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개혁 주일 | 종교개혁주일 85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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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이 갖는 의미 – 기독신문

종교개혁기념일은 마르틴 루터가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였던 1517년 10월 31일을 기념해서 생긴날이며 이 날을 즈음하여 종교개혁주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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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7/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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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마지막 주일은 종교개혁 기념주일 – 크리스찬 투데이

10월27일주일은지상에현존하는세계개혁교회가기념하여지키는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교회는크게두가지로나누입니다.천주교회와개혁교회입니다.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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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us

Date Published: 10/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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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3주년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는 단상(斷想)

이와같이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방면에 큰 울림이 되고 발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올해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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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review.com.au

Date Published: 6/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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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2주년을 맞아 – Manna 24

종교개혁일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교권의 타락과 부패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전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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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anna24.com

Date Published: 2/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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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 이해 > 기타절기 – 감리교교육마당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마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주장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 교회문에 붙인 사건이 있었던 1517년 10월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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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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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주일 | 종교개혁주일 빠른 답변 – MAXFIT

종교개혁일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교권의 타락과 부패속에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전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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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u.maxfit.vn

Date Published: 10/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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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 (2022) – 오타와한인교회

종교개혁주일 (2022) … 종교 개혁(라틴어: reformatio, 독일어: Reformation, … 이 종교 개혁의 이전에도 이미 서방교회 내부에 존 위클리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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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kcc.ca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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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주일 기획 ① 종교개혁의 의미 그리고 과제는? – 아멘넷

하나님 말씀 삶속에서 적용하는 토양부터 만들어야”. CBS는 종교개혁주간을 맞아 한국교회 현실을 되돌아보는 기획 보도 시리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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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usaamen.net

Date Published: 3/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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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설교]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 교계/교회 – 베리타스

종교개혁의 결과 개신교가 탄생하였기에 오늘은 개신교의 뿌리를 생각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개신교를 영어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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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veritas.kr

Date Published: 7/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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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개혁주일설교 10편 – Daum 블로그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우리가 기념하여 지키는 종교개혁 주일은 1517년 10월 마지막 주일(31일)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타락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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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2/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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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종교 개혁 주일

  • Author: YEDAYE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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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3.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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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주일이 갖는 의미

489년 전 있었던 종교개혁은 단순히 기독교의 역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과 세계의 역사를 돌려놓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당시 부패하고 오만한 교회의 실상은 성직자로 있던 같은 동역자들에게마저 심한 혐오감을 주었고 결국 자성의 목소리가 아닌 척결과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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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기념일은 마르틴 루터가 95개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붙였던 1517년 10월 31일을 기념해서 생긴날이며 이 날을 즈음하여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에서 종교개혁주일은 달력속에나 존재하는 기일이 돼 버렸다.사실 개신교의 탄생은 종교개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오늘날 무엇보다도 의미있게 되새기고 기념해야 할 날이 종교개혁주일이라고 본다. 성장이 정체된 현실에서, 서방교회들이 줄줄이 폐허가 되어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갖고 날마다 개혁돼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는 사회문화에 밀려 변방문화가 돼버렸으며 사회를 선도하기 보다는 뒤따라가기 바쁜 시대가 됐다.그러나 교회가 부패하거나 타락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종교개혁 당시처럼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몇몇 교회 문제나 교인이 일으킨 문제로 한국교회가 부패하거나 비전이 없는 집단으로 호도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나 일부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있고 사회를 계도하고 문화를 압도해 가는 면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문제는 무감각증이라고 본다. 한국교회를 향한 위협과 위기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진단능력도 상실해 있으며 결과에 대한 예측마저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이다. 일각에서 외치는 소리는 듣는 이가 거의 없다. 들어도 귀담아 듣지 않고 광야의 메아리가 되어 사라지고 있다.오늘날 종교개혁의 의미는 자성과 개혁의 바람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큰 공감대를 형성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되고 사회의 곳곳에서 실현되어 풍겨나게 하는 것이다.한국교회는 지금 우물에 갇혀 있다. 형식에 치우쳐 있으며 스스로를 얽매이고 위축되어 있다. 말씀과 정의에 대한 확신이 없다. 하나님은 본질을 원하시는데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종교개혁 502주년을 맞아

올해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독일 북부 비텐베르그에서 종교개혁을 일 으킨지 502주년이 되는 해이다. 매년 기독교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종교개혁일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가 당시 교권의 타락과 부패속에서 하 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전통과 관습으로일관된 중세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신앙 (교회개혁)운동을 일으킨 날이다.

1521년 보름스(Worms)국회를 소집하면서 신성 로 마제국의 새황제였던 챨스 5세는 루터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기 위해 루터를 의회로 불러 자신의 책 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하게 된다. 루터는 하 루의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를 받지만 그는 결국 다음날 황제와 의회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된다.

“나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Here I stand, help me, God!; Ich stehe hier, helfe mir, Gott!)

1520년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3가지의 저서였다 .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첫 번째 책에서 만인사제 권의 진리가 공표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 벽을 넘어뜨렸다. 두달후 그는 “교회의 바빌론 유수’ 라는 책에서 성례전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며 성경은 오 직 성찬과 세례의 2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므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씌여지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교황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공개편지에는 교회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보내고 1520 년 12월 10일 루터는 그 파문장과 교회법령을 학생과 시민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불태우게 된다.

결국 마틴 루터는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로마 카톨릭으로부 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황제 챨스 5세도 루터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선포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루터를 추방하게되었고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 그 의 선제후이며 프리드리히 4세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근처의 바르트 부르크 (Wartburg)성으로 보내게 된다. 9개월동 안 루터는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게 된 것이다.

결국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루터가 번역한 이 독일어 성 서를 통해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진정한 종교개혁이 출발하게 된 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형성 에 힘쓰게 되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게 되었다 .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마침내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것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과 속의 이원론적인 구분이나 성직만 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길이라는 잘못된 가치를 바로 잡아주었다. 아울러 교리의 전통과 신조의 권위만을 주장하는 교권주의에서 벗어나 교회와 그 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열어가야 한다는 선교적인 사명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 당시 교회는 하나님을 교회안에 가두어 두고 독점하 며 세상속의 빛과소금의 공동체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포기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역사회의 구제와 선교의 사명을 포기한다면 교회 본연의 사명과 목적을 상실한다 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부는 분배되어야지만 부의 의미가 있는 것이고 가 난한 이웃들을 위해 분배되지 않는 물질은 ‘소유의 본질 ’을 상실한 것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중세말기 성직자의 타락가운데 나온 경구중의 하나가 ‘성직자의 삶은 평신 도의 복음(Vita Clerici est evangeliuum laice)’이라는 말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 북부 비텐베르그를 시작으로 스위 스에서는 쮜리히시를 중심으로 쯔빙글리가, 제네바시를 중 심으로 칼빈이,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레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종교개혁주일을 다시 맞이하며 자신의 명예와 권력, 기득 권을 유지, 보존키 위해 이전투구에 참여하는 지배적 소 수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예배와 교육, 구제와 선교를 위해 땀흘리는 창조적인 소수, 이 땅에서 나그 네 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사 람들이 그립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종교개혁주일 이해 > 기타절기

종교개혁 주일은 마틴 루터(1483-1546)가 종교 개혁을 주장하여 소위 구교 곧 카톨릭(Catholic Church)으로부터 개신교(Protestant Church)를 개혁, 탄생시킨 사건을 희고, 기념하는 절기이다.

1. 시기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마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주장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 교회문에 붙인 사건이 있었던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1517년 종교 개혁 운동이 있은 후 한동안은 루터의 생일인 11월 10일, 루터의 사망일인 2월 18일, 1530년 아우그스부르크 국회에서 루터가 제출한 최초의 개신교 신앙 고백서인 ‘아우그스부르크의 신앙 고백’의 발표일인 6월 25일 등도 종교개혁일로 기념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일이 오늘날과 같이 10월 31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617년 종교 개혁 100주년을 맞이한 행사가 이날 거행되고 부터였다. 그리고 10월 31일이 종교개혁일로 확정, 반포된 것은 그보다 50년 뒤인 1667년 제후(諸候) 요한 게오르그 2세가 루터의 활동 중심지였던 작센에서 이날을 종교 개혁일로 선포하면서부터였다. 그 뒤로 종교 개혁일은 루터파 교회는 물론 모든 개신교 교회에서 종교 개혁의 정신을 기리는 날로 지켜지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유래

마틴 루터 당시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 헌금하기보다는 교회를 위하여 기부를 하고 공적을 쌓는 것이 마치 구원의 근거인양 호도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죄인의 사죄가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지는 진리를 왜곡하여 돈을 내고 이를 구입하면 교회가 죄의 사죄를 보증하겠다는 취지의 면죄부(免罪符)까지 강매하고 있었다. 또한 인간으로서 카톨릭 교회의 수장(首長)에 불과한 교황(the Pope)의 절대 무오성을 주장하고, 구약시대 제사장과 같은 중보권을 독점하는 사제 제도를 유지하며 성직매매를 일삼는 등 비성경적인 교리와 제도로 인하여 카톨릭 교회는 극도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

그리하여 루터는 카톨릭 교회에 반발하여 오직 성경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으며 인간과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성경 진리에 근거하여 주장하며 교회의 사상과 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결과 향후 긴 투쟁을 거쳐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마틴 루터가 자신의 새로운 사상으로 새 제도를 수립하여 전혀 새로운 새 종교를 세운 결과 개신교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만 이미 태초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의 정통 진리에 맞도록 교회의 사상과 제도를 개혁한 결과 개신교가 탄생한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13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 교회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 전반을 가리킨다도 할 수 있다. 원래 ‘개혁'(Reformation)이란 말은 기존 질서의 타당성을 전면 부인하지 않고 잘못된 요소의 갱신을 추구함을 의미하는 말이며 따라서 모든 체제내에서 개혁 운동은 항상 필요한 것이다. 즉 교회가 초대 교회의 표준에서 탈선될 때 어떤 양상으로든 개혁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의 순수성 회복을 위해 항상 노력했음을 보여 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517년 루터의 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고 보다 성공적이며 광범위한 결과를 발생시킨 것이 칼빈의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교황 무오설을 비롯한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공격하고 성경의 유일한 권위를 주장한 위클리프나 하나님의 죄사하시는 권세를 인간의 물질적인 목적을 위해 도용한 면죄부 판매를 정면에서 반박한 후스(John Huss)등 개혁 운동의 선구자가 있었다.

따라서 이런 종교 개혁은 단지 16세기의 타락했던 교회를 정화했다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앙과 성경의 절대 권위 그리고 교회의 봉사적 사명을 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 개혁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며,오늘날 우리도 루터를 비롯한 개신교 신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적인 악습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킴은 물론 이를 개혁시켜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독교를 유지시켜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주일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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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주일 기획 ① 종교개혁의 의미 그리고 과제는? > 한국ㆍ세계ㆍ정보

“하나님 말씀 삶속에서 적용하는 토양부터 만들어야”

CBS는 종교개혁주간을 맞아 한국교회 현실을 되돌아보는 기획 보도 시리즈를 마련했다. 오늘은 첫 순서로 종교개혁주일의 의미와 한국교회의 실상을 살펴봤다.

마틴 루터는 495년 전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걸었던 로마 가톨릭에 저항해 종교개혁의 불씨를 지폈다. 마틴 루터는 로마가톨릭이 성도들 위에 군림해 성직을 매매하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교회의 오만과 부패가 극에 달하자 이에 대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대학 성교회에 게재했다.

이러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현재 개신교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됐다.

하지만, 한국교회 현실은 불행히도 종교개혁 당시의 모습과 닮아가고 있다.

불투명한 교회 재정 지출과 교회 매매, 목회 세습 그리고 물질 축복의 기복신앙과 목회자 윤리의식 부재 등 전 영역에 걸쳐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교회가 성장지상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보다는 스스로 종교권력화 돼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해있다.

문성모 총장(서울 장신대)은 오늘(22일) 열린 성결대 개교5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한국교회가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고,다함께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세계선교를 위해서 매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학자들은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정신을 바탕으로 교회갱신을 이루기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토양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한국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해 교인들 모두가 세상에 들어가 말씀을 선포하고 선교적인 삶을 살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은규 교수(안양대 기독교교육학과)는“교회는 평생교육시스템으로 갱신되어야 한다”며, “성숙한 기독교인들을 양육시키기위해서는 말씀을 생활화시키기고 적용시키는 학습 단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창영 교수(성결대 신약학과)는“교회는 초대교회의 선교적 교회를 회복해야한다”며, “가는 선교사, 보내는 선교사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말고, 모든 성도가 세상에 들어가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갱신의 과제를 안고 있다.

CBS TV보도부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종교개혁주일설교]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성경본문

욥기 24장 13-17절, 시편 101편 1-8절, 누가복음서 12장 49-56절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매년 10월 마지막 주는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1517년 10월 31일 무명의 수도사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교의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당 정문에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게시하는데, 이 95개조 논제가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면서 유럽은 대개혁(The Reformation)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종교개혁은 종교에만 머물지 않고, 당시의 정치와 법, 학문과 예술, 교육과 사회복지 등 전 분야에 영향을 주었고, 중세와는 다른 근대 세계를 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결과 개신교가 탄생하였기에 오늘은 개신교의 뿌리를 생각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개신교를 영어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라고 부르고, 종교개혁가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항의한다,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부패한 가톨릭 교회의 교황 레오 10세는 1521년 1월 21일, 루터를 이단으로 지목하여 파문하는 칙령을 내렸으나, 루터는 교황의 파문 칙령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후 루터를 따르는 무리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고,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도 루터에게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19살의 나이에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국제정세의 흐름에 따라 처음에는 루터파들에게 제한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락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후, 가톨릭을 옹호하면서 제국 내 루터파 제후들에게 가톨릭으로 복귀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루터파는 이에 맞서 1529년 4월 19일 제3차 슈파이어 제국회의에서 지난 1926년에 허락했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약속을 지키라는 공식적인 항의(protestation von Speyer)를 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루터파들은 ‘저항하는 자’ 즉 프로테스탄트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개신교 전체를 아우르는 말로 쓰이게 됩니다.

한편 루터의 종교개혁은 스위스의 깔뱅과 쯔빙글리에게로 이어지는데, 이들 세 사람의 신학과 신앙에 기초하여 세워진 교회들을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를 정착하고 제도화하여 종교개혁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제네바의 칼뱅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the church reformed, always reforming)고 말했습니다. 즉 개혁된 교회(Reformed Church)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늘 개혁하는 교회(Reforming Church)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는 개신교가 늘 개혁하는 정신으로 세상의 온갖 불의와 부패에 맞서 저항하는 신앙공동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항과 개혁은 세상을 향해서도, 그리고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머물러 안주하는 순간,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만족하는 그 순간부터 언제나 부패와 타락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변혁의 역사]

그런데 가만 보면 성서의 신앙 전통과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언제나 변혁을 주도해 왔습니다. 고대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힘과 권력에 의지하여 부와 명예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오로지 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 믿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자기 조상의 땅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오므리 왕조 시절, 아합왕은 국제질서에 편승하여 이스라엘의 풍요와 번영을 도모합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번영에 축하를 해주기는커녕 우상 숭배와 불평등에 대하여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이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민족주의적 감정이 고조될 때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갱신을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에 눈뜨게 하셨고, 첫 교회가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유대교로 회귀하려고 할 때, 바울 사도는 서유럽 전체로 선교여행에 나서면서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만들어냅니다. 높은 도덕성으로 존경받고 세계로 뻗어나가던 기독교가 제국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지배종교, 힘의 종교로 변질됩니다. 그러자 참된 신앙인들은 사막으로 들어가 수도원 운동을 일으키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마저도 국가 종교에 물들고, 교황은 제국의 힘을 탐내고, 성직자들과 교회가 돈벌이에 혈안이 되자 종교 개혁가들이 변혁의 깃발을 든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한말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전근대적 계급질서에 머물러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읽지 못하고 쇠락하던 이 땅에 개신교가 들어옵니다. 개신교는 조선 민중에게 인권의 존중과 평등, 자주적 의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근대식 교육과 의료제도를 확립하는데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개신교가 이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유교적 권위주의나 무교의 기복주의에 물들고, 내세 지향적이며 타계적이며, 현실도피적인 모습도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서슬 퍼런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과 한국의 근원적 죄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해 애쓰고 노력한 것도 사실입니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해체되어가는 마을 공동체의 대안으로 서로 힘이 되고 위로를 주었던 곳도 한국 개신교회였습니다. 코로나 19 상황에서 친교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얼마나 소중했는가를 여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190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교회가 급격히 성장하자 점차 자본주의의 곰팡이가 교회에 피어나고, 권력과 야합하는 등 더 이상 새로운 개혁의 동력이 상실되자, 사회적 신뢰도는 추락하고 세상의 조롱거리와 걱정거리가 되는 현상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빛을 밝히고 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도 바로 그런 신앙공동체 중 하나가 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세상의 현실과 어둠의 세력]

세상은 교회가 타락하였다고 손가락질 하고, 그러한 비난에는 이유가 있고 일리도 있지만, 교회를 향한 비판에는 여전히 교회만큼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주길 기대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또한 비슷한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경쟁이 당연한 것이며, 승자는 모든 것을 거머쥐지만 패자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 몰려야 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함께 사는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닥치는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고, 거기에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지 못하면 도태되고야 마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최근 계속되고 있는 택배기사들의 죽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 산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각종 재해들을 보면 하청에 하청을 주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고혈을 빨아서 소수의 사람들이 배를 채우는 일들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처럼 벌어집니다. 코로나 19 상황에서도 중국의 마윈과 같은 갑부들(super riches)은 웬만한 나라들의 국내총생산을 뛰어넘는 돈을 법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깁니다. 자유는 독재 권력에 맞서게 합니다. 그러나 한편 개인의 사적재산을 인정하고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는 경제적 자유의 보장은 시장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불평등을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그 노동의 결과가 고스란히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냥 시장에 내맡기면 불평등이 고착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이고, 그래서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한 사람이 되며 중산층은 날이 갈수로 더 살기 어렵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 세계에 몰아닥친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올 해 노벨 평화상은 유엔 세계식량계획이 받았습니다. 유엔 세계 식량 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은 매년 전 세계 83개국 1억 명을 지원하는 기구입니다. 전 세계의 기아 인구를 0명으로 만들기 위한 제로 헝거(Zero Hunger)가 목표입니다. 이 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코로나 19로 절대 기아 선상에 놓인 위기 기아 인구가 2019년과 비교하여 배로 늘었습니다. 작년에 다양한 기후 재앙과 전쟁으로 인해 이미 1억 3천 500만명이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는데 이번에 코로나로 약 2억 7천명이 식량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전 세계 사람들이 음식물을 남기지 않고 버리지만 않아도 세계의 2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아직도 인류는 자기 문제에 매몰되어서 함께 사는 지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의 말씀을 봅시다.

“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빛이 밝혀 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빛이 밝혀 주는 길로 가지 않는다. 살인하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도둑질을 한다. 간음하는 자는 저물기를 바라며,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가린다. 도둑들은 대낮에 털 집을 보아 두었다가, 어두워지면 벽을 뚫고 들어간다.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밝은 한낮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들은 한낮을 무서워하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평안을 누린다.”(욥 24장 13-17절)

욥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한 자락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환한 대낮보다 악을 행하기 좋은 밤을 더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빛이 밝혀 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빛이 밝혀주는 길로 가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악행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과 궁핍한 사람들이 더 곤혹을 겪으며, 시민들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이 망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범죄자들의 삶을 잘 살펴보면 그 한 사람을 사탄이나 마귀, 악마로 규정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곤경에서 오는 숱한 상처가 그의 내면에 쌓이고, 그것이 분노와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그런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두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을 지닌 한 사람의 중요성]

우리는 너무 쉽게 국가와 정부의 탓을 하지만, 결국 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와 능력, 삶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은 다윗 왕의 약속이 담긴 노래로 전해지지만, 우리 모두가 이 사회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시편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구절구절 하나가 전부 아름답고 보석 같습니다.

“주님,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렵니다. 주님께 노래로 찬양드리렵니다. 흠 없는 길을 배워 깨달으렵니다. 언제 나에게도 오시렵니까? 나는 내 집에서 흠이 없는 마음으로 살렵니다. 불의한 일은 눈 앞에 얼씬도 못하게 하렵니다. 거스르는 행위를 미워하고, 그런 일에는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구부러진 생각을 멀리하고, 악한 일에는 함께 하지 않겠습니다. 숨어서 이웃을 헐뜯는 자는, 침묵하게 만들고, 눈이 높고 마음이 오만한 자는, 그대로 두지 않으렵니다. 나는 이 땅에서 믿음직한 사람을 눈여겨보았다가, 내 곁에 있게 하고, 흠이 없이 사는 사람을 찾아서 나를 받들게 하렵니다. 속이는 자는 나의 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앞에 서지 못하게 하렵니다. 이 땅의 모든 악인들에게 아침마다 입을 다물게 하고, 사악한 자들을 모두 주님의 성에서 끊어버리겠습니다.”

첫 마디의 각오부터가 아주 정확하고 옳은 방향을 택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랑과 정의를 노래해야 합니다. 사랑을 담은 정의를 실천하고, 정의를 포함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정의 없는 사랑은 편향되고, 사랑 없는 정의는 가혹한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과 정의는 함께 가야 합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는 자신의 집에 있을 때부터 스스로 흠이 없이 살며, 구부러진 생각이나 불의한 일, 악한 일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주변을 좋은 사람들도 가득하게 하고, 불의한 자들은 물리칩니다. 선한 영향력은 좋은 사람들이 모일 때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작은 촛불들이 모일 때마다 어둠이 더 물러가듯이, 우리 생명사랑 신앙공동체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참된 신앙인들이 몰려오는 곳이어야지, 왜곡된 신앙, 독선적이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으며, 기득권을 쥐고 지배하려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몸이 따르지 않고 말만 무성하며, 그리스도교 진리를 탐구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참된 신앙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는 강요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강요로는 참된 신앙교육과 양육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전적으로 각 개인이 주님 앞에서 스스로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회자와 각종 위원회 및 모임을 두고 목회활동을 통해서 양육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결국 그것을 감당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본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 선교를 위해 정말 필요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신앙의 뿌리를 깊게 내린 사람입니다. 코로나 19의 상황은 교인들 무리에 묻혀 적당히 신앙 생활하던 우리의 게으름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홀로 스스로 서도록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신 것입니다. “신앙의 식구들이 함께 모이지 못할 때에도, 너는 홀로 언제나 내 앞에 서 있느냐?”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는 양적 성장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질을 묻고 계십니다. 성숙한 신앙인지 아닌지를 점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올 해 안에 예배 처소를 옮기게 됩니다. 새로 마련하는 공간은 지금의 공간보다 좁습니다. 전체가 함께 모이기엔 작은 공간입니다.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작은 공간은 목회활동에 제약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공간의 협소하다고, 신앙마저 작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잘 분배하면 작은 공간이 오히려 좋은 교육을 하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 11시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중에도 언제든지 새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정말 소중하지만, 그 예배가 실제로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하고 성숙시키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진지하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모이는 예배가 흩어지는 선교로 이어지고 있는지, 교회당의 예배가 생활신앙으로 거듭나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모이는 예배이든지 온라인 예배이든지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려는 의지, 더 성숙한 신앙을 가지려는 의지가 없다면 예배는 일종의 퍼포먼스, 쇼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은 구경꾼이나 시청자가 될 뿐입니다. 그저 보고 즐기고, 만족감만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종교 시장의 소비자로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목회와 신앙 훈련이 지향하는 바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종교적 욕망을 채우려는 소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변화가 없다면 “예배를 통해 은혜 받았다”, “설교가 감동적이다” 하는 모든 말들은 자기 위안에 머무를 뿐, 하나님 나라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정적 만족을 신앙으로 착각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씀하시게 될 것입니다.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오늘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 세상에 왔다고 하십니다. 물이 화해와 포용, 살림과 생명의 이미지라면 불은 파괴와 심판, 죽음의 이미지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물이시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불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살리고 무엇을 없앨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불을 지르러 왔다는 말씀에 이어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분열의 양상을 보면 부모세대와 자녀세대 사이의 갈등을 다룹니다. 여기 부모와 아들과 그의 아내, 딸이 함께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싸운다든지, 시누이와 올케가 싸운다든지 남매가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직 부모 세대와 그 자녀 세대만의 갈등을 부각시킵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매일 것인가, 아니면 다가올 미래를 선취할 것인가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미 변했고, 앞으로도 더욱 변해갈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과거의 영광과 습관, 지금의 기득권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불평등은 심해지고 부패한 세력들이 여전히 기세 등등 합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세상은 전혀 새롭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맞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잘못된 관행을 붙들고 그것에 집착하면서 자신만을 위해 몰입하는 인간이 되지 말고, 새롭게 열리는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면서 모두가 함께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라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에 타협은 없으며, 이 둘 사이에 평화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단도직입적인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교황은 자신을 하나님처럼 여겼습니다. 교회는 큰 성당을 지으며 돈을 벌기 위해 면죄부를 남발했고, 페스트로 인해 많은 성직자들이 죽자 성직 매매가 성행하며 아무나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조차 읽을 줄 모르는 성직자들이 교황청에서 내려주는 설교문을 외워 그저 낭송할 뿐이었습니다. 교회는 지옥에 대한 백성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성서의 정신을 위반할 뿐만 아니라 황금 송아지의 유혹에 넘어가 세상 보다 더 추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교회에서 성서는 올바르게 읽히지 않고, 기독교 윤리는 땅에 떨어졌으며, 교회의 조직과 체제는 힘과 권력, 돈에 의해 운영됩니다. 이러다 보니 세상 사람들을 향한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탄탄한 신학에 기반한 실력 있는 목회자들은 줄어들고, 세상의 비난과 비판 속에 교회는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다시 교회개혁이 필요한 때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다시 성서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들의 외침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성경말씀을 읽고 그대로 이 세상에서 살려고 철저하게 노력할 때만이 교회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이것을 해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하나의 악세사리나 취미처럼 될 때, 교회는 맛 잃은 소금이 됩니다. 루터가 쓴 95개조 논제 중 50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교황이 면죄부를 퍼뜨리는 자들의 강제 징수를 알고 있다면 그는 성 베드로 성당을 양 떼들의 가죽과 뼈로 건축하느니, 차라리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 더 낫다고 그리스도인은 배워야 한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신을 보존하고 건축물을 유지하기 위해 교인들의 피땀 어린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거짓 뉴스나 왜곡된 복음으로, 자본주의의 물들어 오염된 말씀으로 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면 그런 교회는 망해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 선교의 진지를 구축하자는 것이지, 재테크를 한다거나 세상의 고통은 무시한 채 우리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라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다면 저는 당신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맑게 깨치는 것이요, 진리를 사랑하고,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요, 이웃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자신을 내어 주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적인 이익보다 공공의 감각을 키워 공존하고 상생하는 사회를 만드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위해 우리는 새 공간을 마련합니다.

우리들의 도전과 열정들이 진정으로 우리 신앙을 참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길 빕니다. 교회가 복음을 하찮게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우습게 여겨,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됩니다.

21세기는 중세 시대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본의 힘이나 국가의 공권력으로 신앙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자유롭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가지겠다고 선택하셨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려는 유혹을 뿌리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불을 지르신 예수님의 그 거룩한 사랑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이미 불이 붙었다면 제가 바랄 것이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아 버림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거룩한 하나님! 생명사랑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이 거룩한 변혁의 주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하여 주소서. 적당히 교회 다니면서 세상도 즐기려는 유혹을 뿌리치게 하여 주소서. 오히려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일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게 하여 주소서.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데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그 옛날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영을 부어주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거룩한 영을 주셔서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노인들이 꿈을 꾸게 하여 주소서.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에 더 멋지고 당찬 선교를 해 나가게 하여 주소서. 온 성도가 한 마음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유로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송축하고, 우리의 입술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10월 마지막 주를 보내며 올 한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한없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겪는 어려움들을 이겨내게 하시고, 우리가 때로 주님께 소홀할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새 시대에 적응하며 또 다른 내일을 다시 꿈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배 공간을 이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새 공간을 허락해 주심에 감사하고, 그곳에도 하나님 나라 선교를 잘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이 시간 주님께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받아 주소서. 오늘 예배를 통해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저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께서 감당하라 명하신 소명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성령의 불을 지르십시오.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로 정진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새 시대를 여는 변혁의 주체로 서려는 생명사랑 교우들과 지금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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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또 한 번의 종교개혁을 기다리며

본문 : 왕하-22-08-14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 Luther, 1483-1546)는 법관이 되기 위해서 법학을 공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서 벼락이 치는데, 그만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루터는 법관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선행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습니다. 금식도 많이 하고, 고행하면서 수도하고, 선행을 많이 베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루터가 머물고 있는 수도원 숙소에서는. 그 공동묘지를 바라보면서 루터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어떤 존재로 설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루터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죄를 지으면 신부님 앞에 가서 고해성사를 해야 합니다 . 루터도 마음속에 죄가 떠오르기만 하면 신부님을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죄가 생각날 때마다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루터가 너무 자주 찾아오니까 신부님이 ‘제발 죄를 좀 모아놓았다가 한꺼번에 가져오라.’고 말할 정도로 루터는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럼에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공부를 마치고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중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좋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 황제에게 부탁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올라갔다고 하는 계단을 로마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 계단을 가운데 두고 성당을 지은 것이 계단성당입니다. 로마를 찾아온 사람들은 이 계단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사진) 그렇게 함으로써 죄가 사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의 전통을 따라 이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아픔은 컸지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참회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로마서 1:17 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에서 돌아온 그는 열심히 말씀을 연구하면서 ‘ 우리는 우리가 쌓은 어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이런 구원의 진리를 통해서 당시 로마 교회를 바라보니까, 로마 교회가 행하고 가르치는 것들이 너무나도 성경말씀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면제부였습니다 . 면제부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 만큼 많은 선행을 쌓지 못했다면 교황이나 로마 교회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선행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자라고 말하는 훌륭한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많은 선행을 쌓았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이 하늘 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그 선행을 사면 내가 천국 가기에 모자란 선행이 더해지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당시 로마교황청은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데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성자들의 남은 선행을 나눠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면죄부입니다. 내가 선을 많이 쌓지 않아도 돈을 많이 내고 하늘 창고에 쌓여 있는 선행을 사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고, 그것으로 교황청은 많은 돈을 거둬들인 것입니다.그것을 안 루터는 분개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가르침으로 우매한 교인들을 현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 정문 게시판에 95개 조항을 내 걸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종교개혁을 하기 위해서 시도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과 복음 진리에서 멀어져 있는 당시 교회를 향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공개적으로 토론해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로마 교황청이나 로마 천주교회에서는 루터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름 없는 한 젊은 교수의 개인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자, 교황 레오 10세는 그 다음해인 1520년 7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을 발송합니다. ‘60일간의 여유를 줄 테니 그 주장을 철회하라’고 협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521년 12월 10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이 보낸 파문장을 불살라버렸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많은 독일 사람들은 환호했고, 루터는 그런 독일 백성들의 후원을 힘입어 본격적인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독일 백성들이 루터의 종교개혁을 열렬하게 지지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사실상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11-12세기만 해도 교황청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황제를 손에 쥐고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1303년에 벌어진 아나니 사건으로 교황청은 그 권력을 황제에게 빼앗기고 프랑스 아비뇽에서 교황이 거의 포로가 되는 시기를 맞게 됩니다. 세상 권력에게 로마 교황청이 완전히 패하고 만 것입니다. 이 아비뇽 사건 이후로 로마 교황청은 교회의 권위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잘못된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그 잘못된 방법이 바로 폐쇄적인 계층구조식의 성직체계를 견고히 하는 것이었고, 7성례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폐쇄적인 계층구조는 엄청난 비리를 양산하게 됩니다. 성직이 돈으로 매매되고, 가장 경건에 힘서야 할 수도자들이 타락하게 되고, 고위 성직자들은 사치와 불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바로 잡고 교회를 바로 세워야 할 교황청 역시 자기들의 배만 채우는데 정신이 팔려 잘못된 교회들을 바로 잡지 못했습니다. 또한 7성례를 강조하면서 신앙에 미신적인 요소가 점점 가미되었습니다.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제후들과 귀족들, 중산층들이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청에 내야할 세금을 거부하고, 로마 천주교회의 간섭에 항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타락한 로마 천주교회에 항거했지만, 뭣 모르고 힘이 없는 수많은 백성들은 로마 천주교회에 저항할 힘이 없어 불만스럽더라도 로마 천주교회를 따라가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는 교회개혁에 대한 열망이 점차 무르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독일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1884우리나라에 복음의 씨가 뿌려져 교회가 세워진지가 벌써 1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놀랄만한 엄청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경제규모에서는 세계 13 위인 우리나라가 선교사 파송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 현재 공식적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가 2만 명이 넘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파송 받은 선교사들까지 하면 약 4만 명이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안에 교회도 4 만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시골에도 교회 없는 동네가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때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했습니다. 1 천 2 백만 성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2005년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교회 교인은 불과 860만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외국에 선교사를 몇 명이나 보냈느냐? 우리나라 안에 교회가 몇 개가 있느냐? 교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정말 교회다운가?’ 하는 것입니다. 세계 10 대 교회 가운데 7 개가 한국에 있다고 하는데,

큰 교회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고 , 세상에 소금이 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이렇게 교회들이 많은데 , 저녁만 되면 빨간 십자가 네온사인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데 , 왜 우리 사회에 어두운 구석들이 그렇게 많이 있습니까? 기독교 인구가 그렇게 많은 데 왜 우리 사회에는 점점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라지고 있습니까? 십자가 탑은 많은데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성도들은 많은데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처럼 살아가는 성도다운 성도가 적은 한국교회는 절대로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영국의 유명한 강해설교가인 데니스 레인(Denis J. V. Lane) 목사님께서 한국 교회에 이런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자랑만 하지 마십시오 . 100 년 전에 영국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교회의 전성기를 가졌습니다 . 그러나 그 화려하고 자랑스럽던 영국교회는 지금 텅텅 비어 있고 박물관처럼 전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 50 년 후에 한국이 영국과 같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충고라고 생각합니다. 왜 영국교회가 박물관처럼 변해버렸습니까? 한국 교회를 바라보는 영국 목사님은 왜 한국교회가 영국교회처럼 곧 박물관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한국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인 한미준에서 지난 2004년 한국갤럽에 의뢰해 여론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사회적인 부정적 이미지’를 꼽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서 우리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본 몇 편의 한국 영화 가운데서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이고 있는 영화가 많았습니다. 한국 영화 속에서 기독교와 교회가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을 단순히 영화감독의 책임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게 지금 우리 사회를 비춰주는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왜 우리 사회는 교회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일까요? 종교사회학자인 감리교신학대학교 이원규 교수는 이렇게 진단합니다. “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너무 인색하다 . 전도 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준다 ,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한다 ,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 등이다 .” 참 부끄러운 이야기들 아닙니까?

사실 한국교회는한국사회를 위해서 교회가 하는 봉사가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이 사회봉사를 하는데도 왜 한국사회는 한국교회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까?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 봉사는 많이 하는데 순수한 뜻으로 봉사하지 않고 , 봉사를 교회성장의 한 방편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 교회 밖의 사람들 입장에서 말한다면, ‘ 자기들 교회 크게 만들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무슨 봉사냐 ’ 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지요. 봉사는 봉사 그대로 순수해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전도도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해야지, 교회를 부흥시키고 큰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전도하는 것은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도 본질에서 벗어나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한다면 그게 바로 타락입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교회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통해서는 생명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비본질적인 모습으로는 새 역사를 창조해갈 수 없습니다. 신앙과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로마 천주교회로부터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는 말입니다. 타락한 로마 천주교로부터 종교개혁을 통해 신앙과 복음의 본질을 찾고자 했던 개신교회를 흔히 ‘ 개혁교회 ’ 라고 말합니다 . ‘개혁교회’라는 말은 개혁된 교회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개혁되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목숨을 걸고 비본질과 싸워 본질을 지켜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비본질은 무엇입니까?

<개혁되어야 할 비본질적인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

그건 바로 세속주의 입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기준에 물든 교회의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그 대표적인것이 교인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요 , 큰 교회로 부흥시킨 목사가 성공한 목사라는 생각입니다. 숫자놀음에 빠진 것입니다 .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이 교회의 목표가 될 수 없고, 교회의 부흥이 교회와 목회자를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몇 천 명 모인 교회는 진짜 좋은 교회이고, 몇 십 명 모인 교회는 형편없는 교회입니까? 몇 십 명의 성도들을 위해서 온 힘과 정성 다해서 목회하는 목회자는 능력 없는 목사입니까? 누가 그렇게 평가합니까? ‘몇 명이 모이느냐? 헌금이 얼마나 되는냐? 교회당을 예쁘게 잘 지었느냐?’로 교회를 평가하려는 생각이 바로 세상적인 가치기준입니다 . 마케팅목회 -실제 로버트슐러 수정교회 켈리포니아 유명, 신학교 성장교과서…,,,,,,지금,,,세상적인 가치기준은 숫자와 크기에 의해 평가됩니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기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크기로 교회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얼마나 신실한가를 보십니다. 헌금을 얼마나 많이 냈느냐를 보시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를 보십니다.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보시지 않고 얼마나 충성했느냐를 보십니다. 여러분, 우리 성경에 성공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도서 10:10 절입니다.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그런데 성서주석가인 발터 침멀리(Walther Zimmerli, 1907-1983) 교수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지혜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좋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성공’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만, 사실은 성공이라는 말보다는 ‘ 유익 ’ 이라는 말이 더 바른 말입니다. 지혜를 잘 사용하면 삶에 큰 유익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성공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충성스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 그래서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없는 대신 ‘충성’이란 말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그런데 세상적인 가치에 물들어버린 한국교회와 한국교회 성도들은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성공해야 하고, 목회도 성공해야 하고, 사업도 성공해야 하고, 인생도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하나님께 받은 사명인 것처럼 말입니다.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로 성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남들처럼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매일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스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충성스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 뿐입니다. 돈을 많이 버느냐? 부흥하여 큰 교회가 되느냐 하는 것은 충성하다 보면 주어질 수 있는 결과일 뿐입니다. 열심히 일해도 돈을 많이 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가 생명을 바쳐 교회를 섬기는데도 부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돈 많이 버는 것에 목적을 두면, 돈이 벌리지 않는 일에는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교회가 부흥해야 한다는데 목적을 두면 목사가 바른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적인 사고 속에서 껍데기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본질인기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껍데기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준 삼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한 이야기입니다. 요시야 왕 이전에 히스기야 왕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우상을 다 제거한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면서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므낫세는 북 이스라엘 19명의 왕과 남 유다 20명의 왕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왕입니다. 무려 55년 동안 남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55년 동안 통치하면서 남 유다 역사상 가장 어리석고 가장 불신앙적인 왕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다 제거해 버린 우상들을 다시 도입했습니다. 우상의 천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므낫세의 뒤를 이어 아몬 왕이 2년을 통치하다가 반역으로 인해 죽고, 요시야가 8살 때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전국적으로 우상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요시야가 왕이 된 지 18년이 되었을 때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그 동안 므낫세와 아몬이 통치하던 시기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잃어버렸고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 왕 때에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서기관 사반이 그 율법의 말씀을 요시야 왕 앞에서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아 왕은 그 옷을 찢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우리가 말씀을 떠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다는 것이니다.그리고는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우상의 제단들을 다 불태우고 헐어버렸습니다. 우상에게 경배하던 모든 이방예배를 다 없애버렸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이방 우상의 제사장들을 다 죽였습니다.(23:20)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잘 표현해 준 말씀이 열왕기하 23:24절입니다. “요시야가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거기에 보면 ‘드라빔을 없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드라빔은 가정수호신입니다. 가정마다에 가정에서 섬기는 신들이 있었는데, 그 신들을 다 없앴다는 말입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있는 우상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남몰래 행하던 모든 우상숭배까지 근절시켰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요시야가 얼마나 철저하게 우상을 제거했는지를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요시야가 왜 종교개혁을 감행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종교개혁을 감행했습니까?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 되는 신앙으로 바로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신앙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살던 삶이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 중심의 생각들이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진정한 신앙개혁이 아닙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좋은 쪽으로 개혁된다 하더라도 말씀의 기준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참된 신앙개혁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신앙개혁은 교회와 사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에서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내가 주인이 되려하는 가정은 아직도 드라빔을 품고 있는 가정입니다. 그 드라빔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드라빔도 제거해야 합니다. 내 생각의 드라빔, 내 욕심의 드라빔을 불태워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내 가정에도, 내 삶에도, 내 생각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종교개혁이 이루어집니다. 열왕기하 23: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요시야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칭찬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거짓되고 부패한 것들을 바로 잡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시야에게 이렇게 놀라운 칭찬을 하셨습니다.무엇이든 개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단 시간에 되는 것도 아닙니다. 열왕기하 22: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요시아 왕은 왕이 될 때부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셨던 다윗의 길을 따라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때를 기다렸습니다. 18년이란 세월을 기다리며 준비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한 것을 기회로 종교개혁을 과감하게 단행했습니다.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감행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을 것입니다. 적지 않는 저항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그 어떤 반대에도, 그 어떤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 개혁을 단행했습니다.그런 요시야를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신 것입니다.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개혁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 두 번의 결단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 몇 마디 깨달았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끊임없는 결단과 노력이 없이는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게 힘든 과정이기에 그 과정을 이룰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말씀에 기준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말씀에 비춰 바꿔져야 할 모습들은 없습니까? 개혁은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바꿔져야 합니다. 내가 개혁되고 바꿔지면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십니다

2. 제목 : 종교개혁의 원리

본문 : 롬-01-15-17

오늘은 전세계 모든 개신교가 종교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그 이유는 1517년 10월 31일에 종교 개혁자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그 교회당 정문에다가 95개조 항의문을 써 붙이고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계 역사를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 역사의 구분에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주후 590년까지를 고대 교회사라고 하고, 주후 590년-1517년 까지를 중세 교회사라 하며, 주후 1517년 이후 현대까지를 근세 교회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후 590년-1517년 까지를 또 다른 말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 시대라고 하며, 이 1,000년의 중세사를 암흑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초기 그토록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공인을 받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교회는 커다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황제의 비호를 받게 되자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고 발언권이 강해지며, 신앙 외적인 것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교회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잃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교권이 하늘을 찌를 듯 해서 황제의 권위까지 짓누르게 되었습니다. 곧 교황이 황제의 우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카놋사의 굴욕’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는데, 당시 로마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3일 동안이나 교황에게 맨발로 눈밭에 서서 잘못을 빈 유명한 사건입니다.

교황 이노센트 3세 때는 교황권의 전성기였습니다. 어떤 날 교황이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물을 교황청 창고로 싣고 오는 수레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신학자에게 ‘우리에게 은과 금은 없다는 말은 이제 지나갔다. 저 많은 물질을 보아라’고 하자, 아퀴나스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말이 없어진 것처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도 없어졌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교회가 세속적으로 부유하게 되자, 성직자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파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구원을 돈으로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어졌습니다.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 당시 중세 교회의 타락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황제가 일층 왕관을 쓰는데 교황은 삼층 왕관을 쓰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추기경들도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도적놈처럼 돈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교황청은 성직매매, 술주정, 사기, 도둑질, 강도질, 사치, 매춘행위, 협잡질 등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가득차 있다”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38년 로마의 추기경들이 교황 바울 3세에 보낸 ‘개혁의 제안’라는 글에서 로마 교회의 비리와 타락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첫째 병폐는 성직자의 임명 문제입니다. 철없는 아이들, 심지어는 전적으로 자격이 없는 무뢰한과 타락자들이 성직자로 임명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사제들이 무식하고 부도덕하다는 것은 분통이 터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로마시 안에는 창녀들이 귀부인들처럼 왕래하는데 그 뒤를 성직자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부끄러운 병폐가 중단되어야만 하겠습니다”

당시 교회는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서 거대한 성당을 새로 짓게 되었습니다. 그 건물이 바로 오늘날의 바티칸 궁전이 있는 성 베드로 성당입니다. 얼마나 대단하게 지었든지 시작한지 백 년이 지났는데도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건축비를 모금하기 위해서 면죄부라는 것을 팔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연옥이라는 것을 믿는데, 이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고통의 장소라고 일컬어 집니다. 연옥이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선행이 부족한 사람들이 가서 고난을 받고 있다가, 천국으로 가게 되는 장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일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공덕을 쌓아 주면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 갈 수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면죄부를 사게 되면 살아 있는 사람은 그냥 천국으로 가게 되고, 만일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사게 되면 연옥에 있는 영혼이 즉시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하면서 팔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이 면죄부를 팔기 위해 루터가 살고 있는 비텐베르크에 와서 면죄부를 사라고 교묘하게 선동하였습니다. 루터는 여기에 심하게 반발하면서 95개조 항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교회당 정문에 붙여 놓고 공개 논의를 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CD 사진- NO. 35. 5. 15. 40 순으로) 그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 지금으로부터 485년 전입니다. 이 사실이 급기야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고, 마침내 종교 개혁의 불길이 세차게 일어나서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변화시켜 놓았고, 교회의 변혁으로 말미암아 중세의 막이 내리고 근대 사회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개혁자들이 외친 종교 개혁의 원리들이 무엇입니까?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것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밑에 두고 있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정경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해석권이나 성경을 읽는 것까지도 평신도들에게는 제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모든 신앙 내용을 교회의 전통이나 교회의 권위보다 먼저 성경에 두었습니다. 교회가 결정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에 신앙의 표준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성경을 신자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개방시킨 것이 종교개혁의 근본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칼빈은 “성서를 떠나서 신앙을 논하는 자들은 광난증 환자(정신병자)”라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2. 오직 믿음(Sola fide)

마틴 루터를 종교 개혁의 선봉자가 되게 한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신득의’ ‘sola fide’ 이것은 벌써 구약의 하박국서에,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서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쳐 준 진리이지만,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진리를 고의적으로 은폐해 버리고,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의 공로나 적선을 내세우며, 암매한 신도들을 속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같은 주장은 성경에 근거를 둔 구원관이며, 동시에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 즉 공로 사상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것입니다.

3. 오직 은혜(Sola gratia)

당시의 로마 카톨릭은 행위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있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고, 특히 교황 레오 10세 시대에는 면죄부를 사야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논리로 우매한 신자들을 속였는데, 개혁자들은 죄를 용서받는 일이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서만이 가능하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같은 주장은 행함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1000년이 넘는 로마 카톨릭의 ‘이행득구’주의 이단 사상에서 모든 영혼을 해방시킨 자유의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4. 만인 제사장(신자 개위 사제)

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개인은, 신부나 사제를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있다는 사상이며, 속죄의 근거도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마치 그 동안 신부들이 속죄의 권한을 가진 것처럼 잘못 가르쳐 온 것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성직자들의 타락과 인간중심주의적인 사상으로 오염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한 이상과 같은 도전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1000여년 동안 버티어 온 중세 천주 교회의 썩은 뿌리를 흔들어버린 하나님의 채찍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85년전 한 이름 없는 사제가 비텐베르그 교회당 문에 95개 논제를 붙이므로 독일의 조용한 시골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개혁의 봉화는 기독교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고, 나아가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참으로 종교개혁은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세계사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한국 교회는 어떤 형편에 있습니까?

1)자유주의 신학의 침투입니다.

18세기 이후 독일을 중심하고 일어났던 각종 자유주의 신학이 우리 한국 교회에 들어와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격하시키고, 반대로 이성과 인간의 권위를 최고로 내세우는 것이며, 신학을 윤리학으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사신신학, 살신신학, 혁명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종교 다원주의, 뉴 에이지운동 등은 모두 무신론적 신학인 것입니다.

2)신비주의의 위험입니다.

성령 충만을 빙자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용납할수 없는 것들이 난무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한국 교회는 자유주의 신학보다 신비주의 신앙으로부터 크게 위협을 받는다고 할 수있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하여 여러 가지 이단이 나옵니다. 성령 충만하면 직통 계시를 받고 방언, 입신, 신유, 예언 등을 할 수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한국 교회가 심각할 정도로 깊은 병에 걸려 있는 것을 몇 가지 말할 수 있다면 1)분열 2)부패 3)물질 만능주의 4)기복신앙 5)개인주의 등을 들 수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개혁되어져야 할 것은 없을까요? 예수믿고 학습을 받고 세례를 받고서도 옛 습관이나 관습 그리고 못된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없을 것입니다. 양심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행동이 변화가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관습을 버려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람을 잡아먹던 식인종 추장이 예수를 믿고 나서 사람을 잡아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백인 상인이 상업차 아프리카에 가서 그곳의 추장을 만났습니다. 그 때 추장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백인 상인은 경멸하는 태도로 “그 책은 옛날 인문이 발달되지 못한 시대에나 보던 책이요. 지금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는 그런 책을 볼 필요가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그 추장은 한참 동안 백인 상인을 쳐다보더니 말하기를 “만일 성경이 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벌써 내 뱃속에 들어갔을 것이요. 세상은 변하여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변할 수 없소. 이 말씀이 사람을 잡아먹던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만든 것이요. 과학이 결코 우리를 변하게 한 것이 아니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상인은 부끄러운 얼굴로 그 자리를 떠나가 버렸다고 합니다.

알콜 중독자인 창녀에게 두 딸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두 딸은 자기들의 어머니가 어떤 생활을 하는지 곁에서 또렷하게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들은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를 떠나 각각 독립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어머니는 수소문 끝에 큰딸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큰딸은 가슴 아프게도 자기와 똑같이 창녀가 되어 있었고 더욱이 알콜중독자였습니다.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애야,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니?”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어찌 지금과 다르게 될 수 있었겠어요?”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둘째 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녀는 훌륭한 가정의 착실한 주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애야, 어떻게 이렇게 되었니?”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어찌 지금과 다르게 될 수 있었겠어요?” 놀랍게도 두 딸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주어진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죄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교권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자유자라 할 수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의 종이 되거나, 황금과 정욕과 권세와 인기의 종이 되거나, 사람의 종이 되거나, 사업이나 일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라고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말하기를 ‘세상의 어두움만을 탓하지 말고, 네가 먼저 작은 촛불이 되라’고 했습니다. 깨끗한 세상을 만드는 최초 최고의 행위는 내가 먼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남을 재는 잣대로 나를 재고, 남에게 들이대는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내게 가해서, 내가 먼저 개혁되어지고, 내가 먼저 갱신되어지고, 내가 더 성화 되고, 그래서 더 사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더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더 좋은 신자가 되고, 이러한 신자들로 가득한 우리 송정 중앙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제목 : 제2의 종교개혁

본문 : 겔-37-01-6

I.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

119 구조대원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가운데 누렁이 구출작전이라는 TV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농가에서 어릴 때 시장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사왔습니다. 단단한 목줄을 매어 두었고 또 헐렁한 끈으로 기둥에 묶어 두었는데 끈이 풀어졌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1년 2년 3년 4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강아지는 무척이나 커졌습니다. 어린 강아지 때에 묶어 두었던 목줄이 그대로 있는 바람에 강아지가 몹시도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붙들어 풀어주려고 하면 후딱 도망을 갑니다. 하는 수 없이 구조대원들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되었고 마취주사를 쏘아서 강아지의 끈을 풀고 보니까 이미 목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수술하여 겨우 고쳐 주었지요. 강아지는 성장하고 커져만 가는데 목줄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강아지는 커다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세상은 달라지고 변화되고 있는데 나는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다. 교회는 달라질 줄을 모른다 그러면 망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보리 새우란 놈이 있습니다. 허물을 많이 벗어야 살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허물이 부드러워서 자주 허물을 벗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가면서 허물은 딱딱해져가고 벗는 텀이 길어집니다. 그러다가 허물이 딱딱해져서 더 이상 허물을 벗지 못하면 그 허물에 갇혀 보리 새우는 죽어갑니다.

교회도 기업도 세상사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나만 가만히 있으면 망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지 485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Reformation = form을 새롭게 한다. 본래의 form으로 돌아간다. 본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의 환원운동입니다. 초대교회로의 환원운동입니다. 주님의 가슴속에 있던 그 본래의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장로회 신학 신학대학원에서 대안 목회라는 제목으로 셀목회를 강의합니다. 첫 시간에 – “셀교회 운동은 대안목회를 찾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세우시기를 원했던 바로 그 목회, 바로 그 교회를 찾는 원안 목회입니다. 한국교회가 부흥이 안되기 때문에 대안을 찾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에 우리에게 보여주는 원래의 모습, 원안을 찾아가는 운동입니다.” 강의합니다.

그러므로 빌 백헴 목사님은 셀교회 운동은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 예배의 갱신, 사역의 개혁이었습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이 성직자들의 손에 있던 성경을 빼앗아서 성도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었다고 하면, 두 번째 종교개혁은 목회자들의 손에만 머물러있던 사역을 빼앗아서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운동입니다.

한국교회를 자주 방문했던 영국이 낳은 훌륭한 강해설교가 데니스 레인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향하여 뼈있는 충고를 남겼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자랑만하지는 마시오. 한국교회도 이제 변하지 않으면 시대속에 버려진 창고나 박물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100년전 영국은 영국은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교회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끄러나 그 화려하고 자랑스럽던 영국교회는 지금텅텅 비어있고 박물관처럼 전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50년 100년후 한국교회가 지금의 영국교회와 같이 되지 않는다는 어떤 보장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차분이 그리고 겸손히 내일을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들이 과장과 허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들이 마지막때를 준비하고 있는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절망만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추수 때가 되었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이 한국교회에 커다란 기대를 보내며 살려달라 애원하고 있습니다. 추수할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위대한 영혼의 대추수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계도처에서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1세기의 추수를 우연에 맡기지 않으십니다. 멋진 승리를 계획하는 명장처럼 멋진 작전을 가지고 계십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추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처참한 몰락이냐? 엄청난 추수냐?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 몸부림은 일종의 혁명적인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제2의 종교개혁이 됩니다.

II. 본문의 이해

오늘 본문을(겔37:) 연극무대 위에 올려봅니다. 여러분을 극장으로 초대합니다. 연극의 제목이「마른뼈 골짜기」입니다.

① 남루한 옷차림의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으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부정과 부패를 회개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열방을 의지한 죄를 회개하십시오. 위정자들도 국민들도 회개하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이 나라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자그만치 200백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② 잠시 백성들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한발과 재난,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습니다.

③ 그래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수많은 군대를 끌고 쳐들어 옵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옵니다. 도처에서 비명소리로 가득합니다.

④ 비극적인 장면들이 계속 지나갑니다.

유대 왕은 두 눈이 뽑힌채 쇠사슬에 묶여 개처럼 끌려갑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건장한 젊은이들이 포로로 질질 끌려갑니다. 성전과 회당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마을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이런 비극적 역사가 7년동안이나 계속되어졌고 골짜기마다 마른 뼈로 흘러 넘쳤습니다.

장면이 바뀌어집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포로의 한 사람으로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에스겔아 너는 나를 따르라”(겔1:1) 한 골짜기에 다다랐더니 그 골짜기 처처에 마른 뼈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에게 희망이 있겠느냐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그래서 이 연극의 주제는 “마른 뼈에도 소망이 있는가?”입니다.

마른 뼈 골짜기의 상황을 오늘 본문 2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① 뼈가 심히 많다는 말은 절망의 상태가 온 백성에게 퍼져있었음을 말합니다. 전 민족적인 참상이었다.

② 아주 말랐다고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재생의 기운이 전혀 없었습니다.

③ 뼈가 온 지면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뼈는 본래 땅속에 묻혀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지 못하니 보기에 흉하고 더럽고 무섭기만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너무나도 비참하게 죽었기에 장사지내 줄 사람이 없었던 게지요. 버려진 시체 – 짐승들이 뜯어먹었습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 까마귀가 뜯어먹었습니다. 뼈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수치가 열방 앞에 여지없이 드러난 상황이었습니다. 7년동안 이 비극은 계속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은 1500년전 천주교회가 생겨나면서 시작하여 지금부터 500년전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천주교회의 비참한 모습, 교회의 앙상한 뼈만 남은 바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이 뼈들은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기록합니다. 여기 앙상한 뼈들은 7000만 내 민족입니다. 굶주린 내 동포들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한국교회요 내 교회요 내 영혼일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도 달라져야 합니다. 조직만 남은 교회가 생명으로 넘쳐나야 합니다.

에스겔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이 마른뼈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살려내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루터와 칼빈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마른뼈처럼 화석화되어지고 조직화되고 타락하여 죽어 넘어진 천주교회로부터 생명있는 군대, 생명력 넘치는 교회를 찾아 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와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죽은 영혼 살려내고,

죽은 교회 살려내고, 민족을 구원하는, 세계 열방을 구원하는 교회를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면서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가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 가야합니다. 가면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친구들이 피신할 것을 요청하고 만류하지요. 이때

웰매스의 재판장으로 들어서며 루터는 당당히 이야기합니다. “웰매스의 지붕을 덮은 수만장의 기왓장이 악마로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네 주장을 꺾으라 말하지 않는 이상, 성경이 네 주장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나는 당당히 내 목숨과 함께 이 재판장에 들어서리라.” 모든 친구들의 권유와 만류를 뿌리치고 갑니다. 그 용기, 그게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라는 확신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무릅쓴 결단이요 각오였습니다. 한국교회안에서 주님의 가슴속에 있던 교회, 사도행전적인 그 교회를 회복하는 일은 일종의 개혁이요 혁명입니다.

여러분의 동의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헌신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루터만큼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 이 교회가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그 교회를 이루어 가기를 원합니다.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비전에 이글거리며 뜨겁게 타오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들은 이 시대의 루터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III. 천주교로부터

종교개혁의 첫 번째 영역은 아무래도 기독교 복음을 왜곡시키고 저질화시켰던 천주교로부터 주님이 전해 주셨던 원래의 복음, 복음의 원형을 회복하는 복음의 회복, 진리의 회복운동입니다.

우리교회 협동목사님으로 함께 교회를 섬겼던 장신대 조직신학 교수 김명룡 교수님의 「기독교와 천주교의 비교연구」라는 명강의를 기억합니다. 그분의 얘기인즉슨,

전세계적으로 볼 때 개신교 국가들이 카톨릭 국가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발전된 나라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인권, 자유가 신장되고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의 열강들을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많은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들입니다. 일반적으로 봐서 카톨릭 국가들은 두세 국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2류 국가로 전락이 되어 있습니다.

왜, 카톨릭 국가들이 개신교 국가에 비해서 현격하게 뒤쳐져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연구 논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논문들을 조사해 보면 카톨릭 정신이 개신교 정신에 비해서 상당히 열등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고 바꿔 말하면 우리 개신교 정신이 카톨릭 정신에 비해서 월등히 우수한 정신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종교는 국가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에서 여론 조사를 해보면 카톨릭이 가장 호감을 갖는 종교로 되어 있어요. 반면 우리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굉장히 나쁩니다. 불교와 개신교가 비슷하죠. 그래서 한국에서는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카톨릭 교회로 많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개선이 아니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위대한 종교에서 그렇지 않은 종교로 가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회의 성례엔 7성사라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고백성사입니다. 고백성사라는 것은 일명 고해성사라고도 하는데 신부님께 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 카톨릭교회에 의하면 세례에 의하여 원죄가 사해집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자범죄가 사해집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신부님에게 가서 고해하는 성사가 있기 때문에 일반 성도들이 신부를 비난하는 경우가 개신교에 비해서 월등히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개신교회는 하나님 앞에만 죄를 고백하기 때문에 사람 앞에는 다 숨겨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신부님 앞에 가서 크고 작은 모든 죄를 다 고백하고 살기 때문에 신부님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 죄를 다 들여다 보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다닐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끔 신부가 큰 잘못을 하더라도 신부님에게 덤벼드는 천주교 신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덤벼들려고 하다가도 신부님이 두 눈 크게 부릅뜨면 고개가 수그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톨릭교회는 사제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죄가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사제가 원죄를 사하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론적으로 카톨릭교회는 면죄부를 팔아먹을 수 있습니다. 중세 때 카톨릭이 면죄부를 팔아서 심각한 타락상을 보였는데 물론 지금 카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지는 않지요. 그러나 그들이 갖고 있었던 그 신학적인 이론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사제에게 가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과의 만남속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측면은 마리아론과 관련이 있습니다. 카톨릭교회에 가보면 많은 성도들이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론의 핵심은 5가지 정도로 요약이 되어집니다. 첫째,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였다. 둘째,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 없는 삶을 살았다. 셋째, 마리아는 육체를 갖고 승천했다. 넷째,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시고 교회의 어머니시다. 다섯째,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마리아의 중재성입니다.

여러분 과연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로 살았을까요?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는 물론 동정녀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예수님의 많은 동생들을 요셉과 결혼하여 낳은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성경의 분명한 기록에도 분명하고 교황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틀릴수 있지만 교황의 말씀은 틀릴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입니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었고 죄없는 삶을 살았다.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많는 진리들을 마리아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께 기도하는게 유효할까요? 카톨리교회에서는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가능한 대로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예수님은 효성이 지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마리아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기도는 가능한 한 마리에게 하곤 합니다.

마리아 신학자로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 성 리구리란 분이 「마리의 영광」이란 책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한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봤습니다. 왼쪽 끝에는 예수님이 서 계시고 오른쪽 끝에는 마리아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왼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중간쯤 올라가다가 위를 보니 위에는 주님이 계시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얼굴로 보고 계시는 겁니다. 그 사람이 놀라서 떨어지는데 그때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들려 오기를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오른쪽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성모 마리아가 자애롭게 맞아주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마리아가 이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에게 뭔가를 얘기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보다 마리아가 더 인자한 성품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행위로, 교황의 말씀으로, 덧칠한 크나큰 오류외에도 이처럼 로마 천주교회는 진리를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직접 하나님께 고백하여 용서받는 것이라면 카톨릭은 간접적으로 만나고 사제를 통해 용서받는 간접적인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신성한 기독교를 하등한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 교리의 개혁은 상당부분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개혁은 완성되지 못한 미완성 교향곡이 되었고, 사역의 개혁은 큰 시도조차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은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가 되었습니다.

IV. 예배와 사역의 개혁

전세계의 살아있는 교회들은 한결같이 예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사람이 살고 민족이 살아납니다.

저 자신도 한소망교회를 개척한 이후 지난 10년동안 지속적인 관심이 어떻게 하면 우리의 예배를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성경의 백성들이 드렸던 바로 그 예배,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행복해 하고 은혜를 누리는 그런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꾸준히 고백해 왔습니다.

지금 우리교회 주일 예배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고 더 많이 기도할 것이지만 나름대로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예배학적인 모델을 발견한 것으로 자부할 만 합니다.

장로회 신학대학이 발간하는 신학연구지 「교회와 신학」 바로 지난호에서는 -영광스런 경배와 찬양이 있는 예배 : 한소망교회 예배 이야기 – 라는 글이 실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매주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우리교회 예배를 탐방하기 위해 찾아오곤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화려한 프로그램이나 거대한 예배당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그 자녀들의 총제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요 사귐입니다. 때문에 예배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크게 보이거나 생각이 많이 나면 안됩니다. 사람이 영광을 받거나 강조되는 일은 되도록 절제되어야 합니다.

지나치게 웅장한 강단이나 강대상, 권위적인 강단은 검소하게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강단위에 설교자나 기도자가 앉는 권위적인 의자는 성도들의 위치로 내려오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심지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설교자도 감추어져야 합니다. 특별한 가운이나 장식, 박사학위를 표시하는 무늬들 등은 의도적으로 검소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먼저 가장 영광스런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다가 예배에 실패하면 안됩니다.

가끔 한국교회 안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자가 예배를 인도만 하지 자기 자신이 가장 영광스런 예배자요, 가장 영광스런 예배를 보여주는 자임을 망각할 때에 자기 자신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성경의 백성들이 어떻게 예배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지난번 교회에 있을 때에 어떻게 예배했는지 생각하지 마시고, 어떤 예배가 나를 기쁘게 하는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의 백성들은 어떻게 예배했는가? 주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시간, 감정을 표현해도 좋습니까? 운다든지, 웃는다든지, 손을 든다든지, 기뻐 춤을 춘다든지 감정 표현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오히려 역으로 질문합니다. 젊은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선수 하나만 나타나더라도 열광적으로 환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 귀한 손님, 대통령만 나타났다 하더라도 온 식구들이 기쁨으로 반겨줄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 자리에 천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되신 그분, 만주의 주가 되신 그분이 영광가운데 이 시간 임재해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찬양 가운데 기도가운데, 말씀 가운데, 내 영혼에, 내 중심에 머리마다 임재해 계십니다.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된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 예수님께서 피흘리신 그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상처가 있든지 모두다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기 위해 피 묻은 모습 그대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성 삼위일체 영광이 이 예배 가운데 충만히 넘치고 있는데 그렇게도 감정적인 표현을 안해도 좋은 것입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신 일을 열광적으로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마다 입술만 달삭거리는 찬양은 옳지 않습니다. 배에 힘을 주고 큰소리로 찬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셨을 때 기뻐하며 환영하며 박수를 치며 찬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손을 들고 환호하며 찬양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때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춤을 추며 경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600장 찬양을 보면 19세기에 만들어진 복음성가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혀 드리는 찬송,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을 기뻐하는 찬송, 하나님이 오심을 마음껏 행복해 하는 찬송이 많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우리 예배는 가능한한 이 시대에 불려지는 모든 찬송들, 특별히 가장 최근에 우리 민족적인 정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맞는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 그것을 찾으려고 함께 몸부림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몸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시간을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때묻은 것, 저는 것, 흠이 있는 짐승을 드릴 수 없습니다. 물질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가치를 드리는 것입니다.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 교회 예배가 살아날 때에 에스겔이 보았던 그 마른 뼈 같은 영혼들이, 교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 진리의 개혁 그리고 예배의 갱신과 함께 마지막 남은 과제가 사역의 개혁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12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거기 보면 목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목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도, 목회를 하는 것도, 교회를 세우는 것도, 목사의 사역으로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며”자를 “여”자로 바꾸면 정확한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목사가 교회에 존재하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성도를 온전케 함으로써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이라”

목사의 사역이 따로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역이 따로 있습니다. 목사의 사역은 성도를 온전케 하는 사역이며, 성도들의 사역은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 셀을 세우는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의 사역인,

1. 성도를 온전케 한다는 성도들의 흠과 티가 없도록 도와준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마른뼈 골짜기에 팔뼈, 다리뼈, 두개골들이 사방에 흩어져있습니다. 그 뼈들을 제 위치에 정확히 갖다 놓아서 팔은 팔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리는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머리는 머리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입은 입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제 위치에 끼어 맞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준비시켜서, 구비시켜서.

목사의 해야될 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은 성도를 구비시키는 것입니다.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2.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봉사란 말은 가족이란 단어에서 왔습니다. 가족은 오이코스, 봉사는 오이코노모스입니다. 가족을 위하여, 배고픈 가족을 위하여, 밥을 짓는 어머니의 손길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추운 가족들을 위하여 옷가지를 챙기고, 떨어진 옷을 깁는 어머니 바느질 손을 –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셀에서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 주는 사역을 말합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나의 격려와 칭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격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셀 안에서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함께 기뻐해 주는 활동을 말합니다. 배고픈 내 셀 멤버들을 가족들을 위하여 밥을 짓는 손길을 말합니다. 봉사의 사역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섬겨주는 목회 사역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사역할 때 전통적인 교회에서 이 모든 일들을 목사들이 감당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일들은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사역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써야될 면류관을 그동안 우리 목회자들이 빼앗아서 모두 짓밟고 만 것입니다.

십부장이 해야될 일도 구역을 섬기는 일들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들도 심방하는 일들도 아픈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는 일들도 교인들이 기뻐할 때 함께 춤추는 일들도 모두 목사 혼자 그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에게 이 모자를 나누어 주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의 성도들이 되었을 때에 셀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You can be a Leader.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셀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예배를 섬기는 사역자가 되십시오. 셀의 사역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디자인하신 참된 교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제2의 종교개혁에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V.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들은 우리 시대에 에스겔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른뼈들을 살려내라. 영혼들을 살려내라. 침체된 한국교회를 살려내라. 교회가 살아 민족을 구원해 내라.

① 바른 진리에 바로 서십시오. 개신교회는 여러 종교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가족, 이 교회의 멤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가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우려 했던 영광스런 교회가 천주교회로 잘 이어져 내려오다가 개신교회가 작은 집으로 뻗어나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세우길 원했던 그 영광스런 교회 그 교회가 교리적으로 예배적으로 조직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천주교회입니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주님이 세우길 원했던 바른 복음으로 바른 진리로 바른 교회 모습으로 돌아가 주님의 교회에 전통성을 회복하고 거기에 바른 뿌리를 내린 진정한 교회, 참된 교회, 주님의 심장속에 있는 교회로 돌이키는 운동이 종교개혁입니다.

② 한걸음 더 나아가 예배를 살려내십시오. 예배의 영광을 회복해 가십시다. 예배 실패자는 인생의 실패자입니다. 예배에 실패하는 사람은 영원의 실패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배의 성공자들은 이 시대에 진정한 개혁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485년전 종교개혁자들이 완성하지 못했던 영광스런 예배를 우리가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이 시대에 참된 개혁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사역자로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디자인하신 교회의 성도로 살아가십시오. 반드시 예배의 성공자가 됨과 함께 셀에 참여하여 공동체의 영광, 공동체의 생명력, 공동체의 아름다운 경험을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십시오. 이 민족의 지도자, 마을의 지도자, 셀의 리더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은 종교개혁의 완성이요 이 시대에 주어진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4.제목 : 종교개혁 운동이란?

본문 : 롬-01-16-17

이런 운동이 종교개혁 운동이다.

서론: 축원

10월 마지막 주일은 종교 개혁 주일입니다. 우리가 기념하여 지키는 종교개혁 주일은 1517년 10월 마지막 주일(31일)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타락하고 부패한 신앙을 개혁하고자 95개 조항의 공개 토론 제목을 교회의 게시판에 붙이면서 시작된 신앙개혁 운동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신앙 개혁 운동이 온갖 방해와 위협과 협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열매를 맺어 프로테스탄트 곧 오늘의 개신교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해서 종교 개혁의 근본 신앙을 상고하면서 지금 우리의 신앙이 진정으로 처음 루터가 외쳤던 개혁된 신앙에 있는가를 스스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러분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개혁되어야 할 부분이 발견되면 새로운 신앙의 결단으로 타락되고 부패된 부분들을 성령의 검을 통해서 도려내고 참된 신앙으로 온전해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성경중심의 신앙, 성경중심의 삶을 사는 자가 되자는 운동이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당시에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는 교권의 권위가 더 힘이 있었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이 신앙생활에 중심이어야 하는데 성경이 신앙생활에 중심이 되지 못하고 조상들의 유전과 교리가 신앙생활에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교권이 교리를 앞세워 별 이상한 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속죄권 판매였습니다.

속죄권이란 1515년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대성당을 짓다가 자금이 모자라게 되자 교인들에게서 돈을 모으기 위하여 속죄권이라는 것을 팔았는데, 이 속죄권이란? 죄지은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려면 돈을 내고 속죄권을 사야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또 이 속죄권만 사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팔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현혹되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이 속죄권을 사게 되었고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거액을 내고 종이 쪽지에 불과한 속죄표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순전히 종교 사기꾼들의 엄청난 죄요, 신앙의 타락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카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톨릭과 교황에게 도전하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려고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들의 신앙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신앙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다른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여러분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생활에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인생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생명이요, 능력이요, 축복이 되는 것이지요.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절대로 복종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다시금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물질만능 시대, 과학 제일주의 시대, 우주 시대가 되는 21세기가 가까워 오면서 성경말씀을 한낱 윤리나 도덕 교과서 정도로만 여기려는 풍조와 물결을 여러분들이 막아야 합니다. 성경은 윤리 교과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구원받고 천국 가서 영생을 얻게 하는 생명의 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성경의 말씀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것은 변질시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변질시키면 안됩니다.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이 비추어 주는 빛을 따라서만 살아서 영원한 축복을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운동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카톨릭의 교리는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기의 고행으로 인해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고 속죄권을 돈을 주고 사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괴롭히며 높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내려오고 고행과 수행으로 의로워 지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루터는 이것이 다 성경과 대치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봉독해 드린 롬 1:17의 말씀을 붙잡고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자신의 수행이나 고행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타종교와 기독교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관입니다. 타종교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의 수행이나 공로로 구원이 가능할까? 대답은 한마디로 아닙니다.

중세 카톨릭의 교리와 같이 인간의 노력이나 수행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카톨릭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에는 인간의 공로가 0.00001%도 가미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구원받아 의로워진 자들의 믿음의 행동은 모두 영원한 상급과 연결이 되어지고, 영원히 누릴 복과 관계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믿음 밖에 없음을 믿으시고 믿음으로 의로워진 여러분들의 삶이 영원한 영광과 상급과 부요를 바라보고 믿음을 실천하는 삶을 사셔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모두 덧입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종교개혁은 신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신앙운동입니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중보자로 믿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아를 숭배하고 그 앞에 가서 기도합니다. 카톨릭의 이단성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출생시키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신 분이지, 마리아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중보자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신앙인에게 존경의 대상은 되어도 예배의 대상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예수님보다 더 높이고 숭배하고 예배하는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중간에 누구를 거쳐서 나가는 자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예수님이 친히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휘장을 찢어 주시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만인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베드로전서 2:5 – “너희는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여러분은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카톨릭은 지금까지도 이것을 믿지 않아요. 그 예가 죄를 지으면 신부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부가 죄가 사하여 졌다고 선포해야 죄 사함 받는 거예요. 이것도 카톨릭의 이단성입니다.

여러분들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목사한테 와서 고해성사를 하십니까? 아니지요. 여러분들은 직접 하나님께 나아와서 자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으시지요.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집례하는 목회자가 있기는 하지만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종교개혁 482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과 교단 교계의 신앙을 보면 다시금 종교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교권주의, 자기 중심 신앙, 분파주의, 형식주의, 등등 개혁되어야 할 부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요. 바라기는 먼저 우리 개개인의 신앙 개혁을 중단없이 계속해서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온전히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바른 신앙운동이 확산되어 감리교단의 신앙 개혁이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 한국 기독교의 제2의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한국교회가 되고, 통일된 민족교회를 이루어 21세기에 세계에 진리의 빛을 밝히 비추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는 일에 여러분의 교회가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제목 : 위기속의 믿음

본문 : 히-11-23-40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11:23-40

4년 전, 일본인 세 명이 이라크 저항세력들에게 억류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온 일본 열도가 들끓었습니다. 여론은 “누가 사지(死地)에 가라고 시켰느냐!” “저런 사람들은 죽여 버려야 해!”라는 등, 동정보다는 비난이 앞섰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자업자득”이라는 식의 비난에 가까운 편지와 이메일과 전화가 쏟아졌습니다. 우익 언론들은 가족들에게 정부와 국민들에게 폐를 끼친 것을 사과하라고 했고, 일본 정부는 그들을 구출한 비용을 가족들이 지불하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구출되어 도쿄 공항에 내렸을 때는 살아 온 것이 기뻐서 가족들과 끌어안고 반가워하는 것이 아니라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은 그런 일본의 반응에 놀랐습니다. ‘자기 국민이 잡혀 있다가 살아 돌아왔는데 어쩌면 저럴까?’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두 달 후, 우리나라의 김선일씨도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의 반응은 일본과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온 국민이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진심으로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습니다. 정부도 김 씨의 석방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참수를 당하고 차가운 시체로 돌아왔을 때, 온 국민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진심으로 애도했습니다.

4년이 흐른 지난 7월 19일, 한국청년 23명이 아프가니스탄에 의료 봉사를 하러갔다가 탈레반에게 납치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 사회의 반응이 전과 같지가 않습니다. 좀 싸늘하다고 할까요?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봐도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반응이 많습니다. “위험 경고를 무시하고 간 사람들을 왜 혈세로 데려와야 되냐?” “인질의 목숨과 상관없이 군사적으로 작전을 시행하라.” “너희 하나님에게 구원해 달라고 해봐!” 마치 십자가 밑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도들을 사지로 몰고 간 목사는 자폭하라!” “극성맞은 예수쟁이들! 막무가내식의 선교!” 4년 전과 달리 거부감이 큽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느 사람이 사마리아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고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를 돌봐주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나타나서 강도 만난 사람에게 말합니다. “사마리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왜 정신없이 그리로 다니느냐? 그쪽으로 다니지 말라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냐?” 그리고 그 사람을 발로 차고 욕을 하고 침을 뱉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반응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교계에서도 “영웅주의가 아니냐?” “과시용이다” “준비 부족이다” “선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자” “선교의 전략을 바꿔야 된다”는 등의 비난과 질책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은 선교 정책을 탓할 시간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할 시간입니다. 슬퍼할 것을 슬퍼하고 장례식을 끝내고 피랍자들이 가정과 교회로 돌아오고 난 후에 그 모든 것을 토론하고 평가할지언정 지금은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들을 위해서 함께 슬퍼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어깨를 끌어안아주고 함께 기도해야 할 시간인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우리와 반응이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돕는 한국 봉사자들을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일부는 이 사건에 대해 짜증을 내고 비난하지만, 현지인들은 한국인이 피랍된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외국 군대는 철수하더라도 봉사자들은 더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는 시민 2,3천 명이 한국인을 납치한 집단을 비난하고 피랍자들을 석방하라고 데모를 했습니다. 탈레반 출신의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협상을 하고, 한국 사람들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 이런 때에, 우리 국민들이 부정적인 시선으로 조롱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이번에 대통령을 대신해서 특사로 아프가니스탄의 현지에 간 백종천 청와대 비서는 우리 교회 집사님이십니다. 2부 예배에 참석한 그의 아내와 함께 백 집사님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백 집사님이 이번 사태를 잘 마무리하고, 남은 22명을 한국으로 데려 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마치 결혼과 같습니다. 결혼을 할 때 서로 약속을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그대를 사랑하고 아끼며 그대의 신실한 남편과 아내가 될 것을 하나님과 부모님들과 모든 증인들 앞에서 약속합니다.” 신앙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건강, 성공, 돈, 일류학교, 평화와 웃음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슬플 때도, 병들 때도, 가난할 때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좋은 일 있어도 좋지 않은 일이 있어도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떤 환경과 여건 중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힘과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의 언행심사 가운데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성경에서도 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기적적인 승리를 체험하면서 남긴 간증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이삭과 야곱, 요셉은 죽음 가운데서도 살아났고, 요셉은 노예에서 한 나라의 총리가 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아주 멋진 이야기지요.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그 아이를 건져서 결국 애굽 공주의 아들이 되고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가 됩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멋진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의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고 애굽의 모든 부하보다도 더 고난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홍해가 갈라지고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았고,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고 전진함으로써 결국 이 모든 위대한 역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도 믿음으로 일곱 바퀴를 돌았을 때, 큰 성이 무너져 내렸고 여리고성을 정복했습니다. 라합도 믿음으로 생명을 구했고 가문을 살려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성경에는 믿음으로 위대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승리의 이야기를 듣기 원하고 승리를 기대하고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32~35절). 믿음으로 이것이 가능합니다. 과거의 하나님과 오늘의 하나님과 내일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든 승리와 모든 성공과 모든 축복을 경험한 과거의 신앙인들처럼 우리도 이 시대 우리의 삶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으로 이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생의 한 면에 불과합니다. 인생에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온갖 고난을 감수하고, 고난을 거치면서 아름답고 좋은 신앙의 간증을 남겼습니다. 인생의 한 면으로는 믿음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체험했고, 또 한 면으로는 역시 믿음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냄으로써 후세에 좋은 간증을 남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35~37절). 죽은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고 톱으로 두 쪽을 냈습니다. 두 쪽 사람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라고 합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가신 배 목사님도 머리부터 발까지 7발의 총알을 맞았다고 합니다.

터키로 성지순례를 가면 ‘갑바도기아’라는 곳을 들리게 됩니다. 그곳에는 땅에 조그만 구멍이 나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8만 명이 살 수 있는 거대한 도시를 만나게 됩니다. 암벽 지역에는 사방에 굴이 뚫려있습니다. 핍박을 받아 갈 곳이 없었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그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방황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이런 고난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난을 감수하면서 그 속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지난 주 수요예배에서 우리는 주기철 목사님에 관한 영화를 참 감동적으로 보았습니다. 만약 주 목사님과 사모님이 “우리가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다른 목사님과 사람들은 다 신사 참배를 하는데 우리만 끝까지 이럴 필요가 없지! 나도 편안하게 살아야겠다!”하고 그저 편안한 삶만 살았으면 우리가 참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주 목사님과 사모님이 그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좋은 간증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지, 일사각오가 무엇인지, 헌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 간 젊은이들은 의료관련 봉사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4년 전에 그곳에 병원을 세우고 해마다 봉사를 갔습니다. 이리저리 놀러 다니다가 붙잡힌 것이 아닙니다. 다른 젊은이들은 아프가니스탄의 ‘아’자도 생각하고 있지 않는데, 이 젊은이들은 이 전쟁의 나라를 생각하고 질병을 돌보고 약을 주러 간 것입니다. 다른 젊은이들은 휴가라고 바닷가에 가고 산에 놀러 갔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휴가를 아프가니스탄에 바쳤습니다. 다른 젊은이들은 집에 앉아서 아시안게임을 보며 “아, 드디어 한국이 골차기에서 이겼다!”고 즐거워한 그 시간에 이 젊은이들은 자기의 시간과 돈을 바쳐서 그 머나먼 곳에 섬기러 갔습니다.

그 중에 미국 CBS와 인터뷰 한 임현주라는 여자 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술할 수 없는 아이들 두 명을 세브란스 병원에 데려와서 수술을 시키고, 한국에 조금 더 있어야 되는데도 이번 팀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것을 알고 통역을 하겠다고 바로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로 한국에서 편안하게 일해도 됩니다. 굳이 그곳에 갈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곳에 갔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프가니스탄의 불쌍한 아이들을 사랑하고, 약 없고 의사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그곳 사람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가슴으로 간 것이지 과시를 위해, 영웅주의자가 되려고 간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감수하면서 영적인 믿음의 간증을 남긴 사람들이 성경에도 있고, 오늘 이 땅에도 있습니다.

이번에 돌아가신 배 목사님의 아버님께서 제주도에서 예배드리는 모습과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흔들림이 없고 차분하고 안정된 모습이셨습니다. 아들이 죽었는데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붙들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목사님의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남편 한 사람의 희생으로 족하니 나머지 사람들을 빨리 돌려주세요. 그분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는 장례식을 못합니다.” 참 멋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아픔을 겪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믿음으로 좋은 간증을 남기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제 인생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힘든 일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좋은 일이 있든지 나쁜 일이 있든지, 건강하든지 병들든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동일한 믿음으로 좋은 영적인 신앙의 간증을 남겨서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삶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배 목사님의 가족과 피랍자 가족을 위해, 그리고 피랍자들의 무사한 귀국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비난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쟁이들 어쩌고 하며 비아냥거릴 때도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요, 사랑할 때요, 함께 울 때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자살폭탄의 종교가 아닙니다. 용서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무고한 사람을 납치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해 “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이 참된 복음이 들어가서 그들의 삶이 변화되고 배 목사님의 죽음이 그 나라에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씨앗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도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 평화의 하나님을 알아서 자살폭탄 대신에 사랑의 폭탄을 남기는 축복이 그 땅에도 나타나길 원합니다. 아프가니스탄부터 저 아프리카까지 거리낌 없이 사랑의 봉사를 다녀올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선을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이번 일로 위축당하지 않고 세상 끝까지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새로운 축복이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으로 대처하면서, 선한 일이나 선하지 않은 일이나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막론하고 언제나 믿음이 이기는 것을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이번 일이 새로운 헌신과 새로운 희생과 새로운 믿음으로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는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들의 희생이 한국교회를 살리는 새로운 믿음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6.제목 : 종교개혁의 현대적 의미

성경본문 : 에베소서 4 : 17∼29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10월 마지막 주일은 개신 교회에서 지키는 종교개혁 기념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M. Luther)가 로마 교황청을 향하여 95개조에 달하는 항의문을 내걸고 개혁의 기치를 든 지 485주년이 됩니다. 중세 로마 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교권의 남용과 교회 안에 우상적 요소를 용납하는 등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교회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형편은 정치, 사회, 문화, 예술 할 것 없이 개인의 자유와 의사는 무시된 채 모두 다 로마 교회의 교권주의 자들에게 장악되어 있었습니다. 급기야 문예 부흥(Renaissance)운동이 터지게 되고, 이어서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둘 다 로마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지만 전자는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입니다. 옛날이마 지금이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이어져야 됩니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의 요체(要諦)를 「말씀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이는 단순히 옛날로 돌아가는 복고(復古)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이나 단체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바꾸어 버리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히브리서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개혁」은 궤도를 이탈하고 비정상적인 길로 가는 것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정상적인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며 개혁 교회가 지향하는 노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이루어나가는 생명 적인 운동입니다.

Ⅰ. 구조적 변화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일러줍니다(고전10:31).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 최고의 가치를 망각한 채 자기의 욕심에 따르는 목적을 추구하곤 합니다. 이럴 때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자기를 합리화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소위 「장로의 유전」이라 불리우는 제도로 사람들을 얽어 묶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15:3).

개혁은 이렇게 잘못된 제도나 관행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제도를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1) 중세 로마 교회의 잘못된 제도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 교회는 급속도로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직자들에게 특혜가 주어지면서 성직이 매매되기 시작하였고, 사도들의 신앙이 퇴색되면서 교회는 속화일로를 걸었습니다. 그레고리 1세(GregoryⅠ)가 교황으로 즉위한 A.D 590년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까지 약 1천 년간을 신앙적으로는 기독교의 암흑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데, 로마 교회에서는 이 때가 교황 권이 하늘을 찌를 듯한 전성시대라고 말합니다.

특히 그레고리 7세로 불리 우는 힐데브란트(Hildebrand)가 교황이 된 후(1073-1085),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땅에도 왕이 둘일 수 없다”고 하며 교황을 유일한 권력자로 인정하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 개혁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교황 레오 10세(Leo Ⅹ. 1513-1523)때 시행한 속죄권 발매 제도였습니다.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게 되자 그것을 조달하는 목적으로 속죄권을 판매하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맬 수 있고 풀 수 있는 권세를 받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천국과 지옥문을 열어 놓았다. 이 속죄권을 사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사함을 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해 표를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궤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곧 천국으로 옮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명시하였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회의 또는 교황의 권위를 빙자하여 만들어진 제도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하는 요소들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 개혁운동인 것입니다.

(2) 세상 나라의 불합리한 제도들

인간 역사를 통하여 보면 개인이나 국가간에 불평등한 조약이나 법을 제정해 놓고 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런 것은 명분상 합법적인 절차를 내세우지만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것들입니다.

노예 제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과거 기독교 국가들 중에도 오랜 기간 노예제도를 법으로 정해 놓고 이를 시행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를 폐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진 자가 그것을 남용하여 국민의 인권을 탄압했던 사례나, 사용자가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했던 일들이라든지 모두 다 하나님의 원리에 거스리는 일들을 하면서 이를 제도와 관행으로 묶어 놓은 경우들입니다.

창조 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유나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중에도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개혁 신앙이 앞서는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되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가 아닌 이교도들의 지역이나 로마 카톨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일수록 독재 권력과 인권의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의 척도에 따라야 됩니다.

흔히 사람들의 하는 일은 다수의 힘을 모아 밀어붙이는 식으로 일종의 포풀리즘(populim)적인 방법을 선호하고 있어서 그것이 또 다른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성경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이며 가장 정당하고 바른 길을 일러주는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다.

개혁자 루터는 1521년 교황 레오 10세의 명을 받은 찰스 황제의 부름을 받고 웜스(Worms) 국회에 나갔는데, 황제로부터 “그대의 글들을 취소할 용의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루터는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을 지적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는 취소할 수 없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노선입니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ce) 오직 성령(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구호가 개혁 신앙의 모토(motto)입니다.

Ⅱ. 생활의 변화입니다.

본문 말씀 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28절에는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개혁은 사상이나 이론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행동으로 옮겨지는 삶이어야 합니다.

(1) 위선의 옷을 벗는 것.

신앙 생활이 잘못 길든 사람은 자칫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구조 속에 갇혀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마7:15).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형식 종교로 전락해 버린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마23:15). 그들은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는 자들이었고 속은 불신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 거룩하고 진실한 것처럼 위장하고 다녔습니다. 마태복음 23:5-7에 보면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51:6).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식 종교로 전락하였고, 겉으로만 거룩을 표방하면서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습니다.

(2) 과감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수님꼐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는데 그곳에서는 세계 각 국에서 모여온 사람들을 상대로 소와 양과 비둘기 같은 동물을 팔거나 돈을 바꾸는 등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소와 양을 내어쫓고 돈 바꾸는 상을 엎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요2:13-16). 이 때 제자들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하였습니다(요2:17).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타락한 교회와 변질되어 버린 신앙을 과감하게 타파하며 제 모습으로 돌려놓게 하는 시도입니다. 개혁 운동은 잘못 된 일들을 과감하게 척결하고 정리하는 행동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종교가 암흑기에 들어갔을 때 분연히 일어나서 모든 우상 숭배의 잔재를 척결하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개혁을 단행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합 왕과 맞서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제사장들을 진멸해 버린 엘리야나(왕상18:40), 므낫세 이후 우상 종교로 전락해 버린 유대 왕국을 하나님 중심의 나라로 바꾸어 놓은 요시야 왕 같은 인물입니다. 열왕기하 23:1-16에 보면 그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율법 책을 찾아 그 말씀에 명시된 도리를 백성에게 낭독하고 곳곳에 있는 우상의 전각들을 훼파하였으며 심지어 우상 숭배를 주도했던 무리들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 뼈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3) 교회의 사명과 관련됩니다.

요한복음 2:1-11에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번 이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쓸모 없는 물을 가치가 있는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도하시는 교회 운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변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바뀌어지는 생명적 변화를 의미합니다(고전15:53).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변화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춰질 때 바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복음의 위력을 나타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기 못할 것이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마5:14-16).

Ⅲ. 인격의 변화입니다.

본문 말씀 22-24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옛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인격의 변화가 개혁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 오는 변화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5:17).

(1) 마음은 인격의 주체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겨냥하고 작용하므로써 그 인격을 새롭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중 씨 뿌리는 비유는(마13:18-23), 네 종류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여기 좋은 땅이 아닌 길가 밭이나 돌 밭이나 가시떨기 밭은 모두 버린바 된 자연인 그대로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문 말씀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허망한 마음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마음이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마음을 뜻합니다. 로마서 1:28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은 마귀가 표적으로 삼는 마음이요 온갖 죄악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더 흉악한 범죄를 유발시키게 되는 것입니다(롬7:20). 이처럼 황폐한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개혁 신앙인 것입니다(빌2:5).

(2) 회개하므로 마음을 비워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마음을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마5:3). 그것은 청결한 마음과 직결되는 것입니다(마5:8). 마음을 청결케 하는 작업은 회개하므로 가능해집니다. 로마서 1:29-31에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마귀의 속성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로마서 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변화와 개혁은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므로 이루어집니다. 오순절에 성령받은 베드로의 셜교를 들은 무리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행2:37-38).

(3) 성령의 역사로 되어집니다.

로마서 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게 되면 모든 육신의 소욕은 소멸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라사인의 마을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이 들려 소리를 지르며 무덤 사이로 돌아다니는 사나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옷을 벗고 광란극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안에 있는 귀신들을 쫓아 내신 후 맑은 정신이 들어갔을 때 그는 옷을 입고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눅8:26-39). 곧 상실된 마음이 제 주인을 찾으므로 비로소 새롭게 변화가 되어진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지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성령의 주도하시는 능력에 힘입어 생명적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7.제목 : 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히

본문 : 히-13-01-8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자기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브리서 13:1-8)

서울 상계동 쪽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14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나와 전에 살던 상계동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14년 전의 살던 상계동은 흔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4차선, 8차선으로 뚫리고 대형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어서 여기가 나 살던 동네인가 믿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습니다만 요즘은 변화템포가 빨라져 1년이면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골짜기를 메워 평지를 만듭니다. 컴퓨터의 경우 6개월이면 모양과 기능이 바뀝니다. 자동차의 경우도 1년이 멀다하고 모델이 바뀝니다.

그러나 가장 변화 무쌍한 것은 사람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변덕을 부리고 바뀝니다. 생각이 변하고, 태도가 변하고, 말이 변합니다. 그래서 장사도 변덕쟁이들의 기호에 맞춰야 되기 때문에 변화를 주는 장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유럽의 전통적인 자동차를 꼽는다면 메르세데츠벤츠, 볼보, BMW, 아우디, 싸브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차들은 전통적으로 지켜 내려온 모델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전적인 디자인을 지켜 나왔습니다. 그런데 고전적인 디자인만을 고집하다보니 장사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차종들도 혁신적으로 디자인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스포츠카를 만들고 새 모델을 바꾸어 자동차 시장에 내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변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하는 속도가 그보다 더 빠릅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갈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철이 들고 나이가 들고 공부를 많이 하고 교회생활의 연륜이 길어지고 이런저런 직분을 맡을수록 좋은 쪽으로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도가 신중하고, 언행을 조심하고, 충성을 다하고, 덕을 세우고, 믿음이 견실해 지는 것은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쁜 쪽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연륜이 쌓이고 이것저것 맡은 일이 많아질수록 더 경솔해 지고, 말이 많아지고, 인격과 품위를 지킬 줄 모르고, 신앙이 점점 더 악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쁜 쪽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좋든 싫든, 원하든 원치않든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동일하시다는 것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1. 왜 동일하십니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6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신이 아닙니다. 변치 않아야 신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한복음 14:6을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고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이론, 진화론 등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다 세월 따라 변천을 거듭했고 변했습니다.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는 변치 않습니다. 예수가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 다는 진리도 변치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을 보면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했고, 1:17을 보면 “나는 처음과 나중이니”라고 했습니다.

주경가 마펫(Moffatt)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변치 않는 영원자이기 때문에 예수를 저버리고 다른 신앙의 대상을 구해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태초에 천지와 인간을 창조사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와 인간을 다스리시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1)예수님만 바라보고 믿고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정권도, 역사도, 영광도, 성공도, 부귀도, 아름다움도 다 변합니다. 저는 며칠 전 김대중대통령과 노무현 당선자가 만나는 모습을 TV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선입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물러나야 하는 분의 쓸쓸한 모습과 새로 들어서야 할 사람의 당당한 모습이 화면 가득 교차되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뉴스화면에 김우중 회장의 얼굴이 비쳤습니다. 이것도 선입견 일 수 있습니다만 당당하고 패기 넘치던 그의 모습은 간데 없고 초췌하고 실의에 빠진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여러분, 세상 것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덕부리지도, 얼굴을 바꾸지도, 생각이 오락가락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바라보고 믿으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좋은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1절을 보면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했고, 2절에서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했고, 16절에서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어느 신문 사회면에 꽂힌 큰 활자가 생각납니다. 그것은 “썰렁한 연말”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인정과 연민과 동정과 사랑이 식어 썰렁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경기 탓으로 돌립니다만 술집, 음식점 그리고 백화점을 가보면 사람들로 차고 넘친다는 것입니다. 연말의 술 소비량, 사치품 구입비, 해외여행을 합하면 천문학적 숫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어서 썰렁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일, 하던 일은 중단하지 맙시다. 사랑도 대접도 베푸는 일도 계속합시다.

3)좋은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7절을 보면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엔 본받을게 없는 사람이 있고 따르고, 배우고 본받을 것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모습, 바른 모습,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부산에 가면 성결병원이라는 큰 병원이 있습니다. 그 병원의 원장은 대연성결교회 시무장로님 이십니다. 그분은 병원수입의 ½을 교회건축을 위해 적립하고 있는가 하면 매일 예배를 드리고 진료를 시작합니다. 원장부인은 병원과 교회를 위해 기도하느라 늘 목이 쉬어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담임목사님을 깍듯이 모십니다. 엘리베이터도 목사님 보다 먼저 타는 법이 없습니다.

목사님보다 열 살 위나 위인데도 지나치다 싶어 “장로님 이러지 마십시요. 저보다 연세가 10년이나 연상이신데 이러지마십시요.”라고 만류하면 “목사님 아닙니다. 장로가 모범을 보여야죠. 제가 모범을 안보여 주면 교인들이 뭘 배우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유익이 없다”는 말은 신앙생활이나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을 본받아야 내가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좋은 사람을 본받아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아이들의 행동과 부모나 가정환경의 역할관계에 대해 연구 조사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걸핏하면 울고 징징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폭력적이고, 공격적이고, 싸움을 잘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고, 걸핏하면 집기를 집어 던지고, 싸우는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지우개를 손으로 부숴뜨리고, 손톱을 물어뜯고, 수업시간에도 안정을 찾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부모가 이혼해 아버지는 새엄마와 함께 살고 친엄마는 일을 나가기 때문에 할머니가 이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정이 목마르고 사랑이 모자란 아이였습니다. 부모의 역할이 아이의 인격과 삶을 만드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결론입니다.

금년 연말 10만 명의 청소년이 가출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출원인은 가정불화, 부모간의 다툼이나 싸움, 아버지의 폭력 등이었습니다. 본받을 것이 없는 부모 곁을 뛰쳐나왔다는 것입니다.

좋은 본을 보여줍시다.

좋은 본을 본뜹시다.

좋은 본을 물려줍시다.

4)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힘썼습니다. 이른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2∼3년 후에 다시 장로, 집사, 권사를 뽑게 될 것입니다. 최고 학부를 나왔느냐, 일류대학을 나왔느냐, 인물이 어떠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저녁예배 안나오는 사람, 새벽기도도 안나오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집이 멀다, 일이 바쁘다,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교회 중직자들과 중직자가 되려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예배와 기도에 빠지면 안됩니다. 금년은 어떻게 살았든지 새해부터는 기도와 예배를 힘씁시다. 빠지지 맙시다.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저녁 교회는 나오지 않고 식당이나 찻집에서 사람을 만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 12월 첫 주일 저녁 6시 30분경 선교회 관계로 저를 찾아온 시내 모 교회 장로님과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얘기가 끝난 후 “저녁예배 함께 드리고 가시지요”라고 했더니 “죄송합니다. 저희 목사님이 찾으실 텐데 빨리 가서 본 교회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라며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이런 태도가 바른 태도입니다. 얘기를 하다가도, 차를 마시다가도, 사람을 만나다가도 예배를 생각하고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이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교사가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밖으로 봉사를 나가는 것도 예배가 우선입니다. 예배, 기도를 결코 소홀히 하지 맙시다.

5)화해를 힘써야 합니다.

3절을 보면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했고, 7절에서는”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고 했고, 23절에서는”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고 했고, 24절에서는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구절을 한데 묶으면 사이좋게, 친절하게, 용납하고 지내라는 것입니다.

이 해가 저물어 갑니다. 상처받은 마음과 감정을 털어 버립시다. 원한이나 아픔이나 슬픔도 보내버립시다. 너 때문에 상처받고 나 때문에 속상했던 일들도 씻어 버립시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새날를 맞이합시다. 그리하여 새 마음에 담읍시다.

고무풍선 날리듯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 손에 쥐고 있는 것들 다 날려 버립시다. 새 마음, 새 생각, 새 신앙으로 출발합시다. 아멘.

8.제목 : 제 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본문 : 롬-05-01-2

오늘은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M. 루터가 [면죄부에 관한 95개조]를 비텐베르크 대학의 정문에 계시함으로 올려졌습니다.

이 95개조는 마인츠의 대주교가 재정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 것을 신학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이 개혁은 독일의 온 국민의 지지를 받아 오늘에 이르도록 확산되었는데 그 중요한 신학적 핵심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둘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셋째, 만인제사장 주의였습니다.

1. 종교개혁의 세 기둥

(1)오직 성경

당시 교회는 성경을 인용하는 정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꽃의 밑받침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경은 라틴어로 된 Bulgata역만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신부들만이 겨우 읽을 수 있었고 평신도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교회의 전통이 중요시 되었고, 그 중에는 성경에 없는 것들이 진리처럼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숭배나 연옥의 교리나 예수님의 동상이나 성지순례를 해야 천국 간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주장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으로(1532) 탄력을 얻게 되었고, 그 후에는 KJV(흠정역, 1611), 한국어 성경은 로스(Ross Version)목사의 번역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이란 원리는 기독교의 뼈대를 바로 구성하게 했고, 개신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의 주장은 영원히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주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우리 개개인이 성경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 때에 그 의미와 뜻은 살아나게 됩니다.

(2)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이 주장은 요6:28-29; 엡2:8; 빌1:29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이 원리를 깨닫게 된 것은 그의 오랜 고민과 연구 끝에 얻은 결과였습니다.

시 31:1절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갈 3:5-9; 5:5-6;

롬 1:17; 5:1

(3)만인제사장주의(벧전 2:9)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은 신부 없이도 우리가 직접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카톨릭에서 처럼 고해성사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중보자 되신 주님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여러분들을 돕는 조교와 같은 입장입니다.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멘토(Mentor)입니다.

2. 왜 또 종교개혁을 해야 하는가?

(1)본래의 개혁정신이 살아지고 있다.

교회들이 다시 성경보다는 전통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만인제사장주의가 아직 확립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개혁을 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이 병신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들을 깨워야 합니다.

(2)semper reformanda(계속적인 개혁)가 없다.

사실 종교개혁을 완성한 것은 요한 칼빈 이었습니다.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옳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카톨릭의 잔재물인 신부칭호, 의식의 개혁을 다 이루지 못했습니다.

성례식을 보면 카톨릭의 신학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7가지 성례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성경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교회의 통치를 위해서 그렇게 해온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세례식(영세), 성만찬, 결혼례,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임종도유식(종유례)입니다.

그것도 화체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두 가지만을 성례로 인정했지만 성찬식에서 공존설을 주장하여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우리 장로교는 Reformed church이기는 하지만 Reforming church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인물이 썩듯이 교회들이 이 구석 저 구석들이 썩고 있습니다.

(3)세속적 물결에 교회가 물들고 있다.

지금 세속적 물결이 홍수처럼 들어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다원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에 절대주의란 사라졌고, 모든 것은 다 상대주의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행4:12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또, 요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종교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4)청교도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본래 청교도 정신은 영국에서 성공회를 절대시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 운동이 청교도운동이었습니다.

카톨릭의 제도, 의식의 일체를 배격하고, 엄격한 도덕, 주일성수, 향락의 제한을 주장한 사상입니다. 이들이 유명해진 것은 1640-60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 때문이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은 청교도 문학으로 유명합니다.

이 청교도 정신은 네델란드와 미국 건국 초기의 신학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바로 청교도의 후예입니다. 지금 한국의 장로교는 본래의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청교도 정신의 회복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살고 교회들이 삽니다.

3. 어떻게 오늘의 종교개혁을 해야 하는가?

(1)무엇보다도 먼저 평신도를 깨워야 한다.

한국에서는 사랑의 교회의 옥 한흠 목사에게서 이 운동이 최근에 강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제 목회에 평신도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2)청교도 정신의 회복과 함께 절대 신앙, 절대순종, 절대 헌신을 해야 한다.

물론 지금은 다원화의 시대이기 때문에 절대주의를 주장하기가 쉽지 않지만 종교란 상대주의에 빠질 때에 힘이 없어지고, 영향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다 절대적이란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과 순종과 헌신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순종이 혹 목사의 독재 내지는 교회의 타락을 가져올 소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청교도 정신으로 우리가 무장해야 삼대 절대주의의 의미가 있어집니다.

(3)사경회를 통해서 [오직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한국 교회를 망치고 있는 것이 부흥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당회가 금년의 가을 부흥회를 취소한 것은 차선책이었습니다.

그러나 2006년 3월에는 제가 마지막으로 한번 사경회를 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기대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4)제자화 훈련을 통해서 평신도의 지도력을 길러야 한다.

교회의 힘은 목회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힘은 평신도들을 길러 일꾼으로 삼을 때 나옵니다.

그러므로 참 교회의 활력소는 바로 여러분들, 평신도들에게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제자화 훈련에서 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 이름은 다르지만 이 제자화 훈련이 성경강좌란 이름으로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맺는 말

지금 현실은 제2의 종교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정치가 여야의 극단적 대치로 인해서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고, 경제는 타자의욕이 완전 상실 되어서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많은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외국으로 이민 갈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이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꼭 종교개혁이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다시 본래로 돌아가는 회복운동을 통해서 새로워지기를 축원합니다.

9.제목 : 종교개혁과 생명적 변화

본문 : 엡-04-17-29

오늘은 마틴 루터(M. Luther)가 1517년 10월 31일 로마 교황청을 향하여 95개조에 달하는 항의문을 내걸고 개혁의 기치를 든 지 488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중세 로마교회는 사도들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교권의 남용과 교회 안에 우상적 요소를 용납하는 등 세속적이고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교회가 본연의 목적을 망각하고 궤도에서 이탈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형편은 정치, 사회, 문화, 예술 할 것 없이 개인의 자유와 의사는 무시된 채 모두 다 로마 교회의 교권주의자들에게 장악되어 있었습니다. 급기야 문예부흥(Renaissance)운동이 터지게 되고, 이어서 종교개혁(Reformation)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둘 다 로마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지만 문예부흥운동이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면,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입니다. 옛날이마 지금이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이어져야 됩니다. 개혁자 칼빈(J. Calvin)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의 요체를「말씀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 이는 단순히 옛날로 돌아가는 복고(復古)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씀에 의하여 새롭게 변화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이나 단체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새롭게 바꾸어 버리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개혁」은 궤도를 이탈하고 비정상적인 길로 가는 것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정상적인 길로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새롭게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며 개혁교회가 지향하는 노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개혁은 어느 특정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하며 이루어나가는 생명적인 운동입니다.

구조적 변화

성경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일러줍니다(고전10:31).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이 최고의 가치를 망각한 채 자기의 욕심에 따르는 목적을 추구하곤 합니다. 이럴 때는 항상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자기를 합리화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소위 「장로의 유전」이라 불리우는 제도로 사람들을 얽어 묶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시며 이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15:3). 개혁은 이렇게 잘못된 제도나 관행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제도를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중세 로마 교회의 잘못된 제도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 교회는 급속도로 타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직자들에게 특혜가 주어지면서 성직이 매매되기 시작하였고, 사도들의 신앙이 퇴색되면서 교회는 속화일로를 걸었습니다. 그레고리 1세(GregoryⅠ)가 교황으로 즉위한 A.D. 590년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517년까지 약 1천 년간을 신앙적으로는 기독교의 암흑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데, 로마 교회에서는 이때가 교황권이 하늘을 찌를 듯한 전성시대라고 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유나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 중에도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제한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앙이 앞서는 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도록 되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가 아닌 이교도들의 지역이나 로마 카톨릭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일수록 독재권력과 인권의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척도에 따라야 된다.

성경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이며 가장 정당하고 바른 길을 일러주는 지침서가 됩니다. 개혁주의 신앙노선은 오직믿음(SolaFide),오직은혜(SolaGrace),오직성령(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입니다. 또한 개혁은 사상이나 이론만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행동으로 옮겨지는 삶이어야 합니다.

위선의 옷을 벗는 것.

신앙생활이 잘못 길든 사람은 자칫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구조 속에 갇혀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의 특징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고 표현하였습니다(마7:15).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형식 종교로 전락해 버린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마23:15). 그들은 사람들의 눈만을 의식하는 자들이었고 속은 불신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 거룩하고 진실한 것처럼 위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양을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51:6).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형식 종교로 전락하였고, 겉으로만 거룩을 표방하면서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위선의 옷을 벗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타락한 교회와 변질되어 버린 신앙을 과감하게 타파하며 제 모습으로 돌려놓게 하는 시도입니다. 개혁 운동은 잘못 된 일들을 과감하게 척결하고 정리하는 행동입니다.

교회의 사명과 관련된다.

요한복음 2:1-11에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첫 번 이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쓸 모 없는 물을 가치가 있는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도하시는 교회 운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변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바뀌어 지는 생명적 변화를 의미합니다(고전15:53).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변화된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춰질 때 바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복음의 위력을 나타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인격의 변화

본문 말씀 22-24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개인에게 있어서 옛사람이 새 사람으로 바뀌어 지는 인격의 변화가 개혁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변화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5:17).

마음은 인격의 주체

기독교의 복음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겨냥하고 작용하므로써 그 인격을 새롭게 만들곤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 중 씨 뿌리는 비유는(마13:18-23), 네 종류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였는데 여기 좋은 땅이 아닌 길가 밭이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은 모두 버린바 된 자연인 그대로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본문 말씀 17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허망한 마음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마음이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마음을 뜻합니다. 로마서 1:28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황폐한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개혁 신앙이고(빌2:5) 곧 상실된 마음이 제 주인을 찾으므로 비로소 새롭게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지난 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고 언제 어디에서나 성령의 주도하시는 능력에 힘입어 생명적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3대원리는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정직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정직과 진실이 무엇입니까?

폴 틸리히라고 하는 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불행은 역사 속에서 볼 때, 어디에서 오는가요? 고대 사람들은 불행을 운명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잘살고 못사는 것이 운명이고, 숙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하지 않았고 중세기 사람들은 불행이 죄와 저주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병이 들고, 홍수가 나고, 흉년이 와도 그 목든 것이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어떤 노력과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대 사람들은 불행이 교만에서 온다고 합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집도 짓고, 옷도 좋은 것을 입고, 잘 먹고 생활합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에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어리석은 자를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인간은 약하고 하나님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이고 정직함입니다.

사람들이 `스티븐 호킹` 박사, `아인슈타인`보다 위대한 과학자라고 칭송을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근육이 굳어 가는 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현대의학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그가 2년이 아니라 10년, 20년 지금까지도 살고 있고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는 「시간과 역사」라는 책의 서문에 “나는 매일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또 그 힘 때문에 살아간다”라고 썼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는 것입니다. 그가 쓸 수 있는 생존의 시간은 2년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뿐 아니라 그의 능력까지도 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은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감사는 인간이 해야 할 본질입니다. 우리 인생은 감사 없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구원받은 것도 감사하고, 이날까지 살아온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 신앙인이고,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종교 개혁은 단순히 종교구조를 고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화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고, 전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하면서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수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이 신앙인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가운데 `세바스찬 바하` 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곡을 많이 썼지만 그의 인생은 작품처럼 화려하지 못했고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열 살 되기 전에 조실부모해서 고아로 자랍니다. 형 밑에서 크면서 많은 구박을 받았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결혼했는데, 그만 아내가 13 년 만에 죽었습니다. 또 다시 결혼을 해서 자식이 스무 명이나 되었지만 그 중에 열 명이 죽었으며 남은 열 명 가운데 하나는 스무 살이 되어서 죽고, 그 중에 하나는 뇌성마비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자신은 나이가 들어감에 눈이 점점 안 보이다가 그만 맹인이 되고 말았고 뇌일혈로 쓰러져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가 곡을 만드는데,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곡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오라트리오를 만들 때 맨 밑에 싸인을 하는데, `세바스찬 바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합창곡을 만들었을 때는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께.` 오르간 반주곡을 만들 때는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싸인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기를 전혀 내세우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내세우고 모든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은 그의 어려운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가?

진정한 개혁은 사람의 개혁입니다.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이 고이면 언젠가는 냄새가 나게 마련입니다. 물은 흘러야 맑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문화도 정체되어서는 안 되고 흘러야 합니다. 하나의 기관도 새로워져야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보면 쉴 새 없이 새로워졌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박해를,내부적으로는 이단을 물리쳤고 자체를 정화하는 개혁이 끊임없이 지속되었습니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는 하지만 그 기간에도 수도원에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교회를 개혁해 가는 것이 가장 건전하며 신앙적으로 모범이 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이 스스로를 점검하여 잘못된 것이나 왜곡된 것을 찾아서 바로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자체 정화 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그것이 성령운동 또는 경건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되려고 하면 “내 탓이요”라는 자각과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회개운동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운동이 일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은 모든 잘못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자체 개혁은 결코 일어나지 못합니다.

또한 개혁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므로 타인이 나를 개혁하는 결과가 됩니다. 기독교가 다른 세력에 의해서 개혁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먼저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개혁하면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항상 자발적인 개혁을 이루었지만 지금은 이 개혁이 계속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가요? 눈으로 보아 알고 있으면서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무엇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우매하지는 않습니다. 알면서도 용기가 부족하던지 아니면 안일하게 생각하는지 시작을 못하고 있습니다. 내 몸에 내 손으로 수술하는 칼을 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시해야만 살 수 있다면 감행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새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거듭난 심령들이 세례 받는 예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성례전에는 세례와 성찬식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세례는 씻음을 받음과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성만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세례(Baptism)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 것의 증명이며,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결단한 우리의 서약을 표시하고 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속에 이루어 놓으신 신분의 변화를 외적으로, 공적으로 인치는 예식입니다. 또한 세례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갈3:27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세례는 세상에 속했던 내가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타락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며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 인침입니다. 또한 세례는 회개와 용서의 예식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확증입니다. 회개하는 자녀의 죄를 완전하게 도말하여 씻겨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곧 세례입니다.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실 때 역사하신 성령님 안에서 내가 변화된 생의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주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입장허가’입니다.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한국교회가 복음을 재발견할 때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영적 각성은 도덕적 갱신과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져 교회가 사회를 정화하고 선도하는 중심세력으로 자리 매김할 수 있을 것입니다.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교회가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그 화려한 성장도 유럽교회들처럼 하나의 과거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0. 제목 : 종교개혁의 모델

본문 : 왕하-22-02-7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성전에 보내며 이르되,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산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맡은 감독자의 손에 넘겨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작업자에게 주어 성전에 부숴진 것을 수리하게 하되,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성전을 수리하게 하라, 그러나 그들의 손에 맡긴 은을 회수하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진실하게 행함이더라”(왕하22:2-7)

본래 마틴 루터는 독일 색슨이라고 하는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서 가난하게 났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신앙의 법대로 루터의 가정은 경건가정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주 엄격한 신앙지도를 받았습니다. 소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졸업한 후에는, 그 당시에 흔히 하던 대로 자기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뜻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수도사가 된 얼마 후에, 신부로서 안수를 받으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맡은 과목은 시편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였습니다.

이와 같은 성경과목을 가르치면서 연구하는 동안에 점점 깨닫게 된 것은 당시 교회의 교훈과 행사가 성경의 교훈과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끔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 신부는 마음 가운데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이 성 베드로(St, Peter)라는 큰 예배당을 짓기 위해서 모자라는 돈을 모금하는데 속죄 표를 선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이 청년 루터는 더 침묵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95조의 그릇된 점을 지적하면서 속죄 표 파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 당시의 소위 참 회개라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반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죄 사함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인데 속죄 표를 사서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반대를 하게끔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처음에 비텐베르크 작은 교회에서 시작이 되었지마는 이 소식이 온 유럽에 펴지게 되었고 종교개혁의 불길은 요원의 불과 같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교황은 자기의 정치적 세력을 이용해서 물론 능력으로 탄압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신교들도 부득이 핍박을 받다 못해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종교전이 16세기 와 17세기에 많아졌습니다.

스페인 같은 데서는 종교재판소에서 신교 사상을 가진 사람을 전부 일일이 심사해서 학살한 수가 얼마나 많은지 부지기수입니다.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도 1572년 8월 23일, 성 바돌로매 제일(祭日)때는 갑자기 구교도들이 일어나서 7천명에서 1만에 달하는 많은 신교도들의 생명을 파리에서 학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끌다가 마침내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에 의해서야 비로소 유럽에서 신교도들이 양심대로 주를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을 여러분에게 하는 것은 양심대로 믿을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얼마나 값비싼 희생이 지불되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신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는 것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입니다.

1.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종교개혁”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초기 선교사들의 문서에 보면 종교 개혁사를 “교회 갱정사”라고 했던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참회 혹은 회개란 개인의 내적 회개뿐만 아니라 외적인 개혁(혁신)을 동시에 의미한 것으로서 종교개혁이란 간단히 말하면 원시 그리스도교 회복운동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교회의 본래적인 신앙과 생활에서 이탈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 사도적 교회에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로마 카톨릭의 성례전적인 제도(Sacramental System)와 공적사상 등과 같은 비 복음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근본의 기독교,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결코 어떤 새로운(new) 신학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 신학은 어떤 새로운 신학(a new theology)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한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은 결코 16세기에 형성된 신학이 아닙니다.

이미 사도적 교회로부터 있어 왔으나 오랜 세월동안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권과 미신과 비 복음적인 전통 속에 가려졌던 것이 16세기에 와서 다시 부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개혁에서 어거스틴(Augustine)의 은총의 신학을 보며, 사도 바울의 이신득의 교리의 부흥을 보게 됩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이 종교개혁의 본질을 오해해 왔는데 종교개혁을 단순히 교리적(신학적) 개혁운동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신학이나 의식, 제도 등 중세적 오류에 대한 비판과 거부로 시작된 교회의 신학적 개혁운동으로만 생각해 왔으나 사실 종교개혁은 복음주의적 개혁운동만이 아니라 영적 갱신운동 혹은 영적 부흥운동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은 교리의 개혁(Reform)과 영적 부흥(Revival)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의 3대 원리는 신자로서 언제나 기억할 만한 불멸의 진리입니다.

(1)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죄 사함을 받습니다.

(2)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행실의 표준입니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으로 판단하여 취사 선택해야 합니다.

(3)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는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신부, 교황, 마리아가 아닙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제사장의 자격이 있습니다. 여기 신앙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선언합니다.

2. 요시아의 개혁은 그의 성전 수리 도중에 발견된 모세의 율법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왕하22:4-7, 8).

성서적 개혁운동을 말하려면 요시아의 개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시아는 퇴락한 하나님의 성전을 수축하는 과정에서 제사장 힐기야에 의해 발견되고 서기관 사반에 의해서 전달된 그 율법책의 내용을 접한 왕 요시아는 처절한 회개와 더불어 전면적이고 파격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23:4-20에 기록되어 있는 구체적이며 다양한 개혁조치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다 왕조시대 전반에 걸쳐 형성되고 확장 발전되어 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들을 거부하고 타파하여 본래의 야훼 예배의 모습을 회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 야훼적인 가나안 종교의 전통 요소들이 얼마나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과 예배에 깊숙하고도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알과 아세라로 대변되는 가나안의 전통종교 요소들은 일월성신 종교와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내부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23:4, 11-12).

가나안의 전통적인 풍요신앙의 산물인 미동의 집이 성전 경내에서 발견되었습니다(23:7).

솔로몬의 성전뿐 아니라 유다의 각 지방에서는 역시 가나안의 종교적 전통의 산물인 산당 중심의 신앙이 일반적인 종교 행태로 고착되어 있었습니다(23:5, 8, 9, 13).

심지어는 고대 지중해 동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인간제사도 당시 유다의 종교에 낯설지 않은 요소였습니다(23:10).

물론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앙은 여타 종교 및 신앙들과 마찬가지로 그 주위에 존재하는 여러 인접한 다양한 종교와 신앙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 발전되었습니다. 비록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이 주위와는 전혀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라고 믿고 싶을지라도, 그들의 신앙이 역사 문화적인 진공 속에서 생성되고 전승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본래 존재하던 가나안의 문화와 종교의 한 가운데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역사를 꾸려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가나안의 전통종교들을 자연스럽게 발전적으로 수용하고 토착화했다고 너그럽게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인들의 이러한 생각은 성경에서는 별로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요시아의 개혁은 모세의 율법 책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요시아는 성전에서 발견된 모세의 율법을 모든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공포하고 그 율법을 매개로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계약을 재확인한 후(23:1-3)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유다의 종교를 개혁한 것입니다.

가나안의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모두 파하며(신12:2), 그 제단을 헐고 주상과 아세라를 깨뜨리며(12:3), 오직 야훼께서 지정하실 한 곳에서 예배드리라는 가르침(12:5, 11)이 그 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요시아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러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행한 이스라엘 역사상 몇 안되는 왕들 중 하나입니다.

결국 요시아가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가르친 바대로 예배하고 행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종교제도 혹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제도 또는 권위와 어떤 관계를 갖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제도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대대로 전래되어 오던 선친 왕들의 예배와 신앙의 전통이 그 자체로 독자적인 권위를 갖게 되어 모세의 율법책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망각 속에 묻어버린 상황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만 의존하여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개혁을 실시한 요시아의 경건은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3. 한 가지 반드시 지적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요시아의 종교개혁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올바른 예배와 신앙을 회복하는 그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그 자신의 신실함과 경건함을 입증하고 만대의 성군으로 길이 기억되는 데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신앙과 예배행위는 유다의 국가 민족적인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요시아는 발견된 모세의 율법 책을 대한 후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왕하 22:13).

이는 신명기 28:15-68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일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곳에서 네 열조의 알지 못하던 우상을 섬길 것이라”(신 28:15, 65). 이것은 신학적 도덕적인 차원일 뿐 아니라 문자적으로 생존차원의 문제입니다.

북 왕국은 이미 이 저주의 말씀의 본보기가 된 상황입니다(왕하 17:7-18).

열왕기하 22:13에 담겨진 요시아의 현실인식은 바로 이러한 국가와 민족의 존폐의 문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시아에게 종교개혁은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행하여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선택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요시아의 종교개혁에서 보이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나타나듯이,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왕 요시아의 위대성입니다.

열왕기하 22:3부터 23:25에 이르기까지 성경본문을 구성하는 5개의 주요 기사들은 모두 요시아가 그 행위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시아가 보내며 가로되”(22:3), “왕이 명하여 가로되”(22:12; 23:21), “왕이 보내어…모으고”(23:1), “왕이 명하여”(23:4). 그리고 그가 주체가 되어 실행한 개혁의 결과 그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23:25)는 최상급의 칭송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개혁이 결국 실패로 끝나지 아니하였는가라는 질문은 타당합니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급작스러운 서거(23:28-30)로 인해 그의 정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 역사적인 상황 전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23:31이하고). 그리고 성경은 요시아의 신실함과 경건함도 그의 조상 므낫세의 죄악으로 인한 야훼의 진노를 돌이킬 수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23:26).

그 이전에 축적된 배교와 죄악이 너무 심각했다는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유다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대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25:1-7).

이런 점에서 요시아의 개혁은 실패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위로부터의 개혁이 갖는 한계에서 찾는 의견도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시아의 개혁은 힐기야를 정점으로 하는 그를 추종하는 예루살렘의 제사장 집단과 관료집단, 그리고 궁정 예언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의 지지세력을 주축으로 하여 지방의 여러 전통세력들을 제압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내지는 정치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올바른 종교와 신앙에서 지도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지적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하나님의 진노는 유다의 열왕들의 실패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유다의 열왕들도 결국은 산당을 폐하지 못한 실패를 안고 있습니다(왕상 15:14; 22:43; 왕하 12:3; 14:4). 그리고 므낫세의 배교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의 타락과 그로 인한 파괴적인 결과에 대한 지도자의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그래서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곧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시 2:7; 삼하 7:14). 그리고 친히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포함하는 일체의 예배제도를 조직 관장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교의 타락 및 회복 여부는 왕의 책임하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요시아가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전승하는데 신실했다는 점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당시 제사장들의 직무유기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한 동안 잊혀져 있다가 성전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은 제사장들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직무를 소홀히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종교 지도자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모두가 다 진실하게 맡은 일에 충성을 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수나 미장에게 공사비로 맡긴 은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하는 일이 다 진실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감시하지 아니해도 다 자기 일처럼 성실하게 할 수 있다면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송은근목사 설교창

글쓴이 : 송아지 원글보기 : 송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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