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 와 삽비라 |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모든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아나니아 와 삽비라 –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th.taphoamini.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th.taphoamini.com/wiki/.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JOY TV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3,284회 및 좋아요 69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아나니아 와 삽비라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 아나니아 와 삽비라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리라
– 마태복음 6:1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건데요
그 인정받고 싶은 감정으로 인하여
남을 시기하고 질투할 때
크리스천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https://youtu.be/wm9-GZ8AUfg ☜
김병삼 목사님의 전체 설교 영상이 궁금하신분은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


\”선교는 사명, 후원은 동역\”
나영선(나도영상선교사)에 약정해주시는 선교후원금은
영혼을 살리는 복음방송 콘텐츠 제작과 기독무화행사를 통해
‘땅끝 복음 전파’의 절대 사명을 완수하는데 사용됩니다.
▶영상선교사 참여안내 : 02-6333-1003
▶ARS : 060-808-1004
▶CTS 영상선교후원 동참하기 : https://bit.ly/31Nxqcq
▶CTS 기독교TV 홈페이지 : http://www.cts.tv/
신앙생활에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는
No.1 기독교 채널 CTS기독교TV
더 많은 복음 전파, 전도에 힘 쓰고자 합니다.
ⓒ 2021 All rights reserved by CTS기독교TV
* 모든 저작권은 CTS기독교TV에 있으며,
이 콘텐츠는 무단 다운로드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짧은설교 #아나니아 #삽비라

아나니아 와 삽비라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행4:36-5:11) [2019년 11월 24일, 성령 …

오늘 우리가 본 성경말씀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일로 성령을 속인 일 …

+ 여기에 보기

Source: scjeil.org

Date Published: 11/9/2021

View: 5640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 (행 5:1-11) * 땅 끝까지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한창 부흥하던 초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성도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종교 …

+ 여기에 표시

Source: www.kpccoh.org

Date Published: 9/10/2022

View: 435

‘사도행전 강해'(34)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2) (5:3~6) – 기독신문

베드로는 3절에서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냐』고 물으며 아나니아를 책망했다. … 사도행전 강해'(34)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2) (5:3~6).

+ 더 읽기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4/23/2022

View: 6018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 Daum 블로그

아간의 이야기와 다른 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전리품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헌금한 돈이라는 …

+ 더 읽기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5/20/2022

View: 583

<성경바로알기> 아나니아·삽비라는 왜 죽임을 당했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악이 도대체 무엇이었기에 그들이 생명까지 잃게 되었을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the prophetic insight)으로 …

+ 여기에 보기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5/20/2021

View: 2764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십일조 교훈 맞는가? < 신학 < 기사본문

몇 일 전이었다. 모 방송국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십일조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 여기를 클릭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7/11/2022

View: 1335

성경인물설교(56) 아나니아 삽비라

아나니아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으로 유대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름이었고, 그 아내 삽비라라는 이름은 ‘청옥’이라는 뜻으로 ‘아름답다’라는 단어에서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12/5/2022

View: 515

[ 거짓말 ]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이유 (행5:1~11)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많은 무리가 교회에 더해졌다. 그들 가운데 밭과 집을 판 돈을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1/2021

View: 88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아나니아 와 삽비라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나니아 와 삽비라

  • Author: JOY TV
  • Views: 조회수 3,284회
  • Likes: 좋아요 69개
  • Date Published: 2021. 7.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DMA7bpK6ow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 (행 5:1-11) * 땅 끝까지 이르러

2018년 5월 13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14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

(사도행전 5장 1~11절)

[ 들어가는 말 ]

지난 2015년 여름 안식월을 가졌을 때 한국에 가서 오랜만에 제가 이민 오기 전 다녔던 교회의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열 명 쯤 모였는데 그 중 다른 한 친구와 제가 목사였고, 나머지도 모두 교회에 열심히 나가며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 몇 명이 목사인 저와 그 친구에게 부탁하자고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들이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제발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 분야 저 분야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 성경 이야기만 해 달라. 잘 모르면서 경제 이야기, 정치 이야기 같은 걸 자꾸 하고, 우리 전문 분야들에 대해 아마추어 수준에서 이야기하는데, 사실이 아닌 것도 많으니까 그렇게 안 해주면 좋겠다.”라고 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제발 설교할 때 헌금 이야기 좀 그만 해라.” 당시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한지 10년이 조금 넘은 때였는데, 지난 10년 동안을 돌아보니까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좀 의아했습니다. ‘왜 저런 말을 할까?’ 알고 보니, 한국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헌금하라는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헌금과 연결이 된다고 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이 헌금, 저 헌금 등 명목을 많이 갖다 붙인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로 강해설교를 하는데, 강해설교에는 지금 제가 하는 방식처럼 ‘연속 강해설교’가 있습니다. 성경의 책을 한 권 정하여 순서대로 해나가는 것입니다. 또 주제를 정하고 거기에 맞는 본문을 정하여 그 본문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적용하는 ‘주제별 강해설교’도 있습니다. 연속 강해설교의 특징 중 하나는, 본문을 설교자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고 성경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죽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사실 헌금에 대한 설교는 듣는 성도님들도 부담이 되겠지만 전하는 설교자도 부담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 같은 경우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본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순서대로 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과연 헌금에 대한 본문일까요? 사실은 헌금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나니아의 거짓말과 죽음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교회를 좀 다닌 분들은 많이 아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본문에 충격적인 사건이 나오는데, 헌금을 부분적으로 숨겼다가 그저 벌 받고 매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어버린 사건입니다.

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이 헌금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내려다가 인간인지라 조금 아까운 생각이 들었는지 조금 떼어 놓고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세 시간 간격으로 부부가 그대로 죽었습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이것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설일 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조금 전 제 친구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 본문이야말로 많은 설교자들 또는 부흥사들에 의해 가장 악용된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거 봐라. 헌금을 제대로 안 하면 죽는다. 그러니까 제대로 헌금해라.’ 하고 위협하는 설교 본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이 사건이 갖는 위치는, 단순히 헌금을 내고 안 내고 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그냥 빨리 읽으면 헌금을 제대로 안 내서 죽었다는 사고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결코 헌금과 관련된 사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믿음의 본질과 핵심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건이라고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에 가장 처음 만드신 완벽한 공동체가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만드시고 거기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죄가 들어와서 에덴동산이 파괴되는데, 그 원인은 결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 대해서도 여러 논란이 많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또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다고 그 다음 사람들도 계속 죄인이 되는 것이냐고 질문할 수도 있지만, 쉽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끔 영화를 보면,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발견되는데 어떤 사람이 그곳에 여행을 갔다가 감염이 되어 비행기를 타고 돌아옵니다. 같이 비행기를 탄 사람들에게 다 전염되고, 그 사람들이 다 흩어지니까 다 전염이 되고, 그래서 온 나라가 뒤집히고 세계가 뒤집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자기가 착하냐 아니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있으니까 그냥 번지는 것입니다. 그것과 비슷합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죄가 그냥 번져버린 겁니다.

다시 신약으로 와서,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서 가장 첫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합니다. 이 교회는 정말 놀랍고 황홀한(fantastic) 공동체였습니다. 위로부터는 강력한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사람들이 저마다 방언을 하는데 그것도 외국어로 방언하여 이곳저곳에서 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자기들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해서 부족한 사람이 없고,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구분 없이 서로 다 나누어 쓰는 놀라운 공동체였습니다.

인류 역사에 이런 공동체가 다시 또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 이상적인 사랑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4장에 나타난 초기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공동체에 무서운 죄가 들어왔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1-2절)

4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 요셉이 있는데, 별명인 바나바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와 헌금을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전체에 큰 감동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헌금을 하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갑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면 당연히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도 존경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바나바가 헌금을 해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주목을 받는 것을 질투하고 시기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였습니다. 이들도 속으로 ‘우리도 땅이 있으니 팔아서 헌금하자. 우리 땅을 팔아서 바나바보다 더 많이 헌금을 하자. 그러면 사도들과 성도들이 우리를 인정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부랴부랴 땅을 팔아 돈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자기 집이나 땅을 팔아 헌금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재정이 필요하다고 할 때 집을 팔아서 헌금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귀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부부는 대단한 신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목적과 동기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제일 중요한데,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 겁니다.

나중에 베드로도 말하지만, 자기 재산인데 자기가 마음대로 쓸 권리가 없습니까? 자기들이 처분한 것 중에 일부는 남겨 놓고 일부는 교회에 바칠 권리가 없습니까? 그렇게 한다고 잘못될 것은 없습니다. 땅을 팔아서 ‘이것은 땅을 판 돈의 일부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쓸 곳이 있어서 다 드리지는 못하고 이것만 드립니다.’라고 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일부를 감춘 데에 있습니다. 전부 다 낸 게 아닌데 전부를 드린 것처럼 위장한 데 있었습니다.

왜 그랬는가? 동기가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랑과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바나바가 성도들로부터 받는 저런 존경과 사랑에 대해 질투가 올라온 겁니다. 자기들도 그것을 받고 싶어서 헌금을 한 겁니다. 헌금을 한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족한 지체들을 돕기 위해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된 동기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막상 땅을 팔고 보니까, 원래부터 감추려고 했던 것은 아닌 것 같지만, 아까운 생각이 든 겁니다. ‘바나바가 낸 것보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다 할 필요는 없다.’ 하고 판단을 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바나바처럼 자기들도 가진 것 전부 다 낸 것처럼 위장한 것입니다.

사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죄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는데, 사탄은 결코 큰 죄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겁니다. 큰 거짓말이 아니라 작은 거짓말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사탄의 유혹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결코 엉터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엉망이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유혹이 오면 누가 못 이기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교묘합니다.

‘야, 네가 헌금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헌금을 이렇게 많이 하는데, 너도 이것도 쓰고 저것도 써야 되지 않느냐? 또 이렇게 많이 낼 필요가 뭐 있느냐? 땅을 얼마에 팔았는지 누가 아냐? 너희 부부만 알고 있으면 된다. 자식 교육도 시켜야 되고 시집장가도 보내야 되고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교회에 다 바치느냐?’ 이렇게 작은 데서 모든 게 시작됩니다. 그런데 질투와 욕심으로 가득한 이 부부가 사탄의 속삭임에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드린 헌금은 액수로 따지면 큰 헌금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이 액수만 보았을 때는 ‘야, 대단하다!’ 하고 감탄할 만한 액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성도만 있으면 우리 교회는 엄청난 부자가 됩니다. 이런 성도만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겉으로만 보면 대단하고 문제가 될 게 없는데, 베드로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감탄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성령님이 알려주셨습니다. ‘이건 아니다.’

보통 누가 큰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겠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그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재벌 회장 앞에 가서 ‘이거 용돈으로 쓰세요.’ 하고 재벌에게 10,000불을 줘보십시오. 우리 같은 보통 사람에게 10,000불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런데 재벌이 그걸 보면 감동을 받겠습니까? ‘이게 뭐야? 껌 값이네.’라고 할 겁니다.

하나님은 우주에서 가장 큰 부자이시고 재벌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갖고 계신 분이신데,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해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그저 소위 ‘껌 값’이지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액수에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받으십니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돈도 없는 어린 자녀가 이런 어머니날 같은 때에 자기 나름대로 카드를 쓰고 1-2불짜리라도 선물을 사서 엄마를 줄 때 감동을 받는 것이지, 아이가 갑자기 만 불을 훔쳐다가 선물할 때 감동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 돈이나, 아무 헌신이나 받으시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은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거짓된 헌신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을 받지 않고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었습니다. 순수하지 않은 헌금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닌 거짓된 방식으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면, 사람들은 감동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전혀 감동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런 돈 때문에 교회는 시험에 들게 됩니다.

놀랍게도 비슷한 사건이 구약에 하나 있는데,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가 죽고 나서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가나안 정복전쟁을 벌입니다. 첫 번째 성이 아주 강력한 여리고 성이었는데, 그들은 전쟁을 하지도 않고 하루에 한 바퀴씩 성을 돌다가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고 ‘와’ 소리를 지르니까 성이 무너져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다음 성은 그에 비하면 아주 약한 아이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 성 전투에서는 패배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전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딱 한 번인데 그게 바로 아주 약한 아이 성에게 진 것입니다. 그때 아간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첫 번째 여리고 성에서 얻은 것들은 다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너희가 다 가져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은 그것을 어기고 몰래 훔쳤습니다. 그래서 자기 장막 바닥의 땅을 파고 그 속에 훔친 물건을 깊이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나님도 모르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구약이 원래 히브리어(아주 일부가 아람어)로 되어 있고 신약은 헬라어(그리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BC 250년경에 이집트에서 헬라어로 번역했습니다. 거기에 유대인 공동체가 컸기 때문에, 프톨레미 왕이 번역을 명령하여 유대인 학자 70명을 불러 번역했다고 “70인역”(Septuagint)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인데 히브리어가 아니라 헬라어 성경입니다.

그 70인역의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이 물건을 훔쳤다는 단어가 ‘노스피조’(nosphizo)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 2절에서 아나니아가 얼마를 ‘감추매’라고 한 것이 똑같이 ‘노스피조’입니다. 그러니까 아간이 훔친 물건을 땅 속 깊이 감추었던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역시 얼마를 깊이 감추었다는 뜻입니다. 아간이 범한 똑같은 범죄를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꾸짖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3-4절)

“땅이 그대로 있을 때”라는 것은 아직 팔지 않았을 때입니다. 당시 첫 번째 교회 성도들의 헌금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따라 너무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드린 헌신이었습니다. 누가 강요해서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너무 은혜를 받았으니까 자기도 뭔가 갚고 싶다고 하며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어떻게 성령을 속일 생각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생각이 있습니다. 마음으로 먼저 계획이 있은 다음에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으로 증오하며 ‘죽이고 싶다’라고 생각하면 살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있지만, 돈도 아니고 학위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네 마음속으로 이런 일을 감히 계획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런 거짓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첫 번째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부흥하고 있었습니까? 한 번에 3천 명이 들어오고,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고친 다음에 남자만 5천 명이 들어오니까, 120명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수만 명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방언, 예언, 온갖 은사, 기적, 구제, 봉사, 나눔, 사랑 등 얼마나 놀라운 공동체였는지 모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말씀 공부도 했고, 같이 뜨겁게 합심해서 소리 높여 기도도 했고, 외부로부터의 핍박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내부로부터 이런 문제가 올라오는 겁니다.

요즘 중요한 것이 반도체인데, 아무리 잘 만들어도 거기에 먼지가 들어가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지가 안 들어가게 하려고 굉장히 애를 씁니다. 교회도 아무리 수가 늘어나고, 성경공부가 많고, 제자훈련과 사랑의 나눔이 많고 훌륭해도, 거기에 거짓의 영, 속이는 영이 들어오면 그 모든 놀라운 것들이 다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게 잘나가던 많은 교회들이 거짓된 것이 하나 들어오면서 무너지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하나님은 진리이시지만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탄의 이름의 뜻이 바로 ‘거짓말 하는 자’입니다. 처음에 사람이 선악과를 먹도록 꼬이던 때부터 사탄은 거짓말하는 자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안 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뭘 해도 쓸 데 없는 거짓말을 섞어서 농담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데,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얀 거짓말’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나를 가리려고 하는 게 거짓말입니다. 가볍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데, 그 가볍게 한 거짓말에 사탄이 들어붙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거짓말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게 하겠다는 결심을 처음부터 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5-6절)

베드로의 꾸중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나니아가 쓰러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즉각 죽음으로 심판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큰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2절에 보면 그 감춘 것을 아내도 알았다고 했는데, 이 부부의 문제는 전 재산을 안 바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더 깊이 내려가 보면, 결국 ‘내가 하면 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핵심은 내가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필요 없다. 내가 하면 된다. 내가 주인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하면 된다. 하나님이 필요 없고 내가 하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전 재산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온 것은 강요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기뻐서 한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못 했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재산권을 자기가 갖고 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치려고 했다가도 무슨 사정이 생겨서 다 바치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 이렇게 됐습니다. 이것만 바치겠습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결국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해드리고 하나님 앞에 그냥 나갔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돈이 아닙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부자이신 분이 무슨 우리의 푼돈이 필요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주인이냐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를 억압하고 누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하라고 하신 것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그대로만 살면 우리에게 좋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좋고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해가 되는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상숭배나 악한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는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이다. 하나님 필요 없고 내가 알아서 한다.’ 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그리로 못 가도록 막아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한다. 하나님 필요 없고 이 순간에는 내가 주인이다. 하나님도 모르시겠지.’ 하고 나가다가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2. 삽비라의 비극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7절)

이 표현이 참 절묘한데, 2절에서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라고 합니다. 남편이 행한 악한 일, 다시 말해 세상의 악에 대하여, 슬쩍 감추고 거짓된 것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 욕망에 눈먼 사람은 사탄의 먹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몰라도 상관없는 것에는 지식이 해박했는데, 몰라서는 안 될 생명의 법칙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8절)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아나니아가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을 가리키며 이것이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알면서 왜 물어보느냐? 그냥 이야기하지 왜 알면서 모르는 척 마음을 떠보느냐?’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남편이 죽었다고 당연히 아내도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너라도 빨리 회개하고 돌아와라.’ 하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이 하나님의 것을 훔친 다음에 아이 성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당연히 이겨야 할 전투였고 아주 약한 성이었는데도 졌습니다. 그 까닭을 하나님이 알려주셨습니다. 누가 훔쳤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서 범인을 찾게 되었는데, 사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십니까? ‘야, 저기 아간이 훔쳤다. 당장 끌어와라.’라고 알려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지파의 대표가 나와 제비를 뽑습니다. 그랬더니 아간이 속한 유다 지파가 뽑힙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족장들이 다 나와서 뽑으니까 아간이 속한 세라 족속이 뽑힙니다. 세라 족속에 속한 가문의 대표들이 나와서 뽑으니까 아간이 속한 삽디 가문이 뽑힙니다.

하나님이 범인인 아간을 지목하시며 단번에 ‘저 아간 잡아내!’라고 하실 수 있었는데 왜 제비를 뽑게 하셨습니까? 그 과정 자체가 아간에게 회개의 기회였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끝까지 주시는 겁니다. 한 번에 그대로 죽이실 수도 있었는데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아간의 입장에서는 제비뽑기가 계속되면서 점점 자기에게 좁혀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거기 훔친 사람은 자기 밖에 없습니다. 빨리 나와서 용서를 빌면 됩니다. 그런데 자기의 가문의 남자들이 뽑힌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뽑히고 나서야 바른대로 말하가고 해서 말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시치미 떼고 있습니까? 회개하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도 모르겠지’ 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지만 그 상황에 되면 ‘설마, 설마, 하나님이 설마’ 하는 겁니다.

결국 아간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와 함께 공범인 가족들을 돌로 쳐 죽이고 돌무더기를 쌓게 되는데, 그곳을 ‘아골 골짜기’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 ‘아코르’가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괴로움의 골짜기’입니다. 결국 사탄에게 넘어가서 무너진 그의 인생은 괴로움의 골짜기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간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다 잘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었을 삽비라는 아간의 길을 가지 말았어야 하는데, 베드로가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했을 때 즉시 ‘사실은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말로 ‘삽비라’ 그러면 좀 어감이 이상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Sapphira이고 sapphire와 연관되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그런데 이름과는 달리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 생명의 기회를 붙들지 못했습니다. 그냥 거짓으로 대신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역시 또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착각 속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내던졌습니다. 누가 막은 게 아니라 스스로 내던졌습니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간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아간 한 사람이 범죄를 했는데 온 이스라엘이 패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도 단순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개인 문제가 아닌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바나바가 한 일을 잘 알고 자기들도 하고 싶었다면 이들은 요즘 말로 교회의 중직자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리더인 이들이 이렇게 했을 때 전 교회에게 부정적이고 나쁜 영향을 미치며 해가 되는 겁니다. 목회자인 저나 장로님이나 중직자가 이상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개인의 문제로 끝나겠습니까? 온 교회가 뒤집어지는 겁니다. 주님은 이 죄를 정결하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결론을 내립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9-10절)

이것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6절에서도 아나니아가 죽었을 “젊은 사람들”이 메어 나가 장사했는데 삽비라가 죽었을 때도 “젊은 사람들”이 또 메어다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뭔 죄입니까? 갔다 들어왔더니 또 장사지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젊은 사람들, 즉 청년들이 참 귀합니다. 청년들이 이런 굳은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청년들이 많을수록 우리 교회는 참으로 복된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열심히 섬겼던 이 젊은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 욕망을 섬기느라 하나님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삽비라의 생명은 자신이 불러들인 사탄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3절에서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사탄이 역사해서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을 활짝 열어서 ‘사탄아 들어와라’ 했기 때문에 사탄이 역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발적으로 사탄에게 마음을 내어줬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속이게 되었고, 그렇게 됨으로 자기 파멸로 갔습니다.

베드로가 9절에서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함께 꾀하여”, 즉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중 한쪽만 하나님을 속이려 한 게 아니라 함께 꾀하여 하나님을 속이려 했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이 단어에서 ‘심포니(symphony)’가 나왔습니다.

함께 연주하는 게 심포니인데, 지난 번 4장에서 악한 연합을 보았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원수였는데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서로 앙숙인데 예수님을 죽이는 데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로마 사람들과 유대인들도, 유대인들은 독립을 하겠다고 하고 로마 사람들은 억누르는 관계인데 하나가 되어 예수를 죽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러한 악한 연합을 해서 주님을 속이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외부 세력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이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내부 사람이고 신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11절)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한창 부흥하던 초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성도들은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해서 잡혀 들어갔을 때에도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핍박은 함께 기도함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활한 사탄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거짓의 영을 퍼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대전쟁사 같은 것을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이 오랑캐를 막겠다고 세운 것인데, 그랬어도 만리장성을 뚫고 들어와 점령했습니다. 매수해서 그랬습니다. 성을 정말 다 무너뜨리고 들어온 게 아니라, 지키던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성문을 열게 하여 들어와 점령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내부에 거짓의 영을 퍼뜨리려 한 것이 사탄의 작전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굉장히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무서워서 덜덜 떠는 게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리스펙’이 있는데, respect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경외한다’는 말이 바로 respect한다는 말입니다.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존경하면 그 앞에서 함부로 못 합니다. 존경하지 않으니까 함부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더 존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크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3. 종교심이 아니라 참 믿음으로 나아가라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확 죽이신 것은 하나님이 너무 하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물어야 할 질문은 그게 아닙니다. ‘아니, 그래도 어떻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그렇게 죽이시는가? 너무 하시다.’ 하는 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라, 여기서 꼭 자기를 향해 질문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도 똑같은데 나는 왜 안 죽나?’ 이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사실 그들 정도의 열심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 정도 헌신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헌신되어 잘하고 있는데 이 한 가정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죄를 제거하여 정결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정말 순결하고 정결한 공동체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많이 지나서 우리는 너무나 세상과 타협하여 더러운 모습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가정에도, 교회에도 잘못된 모습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때와 똑같이 지금 하시면 여기에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긍휼을 베풀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법칙 중에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형 사고가 가끔 터지는데, 그런 대형 사고가 갑자기 뻥 터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터지기 전에는 반드시 어떤 전조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관련된 수많은 사고와 징조들이 있고, 그런 것이 계속 조금씩 일어나다가 어떤 한 사건으로 크게 폭발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산업 재해가 발생했을 때 아주 크게 다친 사람이 1명 나오면, 그 전에 똑같은 원인으로 가볍게 다친 사람들이 30명 정도, 그리고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정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1:30:300 법칙’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큰 사건은 항상 사소한 것을 방치해놓을 때 발생합니다. 사소한 것이 발생했을 때 잘 파악하고 미리 방지하면 아주 큰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징조가 있는데도 무시하고 괜찮겠지 하며 나아가면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가 난다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음주운전을 했는데 살짝 스친 것 외에는 사고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음주운전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분이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 제가 미국에 이민 와서 대학생일 때 당시 30대 중반 박사과정에 있던 사람이 그것을 자랑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날도 술이 약간 취했는데 “내 특기는 술 먹고 운전하는 거야.”라고 하며 가려고 했습니다. 모셔다드리겠다고 했더니 “에이, 난 특기가 음주운전이니까 괜찮아.”라고 갔습니다. 그 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닙니다. 음주운전을 했는데도 몇 년 동안 사고가 없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입니다. 그렇게 계속 살면 언젠가 뻥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유명한 골프선수 중에 타이거 우즈(Tiger Woods)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몇 년 전에 아주 엄청난 바람둥이였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몰락했습니다. 지금 재기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고 있는데 옛날의 그 엄청난 실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최근에 약간 잘하는 것 같더니 들쭉날쭉 하면서 그냥 평범한 선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야구 좋아하는 분들은 한국의 강정호라는 선수를 아실 겁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Pittsburgh Pirates) 팀 소속으로 메이저리그(Major League)에서 아주 잘했습니다. 그런데 2년 전 시즌이 끝나고 휴가로 한국에 갔다가 음주운전을 해서 잡혔습니다. 그래서 미국 비자가 거부되어 못 들어왔습니다. 바로 몇 주 전에 간신히 풀려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제 실력이 나오겠습니까? 옛날 실력을 찾으려고 굉장히 노력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 전에도 음주운전을 몇 번 했는데, 다행히 누가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기둥에 부딪치고 도망가다 잡혔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조현상이 다 있는 겁니다. 그때 빨리 마음을 잡고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대개 사람들은 조금 해봐도 괜찮으니까 ‘괜찮나 보다. 하나님도 모르시나 보다.’ 하며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안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내부 사람들이었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었고, 그것도 중직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이들이 당시 초대 교회에서 열심히 했는지는 몰라도, 결국 이들이 가졌던 믿음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믿음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의 종교심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종교심과 참 믿음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심은 출발도 끝도 다 ‘자기’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자기가 구도를 하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면 하고, 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겁니다. 자기가 뭔가 하려는 마음이 들면 열심히 찾고, 그런 마음이 안 들면 안 합니다. 그게 종교심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시작도 끝도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비록 나는 지금 별로 하나님을 찾을 기분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먼저 내게 와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먼저 해주신 것에 감사해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먼저 나서서 뭘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주신 것에 감사해서 ‘감사합니다’ 하며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시키시기도 전에 ‘하나님이 뭘 원하시지?’ 하고 미리 알아보며 나아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가진 것은 참 믿음인 줄 알았는데 그냥 종교심에 불과했다는 것을 오늘 보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이 모습이 혹시 나에게는 없습니까? 정말 믿음이 아니라 종교심인데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신데도,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신데도,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분으로 혹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필요할 때는 찾고 필요 없을 때는 내 마음대로 하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종교심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찾기도 전에, 알기도 전에 먼저 나를 아셨고 먼저 나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불러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서 반응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예배는 억지로 교인이니까 어쩔 수 없어서 나와 하는 게 아닙니다. 헌금은 박스가 있으니까 체면상 하거나 교인이니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게 아닙니다.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 그냥 놓아두었으면 저 영원한 멸망으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던 나를, 아니 그리로 가고 있던 나를 붙들어서 저 영원한 천국으로 불러주신 그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서 나와 예배하는 겁니다. 감사해서 헌금도 드리는 겁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봉사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 사랑도 하는 겁니다.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제자의 모습대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참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도행전 강해'(34)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2) (5:3~6)

저작권자 © 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tory

talk

band

blog

기사공유하기 유상섭

베드로는 3절에서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냐』고 물으며 아나니아를 책망했다. 이 말은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침입하여 그 속에 충만했다는 뜻이 아니라, 3절 하반절에 나와있듯이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을 성령에게 거짓말을 하고 땅값의 일부를 착복할 생각으로 가득 채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니아가 사탄이 주는 이러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찼다는 표현은 4장에 두 번 언급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표현의 정반대이다(8, 31). 베드로와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아나니아는 성령과 교회공동체의 생각에 반대된 생각으로 충만했던 것이다.4절에서 베드로는 그가 성령을 속인 행위의 부당성에 대하여 지적한다. 먼저 베드로는 땅이 매매되기 전에도 아나니아의 것, 매매된 후에도 그의 것이었음을 지적한다(4a). 이 지적은 땅이 전적으로 아나니아의 개인적인 권한에 따라 처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가 땅을 판 후에 땅값의 일부를 착복한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에 따라 행한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 속아서 그릇되게 행한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신자는 성령의 내주함을 받는 자인데 성령의 내주함을 받은 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아니하고 사탄이 주는 생각으로 충만하여 그의 유혹을 받아 땅값의 일부를 착복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계신 성령의 절대적인 주권을 도전한 심각한 죄가 아닐 수 없다. 『네가 사람들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는 베드로의 책망은 이점을 보여준다. 아나니아가 성령의 인도를 중도에 거절하고 사탄의 유혹적인 인도를 택한 것은 성령 하나님을 기만하고 속인 죄다.아나니아는 이러한 책망의 말씀을 듣는 때에 엎드러지고 나서는 곧 목숨이 끊어졌다(5). 사도 베드로가 한 것은 책망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가 쓰러져 즉사한 것은 단순한 심장마비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에 따른 죽음으로밖에 볼 수 없다. 더욱이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하여 사람들이 들었을 때에 크게 두려워한 것은 그들이 이 사건을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5b). 저자가 큰 두려움이 온 교회와 이 사건에 대하여 들은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11절에서 다시 기록한 것은 이 사건을 통하여 교회가 큰 교훈을 얻게된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나니아가 죽었을 때 교회의 청년들은 그를 아나니아를 천으로 싸서 들고 나가서 즉시 매장을 했다(6). 왜 아나니아가 죽은 사실을 그의 아내에게 통보하지 않고 즉시 장례를 치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너무 장례를 성급하게 치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장례 관습은 사람이 죽은 지 24시간 내에 매장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자살한 사람, 국가 반역자, 출교된 자, 배도자, 범법자와 같은 사람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분명할 경우에는 유대인들은 지체없이 적절한 장례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시신을 매장했다. 따라서 아나니아의 즉각적인 매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죽음의 경우에 해당 가족에게 통보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즉각적인 진노로 죽어 장사지냄 바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아내에게 통보되었다면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점에서 삽비라가 되어진 일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삽비라와 관련된 이야기 전개에 필수적이다.유상섭(총신대신대원)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여호수아 7:1, 25~26, 사도행전 5:1~11

1. 들어가는 말

성령은 초대 교회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끈이었습니다. 초대 교회공동체에서는 성령 안에서 많은 신도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나바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그 판 돈을 헌금했습니다. 이 이야기 뒤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는 바나바의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겉보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교회공동체 내의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마음에서 다른 신도들처럼 교회에 헌금을 하기로 자원했는데, 바나바는 약속대로 헌금을 해서 칭찬을 받은 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약속대로 헌금을 다 드리지 않고 성령을 속임으로써 같은 날 하나님께 벌을 받아 모두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헌금을 하면 복을 받고, 그것도 헌금을 많이 하면 그만큼 더 많은 복을 받고, 헌금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의 아간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합니다. 아나니아와 마찬가지로 아간도 주님께 속한 것을 몰래 감추어 두었다가, 그 일 때문에 죽음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아간의 이야기와 다른 점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전리품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헌금한 돈이라는 점과 아나니아가 아간처럼 공동체 구성원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탄핵에 의해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게 한 이유를 통해서 교회공동체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성령을 속이는 것이 초래한 주님의 심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2.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이유

초대 교회공동체의 많은 신도는 모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유했습니다. 공동 소유는 ‘굴욕적 가난’과 ‘과도한 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각자의 형편에 맞게 헌금하면, 주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주님은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공동체에서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와 헌금했습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금하는 이유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 그리스도가 그들의 주로서 곧 다시 오실 것으로 그들이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들이 모든 가치가 뒤바뀌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이 값진 진주로 비유되는 하나님 나라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서 가진 것을 다 팔 수 있었습니다(마 13:45~46). 이렇게 해서 그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을 다 파는 것은 교회공동체의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주라(신 15:11)는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라(신 15:4~5)는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헌금은 형제들의 궁핍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돌리도록 만들었습니다(고후 9:12). 믿는 사람들 모두가 무엇이든 공유하면서, 멋진 화합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 팔아 공동 자원으로 이용하면서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웠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 집에서 식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그들의 하루 일과였습니다. 식사 때마다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축제였습니다. 주님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더하셔서 날마다 그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행 2:44~45).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로써 믿음의 동기가 부족한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자극을 받고, 기독교인의 삶에 헌신하도록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복음의 기쁜 소식은 그들의 헌신을 통해 또 다른 이웃에게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고전 6:10).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아간과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탐욕의 파괴적 속성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하는 이야기가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입니다.

3.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이유

아니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교회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성장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아내 삽비라와 공모하여 땅을 판 돈의 일부를 몰래 자기 몫으로 챙겨두고는, 나머지를 사도들에게 가져와 헌금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사람보다 자신들이 교회공동체에 더 헌신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기 소유의 재산 중 일부를 팔았고 그 판 돈의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헌금했습니다. 사실 아나니아가 판 재산은 작은 규모의 땅이며, 바나바가 헌금한 큰 규모의 밭과 구별됩니다. 바나바와는 달리 삭개오가 재산을 모두 바치지 않고 자신의 재산의 반만 바친 것처럼 재산을 모두 바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헌금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나니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물 중에서 일부를 바치면서도 그것을 다 바치지 않고 성령과 사도들을 속이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을 속였다는 사실입니다. 아나니아가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은 사탄이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 공동체의 대변인으로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질문합니다. 베드로의 질문은 아나니아가 숨기고 있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아나니아야, 네가 어찌하여 사탄에게 넘어가 성령께 거짓말하고 땅값의 일부를 몰래 떼어 두었느냐? 그 땅은 팔기 전에도 네 것이었고 판 뒤에도 네 것이어서, 그 돈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네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속임수를 썼느냐? 너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만 있고 아나니아의 대답은 없습니다. 아나니아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어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너희가 땅을 팔고 받은 돈이 이것이냐?” 삽비라가 대답했습니다. “예, 그 돈입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너희가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대적하다니 이 무슨 일이냐? 네 남편을 묻고 온 사람들이 집 앞에 있으니, 다음은 네 차례다.” 베드로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삽비라도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던 질문을 삽비라에게 던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는 다르게 삽비라에게는 소명할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은 삽비라에게 소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삽비라가 남편 아나니아와 공범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과연 땅을 판 돈의 일부를 몰래 자기 몫으로 챙긴 죄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 자리에서 죽게 만드는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이 저지른 죄에 비해 지나치게 과도한 벌은 아닌가라는 물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참한 죽음은 탐욕을 부리는 것의 종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탐욕을 부리는 것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탐욕이 사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이는 행동을 했습니다. 성령을 속이는 행위는 교회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서둘러 그러한 행위를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은 그렇게 매서웠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는 사탄이 하는 일이며, 성령을 속이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죄는 은밀한 죄 혹은 개인적인 죄 같지만, 실제로는 교회공동체를 파괴하는 공적인 죄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아니니아와 삽비라의 행위를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안겼던 아간의 행위와 같은 자리에 놓았습니다. 아간은 주님께 바쳐야 할 물건 가운데 일부를 취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습니다(수 7:1).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연전연패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이 지키라고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주님이 금지한 전리품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또 전리품을 훔치고서는 그들이 한 짓을 은폐하려고 그 훔친 것을 그들의 살림과 함께 감추어 두었다는 것입니다(수 7:11). 여호수아는 그 죄의 근원이었던 아간을 찾아냈습니다. 온 이스라엘은 아간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제야 주님은 맹렬한 진노를 거두셨습니다(수 7:26). 같은 방법으로 베드로는 죄의 근원이었던 아나니아를 찾아내고, 그를 그 자리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아간과 아나니아의 탐욕을 그대로 두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적과의 싸움에서 계속 패배하고, 교회공동체는 붕괴되기 때문에 아간의 죽음의 벌과 유사한 죽음의 벌을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일지는 모르지만, 이들의 비참한 죽음을 성서에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간 그리고 아니니아와 삽비라의 비참한 죽음의 원인은 그들 마음속에 사탄이 가득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탐욕과 탐욕을 감추는 위선이 교회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도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4. 나오는 말

누가는 교회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소유의 나눔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는 소유의 나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니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사도행전 속에 삽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소유를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탐욕이 부른 참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이 땅에서 편안히 사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 편안히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세상과 재물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마음 가까이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주님의 영광을 그 아래에 둡니다. 주님에 대한 헌신은 세상과 육신을 만족시키다 남은 자투리 시간에 합니다. 그들이 그나마 미적지근하게라도 신앙을 붙들고 있는 것은 훗날 주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간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모습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고, 우리의 귀가 꽉 막혀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주님의 명령을 전해 들었지만 명령을 지키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 마음을 두고 육신을 쫓아 살더라도 주님이 용서하시고 의인으로 삼으실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아간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주님께 바쳐야 할 물질의 일부를 훔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유를 나누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부족한 필요를 채워주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께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입니다(고후 9:12). 우리는 인색하게 심는 사람은 적은 곡식을 거두고, 아낌없이 심는 사람은 풍성한 곡식을 거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베푸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고후 9:6~7).

그리스도인은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온갖 탐욕에 맞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앞세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나바처럼 헌신은 공동체를 살리고, 아간과 아나니아처럼 탐욕은 개인의 몰락과 공동체의 붕괴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에 요구되는 것은 탐욕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헌신입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3:5).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지 않으면

완전한 자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탐욕스럽고 근심하고 불안한 사람,

사치를 추구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다 족쇄를 찬 사람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모두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안식을 찾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5:1-11

어떤 사람이 챨스 스펄전 목사에게 찾아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완전한 교회를 찾는데 도와 주십시오.”

스펄전 목사, “만약 내가 그런 교회를 찾는다면, 내가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내가 그 교회에 들어가면, 그 교회는 더 이상 완전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 땅 위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도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우리의 모델 교회입니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말 그대로 이상적인 교회이요, 모든 교회의 모델이 되는 교회이지만, 그 교회도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 교회가 내부에서 만나는 첫 번째,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도행전에서 첫 번째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고,

삽비라는 아람어로, ‘아름답다’는 뜻을 갖고 있는 이름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과 반대되는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바로 앞 본문에 나오는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고,

바나바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그 값을 모두 교회에 헌납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두 사람은 바나바가 한 일을 보고,

“우리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판 값 모두를 헌납하지 않고, 그 중에 일부는 몰래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사도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루에 저주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사도행전 5:1-11, 이 본문은 중요하지만, 설교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해 왔습니다.

20세기 위대한 설교가 Charles Spurgeon의 설교집 60권에도, 이 본문으로 한 설교는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갑작스럽게, 수치스럽게, 저주를 받은 것처럼 죽었는데,

이러한 죽음은, 사랑의 하나님, 그리고 사랑을 실천해야 할 교회라는 개념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렇게 심판하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극을 대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그렇게 했을까?

그리고, 하나님은 왜? 그렇게 냉혹하게 심판하셨을까?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받아야할까요?

1.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왜? 그렇게 했을까요?

* 교회의 insider 가 되고 싶었을까?

* 베드로와 다른 교회지도자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고 싶었을까?

* 군중심리에 이끌렸을까?

* 사람들의 찬사, 칭찬, 인정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그 정도로 중요했기 때문이었을까?

* 그래서 그들 사이에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을까?

* 최악의 시나리오인데, 교회 안에 있는 권력 구조 power structure의 상부로 상승하고 싶었을까? 종교적 신분상승을 바랬을까?

우리는 이 모든 동기가 아나니와 삽비라에게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이 두 사람이 바나바를 따르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나바가 교회로부터 받는 인정과 존경을 보고는 결정합니다.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고, 또 긍정적인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동기가 복잡했던 것입니다.

재산을 판 돈이 자기들의 손에 있을 때, 자기들의 처음 생각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과거의 생활의 습관, 사고의 습관을 순식간에 청산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있는 베드로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불안한 눈빛과 무엇인가 감추는 마음이 완전히 감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모든 재산을 팔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부만 헌금해도 됩니다.

아나니아는 자기의 돈과 소유를 갖고, 자기가 마음대로 써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부부가 재산을 모두 팔아서 모두 헌납했다고 생각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소유를 팔아서 내어 놓는 것이, 법칙이거나 원칙이 아니었고, 또 강제사항도 아니었습니다.

사탄이 아나이아와 삽비라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교회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었던 욕망이었습니다.

교회가 바나바를 존경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러한 존경과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한 것을 그대로 하지는 않고, 그가 받는 존경을 시기했고, 그래서 자기들도 받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위장된 경건이고, pious pretense

종교적 위선입니다. religious sham

거룩을 시물레이선한 것입니다(simulated holiness)

크리스챤의 사기극이고 Christian fraud

영적 기만입니다. spiritual deception

한 번 범한 죄가 죄책감을 낳고,

그 죄책감이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만들고,

증폭된 죄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만듭니다.

사도행전 교회의 첫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위선자의 비극!

레위기 10:1-5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모세가 아론의 아자비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 밖으로 메어 가라 하매 그들이 나아와 모세의 명대로 그들을 옷 입은채 진 밖으로 메어 내니…

, “주 앞에서 죽었다”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장례를 치르는 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맞아 죽은 사람의 장례는 신속하게, 조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애곡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살, 반역죄, 추방, 배교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2.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과연,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장례를 치러야 할 정도의 심각한 죄이었다는 말씀입니까?

본문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은, 일상적인 거짓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영성보다 더 거룩하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헌신보다, 더 깊은 헌신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습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영성보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더 거룩하게, 더 영적인 것으로 볼 때에는,

우리가 아나니아의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더 거룩하게 보도록,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나니아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기만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고, 그러한 인상을 남기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훈련을 많이 받지도 않았는데, 영적인 훈련을 충분히 받은 것처럼 행동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를 영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설교자, 또는 목회자가 하나님께 더 깊이 헌신하고, 그리스도의 성품까지 성숙하라고 말할 때, 나는 이미 그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또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바로 아나니아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영적인 기만은 하나님께 사악한 일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속이는 것은, 우리는 그들에게뿐만 아니라, 주님께 속이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죄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은 돈의 일부를 감춘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교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성령님께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5:11에는 사도행전에 23번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 ekklesia 가 처음 나오는 장소입니다.

사울/바울은 나중에 고백했는데, 자기가 교회를 핍박한 것은, 곧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행9:4)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거룩한 가면을 쓰지 말라.

2.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혹했을까요?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pivotal time이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려고 했던 일, 그 방법은 복음의 방법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방치하면, 앞으로 교회가 가야 하는 여정에 치명적인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시점에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등장하는 아간이 그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수7: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아나니아가 그 값의 얼마를 “감추었다”고 했을 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nosphizp”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 단 두 번 나옵니다.

여기와, 디도서 2:10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단어는 여호수아 7:1, 아간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서, 칠십인역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사용했음이 분명합니다.

여호수아 7:1에서, 아간은, “온전히 바친 물건”을 훔친 죄를 범했고,

이 범죄행위에 대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은 모두 진멸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헤렘’ herem 사상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나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가축들은,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었습니다.

이것을 그 어떤 누구도 위반해서는 않됩니다.

그런데, 아간이 바로 그것을 위반했습니다.

즉, 헤렘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아간과 그 가족은 레위기 10장 1-5에 기록된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 7장은,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간의 범죄를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5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함께, 그리고 성령의 강림과 함께, 교회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를 방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적 기만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 악한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큽니다.

교회의 역사를 부패시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영적 기만에 대하여,

묵인하고 넘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3.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로부터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3절, 베드로가 한 말 가운데,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고 했습니다.

(1)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하여, 아나니아의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행동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채웠다는 것(filling)과, 사탄이 그를 소유했다는 것(demon-possession)은 다릅니다.

사탄의 주요 활동 무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탄이 사람의 마음을 채웠다는 것은,

사탄이 사람을 억누른다(domonic oppression)

사탄이 사람을 괴롭히다(demonic affliction)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demon-possession은 사탄이 사람을 완전히 소유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demon oppression 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고와 행동의 결과에 대하여 눈이 멀게 하고, 그 사고와 행동에 집착하여 obsessed 되어, 결국 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2)그러나, 사탄의 행동이 아나니아에게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4절에서 아나니아의 행동에 책임을 묻습니다.

(3) 베드로도 사탄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눅22:31, 예수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베드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이렇게 경고합니다.

벧전5:8,

“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욕망에 붙잡히면 obsessed,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되고,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거짓 행복에 목숨, 가족, 사역, 명예를 걸게 됩니다.

잠7:22-23,

“22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23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

4. 우리는 이러한 공격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아나니아는 이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님, 그리고 믿음의 형제 여러분, 삽비라와 저는 모든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내어 놓기로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우리를 위하여 따로 떼어놓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나바가 한 것처럼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은, 우리가 이 정도로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느꼈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믿음이고, 진정한 용기입니다.

진실한 마음에 사탄이 틈타지 못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합당치 않은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진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자는”, “온유하는 자는”, “의에 주리고 배고픈 자는”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나아가면서,

하나님께 있는 그대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입니다.

are united in not hiding their helplessness and in accepting their need for God.

이것이 은혜입니다.

은혜의 반대는 자기 의 입니다.

내가 나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사랑과 칭찬을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하지 않은 것까지, 나의 모습이 아닌 것까지 사용해서,

나의 의를 과장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닌 것을 우리의 옷 삼아 입고, 우리가 하지 않은 것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지요.

진실하지 않으면, 코이노니아를 깹니다.

요일1:7,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

거짓은 치명적인 암입니다. 교회의 몸을 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내가 아닌 다른 모습을 내어 보이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으려 하지는 않습니까?

영적 기만이라는 죄를 은연중에 범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 중에서, 일부를 몰래 감추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기가 두려워서,

나를 더 거룩하게, 더 영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나를 더 영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교회 앞에, 그래서, 성령님 앞에,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요일 1:8-9,

“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십자가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죽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 은혜를 다시 기억합니다.

주님의 찢겨진 살, 주님의 피를 기억합니다

주께로 나아오는 큰 무리사도행전 5:12-16

우리는 지난주 본문을 통하여 교회를 이용하여 자기 욕심을 채우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소멸하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사건 이후 에 교회가 어떻게 변화 되고 있는지를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행5:13-14)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그 사건 이후에 교회가 더욱 부흥되어 가는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의 자비가 회복 되었습니다.

(행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복음의 능력은 자비와 은총의 능력입니다. 아나니아의 사건을 통하여 초대교회는 잠시 이능력이 유보 되었지만 죄악이 물러가고 부정함이 제거되자 생명의 은총이 다시금 임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비의 은총은 청결을 유지할 때 생겨 나게 됩니다. 모든 죄악이 소멸되고 성결이 유지될 때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은총의 회복은 사람들의 신앙을 담대하게 만들었습니다.

(행5:12)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들은 핍박의 장소나 대적들의 감시를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러한 환란을 이겨내도록 한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이 주는 어떠한 환난에도 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연함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가능하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역에 불평을 토하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때문에 교회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불평이나 의구심도 존재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더욱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장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명의 목숨이 끊어 졌다는 것에 역점을 두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교회의 청결유지를 더욱 중요 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넷째. 사도들과 성도들이 백성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의롭고 진실한 행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의로운 행실만큼 좋은 전도는 없습니다. 성도의 옳은 행위 만큼 능력있는 전도는 없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행실이 불신자들에게 인정 받을만하고 그들에게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때에 우리의 증거가 어두움에 비취는 생명의 빛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다섯째. 교회가 더욱 크게 부흥 되었습니다.

1)많은 사람이 주께로 나아 왔습니다.

교회가 가진 가장 큰 사명은 주의 나라의 확장입니다.이 땅위에 하나님의 법에 의해 통제받고 다스려 지는 그의 나라를 확장 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를 인정한며 그의 계명을 받아 들이는 성도의 무리를 확장 시켜 가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에는 이러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자라나고 움직이며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교회 이러한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해 가는 참된교회입니다.

2)부흥하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 납니다.

사도들의 행한 능력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었습니다. 환자위에 덮이는 베드로의 그림자 만으로도 기적이 일어 났습니다. 이러한 능력이 초대 교회를 더욱 부흥케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은 인간의 지혜나 방법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요 사역인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의 역사가 드러날 때 비로소 교회는 크게 일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교회를 부흥 시키겠다는 망상을 버리고 모든 것을 주께 맡기며 기도 하는 일과 그의 명령대로 겸손히 순종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교회는 어떠한 악의 사술도 교회를 무너 뜨릴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고서 살아가는 자로서 우리는 어느 위치에 서야 하겠습니까? 교회를 근심케 하는 자의 자리에 설수도 있습니다. 핍박자의 자리에 설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복된 성도들은 더욱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어 지고 교회와 가정과 이웃이 축복 받는 더욱더 왕성케 되는 귀한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십일조 교훈 맞는가?

몇 일 전이었다. 모 방송국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십일조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필자는 그 설교를 들으면서 매우 화가 났다.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하나님께 약속을 안 지켜서’ 당한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당시 세계가 로마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다면 현재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의해 세계가 갈등과 분노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강자의 논리가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는 성령의 역사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필자는 여기서 그 당시 시대와 지금 시대가 중첩되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그 거대한 권력에 기대어 약자를 짓밟고 자기들의 권력을 얻으려 하고 또 그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 역시 이 시대의 아나니아가 아닐까?

당시의 로마는 세계의 중심 국가로서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세계는 로마를 통해 시작됐고 로마야말로 진정한 강자, 영원한 강자임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맹수와 같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확장해 나갔다. 로마는 힘에 의해 지배하려는, 그리고 ‘강한 자’를 숭배하는 ‘팍스 로마나’국가였다. 그리고 철저한 물신숭배 국가였다.

로마는 또한 식민지 국가들의 정신적 지주로 자처했다. 이스라엘 역시 세계 지배자인 로마의 영향력에서 비켜갈 수는 없었다. 이스라엘의 지배층은 로마의 폭압과 회유책에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었고, 로마에 빌붙어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의 피를 빨아 로마에 바쳤다.

자만과 오만의 국가, 물신 국가였던 로마에서는 과부와 고아, 소외된 자들이 쉴 만한 여지가 없었다. 전쟁 영웅들을 기리는 궁전들이 여기저기 건축되었으나 가난한 자들이 쉴만한 집이 없는 국가였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 그러나 탐욕과 유물론적 사고가 팍스로마나와 그의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팍스로마나를 넘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은 이전의 어떤 운동과도 비교할 수 없는 폭발력과 질적 변화를 초래한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식민지 국가로서 예루살렘과 이방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팍스로마나의 세계관을 뒤집는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오순절 사건으로 예루살렘의 작은 도시에는 하루만에 수천 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이적이 나타나고 있었다.

성서는 이 놀라운 이적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유무상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행2:44~45)고 하였으며, 또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4:35~36)”라고 그 감동을 전하고 있다.

팍스로마나가 강자에 의한, 강자를 위한 세계 질서라면 오순절의 역사는 디아코니아의 역사적 실현이라는데 우리의 희망이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야심가였다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사탄에게 홀려서,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얼마를 몰래 떼어 놓았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숨졌다.(행5:3~5)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급사한 이 사건은 말라기서와 더불어 십일조를 떼어먹었을 때 나타나는 재앙으로 종종 인용되는 성서구절이다. 십일조, 곧 하나님께 바치기로 약속한 물질을 자기의 것처럼 사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성서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죄를 범하였으나 회개를 통해 전보다 더 복을 누리는 장면들을 보게된다. 구약에 있어서 아브라함이나 다윗,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선 급작스런 죽음 외에 명확한 사유를 알 수가 없다.

사실 이 구절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 죄에 비해 징벌이 너무 크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베드로의 경우 예수께서 그의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 말씀하실 정도로 복을 받은 인물이었지만 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을 달리하실 때까지 그는 배반과 의심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무엇인가 다른 이유로 그들 부부가 급사를 당한 것이 아닐까?

요즘 설교 식으로 ‘십일조 떼어먹어 급사한 것’라면 어느 누구도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잘 순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하루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그 시대의 범부들에게는 그럴 능력도 없었고 공동체의 지도자 역시 십일조를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와 공동체내의 특별한 정황을 살펴보지 않고, 단순히 ‘십일조 잘하라는 교훈’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문자적 해석이다.

사도행전 4장 36~3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로부터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 요셉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그리고 5장 1~2절에는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소유를 팔아서, 그 값의 얼마를 따로 떼어놓았는데, 그의 아내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떼고 난 나머지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 두 절을 비교해보면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상당한 평판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짐작 할 수 있다. 성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속였다고 했는데, 그들이 마음에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당히 큰 재산을 바치는 댓가로 명예를 얻어 교회 내에서 지도자적 위치에 오르기를 희망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바나바를 모델로 삼아 교회 내 영향력 넗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지도자들이 성령에 감화 받아 자신들의 전 재산을 헌납하는 모습을 야심으로 가득 찬 그들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야심을 이루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분명 “십일조 잘하거나 약속 지키기”의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건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다. 내고 싶지 않으면 내지 않아도 되었다.(행5:4)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야심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 내에서 지도자 행세를 하기 위해 자기의 재산을 이용했다. 그들은 재산을 팔아 고아와 과부를 섬기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환심을 사는 것이었다.

팍스로마나의 시대, 가난한 자들이 암울한 현실 앞에 희망을 찾을 수 없던 시대에, 예수 공동체는 ‘불의 혀들’처럼 타올랐다. 성령운동에 동참한 자들은 봉사와 섬김으로 팍스로마나를 걷어 내기 위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예수의 약속대로 새로운 세계관의 진원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걸음을 방해한 자들이었다. 거룩한 공동체를 권력화하고 재물로 얻으려 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죽음 이전에 수없이 많은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들풀처럼 퍼져나가는데, 그들은 회개가 아니라 권력의 야망을 붙들고 있었다.

[ 거짓말 ]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이유 (행5:1~11)

아나니아가 죽은 이유 (사도행전 5장 1-11절)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많은 무리가 교회에 더해졌다. 그들 가운데 밭과 집을 판 돈을 사도들 앞에 내놓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판 돈 중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사도들 앞에 내놓았다. 베드로가 “땅 판 것이 이게 다냐?”라고 묻자 아나니아는 “예”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하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떤 마음으로 땅을 팔았고, 왜 땅값 중 얼마를 감추었을까? 그리고 이것은 왜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그 당시 교회 일을 하고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많은 물질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헌금을 드렸다. 사도행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6~37) 하며 바나바가 밭을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둔 것을 온 교회가 알게 되었다.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 분위기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니까 그들도 헌금을 드리려 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없으니까 결국 땅을 팔아서 그 값의 반쯤 더 되게 교회에 갖다 주고 나머지는 어려울 때 쓰자며 감추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땅 판 값이 이게 전부냐?”라고 물었을 때 “좀 남았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예, 이게 전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대상은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사람에게 인정받고 ‘내가 했다’는 것을 나타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린 헌금은 바람직한 헌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도 되고 팔지 않아도 되는데 왜 땅값 얼마를 숨기고 거짓말해야 했을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중요시 여긴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 그 값을 교회에 드리고도 저주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될 수 있다. 주님을 생각하기보다 자기 체면이나 자기 위치를 인정받으려는 쪽으로 마음이 흘러가게 된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오늘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할 사실은 우리 생각으로 흘러가면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간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길로 가면 우리 인생 속에 어려움이나 절망할 일이 있어도 그 문제를 주님이 넉넉히 해결해 주신다. 다윗은 시글락이 불탔을 때 울 기력이 없도록 울다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따라가면 미치겠습니까?’ ‘따라가라. 정녕 미치고 도로 찾으리라.’ 그 말씀을 듣고 소망이 생긴 다윗은 그냥 앉아서 낙심하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쫓아가서 아내와 자식, 재물을 도로 찾는 영광을 얻었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아나니아 와 삽비라

다음은 Bing에서 아나니아 와 삽비라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 생명의말씀
  • 말씀
  • Church
  • 교회
  • 설교
  • CTS
  • 기독교
  • 목사
  • 주일예배
  • 주일설교
  • 주일
  • 기독교텔레비전
  • 복음
  • 기독교TV
  • 기독교방송
  • 기독교채널
  • 은혜로운 설교
  • 예배
  • 은혜로운
  • 한국교회
  • bible
  • 크리스천
  • 짧은설교
  • 짧은
  • 말씀노트
  • 짧은 설교
  • 짧지만
  • 강력한
  • 만나교회
  • 만나교회 김병삼
  • 김병삼목사
  • 아나니아
  • 삽비라
  • 인정받고싶은
  • 감정
  • 인정받는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YouTube에서 아나니아 와 삽비라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 아나니아 와 삽비라,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See also  Tusz Do Drukarki Hp 3639 | Replacing The Ink Cartridge | Hp Deskjet 3634 Printer | @Hpsupport 인기 답변 업데이트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