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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왜 침노하는 자들의 것인가 – 크리스천비전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태복음 11:12).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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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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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12절 –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천국이 힘으로 …

진리의성경(bible.rexpia.com) = 킹제임스 성경 말씀을 통해 바른 교리와 진리를 가르칩니다. 예수그리스도만 나타내는 유기체적인 교회 지체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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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rexpia.com

Date Published: 10/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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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 마11:12 천국을 침노해 빼앗는다는 의미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 … 은 구약시대와 비교해 신약시대에는 구원의 진리가 뭔가 바뀐 것 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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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hyjesusonly.com

Date Published: 5/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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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하는 자(violent men)의 뜻. 마태복음 11:12, 누가복음 16:16

천국을 ‘침노하는 자 (violent men)’는 ‘힘 (force)’으로 ‘천국(하나님 나라)’을 빼앗습니다. 눅16:16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힘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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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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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성경 9 /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 한누리교회

* 마태복음 11장 12절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 구절은 성경의 대표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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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nr.kr

Date Published: 10/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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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하는 자가 소유하는 천국(마11:12)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은 사모하는 자에게 열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은혜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가만히 있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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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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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수 있을 만큼 나약한 나라인가

성경은 계속 침노하는 자 거라고, 빼앗는 자 거라고 합니다. … (천국에 의해) 공격당하는 자들은 (천국을) 차지한다”가 될 것이다. 천국은 침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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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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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2020]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 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예수님께서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침노라는 단어가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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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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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먼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여 천국이 시작되었다고 외치던 요한이 활동하던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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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ynlee.tistory.com

Date Published: 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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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국을 침노 한다는게 무슨뜻인가요? – 다음블로그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 … 나라를 침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침입하는 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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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6/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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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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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천국이 힘으로 쟁취하는 곳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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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1장12절 –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천국이 힘으로 쟁취하는 곳인가요?

정말 흔히 다루는 주제이며 대개의 크리스천들이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는 이상한 말처럼, 여기도 이상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 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2, 개역한글 /개역개정)

애써서 천국을 차지하기 위해 힘을 쓰라는 식의 메시지를 예수 믿고 지금까지 듣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일단 개역개정 말고 다른 성경 번역본들에서 같은 구절을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11:12, 공동번역)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럼 크리스천들은 폭행을 쓰는 사람들입니까? 어떤 이들은 우리 죄인 된 인간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지만 하나님께서 천국을 허락하신다는 이야기로 해석도 하지만 그건 억지로 꿰 맞추는 것이고, 이 구절은 분명히 폭력을 쓰는 악한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 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의 때부터라고 했을까요? 그 전에는 대충 해도 갈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일까요?

[세례 요한이 설교하고 세례를 주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받아 왔고 공격하는 자들이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마11:12, 현대어성경)

현대어성경을 보아도 좀 이상하네요. 그리고 다음 영어성경들을 보아도 분명히 폭행하는 자들이 폭력으로 kingdom of heaven 을 빼앗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violent men take it by force.] (마11:12, NASB, 신미국표준역)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마11:12, NIV, 신국제역)

★ 우선 ‘침노하다’라는 뜻을 보겟습니다.

<1. 남의 나라를 불법으로 쳐들어가거나 쳐들어오다.>, <2.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치다.> 라는 뜻입니다.

천국을 불법으로 쳐들어가는가?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고 해쳐야 하는가?

강소천의 동요 <이순신 장군>의 가사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자 성도의 가장 큰 영광인 구원을 통해 받는 천국(하늘나라)을 침노한다는 것을, ‘공격형 마케팅’이나 ‘자기주도학습’처럼 그저 적극적으로 차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미 여러 역본들은 그런 의미로 억지 해석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해석과 어떤 개념이 맞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한 가지 뜻일 텐데 왜 이렇게 다른 성경들이 많은 것일까요?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마11:12, 킹제임스흠정역)

현재의 한글 번역본들 중에서는 이것이 가장 적절한 번역입니다. 위의 여러 한글 성경과 영어 역본들을 비교해 보아도 이 번역이 적절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2, 개역)

그런데 왜 이런 판이한 번역이 나오는 것일까요? 마태복음의 오해를 풀고 전반적으로 설명하려면 긴 이야기지만 간단히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 천국이 아닌 ‘하늘의 왕국’

일단 kingdom of heaven을 ‘천국’으로 번역하면 안 됩니다.

kingdom (킹덤)은 왕국입니다. “kingdom of heaven” 을 다 ‘천국’이라고 번역 해 놓으니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 등을 모두 천국으로 오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왕국”, 하늘로부터 임하는 왕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지금은 내 왕국이 여기에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 (요 18:36)

주기도문에서도 ‘나라이 임하옵시며’가 아니라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0)” 라고 해야 하는데, 땅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왕국을 세우시리니 그것은 결코 멸망하지 아니하리이다. 그 왕국은 다른 백성에게 남겨지지 아니하며 이 모든 왕국들을 산산조각 내어 소멸시키고 영원히 서리이다.] (단 2:44)

이처럼 하늘의 왕국은 구약 때부터 예언되었던 것이며, 그래서 동쪽의 지혜자, 즉 동방박사들도 왕을 찾아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르되, 유대인들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쪽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 2:2)

★ 왜 침례자 요한의 때부터인가?

[이르되, 너희는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 3:2)

이렇게 선포한 침례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다 죽게 되어 천국에 갈 날이 가까웠다고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왕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을 선포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이 메시아 왕국은 하늘의 영적인 왕국이 아닌, 실제로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을 말합니다. 왕국을 선포한 것은 요한으로 시작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성경은 왕국이 선포된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라고 못박는 것입니다.

[율법과 대언자들은 요한의 때까지요, 그때 이후로는 하나님의 왕국이 선포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밀고 들어가느니라] (눅 16:16)

요한 이후부터는 회개하고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폭력으로 빼앗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땅에 이루어질 하늘의 왕국을 훼방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물론 마귀이며 인간으로는 왕이신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 백성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마귀 들렸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매 그들이 말하기를, 보라, 음식을 탐하는 자요, 포도즙을 많이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 (마 11:18~19)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듣고 이르되, 이자가 마귀들의 통치자 바알세붑을 힘입지 않고서는 마귀들을 내쫓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4)

그들은 이런 막말로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게 비방하는 것도 모자라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훼방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아니하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허락하지 아니하는도다.] (마 23:13)

이보다 더 큰 폭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을 훼방하고 각종 음해와 모의를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고 그분을 팔아 넘긴 자들이 폭력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유대인들에게 있을 일들을 말씀하시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을 폭력배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는 시각에 사람의 아들이 오느니라. 그런즉 자기 주인으로부터 그의 집안사람들을 넘겨받아 다스리며 제 때에 그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줄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 누구냐? …..그러나 그 악한 종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 주인이 오는 것을 늦추시는구나, 하며 자기 동료 종들을 때리고 술 취한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 시작하면 그가 그를 기다리지 않는 날 그가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잘라 내고 위선자들과 함께할 그의 몫을 그에게 지정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 24:44~51)

예수님의 초림이 있었지만 결국 유대인들에게 왕국은 거부되었고, 천년왕국으로 연기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구약의 대언자들이 보지 못한 교회시대(은혜시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예수님을 거부해 온 유대인들은 7년 동안의 환난이 극에 달할 때 예수님이 참된 왕이자 메시아였음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그들과 휴거되지 못하고 환난 기간에 믿은 자들의 땅이며 예수님께서 왕으로 재림하셔서 통치하실 이 땅에 실제적으로 세워질 물리적인 왕국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물론 하늘의 왕국은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즉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구속의 사역을 십자가에서 끝내신 이후일 것입니다. 그랬다면 구속 사역, 즉 부활과 승천 이후에 땅에 오셔서 마지막 한 이레를 성취하면서 지상의 왕국을 실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의해 유대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왕을 거부했고, 그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메시아를 거부함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인의 때가 이르렀으며, 이 은혜의 시대는 70이레 중 69이레와 마지막 한 이레 사이의 공백기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은 유대인들의 눈 멀음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순차적 구원 프로그램입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은 자기가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였으나 선택 받은 자는 얻었고 그 나머지는 이 날까지 눈멀게 되었으니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잠들게 하는 영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11:7~8)

★ 천국에 들어가는 법칙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경우의 논리를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듯이 싸워서 차지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가나안을 천국의 모형으로 삼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나안에는 악한 자들도 살고 있고, 무찔러 이겨야 할 족속들이 사는 곳입니다. 또 그곳에 입성한 뒤로도 많은 전쟁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자녀들은 얼마 안 가 하나님을 다 잊고 세상은 아수라장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을 천국으로 생각하여, 수많은 이들이 초청(출애굽)을 받았지만 단 2명밖에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다면서 천국에 가기가 매우 힘들고 싸워서 침노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큰 실수요 오류입니다. 전쟁에 나가지 않는 여자들은 어찌합니까?

게다가 모세는 지옥에 갔다는 것입니까?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모세는 구원을 못 받았다고도 하는데,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럼 행위로 구원을 받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히 11:24, 킹흠정] 믿음으로 모세는 나이가 들었을 때에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이처럼 모세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변화산에도 나타났습니다. 지옥으로부터 와서 방문한 것이 아닙니다.

[막 9:4, 킹흠정] 거기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고 그들이 예수님과 이야기하거늘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자들 중 두 명이 들어간 것이지, 많은 백성들 중 아이들은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신 1:39, 킹흠정] 또한 너희가 탈취물이 되리라 하던 너희의 어린것들과 그 날에 선악을 알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은 거기에 들어가리니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줄 것이요, 그들이 그것을 소유하리라.

가나안 땅의 입성은 천국행 보다는 구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전쟁과 고통이 있고,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게 되는 불행한 삶을 살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육적인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비유적으로 생각할 때는 한 사건과 어떤 사실에 모든 것을 대입시키면 모세가 구원을 못 받았다는 비약이 되기 때문에 모든 일을 대입시켜서는 안 됩니다.

또한 2명만이 가나안에 갔듯이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라면, 천국은 경쟁논리와 상대논리가 적용되는 곳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상대적으로 평가하시지 않으십니다. 일정한 기준이 되면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도록 매우 쉬운 기준을 제시하신 분이십니다. 힘이나 돈이나 능력이나 아무것도 없어도 가능합니다. 생각할 수만 있으면 믿어서 갈 수 있으며, 생각하고 분별할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나 정신 장애인들은 그냥 받아주십니다 (할렐루야!).

반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상을 주십니다. 결과적으로 상대적 평가가 되는 것이지만 전혀 부당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 성경을 지키고 복음을 선포하며 가르친 사람, 절제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사람, 가족을 잘 보호하고 부모에게 효도한 사람, 작은 자 하나를 대접한 사람… 모두가 상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경주’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상대적인 개념이 등장합니다.

[고전 9:24, 킹흠정]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움 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갈 수 없는 곳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심으로 다 받아주시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그에 맞게 상을 주시는 것이야말로 인격적인 방법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법칙을 모르고, 그분에 대해 전지전능을 앞세워 자기 맘대로 하는 편협한 신으로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스스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지옥조차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만들지 않으셨지만, 속아서 마귀들의 심판 장소로 끌려가는 자들에게는 그것을 심판이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 25:41, 킹흠정] 그때에 그가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 알고 배워서 오해를 풀어야

결론적으로, 하늘의 왕국을 ‘천국’으로, 왕국의 복음을 ‘천국 복음’으로 오해한 나머지 성경이 잘못 번역되고, 문맥을 애매하게 변형시켰으며, 그에 따라 해괴한 신학이 등장한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세계적으로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천국을 열심히 싸워서 빼앗으라는, 행위 구원과 같은 내용으로 해석하는 나라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개역)

이런 해석, 이런 식의 선포는 성도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같은 것입니다. 복음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나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남자만 60만, 전체로는 200만 명 안팎이었을 무리들 중에서 2명밖에 가나안에 못 갔다며, 그것이 천국 입성의 법칙이라니, 폭력도 이런 폭력이 없습니다.

아무 때나 ‘아멘’ 하지 말고 바른 성경을 보고 배워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몰랐던 부분을 알고 바른 말씀으로 바로잡아 진리의 바른 말씀에 이르러야 합니다.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 (KJV)

★ 이 말씀을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이며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통치하시는 / 하늘로부터 임하는 땅의 왕국이 침례자 요한 때부터 선포되었으나 /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 그때까지 그 왕국이 임하지 못하도록 힘을 쓰고 / 폭력을 휘둘러 훼방하며 빼앗으려 했다.”

이 왕국은 바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 폭력배들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며 / 이방인들의 때가 차면 반드시 다시 설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느니라.] (요 10:28~29)

★ 끝으로 이 왕국은 복음을 믿어 구원 받은 크리스천들과 직접 연관이 없으며, 이 말씀을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구약과 신약, 세대별 구분을 잘해야 합니다. 이 왕국이 이루어지기 전에 교회 (구원받은 신약성도)는 휴거 되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하며, 천년 동안 유지될 이 왕국 (실제로 이땅에 세워질 물리적인 왕국)에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 됩니다.

이 모든 특권과 천국은 믿는 자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며 전투를 벌여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특정인의 신학이나 번역자가 이해한 수준에 따라 재단하여 번역하는 것이 아니고, 설령 뜻을 모른다 해도 있는 그대로 번역해야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또한 지금까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배웠던 간에, 이제 바른 진리의 말씀에 대해 듣고 알게 되었으면, 부지런히 성경을 찾아보고 바르게 분별하여 제대로 바른 진리 가운데 서야 할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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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1:12 천국을 침노해 빼앗는다는 의미는?

천국을 침노해 빼앗는다는 의미는?

[질문]

“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2)에서 궁금한 것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1) “세례요한 때”부터라 하면 구약 시대에는 천국이 침노 당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가 되는데 이것이 어떤 뜻인가요?

2)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분명 예수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천국을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하면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답변]

언뜻 보면 이 구절은 구약시대와 비교해 신약시대에는 구원의 진리가 뭔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거기다 천국을 침노해야 차지한다고 하니까 많은 신자들이 질문자처럼 행위 구원의 말씀인지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본문의 뜻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을 가장 기본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아주 적절한 교재가 됩니다. 신학적 지식이 없더라도 본문과 앞뒤 문맥만 정확히 따지면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난해할수록 본문과 문맥에서 그 뜻을 찾아야 하고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 그 안에 정답 혹은 정답으로 이끄는 힌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모든 저자는 특정 주제에 대해 의도적으로 글을 이어가기에 문맥과 격리된 의미를 갖는 구절은 하나도 없는 법입니다.

성경해석의 대전제

본문처럼 행위 구원으로 오해될만한 구절들이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전체의 뜻은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교리를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성경전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도 믿음의 구원을 드러내는 복음이 얼마든지 있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해 구약도 행위구원을 부인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진리가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연유했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3:17, 21,22)

따라서 아무리 행위구원으로 오해될만한 구절이라도 무조건 그런 해석은 배제해야 합니다. 대신에 앞뒤 문맥을 잘 살펴서 왜 그런 표현을 하였는지 믿음의 구원에 바탕을 두고 더 깊은 뜻을 찾아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가장 혼동하는 구절인 야고보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7)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앞부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2:18) 야고보가 어떤 자와 자신을 비교합니까? 행함은 없고 예수를 그냥 믿기만 한 자입니다. 성화의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는 자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성령의 온전한 거듭남이 있었다면 성화가 아직 제대로 안 이뤄져도, 모든 신자가 그런 형편임, 당연히 구원 받은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대조해서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겠다고 합니다. 이미 온전히 믿었다는 사실의 진정성을 행함으로 입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행위구원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관하게 인간의 공적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뜻이 행위구원이 되려면 “나는 믿음 없이도 행함으로 나의 온전함을 보이리라”고 그 표현이 달라져야 합니다.

본문 뒤에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을 예로 삼아 동일한 맥락에서 말씀합니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1b)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언뜻 행위구원 같습니다. 그러나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고 이어집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나야 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이 온전히 있는 것입니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23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늙어 생산이 불가능함을 알고도 후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에 어떤 행위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말년에 그 약속의 외아들마저 제물로 바친 것도 하나님이 이삭을 부활시켜 주시거나 또 다른 자식을 줄 수 있음을 온전히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롬4:17-22) 요컨대 모리아 산 사건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증명된 것이지, 이삭을 바친 후에 비로소 의롭다 여겨진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본문과 문맥에서 뜻을 찾으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본문을 먼저 따져 봅시다. 만약 침노해서 천국을 차지하는 것이 특정 행위라면 행위 구원이 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는” 은혜 시대인 신약시대를 말하는데 더더욱 어불성설입니다. 본문 안에서부터 그런 해석은 단연코 부인됩니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알려면 이 구절이 속한 전체 문맥(11:2-19)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실 그이” 즉, 메시아가 당신인지 묻게 했습니다. 본문은 주님이 그에 답한 후 제자들에게 풀어 설명한 내용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정체성”을 당신께서 직접 변호한 것으로 본문은 그런 바탕에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주님은 우선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행하신 이적과 가르친 내용을 보고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11:6)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깨닫고 메시아로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세례 요한이 맡은 역할을 설명해주었습니다. 메시아 즉, 당신께서 곧 오신다고 미리 선포했던 자라는 것입니다.(7-11절) 그래서 10절에서 말라기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말3:1a)라는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 본문 앞에 있는 내용들입니다.

본문에 이어선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13절)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은 구약성경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인데 그 예언은 요한으로 끝마쳐졌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필요 없고 요한의 예언대로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사람이니라.”(14절)고 요한에 대해 부연 설명했습니다. 이 또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를 인용한 것입니다. 크고 두려운 날은 여호와의 날로 바로 예수님의 초림을 말합니다. 그 전에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와서 구원과 심판을 선포할 것인데 요한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15절)라고 선포한 후에 16-19절에선 이 세대의 귀 없음에 대해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면 구원 받을 수 있는데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영접하지 않는 자에게 심판을 의미하는데도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요한은 귀신들린 자요, 인자(인간으로 오신 예수)는 술을 탐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대의 사람들은 요한의 예언도(세례 요한의 때부터), 또 그 예언대로 실제로 메시아가 왔어도(지금까지) 전혀 깨닫지도 못하고 심지어 귀담아 듣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과 그 제자들도 예수님이 술 마시고 세리와 죄인과 교제하니 혹시 메시아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기에 그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종교적 외양보다 당신께서 일으킨 이적과 가르침의 의미를 잘 따져보면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다른 성경과 비교해보라.

이제 본문의 의미가 거의 드러났습니다. 먼저 요한의 메시지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왔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가 곧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죄인을 구속하실 사역을 완수할 것입니다. 따라서 귀 있는 자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구주로 영접하여 그분의 영생을 선물로 얻고 또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설명한 그대로 당신을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귀 없는 자처럼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깨닫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세례 요한의 예언과 예수님 당신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해 세밀히 따져서 구약의 모든 예언들과 비교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깨달음을 얻는 자는 구원을 차지할 뿐 아니라 그분의 거룩하고 완전한 통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구절을 해석했으면 성경전체가 말하는 진리와 성경 다른 부분의 동일한 언급과도 부합되는지 비교 검증해봐야 합니다. 앞에서 “천국을 침노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잘 깨달아 그분을 메시아로 영접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는 기독교 진리와 완전히 일치 됩니다. 누구라도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또 누가복음 16:16과 평행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4-16)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고 주님은 그들의 교만을 야단쳤습니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자는 즉, 구약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요한으로 마감되고 이제는 그 메시아이신 당신이 오셔서 천국 복음을 직접 전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선 ‘침입한다’로 번역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의 “침노하는”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둘 다 특정지역을 침공해서 강제로 빼앗는 것 같은 어감을 줍니다만, 근본적으로 그 어원은 강력한 힘으로 행동하는(주도적) 또는 움직이는(수동적) 모습을 뜻합니다. 헬라문법상으로도 수동태와 중간태(수동과 능동의 의미가 다 있음) 둘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알기 쉽게 말해 우선 주어가 되는 천국(마태복음의 경우)과 복음(누가복음의 경우)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예수님이 전파하고 있는 복음의 권세가 강력하고 또 여러 이적으로 그 복음의 절대성이 확실히 입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고 듣는 귀가 있다면 그 복음 앞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신자 쪽에서도 정말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갈급한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아주 크고 강한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껏 세상에선 도무지 구원을 얻을 수 없었기에 메시아를 만나려는 강한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한다는 것은 누구나 침노하기만 하면 차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천국이 강력하게 이 땅에 도래했습니다. 단순히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통치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통치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오신 이후처럼 강력하지 못했기에 아무나 침노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이후 천국이 강력하게 임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과도 연결됩니다. 구약시대에는 특정인물에게 특정사건을 위해 성령이 일시적 부분적으로 임했지만 이젠 예수를 진심으로 영접하면 누구에게나 임재 내주합니다. 또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으로 보호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천국을 침노한다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9/28/2012

침노하는 자(violent men)의 뜻. 마태복음 11:12, 누가복음 16:16

누가복음 16장 (바른 성경)

16: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에게 한 청지기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비난이 주인에게 들려왔다.

16:2 그래서 주인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너에 대하여 이런 말을 듣고 있는데, 어찌된 일이냐? 너의 청지기직을 청산하라. 너는 더 이상 청지기직을 수행할 수 없다.’ 하니,

16:3 청지기가 속으로 말하였다. ‘내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직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16:4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내가 청지기직에서 쫓겨날 때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들 집에 영접하도록 해야겠다.’

16:5 그리하여 그가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을 일일이 불렀다. 그리고 그 첫째에게 말하기를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습니까?’ 하니,

16:6 그가 ‘기름 백 말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청지기가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 문서를 가지고 앉아서 빨리 오십이라고 쓰십시오.’ 라고 하였고,

16:7 또 다른 이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얼마나 빚졌습니까?’ 하니, 그가 말하기를 ‘밀 백 섬입니다.’ 하므로 그 청지기가 그에게 ‘당신의 문서를 가지고 팔십이라고 쓰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16:8 주인이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으니, 이는 그가 슬기롭게 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세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슬기롭다.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어라. 그러면 그것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들로 영접할 것이다.

16:10 가장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고 가장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일에도 불의하다.

16:11 그러므로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6:12 또 너희가 남의 것에 충성하지 못한다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것을 주겠느냐?

16: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6: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이 모든 것을 듣고서 예수님을 비웃으니,

16: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람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혐오스러운 것이다.

16:16 율법과 선지자들은 요한까지이다. 그 후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 나라로 침입한다.

16:17 그러나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 율법의 한 획이 떨어져 나가는 것보다 더 쉽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수 있을 만큼 나약한 나라인가

이창모 목사의 성경 오역(誤譯), 오석(誤釋) 바로잡기(7)

글을 시작하며

눅16: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과 함께, 마11:12(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해 나간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역사를 선포하는 귀중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번역 성경들의 오역과 오석으로 인해 마11:12의 말씀은 세계 교회사에서, 특히 한국교회에서 심각하게 오용되고 있는 사탄의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 아래 마11:12을 소재로 한 어떤 심각한 저질 설교의 한 부분을 보라.

“~여기가 좋사옵나이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울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가 싫다고 하나님 걸 빼앗아야 합니다. 천국은 빼앗는 자 거라고 했습니다. 달래야 합니다. 조건이 어디 있어요, 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야곱이라는 사람은 여러분, 어떻게 했어요? 사기꾼이요, 도적놈이요, 그런데 누구 거 도적질했어? 아버지 거 도적질했어. 그런데 아버지가 도적놈이라고 했어요, 안 그랬어요? 아니라 그랬습니다.

~믿으면 아멘하세요. 잘 들어요, 잘 들어야 합니다. 지금 잘 들어요. 성경은 계속 침노하는 자 거라고, 빼앗는 자 거라고 합니다.

~(야곱처럼)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 가지고라도 빼앗아 잘 사는 그 아들을 보고 자랑하는 걸 믿으면 아멘하세요. 여러분, 비밀이어요. 놀라운 비밀이야. 사람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 사람들에게는 거짓말하지 말아야 하지만, “아버지 이번에 내게 축복만 해주신다면, 내가 목사가 되겠어요.” 그래가지고 대학 딱 들어가고 난 다음에 목사가 안 되도 아버지가 오래 참는 걸 믿으면 아멘 하세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이렇게 좋으신 분이야.”1)

위의 어처구니없는 설교는 오래 전에 있었던 한국교회 강단의 비극적인 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한국교회 강단의 슬픈 현실이다. 물론 지금은 마11:12을 위의 설교처럼 노골적으로 무식하게 설교하지는 않는다할지라도, 거의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적어도 의미상으로는 위의 어처구니없는 설교와 대동소이하게 설교하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일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중세교회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로 간에 영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중세의 기독교 국가들은 마11:12을 근거로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시키면서, 자랑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양 다른 나라들을 침략했다. 근세 시대에서도 기독교 국가들인 유럽의 열강들은 마11:12을 근거로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시키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 등을 향한 침략 전쟁을 하나님의 뜻인 양 노골화시켰다.2)

세계사에 나타난 이런 어처구니없는 해프닝들은 마11:12의 헬라어 원문 “bia,zetai”(비아제타이)를 수동의 의미인 “침노를 당하나니”로 오역하고, 반대로 “biastai.”(비아스타이)를 능동의 의미인 “침노하는 자(들)”로 오역했기 때문에 생겨난 비극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금까지 모든 교회는 마11:12의 심각한 오역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마11:12을 바르게 번역한다는 것은 대단히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믿음을 위해서는 번역 성경의 오역을 바로 수정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다. 특히 마11:12을 바르게 번역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글을 끝까지 그리고 천천히 정독해야 할 것이다.

고대 헬라어에서 ‘중간태’란 무엇인가?

마11:12의 “침노를 당하나니”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는 동사이다. 스테판 헬라어 분해 사전에서도 이 동사를 VIPPS3(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단수,3인칭)로 표시하고 있다. 이에 비해 바우어 사전을 비롯한 상당수의 주석들에서는 이 동사를 ‘중간태 또는 수동태이다’라고 설명하면서 수동태일 수도 있고, ‘중간태’일 수도 있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 속에서의 헬라어 동사들 중에 수동태도 되고 중간태도 되는 동사는 없으며, 수동태이든지 능동태이든지 둘 중 어느 한 쪽에 속해 있는 동사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11:12의 바른 번역의 관건은 “침노를 당하나니”로 번역된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를 수동태도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중간태’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바르게 판단하는 것에 달려있다.

헬라어를 공부한 이들은 기억하겠지만, 헬라어 동사에는 능동태와 수동태 그리고 현대 언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간태’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어떤 언어에서도 동사의 ‘중간태’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주어가 주체적으로 동작하는 것을 묘사하는 능동태의 동사와 주어가 수동적으로 동작당하는 것을 묘사하는 수동태의 동사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대 헬라어로 기록된 성경에는 수동태의 모양을 띤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수동의 의미로 번역하면 전혀 뜻이 통하지 않고, 능동태로 번역해야 제대로 뜻이 통하는 문장들이 더러 발견된다는 것이다.

어떤 동사가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음에도 그 의미가 능동이라면, 이 동사를 수동태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 또 그렇다고 해서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는 동사를, 능동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능동태라고 명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수동태의 모양을 띤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능동의 의미로 쓰인 동사를 이도저도 아닌 ‘중간태’라고 편의상 명명하게 된 것이다(‘중간태’는 수동태의 의미 변화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단순히 동사의 모양만 가지고는 수동태인지 ‘중간태’인지 구별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고대 헬라어의 동사들 중에 ‘중간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장 속에서 수동태의 모양을 띤 동사들 중에 그 의미가 능동인 경우에 그 동사는 ‘중간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장에서 ‘중간태’로 사용된 동사라 할지라도 다른 문장에서 얼마든지 수동태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면 고대 헬라어에서 왜 굳이 수동태의 모양을 띤 동사로 능동의 의미를 나타내려고 했을까? 물론 그 이유는 정확하게는 잘 모른다. 그러나 수동태 모양을 띤 동사로 능동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문장들을 관찰해 보면, ‘중간태’는 능동태 동사처럼 주어의 동작을 묘사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동작하는 동작의 주체인 주어를 강조하는데 초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마11:12을 원문대로 미리 원문대로 바르게 번역한다면, “천국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 공격하나니(여기서 ”공격하나니“가 능동의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수동태 모양을 띤 동사(중간태)를 사용한 이유는 공격하는 동작의 주체가 바로 ‘천국’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천국에 의해) 공격당하는 자들은 (천국을) 차지한다”가 될 것이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빼앗느니라(?)

KJV처럼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bia,zetai”(비아제타이)를 왜 수동의 의미로 번역하는 것일까? 마11:12의 주어인 “천국”(h` basilei,a tw/n ouvranw/n/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공격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bia,zetai”(비아제타이)가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어도 능동의 의미로 사용된 중간태일 것이라는 판단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이 “bia,zetai”(비아제타이)를 수동의 의미로 번역한 이유는 어설프게 전후문맥을 염두에 두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마11:12 바로 앞에 언급되었던 세례요한과 마11:12의 천국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어설픈 전후문맥을 염두에 두고 마11;12를 읽는 이들은 “세례요한은 헤롯에 의해 폭력적인 죽음을 당했다. 이렇듯 천국은 원수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침노 당한다. 그래서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원수들이 천국을 빼앗는다”라고 마11:12을 이해하고 번역한다. 다음은 “bia,zetai”(비아제타이)를 수동의 의미로 번역한 아래 번역 성경들이다.

공동번역: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KJV: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NASB: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s violence, and violent men take it by force.

안타깝게도 위의 번역들은 마11:12의 주어인 “천국”의 주권적인 본질적 속성을 놓친 오역이다. 왜냐하면 전능자 하나님이 그의 절대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천국은 본질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공격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은 헤롯에게 공격당해 참수 당했지만, 천국은 헤롯에 의해 결코 목이 잘리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은 세례요한이 참수 당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강하게 세상을 향해 침노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헤롯의 공격에 의해 참수 당했을 때, 천국복음으로 세상을 공격하시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유대 당국자들에 의해 공격당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은 세상의 공격에 의해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더욱 더 강하게 세상을 향해 공격했으며, 그 공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통치되는 “천국”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마11:12에서 “천국”을 주어로 하는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비록 수동태의 모양을 띠고 있는 동사이지만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의 의미로 쓰여진 ‘중간태’가 명백하다. 그러므로 “bia,zetai”(비아제타이)는 “침노를 당하나니”가 아니라 “침노하노니”로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마11:12의 유사본문인 눅16: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눅16:16에는 하나님 나라가 공격당한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복음 전파자들을 통해 세상을 향해 전파되는 복음으로 공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들어가느니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의해 공격당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침입 당하게 되는 것이다{눅16:16에서 ”침입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마11:12와 동일한 “bia,zetai”(비아제타이)이며, 눅16:16에서 이 동사는 명백하게 수동태이다. 이것은 뒤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대부분의 헬라 교부들이나 칼빈, 그리고 헨드릭슨, 리델보스 같은 이들은 “bia,zetai”(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고, “천국은 공격한다”로 바르게 이해했다. 그리고 NIV(has been forcefully advancing)를 비롯한 상당수의 번역 성경들도 “bia,zetai”(비아제타이)를 “천국은 공격한다”으로 바르게 번역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bia,zetai”(비아제타이)를 “공격한다”로 이해한 모든 이들과 모든 번역 성경들은 그 뒤에 이어지는 문장의 주어인 “biastai.”(비아스타이)가 능동의 의미로 사용된 “bia,zetai”(비아제타이)에서 유래된 것으로만 생각하고, “biastai.”(비아스타이)를 능동의 의미인 “침노하는 자들”로 오역하고 만 것이다. 헤르만 리델보스도 이 부분을 “천국은 침노한다. 침노하는 자가 천국을 빼앗는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투쟁이 요구된다”라고 주석했다.3)

“bia,zetai”(비아제타이)를 “공격한다”로 바르게 번역했으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biastai.”(비아스타이)를 “침노하는 자들”로 오역한 번역 성경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새번역: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

NIV: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수 있을 만큼 나약한 나라인가?

마11:12에서 “침노하는 자들”로 번역한 “biastai.”(비아스타이)는 “bia,zetai”(비아제타이)에서 온 명사이므로, “bia,zetai”(비아제타이)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리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bia,zetai”(비아제타이)가 “침노를 당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수동태라면, “biastai.”(비아스타이)는 침노를 당하는 천국을 “침노하는 당사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bia,zetai”(비아제타이)가 “침노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중간태’라면, “biastai.”(비아스타이)는 침노하는 천국에 의해 “침노당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bia,zetai”(비아제타이)를 “침노하다”의 의미로 바르게 이해한 자들이 “biastai.”(비아스타이)를 “침노하는 자들”로 번역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명백한 실수이다. 이런 실수는 눅16:16에서도 발견된다.

눅16: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에서 “침입하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마11:12에서와 동일하게 수동태 모양을 띠고 있는 “bia,zetai”(비아제타이)이다. 따라서 눅16:16에서 이 동사가 수동의 의미로 쓰였는지, 능동의 의미로 쓰였는지를 판단해서 수동태 또는 ‘중간태’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11:12의 “bia,zetai”(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고, “침노하느니라”의 능동의 의미로 번역한 자들이나 번역 성경들은 물론이고, 이 동사를 수동태로 보고, “침노를 당하노니”로 번역한 자들이나 번역 성경 모두는 눅16:16의 “bia,zetai”(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고, 능동의 의미로 번역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눅16:16의 “bia,zetai”(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고, 능동의 의미로 오역한 번역 성경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BibleWorks 등 대부분의 주석들과 모든 번역 성경은 이 동사를 ‘중간태’로 본다).4)

개정개역: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공동번역: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새번역: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다. 그 뒤로부터는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으로 전파되고 있으며, 모두 거기에 억지로 밀고 들어간다.

NIV: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proclaimed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is being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

KJV: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until John: since that time the kingdom of God is preached, and every man presseth into it.

마11:12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이 그의 절대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천국”을 주어로 하는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능동적인 의미로 쓰인 ‘중간태’가 명백하므로 “침노하노니”로 번역해야 마땅하듯이, 눅16:16의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의 주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마다”(pa/j/파스)이므로,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의해 동작되는 수동태가 명백하다.

그러므로 동사 “bia,zetai”(비아제타이)는 수동의 의미인 “침노를 당하나니”, 또는 “들어감을 당하나니” 등으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을 조금도 침범할 수 없다. 사람은 오히려 천국 복음을 들음으로써, 천국에 의해 공격당한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자신의 힘으로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사람마다 복음으로 공격당해,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한 믿음으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그의 양들을 양 우리로 들어가게 인도하시면, 그의 양들은 그의 양 우리로 들어가게 된다. 결코 양들이 자신의 힘으로 양 우리를 침노하여 양 우리에 들어가거나 양 우리를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글을 마치며

아담이 하나님이 되려고(천국을 침노하려고) 하나님을 거역했듯이, 이 시대의 교회들과 신자들이 타락과 파멸의 나락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을 침노하여 차지하려는 이 시대의 세속적인 교회들과 신자들의 사악한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너무나 적절하게도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성경을 오역한 사탄의 메시지가 이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정당화시켜주기까지 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 이런 교회들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타락한 교회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들로 우뚝 서서 박수를 받고 있으며, 오히려 사탄의 하수인들이 믿음의 영웅들로 추앙받기까지 한다.

오순절주의, 신사도주의, 신비주의, 성령주의, 알미니즘, 조나단 에드위즈를 믿음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교회들, ‘회심 준비론’을 주장하는 자들, ‘유보된 칭의’를 주장하는 자들, 수많은 이단들의 교주들 등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또 나름대로 적절하게 거짓 진리로 위장은 하지만, 하나같이 하나님의 자리를 엿보며,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며,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자리를 침노하는 자들이 틀림없다.

[바른믿음]에서, 특히 정이철 목사가 사력을 다해 이런 자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절대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밝히 드러내어, 하나님의 참 교회와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 하나님을 흉내 내는 거짓 교회들과 거짓 믿음의 영웅들에게 미혹되지 않고,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의 참 교회를 섬기며,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의 참 자녀로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적어도 [바른믿음] 독자들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의 오역의 심각을 인지하고, 또 우리 속에도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은 교만이 숨어있음을 자인하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진리의 말씀에 따라 철저하게 하나님이 되고 싶은 교만을 죽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따라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 각 주 —-

1) 권성수, 성경해석학-1, pp. 11-12.

2) 류모세, 열린다 성경 난해구절-1, p. 235.

3) 헤르만 리델보스, 마태복음, p. 338.

4) 그러나 스테판 헬라어 분해 사전에서는 이 동사를 VIPPS3(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단수 3인칭)로, 즉 수동태로 표시하고 있다.

이창모 목사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한국 교회를 신물 나게 체험하며 갈등하다 하나님을 향해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며 1999년 김천에서 ‘제자들 경배와 찬양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창모 목사는 한국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이 단지 성공주의, 황금만능주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 등이 아니고 이미 한국교회에 만연된 잘못된 신학에 있음을 확신하고서 무엇이 바른믿음인지 신학적으로 깊이 고민하는 목사이다. 이창모 목사는 자신이 중2때 수련회에서 방언을 받았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것을 ‘영의 기도의 언어’라고 가르치므로 의심없이 수 십년 동안 옹알거리는 방언현상으로 기도(?)하였던 대표적인 방언기도자였다. 김우현, 김동수 등이 저술한 거짓 방언을 미화하는 한심한 서적들을 접한 후 방언에 관한 깊은 신학적인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오늘 날 방언이라고 알려진 소리현상과 성경의 참된 방언은 무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되었다. 이전의 자신처럼 방언으로 기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다른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진정한 복음으로 돌이키기 위해 (밴드오부퓨리탄,2014)을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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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2020]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 이다.

[MC2020]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 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

예수님께서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침노라는 단어가 우리에겐 익숙한 단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침노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남의 나라를 법이나 도리에 어긋나게 쳐들어간다는 의미

성가시게 달라붙어 손해를 끼치거나 해친다는 의미

두 가지의 의미 모두 부정적입니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자를 설명합니다.

침노를 당하는 자에게는 불법적이고, 도리에 어긋나게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손해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침노를 하는 자에게는 그 행위의 당위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에게는 그 행위가 당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침노는 무언가를 폭력적으로 뺏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침노할 만큼의 열심을 갖고

그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용기 있는 자입니다.

‘침노하는 자’들은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침노하여 고침을 받고 구원받은 자들이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길가에 앉아있던 바디매오(*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는 예수님을 목 놓아 불렀습니다.

주변에서 그에게 조용히 하라고 해도 그는 그 말에 맞서 더욱 크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쳤습니다.

또한 혈루병에 걸린 여인도 죄인이라는 낙인에 찍혀있던 그녀가

유대인인 예수님께 손을 대는 것 또한 그녀의 모든 용기를 짜내어 한 행동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로보니게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요청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개로 빗대어서 예수님께 구합니다.

이 행동들은 이름도 없고,

힘도 없는 이들의 목숨을 걸고 했던 행동 들입니다.

이 행동들은 이 세 사람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침노 였던 것입니다.

구원을 향했던 그들의 침노,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침노가 그들을 구했습니다.

우리들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열정은 무엇에 침노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지 말입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장 12절)

천국은 침노를 당하며,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는 이 구절은 ‘천국’이라는 평화롭고 신성한 공간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아 고개를 갸웃하게 합니다.

먼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구절을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여 천국이 시작되었다고 외치던 요한이 활동하던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천국이 확장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천국의 확장은 ‘침노를 당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는 수동태와 중간태로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를 수동태로 해석하면 천국이 어떤 강한 힘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거칠게 강탈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습격을 받아 강탈당하는 것처럼 정복되어 빼앗기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를 중간태로 해석하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 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the Kingdom is forcefully advancing)”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거룩한 능력과 권위로 이 땅에 임하게 된 천국은 침략이나 약탈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형태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구절에 대해서도 Hill, Meier, Hobbs 등의 학자들은 앞 구절의 ‘침노당하다’라는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면서 그 연장선 상에서 하늘나라가 맹렬하게 공격을 당하고 있고 난폭한 자들이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Pamment, Kummel과 같은 학자들은 ‘침노당하다’를 중간태로 해석하면서 이 구절 역시 ‘침노하는 자’라기보다는 ‘용기있는 자, 강한 자’로 이해하여 용기와 강한 집념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즉, 소심하거나 게으르거나 쉽게 낙담하여 믿음에서 돌아서는 사람은 천국을 얻을 수 없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노력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동원하는 강하고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빼앗느니라”라는 말의 원어는 ‘하르파주신 아우텐’으로 무엇을 얻기 위해서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움켜잡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어주신 유업, 이미 이 땅에 임한 천국을 얻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기울여 애쓰고, 이것이 아니면 살아갈 희망이 없는 것처럼 인생의 초점이 거기에 맞춰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토록 간절하게 천국을 원할까요? 지금 현재 먹고살 만하고 만족스러운 사람보다는 살기 팍팍하고 고난이 계속되며 세상적으로는 살아갈 희망이 없는 힘겨운 사람이 더욱 천국을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나 창기, 병자, 죄인들이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천국의 소망을 더욱더 강렬하게 갖게 되나봅니다. 예수님은 그 이치를 이미 알고 계셨기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 복병처럼 숨어드는 고난과 어려움들이 왜 유익한지 이해가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현실의 아픔은 천국에 관한 더 강렬한 소망을 갖게 합니다.

물론 그것은 죽고 난 다음에 가는 천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천국이 임했다고 말씀하셨고, 그 천국이 확장되어가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어떻게 천국이 임하고 있나 돌아보게 됩니다. 한 신실한 목사님이 인류의 역사는 갈수록 더 좋아지고 있다고 한 이야기가 오래도록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좋지 않은 뉴스들을 보면서 “말세야, 말세”라고 말하며 왜 이리 부도덕하고 악한지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사실 불평등하게도 노예가 있었고, 여성과 아동의 권리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를 생각해 보면 현재 인간의 존엄성은 훨씬 더 격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 세계가 화염에 불탔던 세계 1,2차대전이 지난 지 아직도 100년이 지나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나와 지금 이 정도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 사이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이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지구가 아파 신음하며 이상기후가 발생되고 시베리아에 산불이 나는 등 자연이 해방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시위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빈부의 차이로 인한 고통,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사회 계층 사다리가 무너져 빈곤이 악순환되는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우리가 침노하여 제도와 사고방식을 천국화해야 하는 과제들입니다.

이 땅의 문제들은 도외시한 채 죽어서 가는 천국만 흠모하고 있다면,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던 것처럼 이 땅에 임한 천국을 무시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 땅에 천국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은 천국을 완성해가는 뜨거운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너희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천국을 완성해가는 열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키워내라는 말씀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도로 불린 우리들은 ‘프로테스탄트’ 즉 ‘저항하는 자’입니다. 잘못된 제도와 불평등과 차별과 악습의 대물림에 대해서 저항하고 사력을 다해 올바른 길을 만들어감으로써 천국을 이 땅에 확장시키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제시대에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야말로 억압과 압제에 맞서 비폭력으로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숨을 바쳐가며 그들이 외친 것은 우리 민족만의 해방이 아니라 천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인간의 구원과 해방의 외침이었습니다.

신분의 구분이 있었던 조선 말에서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며 외친 그들의 외침은 단지 일본에게서 벗어나는 데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며,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은 제국주의적 억압뿐 아니라 신분 계급의 어떠한 차별로도 얽매일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한 데 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은 기독교 복음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얻었으며, 이름이 없었던 여성에게도 이름이 주어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각 개개인이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된 것은 천국이 임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천국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아직도 이 땅의 세속적인 삶은 어쩔 수 없고, 죽어서 가는 천국이나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기독교인은 이중국적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땅의 세속국가에 속해 있으나 본질은 천국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오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 위험성을 자아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천국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천국이 이 땅 위에 확장되었다는 뜻이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죄 많고 세속적인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거룩하게 만들어갈 것인지, 어떻게 서로를 존엄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지 뜨겁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이겨야 하며 타인을 향해 내 것을 양보할 수 있는 천국의 삶을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교회에 헌금은 반드시 내야 하고, 이 땅의 세속국가에서 내라고 하는 세금은 어떻게든 줄이려고 애쓴다면, 이 땅에서 천국을 확장하는 일은 요원할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 열심히 봉사하면서, 이 땅의 선거에는 무관심하고 정치는 무조건 더럽다고 비판만 할 뿐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침노하여 천국을 빼앗는 자가 아니라 게으르고 무관심하고 열정이 없어 천국의 침노를 무한정 연기시키는 행위를 하고 마는 것입니다.

천국은 죽은 뒤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확장시켜가는 것임을 기억하고, 강한 신념과 좌절하지 않는 열정과 반드시 그 천국이 임해야만 하겠다는 가난한 심령으로 사모하며 작은 일부터 행동해야겠습니다.

무화과 열매가 풍성한동네

천국을 침노해 빼앗으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질문]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성경을 읽다가 상기 구절에서 탁 막히면서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소망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생각한 것이 맞는가요?

[답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생각하시는 대로 정확히 맞습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살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우선 강단에서 간혹 이 말씀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오류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상기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구원관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믿어라?

적극적 믿음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본문을 인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특별히 담임 목사에게 순종하며 교회의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것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천국은 침노해서 빼앗아야 하므로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보고 봉사하며 전도하여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경우입니다. 축복을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빼앗아 올 수 있고 또 빼앗는 만큼 누릴 수 있다는 식입니다.

본문은 근본적으로 천국에 관한, 그것도 특별히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현실에서 누리는 축복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천국이란 시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이기에 현실에서 복을 받는 것도 그 통치의 일부이긴 합니다. 그렇다 해도 신자가 열심히 믿는 만큼 복을 받을 수 있다면 자기가 받을 복의 질과 양을 인간 스스로 정하는 셈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역할은 단순히 채점하여서 복을 나눠주는 일종의 관리인으로 그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으로 오직 당신이 세우신 계획과 목적대로 이 땅을 운행해 나갑니다. 그분은 결코 기계적인, 말하자면 동전을 집어넣으면 원하는 물건이 나오는 자동판매기 같은, 분이 아닙니다. 잘 믿는 만큼 복을 받는 모습이 일부 결과적 외형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믿음의, 특별히 복을 받는, 원리로 가르쳐져선 안 됩니다.

기복주의 신앙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본질과 복의 의미에서부터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바와는 거리가 멉니다. 우선 믿음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기에 신자가 그분과 평생을 동행하면서 유지해야 할 인격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또 신자가 하나님께 받아 누릴 복도 예수님이 팔복 강화에서 말씀하셨듯이 반드시 신자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풍부하든 궁핍하든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이 신자가 누릴 진정한 복인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Give-and-Take의 법칙이 없습니다. 믿음을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어떤 공식이나 법칙으로 단순화시킬 수도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를 일대일 개인적으로 대우하십니다. 각 신자에게 특유의 계획과 뜻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오직 그 한 사람만 있는 양으로 범사에 간섭하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적극적으로 믿기만 하면 그만큼 복을 누린다는 것은 세상에서 의지력이 강한 자만 득세하게 만든다는 논리로 귀착됩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되어버립니다.

나아가 담임 목사나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닐 경우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참 신자라면 당연히, 단 교회와 목사가 성경적일 때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흩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한 재충전입니다.

물론 안식일을 주 안에서 보내고 무엇보다 주를 경배하기 위해 주일에는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 외의 모든 모임과 행사는 신자답게 변화시키며 영적으로 성숙시켜서 세상에서 죄악과 싸워 이기는 십자가 군병으로 양성하는 목적이어야 합니다. 무조건 교회에만 자주 모여서 신자끼리 교제하고 또 적극적 믿음으로 복 받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주님께 충성하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복을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베풀어 주십니다. 그 복 가운데는 핍박과 순교의 복도 당연히, 아니 훨씬 더 자주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반드시 믿음과 복, 그 각각의 본질과 상호관계를 정확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대로만 가르치고 실천해도 천국은 신자의 본인과 가정과 직장에서부터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온 땅에 누룩처럼 번져나갈 수 있습니다.

물론 신자는 적극적인 믿음을 가져야 하고 교회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분께 헌신하고 있기에 자발적이고도 필연적인 열매의 모습으로만 드러나야 합니다. 아니 정말 온전한 믿음 위에 서있다면 성령님이 강권해서라도 그렇게 만드십니다. 요컨대 구태여 적극적으로 믿은 만큼 복을 빼앗아 가라고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문법적 표현

본문을 해석함에 애로를 느끼는 것은 헬라어 원문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사실상 힘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침노를 당하노니”라는 부분인데 헬라 동사 ‘비아제타이’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말로는 분명 수동태 형식으로만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침노’라는 아주 공격적인 단어가 사용되다보니 천국이 어떻게 인간이 빼앗을 수 있는가라는 의아심부터 듭니다. 어쨌든 신자로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아주 굳세고도 뜨겁게 믿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용어는 예수님이 직접 선택해서 사용했음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먼저 수동태 해석의 경우는 천국은 동작의 영향과 결과를 받는 입장이며 주체는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자에 의해서 강탈당하거나 그 힘으로 다뤄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힘이 있는 자가 빼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중간태는 동작의 영향과 결과가 스스로에게 미치는 재귀적 용법으로 주로 사용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지만 본문에선 문맥상의 뜻이나 동작의 주체가 명료하게 나타나 있지 않기에 재귀적 용법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국은 지금 아주 강력하게 도래되었고 아주 역동적 적극적으로 확장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삼의 힘이 개입되지 않고서 천국 자체의 큰 힘으로 말입니다. 이런 의미를 재귀적 표현이 없는 우리말로는 간단명료하게 번역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어 자체의 동사의 태와 상관없이 동작의 주체가 사단 같은 흑암의 세력이나 그에 미혹되어 있는 불신자들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천국이, 그것도 이제부터 예수님이 실현시킬 천국이 그들에게 침노당할 수 없으며 그들이 차지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동작의 주체는 천국 스스로이거나(중간태) 혹은 신자들이(수동태)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 되었든 그 해석은 한 마디로 천국은 이제 적극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니 신자들도 적극적으로 믿어 천국을 차지하라는 것이 됩니다.

그럼 위에서 오류라고 언급한 해석이 옳다는 뜻이 됩니까? 물론 그럴 리는 없습니다. 성경 본문의 문법적 분석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반드시 천체 문맥에서 따져 보아야 합니다.

문맥에서의 해석

우선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씀을 먼저, 말하자면 강조할 목적으로, 하셨다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럼 요한의 때 이전과 이후가 확실하게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천국이 침노를 당하지 않았고 또 침노하는 자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통치라는 천국에 관한 광의의 해석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에 일단 배제 되어야 합니다. 만약 천국을 하나님의 통치라고 해석하면 구약 시대에는 그 통치가 적극적으로 믿지 않는 자에게도 임했지만 이제 신약 시대부터는 적극적으로 믿는 자에게만 임한다는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통치 원리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는 세상이 보존되고 또 당신의 법칙대로 운행되도록 해서 먹고 마시는 생존 환경을 제공하는 일반은총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당신을 오직 믿음으로 따르는 자는 구원으로 인도하여 영생을 주시며 또 그 인생을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는 특별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시대와 장소가 달라졌다고 해서 수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구약시대에 선택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일반은총에 머문 자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분으로부터 의롭게 여김을 받았듯이 구원의 원리도 신구약 시대에 동일합니다.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라는 뜻입니다. 구태여 요한을 따로 언급한 이유가 동시대에 살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요한이 한 역할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광야에서 기쁨으로 외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선언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입니다.

즉 메시아가 오기 직전에 그 실제적 도래를 크게 외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구약에 예언된 것마저 요한으로 인해 정확하게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 전에(10절)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말3:1)에 대해 미리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선 반드시 예수님 오시기 전과 이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야만 합니다. 아니 문맥상의 의미도 실제로 그런 의미를 나타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과 후에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는 하나도 변함이 없다면 과연 무엇이 가장 크게 달라졌습니까? 그 답은 너무나도 간단명료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본체이신 당신께서 인간의 비천한 몸으로 이 땅에 직접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강화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인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답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내용일 수밖에 없으며 본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이 가장 크다고(11절)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인격이 고매하거나 도덕적 선을 많이 행했거나 종교적 실력과 능력의 크고 작고를 따지는 말씀이 아닙니다. 메시아가 미래에 올 것이라고 예언만 했던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는 달리 요한은 이제 정말 오셨다고 선언했고 또 직접 육안으로 보았으니 그들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바로 이어지는 12절의 천국과 연결해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 이후에 이 땅에 침노(도래)한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구약 성도들도 이미 가 있는 요한 당시 기왕에 존재하고 있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구약 성도와 달리 메시아를 직접 보긴 봤지만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이 이 땅을 향한 구속을 완성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 구속의 은혜와 권능 안에 완전히 들어온 신약 시대 이후 천국에 가는 성도보다 작다는 것입니다.

침노하여 천국을 차지하라는 것은?

이제 본문에서 특별히 말하는 천국의 의미가 아주 좁혀졌습니다. 우선 일반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며, 구약성도들이 이미 가있는 상존하는 천국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당신께서 적극적으로 실현할 천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불치 병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상처 받은 자를 말씀으로 위로하셨던 그분의 사역이 천국이 아닙니다. 기존의 종교적 기득권층을 뒤엎고 소외 되고 핍박 받는 자들을 세웠던 개혁도 천국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열두 명의 제자와 함께 가르침과 섬김의 공동체를 만드시고 삼년 간 가꿔나간 것도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가 요한보다 크다고 했지 않습니까? 별다른 사역도 하지 않은 신약시대의 일반 성도가 마지막이자 제일 큰 선지자로서 순교까지 당한 요한보다 그런 측면에선 결코 더 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13-30절) 즉, 예수님의 부연설명을 보면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을 순수하게 믿었느냐 믿지 못했느냐에 따라 천국의 기준이 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잔치에 아무리 초대해도 응하지 않으며, 심지어 예수님의 권능을 가장 많이 입은 고을도 제대로 회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 모두가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알고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지도 알아채지도 못해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것과 침노하여 빼앗으라는 의미가 분명해졌습니다. 먼저 천국이 침노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적극적으로 구원을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앞에서 언급한 중간태로 해석함) 예수님이 사역하시고 가르치심으로써 하나님 당신의 실체를 직접 보이셨습니다. 또 당신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 노예가 되어 있던 인간을 구원할 길을 활짝 여신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침노하여 천국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믿으려고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헌신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아가 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야만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개인적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처절하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외에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구원 받을 길이 없었음을 절감해야 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또 율법을 잘 따랐다는 것으로는 구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철두철미 인정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과 동일하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로부터 지금까지 즉, 당신께서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지금까지 이 땅은 천국 복음에 의해 적극적으로 침범 당하고 있으며 구원의 길이 가시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그 잔치의 초대에 응하여서 어린아이 같이 순전한 믿음으로 당신의 구세주 되심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침범 당한다”는 아주 공격적이고 강력한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입니다. 이 땅과 죄인들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의 열심과 주권으로 확실하게 구원을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영혼을 찌르는 힘이 너무 강해 항거할 수 없으며 또 성령의 권능으로 거듭나게 함도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와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십자가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을 침노하여 빼앗으려면 즉, 구원을 얻으려면 자신이 무능, 무력, 무지,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죄에 빠져 하나님과 완전히 원수 된 자리에 있음을 온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자기로선 도무지 구원의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 없는 이 땅이 아무 희망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정말 마음이 가난해지고 영혼이 갈급해져서 오직 천국 영생을 소망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구원 받은 자들도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는 똑 같았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모세는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 봄이라.”(히11장에서 발췌) 성경은 분명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봤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수님이 구태여 천국이 침노하였고 또 신자더러도 침노하여 빼앗으라고 말한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서 구원여부는 죽어 봐야 압니다. 유대교는 선택된 민족이기에, 이슬람은 알라에 의해 숙명적으로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예외는 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구원의 확신을 개인적으로 생전에 미리 갖는 경우는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뿐입니다. 그야말로 천국이 이 땅에 적극적으로 침노한 것입니다.

생전에 이미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한 것은 신자더러도 예수님처럼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서 적극적으로 이 땅을 침노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부터 가까운 이웃을 거쳐 차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특별히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십자가 보혈의 권능에 힘입어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에 뜨겁고도 적극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교회와 목사에 충성하여 많은 복을 받으라는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에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 살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오직 예수의 향기만 드러내는 사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한 것에 대한 답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께서 적극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고 죽으시고 부활하여 천국을 실현한 것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신자가 날마다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여서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먼저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그분이 누구인지 바로 깨닫고 자신의 주인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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