구절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이 날 또한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셨다. 더군다나 다음 날은 먼 여행을 떠날 계획이 있었으며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퍼져 다음 날 또한 많은 인파에 쫒겨 바쁜 하루를 보낼 것이 분명했다. 36-37절은 예수를 찾는 많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 1:36-37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찾았다. 생각해보라. 바쁜 하루를 마치고, 또 하루의 바쁜 날을 앞두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다음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릴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일찍 일어나 기도를 드린다 하면, 이 사람은 기도를 자신의 생활 속 가장 높은 우선 순위로 여긴다는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지 않은가? 바로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분이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께서는 다음 날이 아주 바쁜 하루가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 기도 할 시간이 많이 없을 것을 예감하시고 예수께서는 그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 – 하루를 시작하기에 참으로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의 하루를 시작하기에도 참 좋은 방법이 아닐까? 그 날의 고통과 압박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그리하면 하루 동안 하나님의 보살핌과 능력을 느끼고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리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실 수 있는 것들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 한다면 다음 날 아침 기도를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날 의지가 생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저 생각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우선적으로 중요시 여기셨기에 그러한 의지 또한 가능했던 것이다. 기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여부가 아니라 우선 순위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태복음 14:23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담은 다음 구절은 마태복음 14장 말씀이다. 앞에서와 같이 글의 배경을 살펴보자. 이 날은 시작부터 아주 슬픈 날이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의 사형 소식을 접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사형에 대한 설명은 마태복음 1-11절 말씀 참고). 뒤를 잇는 14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4: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더 나아가기 앞서 잠시 다음 상황을 고려해 보도록 하자. 만약 당신을 위해 항상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던 친척이 사형을 당했다면 당신은 기분이 어떻겠는가? 아마도 슬픔에 젖어 한 동안 혼자 떨어저 있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 또한 같은 마음이셨다.

마태복음 14: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세례요한의 사형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예수께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계획하고 계시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후, 충격에 쌓여 이후 결정된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긴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다. 그를 기다리는 인파에 동정심을 느끼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셨다 (마태복음 14:14). 치유는 물론 기적을 행하시어 그들의 배를 채워주시기까지 하셨다 (마태복음 14:15-21). 22절은 그 이후 일어난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여기서 “즉시”란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해 주신 후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제촉”하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제촉”이란 그리스어에서 “anagkazo”라는 단어의 과거 시제로서 “억지로라도 어떠한 일을 시키다”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 성서에서 아홉 번이나 쓰인 단어이다 (참고: “Vine’s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달가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람들 또한 돌려보냈다. 예수께서는 왜 제자들을 “제촉”하시어 그들을 멀리 떨어뜨려 보냈을까? 그 이유는 23절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그 이유는 바로 예수께서 혼자 머물러 “기도”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루 하루에서 기도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제자들과 인파를 제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기도는 단연 예수님의 삶 속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지켰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성경 말씀을 새겨듣고 우리의 삶 가운데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한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누가복음 6:12-13

성경 말씀을 하나 더 살펴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중요성은 물론 기도 내용을 눈여겨 보도록 하겠다. 정확한 기도 제목은 알 수 없지만,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누가복음 6:12-13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정확히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그 다음 날 아주 중대한 결정을 내리셨음에 미뤄보아 열 두 제자의 임명이 기도 제목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결정을 내리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할 필요성을 느끼셨다면, 우리들 또한 이런저런 선택을 하기 전 하나님께 기도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 자신의 제한된 지식으로 결정에 도달하기보다 하나님께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간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 알고 계심은 물론 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 또한 알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를 알려주실 성령 또한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를 통해 도움을 요청할 것인가 이다.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사역 문제 또한 같은 문제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 할 필요는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한된 지식을 가진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실 것이다. 이 중 몇 가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 이는 이미 성경에 적혀있는 조언이자 명령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좀 더 세부한 결정 – 어느 곳에 가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할 것인가 – 등의 문제는 하나님께 직접 의논하고 하나님의 의견을 여쭈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를 통해 간구하도록 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작 당신을 다른 곳에 보내거나 다른 일을 하도록 하고싶어 하실지도 모른다. 직장에 빗대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사와도 같다 – 최고의 결정권을 가진 상사 말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마태복음 26:36-44

다음 보기는 잘 알려진 마태복음 26장 36절부터 44절의 말씀이다. 이 부분은 예수께서 구속되어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밖히시기 직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36절 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마태복음 26:36-38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께서 슬퍼하신 이유는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지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께 아주 힘든 시기였음과 동시에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 우리의 구원이 달린 예수님의 희생이 이루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가? 다음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태복음 26:39-4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인류 구원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으셨다. 이에 대한 기도를 무려 세 번이나 드렸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가짐은 참으로 좋은 본보기를 제공한다.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먼저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께 내려 놓았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희망 사항을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꼭 이루어주셔야됨은 물론, 우리가 원하는 시기와 방법에 맞추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오해하는 자들이 많다. 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만 사실이 된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성경은 많은 예를 기록하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성경이 이야기하는 약속들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의 예도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일종의 차를 가지고 싶어 한다고 가정해보자. 성경에는 내가 그 차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그 차를 꼭 가져야만 하며,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어떠한 차를 원하는지 하나님께 나의 희망사항을 간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도인가? 그렇다! 내가 그 차를 소유하는 것이 정작 좋은 일인지 좋지 않은 결과를 나을 것인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것은 올바른 기도인가? 물론이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좋고 완벽하다고 (로마서 1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신다고 (베드로후서 2:7) 이야기 하는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할까? 이 말씀들을 믿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믿고 따라야 할까? 물론이다! 예수께서 하신 그대로 말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간구한 것은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그러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자신의 희망사항(“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랬다.“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리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예를 본받아, 우리 자신의 희망사항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흠잡을 데가 없는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랄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보기로 돌아가보자면, 비록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간구한 것들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무시하신 것을 아니다. 누가복음은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기록을 제공한다.

누가복음 22:41-43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힘을 더해주기 위해 천사를 보내주셨다. 가끔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희망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깨닳곤 한다 (로마서 12:2). 만약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더해주실 것이다.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용기와 힘을 얻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8:3-11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 원하셨던 가장 큰 희망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었다. 이에따라 예수께서는 어느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셨다 – 우리 또한 이를 본받아야 하겠다.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셨듯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아시고 슬픔에 가득차 계셨으나 기도를 한 후 힘을 얻어 정작 잡혀가실 때에는 대담함과 굳은 의지를 보여주신다. 자신을 고문 할 자들을 만나러 가는데에는 대담함과 굳은 의지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두려움에 쌓인 자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미루고 이러한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려워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는 자들을 직접 찾아가셨음은 물론 제자들의 안전까지도 책임지셨다. 게다가 베드로로 인해 뜯겨진 하인의 귀까지 치유해 주기까지 하셨다 (누가복음 22:51). 이 모든 힘 – 대담함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굳은 의지는 오로지 기도를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예수님 삶 속의 기도: 결말

혼자 더 공부 할 성경 구절이 더 많이 있지만, 지금까지 이 글에서 살펴 본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기도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제자들과 인파를 제촉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기도를 통해 결정에 도달하고, 어려움을 극복하셨다. “시간이 남으면 기도하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기도할 시간을 마련하셨다. “우리자신의 뜻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따르라”는 세상적인 조언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마지막으로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도록 하자.

빌립보서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각주

1. 참고: 고린도전서 14:14-15, 에베소서 6:18, 빌립보서 6:6, 골로새서 4:12, 디모데전서 2:1, 야고보서 5:13, 16-18 그 외 복음 말씀과 구약 성서.

2. 참고: “Adam Clarke’s commentary of the Bible”과 “John Wesley’s explanatory notes”.

[예수님의 기도7] 기도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시다 (눅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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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시다 (눅 11:1-2)

오늘은 누가복음 시리즈 속의 시리즈. [예수님의 기도] 일곱 번째 시간이다.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마다 함께 낭독하는 기도가 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바로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 본문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예수님께서 기도문을 가르치시게 된 배경이 다르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던 중에-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기도 생활에 대해서 경고하시는 맥락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다.

(마 6:5,6,9)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눅 11:1-2)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두 본문을 조합해 보면,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고 돌아 오셔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그때 제자 중에 하나가 “그러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면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얘기가 없는데 왜 누가복음에는 있을까? 강조점의 차이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강조점 중에 하나는 기도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보면 누가복음에는 누구누구가 기도했다는 얘기가 상당히 많이 나온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장면도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물어 보실 때, 70명의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도하셨다. 누가는 이 사실을 빼놓지 않고 복음서에 담았다. 이번 본문 역시 마찬가지다. 그날도 어김없이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따로 시간을 내고 장소를 마련하셔서 기도 하신 후에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셨다. 제자들은 항상 기도에 힘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적잖은 감명을 받았다.

무슨 일이든지 앞선 사람을 보고 따라 하는 것 만큼 안전하고 편한 방법이 없다. 기도도 동일하다. 몸소 기도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큼 좋은 기도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스승이 자기만의 기도문을 만들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세례 요한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에 응하셔서 친히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은 모든 성도가 따라야 할 기도의 기준이자 표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토시 하나 틀리면 안 된다’, ‘절대로 내용을 더하거나 빼지마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순서와 방향을 따라 기도 하는게 훨씬 더 유익하다”는 의미에서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할 때에 일정한 순서와 방향을 잡고 있으면, 이게 없을 때 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기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시간에 인도자가 아무런 주제 제시도 없이 그냥 “우리 다함께 기도 합시다”라고 할 때 보다는, “말씀을 생각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등등. 특정한 기도 제목을 정해 줄때 기도의 집중력을 높여주고, 더욱 폭넓고 깊게 기도할 수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두 번째 차이점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 보다 좀 더 간략하다는 것이다. 아마 본문을 읽어보면 어떤 내용이 생략 되었는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눅 11:2-4)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마태복음과 비교했을 때 어느 부분이 생략되었는가? 시작 부분에 “하늘에 계신 우리”가 없다. 그리고 “나라가 임하시오며” 다음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없다. 또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다음에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도 생략됐다. 마태복음이 좀 더 구체적이고, 누가복음은 상대적으로 간소하다.

어쨌든 지금은 누가복음이 설교 본문이니까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을 기준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순서대로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기도문은 크게 6가지 기도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아버지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치셨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확신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거니와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한다는 믿음의 고백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거룩한 분이시다. 영광스럽고 위대한 분이시다. 쉽게 말해서 감히 우리가 함부로, 쉽게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마땅한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경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3.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의 기도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삶,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나라,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4.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참 많다. 일용할 양식을 채워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자녀의 기도이다. 우리는 필요한 것들을 채워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한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어려울 때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에는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다.

5.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 힘으로는 이 죄를 씻을 수가 없다. 아니 죄를 더 추가할 뿐이다. 우리 죄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나의 죄를 씻어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가로막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사하여 달라고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신다.

6.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우리는 정말 연약한 존재들이다. 우리 힘으로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없고, 우리 힘으로는 유혹과 시험을 물리칠 수 없다. 원수 마귀 사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유혹이 밀려 올 때, 시험에 들었을 때, 여러 가지 악한 일들이 우리를 삼키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실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제목들을 순서에 따라 기도하면 여러 가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일단 기도할 때 횡설수설 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다. 기도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내용들을 빼먹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기도를 보면, 솔직히 주먹구구식일 때가 많다. 쉽게 말해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입에서 나오는 대로 기도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까 항상 내가 지금 당장 필요한게 있거나, 급한 문제가 있을 때는 구구절절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는 일절 생략해 버린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해야 한다.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해야 한다. 여기까지가 주기도문의 내용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다음으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살펴보고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다.

1. 나의 기도 생활은 다른 사람들의 기도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예수님이 기도에 힘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 봐 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그날도 어김없이 기도하고 오셨다. 만약 예수님이 생전 기도하지 않는 분이었다면 과연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려 했겠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나 항상 기도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그 모습을 보고 기도를 배우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제자들의 기도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기도 생활은 다른 이들의 기도 생활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단적인 예로, 새벽예배에 누구도 참석하고 누구도 참석했다고 하면 아무도 안 왔다고 할 때보다 훨씬 더 자극이 되고 도전이 된다. 기도시간에 내가 먼저 용기 내서 소리 내어 기도 하면, 다른 사람도 자연스럽게 통성 기도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기도 생활이 오로지 나만의 기도생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도 생활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한다. 그러면 나의 기도도 살아나고, 나로 인해 다른 이들의 기도 생활도 살아나게 될 것이다.

2. 기도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뒤집어 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배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기도를 배우지 않는 것 같다. 말씀도 배우고, 찬양도 배우고, 이런저런 사역도 배우고 아무튼 다른건 다 배우는데 희한하게도 유독 기도는 배우지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고, 예수님은 친히 가르쳐 주셨다. 그렇다. 기도도 배워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기도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래야 기도가 깊어지고 성숙해 진다.

3. 기도는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이렇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 하지 않고서는 ‘이렇게’ 할 수도 없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에 힘쓰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이유도 결국 제자들이 실제로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잊지 말라. 신앙은 생활이다. 기도는 하는 것이다.

말씀을 맺겠다. 기도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주기도문의 제목을 따라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오로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이고 철없는 떼쓰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구하는 성숙한 기도로 변화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의 기도생활이 다른 이들의 기도 생활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소망과 기대감을 가지고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 실제로 하는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힘써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이렇게’ 기도 ‘하는’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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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예수님의 기도(4)(요 17:20~26)

예수님과 함께 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기를 기도하셔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 홍성인 목사

자신과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마치 창세기 49장의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열 두 아들을 축복한 것처럼,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을 바로 앞에 두고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축복하는 모세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요 17:20)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셔서 주신 예수님의 영광을 이 땅의 성도들이 보게 되는 것”(요 17:24)입니다. 이 땅의 성도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 됩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 17:20). 이 땅의 성도들이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는 예수님의 비전은 엄청난 기적이나 신비한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의 ‘말’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요 1:1)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만을 증거하게 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변화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라고 하는 구세주의 이름으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신비한 기적이나 이적으로 한 번에 3000명, 5000명을 회개시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대로 제자들의 입에서 선포된 ‘말’ 즉 ‘로고스’를 통하여 이 땅의 교회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먼저 하나됨을 이뤄야

오늘날 한국 교회가 변질되고 약화된 것은 ‘예수님’아닌 다른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될 때 하늘의 능력과 권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이름의 권세와 십자가의 능력만을 붙잡게 될 때 예수님의 영광을 이 땅의 모든 자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22절) 그러므로 주님의 영광인 십자가를 통하여 제자들은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길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져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은 영광중의 영광입니다. 하나 되어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교회가 교회되며 성도가 성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여야 될 가장 큰 이유는 “세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함”(요 17:21)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하는 일은 어떤 특별한 방법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 되어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과,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될 것입니다.”(요 17:23)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으로 온전히 하나 된 것을 보여줄 때 세상이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될 뿐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교회를 위한 종말론적인 축복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축복의 내용을 보면 하나는 성도들이 자신과 함께 천국에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영원하신 사랑으로 예수님이 성도들 안에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26절).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다”라고 신학자들이 말합니다. ‘이미’는 오늘 본문 26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키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은 주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환란이 심각하고 고난이 많아도 예수님이 계신 천국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친히 그곳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면 평안이 오고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어떤 고난이라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감당할 뿐 아니라 십자가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는 인생, 하나님의 사랑이 심령 속에 머무는 인생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셨던 영광, 즉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로 인하여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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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배경 설명

편집자 노트: 이 글은 테이블톡 매거진 시리즈: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두 번째 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전통적으로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린다. 어떤 이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가장 장문의 기도 중의 하나라는 이유로 본문의 기도를 “주기도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목할 점은 “주기도문”이 요한복음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은 원래 제자들의 요청으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제자들의 기도”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마 6:9~13; 눅 11:2~4). 요한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을 인지 한 채로 자신의 복음서를 쓰고 있었다면, 그가 다른 두 복음서의 주기도문을 단순하게 차용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드린 마지막 기도를 기록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직후,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드온 시내 건너편에 위치한 동산에 들어가신 일을 요한이 언급한 것도 특이하다. 예수님이 로마 군인에게 붙잡히신 바로 그 동산이다(요 18:1~2). 요한이 동산의 이름까지 밝히지는 않지만, 다른 두 복음서를 읽어본 독자라면 그곳은 예수님이 체포되시기 직전에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마 26:26~46; 막 14:32~42; 눅 22:40~4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세 번에 걸쳐 다음과 같은 간구를 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42, 44; 막 14:36, 39, 41; 눅 22:42).” 그렇기에, 요한이 기록은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시기 전 하셨던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이해를 현저하게 확장시킨다.

전후 배경 이해하기

세 복음서에 등장하는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성경적 배경을 보여준다. 일단, 요한복음의 전체 흐름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크게 두 가지의 극적인 상황으로 나눈다. 학자들은 이를 “표적의 책(2-12장)”과 “영광 또는 찬미의 책(13~21장)”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요한복음을 반반씩 읽는 것은 축구나 연극관람 중에 휴식 시간을 갖는 것과 흡사하다. 1막은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표적(2장)부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11장)까지 놀랄만한 표적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그려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대 백성들은 그들의 메시아를 배척한다(요 12:36~41).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세족식은, 자기 백성을 위한 그 분의 사랑,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드러내실 참사랑의 본을 보여주신다.

요한복음의 2막 또는 후반전이 시작되면서 이야기는 현격히 변한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메시아적 공동체를 모으신다(13장 1절과 1장 11절에서 ‘자기 사람들’이라고 표현). 그리고 요한은 부활 후 시점과 찬미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찬미의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요한복음 1장 1~18절의 서막과 비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요 13:1~4)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세족식은, 자기 백성을 위한 그 분의 사랑,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드러내실 참사랑의 본을 보여주신다(요 19:30; 3:16). 이처럼, 예수님의 세족식은 마치 십자가의 예고편과 같은 역할을 한다(13장 1절의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할 때, 이는 “최종” 또는 “최대”의 의미가 있다).

요한복음 13~17장은 독특하다. 열두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역시 독특성을 가지고 묘사한다(요한은 다른 공관복음과 달리, 성찬을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맺어진 새 언약의 제정으로 명확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물론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떡에 대한 논의가 최후의 만찬에 반영된다고 볼 수는 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에게 전해지는 예수님의 고별사만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성령의 오심에 대한 설명과(요 14, 16장) 예수님의 승천 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요 15장)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의 수난 바로 앞에 나오는 13~17장 전체 구조는 다음과 같다(고별 설교 또는 다락방 설교라고 불린다). 요한복음 13장 1~30절에서는 고별 설교 및 (예수님의 수난을 다룬 18~21장까지를 포함한) 찬미의 책 전체의 서문처럼 세족식이 등장한다.

세족이 끝나고 배신자 유다가 자리를 뜨자(요 13:30), 예수님은 13장 31절부터 16장 33절에 걸쳐 열 한 가지의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질문에 의해 때때로 중단되기도 하지만 (요 13:36~37[베드로]; 14:5[도마], 8[빌립], 22[유다 다대오]), 대부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떠나신 이후에 제자들의 삶을 대비하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주님을 잃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더없이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이 더 나은 일임을 확신하게 하셨다. 예수님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신자 안에 내주하실 성령을 보내신다. 이렇게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는 대신,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시어 신자의 마음 중심을 더욱 강력하고 신령한 임재로 이끄신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는 대신,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시어, 신자의 마음 중심을 더욱 강력하고 신령한 임재로 이끄신다.

신약의 신자들인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의 충만을 개인적으로 경험한다. 하지만,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 사역의 완성이란 여전히 미래형이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성령 강림이 곧 일어날 것임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다(행 2; 요한복음 20장 22절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임무를 수여하시며 성령 임재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제자들의 잠시 동안의 근심을 여자의 해산과 비교하시며 가르침을 마치신다. 해산 때의 고통이 있으나 아기를 낳으면 기쁨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잊힌다(요 16:16~33). 이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슬픔에 젖게 되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머지않아 보게 되므로 큰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16:33).” 예수님은 앞으로 다가올 환난에 대해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세상과 사탄, 그리고 “이 세상의 임금” (12:31; 14:30; 16:11)으로부터의 승리를 바라보게 하신다.

기도의 내용 이해하기

신약 성경 중,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직분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약 전체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세가지 직분을 묘사한다. 선지자 직분에 관하여 먼저 생각해 보자. 요한복음에도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유월절에 즈음한 예루살렘 첫 방문에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면서 선지자로서의 행동을 취하셨다(요 2:13~22). 시편 기자의 묘사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배의 순결을 사모하는 열심에 휩싸이셨다(요 2:17; 시 69:10). 성전은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집 (요 2:16; 눅2:49)”이요, “아버지의 집”은 신랑 되신 메시야(요 3:9)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예비하실 장소이다(요 14:2~3).

또한, 메시아적 표적으로 오병이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 6:14)”고 고백 했다. 이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신 18:15~19)”의 도래에 대한 기대였다. 그러나 성전 정화 사건으로 예수님은 배척되셨고, 유대 민족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다. 사람들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예수님을 인정할 때도 예수님은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요 6:14-15)” 가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또 다른 표적을 행하시기 이전에도 요한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요 4:44; 마 13:57; 막 6:4; 눅 4:24)”라고 언급했다. 이처럼 요한복음 속 예수님은 진정한 선지자이시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과 갈릴리 사람들은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배척했다.

왕이신 예수님에 관하여서, 우리는 오병이어 사건 직후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는 사람들을 본다 (요 6:15).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셨을 때도 예수님은 솔로몬 왕처럼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가셨다(요 12:12-19; 왕상 1:38). 이는 예수님이 보이신 왕의 겸손(요 12:14)이며 스가랴 선지자의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요 12:15; 슥 9:9)”라는 예언의 성취이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마중하며 유대 민족의 전통에 따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그곳은 “종려나무 성읍”이라 불리던 여리고 부근이었고, 종려나무 가지는 유대 민족의 자부심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큰 무리는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 12:13)”라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한 백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힐난하는 유대 지도자들 편에 합류한다. 예수님을 조롱하던 심문을 마치고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선보이며 “보라 너희 왕이로다” 이야기했을 때, 백성들은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요 19:14~15)”라고 소리 질렀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라는 빌라도의 반문에도, 대제상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15절)”라고 냉담하게 답했다. 유죄가 선포되고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명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을 3개 국어로 적은 패를 십자가 위에 붙였다(19절). 이에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 유대 지도자들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설득하나 빌라도가 이를 거부했다 (21~22절). 심오하고 비극적인 역설이나, 빌라도는 유대 백성들이 거부한 왕이신 예수님의 역할을 확증해 준 것이다. 배척당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참 선지자이셨듯, 백성들의 배척 속에서도 예수님은 진정 그들의 왕이셨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사장적 직분은 선지자나 왕의 직분만큼 눈에 띄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희생 제사로 표현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죽음을 맞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 1:29, 36). 그분은 자신의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요 10:15, 17-18). 부지불식간이지만 그 해의 대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예수님이 바로 백성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유대 민족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을 베푸시는 한 사람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했다(요 11:50~51; 10:16). 대제사장이면서도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는 역설 속에서 제사장이자 중보자의 역할을 완성하신 예수님이시다. 공식적으로 대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던 가야바가 있었지만, 진정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반복적으로 유월절에 비유하여 묘사한다. 종 되었던 집으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함께, 유월절의 상징을 예수님께서 완성하셨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라는 바울의 말을 상기시켜준다. 이처럼 요한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으나 참된 선지자이자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예수님을 드러낸다. 사실, 이 세 직분을 가지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배척은 그분의 메시아적 사명의 필요충분조건이기도 하다 (요 12:38~41).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예수님 자신을 위한 중보를 시작으로 (요 17:1~5), 그분의 제자들과 (요 17:6~19) 첫 증인들을 통해 신자가 되는 이들을 (요17:20~26) 위한 중보를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자세 이해하기

고백 설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죄 없음과 이타적인 자세로 시작한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점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 완수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안녕과 앞으로의 사역을 염두에 두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중보자의 제사장적인 자세를 취하셨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요 17:2~3)” 주시는 데 관심이 있으셨다. 자신의 영광보다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사였다(요 17:4~5).

백성들의 배척 속에서도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은 진정 그들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도를 밀어붙이시거나 자신의 위상을 높이며 무언가를 얻고자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오히려 주러 오셨다.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그의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게 하신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오신 것이다. 세족식에서 이미 보았듯이, 예수님은 신자에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본을 보이셨다(요 13:15-16; 빌 2:1-11). 예수님의 “새 계명”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요 13:34-35). 예수님의 끝없는 자기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는 자기 홍보와 사리 추구가 (심지어 많은 신자들 사이에서까지) 최고시 되는 현시대의 풍조에 크나큰 도전이 된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신자들을 세상 속에서 영적으로 보호하기 원하셨다. 그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라고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 17: 11,14,1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고, 곧 성령님도 보내실 것이다(요 17:14).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신자들을 데려가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들을 보호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는 기도이다(요 17:15).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는 신자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드리는 기도이자, 하나님 말씀의 진리로 신자의 성화를 이루게 하시려는 기도이다.

더욱이, 신자를 위한 기도는 단지 그들 자신의 성화를 누리려는 독단적인 목적이 아니다. 신자를 위한 기도는 사명(요 17:18)을 목적으로 한다. 유감스럽게도 사명적 목적을 위한 신자의 거룩과 성화는 너무나 쉽게 간과된다. 성화는 사명의 결과이며, 역으로 사명은 성화된 사람들에 의해 성취된다. 성령이 내주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자,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충성하며, 세상을 향한 사역의 목적으로 연합하는 사람들에 의해 실행된다(요 17:20~26; 엡 4:1~6).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령이 부어져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묶인 믿음 공동체의 하나 된 사명이야말로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근저를 이루는 비전이다.

이 글은 원래 테이블톡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기도시리즈】(7) –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퀸즈교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요한복음 17:1-26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제사장적인 중보기도를 하신 것을 기록한 장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말합니다. 1절-8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이며, 9절-19절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 마지막으로 20절-26절은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우리와 같은 크리스천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던 제자들을 이세상에 남기고 떠나신 뒤에 남은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방법을 기도를 통해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 기도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는 것이며(15절), 둘째는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것이며(17절) 셋째는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하나게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1) 제자들이 이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듯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님의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달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는 이유는 시험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하와처럼 우리가 마귀의 시험(유혹)에 걸려드는 순간, 악에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불순종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갖고 태어나며 이 세상의 임금은 마귀이기 때문에 세상은 결코 선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악한 세상에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가 없었던 에덴동산에서도 하와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는데, 하물며 죄가 관영한 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을 사랑하면 안됩니다. 세상의 것들에 빠지게 되면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문 16절에서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와 악을 많은 이들이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를 식물로 설명하자면, 죄는 식물의 뿌리를 말하며 악은 그 뿌리를 통해 나온 열매를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이 죄이며, 악은 죄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을 말합니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면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고 열이 나는 증세를 보입니다. 이처럼 그런 증상을 보이게 한 근본 원인인 감기가 죄에 해당하며, 죄 때문에 나오는 콧물이나 열이나 기침이 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근본 원인인 죄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들은 우리의 눈에 보입니다. 즉 분노, 거짓말, 욕, 질투, 용서하지 못함, 살인, 음행, 이간질, 교만 등은 죄 때문에 나오는 악입니다. 본질적인 죄나 선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죄로 인해 맺히는 육체의 열매나 선으로 인해 맺히는 성령의 열매는 우리의 눈에 보이므로 그 열매로 그를 선인과 악인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악을 행하거나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근본 문제인 (원)죄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가 우리 가운데에 있으면 악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 속에서 피어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는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원죄가 해결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주여, 주여”하면서 그 말씀이 자신들에게도 해당된다고 착각하며 죄속에서 너무나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도록 죄를 지적해주면 권면해준 이를 미워하며 “정죄하지 말라”고 너무나도 뻔뻔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원죄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 중직을 맡아서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주여, 주여”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도 잘 하고, 구제와 봉사도 잘 하여 외관상으로는 구원받은 것 같아도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고아원에 들어온 아이들이 원장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원장이 그 아이들을 자신의 호적에 자녀로 등록하지 않는한 결코 원장의 친 자녀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길 원한다면,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장사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원죄가 해결되지 않는한, 아무리 매일 짓는 자범죄를 회개하고 뉘우친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래서 돼지가 씻었다가 진흙탕에 도로 눕는 것과 개가 토한 것을 먹는 것처럼 자꾸만 지은 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다윗처럼 회개한 죄를 다시 짓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구분하기 가장 쉬운 것이 “형제를 용서하지 못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즉 그들이 삶 속에서 그들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용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용납하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원수는 둘째치고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의 자범죄를 백날 회개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고아원에 들어와 있다가 장성하면 자기의 갈 길을 가야할 뿐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16:14-15)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3-3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요일 4:20)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

그래서 우리는 먼저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 즉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 버리지 못하거나 자기 자아가 죽지 않아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기도문도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원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루종일 눈을 감고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우리가 주님 안에, 그리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순간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사에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므로 악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사 믿음이 연약해서 또는 실수로 넘어졌을지라도 기도하는 순간에 주께서 깨닫게 해주시므로 빨리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습니다. 실수로 악을 행했을지라도 회개함으로 악에 빠지지 않고 오뚜기처럼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 62:6-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위하여 쉬지 못하시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은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2)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빠진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거룩’이 무엇입니까” ‘거룩’은 ‘세상과 구별된 것’으로 ‘세상에는 없는 유일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거룩이라는 성품이 원죄를 갖고 태어난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룩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원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리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3)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따라서 우리는 매순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내면에 깊고 높게 건축한 세상의 견고한 진을 부셔야만 합니다. 매일 성경말씀을 거울처럼 들여다 보면서, 우리 자신을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원죄가 해결된 그리스도인은 가짜 제자와 참 제자의 삶을 구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세상에서 죽고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 왔을 때에 가짜 제자들은 자기의 방법으로 살 궁리를 연구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에 가룟유다처럼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참 제자들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이세상에서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훈련소이기 때문에 정말로 제가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제가 영원히 살고싶은 곳이 아닙니다. 역시 제가 가고싶은 곳은 천국입니다”라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자신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그러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이렇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찢어서 상하게 하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리더들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씀과 반대로 주장을 하며 예수님께서 하신 성경말씀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하는 자를 향해 망령된 주장이며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것을 본 이들은 정말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XX신이라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말을 거침없이 했습니다.

이런 이들은 거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들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책망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러한 자들이 목사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악에서 구원해주시고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신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경건치 않고 거룩함도 전혀 없는 교회의 악한 지도자들 때문에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 핍박을 당하며 욕을 먹을찌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전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3) 삼위 하나님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도록 해달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선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3위일체를 생각할 때에도 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한자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체(體)’가 ‘몸’이라는 뜻이라서 ‘한 몸’으로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즉 성부·성자·성령님이 하나라는 말을 세 분이 한 몸을 갖고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면 안됩니다.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하나라는 뜻이지 한 몸이 아닙니다. ‘하나’라는 것은 같은 마음과 같은 목적과 같은 생각과 같은 뜻을 갖고 함께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합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한 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삼위 하나님은 어떻게 하나가 되셨습니까? 그분들은 서로 겸손히 복종하는 자세로 하나가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6-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는 핵심(key point)입니다.

또한 3위 하나님은 서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아가페 사랑을 하십니다. 그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관계를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그 사랑을 할 때에 우리도 삼위 하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쌍동이라도 완전히 똑같지 않은 것처럼 우리는 서로 다르게 생겼고, 취향도 다르며, 기질이나 성격도 다르고 자란 환경도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까요?

찬양대가 찬양을 할 때에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의 서로 다른 파트가 있고, 또 한 파트 안에서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갖고있지만 열심히 연습하고 난 뒤에는 아름다운 찬양이 나오는 것처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는 말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각 파트는 다른 파트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내 소리가 튀어나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목소리를 돋보이기 위해 혼자 크게 부른다면 그 노래는 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찬양대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소리를 죽여야만 합니다. 모두들 자기를 드러내기 원한다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를 이 기도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떤 제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지도 이 기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이 내용대로 살고있는지 반드시 매일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첫째로 악의 유혹에 자주 넘어지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자주 넘어지고 있다면, 그 넘어지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뢰해야 합니다.

둘째로 진리인 성경말씀대로 살아가면서 거룩한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매일 매순간 성경말씀에 있는 경건의 훈련을 쌓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적인 일에 몰두해있는지 내 생활을 점검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안에서 부부가 한몸이 되었는지 그리고 교회인 성도들과 하나가 되어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부라고 하면서 각방을 쓰거나 서로 간섭하지 않고 따로국밥처럼 살거나 예수님처럼 교회를 위해 죽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아서 서로 지배하려고 자주 다투며 사는 부부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제자인 것처럼 교회에 가서는 경건한 척 합니다. 교인들과는 한 교회를 다니므로 하나가 된 것 같은데, 주안에서가 아니라 같은 취미로, 또는 같은 일 때문에, (예수가 빠진 상태에서) 같은 목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주님의 말씀으로만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깊이 이 문제를 묵상하는 가운데, 그 동안 나 자신이 정말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 참 제자의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면, 그 모든 것을 갖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며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속히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시고 진정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의 기도

추천평

이 책은 예수의 기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존스의 논점은 그저 예수의 기도에서 기도의 원리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이 들어간다.

– 도널드 S. 휘트니 (서던뱁티스트신학교 신학원 부학장 겸 성경적 경건 교수)

오늘날 다른 어떤 저자도 그렇게 깊이 있고 읽기 쉬우며 흥미를 유발하고 풍성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그토록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 주의 인성, 연약성, 권위, 영광이 책 갈피갈피에서 튀어나온다. 이 책을 읽으라.

– 댄 맥도널드 (그레이스토론토교회 담임목사)

이 책은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법 또한 가르쳐준다. 그대의 영혼이 메말랐고 기도가 죽었다면, 그런 그대를 소생시키고 새 힘을 북돋아 줄 생수가 바로 여기 있다.

– 데이비드 머리 (청교도개혁신학교 구약학/실천신학 교수)

마크 존스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성령의 능력으로 성부께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었는지 깊이 있게 신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우리 또한 그렇게 기도할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 리 게티스 처치소사이어티 소장 (The Forgotten Cross 저자)

그리스도를 알려는 욕구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이 책에서 진수성찬을 접하게 될 것이다. 마크 존스는 성자의 기도 생활을 관찰함으로써 성부께 이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경건을 위한 최상급의 음식을 우리에게 대접해 준다.

– 챠드 반 딕스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회사 교수)

성육신을 통해 하늘이 땅과 입맞춤했기에, 여기서는 기독론이 믿음의 일상생활을 형성하고, 채워 나가며,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우리의 동료 인간인 주님에게서 가장 기본적이고 아름다운 경건 활동을 배워 나간다.

– 데이비드 매티스 (미네아폴리스/세인트폴시티즈교회 목사)

기도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그 진실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기도는 우리 주님이 참으로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게 해준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 책은 예수에 관한 책이다.

– 메건 힐 (Praying Together, Contentment 저자, The Gospel Coalition 편집자)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1)

Q. 예수님께서 고별 설교 후 인류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하신 기도이기에 그 어느 기도 보다 의미가 더 하는 기도라 관심이 쏠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나요?

그렇습니다. 질문하신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이어서 하신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를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2회에 걸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우리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인류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기는커녕 그들로 인하여 상처와 마음 아픈 일이 더 많았습니다. 기도하자고 하면 졸기나 하고 그리고는 비폭력이어야 할 제자가 폭력을 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나 자르고(마 26:51), 누가 더 크냐며 자리싸움이나 하고, 이런 것을 보면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의 철없는 오늘의 모습만 본 것이 아니라 미래적으로 그리고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 받고, 은혜 받으면 넉넉히 주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이라는 확신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봅니다. 어린아이가 지금은 넘어지고 자빠져도 장성하면 골목길, 산길, 어둡고 힘든 길도 넉넉히 잘 헤쳐 갈 거라는 기대와 함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의 오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는 것처럼 우리 주님도 공관복음의 제자들을 본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제자들을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지금은 부족하고 주님께 미달되는 성도라도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한다는 인간 본연의 뜻을 기억하고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 되게 하소서. 11절에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자신이 부활승천 함으로 예전처럼 제자들과 함께 육체로 거하면서 그들을 지켜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들의 보호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세상은 요한복음 15:18~19의 말씀처럼 교회와 성도에 대하여 적대적 입장을 취하는 반 그리스도적인 집합체를 가리킵니다.

때문에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됨의 모델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하나됨입니다 (21~22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 모두는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고전 12:27). 서로 떨어질 수 없도록 연합되어 있는 우리의 몸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유기적인 조직체입니다(엡 4:16). 그러므로 크든 작든 분쟁을 일으킬만한 소지들을 철저히 없애고 성도는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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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에니멀 커뮤니케이터 하이디가 한국에 방문해서 화제가 되었다. 이제 한국에서도 에니멀 커뮤니케이터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들의 역할은 동물과 주인이 서로의 마음을 알도록 전해 주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식물과 소통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 때 우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는 일기장과 이야기했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 제제는 나무와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소통이 유년기의 환상이 아닌 사실이라 치더라도 이것보다 더 신비한 소통이 있다. 그것은 온 세상을 지으신 분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기도라고 부른다.

▲ <기도> / 오강남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펴냄 / 264쪽 / 8,500원.

예전엔 사람과 소통은 쉽지만 하나님과 소통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눈에 보이고 목소리도 들리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사람과 소통하는 것도 어렵다! 제대로 하려면 전혀 쉽지 않다.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라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어떻게 되지 않는다. 도날드 밀러는 교회가 복음을 관계보다 공식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를 ‘관계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리잔 여러 개 옮기듯 어려운 일이다.

사람과의 소통에서 우리가 흔히 하는 실수는 내가 하는 말을 상대가 다 알아들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상대의 생각은 제대로 확인해 보지도 않고 상대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 그러나 나중에 확인해 보면 상대와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듣지는 않으면서 말을 많이 한다고 소통이 잘 된다고 할 수 없다. 영화 <은하해방전선>을 보면 주인공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누구하고도 제대로 통하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성경에서도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로 경계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문은 위안을 준다. 일상을 살다 보면 무슨 기도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그저 이 한마디를 하면 되는데, 죄인이 거룩하신 분께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이라면 분명 이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듯이 나의 죄인 됨을, 그 분의 거룩함을 느낄 수 있다.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헨리 나우웬이 예수의 기도를 높은 경지로 여긴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더 깊은 소통이라는 것은 연인이 눈동자를 맞추듯, 부모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신비한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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