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23012 투표 이 답변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th.taphoamini.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th.taphoamini.com/wiki.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Charity Baptist Church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24,336회 및 400153 Like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Table of Contents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천국은 어디에 있나요? 천국의 위치는 어디인가요?

이 질문에 대해 먼저 짧은 답변을 하자면,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천국은 사도 바울이,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7/18/2022

View: 6378

성경문답 –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 WhyJesusOnly.com

그들이 이야기하는 천국이란 여러 가지 죄를 스스로 반성하고 염려와 불안을 정신 수양을 통해 없애고 도덕적 훈련을 통해 인격의 도야를 얻어 평강을 …

+ 여기를 클릭

Source: whyjesusonly.com

Date Published: 7/9/2021

View: 9581

천국의 비밀 —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 하나님의 약속

많은 사람들이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에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

+ 여기에 보기

Source: www.light-of-truth.org

Date Published: 5/16/2021

View: 9059

천국은 어디 있는가? – 다음블로그

보통 그런 질문을 받으면, “천국은 마음에 있다.”라고 대답한다.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

+ 여기를 클릭

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12/20/2022

View: 1004

[천국 바라보기5] 천국은 하늘에 있다. 고후12:2-4 – 썹목사

이로써 우리는 “천국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에 “하늘”이라는 답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하늘’을 크게 세가지 의미로 사용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ssub2.tistory.com

Date Published: 11/2/2022

View: 1494

아름다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 영원히 하나님을 따르리

천국의 비밀 –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한 복음 사이트에서 최근 독특한 스타일의 채팅 코너를 몇 개 내놓았다. 거기에 이런 게 있었다.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hengcao7.tistory.com

Date Published: 8/23/2021

View: 6489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천국이 정말로 존재합니까?

… 곳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에 가면 이미 죽은 내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수 있습니까?” 답변: 네, 천국은 정말로 존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르는 “천국”은 …

+ 더 읽기

Source: www.everykoreanstudent.com

Date Published: 2/9/2022

View: 7697

당당뉴스 모바일 사이트, 천국은 어디에?

신약성서에서 “하늘 나라”(천국, 天國)는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천국)는 유대교적 색채 …

+ 더 읽기

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7/8/2021

View: 8865

천국은 어디에 있나 – Fruitfulife

천국은 죽어서도 가지만 살아서도 갑니다. 하나님은 어디 사십니까? 천국에서 사십니다. 주님도 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

+ 여기에 보기

Source: fruitfulife.net

Date Published: 4/29/2021

View: 6698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 Author: Charity Baptist Church
  • Views: 조회수 24,336회
  • Likes: 400153 Like
  • Date Published: 2022. 6.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Cg6BSoNtCs

천국은 어디에 있나요? 천국의 위치는 어디인가요?

질문

천국은 어디에 있나요? 천국의 위치는 어디인가요?

답변

천국은 틀림없이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성경에서 천국의 존재와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하지만, 천국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어떠한 곳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먼저 짧은 답변을 하자면,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천국은 사도 바울이,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 고린도후서 12:1-4에서 나오는 “셋째 하늘” 그리고 “낙원”입니다. “Caught up (이끌려 간)”으로 번역된 헬라어 표현은 믿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올라가게 되는 휴거를 묘사하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 4:17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천국이 “이 땅”의 “위”에 있음을 나타내는 다른 구절들 또한 많습니다. 바벨 탑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 우리가 내려가서” (창세기 11:7)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시편 103:11에서 “땅에서 높음”이라고 묘사되었고, 시편 14:2에서는 주님께서 “굽어살피[시는]” 장소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3:13 에서 “하늘에 올라간 자”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 묘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11에서 예수님은 하늘로 “올려져 [가신]” 것으로 묘사되었고, 또 요한계시록 4:1에서 하나님께서 요한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성경구절들을 통해 천국이 지구의 공역과 별들을 넘어서 위치하고 있다고 결론 짓게 됩니다.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천국”이 그 분이 살고 계신 우리로부터 먼 곳을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 신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천상의 바하마와 같은 아름다운 곳에서 보내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이와 같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을 부를 때 항상 우리 곁에 계시고 (야고보서 4:8), 우리가 그 분께 “나아갈” (히브리서 10:1, 22) 것을 권장하십니다. 따라서, 성인과 천사가 거주하는 “천국”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성인과 천사들이 공간과 시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까운 곳으로 여겨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자가 “천국에 있다”고 할 때는 그 분이 다른 어떤 장소에 있다는 것 보다, 우리와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천국의 하나님께서 언제나 이 땅 위의 그 분의 자녀들과 가까이 계신다는 것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표현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천국이 자주 언급되지만, 그 위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위치보다 천국의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천국의 위치를 수수께끼로 남기시지 않았을 까 생각됩니다. “어디”보다는, “왜” 그리고 “누가”에 대해 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약성경은 천국이 어떤 곳인 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설명하는 것보다, 천국의 존재 목적과 누가 거주하는 지에 집중합니다. 지옥은 분리와 처벌의 장소입니다 (마태복음 8:12, 22:13). 반면, 천국은 교제 와 영원한 기쁨, 무엇보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예배 드리는 장소입니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

그 동안 고민하면서도 누구와 상의하기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겠습니다. 헌데 너무 원초적인 질문이라 답변이 곤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픈 질문은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변이 가능할지요?

[답변]

너무 원초적인 질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의문입니다. 답변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만약 답변이 불가능하면 천국의 실재성(實在性)이 의심 받게 되는 결과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기독교 신자가 다른 종교의 신자와 확실히 다른 점 하나는 언제 죽어도 천국 갈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갈 자신이 있다고 하면 벌써 그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간다고만 했지 그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아 천국에 관해 체계적인 정리가 되어 있지 않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천국이 어디 있는지 알려면 천국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정의부터 분명해져야 합니다.

특별히 질문자께서 궁금하신 내용 중의 하나가 틀림 없이 신자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이 이 우주 가운데 공간적으로 어떤 물리적 장소를 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믿기에 더더욱 천국에 관한 정의를 확실히 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1.천국의 정의(定意)

1.1. 두 가지 천국

천국에 관해 적용된 용어와 그 의미는 교회사적으로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천해 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듭니다. 지금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알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 지면 상의 제약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 복음서에 천국에 관해 비유(마13장 참조)와 설교로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모든 가르침의 주제는 천국이었습니다. 흔히 성도들의 실천적인 윤리에 관한 교훈이라고 알고 있는 산상수훈의 주제도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말로는 천국이라는 한가지 표현뿐이지만 사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흔히 말하는 천국(Heaven) 즉 구원을 얻은 영혼이 죽은 후에 가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과 경배로 섬길 곳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요14:1,2) 간다고 하신 바로 그 곳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천당이나 극락과 같은 의미입니다만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죽은 후에 가 봐야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 된다고 가르칩니다. 살아서는 어떻게 하든 최선을 다해 자기들 신의 노여움을 풀고 그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정성, 치성, 헌금, 희생 등을 가능한 많이 갖다 바쳐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은 남이야 어떻게 되었든 오직 자기 자신의 성적표만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선행과 구제는 진정한 선이라기보다 죽은 후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이 땅에서 자기 공적을 쌓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거룩한 통치가 실현되는 영역으로서의 “하나님의 왕국 혹은 주님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혹은 the Kingdom of the Lord)”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전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4:17)였습니다. 주님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이 땅에 편만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 죄악과 사망의 사슬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구원 하심으로써 인간의 삶 속에 천국을 실제적, 현재적으로 도래시키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만이 갖는 천국에 관한 특유의 의미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신자가 이미 이 땅에서 주님의 통치를 받는 삶 전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하는 죄인으로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고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베풀었습니다. 신자는 중생 이후 그 분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아 자기 모든 삶을 바쳐 오직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기에 자신의 성적표만 관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주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 땅에 더욱 많이 펼쳐지도록 헌신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선행은 주님 대신 이 땅에 천국을 실현시키는 것이자 다른 이들을 더욱 주님께로 인도해 자기가 받은 은혜를 동일하게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1.2.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신자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도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전적으로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장소적으로 어디 있는가를 따지기 위해선 신자가 죽기 전에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을 각각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신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왕국’에는 현재 임재한 나라와 미래에 도래할 나라라는 이중적 성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래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마6:10) 나아가 당신께서 재림하셔서 새롭게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계시하시고 신자더러 영육간의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라고 하셨습니다.(마16:28, 계19-22장, 계22:12,20) 종말론적인 의미로 예수님 재림 시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해 있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뿌리 내렸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씨 뿌리는 비유(마13:3-23)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좋은 땅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씨앗을 이미 뿌려 놓으셨습니다.(마13:11, 23) 구원 받아 천국의 비밀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3. 천국의 구성 요소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디 있는지 알려면 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도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한 나라를 구성하려면 주권, 국민, 영토 반드시 이 세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먼저 주권이란 그 나라를 통치하는 권력이 누구에게서 나오며 누구에 의해 집행되는지를 의미합니다. 국민들의 정치참여로 권력구조가 결정되는 나라는 민주 국가이고, 일인 독재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으면 전제 국가이며, 세습왕조에 의하면 왕정국가가 됩니다. 따라서 통치권의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그 분이 집행하며 궁극적인 결과도 그 분이 책임져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또 나라가 성립되기 위해선 그 나라의 주권에 순종하여 국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하고 그 나라가 부여하는 특권을 제대로 누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왕만 있고 국민이 없으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공산전제 국가의 체제를 도저히 인정 못해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는 자는 이미 그 나라의 국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과 인생의 안전과 결과를 궁극적으로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여 그 분의 뜻대로 살며 그 분이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통치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긴 주의 자녀가 반드시 한 명 이상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가 구성됩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공간적인 위치를 점하는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국경으로 경계선을 지을 수 있는 영토, 영해, 영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 지리적으로는 세상의 나라들과 그 영토가 겹칩니다. 또 죽어서 가는 천국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2.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2.1.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the Lord) – 이 땅에서의 천국

2.1.1.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

먼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세상 나라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꼭 어떤 입법, 행정, 사법적 기관을 구비해 제도적인 조직의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분의 통치는 성령을 통해 신자의 영혼과 교통하는 불가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가시적인 조직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이 세상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라고 추정하거나 주장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만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중생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참된 성도만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며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데 조직체로서의 교회 안에는 가라지와 같은 교인도 있기 때문입니다.(마13:24-30) 따라서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2.1.2. 각 자의 마음 속에 천국이 존재하는가?

또 어떤 종교에선 천국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고 각자가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천국이란 여러 가지 죄를 스스로 반성하고 염려와 불안을 정신 수양을 통해 없애고 도덕적 훈련을 통해 인격의 도야를 얻어 평강을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걱정이 더 이상 자신의 자아를 흔들지 못한다는 뜻에서만 천국입니다.

그러나 이는 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주권자의 통치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자신을 내어 맡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의 의지적 결단과 반복되는 수련으로 얻은 일시적인 정서적 안정을 천국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주권자도 자기요, 백성도 자기요, 영토도 자기의 지정의적 능력이 미치는 부분 안에서만 그친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혼자서 왕과 백성을 겸하는 일인(一人) 왕국이자 왕 마음대로 하는 독재 국가입니다.

그 왕국은 자신의 생각과 기분대로 천국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지었다 허무는 자기 구원입니다. 아무리 오랜 수련을 거쳐도 그 결과는 허무로 끝나고 실제 천국의 문턱에도 못 가 봅니다. 자연인의 지정의 능력은 너무나 제한되고 무능하며 그 영혼은 부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간섭이 없는 상태로는 살아 계신 주님을 대면할 수도 없어 그 분의 의로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는 아무리 염려 불안이 없고 세상적으로 형통하고 도덕적으로 고상해 보여도 여전히 그것은 인간의 왕국, 세상의 왕국에 불과합니다.

대신에 기독교의 경우는 다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성령 세례를 받은 참 신자 안에는 분명히 성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고 성도가 천국 갈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성도에게 와 계시고 성도는 백성으로 그 분의 인도를 받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의 경우는 혼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라도 자기의 정욕과 남아 있는 죄의 본성에 이끌리거나 심지어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정서적,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 훈련을 통해 얻은 평강은 절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기도하여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분명히 듣고 그대로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할 때 만이 혼자라도 천국이 되며 하나님 나라가 자신에게 도래하는 것입니다.

2.1.3 천국을 실현시켜야 할 성도의 삶

다른 말로 해서 성도의 이 땅에서의 삶은 천국을 간헐적으로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이 땅에서 얼마나 천국을 지속적으로 오래 풍부하게 나아가 더 많은 다른 성도와 함께 맛볼 수 있는가의 싸움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되는 까닭입니다.(살전5:17.18)

반면에 성도가 죽은 후 천국에 들어가고 나아가 부활하여 주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통치에 참여할 때는 더 이상 죄와 사탄의 방해가 없습니다. 항상 삼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인도와 통치가 가능해집니다.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천국의 현재성은 가변적이지만 미래성은 불변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내포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참다운 성도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그분의 뜻이 드러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있습니다. 특별한 공간적 경계선이 따로 없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자기가 속한 가정, 직장, 사회, 민족, 국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확장하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주권자, 백성, 영토 셋이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가 성전을 짓고 어떤 자선 행사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꼭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전 가족이 교회를 나가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며 형제 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그 가정에 천국이 이뤄졌다고 무조건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 먼저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일에 참여하는 모든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짓는 일이 담임 목사의 욕심과 고집으로 진행되고 교인들도 불평 불만을 갖거나 의무감으로 참여한다면 아무리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보여도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강요로 교회에 억지로 나가거나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서로 화목하고 섬겨선 하나님의 통치가 없다는 점에서 천국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 온 사람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지 하는 일의 선한 동기나 종교적 취지와 관계 없습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 어디에서든 각 개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서 성령님을 통해 서로 교통하고 주님을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때에 비로소 천국이 실현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에게 종교적인 의무를 강요하기 앞서 각 자녀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일 대 일로 만나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발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게 되며 주님의 뜻이 가장 우선되는 가정으로 변화되며 그 안에 천국이 실현됩니다.

천국은 항상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의 사람으로 먼저 변화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그 분께 자신을 바쳐야만 시작됩니다. 기독교적 조직체를 만들어 그 조직 전체가 선하고 거창한 기독교적 일을 한다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조직체의 구성원 각자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 자기가 소속한 세상 조직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만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지상명령(the Great Commision)으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2.2. 천국(Heaven) – 죽어서 가는 천국

2.2.1. 어느 별에 천국이 있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성도가 죽은 이후에 가는 천국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질 차레입니다. 스스로 천국을 갔다 왔다고 주장하며 시한부 종말론을 믿는 한 미국의 이단 목사가 지은 책에서 천국이 오리온 성좌 곁에 있는 어떤 별이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과연 천국이 우주 천체들의 좌표 상에 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까요?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곳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1:17)이라고 했습니다.

화학적 분자 구조를 가진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반드시 썩게 마련입니다. 썩지 아니한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며 썩지 않기에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질은 반드시 보입니다. 아무리 미세한 것도 현미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홀로 하나라는 것은 그 존재의 생성 근원과 그 존재가 계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자 운행자로서 영원히 계신 분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영으로써 물질계가 아닌 영계에 세세토록 계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육안으로 보이는 오리온좌 같은 별은 벌써 물질계입니다. 천국이 그런 곳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은 여전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로 화성이나 태양 같은 하나의 별일 뿐입니다.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신4:19)

영계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가로 세로 높이의 입체적인 3 D(Dimension)에다 시간을 합한 4 D와도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육안과 지정의로 측량하여 분석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인간으로선 천국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삼층천까지 직접 갔다 온 영적 체험을 한 바울 사도가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3,4)

인간의 죽음이란 영혼이 생물학적 육체를 벗는 것을 말합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는 이 땅에 남겨두고 썩지 않는 영만 영계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나쁘고 영혼은 선한 것이라 영만 천국에 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 신자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어 멸절(滅切)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는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존재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질로 이뤄진 지구상의 분자구조와는 다른 구조의 존재가 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체험을 한 바울 사도가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0-49참조)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성도들의 완전한 영육간의 부활을 묘사하고 있지만 천국에서의 우리의 존재 형태가 이 땅에서의 것과는 전혀 다른 신령한 형체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천국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라면 영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형체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물질로는 영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본체를 본 자는 바로 죽는다고 합니다.(삿 13:22) 이는 죄악으로 부패한 인간이 너무나 거룩하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과는 공존할 수가 없으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 소멸하신 불 앞에 바로 타 없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본질적으로 물질로 이뤄진 존재와 영으로 된 존재가 동일한 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선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빌2:6-8) 역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육신을 벗고 영혼만 더 정확하게는 천국에 합당한 형체가 가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2.2.2. 천국의 실체

그렇다면 영들만 있는 천국에서 어떻게 24장로들과 천사들과 구원 받은 성도들이 찬양할 수 있습니까?(계시록 4장) 장로들이 흰 옷을 입었고 보좌가 있고 그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으며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물질계와 동일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성도가 천국 갈 때에는 그 존재가 멸절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체의 존재로 바뀌어 계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존재 가능한 신령한 형체로 바뀌어진 것이지 영만 천국 간다고 해서 아무 의식도 없는 단순히 안개 같은 존재들이 구름처럼 떼로 몰려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도 분명히 성도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감정적 의식과 그 존재가 스스로 움직임이 가능한 3D 적인 차원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지구상에 지금 우리가 측정하고 분석 가능한 물질의 형태와 시공간의 차원과는 다른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하고도 새로운 형태와 시공간의 차원이 분명히 천국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천국 특유의 썩지 않는 신령한 물질계(보고 듣고 감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그곳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말로는 절대 표현하지 못합니다. 환상으로 자세하게 천국을 본 요한 사도마저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등으로 이 땅의 비슷한 형체에 갖다 대어 비유만 했지 딱 집어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구조와 모습은 지상의 것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못합니다. 사람이 죽어 봐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천국의 실체에 관해 관심을 갖고 소망으로 기대해야 할 부분은 천국의 물리적, 공간적, 형체적 모습과 위치가 아닙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더 이상 죄가 존재하지 않는 곳(free from the presence of sin)’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이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22:3,4)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3,4)

하나님과 함께 거할지라도 더 이상 인간이 불에 타 소멸되지 않는 곳이 천국입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 영원히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 땅에서 갖고 있던 죄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미쳐 이르지 못했던 부분들도 어린 양이 다 대속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가 천국에 들어 오는 순간 이땅에서의 더러운 것은 다 벗어버리게 하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이 계시 받은 그대로 세세토록 주님을 친히 바라보며 그 분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나아가 주님을 섬기는(성도가 천국에서도 따로 할 일이 있음)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7,18)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실이며 크나큰 은혜입니까?

3. 결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주님의 영광을 증거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합니다. 심지어 신자 혼자서라도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분명히 실재하지만 인간이 측정하고 이해하는 시공간의 범위상으로는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영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듯이 영은 물질계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천국은 비록 그 차원과 형체는 다르지만 인간이 알 수 있는 물질계 영역 안 어디엔가 소재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이미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영계로 들어가는 천국행 기차를 탔습니다. 더 이상 그 기차에서 내려지지 않으며 방향도 바뀌지 않습니다. 신자가 오직 할 일은 이 땅에서 자기의 삶과 인생과 존재를 통해서 소속한 세상 조직에서 더 많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실현하고 확장하는 길 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의 비밀 —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에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라고 기록되었으며, 계시록에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계시록 11:15)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천국은 하늘에 있을까요? 아니면 땅에 있을까요? 본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가, 땅에 있는가

‘’예배 때마다 목사님은 늘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시록 21:10, 21) 이와 같은 성경 구절을 언급하며 주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으니 주께서 다시 오실 때면 우리는 모두 들림 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진주와 홍마노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버림받지 않도록 힘써 기도하며 깨어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저는 천국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직까지 귀한 진주나 마노를 본 적이 없어서 천국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가끔은 제가 천국에 가 있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전부 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반짝이고 길을 걸으면 신발이 황금으로 된 바닥에 부딪혀 맑은 소리가 날 것 같았습니다. 그 어떠한 먼지의 기운도 없었는데 바로 제가 생각하는 하늘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천국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주님이 하루빨리 돌아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를 소망했고, 이 또한 저의 기도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주기도문을 묵상하다가 ‘나라이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라는 부분에서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가 땅에서 이뤄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고 목사님은 주님이 오시면 우리를 하늘 천국에 데려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말이 주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아서 저는 조금 의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열리다

하루는 한 사역자를 따라 어느 소그룹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한 자매님이 성경에 대해 매우 분명하게 교제를 했고 그 내용 또한 참신했습니다. 저는 흔치 않은 기회라는 생각에 자매님에게 물어 보기로 마음을 먹고 바로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늘 깨어 기다리면 주님 오실 때 하늘로 들림 받는다고 하셨는데, 주기도문에 보면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오시면 하늘로 들림 받게 될 거라는 목사님의 설교와 모순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는 건가요? 아니면 땅에 있는 건가요?”

저의 질문에 자매님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형제님, 참 좋은 질문을 했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주기도문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나라를 하늘에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3: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기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계속 하늘에 올라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몇 구절을 더 찾아볼까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계시록 11:15),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시록 21:2~4) 이 구절에 보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다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우리의 상상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고, 주님이 돌아오셔서 우리를 데려고 하늘에서 생활하신다면, 이러한 예언은 다 허언이 되지 않겠어요? 모두 아시다시피, 태초에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고, 에덴동산에서 생활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지상에서 땅의 만물을 관리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 땅에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이 사탄에 의해 패괴된 후에도, 하나님은 이 땅에서 구원의 사역을 펼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것도 땅에서 하신 일이며, 예수님이 친히 말씀이 육신되어 인간의 속죄제가 된 것도 땅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종착지는 하늘이 아니라 지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것입니다.”

자매님의 말은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성경과도 잘 맞았으며 주님의 말씀에도 부합했습니다. 전에 목사님이 한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저는 그 속의 진리를 알지 못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니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도 땅에서 일하셨고, 인류에 대한 구원 사역도 계속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기를 간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자매님은 저에게 말씀 한 단락을 읽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돌아갈 곳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이 가야 할 곳이 있다. 하나님은 안식하면서도 전 인류가 땅에서 살아가도록 계속 인도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빛 속에서 하늘의 유일한 참하나님을 경배한다. 하나님은 사람 가운데서 살지 않고, 사람 역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거처에서 살지 못한다….사람이 안식에 들어간다 함은 사람이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뿐만 아니라 인류가 정상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더 이상 거역하지도 대적하지도 않고,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삶으로 회복함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안식에 들어간 후 각자가 누리는 삶과 종착지이다. 사탄을 물리치는 것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추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경영 사역을 끝낸 뒤에 안식에 들어가고 사람이 철저히 구원받아 안식에 들어가는 것 또한 필연적인 추세가 되었다. 사람이 안식하는 곳은 땅이고 하나님이 안식하는 곳은 하늘이다. 사람은 안식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땅에서 살아가고, 하나님은 살아남은 인류를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인도하면서 안식한다.』

자매님은 교제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방금 읽은 내용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구원한 다음, 이 땅에서 인류를 계속 이끌어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절대 우리를 끌어올려 하늘에 두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살고 있겠지만 그때가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이 모두 멸망되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땅에는 더 이상 사탄의 방해와 괴롭힘이 없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기 질투, 기만이 사라지고, 수고하는 일도, 염려하는 일도, 생로병사 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처음의 아담과 하와처럼 에덴동산에 살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은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류를 이끄시며 하늘의 풍성함을 내려 주시고, 인류는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종착지입니다. 이로써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시록 21:4)라는 계시록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매님이 읽어 준 말씀과 교제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계시록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깨닫게 되었고, 따라서 마음도 밝아졌습니다. 그제야 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종착지는 지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삶은 사탄의 방해가 없는, 모두가 화목하게 지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간의 종착지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며, 늘 하늘의 삶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했습니다. 지금 돌아 보면, 저의 그런 생각은 참으로 터무니없었습니다. 우리같이 이런 평범한 육체를 가진 몸이 어찌 하늘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우리는 아쉽지만 모임을 마쳤습니다. 교제하는 내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너무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모임에 더 많은 진리를 깨닫기를 기대하며,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천국은 어디 있는가?

천국은 어디 있는가?

전도할 때, “천국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나름대로 노력했다. 보통 그런 질문을 받으면, “천국은 마음에 있다.”라고 대답한다.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대답은 대답하는 사람 입장에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대답은 질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어야한다. 보통 천국이 마음에 있다고 하면, “어떤 착각에 도취된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천국이 마음에 있다”라는 대답에 만족하는 질문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노력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천체물리학자의 의견도 들어봤다. 강의도 들어보았고, 책도 찾아보았다. 목사님들의 설교에서도 찾아보았다. 성경에서도 관련된 구절을 살펴보았다. 그 모든 것들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씩은 아주 작은 말 한마디가 크게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 작은 조각들을 모았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것을 글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이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그래도 쉽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길고 지루할지도 모른다. 지루하지 않고 쉽게 사람들에게 전달이 될까? 길고 지루해서 자세히 읽어줄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글 쓰는 사람의 고민이다.

천국은 어디 있는가?

(질문1) 천국은 어디에 있을까?

어떤 사람은 이런 반박을 한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제자들이 볼 수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의 로켓트 만큼 빠른 속도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걸어가는 속도로 올라 가셨더라면, 아직까지 태양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태양까지의 거리가 걸어서 5000년이 걸리는 거리이기 때문에, 2000년 동안 걸었다 해도 태양까지의 거리의 반 정도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로켓트의 속도로 올라갔다고 해도, 북극성(800광년의 거리)에 도착하지 못했으며, 빛의 속도로 올라갔다고 해도 아직까지도 큰 개 자리의 Wezen(2100광년의 거리)이라는 별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빛의 속도보다 1000배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고 해도, 온 우주에서 우리의 은하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200만 광년의 거리)에 겨우 도착할 정도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천국에 있다고? 그러면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질문2)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왜 안 죽었느냐?

(질문3) 휴거할 때, 우리가 벌거벗은 몸으로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그대로 입고 가느냐고 묻는다. 옷에 붙은 벼룩도 천국에 가느냐?

(질문4) 휴거할 때에 우리 몸이 실내에서 천정을 뚫고 올라가는가?

(질문5) 부활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옛날에 A라는 사람이 물에 빠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 물고기를 B라는 사람이 잡아먹었다. 그리고 B도 물에 빠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 물고기를 C라는 사람이 잡아먹었다. 그렇다면 C라는 사람의 몸은 A와 B의 몸이 섞여있다. 만일 뼈와 살이 살아난다면, 온 세상의 사람들이 뒤엉

켜서 괴물로 부활할 것이 아닌가?

위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을 준비해보았다. 대답을 준비하면서 천국은 “어떤 착각에 도취된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인격적인 존재가 살고있는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

1. 우리와 다른 차원은 존재할까?

선이 1차원, 면이 2차원, 공간이 3차원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또 다른 차원 속에 있으므로 우리는 4차원에 존재한다. 그러면 4차원보다 높은 5차원이 존재할까?

우리가 빛의 속도로 시리우스별을 향하여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광속으로 24시간을 달리다가, 다시 24시간 여행하여 지구로 돌아온다면, 지구에서는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48시간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적어도 10억년이 지난 후라고 한다. 48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라면 5억년이 지난 후라는 뜻이 아니다. “영원의 시간이 흘러간 후”라는 뜻이다. 빛의 속도로 달리면, 시간이 멈춘다는 뜻이다.

시간이 멈춘 곳, 시간을 초월한 곳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곳을 5차원이라고 한다. 과학자들은 5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것은 진화론자와 창조론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면 6차원,7차원은 존재할까? 스티븐 호킹 박사는 11차원까지 발견했다고 한다.

2. 우리는 5차원을 상상할 수는 있다.

우리가 직접 5차원에 가볼 수는 없다. 그러나 2차원과 3,4차원을 비교해보면, 3,4차원과 5차원의 차이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물론 5차원을 상상해보는 것일 뿐이다. 2차원과 3,4차원의 차이로 5차원을 단정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러나 5차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만화책을 본다고 생각해 보자. 만화책 속의 사람은 우리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만화책 속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차원이다. 만화책 속의 사람들은 면이라는 2차원에 존재하고 있으며, 공간은 3차원이며, 우리는 시간이라는 4차원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3. 5차원과 천국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끝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5차원에는 우리의 공간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5차원에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 즉 시간을 초월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5차원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 천국에도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알 수 있다.

창세기 1:1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태초라는 말은 영어로 “in the beginning” 즉 “처음에”라는 뜻이다. 즉 “시간이 시작되는 처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천지라는 것은 우리의 우주공간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런 시간과 공간이 없다는 뜻이 된다.

만화책 속의 심청이에게 시간의 시작은 우리에게는 만화책의 첫 페이지가 될 것이다. 만화책의 끝 페이지는 시간이 끝나는 시점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만화책 속의 공간이 없다. 만화책 속의 공간이란 우리에게는 종이의 한 면일 뿐이다. 만화책 속의 사람이 보기에는, 만화를 그린 사람이 시간과 공간을 창조했다.

계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마 22:31,32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하나님은 알파(시간의 시작)와 오메가(시간의 끝)을 함께 경험하고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경험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심청전 만화책을 생각해 보자. 만화책 속의 사람에게 시간이란 만화책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우리가 말하는 하루 24시간이라는 개념의 시간은 없다. 우리의 손목시계의 초침이 채칵채칵 돌아가는 그런 시간이 없다. 만화책 속의 심청이가 태어나는 시각과 자라고 있는 시각과, 늙어서 죽는 시각이 만화책을 보는 우리에게는 같은 시각이다. 같은 시각에 첫 페이지를 보면 심청이가 태어나기 전이고,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심청이가 죽은 후이다. 심청이에게 영원이 우리에게는 순간이다. 심청이에게는 우리가 영원한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심청이에게 “알파와 오메가”이다.

만일 심청이가 만화책 밖으로 나온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심청이를 반갑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심청이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우리를 보고 놀라겠지만, 컴퓨터를 보고, TV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그러다가 하루를 우리와 함께 즐기다가, “나는 이제 아버지에게 가봐야해!”라고 하면서 만화책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동안에 만화책을 보던 사람이 책을 다 읽고나서 난로 속에 던져 넣어 태워버렸다고 생각해보자. 심청이에게는 영원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과 심청이의 시간은 다르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하루와 하나님의 하루가 다르며, 우리의 1년이 하나님의 1년과 다르다고 했다.

욥10: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즉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지금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살아있다.

“영원한 천국”이란 우리가 천년, 만년 영원히 사는 곳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이 정지된 차원 높은 곳을 말한다. 그러므로 천국을 영원한 천국이라고 한다. 천국은 시간이 정지된 곳이다. 그곳에서 한 순간(예를들면, 1초)이 우리에게는 영원이다. 성경에서 영생(eternal life)란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는 뜻도 있지만, “시간이 정지된 5차원에서의 생명”이라는 뜻이다.

4. 천국은 분명히 다른 차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5차원인지, 6차원인지, 몇 차원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고전15:27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예수님은 3,4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만물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분명히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심청전 만화책에 속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3,4차원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히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고 계시면, 만물에 속하지 않았다. 분명히 다른 차원에 계신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올라갔었다.

고후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심청이에게 첫째 하늘은 만화책 속의 하늘이다. 둘째 하늘은 우리가 보는 하늘이다. 셋째 하늘은 5차원의 하늘이다.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갔었다는 말은 분명히 우리가 보는 저 하늘이 아닌 다른 하늘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5차원, 6차원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몇 차원인지는 모르지만, 천국은 분명히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공중”이라는 차원이 있고,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고 했으므로, 천국은 6차원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천국을 편의상 5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5.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심청이를 볼 수 있지만, 심청이는 우리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8:20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우리가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할 때에,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그 곳에 계시지만, 우리는 한 번도 우리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본 적이 없다. 마치 TV를 우리가 아무리 가까이서 보아도, TV 속의 사람들은 우리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천국과 하나님은 우리의 바로 옆에 있으나, 우리는 볼 수가 없고 만질 수가 없다.

6. 성경에서 3,4차원과 5차원 사이에 일어나는 실례.

단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의 아들, 벨사살왕이 잔치를 베풀고있을 때에,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씨를 쓰는 손가락이 나타난다. 이것은 5차원에서 3차원의 벽에 글씨를 쓴 것이다.

5차원과 우리의 3,4차원의 사이에 천사가 서있는 장면이 나온다.

대상21:16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천사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편지라”

“the angel of the LORD stand between the earth and the heaven”KJV

물론 이것을 3차원의 하늘과 땅 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땅위”라면, 천사가 서있는 것을 그렇게 표현할 리가 없다. “천국과 지상 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한쪽 발은 5차원에, 한쪽 발은 3,4차원에 있어야한다.

스데반은 3,4차원에서 5차원을 보았다.

행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사도요한도 5차원을 보았다.

계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그 외에도 에녹,엘리야,예수님은 5차원으로 이동했다.

7.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5차원을 조금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5차원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성령을 통하면 약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영생(영원한 세계, 즉 시간이 없는 세계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서로 통할 수 있다. 즉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가 있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야기하실 수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 것을 경험한다. 성경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믿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면, 뭔가 통한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감동적인 메시지를 들을 때에 우리 마음에 감동이 온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아멘!”이라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지른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5차원 즉 천국으로 자라나간 지체가 영적인 몸(그리스도의 몸,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로 연결된다. 그 몸에서 다른 지체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5차원의 몸이 감동하면, 그 감동이 각 지체로 전해진다. 그 지체에 속한 사람들은 같은 감동을 받고, “아멘!”이라고 화답한다. 그러나 영이 다르면 아무 감동이 없다. 우리가 이단의 주장을 들으면 아무 감동이 없고, 물과 기름처럼 맹숭맹숭하다.

이것은 숲에서 나무줄기 하나를 붙잡고 흔든다고 생각해보자. 어떤 나무줄기를 흔들면, 그 줄기에 속한 나뭇가지들은 모두 진동하지만, 그 줄기에 속하지 않고 다른 나무의 줄기에 속한 가지들은 전혀 진동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의 마음에서 자라난 영적인 몸이, 5차원으로 뻗어나가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어 지체를 이룬다. 보이지 않지만,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8. 공간의 차원 이동

그러므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하늘의 대기권을 벗어나기 전에, 차원 이동을 하여 천국으로 가셨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예를 들면, 그림이라는 2차원의 세계에서 입체라는 우리의 공간 세계로의 이동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이러한 차원 이동은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 8:39,40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K.J.V “And when they came up out of the water, the Spirit of the Lord caught away Philip, and the eunuch never saw him again, but went on his way rejoicing. Meanwhile Philip discovered himself at Azotus.”

흠정역을 번역하면, “그들이 물에서 올라올 때, 주의 영이 빌립을 데려 가버려서, 그 내시는 다시는 그 빌립을 보지 못했지만, 기뻐하면서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그동안에 빌립은 아소도에서 자신이 와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빌립은 주님의 영으로 광야에서 아소도로 순간적으로 공간 이동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내시와 빌립이 함께 물에서 올라오는 중에, 빌립이 갑자기 없어졌다. 그래서 내시는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빌립은 자신이 어느새 아소도에 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빌립이 광야에서 다른 차원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아소도라는 지역으로 차원이동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 지도를 펴놓고 미국의 뉴욕과 한국의 서울이 합쳐지도록 지도를 접어서, 뉴욕의 어떤 사람을 한국의 서울로 공간이동을 시킨다면, 뉴욕에 있는 사람이 지도라는 2차원을 벗어나서, 공간이라는 3차원으로 왔다가, 다시 서울이라는 2차원의 지도 속으로 들어간다면 이것은 공간이동이 되는 것이다.

눅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And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knew him; and he vanished out of their sight.”KJV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야기하시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다른 차원으로 차원 이동을 한 것이다.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문이 닫혔는데 갑자기 방 안에 나타나셨다. 이것도 역시 공간의 차원 이동이다.

9. 시간의 차원 이동

우리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을까? 2000광년이 떨어진 별에 지금 도착해서, 초초초고고고성능성 만원경으로 지구의 이스라엘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지금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과학적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을 볼 수는 없을까? 이것은 현재 모든 이론을 동원해도 불가능하다. 미래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Your father, Abraham rejoiced to see my day: and he saw it, and was glad.” KJV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기를 원했다. 그리고 보았다.

이것은 현대 과학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이라는 차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심청이 만화책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현재,미래를 함께 경험하신다. 앞서 공간의 차원이동에서 지도를 접듯이, 만화책의 중간에 수십 페이지를 접어보자. 예를 들어 11p에서 100p까지를 접고, 10p와 101p를 합치면, 시간의 차원 이동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여주었다. 흠정역에서도 “he saw it”라고 했다.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예수님은 “보았다”고 하셨다.

또 한 군데를 살펴보자.

계시록 1:9,10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여기서 “주의 날”“the Lord’s day (KJV)”이라는 말이 나온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주의 날”은 일요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의 날”이라고 언급된 곳이 5번 나온다. 그 외에 “여호와의 날”“주 예수의 날”“하나님의 날”“그리스도의 날”이 언급된 곳을 합치면, 32번 나온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일요일을 의미하는 곳은 없다. 모두가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우리가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으로 AD321년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그렇게 정한 것이다.

학원 세계 대 백과사전. 29권 147p(학원 출판 공사) : “미트라스교(폐르샤의 태양신)는 기독교의 강적이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이보다 앞서 유사점이 많은 미트라스교와의 습합(習合)을 고려, 321년에는 매주의 휴일을 [태양의 날(dies solis=sunday=일요일)]이라고 부르도록 정하였다.”

할레이의 성서 핸드북(기독교문사. 박 양조 역)824p: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일로 일요일을 정하고 쉬게 하였다.”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AD321년에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르도록 정하였다면, 그 전에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것이 AD90년경이라고 생각한다면, 계시록의 “주의 날”은 일요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주의 날”은 다른 곳에서 언급했듯이, “재림의 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로 데려가신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미리 보았다. 바로 시간의 차원 이동을 한 것이다.

10. 그곳에는 공간이나 물질이 없는 곳이다.

영은 무게를 달 수도 없고, 화학분석을 할 수도 없고, 부피를 잴 수도 없다.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영은 3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씀(요4:24)을 생각하면, 이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곳은 이 세상의 물질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즉 만화책 속의 어떠한 물질(산, 집, 사람, 자동차 등등)도 면적이라는 차원에 있기 때문에 약간의 부피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 3,4차원으로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

고린도 전서 15:49,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11. 우리가 어떻게 5차원으로 갈 수 있을까?

만화책 속의 심청이는 우리의 3차원으로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부피가 없기 때문이다. 나오면 없어진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체가 그대로 천국에 갈 수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만화책 속의 심청이는 부피가 있는 그림이 되면 된다. 입체그림?이라는 것이 있다. 평면의 그림에다 물에 녹인 종이 같은 것을 붙여서, 입체로 표현하는 것이 있다. 그런 입체그림은 3차원으로 나올 수가 있다. 그러나 원래 만화책에 그려진 2차원의 그림은 나올 수가 없다. 3차원으로 나온 입체만 나올 수가 있다.

우리의 몸은 5차원으로 갈 수가 없다. 입체그림처럼 5차원으로 자라는 몸이 있어야한다. 그 5차원으로 자라가려면, 5차원의 생명이 있어야한다. 그것이 영생이다. 영원한(시간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생명, 즉 영생이 필요한 것이다.

3차원의 육체가 살 수 있는 육체적인 생명이 아니라, 5차원의 영적인 생명은 영원한 생명, 즉 영원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영생이다. 그래서 그 영원의 세계, 즉 5차원에 속한 존재가 성경에 언급되어있다.

영적인 선물(롬1:11은사, spiritual gift), 신령한 식물(고전 10:3 spiritual meat), 신령한 음료(고전 10:4 spiritual drink), 신령한 몸(고전 15:44 spiritual body),신령한 복(엡1:3 spiritual blessings), 신령한 노래(엡5:19 spiritual songs), 신령한 지혜(골1:9 spiritual understanding), 신령한 집(벧전 2:5 spiritual house), 신령한 제사(벧전2:5 spiritual sacrifices)-KJV

아담은 3,4,5차원에 걸쳐있는 존재였다. 그는 5차원의 하나님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죄를 짓고 5차원의 존재로는 죽었다.

창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롬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아담은 그날 죽었다. 즉 5차원의 생명(영원한 생명)이 끊어진 것이다. 3,4차원에 얽매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즉 5차원에 필요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4차원에 오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왜 안죽었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아담은 그날 영생이 끊어졌다. 5차원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다.

12. 우리가 천국에 간다면, 어떤 모습으로 갈까?

심청전 만화책 속의 심청이는 2차원의 면이다. 3차원에서는 부피만이 존재한다. 면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심청이는 앞서 말한 입체그림이 되어야한다. 입체만 3차원으로 나올 수가 있다. 면이 3차원으로 나올 수가 없지만, 면의 모습이 입체에 인쇄될 수가 있다. 사진을 생각해보자. 사진의 2차원 모습을 우리는 3차원에서 확인하고, “이 사진은 누구누구의 사진이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차원의 얼굴을 2차원적으로 표현한 것이 사진이다. 사진이라는 면이 3차원에는 존재할 수가 없지만, 사진과 사진의 주인공을 연결시킬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3차원적인 부피가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천국에서는 우리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5차원에 속한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천국에서 이 사람은 누구이며 저 사람은 누구인지를 당장 알 수가 있다. 마치 2차원의 사진으로만 보던 사람을 3차원에서 만났을 때, 당장 그 사진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

13. 도장 예화

도장을 종이 위에 찍으면, 2차원의 도장 모습(글씨)이 찍힌다. 그런데 도장은 부피가 있는 3차원의 존재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을 받아 영적으로 자라게 되면, 종이 위에 도장이 찍혀있고(글씨), 그 도장의 자국(글씨) 위에 도장이 놓여있는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2차원의 도장 자국(글씨)을 3차원의 우리 몸이라고 생각하면, 종이 위의 3차원의 도장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5차원의 몸이다. 영적으로 더욱 자라게 되면, 도장은 더욱 큰 도장이 되고, 도장의 모습도 온갖 멋진 모양이 새겨지게 된다. 도장에는 옥도장이 있고, 나무 도장이 있고, 수정 도장이 있고, 상아 도장이 있다. 재료도 여러 가지지만, 모양도 여러 가지이다. 온갖 문양이 새겨진 여러 가지의 도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크기도 제각각 다르다. 그러나 종이에 찍힌 자국(글씨)은 그 도장의 모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2차원인 종이에 도장만 찍힌 사람은 영생이 없는 사람이고, 그 위에 도장이 있는 사람은 영생이 있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사람이다. 영생이 없는 사람은 4차원에 속한 사람이지만, 영생이 있는 사람은 4차원뿐만 아니라, 5차원에서도 몸이 자라고 있다.

3차원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5차원의 우리 몸은 우리자신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식이 3차원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3차원인 몸에 머물러있다. 3차원에 속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나의 몸인데 불구하고 나에게 연결된 5차원의 몸을 내가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으로 연결되는 5차원의 몸은 그냥 성장하기만 한다. 가끔 영적인 감동을 전해주기는 하지만, 의식할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글씨 위에 놓인 도장이다. 등산을 할 때, 더워서 입지 않고 허리에 두르고 있는 옷과 마찬가지이다. 곧 추우면 입을 옷처럼 5차원의 몸은 연결만 되어있다.

이제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그 몸으로 우리의 인식이 이동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3차원의 몸은 벗어버린다. 즉 육체가 죽는다. 5차원의 몸으로 의식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5차원의 존재가 된다.

14. 부활

부활할 때, 우리 몸의 살과 뼈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이 5차원의 형체로 부활한다. 즉 우리의 3차원의 모습이 5차원의 몸에 인쇄된다. 도장을 생각해보자. 종이 위에는 도장이 찍혀있고(글씨), 그 위에 도장이 있다. 종이에 찍힌 2차원의 글씨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고, 도장은 우리의 영적인 몸이다. 그런데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의 육체가 썩는다. 즉 도장 밑의 글씨가 상하거나 지워진다고 하자. 그러나 도장은 그대로 존재한다. 우리가 부활하면, 우리의 형체가 도장에 새겨진다. 이 때 글씨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글씨의 형태가 도장에 새겨진다. 음각으로 새겨진 도장도 있고, 양각으로 새겨진 도장도 있다. 글씨도 추사체가 있고, 구양순체가 있고, 왕희지체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모습으로 5차원의 신령한 몸에 새겨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형체가 영원하고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고전15:42“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그러나 우리의 얼굴만 새겨지는지, 온 몸이 새겨지는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대로 새겨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변한다. 거룩한 모습으로 새겨진다. 욕된 것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된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벌거벗은 몸으로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우리가 입고있는 옷을 그대로 입고 가느냐고 묻는다. 우리의 몸도 우리의 옷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오직 우리 얼굴의 어떤 특징이 5차원의 몸에 인쇄된다.

정확한 것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된다. 그러므로 찬송가에 “주 예수님, 공중에 임하실 때, 나 일어나 맞이하리.”라는 가사가 있다. 그 찬송가를 작사한 제니 크로스비 여사는 생후 6주만에 실명하여 평생 장님으로 지내며 한 번도 눈을 떠 본적이 없고, 평생 앉은뱅이로 지내면서 두 다리로 일어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래 가사에는 “주 예수님이 공중에 임하실 때, 나는 두 다리로 벌떡 일어나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예수님을 맞이한다”고 했다.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서로서로를 분별할 수 있다. 사진만 보다가 그 사진의 주인공을 만나면, 사진과 그 사람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릴 때 추하게 생긴 계집애가 자라서 아름다운 숙녀가 되었다 하자. 아무리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도 어릴 때의 특징은 갖고 있다. 그래서 그 숙녀를 보고 당장 그 어린애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캐리커쳐라는 종류의 그림이 있다. 어떤 사람의 특징을 살려 매우 우스꽝스럽게 그린 그림이다. 결코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지만, 그 특징 때문에 그 그림을 보고,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당장 알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5차원에서는 3차원의 모습이 그대로 인쇄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거룩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특징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누구인지를 당장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완전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변한다.

우리의 육신은 분명히 썩는다. 부활할 때, 뼈와 살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나사로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부활하는 것을 예시한 것이다. 나사로가 부활한 것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하지 않았다. 나사로의 부활은 뼈와 살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다시 죽었다. 나사로의 부활은 우리가 나중에 부활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지, 우리의 뼈와 살이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3차원의 몸은 5차원으로 이동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체가 5차원의 몸을 입고, 5차원의 몸에 우리의 형체가 새겨진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 5차원으로 이동한다.

만일 우리의 뼈와 살이 살아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옛날에 A라는 사람이 물에 빠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 물고기를 B라는 사람이 잡아먹었다. 그리고 B도 물에 빠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그 물고기를 C라는 사람이 잡아먹었다. 그렇다면 C라는 사람의 몸은 A와 B의 몸이 섞여있다. 만일 뼈와 살이 살아난다면, 온 세상의 사람들이 뒤엉켜서 괴물이 부활할 것이다.

마22:31,32 “죽은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지금도 아브라함이 살아있고, 이삭도 살아있고, 야곱도 살아있다. 그러므로 지금 죽은지 1000년이 넘는 사람도 그 당시로 돌아가서 부활한다. 우리로 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부활하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이 죽으면서 3차원의 육신은 썩고, 그 형체가 5차원의 몸에 인쇄된다. 아브라함이 과거에 부활한 것은 아니다. 아직 부활하지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으로 볼 때에는 항상 현재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죽자마자 부활하지만, 우리의 시간으로는 아직 부활하지않았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부활할 것이다.

우리의 시간으로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재림하시는 날에 죽은 자들이 동시에 부활하지만, 아브라함은 죽는 날 부활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시간으로는 아브라함이 죽은 날 부활하지않았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아브라함이 죽은 날(과거) 부활할 것이다(미래)(*깊이 생각하면서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아브라함이 죽는 날 부활했다가 아니고, 부활한다. 아브라함이 부활하는 것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우리 시간으로는 미래가 되고,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현재이다.(*이해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장에 2차원의 자국이 반대로 새겨있듯이, 우리의 모습이 5차원의 몸에 새겨진다. 그리고 의식이 5차원의 몸으로 이동한다. 3차원의 옷을 벗고, 5차원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공중이라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공중이라고 해서 하늘 높이 비행기가 다니는 공중이 아니다. 휴거할 때에 우리 몸이 실내에서 천정을 뚫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동을 한다. 사람들은 “네가 휴거할 때 내가 너를 꼭 붙들고 있으면, 나도 휴거될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볼 때에는 그냥 없어진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않고, 차원이동을 하면서 우리의 육체가 없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과 형체가 5차원의 몸으로 이동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3차원의 몸이 5차원의 몸으로 흡수된다. 흡수된다는 것은 도장을 찍는 것을 시간적으로 거꾸로 생각하면 된다. 3차원의 도장을 2차원의 종이에 찍으면, 종이 위에 도장이 찍힌다. 이 과정을 거꾸로 생각하면, 종이에 찍힌 자국위에 도장을 놓았다가 도장을 들면, 그 자국이 도장으로 흡수된다. 동영상을 반대로 돌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은 5차원의 몸으로 흡수된다.

15. 성경에서 언급한 천국을 5차원으로 설명해보자.

고린도 전서

15:27.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예수님은 3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더 높은 차원에 계신다.

15: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부활하기 전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차가 있다. 3차원의 옷을 벗어야 5차원의 옷을 입을 수 있다.

15: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현재의 우리 몸은 씨앗이다. 씨앗을 뿌리면 씨앗은 죽고, 씨앗과는 다른 형체의 나무나 꽃이 자라나듯이, 현재의 우리 몸과는 다른 형체의 몸으로 부활한다. 우리가 2차원의 도장찍힌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체는 3차원의 도장이다.

15:39-41.“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가지는 형체가 각각 다르다. 즉 영적인 성장에 따라 도장의 모습이 각각 다르다.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부활할 때 거룩한 5차원의 몸으로 갈아입는다. 썩을 수밖에 없는 3차원의 몸을 벗고, 영원하고 거룩한 5차원의 몸을 입게 된다.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아담은 산 영이었으나, 죄를 지어 죽은 영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 우리를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시간적으로는 아담이 먼저이고, 예수님이 그 다음이다). 첫 사람(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아담)는 저 흙에 속한 자들(우리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예수님)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하나님,성령,천사)과 같으니,”

—아담과 예수님의 비교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아담을 따라서 3차원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따라서 5차원의 모습으로 또한 변하리라.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을) 것은 썩지 아니한(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3차원의 몸이 그대로 5차원에 갈 수가 없다. 부활할 때, 우리의 육체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의 뼈와 살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5차원의 형체로 부활한다. 물질이 부활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사로나, 예수님이 부활한 것은 우리의 부활을 상징할 뿐이다. 우리의 5차원의 형체가 부활하는 것을 예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천국에 가셨지만, 나사로는 그 몸으로 살다가 다시 죽었다. 나사로는 3차원의 몸이 3차원의 몸으로 다시 살아났을 뿐이다. 예수님도 구름위에서 천국이라는 차원으로 가실 때에, 그 몸은 5차원의 몸으로 흡수되셨다. 그 외에 에녹과 엘리아도 차원이동을 할 때, 5차원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고후12:2에서 바울은 자기가

셋째 하늘에 갔다 왔으면서도 몸을 갖고 갔는지를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5차원의 형체로 변형되어 갔을 것이다. 바울은 다시 왔으니까 다시 3차원의 모양으로 변화된 것이다. 도장을 다시 종이에 찍듯이. 그러므로 성경은 현재의 썩을 몸이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는 없다고 했다.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변화한다. 즉 현재의 몸이 그대로 천국가는 것은 아니다. 5차원에 속한 형체로 변화한다.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죽은 자들이 5차원의 형체로 변화되고, 몸이라는 물질은 벗어던진 옷과 같다. “2차원의 도장 자국이 도장에 새겨지고.” (A라는 사람이 죽어서, 물고기 밥이 되고, 그 물고기를 B라는 사람이 먹고, 그 사람은 또 물에 빠져죽고, 물고기가 먹고, 다시 C라는 사람이 잡아먹고—–수천년을 내려와서, 내 몸이 네 몸이고, 네 몸이 내 몸이고—–이런 몸이 중복되고, 뒤엉켜 괴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뼈와 살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남자가 따로 있고, 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나 영화촬영이 끝나면, 배우로 돌아오듯이, 극중의 역할은 끝난다. 그러므로 천사처럼 된다. 단지 거룩한 모습으로 변한다. 극중에서는 임금이 입는 용포를 입은 배우도 있고, 거지 옷을 입은 배우도 있지만, 촬영이 끝나면 모두 벗어버리고 자기 옷을 입듯이, 여자, 남자, 키다리, 난자이, 흑인, 백인이라는 3차원의 몸을 모두 벗어버리고, 5차원의 거룩한 몸을 입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와 남자가 따로 없다.

22:31. “죽은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에게는 항상 현재이다. 알파와 오메가이다. 5차원에서 우리를 보는 것은 우리가 심청전을 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지금 살아있다.

베드로후서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지구와 그 안에서 인간이 행한 모든 일들은(works) 완전히 불에 타버린다. 즉 인간들이 행하는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

KJV “But the day of the Lord will come as a thief in the night; in the which the heavens shall pass away with a great noise, and the elements shall melt with fervent heat, the earth also and the works that are therein shall be burned up.”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elements)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義)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어떻게 하늘과 공간이 불에 타고, 땅과 모든 물질이 녹을 수 있을까? 우리가 심청전 만화책을 불에 던져보면, 알 수가 있다. 만화책 속의 하늘이 불타고, 공간이 불타는 것을 볼 수 있다. 태우는 불은 만화책 속에 속한 불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5차원의 불은 우리의 공간을 불태울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의가 없는 5차원의 세상을 바라본다. 만약 천국이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16. 영적 성장, 즉 5차원적 성장의 필요성

그러면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복음을 많이 전하고, 순교를 한 사람과 일평생 살인,강도짓을 하다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과 똑같이 변할까?

마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분명히 상이 있다고 하셨다.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와 주지않는 자는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을 얻도록 노력해야한다. 그것을 영적 성장이라고 한다. 즉 입체그림의 입체를 더 크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만화책의 그림은 2차원의 존재이지만, 3차원의 입체를 더 크게 만들면, 그림에서 분리되어 3차원으로 나올 때, 더 큰 존재가 된다. 우리가 3,4차원의 존재이지만, 5차원의 생명 즉 영생을 가졌으면, 그 생명이 잘 자라도록 가꾸어야한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성장하면, 이 세상에서는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5차원에서는 큰 존재가 된다.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알프스의 멋진 산에 올라갔다고 생각하자. 이 아기는 알프스 융프라우나 필라투스의 멋진 풍경을 즐길 수 있을까? 춥기만 할 것이다. 산해진미를 대접한들 즐길 수 있을까? 맛없는 엄마 젖만 찾을 것이다. 온갖 보석을 준들 필요가 있을까? 강바닥의 돌맹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알프스에서 스키를 즐길 수 있을까? 골프를 즐길 수 있을까? 행글라이더를 즐길 수 있을까?

성장해야한다. 천국의 영광을 제대로 누리려면, 5차원적으로 자라야한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야한다. 5차원의 생명이 잘 성장하려면, 마음 밭을 잘 가꾸어야한다.

17. 우리의 마음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의 영이 들어오신다.(계3:20) 그러므로 성령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마음도 존재해야한다.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플 수가 없다. 그런데 마음은 볼 수가 없고, 무게를 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성령이나, 하나님처럼 5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4차원과 5차원이 연결되는 문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마음)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마음)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마음)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보면, 분명히 우리의 마음도 존재하며, 하나님의 영도 존재한다. 만일 천국이나, 하나님이나, 성령이나,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상상 속에서 만든 존재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18. 5차원 즉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는 문은 우리의 마음이다.

잠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영원한 생명(영생) 즉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5차원 세계의 생명은 우리의 마음에 뿌려지고, 마음에서 자란다. 영원한 세계와 연결통로가 우리의 마음이다.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천국은 3차원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천국은 우리의 마음에 임한다. 즉 우리의 마음과 연결되어있다.

19. 영적 성장의 방법

마음에 5차원의 씨앗이 뿌려지고, 마음에서 5차원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5차원의 씨앗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5차원에 알맞은 환경으로 맞추면, 5차원의 생명은 자란다. 즉 우리가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천국의 생명인 영생을 얻는다. 영원한 나라의 생명, 시간이 멈춘 차원, 5차원에서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을 얻는다. 그 영생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란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하며, 순결하고, 정직하며, 믿음을 굳게 잡고, 선행을 하면, 영원한 생명은 더 풍성하게 되고, 5차원인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

마 13: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복음의 씨앗이 마음에 뿌려진다고 하셨다.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믿는다. 5차원의 생명이 우리의 마음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눅 1: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복음의 씨앗이 자라서 영적으로 자라가면, 우리의 마음은 청결해진다. 그러면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진리를 깨닫게 된다.

마음 밭을 잘 가꾸어야 5차원의 성장이 이루어진다.

20. 마음 밭에 관한 구절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마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눅 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사도행전 8: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행 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1. 추상명사가 5차원에서는 실존할 수 있다.

2차원인 심청전 만화책에서는, 3차원의 어떤 물건을 추상명사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3차원의 물건은 부피로 존재하기 때문에, 2차원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3차원에는 2차원의 존재가 하나도 없다. 면적만 존재하고 부피가 없기 때문에 실존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3차원의 어떤 물질도 5차원으로 갈 수가 없다.

고린도 전서 15:49,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차원인 천국에 존재하는 것을 3차원에서는 추상명사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성령의 열매는 3,4 차원에서는 추상명사이다. 그러나 5차원인 천국에서는 추상명사가 아닐 것이다.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실존할 것이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015.10.4. 이 월석

*쉽게 표현하기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쉬우나,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옮겨온 글)

[천국 바라보기5] 천국은 하늘에 있다. 고후12:2-4

반응형

천국은 하늘에 있다 (고후 12:2-4)

천국은 실존하는 곳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천국은 숨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발견한 사람 외에는 천국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다. 그래서 다들 천국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국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곳은 보화이다. 그렇다. 천국은 보화이다. 보화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천국 그 자체가 보화이다.

천국이 보화인 이유는 우리가 그곳에서 완전히 영화로워 지고, 그곳에서 하나님과 충만한 교제를 이루고, 그곳에서 한 없는 기쁨과 사랑을 누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천국은 하나님의 모든 복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보배로운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천국 하면 가장 먼저 ‘하늘’을 떠올린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천국’이라는 말 자체가 ‘하늘 천’에 ‘나라 국’ 즉 하늘 나라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다. 오히려 천국에 대한 가장 성경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 곳곳에서 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천국과 하늘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정말 그런지 말씀을 보도록 하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가르쳤다(빌3:20).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다시 오실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시민권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 아니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그 천국을 ‘하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했다(골3:1-2). 그러면서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스도가 계신 ‘위’, 땅과 반대 되는 ‘위’ 거기가 어디겠는가? 하늘 밖에 없다. 바울은 여기서도 천국을 하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천국을 하늘이라고 표현했을까?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늘 에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은 하늘을 하나님과 동일시 했다. 물론 하늘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하늘’을 하나님을 부르는 완곡 어법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눅15:18). 이것은 “야훼”를 입에 올리기 송구스러워서 “주님”이라고 불렀던 관습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께 맹세한다”고 하지 않고 “하늘에 맹세한다”(마23:22)고 한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늘을 하나님, 혹은 그분이 계신 곳으로 여기고 있었다.

천국을 하늘이라고 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성육신 전)에 계셨던 곳이 바로 하늘이라는 뜻이다.

(요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요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천국의 핵심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데 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늘에 성부 하나님이 계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늘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로써 우리는 “천국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에 “하늘”이라는 답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하늘’을 크게 세가지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하늘은 우리 머리 위에 있는 대기권을 가리킨다(창7:11-12, 시147:8)

그렇다면 이 하늘이 천국을 뜻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이건 그냥 기본 상식이다. 천국의 실존을 믿든 안 믿든, 천국을 발견했든 못했든, 천국을 어떤 곳으로 상상하든 관계 없이, 적어도 하늘(대기권)을 보면서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누구도 대기권, 그러니까 구름이 끼고, 황사와 미세먼지가 가득하고, 또 때로는 화창하고, 높았다가 낮았다가, 비가 내렸다가 맑았다가 하는 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저기가 ‘천국’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 하늘이, 그 하늘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하늘, 성자 예수님이 계신 하늘, 우리가 장차 영원히 머물게 될 하늘은 지금 우리 머리 위에 펼쳐진 하늘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나라-천국은 대기권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하늘’은 단순히 대기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가 훨씬 더 많다. 날씨 얘기-이를 테면 하늘이 맑다, 하늘이 높다 등-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하늘’은 뭔가 더 고차원적인 것, 고상한 것, 높고 위대한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하늘도무심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대기권’을 뜻 하는게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완전 이상한 말이 된다. 누가 대기권을 무서워하고, 누가 대기권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인생을 살려고 하겠는가? 누가 대기권에 대고 무심하다고 한탄하겠는가? 이때 하늘은 대기권이 아니라, 분명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절대자를 상징한다. 비록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는 분-절대자를 가리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약 천국을 하늘-대기권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허탕을 칠 수 밖에 없다.

성경에서 사용된 하늘의 두 번 째 의미는 우주 공간을 가리킨다.

우주는 분명 대기권 보다는 훨씬 더 높고, 더 멀고, 더 넓은 곳이다. 우주에는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행성이 있다(창1:14-17). 하지만 이 외에는 하늘의 첫 번째 의미-대기권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즉, 이것도 천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이 계신 곳, 바로 천국이다. (고후12:2-4)

안타깝게도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 하늘이 어떤 하늘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하늘은 대기권도 아니고, 우주 공간도 아닌 그 이상, 혹은 그 너머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뭐라고 딱 부러지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바울도 천국의 환상을 보고 들은 후에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곳을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환상 중에 천국을 본 일을 말하면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고후12:2-4). 바울이 이곳을 셋째 하늘이라고 하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은 하늘을 크게 세 단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하늘은 대기권이고, 둘째 하늘은 우주 공간, 그리고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 바로 천국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하늘이라고 할 때에 그 말은 천국이 대기권에 있다는 말도 아니고, 우주공간 어딘가에 있다는 말도 아니다. 천국은 그 이상이다. 천국은 이 땅(대기권과 우주를 포함한)을 초월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은 하늘에 있다. 그러니까 ‘하늘’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즉 초월성 때문에 천국을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을 “새 예루살렘”(계3:12), “거룩한 성”(계21:10), “높고 거룩한 곳”(사57:15)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생각하고, 또 그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출구 없는 미로에 갇힐 수 밖에 없다. 그렇다. 천국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천국에 갔다 와 볼 수 없다. 우리가 세 번째 하늘-초월적인 곳에 있는 천국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 뿐이다.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맞이하는 것 뿐이다. 그 외에는 천국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다.

분명 천국은 실존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장소의 개념은 아니다. 천국은 모든 차원을 넘어선 초월적인 영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대한 모든 신비를 도무지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있다. 초월적인 곳에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상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 우리는 천국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 부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만 붙잡을 뿐이다.

성경은 천국이 실존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천국이 보화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천국이 초월적인 곳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발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천국을 탐구하는 일일까? 천국을 찾아 나서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을 가지고 천국을 사모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초월적인 곳, 다르게 표하면 하늘나라, 또 다르게 표현하면 ‘새 예루살렘’이요, ‘거룩한 성’이요, ‘높고 거룩한 곳’에 살기에 적합한 모습으로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는 초월적인 곳에서 살게 될 사람답게 초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 순종의 삶,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 충성과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초월적인 사람-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땅에서 천국을 예비하는 것이고, 천국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말씀을 맺겠다. 천국은 하늘에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시민권도 하늘에 있다.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가기 바란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확실하게 천국이 어디에 있는 증명하는 길이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천국 백성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반응형

아름다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천국의 비밀 –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한 복음 사이트에서 최근 독특한 스타일의 채팅 코너를 몇 개 내놓았다. 거기에 이런 게 있었다. ‘작은 토론: 천국은 하늘에 있나, 땅에 있나’, ‘참여: 당신은 택함을 받았습니까?’, ‘반문: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했습니까?’ 등등. 상진은 결국 ‘작은 토론: 천국은 하늘에 있나, 땅에 있나?’ 채팅 코너에 들어갔다. 그는 역시 이 화제에 흥미가 있었다. 그가 10여 년 동안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진아, 열심히 추구해야 해. 나중에 주님은 우리를 천국의 집에 불러 주실 거고, 우리는 하늘에서 살게 될 거야. 거기에는 금 벽돌로 깔린 바닥과 옥 벽돌로 세운 벽이 있고, 번잡한 세상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야…” 10여 년 전에 상진은 처음으로 믿음의 선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천국에 대해 신비한 환상을 가득 품고 있었다. 그는 주님이 그를 천국으로 불러줄 그 날만 기다렸다. 그 날은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하늘로 올라갈까? 천국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천국에 대해 줄곧 환상과 기대를 품었던 상진은 돌연 누군가 ‘천국은 하늘에 있나, 땅에 있나’라는 화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을 보고 자연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어 링크를 클릭하고 들어갔다.

토론창에서 천정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이렇게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예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천국이 대체 하늘에 있나, 땅에 있나’하는 문제는 우리가 정말 나누어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관심을 갖는 큰 일이죠.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대체 하늘에 있을까요, 아니면 땅에 있을까요? 우리 먼저 주기도문에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9~10)”

상진은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눈길이 머물렀고, 속으로 ‘천국은 하늘에 있지 않나?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정이 계속해서 말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주 분명하지 않아요?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기를 바라셨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에 세울 거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고, 우리가 언젠가 들림 받아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지도 않았어요. 이런 뜻이 아닌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천정의 인도를 따라 상진은 탁자 위의 성경을 펼치고 예수님의 말씀을 또 보았다. 그는 속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 정말 그렇구나. 이렇게 오랫동안 성경을 봤지만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하신 말씀은 보지 못했어.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셨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이 말씀은 주님이 돌아오시면 분명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 함께 살겠다는 말씀이 아닌가? 이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상진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곤혹스러워할 때 천정이 계속해서 채팅을 보내왔다. “아마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떠나실 때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그 곳이 하늘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사실 주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셨습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지만 그 처소가 대체 하늘에 있을까요, 땅에 있을까요? 우리는 관념과 상상으로 천국은 분명 하늘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사실이 정말 그럴까요? 그럼 우리 계시록의 예언을 다시 봅시다. 11장 15절 말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시록 21:2~4) 모두 자세히 보셨죠. 이 두 단락의 예언에서 각각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를 언급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분명히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땅에 세우시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사람과 함께 살려고 합니다. 세상의 나라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고,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 있어서 주님이 오실 때 우리를 하늘로 데려간다면 하나님의 이 말씀들은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달성할 최종 효과는 바로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것도 땅에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처소도 땅에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땅에서 그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이것은 앞으로 계시록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더보기

더 많은 내용을 묵상하고 싶다면 바로 클릭: 성경 비밀

천국은 어디에?

천국은 어디에?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

요즘도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不信) 지옥”이라는 전도 구호를 힘차게 부르짖는 광신도들을 가끔 목격할 수 있다. 예수를 믿어야만 천당에 들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활활 타는 유황불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서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외치는 그들의 거침없는 용기는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천당과 지옥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지옥행이라고 떠들어대는 그들에게 사람들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신약성서에서 “하늘 나라”(천국, 天國)는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천국)는 유대교적 색채를 짙게 띠고 있는 마태복음의 독특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리는 마태 공동체의 보수적인 신앙 분위기를 감안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하느님을 하늘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통치권이 확립되고 그분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 사회를 가리키는 정치적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신약성서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이 간단한 두 가지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사람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유달리 강조하는 한국 교회 풍토는 문제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친 ‘주의 기도’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듯,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인데, 이 점을 망각하고 사후(死後)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기독교 신앙의 목표요 핵심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 천국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

천국은

우리가 쳐다보는 저 먼 어느 공중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천국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왜 우리는 이 땅을 업수이 여기는가?

설혹 천국이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져

우주 바깥 어느 곳에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세상 끝나는 날 하나님의 계획에 맡겨 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한다.

죽어서 가는 감상적인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꿈을 이 땅에 이뤄야 한다.

이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 땅에서도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 않고

어찌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겠는가.

(권정생, 1937-2007, ‘천국’)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며 한평생 시골 교회당 종지기로 봉사했던 권정생. 평생 새 옷을 거의 입어 보지 못하고 종이 한 장도 아껴 사용하며 항상 검은 고무신과 낡은 셔츠 차림으로 5평 남짓한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맑은 그리스도인”(이필완 목사)이었다.

우리 나라 아동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강아지똥>을 비롯해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무명저고리와 엄마> 등의 동화와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느님> 같은 수필집 등 수십 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써서 욕심을 부렸더라면 인세만 갖고서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을 테지만, 통장에 차곡차곡 쌓인 10억 원 가까운 인세를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신 분.

정말이지 하느님 마음에 쏙 들었을 티없이 맑은 영혼과 순수한 믿음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천국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그분이 딱 잘라 말한다. “천국은 우리가 쳐다보는 저 먼 어느 공중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천국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설혹 천국이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져 우주 바깥 어느 곳에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세상 끝나는 날 하나님의 계획에 맡겨 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 않고 어찌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겠는가.”

여러 해 전에,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천국”에 대한 그 동안 아리송했던 생각들이 말끔히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천국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하느님이 만든 이 땅”에서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겠는가.”

지상에 발붙이고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저 먼 어느 공중에 있는” 천국을 바라볼 게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죽어서 가는 감상적인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꿈을 이 땅에 이뤄야 한다.” 뜬구름 잡으려 하지 말고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옳다는 그분의 말씀이 이제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기 바란다.

3. 당신 하늘 나라를 이 땅 나라에 어서 이룩합시다.

세상을 만들고 나서도

하늘 뒤에 숨지 아니하시고

햇빛처럼 혹은 빗줄기처럼

끊임없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 세상을

우리들의 손에 아주 맡기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할

어디 높은 곳에 두지도 않으시는 하느님

고맙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동역자여

당신 하늘 나라를 이 땅 나라에 어서 이룩합시다.

(이현주, ‘땅으로 내려오시는 하느님’)

시인 목사는 말한다. 하느님은 “하늘 뒤에 숨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분, “이 세상을 우리들의 손에 아주 맡기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할 어디 높은 곳에 두지도 않으시는” 분, 우리 인간의 “영원한 동역자”라고.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과 협력해 “하늘 나라를 이 땅 나라에 어서 이룩”해야 할 능력과 책임과 사명이 있다고.

이런 시인의 태도에 이 땅의 주류 기독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거나 반대할지 모른다. “하늘 나라”는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나라, 즉 믿음의 선물로서 인간에게 “거저” 주어지는 나라이지 인간이 주제넘게 관여하고 건설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한국교회 설교의 단골 메뉴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보수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감히 신과 인간의 협력을 말하는 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인(神人) 협동설’로서 이단(異端) 색채를 띤 위험한 행동이라고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인간 능력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인간은 역사 앞에서 늘 겸손하고 끊임없는 자기 반성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역사 창조 능력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일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중대한 시점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한 14:12). 세상에서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실하고 굳센 믿음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지키려 애썼던 요한공동체의 자의식이 담겨 있는 이 말씀에 우리는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예수는 분명한 어조로 선언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무슨 말인가? ‘나는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세상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서 이제 죽임을 당해 너희 곁을 떠나야 할 테지만, 조금도 기죽지 말라. 너희에게는 새 역사 창조의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에 기대어 수동적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너희 자신의 능력을 믿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라.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일을 빌미로 나를 섣불리 우상화·신격화하지 말라. 내 앞에 공손히 무릎 꿇기보다 차라리 나를 딛고 나를 넘어가라’는 간곡한 부탁이며 분부가 아닌가.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동역자.” 다시 말해, 하느님과 인간은 수직적 주종(主從) 관계에 있는 게 아니라 상호 협력의 파트너 관계에 있다는 시인 목사와 예수의 말씀은 저 먼 “하늘 나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던 우리의 무책임한 내세 지향적 신앙 생활에 내리꽂히는 매서운 죽비(竹 )가 아니겠는가.

4. 천국의 문 앞에서

세상의 종말이 왔다

이 지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하나씩만 가지고 저 세상에 가도록 허락했다

어떤 자는 무거운 황금 뭉치를 낑낑대며 지고 간다

어떤 자는 애인의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며 간다

어떤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소중히 안고 가기도 하고

어떤 어부는 큰 그물을 메고 가기도 한다

말을 타고 가는 자도 있고

수레를 끌고 가는 자도 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런데

천상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에게만 문이 열렸다

그는

병든 노모를 업고 온 가난한 등대지기였다.

(임보, ‘천국의 문門’)

시인은 1940년 생, 그러니까 올해 만 일흔 셋이다. 몇 해 전부터 시인의 시들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느 시를 읽어보아도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쉽고 절제된 언어 속에 녹아 있다.

시인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시인이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시인이 인생에 대한 무르익은 성찰에 다다르게 된 것이 기독교 신앙 때문이든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이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원숙한 삶의 경지에 이른 시인을 통해 하나라도 더 배워 내 자신의 삶과 믿음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게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병든 노모를 업고 온 가난한 등대지기”에게만 천국 문이 열렸다는 이 비유적인 시를 통해 시인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늙고 병든 어머니에 대한 지극히 착한 마음, 즉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순수한 사랑이 바로 천국 문을 여는 열쇠라는 걸 시인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신구약을 통틀어 심판에 관한 가장 상세한 보도인 마태복음 25:31-46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심판을 주관하는 임금은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또, 임금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절).

이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천국행과 지옥행을 판가름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표현은 길게 늘어진 이야기의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를 찾아주는 작고 착한 행동을 실천했느냐 여부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46절)을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오직 믿음만을 강조할 뿐 그 믿음의 당연한 결과물이어야 할 착하고 인정(人情) 많은 행실, 혹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윤리·도덕은 등한시하는 이 땅의 기독교와 교회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다.

5.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10)

저 유명한 ‘산상수훈'(마태 5-7장) 서두를 장식하는 말씀이다. 여기에서도 초점은 “하늘 나라”가 어디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이 ‘팔복'(八福)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 나라는 믿음 유무(有無), 교회 출석 여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과 전적으로 관련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시가 이 말씀의 적절한 주석이 될 것 같다.

삶의 끝에 서면

너희 또한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너희는 행복했는가?

다정했는가?

자상했는가?

남들을 보살피고 동정하고 이해했는가?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영혼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천국으로 가는 시’)

철학자 시인은 말한다. “삶의 끝에 서면…. 중요한 것은 ….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인간의 실존을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의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종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키에르케고르도 “사람”, 즉 사람 됨됨이를 궁극적으로 중요한 걸로 보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한국교회의 기독교 이해는 문제가 참 많다. 믿음에 잇대어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인 것인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예수를 내 영혼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온갖 축복과 은총을 받고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린다’는 식으로 믿음을 천박한 마술적·주술적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하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예수는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한국교회는 그 나라를 믿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하찮고 이상한 나라로 만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과 인격의 근본적이고 질적(質的) 변화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허울 좋은 신앙고백만으로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는 “하늘 나라”가 과연 존재할까? 아니, 나는 하느님의 자녀인가? 나는 “하늘 나라”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가?

6. 천국을 꿈꾸는 나

어머님이 한평생 독실한 크리스천이셨고 아내도 대물림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자신도 한때 교회에 나갔던 내 친구가 하나 있다. 이슬같이 맑은 영혼을 가진 친구는 이따금 기독교 신앙에 관해 짧고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데, 언젠가 내게 정말 천국이 있는 건지 물었다. 십여 년 가까이 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략 이렇게 답해 주었던 것 같다. “천국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예수를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신비한 나라가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사십 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이렇게 내 믿음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감히 천국을 꿈꿀 수 있을 만큼 내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애쓰는 게 중요한 거다. 사후의 천국은 결국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 혹은 신비의 영역으로 남겠지만, 내가 이 땅에서 실천해야 할 천국의 몫이 있다. 그리고 천사같이 착한 아내가 철석같이 믿는 천국의 존재, 고단한 삶 속에서도 아내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 주는 그 천국에 내 마음도 활짝 열어 놓아야겠다.’

…………

+ 천국(天國)

천국은 언제나

나의 주변에서 살랑살랑 맴돌고 있다.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면

길가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도 어여쁘고

이 세상에 미워할 사람

하나도 없으리니

나의 사랑이 깊어지는 그 만큼

천국은 지상으로 내려오더라.

사랑하는 이들과 손목 한번 마주잡고

다정한 눈길이 스치는 한순간이

지상에서 영원까지

나의 행복한 천국이기를!

(정연복)

키워드에 대한 정보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다음은 Bing에서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 동영상
  • 공유
  • 카메라폰
  • 동영상폰
  • 무료
  • 올리기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YouTube에서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국의 위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정동수 목사, 사랑침례교회, 2022. 6 | 천국 은 어디에 있는가,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See also  아프리카 잠방 사고 | [이슈톡] '방송 사고'로 실제 외모 드러난 Sns '여신' (2019.08.01/뉴스투데이/Mbc) 인기 답변 업데이트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