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을 위한 나라 는 없다 해석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의미 해설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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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은 ‘(세상이 많이 바뀌고 험악해지며 자신이 이해할 수 없게 변했거나 돌아가기 때문에) 노인이 살아갈 만한 나라가 아니다‘에 가깝다. 이 구절에서 ‘노인’이란 ‘오래된 지혜를 가진 현명한 생각의 소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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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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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해석 & 리뷰 – 집필공간

사냥을 즐기던 르웰린 모스가 마피아들이 총격전 벌인 곳에서 돈을 획득한다. 그 가운데 살아남았던 한 사람이 물을 달라고 했지만 물이 없어서 그냥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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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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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해석 – 브런치

왜 이 영화의 제목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가? 제목을 방향타 삼아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을 적어보자면, 초점은 은퇴를 앞두고서 사이코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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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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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해석 및 결말에 대하여..(스포주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해석 및 결말에 대하여. … 에드는 극 중 르웰린 모스(조슈 브롤린)이나 킬러인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의 흔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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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_당신이 궁금해할 모든 것을 적었다

하지만 시거를 죽음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그가 가진 숙명성이다. 시거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죽음의 융단이 깔린다. 그 누구도 시거를 피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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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줄거리 결말 해석 한번쯤 다시 생각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줄거리 결말 해석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좋은 영화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안톤시거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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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새겨진 미국사 이야기

이들을 한걸음 뒤에서 따라가는 보안관 벨은 두 사람의 행동을 해석할 관점을 제시한다. 마약과 돈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는 피비린내나는 폭력의 현장이나 냉혈한 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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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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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의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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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노인 을 위한 나라 는 없다 해석

  • Author: 백수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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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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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해석 &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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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스포 O)

사냥을 즐기던 르웰린 모스가 마피아들이 총격전 벌인 곳에서 돈을 획득한다. 그 가운데 살아남았던 한 사람이 물을 달라고 했지만 물이 없어서 그냥 집으로 돌아왔던 르웰린 모스. 그러나 그 사람이 눈에 밟혔는지 한밤중에 다시 찾아가 물을 건네주려 하지만 이미 죽어있었다. 그때 돈을 찾으러 온 무리가 르웰린 모스를 쫓는다. 돈 가방에 위치 추적기가 있고 그를 쫓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시거. 악명 높은 그는 어떻게 서든 그를 찾으려고 한다. 이 사건을 따라다니면서 수사하는 벨은 나이가 많은 보안관이다. 쫓고 쫓기는 숨 막히는 전개 끝에 결국 르웰린 모스는 살해당하고 안톤 시거는 돈을 찾아 유유히 떠난다. 벨은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은퇴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포스터

감상문

역시 함부로 남의 돈을 건드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너무 과한 오지랖은 되려 피해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처음에는 이런 단순한 생각들을 했다. 그냥 돈만 잘 챙기다 보면 추적기 꺼내서 버리고 잠적하면 그만일 것을 괜히 물 갖다 준다고 가서 꼬리 잡히고 그러냐 말이다. 뭐 그랬다면 영화가 안 되려나…

제목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여서 이런 스릴러 영화일 것을 예상 못했다. 노인이라는 대상 자체가 사회적 약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보니 노인이 피해자가 되고, 그리고 피해자로 끝난다고 명확 시 되는 뉘앙스를 가진 제목이라 더더욱 감을 못 잡았다. 사회적 이슈나 복지 관련된 영화였으리라 생각했다.

르웰린은 꼼꼼한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허술했다. 안톤 시거는 상대의 허점을 잘 파고들었다. 타고난 살인마다. 안톤 시거가 처음 보안관한테 잡혔을 때 빠져나오지 못했더라면 스토리의 전개가 다르게 갔겠다. 물론 어떻게든 나와서 돈을 찾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보안관 벨은 꼭 한 발씩 늦는다. 아니면 일부러 늦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전혀 르웰린에게 도움이 안 되는 역할이었다.

이 영화의 특징은 뻔한 전개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안톤 시거를 제거하기 위해 고용된 청부사도 허무하게 죽고, 벨은 도움이 안 되고, 마지막으로 르웰린도 너무 어이없게 죽어버렸다. 허무함과 갑작스러운 전개 속에 갑자기 벨의 꿈 이야기로 영화는 끝맺음이 나버린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올 때 내 이해력이 한없이 부족하구나 하고 한탄했다. 어쩔 수 없이 영화 해석과 리뷰들을 보면서 남아 있던 빈 공간들을 채워나갔다.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해석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OST가 없다. 그러다 보니 연기만 더 몰두하게 보고 사소한 것에 집중하게 된다.

영화의 배경은 베트남 전쟁 끝난 직후이다. 영화 중간중간 베트남 전쟁이 꾸준히 언급된다. 미국이 패배감으로 젖어 있을 때다. 보안관들은 왕년의 영광에서 잘 헤어 나오지 못하고 새로운 변화를 어색해한다. 영원히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나라의 패배, 그리고 그 나라 안은 혼돈이 차오른다. 안톤 시거를 방치하는 보안관, 서부 개척시대를 상징하는 카우보이 복장, 사냥을 실패하는 르웰린의 모습들이 과거 영광의 모습들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무너지고 있는 현상을 대변한다.

이런 배경 속 안톤 시거는 통제가 불가능한 존재의 상징이다. 혼돈과 우연, 그 속에서 본인 나름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편의점 사장과 대화하는 장면이 대표적으로 안톤 시거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안톤 시거는 기존의 것들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안톤 시거에게 제거당하는 피해자들이 대부분 노인들이다. 힘 없이 대항하지 못하고 살해당한다. 이 또한 과거의 영광이 무너지고 새로운 혼돈과 공포들이 찾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르웰린은 이 혼돈 속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을 선택한다. 아무도 그에게 그 선택을 시키지 않았다.

절대적일 것 같았던 안톤 시거조차 전혀 예상치 못했던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는 현실이 어떻게 늘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름을 시사한다.

안톤 시거와 보안관 벨은 단 한 번도 마주하지 않는다. 혼돈을 마주하기 싫어하는 벨은 그 선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노인은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하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새로운 혼돈을 마주했을 때 무너져버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해석

개인적인 취향으로보다는 어떤 당위성으로 선택하는 영화들이 있다. 무슨 메시지를 담고 있길래, 그토록 많이 회자가 되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끌리는…. 그러나 그런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취향으로 소외되는 제목들이 있다. 그다지 끌리지 않는 제목이기에 마음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던 영화, 이런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우연’에서 비롯된다. 어떤 정보를 검색하다가 읽게 되는, 그 영화의 정보를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로 인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은 그다지 끌리지 않았었다. 우연한 계기로 영화를 감상했던 내내 떠나지 않던 의구심 또한 제목에 관한 것이었다. 왜 이 영화의 제목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가?

제목을 방향타 삼아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을 적어보자면, 초점은 은퇴를 앞두고서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쫒는 보안관에게 맞추어진다. 황혼이 되어 되돌아보는 보안관으로서의 삶은 적지 않은 회한들로 들어차 있다. 그때 내가 한 선택들이 과연 옳았던 것일까?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그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다른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평생을 살았는데, 갈수록 더욱 흉흉해져가는 세태로 제기되는 물음은 보안관의 존재의미에 관한 것이다. 더군다나 끝내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잡지 못하고서 은퇴를 해버릴 판이다.

이전 세대에게는 허허 벌판의 텍사스를 삶의 장소로 일구는 근면함 밖에 없었는데, 오늘날의 텍사스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흉악한 범죄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노년이 되면 신의 뜻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신의 뜻을 모르겠다는 원로 보안관의 고백이, 정의는 승리한다는 진리가 정말로 진리인지 의심스럽다는 듯 허탈한 표정 주위를 맴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것인지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심지어 이젠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세상이 되었다.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기도 한 사이코패스 살인마는 도덕적 인과가 성립하지 않는 세태의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처음 살인마에게 죽음을 당하는 노인은, 단지 살인마에게 차가 필요했던 순간에 마침 거기 있었다는 이유로 죽는다. 닭장차를 몰고 가던 노인은 마침 거기 있던 살인마의 고장난 차를 보고 선의로 멈춰 섰다가 죽는 경우이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 입장에서는 살인마의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대변하는 연출로 이해할 수 있지만, 스크린 안의 세계를 살아가는 노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한 세월을 살아온 자신의 마지막은 그렇듯 갑작스러운 우연이었다.

피로 물든 마약 거래 현장을 지나다가 우연히 일확천금을 얻게 된 용접공은, 그 돈을 되찾고자 하는 살인마의 추격을 매번 용케 벗어나며 런닝타임을 이어가나 싶더니, 엉뚱하게도 마약 브로커가 보낸 킬러들에게 갑작스레 죽는다. 내내 부와 삶을 향한 용접공의 초인적 의지를 그려내던, 마치 용접공이 주인공인 양 전개를 해나가던 영화는, 그의 죽음을 자세히 다루지도 않는다. ‘그가 죽었다’는 한 줄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죽음이란 사건은 그토록 간단하고 허무하다.

남편 때문에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 아내, 더 환장할 노릇은 사위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된 장모이다. 암까지 달고 있는 노쇠한 몸은 말년에 도대체 이게 뭔 난리인가 싶다. 내가 저지른 잘못도 아니건만, 자신의 말년이 고작 도망자의 신세이다. 그나마도 사위가 잠시 쥐고 있었던 횡재의 혜택은 누려보지 못하고, 딸에게 장례비를 빚으로 안기고 떠나는 어머니가 되었다.

한 상점의 계산대 앞에서, 살인마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갑자기 심사가 뒤틀린 것인지, 상점을 운영하는 노인에게 동전을 내밀며 선택을 강요한다. 사이코 앞에서 서 있는 노인은 선택을 거부할 수 없다. 노인이 죽고 사는 문제는 오직 동전에게 달려 있다. 동전 앞에 선 노인에게 앞으로 남은 삶의 시간은 그저 확률의 우연이다. 인생의 곡절을 겪을 만큼 겪었고, 이젠 운명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인생의 늘그막. 그러나 동전 앞에서 삶을 갈망하며 운명을 점치고 있는 자신에게, 지나온 세월은 아무런 지혜도 되지 못한다. 삶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순간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동전의 앞뒤를 선택하는 것밖에 없다.

살인마는 나름의 원칙을 고수한다. 용접공에게도 혼자 죽을 것이냐, 아내와 함께 죽을 것이냐의 선택권을 준다. 그러나 용접공이 어떤 선택을 했어도 상관없었다. 살인마는 그의 아내를 죽이러 간다. 그리고 용접공의 아내 앞에서도 동전의 선택권을 준다. 살인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저들의 선택이라는 일방적 해석, 혹은 동전의 결과로 잇대어진 사건이 죽음이었을 뿐이라는 게 살인마 저 나름의 합리이다.

살인마는 자신이 제시한 원칙에 성실하다. 그래서 끝까지 가서 죽이는 것뿐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왜 그런 선택에 내몰려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저들의 이해는 필요 없다. 살인마 자신이 납득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아마 영화 제목의 노인은 그런 의미였나 보다. 도덕적 합리가 통하던 시절을 살았던 세대, 그리고 은퇴를 앞둔 보안관이라는 공권력은 구질서를 상징하는 듯. 그렇다면 살인마는 점점 그런 질서가 퇴색되어 가고 있는, 그저 저 자신에게만 전념하는 욕망들로 종잡을 수 없는 현대의 불안도를 상징하는 것일까?

살인마를 처치하기 위해 마약 브로커가 보낸 해결사는 상당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는 듯한, 반전의 캐릭터라도 되는 듯한 자신감과 치밀함을 내비친다. 그러나 그의 죽음 역시 그저 살인마의 총 한방이었을 만큼 간단하고 허무하다. 돈을 갖고 달아나던 용접공의 죽음과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결코 쉽게 당하지 않는 영화적 필연성의 상징인 듯한 살인마 역시, 마지막에 가서는 다소 어이없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죽지는 않았지만 팔의 뼈가 튀어나온 채, 점점 가까워오는 패트롤 사이렌 반대쪽으로 힘없이 달아난다.

어찌 보면 영화의 주제는 의외로 간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그토록 알 수 없는 개연성으로 다가오는 사건이라는…. 역설은 죽음의 성격이 삶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삶 또한 그토록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예나 지금이나, 노인에게도 살인마에게도, 이건 세대차를 물을 문제도 아니다.

원로 보안관들의 대화 속에선 흉흉한 세태의 원인은 ‘요즘 것들’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용접공과 뼈가 튀어나온 살인마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요즘 것’들이었다. 또 다른 원로 보안관이 자신의 동료를 잃은 사건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흉흉한 세태를 반영하는 범죄는 실상 옛날에도 있었다. 어른들은 그렇듯 자신들에게 반하는 가치를 부정적 현상의 원인으로 몰아간다. 그래야 시대의 불안을 설명해줄 수 있는 인과로 성립하기에….

그러나 요즘 것들이 살아가는 요즘의 풍토를 건네준 책임으로부터 어른들이 자유로울 수도 없는 입장이다. 어차피 요즘 것들도 어른들이 일구어 놓은 시대의 산물이 아니던가. 그렇듯 현상에 대한 원인은 특정한 범주로 규정하기 어렵고, 명확하게 규명되지도 않는다. 뚜렷한 동기가 없는 범죄의 원인이 시절의 문제만도 아니듯, 어느 시절을 살아가던 인생의 속성이 불확정성인 것처럼….

우리에게 도덕과 윤리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도덕과 윤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최소화해주고, 욕망들의 상충을 조절하는 공리(公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이코패스의 사유체계는 그 공리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다. 그저 자신에 대한 이해관계로만 운영되는 정신세계이다. 이런 증상은 의외로 고학력 집단에 많이 숨어 있다고 한다. 그 고학력 집단 중 하나인 정치인들만 봐도 확인되는 퍼센테이지가 아닐까?

그렇듯 공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엔, 노인을 위한 나라만 없는 것이 아니다. 유년을 위한, 청년을 위한, 장년을 위한 나라도 없다.

당신이 궁금해할 모든 것을 적었다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 글에는 엄청난 양의 스포일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글은 오직 읽은자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니 읽지 않은 사람은 이 글을 보지 말았으면 한다. 이 책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때문에 이곳에 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 세상에는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읽는 일이 그렇다.

이 책을 다섯 번이나 읽고 나서야 이 글을 쓴다.

루엘린 모스

베트남 참전 군인 루엘린 모스는 저격용 라이플의 조준경을 통해 황량한 대지를 바라본다. 그 위엔 영양떼가 있다. 모스는 다시 한 번 조준경의 거리를 맞추고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올린 뒤 숨을 가다 듬는다. 피융! 총알이 영양의 대퇴부에 꽂히고 소리가 뒤따라 날아온다. 영양들이 달리기 시작하고 대지는 엷은 먼지 구름에 휩싸여 뿌옇게 흐려진다. 모스는 핏자국을 따라 영양을 추적한다. 그의 목에는 멧돼지 이빨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는 사냥꾼이다. 그러나 핏자국의 끝에서 250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의 처지가 피를 흘리는 영양의 처지와 뒤바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모스는 욕망의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다. 그의 이름 Moss가 나방을 뜻하는 단어 Moth와 흡사하다는 사실은 놀랄 것도 아니다. 그는 가방을 들고 황량한 대지를 가로질러 트럭에 도착해 뒷좌석에 가방을 놓고 점화 플러그에 키를 꼽는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을 때 덜덜거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육중한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톱니바퀴는 모스를 집어삼켜 산산조각을 낼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으스러지는 뼈소리를 들으며 그는 한 남자와 마주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안톤 시거다. 사상 최악의 사냥꾼이다.

안톤 시거

안톤 시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의 지지는 변함이 없다. 안톤 시거는 ‘죽음’을 상징한다. 시거는 국경지대에서 남자 하나를 죽이고 보안관에게 잡힌다. 보안관의 사무실에서 시거는 손에 찬 수갑을 보안관의 목에 걸어 목졸라 죽인다. 시거는 임박한 위기나 죽음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의연하다. 언제나 무표정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시거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죽지 않을 뿐더러 가둘 수 조차 없다는 사실을. 시거는 사실 의도적으로 잡혔다. 의도적으로 잡히기 위해 그는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국경지대에서 저지른 두 건의 살인은 시거가 자기 자신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에 불과한 것이다. 자기 존재의 확인이 죽음으로 마무리된다면 그 존재의 실체는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거의 동전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거와 마주친 자들은 거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간혹 기회를 얻는 사람들이 있다. 시거는 동전을 던져 그들로 하여금 앞, 뒤를 맞추게 한다. 맞힌 자는 죽지 않는다. 이것은 그저 변덕스런 절대자의 놀이인가? 그렇지 않다. 시거의 동전은 한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죽음으로 감당하기에 동전 던지기는 너무 사소한 선택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사소한 선택이란 없다. 살면서 내린 선택들은 돌고 돌아 언젠가 눈덩이처럼 커져 돌아온다. 그 눈덩이를 마주하는 날이 우리 삶의 청산일이다. 그 날이 바로 죽음이 우리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날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단지 동전의 앞뒤를 맞추지 못해 죽은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저 마지막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 선택의 뒤로 무수한 선택이 사슬처럼 얽혀 우리가 태어난 날에까지 가 닿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안톤 시거의 정체로 돌아와, 그가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시거가 ‘죽음’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시거를 쫓는 보안관 벨은 시거를 목격한 아이들을 찾아가 그의 인상착의를 묻는다. 아이들은 시거가 그저 보통 사람 같았다고 말한다. 아주 평범한, 우리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죽음이 아주 특별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두운 망토를 두른채 큰 낫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라는 생명이 태어나는 그 순간 바로 나의 죽음도 탄생한다. 나와 죽음은 쌍둥이인 것이다. 죽음은 나와 너무 닮아 있어서 혹은 너무 평범하기에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에 임박해서야 비로소 내 손목을 잡은 그 죽음이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주 오랫동안 내 옆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죽음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당신이 아무런 눈치도 못챈 게 전혀 놀라울 것 없다는 듯이.

하지만 시거를 죽음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그가 가진 숙명성이다. 시거가 가는 길에는 언제나 죽음의 융단이 깔린다. 그 누구도 시거를 피할 수 없다. 시거는 돈가방이 어디 있는지 안다는 웰스(범죄 조직은 돈가방을 찾기 위해 시거를 보내지만 통제할 수 없는 그를 막기 위해 다시 웰스라는 청부업자를 파견한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거: 가방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웰스: 그래.

시거: 나는 더 좋은 걸 알고 있지.

웰스: 뭔가.

시거: 가방이 어디로 갈지.

웰스: 어디인가.

시거: 나한테 와서 내 발밑에 놓일 거야.

(p.195)

그리고는 산탄총으로 웰스의 얼굴을 쏴 그의 머리를 끈적이는 고깃덩이로 만든다. 시거에게 이 모든 소동의 해결은 그저 시간 문제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이 어디로 가든 어디에 숨든 그는 결국 시거(=죽음)를 만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의 앞에 선 모든 생명은 무로 돌아가고 돈가방은 시거의 차지가 된다. 사람들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숨막히는 추격전을 그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시거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쫓은 적이 없다. 시거는 그저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 기다릴 뿐이다. 죽음을 피해 열심히 도망쳤다고 생각한 그들은 사실 필사의 힘을 다해 죽음의 품으로 달려든 것이다.

텍사스에서 온 악마

이 부분은 나의 해석이 아니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참고 자료를 찾았는데 거의가 쓰레기 같은 글이었다. 그 쓰레기 중에는 꽤 많은 조회수와 추천이 있는 글도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하루 방문자가 4명 밖에 안되는 블로그에서 이 글을 발견했다. 나는 이 글을 소개해야만 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gulchance&logNo=60126538922

이 글의 요지는 ‘잘 살아 보자’는 달콤한 거짓말이 어떻게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 또 그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열풍과 미국의 패권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려주는 영화가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것이다.

레이건이 시작한 재앙은 텍사스 출신의 두 대통령(이 소설의 배경은 텍사스다) 죠지 부시 부자에 의해 완성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아버지는 걸프전을 아들은 아프간, 이라크 전쟁을 벌여 전세계에 죽음의 융단을 깐다. 코엔 형제는 2007년에 이 영화를 개봉한다. 그것은 미국 대선이 있기 1년 전이었다. 코엔 형제는 돈에 혹한 루엘린 모스의 선택이(잘 살아 보세에 속은 당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살인마를 데리고 왔는지(텍사스 출신의 두 살인자 죠지 부시 부자)를 보여줌으로써 곧 있을 선택이(대선)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려 한 것이다. 미국은 2008년 11월 4일 오바마를 선택해 회복의 여지를 만든다. 그러나 한국은 당시 이명박을 선택한다.

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의아해 한다. 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만큼 내용과 제목의 연관성이 깊은 소설이 없다고 생각한다.

늙은 보안관 벨(이 소설은 도망자 모스와 추격자 시거 그리고 그 둘을 쫓는 보안관 벨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은 틈날 때 마다 세태를 한탄한다. 이 나라 어딘가에는 노인의 사회보장기금을 가로채기 위해 그들을 납치한 뒤 앞마당에 묻은 젊은이들이 산다. 자기의 관할 구역에선 몇일 사이에 수 많은 사람이 그것도 소를 잡을 때 쓰는 스턴건에 이마가 뚫린채 살해 당한다. 범죄자들은 보안관을 향해 샷건을 쏘고 그들을 목졸라 죽이고 차트렁크에 넣어 불태운다. 곳곳에 마약이 있다. 학생들이 그것을 산다. 뉴스에는 끔찍한 사건 사고가 줄을 잇지만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들이다.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뉴스를 흘려넘긴다. 이곳은 분명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노인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강팍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제목의 타당성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이 소설은 모스와 시거의 추격전 사이사이에 그 둘을 쫓는 보안관 벨의 독백이 실린다. 그러나 이 독백은 이야기의 전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숨막히는 추격전의 흐름을 툭툭 끊어버리기까지 한다. 이것은 의도적이다. 작가는 우리가 현명한 노인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기 원하지만 벨의 독백은 그저 걱정 많은 노인네의 잔소리처럼 느껴진다. 시간의 세례를 받은 노인은 그 누구보다 삶의 비밀에 더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며 그 누구보다도 사는 법을 잘 아는 사람임에도 세계는 언제나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누구도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역사 모든 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노인의 아이러니다.

안톤 시거의 살인 행각이 결국 미해결로 정리됐을 때 벨은 보안관을 관두기로 결심한다. 마지막 근무날 그는 군청을 나와 자신의 트럭에 올라 가만히 앉아 있는다. 벨은 자신을 짓누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

그것은 패배였다. 영락 없는 패배였다. 죽음보다 더 비통한 패배(p.336).

그러나 이것은 벨의 착각이다. 그는 시거와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죽음이 싸움을 받아주지 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모스가 죽고 난 직후 벨은 알 수 없는 예감에 사건 현장인 모텔을 다시 찾는다. 그때 먼저 와서 돈가방을 찾은 시거가 주차장에 앉아 벨을 바라본다. 벨은 그곳에 시거가 왔다 갔음을(모스는 시거와 멕시코 범죄 조직, 두 일당에게 쫓기는데 그를 죽이는 건 멕시코 범죄 조직이다. 시거는 나중에 사건현장을 찾아와 숨겨둔 돈가방을 찾아간다) 알아채고 주차장을 유심히 바라본다. 벨은 주차장에 시거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그는 총을 들고 주차장으로 나가 순찰차에 탄 뒤 모텔을 빠져 나온다. 모텔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온 벨은 무전기를 들고 두 대의 순찰차를 부른다. 그들은 모텔 주차장으로 쳐들어가지만 시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벨은 지원을 나온 보안관을 향해 아무래도 우리가 놓친 것 같다고 말한다. 벨은 여기서 첫번째 착각을 한다. 벨이 시거를 놓친 게 아니다.

시거가 벨을 놓아준 것이다.

노인은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핵심에 뛰어들기 원하지만 그것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죽음은(시거) 그저 가만히 앉아 자기를 기다리기나 하라는 듯 노인을 무시한 채 유유히 사라진다.

노인에게 죽음보다 비통한 것은 패배감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용함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한 세계. 과감히 죽음과 대항하려하지만 죽음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세계. 그 세계야말로 ‘No country for old men’이다.

꿈의 해석

이 소설에는 두 개의 꿈 이야기가 나온다. 둘다 보안관 벨의 꿈이다. 첫 번째 꿈은 벨이 아버지가 준 돈을 잃어버린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돈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으니 돈 같은 건 잊고 그것을 찾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돈에 대한 코맥 매카시의 부정적 태도는 이 소설 전반에 이를 뿐만 아니라 최근작인 <카운슬러>에 까지 이어진다. 코맥 매카시는 이 나라의(미국) 모든 문제가 돈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두 번째 꿈은 조금 복잡하다. 나는 여기에 그 전문을 옮기겠다.

두 번째 꿈에서 우리 둘 다 꽤 옛날로 돌아갔고 내가 밤중에 말을 타고 산 속을 통과하고 있었다. 산 속의 협곡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날이 춥고 땅에 눈이 쌓여 있었고 아버지는 말을 타고 나를 지나쳐서 계속 나아갔다.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는 단지 나를 지나쳤을 뿐이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가 나를 지나칠 때 나는 아버지가 옛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을 머금은 뿔피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안에 담긴 불빛으로 뿔피리를 볼 수 있었다. 달빛 색깔과 비슷했다. 꿈에서 나는 아버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그토록 춥고 어두운 세상의 어딘가에서 불을 피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언제든 닿으면 아버지가 거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p.339).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정직하고 올바르게 산다. 그들은 눈보라를 뚫고 어둠을 넘어 얼음 위에 불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벨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벨의 전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랬다. 벨은 언젠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 그 불을 다시 뿔피리에 담아야 할 것이다. 그때는 벨의 차례다. 그 불을 가슴에 품고 말을 달리는 것 말이다.

불을 옮기는 자에 대한 의미는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에서 더 명확하다.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아마 위의 해석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해석을 해보려 한다.

달빛 색깔과 비슷한 그 뿔피리는 죽음이다. 달은 때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를 지나쳐 죽음을 피워 놓고 나를 기다린다. 그곳이 죽음의 세계라면 나는 결국 그곳에 닿을 것이고 그곳에 아버지가 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불을 피워 놓고 기다렸기에 죽음의 세계는 더이상 어둡고 추운 곳이 아니다. 이 세계가 아무리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도 결국엔 끝이 있다. 끝 이후엔 다행히 그 어떤 소동도 없다. 이 잔인한 세계에선 죽음만이 유일한 안식인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새겨진 미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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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욱 /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vs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

원작이 뛰어날수록 영화가 실망스런 경우가 많은데, 코먹 매카시(Cormac McCarthy)의 동명소설을 코언 형제(Ethan and Joel Coens)가 각색·감독한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No Country for Old Men)는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빼어난 영화라고 생각된다. 아카데미 4개 부문을 비롯하여 온갖 상을 휩쓸었으니 평가는 충분히 받았는데, 이게 무엇에 관한 영화인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집어말하기는 쉽지 않다.

제목의 번역부터 혼란의 소지를 준다. 예이츠(W. B. Yeats)의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의 첫 구절(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따온 제목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고 옮겨놓은 것은 ‘대략난감’한 노릇이다. 노인을 박해하는 신자유주의 구호 같기도 하고 무슨 철학적인 화두 같기도 하다. 게다가 소설의 번역본을 펴낸 출판사는 보도자료에서 “왜 노인인가? 누가 노인인가?” “왜 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하는가?”라고 의문을 던지면서 ‘철학적’인 읽기를 유도하기도 한다.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고 하소연할 법한 인물은 중심화자로 등장하는 보안관 벨(Ed Tom Bell)이다. 그는 멕시코와 인접한 텍사스 고향 땅에서 젊었을 때부터 보안관으로 근무하며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독백은 1980년에 이르러 멕시코-미국의 국경지역에서 마약거래가 늘어남에 따라 점점 황량해지는 범죄자의 심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령 첫 장면에서 벨은 14살짜리 소녀를 살해한 젊은 살인자가 우발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살인을 계획해왔다는 사실을 담담한 어조로 전한다. 한 엄마가 갓난애를 쓰레기 분쇄기에 집어넣었다는 신문보도도 들려준다. 그러니 텍사스의 고향 땅이나 크게는 미국 땅이 보안관 벨처럼 ‘영혼’의 중요성을 믿는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되는 것이다.

누아르와 스릴러의 요소

이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장르적 특성은 스릴러이지만 비평가에 따라서는 이 영화를 ‘텍사스 누아르'(Texan noir) 혹은 ‘서부 누아르'(Western noir)로 분류하기도 한다. 미국 서부 혹은 멕시코와 인접한 국경지역에서 일어나는 범죄사건임을 부각하는 것이다. 영화의 긴박감은 국경지역에서 사슴 사냥을 나갔다가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고 마약거래와 관련된 240만달러를 손에 넣은 모스(Llewelyn Moss)와 그를 뒤쫓는 멕시코 마약조직원들과 살인청부업자 쉬거(Anton Chigurh)의 용의주도하고 박진감 넘치는 추격전에서 나온다. 이들을 한걸음 뒤에서 따라가는 보안관 벨은 두 사람의 행동을 해석할 관점을 제시한다. 마약과 돈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는 피비린내나는 폭력의 현장이나 냉혈한 킬러들의 각축전이 실감나게 와닿는 것은 누아르와 스릴러 장르를 노련하게 다루는 코언 형제의 치밀한 연출력 덕분일 것이다. 가령 극적 전개를 예고하는 효과음이나 음악을 절제하거나 아예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살인과 폭력의 실감을 투박하고 묵직하게 전달하는 수법이 그렇다. 코언의 스릴러는 조미료를 치지 않아 재료의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음식을 먹는 것 같다.

쉬거라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

누아르나 스릴러의 묘미와 더불어 이 영화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쉬거라는 새로운 유형 의 인물의 출현이다. 촌스러운 헤어스타일과 가축도 살용 압축공기총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비정한 내면에 조응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모스가 물질적 탐욕에 나포되었음에도 순진한 카우보이 영혼을 잃지 않은 마지막 휴머니스트라면, 쉬거는 이를테면 휴머니즘의 경계를 넘어선 초인 혹은 기계나 괴물 같은 인간이다. 쉬거야말로 보안관 벨이 혀를 내두르는 영혼을 결한 듯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자들의 화신과도 같다. 쉬거는 마약과 돈, 탐욕의 그물망 속에 살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본주의 시장의 원리가 아니라 자기의 원칙대로 산다. 그렇기에 한때 동업자 킬러였던 웰즈(Carson Wells)는 쉬거를 ‘원칙을 지닌 사람'(man of principl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쉬거의 이런 면모는 약국 앞에 세워놓은 차량을 폭파시켜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틈을 타서 약국에서 유유히 약을 챙겨간다든지 총상 입은 자기 몸을 수의사가 짐승 다루듯 사정없이 다루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인간은 만물과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법칙에 종속되는 하나의 유기체적 자연물일 뿐이며, 인간의 몸은 짐승의 몸과 다르지 않다. 쉬거가 가축도살용 압축공기총으로 사람들을 소 잡듯이 간단히 죽이는 장면이 무시무시한 것은 이런 인간 이전의 동물적·물리적 차원이 실감나기 때문이다. 쉬거가 한 허름한 주유소의 주인에게 동전의 앞뒷면을 맞추게 하여 운명을 결정짓도록 압박하는 장면이 특히 섬뜩한데, 쉬거가 냉정하고 살벌한 도살업자의 역을 빈틈없이 해낸다면 주유소 주인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간 소처럼 자기의 죽음을 예감할 때의 공포를 탁월하게 연기해낸다. 이 작품이 흥미 위주의 누아르나 스릴러를 넘어서는 것도 쉬거라는 인물 속에 미국과 미국인의 미래상에 대한 묵시록적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쉬거는 근대 서구 백인의 의식의 경계를 넘어선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악한인 것은 미국사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대목으로 여겨진다.

서부극의 전통과 경계의 해체

이 작품과 관련되는 또 하나의 장르는 서부극이다. 이 작품이 모범적인 서부극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선인이 악당을 제압함으로써 잠시 위태로웠던 질서를 복원하는 권선징악적 서부극의 전통, 특히 백인 보안관이 나쁜 인디언들을 벌주는 인종주의적인 ‘냉전’ 서부극의 틀을 완전히 뒤엎는다. 어떤 종족인지도 알 수 없는 악당 쉬거가 끝까지 살아남아 모스의 아내까지 처단하는 결말은 충격적이다. 그런데 서부극의 효시로 평가받되 이런 흑백논리적 서부극과는 차원이 다른 쿠퍼(James Fenimore Cooper)의 《가죽각반 이야기》(Leatherstocking Tales)와 비교하면 이 작품에 새겨진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쿠퍼의 소설에서 깊디깊은 우정을 나누는 백인 사냥꾼 내티 범포(Natty Bumppo)와 인디언 추장 칭가츠국(Chingachgook)과는 달리 백인 사냥꾼 모스와 신원을 알 수 없는 킬러 쉬거는 서로의 숨통을 겨누는 적이다. 백인 정착촌의 문명사회를 등지고 황야로 들어가는 내티 범포의 행적이 아이러니하게도 백인 문명사회의 확장과 서부 개척의 역사를 일러주었다면, 이 작품에서 모스의 행적은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모스는 쉬거에게 쫓겨 부상한 몸을 간신히 이끌고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예전에 범포가 칭가츠국과의 우정을 나누면서 서부의 황야를 누비는 행위가 곧 미국의 변경을 개척하는 과정을 표상하는 것이라면, 이제 모스가 쉬거의 가차없는 추격에 쫓겨 국경을 넘는 행위는 미국의 서부에 건설된 변경들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약조직의 멕시코인 하수인들에게 졸지에 죽임을 당하는 모스의 초라한 최후도 한때 광활한 서부 황야를 호령하던 미국의 예전 선조들과 달리 서부의 미국인들이 현재 직면한 비루한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는 1980년경부터 부쩍 늘어나는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의 마약범죄 사건을 누아르와 스릴러의 양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다루면서도 새로운 미국인의 등장과 최근 미국 역사의 미묘한 변이까지 감지하는 비범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2008.3.19 ⓒ 한기욱

* 사진 출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공식블로그 http://blog.naver.com/thecoens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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