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 와 예수님 |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거듭남에 대하여 | 조정민목사 44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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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노트 p.117] 요한복음 3장 1~7절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Audio Source: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 (요한복음 3_1-8)_주일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목사_20160501
https://youtu.be/jlJ4-E_8fQM
(오디오 소스는 교회 측의 허가를 받고 사용되었고, 본 영상의 광고는 해당 교회와 무관합니다)

#니고데모 #거듭남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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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해야 할 말씀,
기억해야 할 말씀,
기도해야 할 말씀,
차곡 차곡 모아서 계속 나눕니다!
@2021 말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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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나오는 성령으로 거듭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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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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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 03:1-15) – 목회자료 – 기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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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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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예수님 말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거듭남(요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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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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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_요한복음 3장 – bible and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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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니고데모 와 예수님

  • Author: 말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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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5.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T35q-gswcQ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나오는 성령으로 거듭남 (1)



한 밤 중에 예수님께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니고데모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나오는 성령으로 거듭남 (1)





니고데모는 유대의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서 당시 유대 사회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층에 속한 신실한 유대인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이 때 예수님과 나눈 유명한 대화가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되고 있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거듭남’ 즉 ‘중생’에 대한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내가 너에게 진리를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이가 든 어른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사람이 다시 어머니 배 속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사람은 육체적으로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대답하시자, 니고데모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선생인 네가 거듭남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의아해 하십니다.



인류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드(Mircea Eliade)에 의하면 거듭남은 원시시대로부터 있어왔던 인간이 이 세상을 초월하는 일상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원시 사회의 사람들은 인간이 자연적으로 태어난 상태를 전혀 완결된 상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좀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처음 태어난 자연적인 삶은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원시인들은 자연적인 상태로 태어난 삶을 없애고, 다른 차원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의식을 일상적으로 거행하였습니다. 이런 의식들을 보통 통과의례라고 부르는데, 남자 아이나 여자 아이가 어른이 되면, 부족의 정식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성인식 또는 입문식은 거듭남을 만들어내는 통과의례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통과의식에서 죽음은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통과의식이었습니다. 즉 죽음은 비본질적이고, 세속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죽고, 성스럽고 고차원적인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최고 종교 지도자 그룹에 속했던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해서 어린아이처럼 답하며,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의아해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못 박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인해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육체는 죽게 되고, 성령으로 다시 살기 시작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육체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대속과 함께 죽은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우리를 율법이 더 이상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이 정죄하는 세계에서 벗어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났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을 때에, 그 분의 죽음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에 이르는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힌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서 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죽음에 참여하였다면, 그 분과 연합하여 그 분의 부활에도 참여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이 무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은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날 것도 믿습니다. (롬 6:3-8)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대신 사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방법은 성령께서 나에게 오셔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이는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대로 육적으로 부모에게서 태어난 존재는 죽고, 영적으로 성령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가는 신비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니고데모와의 대화 (요 03:1-15)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대화의 말씀이 열 한 번 나타나고 있으며 그 중 에 첫째가 본문에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 사용되어 있는 말은 단순하나 여기 표현되어 있는 사상은 극히 심오합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 버나드는 이 기사가 예수님의 생의 초기나 중기가 아니고, 즉 첫 대화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전에 둔 시기에 속하는 대화일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2절 말씀에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구절은 예수님의 하반기의 박해 때문에 밤에 숨어서 예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대화의 시기는 접어두고 밤에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중생에 대한 대화를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1절에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의 정복자, 백성의 승리자라는 뜻으로 공관복음에는 기록이 없고 요한복음에 세 차례(본 문, 7:50, 19:39) 출현합니다. 니고데모는 이 구절들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전통적인 종교가였습니다. 십일조를 꼭 드리고,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의식을 꼭 드리는 자였습니다. 둘째,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그 위치는 유대에 칠십인 공회 산헤드린의 회원이었습니다. 이 직책은 아주 권세있는 자리입니다. 셋째, 10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를 알지 못하느냐”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백성의 랍비였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실로 모든 조건을 갖춘 유망한 사람이며, 국민이 부러워하는 교양있고 사색 깊은 유대인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넷째, 니고데모는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에 예수님을 찾았다고 한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믿기는 믿으나 밤에 찾아오는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빌라도는 그의 신분 때문에 그리스도와 적이 되었고 니고데모는 그의 높은 신분 때문에 예수님을 신앙하되 소극적 신앙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다섯째,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철저했습니다. 2절 말씀에 “랍비여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 니이다.” 니고데모의 이 고백은 예수님의 출처가 하나님에게서부터이며 예수님의 지상 활동이 하나님으로서의 활동을 하시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같이 니고데모는 우리와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훌륭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니고데모는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니고데모에 대한 태도는 매우 냉담하였습니다. 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니고데모의 질문에 쐐기를 박았던 것은 바로 이 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중심을 보시고 대답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지상의 메시야 왕국을 촛점으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 세계, 가변적인 세계가 아닌 거듭나야 하는 신령한 세계인 것입니다.

2.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중심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 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차알스 스퍼전이 목자의 자성이라는 제목으로 했던 유명한 설교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가 되려고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아야 하고, 또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거듭나지 못 한 사람의 설교는 아무리 다른 것을 많이 안다고 하여도 그 설교는 은혜 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19세기 때의 교역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시대나, 어떤 나라나, 어떤 교역자에게나 다 필요한 말씀인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장로에게도 필요하고, 집사에게도 필요하고, 권찰에게도 필요하고, 주일학교 반사에게도 필요한, 모든 믿는 자에게는 제일 중요한 말인줄 믿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씀에 거듭난다는 말씀은 원어로 “위에서 난다,” “위에서 처음부터”라는 뜻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영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깨닫기 어려운 영적인 일이라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신비한 것이라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우주는 신비한 것입니다. 우리 생의 백년 미만의 시간 속에서 우주를 볼 때에 단조롭고 신비하지 않으나 우리의 한계점인 백년을 넘어서 영원에서 볼 때에는 우주의 생성 소멸의 과정,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하기만 한 것 입니다. 중생도 신비한 것입니다. 이 신비한 중생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습니까? 길 가던 어떤 분에게 “거듭났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모르시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이 중생의 경험은 어떤 분은 갑자기 오기도 하고, 어떤 분은 시일이 요구해서 천천히 거듭나서 자신도 모르는 분이 있습니다. 중생의 모양은 이처럼 여러 가지 말씀으로 드릴수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에 주님을 의지하여 가슴치며 통회의 회개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세째,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 으셔야 합니다. 다른 건 염려없습니다. 내 생활 중심이 그리스도께서 지시 하신대로 산다면 중생의 삶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것 같으나 거듭난 자에게는 쉽습니다. 그러나 중생이 되지 못한 자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일른지도 모릅니다. 결국 중생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며 주님을 모시는 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예수님께서는 거듭나는 조건으로써 물과 성령으로 다시 거듭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물이라는 것은 물 세례를 말하는 것이라고 어거스틴, 크리소스토무스, 웨스트콧과 중세기의 버나드는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물이라는 것은 단순히 물세례 의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인 물로 세례를 주는 과정에 있었던 신앙고백을 토대로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물에 대해서 더 깊이 문제를 파헤친 사람은 존 칼빈입니다. 칼빈은 본문의 물을 성령이라고 보아 본문 말씀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이중으로 강조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칼빈은 물을 성령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성 령의 역할은 회개와 죄사함으로 봅니다. 또한 후자의 성령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성령의 역사의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죄 회개와 죄 사함의 물의 성령의 역사와 예수님을 주로 받아 모시는 성령의 역사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깊은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8절의 말씀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헬라어로 본문은 바람을 「프뉴마」라 기록했는데 바람과 성령은 같은 낱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람을 「루아하」라 하여 역시 성령과 같은 날말로 사용합니다. 이 원어 「프뉴마」 라는 단어는 신약에 370회 나타납니다.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 성령으로 번역되었으나 바람이라는 날말로 번역 하기는 본문과 히 1:7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설교를 자연을 보면서 비유를 들어 하시는 예가 많습니다. 들에 피는 백합. 샤론의 장미꽃, 공중의 새를 보라 등등 여기 바람이라고 설교를 하시는 것도 이처럼 자연의 현상을 비유한 것입니다. 바람과 성령의 같은 점 무엇입니까? 첫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점입니다. 즉 행 8:39에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물로 세례 준 이후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 하니라”하신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흔연히 거동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는 바람처럼 사람의 계획을 초월해서 언제 어떻게 역사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령 자체는 보지지 않으면서 그 역산의 표적은 보이는 것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째, 인간의 의지로 바람을 좌우할 수 없듯이 성령도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흥회를 매번 좇으면서 신비 체험을 하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은 결코 누구의 점유물이 아닙니다. 13절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니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인자란 말은 주로 예수님이 자기에 대하여 표현한 말입니다. 마태 32회, 마가 15회, 누가 25회, 요한 12회 등 모두 4복음서에 84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나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인자라고 부른 예는 3회 뿐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스데반의 순교시 행 7:56에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고 둘째,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기록할 때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계 1:13)라고 표현하였으며 세째, 사도 요한이 계 14:14에서 “인자와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고 하였습니다. 인자란 뜻은 자기를 낮추는 겸허한 칭호이기도 하며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메시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인자로 오심은 온 인류에게는 큰 명예이며 인류에게 큰 소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스스로 부르는 한 인간은 절망이 없고 죄악 속에 소멸되는 인간이 아니라 소망의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능력 14-15의 말씀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 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을 했던 이스라엘은 사십년의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중에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에 불뱀을 보냈습니다. 사막에 흔히 있는 뱀으로 그 비늘이 불처럼 빛나는 독사입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불뱀에게 물려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지도자 모세는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서 불뱀에게 물린 자는 구리 뱀을 쳐다보라고 했습니다. 쳐다보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쳐다보는 순종을 필요로 합니다. 믿음으로 본 자는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우리의 죄로 인해 죽은 자신들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든 장대에 맨 뱀을 보면 살듯이 십자가만 바라보면 생명을 얻는다고 지금도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인간의 수고라면 십자가를 바라보는 수고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십자가에서 시선을 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예수님 말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거듭남(요 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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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 대화하면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늘로부터 거듭난다는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생소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영생은 독생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 거듭남(요 3:1-36)

1-15절, 거듭남에 대해

[1-2절]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경건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자들이었다. 형식과 외식에 치우친 자들도 많이 있었던 것 같으나 경건한 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유대인의 관원이었다. ‘관원’이라는 말은 공회원같이 유대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지도적 인물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니고데모는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는 자이었다. 니고데모는 아마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왔던 것 같다. 그는 경건한 사람들을 대변하듯이 예수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곧 선지자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며 그 근거로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상 선지자 이상이셨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의 부족함을 아시고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는 우선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거듭남이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적으로 다시 나지 아니하면 그는 천국을 볼 수 없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절). 아담과 하와는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었다(창 3:24). 그러므로 사람이 죄인인 채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죄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6:9-10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

[4-5절]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육신적 의미가 아니고 영적 의미이며 영혼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는 것을 가리켰다. 여기에서 물은 죄씻음을 상징한다. 물로 더러움을 씻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씻는다. 세례 의식의 물은 그것을 상징한다. 그것이 복음의 중심 내용이다(요 15:3; 엡 5:26; 히 10:22).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사람의 심령에 적용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구원 활동이다(고전 6:11; 딛 3:5). 모든 사람은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6-8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거듭남은 육신적 의미가 아니고 사람의 영혼의 변화를 가리킨다. 사람의 출생은 육적인 일이었다. 영혼이 그 속에 있으나,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으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의와 선을 행치 못하였다.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으므로 그 기능인 지식과 감정과 의지는 매우 어두워졌고 약해졌다. 그러므로 그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다시 살아나고 지정의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영은 바람과 같다. ‘영’이라는 원어(프뉴마)는 ‘바람, 숨’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남이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을 볼 수는 없으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우리는 거듭난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람은 볼 수 없으나,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성령을 볼 수 없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참된 회개와 믿음의 고백과 변화된 삶을 통해 그를 확인할 수 있다.

[9-13절]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인자(人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거듭남은 비록 신비한 일이기는 하지만 땅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땅의 일’ 즉 땅에서 일어나고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거듭남은 사람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사건이다.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경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은 이미 경험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거듭남에 대한 자신의 말이 진리임을 강조하셨다. 그는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세 구별된 인격을 암시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한 분 하나님께서 세 구별된 인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계시된 명확한 진리이지만 동시에 매우 신비한 사실이다. 주께서는 또 ‘하늘의 일’에 대한 말씀도 암시하시는 것 같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같은 책에 기록된 천국에 대한 말씀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본절은 예수님의 신인(神人) 양성을 증거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는 말은 그가 본래 하늘에 계셨음을 나타낸다. 그는 요한복음 1:1의 증거대로 ‘태초부터 계신 자’ 곧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있는 인자(人子)’라는 원어(호 온 엔 토 우라노)는 그가 땅에 내려오신 후에도 여전히 ‘하늘에 있는 인자’ (KJV) 즉 신성(神性)으로 항상 하늘에 계심을 나타내든지, 아니면 단순히 ‘하늘에 계셨던 인자’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인자(人子) 즉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는 사람이시다.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는 말씀은, 비록 에녹(창 5:24; 히 11:5)과 엘리야(왕하 2:11)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갔고 모든 의로운 성도들의 영들(히 12:22-23)이 그러하지만, 천국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의 구원 계획을 이해한 자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전통본문)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죄를 뉘우쳤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셨고 불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봄으로 죽지 않고 살게 하셨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豫表)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실 것을 가리켰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표현이 몇 번 나온다(요 8:28; 12:32, 34.).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는 영생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이 죄사함을 받아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고 천국에서 복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거듭남에 대해 세 가지의 내용을 말씀하셨다.

첫째로, 천국 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듭나야 한다. 사람은 거듭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죄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둘째로,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물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가리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 속죄의 복음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음으로 거듭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속량하신 자들에게 대속의 의(義)를 적용하셔서 새 생명을 주신다. 이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이며 이것이 구원이다.

셋째로, 사람이 거듭난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4-15).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이며(요일 5:1) 참 믿음은 참 회개를 동반한다고 말했다(요일 3:9-10). 우리는 정말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된 거듭난 자인지 스스로 물어보자.

16-21절, 믿음과 구원

[16절]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할 이유를 말씀하신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사랑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세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포함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물론, 세상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구원하실 자들을 선택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39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이 있고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택하신 자들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9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섰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께는 외아들이 있으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언제 낳으셨는가? 그것은 영원 전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원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라는 성경 진리에 근거해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의 본질적 일체와 수적 하나 되심의 신비를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주셨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주셨음을 뜻한다. 우리는 그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부른다.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의 영과 육체를 취하여 사람으로 오셨다. ‘주셨다’는 말은 또 아버지께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도록 내어주셨음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다(마 20:28). 그의 죽음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신 목적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모든 사람은 죄로 인해 멸망할 처지에 있었다. 죄인들의 마지막 상태는 지옥 형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목표는 영생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상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다(롬 3:20).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수단이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1-22에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고, 에베소서 2:8-9에서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내가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만세 전의 선택과 이끄심이 없이는 내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주께서는 요한복음 6:44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또 요한복음 10:26에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증거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고(롬 5:8), 또 사도 요한도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하였다(요일 4:9-10).

[17-18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세상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심판하다’는 원어(크리노)는 ‘정죄(定罪)하다’는 뜻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는 결코 정죄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롬 8:1).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정죄를 받은 것과 같다.

[19-21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구원을 받은 증거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 곧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정죄받았다는 증거는 빛을 멀리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이다. 불신앙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죄하셨다는 증거이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 그 행위가 드러나고 책망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적이나 간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는 낮을 두려워하며 밤을 좋아한다. 그러나 진리를 좇는 자, 즉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의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그는 자기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희생시키기까지 세상을 사랑하셨다. 독생자는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자기 희생적 사랑이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사람은 종교적 고행이나 도덕적 선행으로 구원 얻지 못한다. 사람의 행위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과 같다. 그는 빛이 세상에 왔으나 빛으로 오지 않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뉜다. 하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이다. 그 둘 외에는 없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22-36절, 세례 요한의 증언

[22절]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예수께서는 유대 땅으로 가셔서 거기 머무시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요한복음 4:2에 보면,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주었다. 세례는 구약의 결례(潔禮) 즉 정결 의식에서 나왔다. 구약의 결례는 물로 씻거나 피를 뿌림으로 이루어졌다(레 14:7-8). 세례는 죄씻음을 상징하는 의식이다(행 2:38). 그것은 복음 진리의 핵심을 표현한다. 누구든지 죄씻음을 받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다. 죄의 대가는 죽음과 멸망이다.

[23-24절]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애논은 요단강 상류 쪽이다.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갈릴리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마 4:12-13; 막 1:14).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지금까지 내용은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의 일들이며 공관복음에서 생략된 것들이다. 요한복음은 이처럼 예루살렘 부근에서의 예수님의 초기 사역들에 대해 증거하며 이런 점에서 공관복음을 보충하는 성격을 가진다.

[25-27절]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의 제자들의 불평스런 보고는 분명히 아직 30세가량밖에 안 된 젊은 사역자 요한에게 인간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일 수도 있었으나 그에게는 그것을 극복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지혜와 은혜와 능력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도 그러하다. 우리의 지혜, 건강, 돈, 환경 여건은 물론, 우리의 믿음, 구원, 성화, 지식, 분별력, 능력, 충성까지도 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다(고전 4:7).

[28-30절]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 앞에 보내심을 받아 사람들에게 그를 소개하는 자에 불과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자신의 위치와 신분과 사명을 바로 알고 있었다. 그는 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하였다. 신부를 취하는 자가 신랑이지만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신랑 친구들이 크게 기뻐하듯이, 자신은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귀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젊은 사역자로서의 인간적인 쓸쓸함이나 우울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불필요한 인간적 연약성이 없었고 또 경쟁심이나 시기심 같은 추한 모습이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기쁨이 충만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좋은 모습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세례 요한은 또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실 때이며 자신은 사명을 다했으므로 쇠해지고 사라져야 할 자임을 고백한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직분자와 봉사자에게 본이 된다. 직분자는 자신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고 그것을 지키고 자기 본분을 다해야 하며 또 다른 이의 위치와 직무를 바로 알아 그를 격려하며 그의 일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을 무시하지 말고 그에게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한다. 시기와 교만, 미움과 다툼은 무서운 악이다.

[31-34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서 오시는 이’라고 증거하였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과 본질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과 본질은 땅이나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신적 인격이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미 증거했었다(요 1:34). 예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신다. 그는 그 근원과 본질, 권위와 영광에 있어서 피조세계를 초월해 계신다. 그는 단순히 땅 위에 사신 한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단순히 한 훌륭한 인간 선생이 아니시고 위로부터 오신 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이, 만물 위에 계신 이이시다. 그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고 그의 본질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그가 보시고 들으신 것을 증거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하신 내용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말들, 그 어떤 인간 스승의 말들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는 친히 하나님 아버지를 보시고 그의 뜻을 들으신 자이기 때문이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인간은 온 세상에 아무도 없고 인류 역사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증거하신 내용을 받는 자들이 없었다. 그것이 어두운 세상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실상,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 2:9). 또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영이시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신약의 사도들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들을 전하였다.

[35-36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은 예수 믿는 길밖에 없다.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인격과 영광을 감사하며 찬송하자. 그의 근원과 본질은 땅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경배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중보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풍성한 말씀을 사모하며 받아 누리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풍성한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주셨고 그것들은 다 신약성경에 기록되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오류와 섞인 것 없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 안에 충만히 거하자.

셋째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교회 생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과 영생을 얻고 그 구원의 감격 때문에 즐거이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는가?

[마태복음 13장 예수님 말씀] 천국 비유들(마 1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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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다음 기사들은 최근 한국 신문에 보도된 내용들입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자력과 방사선 이용의 안전을 심의하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위원회가 위원 결격사유로 8개월 가까이 위원 정수를 채우지 못하고 있어 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정책기관이 아닌 전문기관으로서 거듭나기를 바란다.

하위팀의 재도약은 마운드에 달려 있다. 지난 시즌에 NC 다이노스가 부진했던 이유는 그동안 탄탄했던 불펜진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5선발 후보인 윤강민과 좌완 김영규는 1군 전력으로 거듭나야 한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른바 버닝썬 커넥션. 그런데 비리를 감시하고 추적하고 추상같이 엄벌해야 할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연루되어 있다. 국민들의 비난 여론이 증폭되자, 여의도 정치권에서 진실규명의 불이 붙은데 이어 급기야 청와대까지 직접 나섰다. 이 기회에 추악한 민낯을 도려내고 하루빨리 선진 경찰로 거듭나야 한다.

이렇게 세상에서 거듭남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현재로는 안 된다, 무엇인가 달라져야 한다, 무엇인가 변화를 통하여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거듭남’이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거듭남’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예수님은 깊은 영적의 의미를 가지고 그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거듭나셨습니까? 우리 각자에게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거듭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떻게 거듭나는 것인지, 거듭나면 어떻게 되는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이제 막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거나 아직 거듭남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한 분들은 확신을 가지게 되고, 확신은 가졌으나 세파에 시달리면서 영적으로 무뎌진 분들은 다시 한 번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고, 이미 확신 속에 사는 분들은 거듭난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2장에 보면 가나에서 한참 혼인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결례에 쓰이던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하인들이 그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가졌다 주었을 때 그 물은 맛있는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유대교는 마치 포도주가 떨어져서 파장한 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유대교를 완성하여 하나님 나라 구원 잔치를 가져왔다는 것이 첫 번째 표적이 의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유대교를 완성해서 종말의 메시아적 잔치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옵니까? 성전 기능의 완성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참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창조하시는데, 이 공동체가 바로 그가 짓는 새 성전입니다. 이리하여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초월, 신성, 영광에 참여하여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영생은 문자적으로는 ‘오는 세상의 삶’이란 뜻인데, 내용적으로 하나님적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3장과 4장에서 보듯이 유대교를 대표하는 니고데모나, 천한 수가성 여인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1-2절)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은’사람들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이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나 요한복음에는 3번 언급됩니다. 요한은 그를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일반 백성을 율법을 알지 못하거나 행하지 않는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6천 명 정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 뛰어난 율법학자도 있었고 경건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율법의 작은 조항까지도 철저히 지키려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서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외식에 치중함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가장 많이들은 그룹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대개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니고데모는 겸손하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두 번째로 그를 ‘유대인의 지도자’로 소개합니다. 이는 그가 산헤드린 공회의 종신직 멤버라는 뜻입니다. 당시 공회원의 숫자가 70명 정도였으니까 니고데모는 영향력 있는 유대인 최고 지도층 인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10절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율법에 정통한 랍비로 유대인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19:39에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밤에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이나 가져왔을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종합해 보면 니고데모는 권력, 명예, 학식, 재산 모두를 갖춘 그야말로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기회를 엿보다가 어느 날 밤에 찾아 왔습니다. 요한은 니고데모가 왜 밤에 찾아왔는지 분명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공회원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밤에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기 원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 당국자들의 태도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을 직접 만나러 온다는 자체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로서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 여정에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자주 그렇듯이(9:4; 11:10; 13:30), 밤이 만일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면, 니고데모는 현재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랍비’라 부르며 정중하게 대화를 시작합니다. 랍비는‘선생’이란 뜻으로 유대인의 율법 교사를 존경하여 부르는 칭호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랍비인 것과,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이신 표적이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표적을 보기는 했지만 그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예수님의 말씀은 상당히 도전적인 뉘앙스를 풍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 진실이지만 특별히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거듭’으로 번역된 부사‘anothen’는 ‘위로부터, 처음부터, 다시’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 다시 난다, 새롭게 난다’는 뜻입니다. ‘본다’로 번역된 동사‘idein’은 공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에 대응하는 요한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의 표적과 말씀의 중심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공관복음에서 즐겨 쓰는 중심 주제이지만, 요한은 이곳에서만 사용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특별한 장소를 가리킨다기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모든 곳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지키는 바리새인이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선생인 니고데모도 지금 상태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물론 니고데모가 아주 못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라, 단서가 있습니다.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유대교에서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런 혈통적인 출생만으로는 충분히 않은 새로운 영적 가족에 속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태어나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위’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거듭남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다’는 말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처음부터 철저히 다시 태어난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과 살아갈 목표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심오한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여러분이 니고데모와 같은 상황에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사회지도층 인사인 자기가 갈릴리 촌사람에게 수모를 당한다고 속이 상해서 씩씩댈 수 있습니다. 기껏 선생으로 인정해 주었더니 재수 없다고 자존심이 상하여 욕을 하고 돌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여전히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그의 마음이 점점 열려집니다. 말씀을 통하여 도전을 받고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에 우리가 알 수 없고 따질 수도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에 결국 거듭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를 베푸셔서 믿음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의 비결(5-8절)

니고데모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사람의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복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표현 자체는 나타나지 않지만, ‘물’과 ‘성령’이 같이 언급되는 구절은 에스겔서에 나옵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5-26)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하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새로워질 것을 말씀하시는 구절입니다. 물은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물 뿌림은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과거의 죄로부터 단절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굳은 마음을 가진 이스라엘을 성령으로 변화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은 구약 성경에서 죄의 씻음과 마음의 새롭게 됨으로 약속된 종말론적 사건을 지칭하며, 그 약속된 사건이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물로 태어남을 구약 성경의 종말론적 씻음 곧, 과거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말씀에 비추어 이해할 때, 그것이 세례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6절에서 ‘육’과 ‘영’의 비교에 의해 강조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여기서 육체적 출생의 결과인 ‘육’이란 지상에 속한 실체로서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가리키고, 영적 출생의 결과인 ‘영’이란 하나님께 속한 실체로서 우리 안에서 위로부터 태어난 자를 새롭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을 통한 출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제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바람과 같은 성령의 역사(7-8절)

예수님은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하겠다’로 번역된 헬라어 ‘dei’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표현합니다. 죄인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대한 가르침에 니고데모가 놀라는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성령’과 ‘바람’이 같은 헬라어 ‘pneuma’인 것에 착안하여 언어유희를 통해 성령으로 난 사람의 상태를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기 때문에 사람이 그 소리를 들을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부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입니다. 인간이 바람을 통제할 수도 그 움직임을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의 영향력은 알 수 있습니다. 바람 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바람 때문에 잎사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사람이 거듭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늘에 속한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입니다.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을 베푸시기로 예정된 자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태어난 사실은 확신 있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들 때 이미 성령의 바람이 불고 있는 증거입니다. 지속적인 성령 충만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민감하고 성령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9-12절)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실천해왔고 또 그렇게 가르쳐 왔던 그 내용들은 무엇이 됩니까? 그래서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하며 반문합니다. 이것은 방법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이나 자기의 존재 근간을 기초부터 뒤흔들어 놓는 그런 교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도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반문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은 랍비 교육을 잘 받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선생 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중에서도 뛰어난 선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메시아 시대에 나타날 회개와 성령의 역사가 구약에 분명히 나오는데 선생으로서 그것을 모르고 있느냐는 책망을 하십니다.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하시면서 니고데모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의지적인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실상은 모르는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실제 증인으로서 아시는 바를 말씀하시고 증언하십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보통‘땅의 일’이란 ‘세상적인 일’즉 세상에서 되는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땅의 일’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유대인의 선생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왔지만 사람이 말씀으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일 ‘땅의 일’을 믿지 않았다면 ‘하늘의 일’은 더 믿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일’은 우리가 이렇게 새사람이 되는 것을 위하여 영원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을 두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삼위 하나님 사이에 우리 인간의 구원에 대한 영원한 회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창세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엡 1:4). 그 의논에 따라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의논에 참여한 장본인입니다.

우리의 자세: “거듭나야 하겠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연적인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영적 출생을 의미합니다. 거듭남이란 삶의 중심이 나에게서 주님께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착하게 산다고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등록하면 다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잘 믿는다고 자녀가 덩달아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종교적으로 탁월한 사람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이 하고 싶으면 하는 선택적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방법으로는 거듭날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구세주로, 우리 각자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성경은 거듭난 것을 ‘하나님 나라를 본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영생을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다양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물과 성령에 의하여 영혼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명목상의 신앙인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새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 배우기를 힘쓰고 교회와 목장에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있는 육의 사람은 점점 바뀌어 가고 성령이 주관하시는 영의 사람이 됩니다. 이미 거듭남을 경험하였더라도 지속적인 믿음의 훈련, 경건의 연습을 통해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거듭난 자로서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들입니다. 우리의 시간, 물질, 재능을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거듭난 자들은 언제나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말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인생을 황폐케 하는 비방, 멸시, 조롱, 더러운 말, 혈기를 부리는 말, 거짓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야 합니다. 입술의 열매를 지으시고, 들으시는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듭난 자들은 성령을 좇아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변화된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했다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정 거듭난 사람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난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늘나라는 거듭난 사람을 위해 준비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땅의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위로부터, 하늘의 것으로부터 채움 받기를 원하는 영적인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통하여 성경에 약속된 풍성한 삶을 살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를 전하셔서 함께 기쁨을 나누시면서 궁극적으로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니고데모는 왜 돌아가신 예수님을 장사하러 왔을까?(요19:38~42)_2018-06-17

사람은 저마다 신앙의 표현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표현한다. 그중에서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공회원이었으나 예수님의 제자였던 두 사람의 경우가 그렇다. 그중에 한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다. 둘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였으나 자신의 믿음을 숨기며 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달랐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몰랐으나 밤중에 주님을 찾아가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는 달라졌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해 오신 참 빛이요 그것이 생명의 빛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할 수 있는 한 예수님을 변호하거나 두둔하려고 애를 썼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해를 가져올 것인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던 날, 주님께서 자신에게 들려준 말씀을 니고데모는 항상 기억하고 있었고, 예수께서 죽자 장사하기 위해서 무덤에 찾아간다. 그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 때문에 그날 무덤에 장사하러 간 것인가? 오늘은 니고데모와 아울러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을 비교해보면서 나의 신앙양태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니고데모는 왜 예수님을 장사하기 위해 무덤으로 왔을까? 자기가 마음 속으로 좋게 생각하고 있던 분이었으니까 장례나마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해드리고 싶어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니고데모가 그날 무덤으로 온 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 발각된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존귀히 여기고, 그분을 따르는 자라고 자신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면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쉽게 생각해보면, 산헤드린공회에서 파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패거리로 몰려 동료 공회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잘못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장사하러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내러 왔는지를 좀 더 깊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놀라운 니고데모의 신앙이 들어있다.

2.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게 되었을까?

니고데모가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러 오던 날은 캄캄한 밤이었다(요3:1) . 그때 그는 자원하여 스스로 주님께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산헤드린공회를 대표하여 예수님이 누군지를 알아보기 위해 예수님께 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 혼줄이 났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으로 책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 당시 자신처럼 많이 배우고 율법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는데, 인류의 속죄를 위해 메시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됨으로 성취된다는 것까지 들었다(요3:14).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신적 지혜에 따라 자신이 속해있는 산헤드린공회가 어떤 종교단체인지까지 들었다(요3:11). 자기들은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활동하였던 세례요한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인 줄 알면서도 그분의 외침을 경청하지 않았다는 것도 들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았으면서도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 예수님을 싫어하고 배척하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실제가 그랬었기 때문이다.

그때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계속해서 어둠 가운데서 지낼 것인가 아니면 빛으로 나아올 것인가를 말이다(요3:19~21). 니고데모는 그날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온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 이후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 자신이 만난 예수님은 지금까지 자신이 소문으로 들어왔거나 경험했던 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분에 대한 판단을 새롭게 정립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이 정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만 한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메시야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3.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후 장례는 어떻게 치러졌는가?

그러나 세상은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자기가 속한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자 그를 죽여 없애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그날 빛을 가슴 속에 담아두었기에 예수님을 배척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산헤드린공회와 백성들의 외침은 예수님을 정말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산헤드린공회는 불법도 서슴없이 행하였다. 재판하는 날에는 절대 형집행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 규정까지도 다 무시하였다. 속전속결로 예수님을 처리한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외로히 그리고 백성들의 버림 속에서 아사셀염소처럼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는 그분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있었다. 그것은 민21장에 나오는 놋뱀처럼 그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그제야 확실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대와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소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알려진 사람이라,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의 시체를 처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동료 중 한 사람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예수님은 그날 해가 지기 전에 골고다 언덕에 위치한 자신의 새 무덤에 장사된다. 그 장소에 니고데모도 함께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몰약과 침향(알로에) 섞은 것을 가지고 말이다(요19:39).

4. 예수님을 전혀 다르게 섬긴 두 사람, 아리마대 요셉과 밤중에 주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

예수님의 생애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장례 또한 구약성경에 나온 예언에 따라 진행되었다 . 사53장에 보면, 고난받고 죽임당하실 메시야는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사53:9). 그런데 정말 예수님의 시신은 부자의 묘실에 안치되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공회의 한 명이었던 아리마대사람 요셉이 부자였고, 그가 새로 골고다 언덕에 새로 파놓은 가족묘실에 예수님을 안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마대 요셉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12제자들이나 70명의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영역에 있었던 두 사람을 보게 된다. 그들도 사실은 예수님의 제자였다. 성경기자는 아리마대요셉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존경받는 산헤드린공회원이었다(막15:43).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막15:43).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눅23:50). 그는 예수님을 죽이는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다(눅24:51). 그는 부자였다(마27:57). 그리고 그는 예수의 제자였다(마27:57). 그랬다. 그는 예수님의 숨겨진 제자였던 것 이다. 그날을 위해서 말이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미리 공개되어버렸다면 아마도 빌라도가 그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존경받는 산헤드린공회원이었기에 그는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부자였기에 골고다언덕에 자신의 새 무덤까지 준비해 둘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 주변에서는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평소 때에는 잘 모르나,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에는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다. 아리마대요셉이 그랬다.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기시 전까지는 자신의 마음을 숨겼다. 하지만 그분이 돌아가시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즉시 행동으로 옮겨 실천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부자의 묘실에 묻히실 것이라는 예언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다르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전혀 몰랐던 인물이었으나, 밤중에 주님을 찾아가 정탐하다가 그만 이 땅에 온 빛을 보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때에 마음을 바꾸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 그러니 그는 예수께서 사람들에 의해 모함당할 때 변호사를 자처했다(요7:49~51). 그래서 그는 일찍이 산헤드린공회에서는 예수님을 두둔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만약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더라면 아마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예수께서 메시야로서 그의 예언을 완성하셨음을 알고는 온전히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자 예수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힌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찾아온 것이다(요19:39~41). 그래서 산헤드린공회의 두 사람이 그날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5. 나오며

모든 사람은 다 언제가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아리마대 요셉이 그랬고, 니고데모가 그랬다 .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고, 니고데모는 3년반의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을 보호하고 두둔하기 위하여 준비된 일꾼이었다. 둘은 꼭 그렇게 쓰임받았다. 그렇다. 사람 중에는 자신을 공개하지 않고 어느 때에 나타남으로 쓰임받을 사람도 있고, 자신을 공개함으로 주님께 쓰임받을 사람도 있는 것 이다. 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쓰시는 것이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참으로 담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었기에 자신에게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당당하게 일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이런 사람도 필요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나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쓰임받을 것인가? 어떤 위험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주님을 섬기는 자인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자로 쓰임받을 사람인가? 아니면 숨어있다가 어떤 결정적인 시기에 주님께 쓰임받을 사람이 될 것인가? 그것은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대로 감당하면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6월 17일

정병진목사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_요한복음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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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장에서는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내용과, 세례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가 기록되었습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구원을 주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면서 예수의 증거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되고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게 됨을 선포하였습니다.

1.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1) 유다인의 관원 니고데모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유다인의 관원이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을 중심한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유다교에서 추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개인적으로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예수를 직접 만나 교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예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표적 행함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와 같은 표적을 행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음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a. 관원 중에도 믿는 자가 많음(요12:42-43)

b. 유대인을 두려워한 성도들(요19:38)

2) 거듭남의 비밀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비록 바리새인이고 유다인의 관원인 지식층이었지만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육신으로 다시 나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즉 성령으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던 영혼이 새 생명을 얻게 됨을 뜻하였습니다.

3)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

예수께서 중생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니고데모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들려야 하는데, 이는 자기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a.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거듭남(벧전1:3)

b. 모든 사람을 이끄심(요12:32-33)

2. 예수의 구원에 대한 교훈

1)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독생자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구원의 진리에 대해 교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죄악으로 타락하여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어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써 죄인들에게 구원과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독생 성자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구원을 받지만 그 이름을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도리를 잘 설명하여 줍니다.

a. 아낌 없는 사랑(롬8:31-32)

b.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요일4:10)

c. 하나님 사랑의 확증인 그리스도(롬5:8)

2) 악인들에 대한 정죄와 심판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받을 정죄와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죄의 내용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진리를 계시하셨지만, 악인들은 그 빛으로 인해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오히려 예수를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행을 행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진리를 좇는 자는 빛이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a.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함(요5:42-44)

b. 마음이 완고한 자들(요12:39-40)

c. 믿지 않으므로 정죄받음(막16:16)

3. 세례 요한의 마지막 증언

1) 세례 요한의 증언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의 제자가 이를 보고 세례 요한에게 고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세례 요한보다 예수께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서 세례받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밝히면서 제자에게 그 사실을 증거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와 자신의 관계를 신랑과 신랑 친구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 때에 신랑 친구가 크게 기뻐하듯이 예수가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 세례 요한은 기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망하여야 한다는 세례 요한의 말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섭리와 경륜을 깨달은 자의 고백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사명인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사역이 막을 내리게 되고 예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a. 신랑이신 그리스도(마9:15)

b. 의인의 겸손(고전15:9)

c. 요한과 그리스도의 차이(마3:11)

2)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거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신 자로서 하늘에서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나 그 증거를 받은 자들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보냄을 받은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보내신 자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천국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곧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써,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셨기에 모든 말씀을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시므로 예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그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a. 하늘 일을 말하는 자(요3:12)

b. 세상의 주관자(엡1:21)

c.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실 자(눅22:69)

결론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어 영생을 소유하고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는 복음의 진실은 어느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진리를 따라 예수를 주로 믿음으로써 구원을 소유한 자로서 복음 진리를 전파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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