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 보니 게 여인 의 믿음 | [18강]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24~37) | 하용조 목사 | 하용조 목사의 마가복음 강해 상위 287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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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막 7:24~30) – 기독신문

하지만 지금 이방 여인의 간구에는 분명하게 거절하십니다. 또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함으로서 이방 여인임을 강조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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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11/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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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53]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 네이버 블로그

그 여자는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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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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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 Daum 블로그

마태복음 15:28에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여인의 말은 믿음의 말입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에서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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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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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24-30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동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녀 때문에 예수 믿게 되는 경우가 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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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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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 – 수로보니게 여인의 시련과 믿음의 연단 – 양의문교회

마태복음 15 장 21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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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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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가교회 박종일 목사,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 아시아뉴스통신

여기서 ‘수로보니게’ (Συροφοινίκισσα 수로포이니키싸)는 ‘수리아'(Syrian) 지방의 ‘페니키아(Phoenicia)’라는 뜻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여인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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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newsa.com

Date Published: 5/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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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 – 브런치

산책의 시간 / 믿음 007 | ‘두로'(Tyre)는 갈릴리 북서쪽 64km 지점에 있는, 레바논 남부 지역의 해안 도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페니키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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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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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여성 수로보니게 여인 < 신학 < 기사본문 - 뉴스앤조이

예수를 자신의 주로 이해하고 있는 여인의 이 발언은 예수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했을 것이다. 예수 :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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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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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 (막 7:24-30) – mission.bz

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 (막 7:24-30)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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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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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강] 수로보니게 이방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24~37) | 하용조 목사 | 하용조 목사의 마가복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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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수로 보니 게 여인 의 믿음

  • Author: CGNTV하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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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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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막 7:24~30)

물러서지 않으며 전심으로 하나님 찾는 성도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막 7:29)

오성수 목사(원주중앙교회)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떠나 두로 지방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두로는 이스라엘 북방의 해변에 위치한 이방지역으로, 무역의 중심지여서 경제적으로는 아주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두로는 ‘아스다롯’이란 여신을 숭상하던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온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어린 딸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마가는 그 여자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녀가 상당히 지성을 갖춘 교육받은 여인임을 가리킵니다. 헬라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을 법한 그녀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여자는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거절하셨습니다.

참 특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움을 구하러 나온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왜 이렇듯 단호히 거절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인종차별을 하신 것일까요? 저는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유대교 회당장인 야이로가 어린 딸을 위하여 간구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흔쾌히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방 여인의 간구에는 분명하게 거절하십니다. 또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함으로서 이방 여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인 회당장이 딸아이를 구해달라고 할 때는 흔쾌히 따라나섰던 주님께서 이방 여인의 간구는 거절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인종차별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자비하신 예수님의 말이라고 도저히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인의 형편을 뻔히 아시는 주님께서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그 여인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은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당시 제자들과 모든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인종차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무시를 받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이것은 정말이지 참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이렇듯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시키다니요.

여러분은 이런 경험을 당해 본 적이 있는지요? 가난하거나 배운 것이 없다고 무시를 당하고, 유색인이나 여자라고 괄시를 받아 보셨습니까? 이런 상황을 만나면 정말이지 견디기 어렵습니다. 설사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님마저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에게 실망했을 법도 합니다. 그 자리를 박차고 욕이라도 할 법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했거늘 메시아라는 분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그와 같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주여 옳소이다마는” 이것은 자아가 깨어지는 소리입니다. “저는 이방 여인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존재입니다. 저와 우리 민족은 대대로 아스다롯을 섬겼던 개 같은 여인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러분, 자아가 깨어지고서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아십니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오면서 자존심으로 인해 실족하고 넘어집니다. 자녀들이 진학시험에 떨어지면 자존심이 상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사업하다 부도가 나면 부끄러워서 못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자식 자랑하러 나오는 곳도 아니요, 자기 사업을 자랑하기 위해 나오는 곳도 아닙니다. ‘나 좀 알아주시오’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부끄럽다고 교회를 등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요, 날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더럽고 추한 내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고백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곳은 결코 자존심을 내세우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자존심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수로보니게 족속의 이방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인종차별과 같은 멸시를 당했지만, 은혜받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29~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할렐루야! 만약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의 자존심으로 그 자리를 떠났다면 딸 아이는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람 장군 나아만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나병이라는 치명적인 아픔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다가 아주 신분에 걸맞지 않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먼 길을 왔건만, 엘리사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종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들어가 버렸습니다. 만약 나아만 장군이 계속 자존심을 내세우며 그냥 돌아갔다면 그의 나병은 치유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아만이 자신의 계급장을 떼고 겸손히 요단강에 들어갔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문제 해결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부자 청년은 물질로 인하여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때로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사 먼저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때로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믿음을 보일 때 주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딸 아이 문제로, 남편 문제로, 건강 문제로, 재정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삶의 문제를 가져오신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믿음을 보이십시오.

주위의 제자들이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마 15:23)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려도, 주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여인의 큰 믿음이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이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제자들과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느냐고 원망하십니까? 왜 우리의 기도에 주님은 묵묵부답이냐고 불평하십니까? 주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수로보니게 여인을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그녀는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부르짖기를 계속했습니다. 이방 여인이라 인종차별을 해도 그것으로 인해 은혜받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틀어 예수와의 논쟁에서 이긴 유일한 인물이 바로 이름도 없는 이방 여인, 곧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딸을 위해 간구한 이 여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게 어떻게 반응하느냐?”

이방 여인인 수로보니게 족속 여인은 인종차별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주님께 보이므로 삶의 문제를 해결 받았거늘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요?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 남는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셨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가정을 능히 새롭게 세워주시고, 우리 교회를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시켜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싶어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성경은 온통 우리를 향한 초대로 가득합니다. 문제는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이 정말로 믿음으로 나아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두 번 기도해보다가 포기해 버리는 그런 믿음이 아닌 절대 물러서지 않는 믿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성도를 원하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으로부터 “합격!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는 칭찬과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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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53]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구분: 주일 예배 메시지

본문: 막 7:24-30

제목: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1. 예수님께 온 수로보니게 여인

갈릴리에서 장로들의 전통 문제로 바리새인들의 외식 문제를 비판하신 예수님은, 장소를 옮겨 두로로 이동하셨습니다. ‘두로’(Tyre)는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64km 지점에 위치한, 레바논 지역에 있는 해안 도시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페니키아(베니게, Phoenicia)의 연맹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인 그곳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였지만, 그 사실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 지방의 한 집에 들어가셨다는 소문이 그 지역에 퍼졌고,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여자는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으로, ‘시리아’(Syria)에 속한 ‘보니게’(베니게, 페니키아, Phoenicia) 지방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이방인 여자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곧바로(즉시) 달려왔고, 이내 그분의 발아래 엎드린 채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녀의 간청에 예수님은 이토록 싸늘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평상시 같으면 불쌍히 여기면서 흔쾌히 병을 고쳐주셨을 예수님은, 그 예상을 깨고 그녀의 간구를 거절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치 그녀를 개 취급하듯 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그 모욕적인 말씀을 받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옳습니다마는 개들도 상 아래에서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8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 그리고 집에 돌아온 여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귀신이 나간 딸이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자신의 소원을 성취한 여인을 보게 됩니다. 평행 본문인 마태복음 15장에서는 예수님이 그녀의 행위, 특별히 믿음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마 15:28). 따라서 그녀의 소원은 그녀의 큰 믿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그녀의 믿음을 그토록 크게 보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살펴봄으로써 큰 믿음이란 도대체 어떤 믿음인지를 알고, 그녀처럼 큰 믿음을 소유하여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소문을 듣고 달려온 믿음

여인의 믿음은 소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실 때 아무도 모르게 하시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님도 그 사실은 도저히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의도와 다르게 주님의 두로 입성 소식이 드러났던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시골과 같은 작은 공동체일수록 유숙하는 손님에 대한 소식은 더욱 빨리 퍼지기 때문입니다. 둘째, 두로와 시돈 지역의 수많은 주민이 이미 주님의 이적을 경험하였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도 소문으로 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생에 사역 초기에 갈릴리에서 불치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같은 수많은 이적을 베푸셨고, 그 소문은 곧바로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수많은 사람이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듣고 몰려왔는데, 그때 이미 두로와 시돈 근처의 많은 무리도 찾아왔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3:7-8). 그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던지 예수님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실 정도였습니다(3:9).

그런데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두로 지방의 한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갈릴리까지 갈 수는 없었지만, 지척까지 오신 예수님을 이번 기회에도 놓쳐버린다면 두 번 다시 그분을 만나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여인의 소원은 이전에 갈릴리까지 찾아갔던 사람들보다 늦게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늦더라도 어쨌든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수님이 두로 지방의 한 집으로 들어가셨다는 소문을 듣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이윽고 그분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에서 더욱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듣고 달려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의 소문’은 그분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불굴의 믿음

그녀의 큰 믿음이 소문을 듣고 달려간 데에서 시작되었다면, 그녀가 지닌 믿음의 두 번째 특징은 ‘불굴의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믿음을 크게 보셨고, 그 믿음에 근거해서 딸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간구하다’는 말은 거듭해서 요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자기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자존감을 모두 팽개치고 주님 발아래 엎드려 거듭해서 호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한마디로 거절이었습니다. 그냥 안 된다고 말씀하셔도 될 텐데 굳이 그녀를 개로 비유하면서 모멸감까지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주님의 말씀 속에는 그 당시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 권리에 대한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상에 근거해서 여인의 간청을 물리치셨는데, 그 기저에는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셨던 의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무리가 에워싸서 밀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해도 애써 노력하면 그 틈을 헤집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해도 그 비난을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정작 구원을 베풀 주님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욱이 개 취급하듯 모멸감까지 안겨주면서 거절하면, 한 가닥 남아 있던 소원도 사그라들고 맥이 풀려버립니다. 상황이 그 정도에 이르면 자신을 그렇게 대한 주님께 욕이라도 한바탕하고 소금을 뿌리면서 돌아설 만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녀의 믿음은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옳습니다”라고 인정한 후에, “그렇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호칭한 곳은 이곳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주여’는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존칭이지만, 그녀가 이 호칭을 사용한 이면에는 예수님의 주권과 능력에 대한 절대 믿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인은 ‘옳습니다’는 말을 통해 주님이 유대인의 특수한 권리를 우선시하신 것도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만’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주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즉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말을 통해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믿음의 불굴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불굴의 믿음’은 주님 앞에서 그냥 생짜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굴의 믿음’은 주님의 생각과 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그분의 뜻대로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바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방인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예수님을 알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은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그들만 구원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유대인을 넘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속에도 그 뜻이 동일하게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 영생은 유대인으로 제한하지 않고, 그분을 믿는 자마다, 즉 누구나 허락되었습니다. 그 ‘누구나’ 가운데 바로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극도로 겸손한 믿음

예수님이 그녀의 믿음을 크게 보신 세 번째 이유는, 그녀에게서 극도로 겸손한 믿음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이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28절 후반부에 들어 있습니다.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유대인들과 동동한 위치에서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상 아래에 있는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저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하였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먹다 남은 부스러기라 할지라도 자신의 딸이 귀신에게 해방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모멸감도 받아들일 자세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도 감동하실 정도로 겸손한 것이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덕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실까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취해야 할 사람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취하는 태도가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도 그러한 자들을 대적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반해, 겸손한 사람은 삶의 기준이 하나님의 법에 있습니다. 그 결과 겸손한 사람은 그분의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고, 때가 되면 높이시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 앞에서 그 누구보다도 겸손한 사람이었고, 그 겸손에 근거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과 함께, 그녀의 소원대로 자기 딸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5. 그 믿음이 더욱 요구되는 때

현대는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안타까워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세상애서 믿음을 보겠느냐?”(마 18:8) 그래서 현대는 그 무엇보다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나름 애를 씁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나거나 그분으로부터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두 가지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우리는 주님에 관한 소문을 담고 있는 성경을 통해 그분이 계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약속을 믿고, 기왕이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큰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서 그분의 발아래 엎드린 채 자신의 소원을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비록 주님이 그녀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내치고 모멸감도 주었지만, 그로 인해 낙담에 빠지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지만 불굴의 믿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안타까워하셨던 주님은, 그래서 역으로 오늘 우리에게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 같은 큰 믿음을 보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 소원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처럼 귀신에게 눌려 있습니까? 그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소원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고민하지 말고 주님께 나아가 아뢰어야 합니다.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겸손하지만 불굴의 믿음으로 주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주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과 함께 우리의 소원을 완벽하게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 경험이 오늘 우리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우림과돔밈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마가복음 7:24-30

인생은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자리에는 어디에나 장애물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 건강의 위기, 사업의 위기, 가정의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장애물을 훌륭하게 뛰어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장애물 앞에서 걸려 넘어지고 주저앉아 버리거나 인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인생은 성공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순간순간 맞이하는 위기의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양한 장애물 앞에 서 있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 여인은 이름도 기록되지 않고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 거하는 가나안 여인, 본문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소개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동안 유대지방을 떠나신 유일한 사건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이라는 장벽을 넘어 이방 지역으로 복음의 문을 여는 시발점이이 돼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가나안에 속한 땅으로 두로 지방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해 가장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시돈은 아합 왕 때 바알을 끌어들여 이스라엘을 우상의 나라로 만든 악한 여인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장애물이 놓여 있는 상황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며 귀신들린 내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하는데, 예수님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십니다. 이 여인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 자신이 개 취급을 받고 거절당했지만, 그녀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오히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며 예수님께 또다시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소원대로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 이 여인의 남다른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적극적 믿음입니다.(25절)

이 여인에게는 자기 딸을 고쳐보겠다는 열정적인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딸을 고쳐주실 것이라는 적극적인 확신이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 달려 나와 엎드리는 적극적인 태도가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여인의 믿음은 바로 적극적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열정이 필요합니다.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능력이 없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 분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그 힘을 깨닫는 순간 나도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들에게도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어려움 속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적극적인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님께 달려나가야 합니다. 그분의 힘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주님께만 살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난관을 극복하는 믿음

이 여인이 적극적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난관이 있었습니다. 뜻밖에 그 난관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예수님께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지를 때 주님을 침묵하셨습니다. 바로 이 주님의 침묵이 이 여인이 만나게 된 첫 번째 난관이었습니다. 때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침묵하실지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여인은 침묵하시는 주님 앞으로 달려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간청을 드립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유대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방인은 개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은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므로 이 여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 여인이 만난 또 다른 난관인 굴욕입니다. 때론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일을 겪게 됩니다. 이 때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자존심을 꺾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작은 자들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 왜 이 여인에게 개라고 칭하시면서 굴욕을 느끼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여인에게 겸손을 배우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여인은 이방인을 개라고 여기는 유대인을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개들도 상 밑에서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다는 기막힌 발상으로 자신의 청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자신 앞에 닥친 난관을 잘 이겨냈습니다. 이 난관을 이겨낸 믿음이 이 여인을 구해낸 것입니다. 이 잘에 모인 우리 성도들도 내 앞에 있는 여러 가지 난관을 이겨내는 믿음으로 항상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3) 칭찬받은 믿음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난관을 극복하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청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마태복음 15잘을 보면,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심령 속에서 큰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 여인에게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을까요? 우리도 칭찬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조금만 더 기도하면 될텐데, 기도하다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끈질기게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그 믿음이 크다고 놀라시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끈질긴 기도의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끈질기게 주님께 간청을 했습니다. 이 끈질긴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포하셨습니다.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이제 모든 무거운 짐을 훌훌 벗어저리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삶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수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이 장애물들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내 스스로 만족할 믿음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칭찬하는 믿음에 머물러서도 안됩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역사를 일으켜주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 믿음은 바로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어떤 난관이 닥쳐도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끈질기게 기도하여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스토리에 숨은 복음의 비밀

막 7장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이방인의 도시 두로 지경에 예수님께서 가시자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더러운 귀신 들린 딸 문제로 주님 앞에 나온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막 7장에 나옵니다. 저는 이전에 이 귀절들을 읽으면서 왜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에게 이렇게 대하셨을까라는 의아해했었습니다.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팀 켈러 목사님이 쓰신 “왕의 십자가”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간 가지고 있던 의문점들이 해결됬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방인들을 개처럼 대하는 유대인들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상 아래의 개들도” 라고 하는 원어는 “개” 는 강아지를 의미합니다. 그동안 제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여러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제자들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던 비유를 이 이방 여인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오히려 비유로 답을 합니다.

28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기서 이방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례한 반응이 아니고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먼저 구약에 예언된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순서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곧 십자가 고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만이 아니고 곧 온 이방 나라와 백성을 향해 펼쳐질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귀신 들린 딸로 인해 좌절할 여가도 없이 전능하신 구원자, 예수님께 나아가 그토록 담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주님 앞에 엎드려 간청을 합니다. 자녀의 아픔과 질병에 대해서 담담할수 있는 부모는 아마도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더러운 귀신 들린 자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바로 부모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님의 부활 뒤에 펼쳐질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순서를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지금” 이방인을 향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간구하고 취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한 믿음으로 나아온 그 이방 여인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그 딸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풍족한 은혜와 전능하신 능력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였습니다. 바로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메시야의 강림 목적을 말합니다.

사 53장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낮고 낮은 땅에 오셔서 내 대신 “상 아래 강아지”가 되어주사 오히려 우리로 “주인(하나님)의 상”에 앉아 먹도록 해주신 이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방인인 우리에게 바로 이런 복스런 소식으로 다가 오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내일 주일 예배의 우리 모두의 찬송제목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24-30)

본문의 말씀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더럽게 여기는 이방 여인이요,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가진 초라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딸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자존심(自尊心)과 감정(憾情)을 극복하고 겸손히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에 감동 받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 믿음을 배워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Ⅰ. 주여, 옳소이다(24-28절)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게네사렛 땅을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갈릴리 서북방 약 60km 지점 지중해 연변에 있는 도시로서 과거 지중해의 해상권을 쥐고 있던 페니키아의 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곳 두로의 한 집에 들어가 조용히 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소문이 이곳까지 퍼져서 도저히 자신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 여인은 아마도 딸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사랑하는 딸을 어찌하든지 고치기 위해 유명하다는 많은 의사는 다 찾아 다녀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딸을 위해서 무조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도움을 자마자 구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주님께 나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6절에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헬라인들은 다른 민족을 야만인으로 취급할 정도로 문화적인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란 말은 시리아와 베니게의 합성어로서 시리아 지역에 속하는 베니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니게(페니키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화적(文化的), 민족적(民族的) 배경을 가진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인은 어찌하든지 어린 딸을 구해야겠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런 민족적, 문화적 배경을 다 극복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꿇어 엎드렸습니다. “예수님 내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세요, 내 딸을 구해 주세요!” 여인의 기도는 참으로 간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는 여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녀’란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개’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며 무시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런 식으로 이 여인을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까지 이렇게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믿음으로 나오기만 하면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고 도와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와주시기는커녕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나와 엎드린 이 여인을 개 취급하시며 모욕적인 말로 물리치셨습니다. 한마디로 ‘너는 선민이 아닌 이방인이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민의 구주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는 정말 예수님답지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이런 모욕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데 아무리 이방인이라고 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직접 대놓고 개 취급을 하다니 이는 참으로 참기 힘든 일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로부터 박대를 받으면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여인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는 여인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테스트해 보시기 위함입니다. 이 테스트는 사람을 실족시키기 위한 테스트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마침내 그에게 진정한 축복을 주셨듯이 주님의 크신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시인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조금도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개라고 하시면 개라고 시인하였습니다. 보통 여자들 같았으면 아마 크게 반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무리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힘든 말씀이라 할지라도 “Yes, Lord!” 하며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녀에게는 “No!”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그러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함으로 주께서 다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부스러기라도 얻고자 하는 이 여인은 주님께 은혜 받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온전히 꺾은 것입니다. 물론 이 여인은 헬라인으로서 지성이 있고 자존심이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을 재치 있게 받아 넘겼습니다. 이 여인은 감정을 이기고 자신을 이겼습니다. 이 여인은 실로 지성과 유머, 재치가 넘치는 위대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면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예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개같이 비천하고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존귀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도 어딘가 쓸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랜 신앙의 경력을 내세우며 헛된 자만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만이 우리는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자존심을 꺾을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도 모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엡2:1-3) 우리는 모두 탐욕, 정욕, 거짓으로 물들어 개와 같이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배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를 기억할 때 자존심을 부인하고 겸손하게 주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그는 늘 자신이 과거 양떼를 치며 양 똥이나 만지던 비천한 목동 출신임을 기억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할 때 은혜에 감사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는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에도 요동치 않고 겸손하게 은혜를 간구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여인이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인격을 불신했더라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하면서 더 이상 말없이 낙심해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조금도 기죽지 않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매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어떤 형편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치 아니할 때 믿음의 여유를 갖게 되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였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사람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길래 그 쪽은 자녀고 나는 개냐며 따지거나 불평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무시를 받는 중에서도 예수님을 “주여(Lord)”라고 불렀습니다. 여인은 주 되신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삐뚤어져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 버립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뭔가 마음에 안들면 불평하는 마음을 갖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주권신앙이 있으면 불평하기보다 감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의도하신다는 믿음을 갖습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정하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의 뜻으로만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일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은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심한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주는 모습으로 다가올 때 그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심하게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롬8:28)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결코 실패가 없으십니다. 우리를 반드시 best way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주권을 인정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배워야겠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들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숙한 종들이 되어야겠습니다.

Ⅱ. 이 말을 하였으니(29,30)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님은 여인의 말에 크게 감동을 받으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28에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 여인의 말은 믿음의 말입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에서 ‘이 말’은 모든 의심과 불신을 뛰어넘는 믿음의 말입니다. ‘이 말’은 겸손하게 은혜만을 간구하는 지혜의 말입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여기서 우리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입이 있다고 말을 함부로 하기 쉽습니다. “내 입 가지고 내가 말하는데 뭐가 어때?”하며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불신적인 말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불신적인 말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한 열 두령들은 불신적인 말을 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들로 범죄케 하고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엎드러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의 말을 하였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토대로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나는 안돼, 이 것은 정말 안돼”하는 소리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안되게 하실 것이고,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믿으면 된다”는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과연 불가능한 것도 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자기 입술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믿음의 말은 긍정적입니다. 불신의 말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믿음의 말은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말을 기뻐하시고 그 믿음대로 역사하십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여인의 ‘이 말’을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의 말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대로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겸손히 나오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들에게 응답하시고 그 능력을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치유시키시며 은혜 부어 주십니다. 주님 앞에는 해결 받지 못하는 문제는 없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은밀한 소원을 아뢰어 응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온 인생을 결코 그냥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반드시 응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고침을 받기를 바랍니다. 회복되기 바랍니다. 이제 이 새벽에 여러분의 소원을 아뢰어 응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24-30)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귀결이 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의 내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상대방을 사랑의 동기를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가장 우선적인 관계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자녀들이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해서 성경 곳곳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부모님이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부모를 공경함으로 나타납니다.

사실, 자녀들이 부모를 대할 때에, “내가 부모님을 공경해야지…”라는 결단을 하고 대하는 자녀는 드물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편하게 부모를 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부모가 자녀들의 공경의 대상, 존경을 받을 만한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부모에 대해 일방적인 편애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는 부모님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생명을 주셨는데, 그 육신의 생명을 주실 때에 부모님의 몸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왔지만 부모님의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손길을 통해서 자녀를 돌보게 하시고 성장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주셔서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기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자녀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은, 사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신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님에 대한 공경은, 그러한 부모님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부모님이 어떠한 분이셨는지를 한번 나누어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또한 나아가서는 우리가 어떠한 부모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마가복음 7장에 같은 내용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그 가나안 여자를,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찾아 온 이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천시하는 이방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소리질러 말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찾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들에 들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는 것은, 지금 딸 아이가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쁘고 사랑스럽던 모습의 딸이었는데, 이제는 귀신에 의해서 흉악하게 된 것입니다. 분명 딸 아이의 모습이 흉악한 얼굴로 바뀌었을 것이고, 그 행동도 흉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도 흉악한 일을 행했을 것입니다. 아비, 어미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그 딸의 흉악한 행동으로 봐서는 그 아이에게 자비를 베풀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말합니다. “그 흉악한 귀신에 들린 그 여자 아이는 제 딸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한 여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한 아이의 엄마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엄마는 자식의 모습이 비록 흉악하더라도 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문제가 곧 자신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불쌍한 자신의 딸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자녀들을 바라볼 때에 그 부모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는 다릅니다. 자녀들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됩니다. 자녀들의 기쁨이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삶에 대해서 진정으로 축복하며 안타까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사실,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흉악하게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 여인의 딸과 같이 악한 영의 사로잡혀서 주님을 잃어버리고 흉악한 길로 가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며 주님 앞에 나가는 분들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님인 것이고, 그러한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자녀의 영적인 상태를 바라볼 수 있고, 그 영혼을 바라보면서 내 아픔으로 여기면서 주님께로 올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왔던 것처럼, 우리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 부모의 모습인 것입니다.

2. 그리고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때로 자녀를 위해서 자신 자신의 모습을 부인하고 내려 놓기도 하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아이를 구해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십니다.곧 그녀의 소리를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냉대하시는 모습을 보고, 도리어 제자들이 민망히 여기면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라고 합니다. 그녀를 보낸다는 것은,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고 보내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만나 문제 해결을 받고서 돌아갔던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그 엄마를 낙심케 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일하라고 보내심을 받았으니, 이방여인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행동과 말씀으로 이미 확실하게 그 여인을 거절하는 의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여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예수께 와서 절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냉대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이 엄마에게, 예수님께서 비수와 같은 말씀을 던집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합니다. 도저히 참기 힘든 모욕적인 말을, 딸 아이를 구해보겠다고 온 엄마에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만난 그 여인에게, 마치 그 여인이 개와 같은 존재인 것처럼 말씀하시면서 모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여인이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듣더라도 시험에 들만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행하신 모습을 지켜보던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킬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우리의 스승이 되고, 메시야가 될 수 있어”라면 그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등을 돌릴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의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개가 되던지, 그것보다 더 한 것이 되 던지 간에 자기 자신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개에게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음식이 필요하니, 자신에게도 그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그 딸을 위해서 자기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조차도 부인하고서 살아가는 것이 부모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여자가 아니라 어머니인 것입니다.

동물에게도 이러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그 애정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의 MBC방송국에서 방영한 “남극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타리가 있습니다. “남극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듣고서, 남극이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며 호기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극의 눈물”은 남극에 사는 ‘황제펭귄’의 자식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소재로 한 영상물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황제펭귄들이 영하 60도의 추위 속에서 알을 낳고, 그 알을 부화시키고 부화된 자식을 얼어 죽이지 않고 키워내는, 엄마, 아빠 펭귄의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입니다. 황제펭귄도 새의 종류기 때문에 알을 낳아서 번식을 합니다. 영하 60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추위 속에 엄마 펭귄이 알을 딱 하나 낳습니다. 그리고 그 추운 곳에서 알을 따뜻하게 품어서 부화를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알이 부화되려고 하면 2개월 이상 걸린다고 합니다.

그 일은 아빠 펭귄의 몫입니다. 엄마 펭귄들은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백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를 향해 떠나고, 아빠 펭귄들은 그 알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두발을 모아 발등 위에 알을 올려 놓고 배로 알을 덮어서 두 달 동안 알을 품습니다. 혹시 놓치기라도 하면 1-2분 안에 알은 얼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두 달 동안 잠깐도 쉬지 않고 알을 품고서 서 있는 것입니다. 알을 품은 동안 아빠 펭귄들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그 빙판 위에 서서 지냅니다. 세찬 남극의 눈보라가 몰아치면 아빠펭귄들은 조밀하게 모여서 함께 그 추위를 이겨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두 달 이상 알을 품고서 있으니 아빠펭귄의 몸이 수척해 집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알이 부화되어 새끼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아기펭귄도 털이 없기 때문에 추위에 노출이 되면 얼어 죽습니다. 그래서 부화된 새끼를 계속 해서 품습니다. 그리고 새끼를 먹일 음식은 자신의 위벽속에 저장되어 있던 음식입니다. 자신도 먹지 못해서 수척해진 몸이지만, 위에 있던 음식을 게워서 아기 펭귄에게 먹입니다. 이것을 펭귄 밀크라고 합니다. 이 펭귄밀크가 거의 떨어져 갈 때 먹이를 구하러 갔던 엄마 펭귄이 나타납니다. 뱃속에 음식을 잔뜩 저장하고 기우뚱거리며 옵니다. 아빠 펭귄도 힘들었지만 엄마 펭귄도 자식에게 줄 먹이를 구하기 위해 바닷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옵니다.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받아 죽기도 하고, 다쳐서 피를 흘리며 다리를 절뚝거리며 오는 엄마 펭귄도 있습니다. 그렇게 엄마펭귄은 아빠펭귄을 대신해서 아기펭귄에게 펭귄밀크를 줍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빠 펭귄은 그 아기펭귄을 넘겨주고 다시 바다를 향해서 걸어갑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지만, 자식들을 보호하고 잘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부모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돌아가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오신 부모님의 모습에, 그리고 하나님의 모습에 우리는 공경과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3.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정작 딸 아이를 살렸던 것은 그 어머니의 믿음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한 딸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엄마가 그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수치와 수모를 견뎌내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보고자 원하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엄마의 믿음이었던 것을 봅니다.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딸을 사랑해서 아이를 귀신으로부터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지만, 그 여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흉악한 귀신에 들려 흉악하게 된 딸을 반드시 고치시고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몇 마디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서 다른 방법을 찾아서 떠나는 어미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유일한 치료자이시고 구원자이심을 믿고 간구하는 그 믿음을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 수로보니게 여인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이를 살려주실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부를 때에 말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야, 곧 구원자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의 비수같은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간절하게 붙들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통해서 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딸을 향한 사랑이 아이를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여인의 믿음이 그 아이를 고쳤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하지만, 모든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자녀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부모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의 구원이 세상에 있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대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영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로 나와 치료받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그 부모가 믿고, 그 믿음이 그 자녀들에게 이어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모는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한 부부의 자녀로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는 그 사랑과 헌신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결혼해서 자녀를 낳으면서 부모가 되고, 부모로 성장하게 됩니다.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서 자신의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자신도 부모와 똑같이 자녀를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아무 대가 없이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서, 우리는 우리 부모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무조건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헌신을 부모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모는 자녀의 육신적인 삶 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까지 돌볼 수 있는 부모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고린도전서 4:15에 보면, 결혼도 하지 않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아비로서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육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영혼을 관심하며 바라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적인 아비와 같은 마음으로 낳고 양육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부모님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헌신의 모습을 닮게 하신 것은, 자녀들을 양육할 때에, 육적인 자녀의 성장 뿐만 아니라, 영적인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이 운영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원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공경하기로 다짐하며 사랑할 수 있고, 부모는 자녀를 육신적인 책임뿐만 아니라, 영적인 믿음까지도 책임지며 양육하여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녀나 부모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을 영적으로 양육할 수 있는 믿음의 아비로 성장할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시련과 믿음의 연단

마태복음 15 장

21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 말씀요약 —-

본문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한 이방 여인(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히 12:2)님께는 자신에게 부르짖고 재차 간청한 이 여인의 모습을 보시고서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하셨으니, 이 여인의 믿음의 면면을 살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큰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축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것은 크신 은혜였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나아가셨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갈릴리의 북편에 위치한 곳으로 서로 근접해 있기 때문에 보통 두로 지경(막 7:24)으로 통하였습니다. 두로 지역의 사람들은 옛적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쫓겨난 가나안 족속으로, 이들은 자연히 서로 원수처럼 지내었습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두로의 거민들을 향해 “가장 악랄하고 악명 높은 우리의 원수(notoriously our bitterest enemies)”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곳에 살고 있던 한 가나안 여인이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 그를 메시야로 알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를 수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다는 사실과 예수님께 와서 딸의 병 낫기를 간구하였다는 사실 외에 이 여인에 대한 다른 아무런 정보도 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는 날 때부터 하나님도, 구원도, 약속도 없는 소망없는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전에 이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하시고 이적을 베푸셨을 때에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능력을 친히 보며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막 3:8 참조).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되어야 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원수였던 두로와 시돈 지방에도 가셔서 복음을 증거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복음과는 상관없는 이방인의 땅, 어두움의 땅, 교회와 본질상 원수된 자들에게도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시고 구원으로 이끄셨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요 위대한 구원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실로 이방을 비추는 구원의 빛이 되셨습니다(눅 2:30-32). 하나님과 본질상 원수된 우리들, 복음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던 우리들, 이방인의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진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모든 믿음, 구원얻는 믿음은 그 자체로 고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인정하고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믿음은 금보다 귀한 보배로운 믿음이며,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살후 3:2).

수로보니게 여인은 여러 시련을 만났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받아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이 여인은 여러 가지 시련과 시험을 만났습니다. 그녀에게 시련의 출발은 그녀의 딸이 귀신들려 흉악하게 된 것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자녀가 병들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큰 고통이요 시련이 될 것입니다. 건강의 시련, 경제적인 시련, 생업의 시련, 인간관계의 시련들과 같이, 이 세상 환경과 관계된 모든 어려움들은 모두 다 일종의 시련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자비로우시며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께 찾아와 부르짖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고 침묵하신 것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자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24절). 허황되게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분수에 넘치는 복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 어린 딸이 흉악한 귀신들렸고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이것을 고쳐달라고 간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고 계시는 것입니다. 울며 기도하여도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를 만난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시련은 주님의 침묵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간구하는 것에 대해 단순히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기대하고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의 대답을 해 주시고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져서 마치 모든 것이 나를 대적하고 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을 만난 것입니다(24-25절). 이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시련을 이기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련을 만났을 때에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찾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와 부르짖은 믿음,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고 침묵하실 때에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믿음,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고자 매달린 믿음, 이것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큰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믿음에는 죽은 믿음(약 2:26)도 있고, 연약한 믿음도 있으며(롬 14:2), 뒤로 물러가는 믿음(히 10:38-39)도 있고, 깨끗하지 못한 불순한 믿음(약 1:6-8)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잡된 것이 섞이지 않게 하심이요, 그 잡된 것들을 깨끗케 하시고 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연단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실 때에, 하나님의 섭리에는 밝은 면도 있고 우리 인간이 보기에 힘들고 두렵고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의 전체를 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고 시험에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 공사의 자재들만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벌판에 몇 개의 기둥만이 세워져 있고 여기에 벽돌들이 널려 있고, 저기에 창문들이 널려 있고, 저기에 자갈들이 쌓여있고, 다른 한쪽에는 기와들이 쌓여 있을 때에 거기에 무슨 아름다운 것이 있겠으며 무슨 질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건축자에게는 설계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훌륭하게, 질서있게 세워질 때가 있습니다. 많은 자재들이 순서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연결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고 완성된 것을 볼 수 있어야 우리는 바로 본 것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부분만 보고 낙심하거나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에게는 아름다운 설계도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치시고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게 하시기 위함이요, 또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며, 우리 주님은 어떤 주님이신지를 더욱 분명하게, 더욱 밝히 보여주시고자 함입니다. 시련을 통해 이런 정도의 유익도 우리에게 주실 것을 계획하지 또 기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된 우리에게 왜 혹독한, 불과 같은 시련을 주시겠습니까?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수로보니게 여인의 시련과 믿음의 연단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에게 분명히 증거해 주십니다. 믿음은 자기 신념이나 자기 최면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의 소원이나 성공을 바라는 긍정의 힘도 아닙니다. 자기가 얻고자 하는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구원의 큰 믿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요,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알고 시련 속에서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설계도를 신뢰하는 것이요,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요, 끝까지 낙망하지 않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믿음 없음을 주님께 고백하고 제자들과 같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하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 큰 믿음으로 우리에게 닥치는 크고 작은 시련에서 승리하여,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한 믿음의 연단을 이루어가야 하겠습니다.

예가교회 박종일 목사,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충신교회 전 담임 박종일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24-30)ἀλλ᾽ εὐθὺς ἀκούσασα γυνὴ περὶ αὐτοῦ, ἧς εἶχεν τὸ θυγάτριον αὐτῆς 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ν, ἐλθοῦσα προσέπεσεν πρὸς τοὺς πόδας αὐτοῦ· (Mar 7:25 BNT)But after hearing of Him, a woman whose little daughter had an unclean spirit, immediately came and fell at His feet.(Mar 7:25 NAS)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Mar 7:25 NKR)예수님은 가르치시던 곳을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가 이방인의 땅 두로 지방으로 들어가신 이유를 마가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7:24)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친 몸을 쉬시면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시려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천하에 퍼진 후라 예수님의 존재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7:24).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립니다. 누가는 그 여인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로보니게’ (Συροφοινίκισσα 수로포이니키싸)는 ‘수리아'(Syrian) 지방의 ‘페니키아(Phoenicia)’라는 뜻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이 여인은 유대인이 짐승보다 더럽게 여기고 적대시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헬라인들(로마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민족적 자존심에 가득차 있는 유대인들을 역시 적대시하고 있었습니다.이렇게 서로를 적대시하며 상종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경멸의 대상인 유대인 예수에게 와서 민족적 자존심과 수치심을 다 버리고 그 앞에 엎드려 간구한다는 것은 보통 이상의 용기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그녀는 예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7:26)합니다. ‘간구’에 해당하는 ‘에로타'(ἠρώτα)는 거듭하여 요청한다는 의미로 그 여인의 간절함과 절박함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실로 그 여인은 오직 딸의 구원을 위해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적 자존심을 모두 팽개치고 예수께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하지만 여인의 간절함과 절박함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로 차갑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7:27)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녀’란 하나님의 선민(選民) 곧 유대인을 가리키며. ‘배불리 먹게 하다’는 말은 본 상황에서 ‘유대인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고, 좀 더 포괄적으로는 복음 또는 하나님이 구원의 시혜에 관한한 유대인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개’라는 표현 역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시 59:6), 또는 상대방을 비하할 때와 악한 존재를 상징할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여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에 찬동하기가 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경멸하고 무시하던 대상으로부터 오히려 ‘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마음과 감정은 거의 맨탈붕괴의 상태까지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고 응답합니다.본문에 등장하는 주여( κύριε 큐리에)라는 호칭은 마가복음에는 오직 이곳에서만 등장합니다. 물론 ‘주여’라는 호칭이 단순히 상대방에 대한 높임말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참신앙이 내포되어 있는 호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어서 “옳소이다”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를 표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 유대인의 우선권과 특수한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비천한 자신의 존재(‘개’)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이어지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녀는 마치 상 아래서 주인의 호의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자신과 자신의 딸도 그러한 입장에서 주님의 호의를 기다리고 있다고 간청한 것입니다.’개’라는 말로 자신을 지칭할 때 받는 인격적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을 개의치 않고 주의 은총을 간청하는 모습은 극한 겸손(謙遜)의 표시입니다. 마가복음 7장은 여인의 이 같은 겸손과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이 대비되면서 이방 여인의 믿음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말씀하시며 여인을 돌려보내십니다.이 말씀은 예수께서는 그 여인의 대답에 매우 만족하셨으며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마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평행본문에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방 여인이 안고 씨름했던 최대의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순수하고 끈질긴 그녀의 믿음에 충분히 만족하시고 이제’돌아가라'(you may go, NIV)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병을 치료하신 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씀으로 완전한 회복을 전제한 말이기도 합니다.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선언을 통해 그녀의 믿음에 확실히 응답해 주셨습니다. 특히 여기 ‘나갔느니라’는 말은 완료 시제로 그 선언과 동시에 이미 귀신이 그 딸에게서 떨어져 나갔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이처럼 예수께서 원거리에 있는 병자를 고치신 경우는 본서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예수께서 어떤 특별한 명령이나 외침 없이 당신의 거룩한 의지로 치유의 기적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적 존재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여인은 집으로 돌아갔고, 아이를 괴롭히던 귀신이 온전히 떠나고 아이가 침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의 집에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선사하셨습니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예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 치료의 주님을 찬양합니다[email protected]

수로보니게 여인

‘두로’(Tyre)는 갈릴리 북서쪽 64km 지점에 있는, 레바논 남부 지역의 해안 도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페니키아의 연맹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머물기 원하셨지만, 그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그 소문이 두로 지방에 퍼졌고,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여인의 귀에도 그 소문이 들렸다. 그녀는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 ‘수로보니게’는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으로, ‘시리아’(Syria)에 속한 ‘페니키아’(Phoenicia) 지방을 말한다. 한 마디로 이방 여인이었다.

그녀는 소문을 듣자마자 즉시 달려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 간청에 예수님은 싸늘하게 말씀하셨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평소 같으면 불쌍히 여기면서 흔쾌히 병을 고쳐주셨을 예수님은, 예상을 깨고 그녀의 간청을 거절하셨을 뿐만 아니라, 개 취급하듯 대하셨다. 비록 그 이면에는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지만, 그녀가 받았을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무리가 에워싸서 밀고 들어갈 틈이 없다 해도 애써 노력하면 그 틈을 헤집고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이 비난해도 그것을 한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작 구원을 베푸실 주님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해 버리시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더욱이 개 취급하듯 모멸감까지 안겨주면서 거절하시면, 한 가닥 남아 있던 소원도 사그라들고 맥이 풀려버린다. 상황이 그 정도에 이르면 자신을 그렇게 대하신 주님께 욕이라도 한바탕 내뱉고 소금을 뿌리면서 돌아설 만도 하다.

그런데도 그녀의 믿음은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여, 옳습니다”라고 인정한 후에, “그렇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하였다. ‘옳습니다’라는 말은 주님이 유대인의 특수한 권리를 우선시하신 것에 대한 인정이다. 하지만 ‘그렇지만’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주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즉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말을 통해, 그것이 왜 그런지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가졌던 믿음은 불굴의 믿음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불굴의 믿음’은 주님 앞에서 그냥 생짜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굴의 믿음’은 주님의 생각과 마음을 정확하게 읽고, 그분의 뜻대로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구하는 것을 말한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바로 그렇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녀가 비록 이방인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보다 더 정확하게 예수님을 알고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뜻은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그들만 구원받는 데 있지 않다. 주님은 유대인들을 넘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속에 그 뜻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영생은 유대인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분을 믿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 사실에 기대어 불굴의 믿음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 믿음으로 자기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였다. 이제는 우리가 그런 믿음을 구사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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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특히 성서 속 여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남성인 나로서는 성서의 남성에 비해 성서의 여성을 비중 있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태생적 한계 또는 남성 중심의 성서 해석에 깊이 물들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러한 이유가 상호 중첩되어 시나브로 남성 우위의 시각을 갖게 했을 법도 하다. 성서 속 여성은 내게 여전히 타자화되어 있는, 박제화된 인물일 뿐이다. 의식은 페미니스트이지만 몸은 가부장적인 현실, 이러한 한계를 몸에 지닌 채로 예수의 시선으로 낮아지려 한다. 의식과 몸 사이의 거리만큼 힘든 작업일 테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를 만나는 현장을 성서(마 15:21-28, 막 7:24-30)를 매개로 극적으로 재현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과 제자들, 예수라는 일련의 계열을 통해 대화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소문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한 여인, 여인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다만 여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철저한 종교적 이방인이며 헬라인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무리로 달려온 이유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 때문이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한다. 자기는 온데간데 없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여인은 아픈 딸을 살릴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비록 그것이 소문일지라도,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허둥대며 달려가 자신을 낮추었다. 당당하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이 여인에게서 느껴진다.

그러나 예수는 묵묵부답이다. 예전의 예수는 절박한 민중의 처지에 우선적으로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대처했다. 그랬던 예수가 왜 아무런 반응이 없었을까? 그 사이, 예수의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제자들이었다.

제자들 :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수로보니게 여인은 제자들에게 귀찮은 존재였을까. 줄곧 따라다니는 것도 싫고, 여인이 아픈 딸을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소리가 제자들에게는 소음에 지나지 않은 모양이다. 예수의 침묵과 제자들의 투정이 참으로 대조적이다.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 예수가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정결법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하는 현장에 있었다. 여인이 가나안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결하지 않은, 상종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린 까닭일까. 제자들은 아직도 외형적이고 획일적인 정결의 기준이 체화되어 있는 습속과 문화의 영향을 벗지 못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제자들의 청을 흔쾌히 수락하는 듯,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 :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

생뚱한 장면이 연출된다. 제자들은 ‘얼씨구’ 하며 추임새를 넣고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어 기뻐했을 것이다. 이 대목은 예수가 ‘빼앗긴 자, 정당한 권리를 박탈당한 자’의 편에 서 있다는 일관성이 깨지는 사건이다. 이에 더하여, 수로보니게 여인은 율법을 모르는 평범한 이방인을 흔히 일컫는 ‘개’로 취급받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말씀을 예수 사역의 일관성의 잣대로 재해석해야 한다.

예수는 항상 특권적 유대의식을 경계해 왔다. 변방의 소외된 민중과 우선적으로 함께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방의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집’이라고 말한 것도 예수의 행적과 관련해서 언표화된 사실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구나 ‘잃어버린 양’이라고 했을 때, 수로보니게 여인은 헬라인으로서 특권층이었기 때문에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우선시하는 예수의 원칙적 입장에 위배되지 않는다. ‘개’라고 표현한 것도 직설적인 표현이기보다는 ‘유대/이방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대한 역설적, 비판적 반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말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결코 살갑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여전히 이방인으로 타자화되어 있고 차별과 냉대를 받고 있을 뿐이다. 예수에게 실망했을 법도 한데, 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대담하게 대꾸한다.

수로보니게 여인 :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한 치도 물러남이 없다. 자신이 ‘개’라고 여겨져도 개의치 않는다. 어린 딸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여인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여인은 예수를 이미 신뢰하고 있기에 ‘기적, 징표의 부스러기’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일 게다. 예수의 말을 순차적으로 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또한 여인의 말 속에 강력한 희망을 감지할 수 있다. 여성 이방인인 자신도 주인의 밥상에 참예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를 자신의 주로 이해하고 있는 여인의 이 발언은 예수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했을 것이다.

예수 :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마가)

예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여인의 투쟁어린 간청으로 이뤄진 상호소통을 통해서 예수의 뜻이 점차로 바뀌어가고 끝내는 여인의 간청이 현실로 구현되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성실한 반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구체화되고 이루어진 것이다. 결국 이 둘의 대화는 딸이 살아나는 사건으로 집약된다.

딸의 치유사건을 통해 예수운동이 항상 소외된 자의 편에 있다는 원칙이 증명되었고, 이방인이 고침 받는 사건은 이방지역까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예수운동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 보다 분명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수로보니게 여인이 신앙의 귀감이 되는 이유는, 실존적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만나는 생의 경험을 가졌고 하나님의 뜻을 앞당기는 강렬한 소망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 (막 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 (막 7:24-30)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가복음 7장 전반부(1-23절)에서 우리는 ‘참된 정결’이란 밖(외관, 의식법)이 아니라 속(내면,도덕법)의 정결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속(내면, 행동)을 깨끗하게 함이 없이 겉(외관, 의식)만을 깨끗케 하는 것은 위선이다. 결국 앞 단락의 논란은 예수의 제자들이 범했던 ‘더러운 손으로 떡 먹는 일’이 새 시대에는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즉, 더러운 사람(이방인)도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속(마음)만 깨끗하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러한 논증을 통해서 마가는 지금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이방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담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딸이 고침(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극명한 예로 소개함으로써 7장의 논증을 강화하고 있다(cf. Lane 1974:259) . 그리고 이 치유 사건은 그 다음의 치유 사건들(7:31-37)과 함께 복음(구원)이 이방지역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은 하나님의 돌보심(먹이심), 즉 구원(복음)이 유대에서 이방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특별히 앞의 기사와 함께 이 기사는 먹이심(급식)의 두 이적들(6:33-44; 8:1-9) 사이에 위치하여 그것의 의미를 ‘떡'(αρτος )과 ‘배불리 먹음'(χορταζω)의 단어를 반복함(‘떡’은 6:38, 41; 7:27; 8:5-6 그리고 ‘배불리 먹음’은 6:42; 7:27; 8:8)으로써 연결시키고 있다(Guelich 1989:383; Corley 1993:94).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다수의)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섞여있는 마가의 청중과 그들의 이방 선교에 큰 의미를 던져준다.

본 단락의 기사는 이적(축귀) 기사로 여겨진다(예수께 나아 옴; 축귀에 대한 간구; 믿음에 의한 딸의 온전해짐). 이 이적 기사는 앞의 논쟁에 대한 결론(“부정한 손[사람]으로도 거룩한 떡[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 혹은 치유]을 먹을 수 있다”)으로 제시되고 있다. 비록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의 논쟁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기사는 여전히 논쟁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특별히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가진 이방 여인과의 대화(26b-29절: 일종의 논쟁과 같은 문답)는 독자들에게 상당한 긴장감(혹은 갈등)을 제공하면서 설득력 있게 앞의 사건과 관련하여서 전체 주제의 결론으로 잘 이끌어 간다.

본문의 사건(장면)을 갈등구성에 의하여 분석하여 본다면 표 1과 같이 도표화 할 수 있다.

1. 갈등구조에 의한 장면분석

사건의 발단은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두로 지방에 오셔서 한 집에 머무름(24절)으로 시작된다(S1). 그의 머무름은 결코 은밀한 머무름이 될 수 없었다.

숨기고 감추려고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예수님,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속성이다. 결국 예수께서 이 곳에 오셨다는 소문은 신속히 퍼져 나갔다. 이러한 소문으로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이방 여인이 주님께 찾아 와서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함으로써 사건은 갈등국면으로 전개된다(S2). 본문이 말하는 대로 이 여인은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인 남자인 예수께 직접 찾아와서 그의 발아래 엎드려 간구한 일은 그 당시의 규례를 벗어난 다소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거부적인 답변(27절)은 이 사건을 갈등으로 더욱 고조시키기에 충분하였다(S3). 그러나 예수님의 차가운 반응(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낙담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반응함으로써 사건의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S4).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이 반응은 앞에서 차갑게 답변하였던 예수님으로부터 과연 어떤 반응을 이끌어 낼 것인가? 본문의 사건은 그 갈등이 이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여인과 함께 독자는 예수님의 반응을 예의 주시하게 된다. 과연 어떻게 될까? 여인의 이 지혜로운 답변(믿음의 답변)에 대하여 주님은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이 떠났음을 알려준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29절). 드디어 절정에 이른 갈등은 해결에 이르고(S5), 딸의 온전해진 모습이 언급됨으로써 사건은 종결(대단원)된다(S6).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30절).

2. 사건의 배경(24절)

사건의 배경이 되는 장소(“두로 지경”)의 언급은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옛 경계를 넘어서 이방 지역(페니키아)인 두로와 시돈까지 뻗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막 5:1-20에서 거라사 지방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은 이방인에 대한 개방을 암시하였다. 제자들과 함께 한 예수님의 항해의 목적지(“저편으로 건너가자”)가 이방의 거라사 지역임을 독자는 알고 있다. 거기 더러운 땅에서 예수님은 더러운 군대 귀신들린 한 사람을 고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후에 자신은 홀로 뭍(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을 다시 배를 태워서 벳새다로 가게 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그들이 도착한 곳은 두로와 시돈의 해변도시들을 바라보는 게네사렛의 땅이었다. 이곳 게네사렛 땅에서 정결 논쟁(7:1-23)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막 7:24-8:21은 주로 갈릴리 주변의 북쪽과 남쪽의 이방지역 즉, 게네사렛 -> 두로 -> 시돈 -> 데가볼리 -> 갈릴리 -> (데가볼리) -> 달마누다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결국 막 8:22에서는 예수와 제자들은 여행의 목적지인 벳새다로 돌아왔음을 마가는 언급하고 있다.

24절에 언급된 배경을 통해서 독자는 사건의 배경이 불결한 이방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사건에 묘사된 것들 즉, 두로, 더러운 귀신,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 개들은 이러한 이방지역의 모습을 강화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Εκειθεν δε αναστας απηλθεν εις)의 표현(cf. 막 1:35; 10:1)은 사역의 새로운 전환을 알리는 의미로 사용되었다(Stock 1989:210). 이 기사로부터 이방지역에서의 사역 단락(7:24-8:26)이 시작된다(Swartley 1997:19). 그리고 이어지는 해설자의 서술(“한 집에 들어 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은 이 지역에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예고해 준다. 조용히 자신을 감추려 하나 감출 수 없는 예수님의 모습(cf. 1:44-45; 2:1-2; 3:7-8, 20; 6:30-33; 9:30). 아마도 그의 초기 사역의 영향력(3:8)과 최근의 사역(이적들)으로 인해 그에 대한 소문이 이곳 이방지역까지 퍼졌을 것이다. 24절의 언급은 사건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배경을 이룬다.

3. 주님께 나아온 헬라인 수로보니게 여인(25-26절)

해설자에 의하면 주님께 나아온 이 여인은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가진 헬라인(이방인)인 수로보니게인으로 묘사되어 있다(25-26절). 여기서 ‘헬라인’이란 단순히 이방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헬라의 시민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여인임(Stock; Corley; Guelich)을 암시하고 있다(예수님과의 수준 높은 문답을 통해서).

더러운 귀신에 의하여 고통 당하고 있는 어린 딸을 가진 헬라시민인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곧 주님이 은둔해 있는 집에까지 찾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나아와 엎드리어 딸의 구원(축귀)을 간청한다. 이방 여인으로서 유대인 남자의 집에 찾아온 행동이나 그 발 아래 엎드린 행동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매우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된 “곧 와서”라는 표현과 “그 발아래 엎드리어… 간구한다”의 표현은 귀신들린 어린 딸의 상태의 심각함과 그 딸을 고치고자 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열망과 행동을 잘 묘사해준다. 이처럼 더러운 귀신들린 자신의 어린 딸의 고침(구원)을 위한 그녀의 행동은 즉각적인 행동이었을 뿐 아니라 필사적이고 겸손한 행동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더러움의 문제, 악한 생각과 같은 내면의 문제를 놓고 얼마나 신속하고 겸허하고 담대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여인의 겸손하고 간절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반응은 매우 차가 왔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차가운 거절의 반응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7절).

4. 주님의 응답(27절): 비유로

자신의 발아래 엎드리어 딸의 치유를 겸손하게 간구하는 여인에게 내뱉은 예수님의 말씀은 모욕적인 거절(?)의 반응이었다(Corley 1993:99-100). 예수님의 거절의 말씀은 비유로 주어졌다. 예수님 당시의 해변의 두로 지역은 갈릴리 북쪽 산지의 유대 농부들의 농작물들을 사서 쓰는 부유한 도시였다. 그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따르면 이 지역은 북쪽 갈릴리와 해안도시인 두로 지역 사이에는 농지의 제한 때문에[1] 농작물 공급이 항상 문제였다(cf. 행 12:20). 이러한 상황에 특별히 농작물이 귀한 시절(겨울)이 오면 상대적으로 가난한 유대 농부들은 예비한 곡식이 없으므로 음식섭취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위의 비유를 말하곤 한 것 같다(Stock 1989:212). 과연 ‘자녀의 떡'(이스라엘의 농작물)을 취하여 이교의 ‘개들'(이방인들)에게 주는(파는) 것이 옳은가?

여기 자녀는 유대인을 가리키고 개들은 이방인을 가리킨다. 우리는 여기서 왜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 이 믿음의 여인에게 그와 같은 반응을 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 마가복음에 언급된 치유기사들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에게 겸손히 찾아와 은혜(치유)를 구하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반응을 결코 보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러한 믿음의 행동을 귀하게 여기셔서 칭찬하시며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셨다(중풍병자의 친구들, 손 마른 사람, 혈루증 여인, 회당장 야이로 등).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동의 의미와 의도는 무엇인가? 그 당시의 정황이나 문맥을 고려하면 비유의 말씀으로 주어진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은 대단히 의도적임을 본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비유는 농작물이 귀한 시절에 유대 농부들이 불평 어린 말로서 예수님은 지금 여인에게 이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그녀의 믿음을 시험할(Calvin in Cranfield 1972:248-249; Lane 1974:262)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방)사역의 의미를 보다 역설적으로 알리려고 한 것 같다(Camery-Hoggatt 1992:150-151).

막 4:11-12에 따르면, 예수께서 딸의 온전해짐을 간청하는 이방 여인에게 거절의 비유(riddle)로 응답하신 것은 이 여인을 외인(outsider)으로 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그 비유를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놀랍게 응답하고 있다.

5. 이방여인의 응답(28절): 외인(外人)에서 내인(內人)으로

하나님 나라의 외인(이방인)으로 여기며 비유로 대답하신 예수님(cf. 막 4:11-12)에 대하여 이 여인은 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하고 지혜롭게 응답(응수)하고 있다. 여인의 대답은 그녀가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선권(혹은 특권)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인정하고 있음(“주여 옳소이다마는”)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의 무조건적인 자비와 놀라운 능력에 호소하면서 비록 자신이 개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먹던 부스러기라도 얻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 그녀의 높은 신분이나 유대인과 두로인 사이의 갈등(Garland 1996:293)을 고려한다면, 여인의 이 반응은 매우 특이한 행동이었다. 모멸스러운 비유적 답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딸의 온전해짐(떡을 먹음)을 위하여 자신을 개로 여길 정도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낙망치 않고 끈질기게 반응한다. 딸의 치유(온전해짐)를 위해서 그녀는 이러한 모멸과 거절의 벽을 넘어서야만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끈질긴 간구는 응답을 받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더 큰 믿음을 갖게 되었다.

마가복음의 비유이론(4:11)에 따르면, 이 여인은 외인에게 주어지는 비유를 설명 없이 깨달음으로써 더 이상 외인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제 이 여인은 그 나라의 내인의 위치 에 있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내인(하나님의 자녀)이 되는 것은 더 이상 외관이 아니라 믿음이다(막 1:14). 왜냐하면 앞 단락(7:1-23)에서 본 대로 내인이 되는 것은 내면의 변화와 믿음이기 때문이다. 거절당한 것처럼 보이는 이 여인에게 드디어 하나님 나라의 내인으로서 치유의 은혜가 주어졌다(29절).

6. 예수의 선언과 딸의 치유(29-30절)

그녀의 담대하고 적극적인 믿음과 지혜와 신뢰의 행동은 (인종과 성별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구원의 이적을 경험하는 축복으로 이끌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을 단순히 듣고(믿고) 집으로 돌아간 그 여인은 자신의 어린 딸이 정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 여인의 신앙의 결과는 단순한 부스러기의 먹음이 아니라 배불리 먹은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돌보심, 치유)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이제 더 이상 외관상 차별이 없음을 보게된다. 행 10:34-48(특히 34-35절)과 15:6-11의 베드로의 말씀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믿는 이방인에게도 믿는 유대인과 똑같이 성령을 부어주신다(cf. 갈 3:28). 그러므로 독자는 이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가 고백한 것 처럼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사람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닫게 된다. 비록 이 여인이 수로보니게 태생의 헬라인(이방인)이라고 할 지라도!

7. 나가면서

초기에는 이 이방여인의 간청이 거절될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여인(의 딸)도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돌보심(먹이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기사는 앞의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비록 이방인이 외관적으로는 불결하여도 하나님의 상에서 제외되지 않고 떡을 배불리 먹게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방지역의 급식이적(8:1-10)에서 보는 대로 이제 이방인도 하나님의 상에서 배불리 먹을 수 있음을 이 기사는 미리 입증하고 있다. 이 점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통하여 더 밝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놀라운 복음을 먼데 있는 이방의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그들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상에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사는 참된 신앙의 모습은 어려움(장벽)을 만날 때 더 강해짐을 잘 교훈해 준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이적기사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와 믿음으로 간구 할 때까지 그들에게는 평탄의 길이 주어지지 아니하였다. 이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장벽들을 넘어서서 주님께 나아왔다. 문둥병자도(1:40[접촉할 수 없는 문둥병]) 중풍병자도(2:4[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 야이로도(5:35-36[딸의 죽음의 소식]) 혈루증 여인도(5:27[불결한 상태])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9:18[제자들의 초기 실패]) 바디메오(10:48[조용히 하라는 무리의 계속된 경고])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신앙은 어려움과 시련을 통해서 더 강하여 진다. 모멸적인 거절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 여인의 믿음은 환난 가운데 있는 마가의 청중이나 오늘 우리에게 귀한 신앙의 범례가 된다. 이 여인은 말씀과 믿음으로 환난이 와도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받아 결실하는 전형적인 옥토의 모습(막 4:20)으로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말씀(초기의 믿음)으로 인해 환난이 오면 곧 넘어지는 돌밭의 사람들은 아닌가?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멸적인 도전(야유)앞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자존심을 쉽게 손상시키는 사건(일종의 장애물과 어려움) 앞에 우리는 체면과 감정에 의해 그냥 무력하게 걸려 넘어져서 돌아서지는 않는지. “아니 내가 이 일(수치: 경한 일) 당하려고 이 짓(중대한 일)을 해” 라고 금방 화를 내고 욕하고 돌아설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 고통스러운 경멸의 순간(비유)을 지혜롭게 믿음으로 그것을 긍정적 상황의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녀의 생애에 놀라운 이적을 경험하는 사건으로 만들었다(“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것이 신앙의 지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적은 것'[먹던 부스러기](감정, 자존심, 체면)에 걸려 넘어져 ‘큰 것'(신앙, 성숙)을 잃게 되는가? 결국 이 여인은 부스러기를 구했지만(실제는 배불리 먹음) 그녀의 겸손하고 적극적인 신앙의 간청으로 딸의 구원을 얻게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이와 같은 신앙적 지혜는 간구 하였던 [부스러기] ‘떡'(치유=구원)을 기다림 없이 동시에 같은 상에서 먹게 되었다(Lane 1974:263). 그것도 넉넉하게.

딸의 온전해짐을 위한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복음을 위하여 즉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모멸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뭇 사람의 끝(‘개’로서 취급당한다 할지라도)이 되어 뭇 사람을 섬기는 자로서 살아야 하는 제자도의 겸손한 모습(9:35; 10:43)을 잘 보여준 것이었다(Garland 1996: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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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편집인, 총신대 신대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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