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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A 머스트워십 [믿음의 경주 (Run The Race)]“믿음의 경주(Run The Race)”는 수원 영통구에 위치한 중앙기독중학교 학생들이 매주 목요일 방과후에 드리는 자율 예배에서 처음으로 부른 찬양이다. 가사는 중앙기독초,중학교(CCA, Central Christian Academy) 교목 김요셉 목사님의 설교 주제였던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우리가 인내로 완주하기 위해서 세상의 허물과 죄를 벗어버리고 오직 주 예수만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는 말씀을 모티브로 삼았다.
작곡자인 이종성 전도사는 중앙기독중학교 교목으로서 청소년들과 장년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쉽고 친근한 곡에 초점을 맞춰 익숙한 멜로디와 코드 진행을 사용하여 보다 대중적인 느낌을 강조하였다.
메인보컬과 콰이어는 중앙기독중학교 재학생들로 구성된 CCA 머스트워십 싱어들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청소년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하모니로 담아내었다.

:: Credit
Producer : 이종성
작사 : 이종성, 김주영
작곡 : 이종성
편곡 : 정유진
Recoding,Mixing \u0026 Mastering Engineer : 이현
Recording, Mastering Studio : CCA Recoding Studio
Album Designer 박은철, 유가나
Piano 정유진
Synth 정유진
Drum 이유한
Bass 원요셉
E. Guitar 박만성
A. Guitar 이종성
Worship Leader : 이종성
Chorus : 용주이, 이서영, 채은석, 문은비, 황지수, 박지호, 이홍주, 김지민, 문지원, 서나영, 이지유, 김강은, 박준철,
CCA머스트워십팀, CCA 콰이어(중앙기독중교 교사, 학생 전체)
Studio version Singer : 이서영, 채은석, 문은비, 문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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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장 1-3절 “믿음의 경주” – 목회 아카이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경주는 주로 육상 경기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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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njin0207.tistory.com

Date Published: 9/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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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경주(히12:1-3) – 유평교회

제목 : 믿음의 경주 본문 : 히브리서 12:1-3 설교자 : 조 성 훈.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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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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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목사 설교] 믿음의 경주 – 크리스천투데이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히브리서 12장 1절과 2절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경주” 이와 같은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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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3/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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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경주(히12:1-3) – 시사미래신문

‘믿음의 주’라고 할 때, ‘주’를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는 ‘αρχηγον(아르케곤)’입니다. 이 단어는 ‘시작하다’ ‘지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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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isamirae.com

Date Published: 5/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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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경주를 완주하자 – 미주 크리스천 신문

남가주사랑의교회 담임. 크리스천 라이프는 믿음의 경주와 같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경주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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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press.net

Date Published: 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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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 / 히 12:1-3 – 네이버 블로그

2019년 12월 29일 주일 3부 설교.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 히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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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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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경주: 바울의 예 – 성경의 진리

믿음의 경주: 바울의 예. 믿음은 해야할 경주를 하고 싸워야 할 싸움을 하는 것으로서 바울이 말하고 지시한 것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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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wordofgod.kr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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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믿음 의 경주

  • Author: CCMHUB 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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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3.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EkDgcdOvGG4

믿음의 경주(히12:1-3)

제목 : 믿음의 경주

본문 : 히브리서 12:1-3

설교자 : 조 성 훈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저와 제 아내 사이에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 있습니다. 저는 흰 쌀밥을 먹고 싶다고 하고 아내는 건강을 위해 잡곡밥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내에게 덜 살아도 되니 흰쌀밥을 먹고 싶다고 말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흰 쌀밥으로 대접해드린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제 설교에 많이 익숙해져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형제들은 잡곡밥을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건강에는 잡곡밥이 훨씬 더 좋습니다. 새로운 일꾼들이 전하는 말씀을 잘 들으신다면 더욱 영적으로 건강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새해 첫 주를 맞이하여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의 경주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에 대해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경주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믿음의 경주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떻게 이 경주를 달릴 수 있으며 어떻게 마칠 수 있을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1절). 여기서 가리키는 사람들은 11장에서 말한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등 이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증인은 법정에서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거짓없이 말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그들을 “증인을 삼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삶을 통해 증거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에 대해 그 누가 그것을 헛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말하고 우리 역시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당시 소유의 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재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고 제자의 삶을 살다가 훗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습니다. 마태는 오늘날로 말하면 세무서 직원이었는데 그 일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그물을 깁다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도 쉬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왕이었던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힘든 고난을 견뎠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첫째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절). 여기서 말하는 “모든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우리를 붙잡는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은 “돈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거운 짐은 ‘세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에 묶여있습니다. 통계상으로 열 사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이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왜 믿음의 길을 달려가지 못했을까요?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 5:7). 과거에는 참 신실한 형제 자매였는데 그 믿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도 무거운 것들, 즉 돈에 대한 욕심이나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를 달리지 못하게 잡아매었을 것입니다.

돈은 이 세상에 살 동안만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미련하게도 제일 좋은 옷은 집에 잘 보관해두고 평소에 입고 다니지 않습니다. 좋은 그릇은 귀해서 잘 두고 쓰지를 않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쓰려고 두었다가 나중에 자식들의 손에 의해 버려지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단은 우리가 그것에 매여서 달리지 못하기를 원합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잡을 때 ‘남자들만 가라’, ‘멀리 가지 마라’, ‘가축을 두고 가라’라고 하면서 할 수 있다면 그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경주를 지속적으로 달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물질을 통해 붙잡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자녀와 아내, 또는 남편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말한 사람에게 주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자녀들에게 참 많이 매여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순종하고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매일의 삶을 보면 자녀에게 너무 많이 매여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이고 그들 각자에게 사역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자녀들 때문에 신앙의 길을 달리지 못하고 은사를 활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주님 안에서 양육하고 키워야하지만,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있어서 주저앉게 만드는 자녀에 대한 애착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초창기에 유평교회가 시작될 때 형제 자매들은 자녀들을 키울 때 무엇보다 주님이 첫째자리에 있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주님을 첫째자리에 둔 부모들의 자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오로지 매달린 사람들을 보면 주님 안에서 많이 멀어져있는 것을 봅니다. 내 마음에 과연 주님이 첫째자리에 계시는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이루는데 내 모든 삶이 집중되어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가정을 돌아보고 직장생활을 하지만 우리의 우선순위는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 곳도 알지 못하고 가족을 떠나왔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따를 때 애굽의 모든 금은 보화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믿음의 경주를 달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교육도 직장도 필요하지만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삶은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을 과감하게 잘라버렸습니다.

육체적인 연약함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콤플렉스에 매여서 믿음의 경주를 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속사람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 참 아름다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생활에 너무 많이 매이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얽어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의 경우 타국에서 엄청난 핍박을 받지만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켜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어떤 환경도 가족도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세상도 물질도 가족도 내 자신의 목숨까지도 이를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것에 대해 “얽매이기 쉬운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할 때 참으로 걱정이 됩니다. 점점 더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열린문 선교지를 보니 태국에서 선교하시는 분이 쓴 글이었는데, 태국에서는 가장 좋은 사범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중, 남자 100명 중에 20-25명만이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나머지는 동성애나 성전환자들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교사가 되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할까요?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나이의 사람들만 해도 손에는 성경보다 스마트폰이 더 많이 들려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데 있어서 얽어매는 죄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죄들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절). 구약에서 말하는 믿음의 경주자들이나 우리의 믿음의 모델인 예수님이나, 그들은 달릴 때 눈 앞에 있는 고난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즐거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결과, 즐거움을 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늘에 하나님이 지으신 성을 보고 평생을 텐트에서 살아갑니다. 그 약속을 바라보고 이 땅에 있는 동안 나그네로 산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앞에 있는 애굽의 영광보다, 또 노예 생활의 어려움 보다, 상주시는 이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으로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했는데 결승점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을 하겠습니까? 그 어려운 경주에서 승리하면 얻는 것도 많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썩을 면류관 때문에라도 그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상 주시는 이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모든 신앙인들의 경주의 비결입니다. 하늘의 성,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에 그들의 눈이 고정된 것입니다. 주님은 한 번도 이 경주가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경주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사업이 잘 된다’,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믿으면 좋은 결과만 있다’라고 들었기에 어려움이 닥치면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길은 좁은 길이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없다고 하셨고, 물질이나 가족, 목숨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산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망대를 세울 수 있을지, 군대를 가지고 나가서 이길 수 있을지를 계산하듯이 나를 따를 때 계산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보다 세상이나 가족,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선택의 순간에 내 목숨을 사랑하면 주님을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러한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사도 바울도 그러한 선택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경주를 달릴 때는 방해물이 없어야 합니다. 아내가 가끔 저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늘 ‘당신을 두 번째로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늘 그 첫째가 주님이라는 것을 알기에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아내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이 나를 잡아매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고 돌아보며 책임을 다하지만 그 관계가 주님을 따라가는데 신앙을 포기하도록 병들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도 주님을 순종하고 따라가는데 방해하는 많은 시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나 물질, 가족, 자녀, 배우자,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항상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한 삶을 살고 난 뒤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 바울, 요한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경주를 끝냈지만 우리는 아직 달려갈 길이 남아있습니다. 무거운 것들과 얽어매기 쉬운 죄로 매여서 포기하거나 주저앉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까지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몇 해 전에 한 초등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선수들을 뽑아서 계주를 하는데, 계속 1등으로 달리던 팀의 주자가 뛰질 않고 걸어갔습니다. 뭔가 건강이 안 좋은가 보다 했는데 그가 말하기를 ‘오늘은 달릴 기분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경주는 기분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세상이나 물질, 자녀, 남편이나 아내가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믿음의 경주(히12:1-3)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고 합니다. 이는 똑 같이 시작하고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하여 마지막에는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신앙생활이 우리 믿음의 삶을 달리기 경기를 하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경주자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말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서는 자신도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선수처럼 온 힘을 다해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왜 히브리서는 믿음의 삶을 경기하는 자에 비유하고 있을까요? 히브리서는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배교의 유혹 앞에 서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아마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고, 박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가 분명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가 저 하늘나라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선수들처럼 끝까지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경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Ⅰ.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1).

본문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여기에 보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라고 하십니다. 경주를 하려면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는 무엇에게 묶여서는 경기에 잘 할 수 없습니다. 경주를 잘 하려면 우선 몸을 가볍게 해고 몸을 만드는 것이 기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다양한 체력훈련이 필요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라고 말합니다. 아마 본문은 큰 운동장에서 수많은 관중들이 경기하는 선수들을 응원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경기장에 가보십시오 축구 경기, 야구경기가 벌어지는 운동장에는 수많은 관중들이 모여 경기하는 선수들을 응원하고, 때로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격려합니다. 그것처럼 믿음의 경주에도 수많은 관중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서 하는 외로운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에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관중들은 다 “증인들(μαρτυρων)”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우리 앞서서 이미 믿음의 경주를 먼저 했던 증인들(마르튀스)들입니다. 이 관중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우리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있고, 요셉도 있고, 모세와 여호수아도 있고,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이 믿음의 길, 믿음의 경주를 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경주를 방해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는 어떤 것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무거운 것’이란 혤라어로 ‘ογκον(옥콘)’이라고 합니다. 뛰는데 방해되는 ‘체중’, 혹은 ‘군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운동 경기하는 사람의 체중이 너무 많이 나가서 자기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면, 어떻게 경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제대로 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을 체중을 조절하고, 군살을 빼야 합니다.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군살을 빼야 합니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무거운 것들, 온갖 걱정거리들, 세상 염려, 거기에서 돈에 대한 욕심, 세속적인 욕망, 이런 것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세속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서,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또 세상 염려에 묶여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얽매이기 쉬운 죄’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란 헬라어로 ‘την ευπεριστατον αμαρτιαν(텐 유페리스타톤 하마르티안)’입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죄성, 혹은 습관적인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습관적인 죄, 남이 모르는 죄를 숨기고서는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를 얽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남이 모르는 은밀한 한 죄, 습관적인 죄에 묶여 자주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얽매이기 쉬운 죄는 어디에 갖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해결해주는 곳이 이 세상에는 어디에서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죄를 몰래 숨기고 살다가 어느 날 다른 사람들 앞에 죄가 다 드러나게 되면, 그 수치를 견딜 수 없어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어떤 정치인은 스캔들이 터져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자살하는 연예인, 부자 집 며느리도, 심지어 대통령도 자살하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벗어버리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은 죄를 더 좋아하고, 때로는 죄의 맛, 죄의 즐거움을 즐기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무거운 것과 얽매인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까?

간단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요일1:7)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 저와 여러분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주님께 다 맡기고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습니다.

Ⅱ. 경주할 때 목표인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2).

경주에 있어서 분명한 목표와 모델을 잘 봐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않으셨느니라” 여기에 보면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가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믿음의 주’라고 할 때, ‘주’를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는 ‘αρχηγον(아르케곤)’입니다. 이 단어는 ‘시작하다’ ‘지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주’란 ‘믿음의 창시자’, 곧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온전하게 하신다’는 말은 헬라어로 ‘τελειωτην(텔레이오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완수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하시는 이’는 ‘완성하신 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신 분이시고 완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분만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경주를 시작하신 분이고,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까지 완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응원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목표는 아닙니다. 그들도 실수와 죄를 지었던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he is author and perfecter”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에서 40년을 살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매일 만나가 위로부터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지 않으면 그들은 굶어야 했습니다. 매일 구름기둥, 불기둥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 손을 들어 이겼습니다. 기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뱀에 물려 병들었을 때도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훈련을 40년을 거쳤습니다.

Ⅲ.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3).

장거리 경주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피곤과 낙심입니다. 노련한 마라토너도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고비를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위기를 잘 견디면 끝까지 완주하게 되고 큰 성취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한마디로 피곤하고 낙심될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이 거역한 일을 당하고, 심지어 제자들까지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배신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같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텐데, 우리 주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 있는 자기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교회에 나왔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고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예수 믿다가 힘든 일을 당하고는 결국 예수를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도 힘든 일을 만날 수 있고, 중간에 ‘포기할까, 말까?’로 갈등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피곤할 때마다, 낙심될 때마다 예수님께서 참으신 것을 생각하고 참아내라는 것입니다.

한 건물의 입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얼굴에는 주름이 많고 옷차림도 허름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한번은 건물의 주인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죠? 표정이 항상 밝아 보여요.” 할머니는 웃으면서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 분량도 더 될 것입니다.”라고 하자 주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까?” 그때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고통이 닥치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기다립니다. 그러면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해가 뜬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믿음의 장애물 경기를 하는 경주자들입니다. 위기인 장애물은 crisis는 위험과 기회의 의미가 있듯이 신앙의 경주를 마치면 영광이 있습니다(2, 빌2:8-10). 2절,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땅에서는 영화를 누렸으나 하늘에서는 고통을 당한다는 부자와 세상에서는 고통 가운데 살았으나 하늘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린다는 나사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6).

영화중에 《마이웨이》(Winners, The/My Way)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1973년에 나온 영화입니다. 에밀 노팔(Emil Nofal)과 로이 서전트( Roy Sargent)가 공동으로 감독했고, 죠 스튜어든슨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입니다. 마라톤 선수 출신인 주인공은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뒤, 꽤 나이가 들었을 때, 젊어서 우승했던 마라톤 대회에 다시 도전하는 내용입니다. 많은 훈련과 연습을 한 뒤에 경기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힘에 부쳐 몇 번이나 쓰러집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포기하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립니다. 쓰러져서 숨을 헐떡이는 주인공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화면에 클로즈업되고,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할 때 배경음악으로 프랭크 시내트라가 부른 이 영화의 주제가, “My way”가 흘러나옵니다. “And now, the end is near… I did it my way” 참 감동적입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서 뛰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주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넘어질 수 있고, 힘에 부치고 지칠 수 있어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 / 히 12:1-3 : 네이버 블로그

2019년 12월 29일 주일 3부 설교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

히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오늘 2019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입니다. 2019년도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마지막에 와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말입니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간 것만 같습니다.

한 해를 돌아볼 때 성도님들은 어떤 일이 생각나시나요? 기쁘고 행복했던 일들도 생각나지만 사실 더 많은 경우는 후회되고, 할 수만 있다면 돌이키고 싶은 일들이 더 많이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지나가고 나면 그 때 왜 그랬을까 싶은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후회로 지금의 시간을 보내기보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실패인 것 같아도 그 자리에서 더욱 깊이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또 우리가 더욱 온전케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마라톤 중에서도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얼마 전 우연히 아로나민 골드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한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20대엔 친구를 쫓았고, 30대엔 일을 쫓았고, 40대엔 후배들이 쫓아왔고 그리고 50대엔 아쉬움이 쫓아온다.” 그러면서 “아로나민 골드 주세요.”라고 말하고 “이렇게 오늘도 해낸다.” 마지막에는 “2019년 고생 많으셨습니다. 2020년에도 아로나민 골드가 당신의 힘이 되겠습니다.”

아로나민 골드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시나요? 물론 건강을 위해 이러한 것도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서는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내로써 경주를 감당하라는 것이고, 세 번째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우리가 먼저 주목해서 보기 원하는 것은 ‘얽매이기 쉬운 죄’입니다.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가장 최적화된 복장을 합니다. 달리기나 수영선수들이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복장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경주를 하는데 방해되고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벗어버려야 합니다.

얽매이기 쉽다는 것은 쉽게 함정에 빠지게 하는 죄를 말합니다.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짓고 있는 죄, 곧 염려와 같은 것입니다. 염려는 죄로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염려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믿음의 경주를 계속 하는데 있어 발목을 잡는 덫과 같습니다.

또한 우울증과 외로움이 시대적 질병처럼 퍼져가는 가운데 또 하나의 얽매이기 쉬운 죄가 있습니다. 기쁨의 반대말이 보통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쁨의 반대말은 자기 연민,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올해를 돌아보며 제가 쉽게 함정에 빠졌었던 얽매이기 쉬운 죄는 ‘자기연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연민이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이는 믿음의 경주를 멈추고 싶을 만큼 큰 함정이었습니다. 자기연민의 증상으로 자주 기쁨을 잃어버렸고, 우울한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지친다는 생각,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들이 기쁨을 빼앗아갔습니다.

어느 날은 여러 가지 일들로 감정들이 극에 달하면서 그런 일이 거의 없는데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상황들이 힘들게만 여겨졌는데 지나고 보니 큰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자기연민, 우울한 마음 이러한 감정들을 주님 앞에 가지고 가보니 진리가 아닌 거짓된 감정에 속아있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에 파 묻혀 정말 죽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자기연민, 우울한 마음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에게 얽매이기 쉬운 죄는 무엇인가요? 한 번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는 믿음의 경주는 단숨에 달려가야 하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전략과 지혜가 필요한 장거리 달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략과 지혜는 우리의 일상에서 얽매이기 쉬운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이는 결코 믿음의 경주를 완주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간은 지나고 나면 빨리 흘러간 것 같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참 고단하고 힘겨운 싸움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초대교회와 같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그러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훨씬 더 어려운 환경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싸움에서 죄의 유혹에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티어 서있는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곧 인내로만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매일의 일상을 버텨낼 수 있게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신학교를 가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고, 신학교에 입학해 신대원까지 졸업하고, 수련목회자로 선한목자교회에 왔습니다. 2013년도에 목사안수를 받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제가 처음으로 선배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든 것 같아요.’ 그랬더니 선배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걸 모르고 목사가 됐어?’

목사로 살아가야 하는 하루하루가 때로는 너무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제가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야 할 목표가 흐릿해져 있을 때입니다. 어느새 하늘에 소망을 두기보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을 때 여지없이 슬럼프가 찾아옵니다.

우리가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기 위해서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표는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히 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해주신 것을 받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약속해주신 것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내로 믿음의 경주를 마쳤을 때 우리가 다다르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에 있습니다. 다른 조건이 아니라 숨을 쉴 수 있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나의 영광, 나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결정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것이 다 헛되었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마음을 두고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 있게 달려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있는 것처럼 분명 하나님이 정하신 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하기에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두주자가 되셔서 앞서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시선을 고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길을 잃거나 표류하거나 돌이키는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학교에서 어린이국을 담당하고 있는데, 올해 여름 캠프 이후로 아이들에게 어린이 예수동행일기 책자를 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하는 것만큼 복된 것이 없기에 아이들에게도 동행일기를 쓸 수 있도록 책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것을 또 하나의 숙제로 여길까봐 그것이 좀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원하는 아이들만 가져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소수이지만 예수동행일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는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하루 넘길 만도 하지만 이 아이들은 예수동행일기를 꼭 쓰고 잔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예수 동행일기를 보면 3가지 질문에 체크하는 것이 있습니다.

1)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예수님을 가장 먼저 생각했나요?

2) 식사 시간에 기도하며 예수님을 생각했나요?

3) 어렵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며 순종한 일이 있나요?

매일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한 아이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다 체크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이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예수님을 가장 먼저 생각했나요?’인데 아이가 눈을 뜨며 예수님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생각해낸 방법이 있습니다. ‘엄마, 천장에다 예수님이라고 써놓으면 어떨까?“

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는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그 분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선두주자이시며 완주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그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를 즐거움 삼고 십자가를 참아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인내로 승리를 이루셨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보며 인내로 이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가운데 낙심하여 지치게 되는 일들이 참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로렌스 형제는 17세기 프랑스인으로 행복할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에서 부상당해 장애인이 되고 난 후 38세에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가 된 그는 주방에서 30년간 요리사로 봉사하며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런데 로렌스 형제는 늘 행복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접시를 닦는 것이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온종일 노래하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어느 날 국왕 루이 12세가 수도원을 방문하여 “당신의 행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정도입니다.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 임재연습」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과 친해진 뒤에야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 친해지려면 그 사람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귀히 여기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생각합시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해에는 정말 잘 살아보자는 결단을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로렌스 형제처럼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주방에서 설거지만 하며 평생을 사는 것을 불행하다 생각합니다. 로렌스 형제는 낮은 지위의 수사였고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로렌스 형제보다 높은 지위에 있고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잘 사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 잊혀 졌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은 로렌스 형제입니다.

우리는 로렌스 형제를 통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참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교제를 통해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교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께 반해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주전 23일(월)-24일(화) 1박 2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캠프가 있었습니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복음에 대한 강의만 듣고 말씀보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일 외에는 다른 활동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아이들 52명이 신청하여 참여하였는데, 사실 아이들에게는 매우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아이들 수준에 잘 맞춰진 방법은 아니었어도 복음의 진리를 이렇게 집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에 저는 참여한 아이들이 정말 복음에 대해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첫째 날 아이들이 죄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기록해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A4용지 한 장씩을 나눠주고 적어보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진지하게 자신의 죄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얼마나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이들이 용지를 더 받아가서 적는 모습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둘째 날 마지막 시간에는 나의 복음을 적고 그것을 형제, 자매가 나눠져서 고백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먼저 자신이 가장 감추고 싶은 죄를 고백하고, 그런 죄 된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음을 선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죄를 고백하는 것을 들으면서 제 마음에 가장 남았던 말은 자신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고백한 죄들은 대부분이 부모님께 거짓말한 것, 휴대폰 했는데 안했다고 거짓말하고 숙제 안했는데 했다고 거짓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짓는 죄들, 뒷담화하고 따돌리고 욕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모태신앙이었고, 자신들도 그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욕도 해야 했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나쁜 짓도 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한 아이는 자신이 쓴 것을 결국 읽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용기를 내서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고 그래서 아이를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이 한 잘못이 알려지는 것을 너무나 두려워했습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사실 그 아이가 지은 죄가 엄청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하고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 죄가 드러나면 정말 죽을 것처럼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죄가 드러난다는 것은 정말 이런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학년 아이가 쓴 나의 복음을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습니다. 엄마를 따라 매주 교회를 다니며 새벽예배까지 가며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모하며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며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섬겼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부터 세상을 알아가며 세상의 유행에 맞춰가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점점 친구들과 죄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비속어를 사용하며 음악을 듣고, 숙제를 안했을 땐 부모님께 했다고 거짓말하며 몰래 휴대폰을 볼 때도 있었습니다. 또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하고 외모에 신경 쓰며 제 자신이 변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희 엄마도 제게 많이 변했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캠프에 오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내가 왜 시기, 질투, 거짓말 등 수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나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하나님의 창세전 원형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전 앞으로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님만 따라가는 예수님의 신실한 자녀가 되겠습니다. 또 비속어, 거짓말, 시기, 질투를 하지 않고 친구, 부모님께 잘못을 말하고 사과하는 다시 태어난 제가 되겠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죄의 유혹이 이렇게 크고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죄의 짐들이 생깁니다. 어떻게 이런 얽매이기 쉬운 죄들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요. 이는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생 아이가 나의 복음으로 선포한 것처럼 우리 자신을 이미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인내로 계속해서 이 경주를 감당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선두주자가 되시고, 완주자가 되셔서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라’는 이 주제는 사실 저 자신을 향한 외침과도 같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내며 제 안에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질그릇 같은 저 자신을 볼 때는 좌절과 절망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그 절망 속에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좌충우돌하며 달려온 인생길 가운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배워가는 것이 가장 복된 것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7-10절의 말씀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손양원 목사님께서 신사참배 거부로 무기 구금형을 받고 옥중생활을 하던 중에 쓰신 ‘꽃 피는 봄날에만’이라는 시를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꽃피는 봄날에만 주의 사랑 있음인가

땀을 쏟는 염천에도 주의 사랑 여전하며

열매맺는 가을에만 주의 은혜 있음인가

추운 겨울 주릴 때도 주의 위로 더할 것은.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 아름답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 유혹의 손길되나

고생 중의 인내함은 최후승리 이룩하네.

세상권력 등에 없고 믿는 자를 핍박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아 회개하고 돌아오라

우상의 힘 몇 일가며 인간의 힘 몇 일가나

하나님의 심판 날에 견디지 못하리라.

저 천성을 바라보니 이 세상은 나그네 길

죽음을 피하라고 나의 갈길 막지마라

내게 맡긴 양을 위해 나의 겨레 평화 위해

우리 주님 가신 길을 충성으로 따르리라

이렇게 믿음의 경주를 다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말은 무엇입니까.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2019년 마지막 예배를 드리며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지금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수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기쁨으로 이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위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것이 힘겨운 고난의 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특권이요, 생명의 길이며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는 자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_

주님, 지금 이 자리까지 주님의 은혜로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것처럼 우리가 믿음의 경주에서 끝까지 완주하는 자들 되게 하소서.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오직 주님의 나라를 향하여 인내로 경주하게 하시고, 우리의 선두주자가 되시고 완주자 되신 예수님만 더욱 바라보게 하소서.

찬양 _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믿음의 경주: 바울의 예

성경의 진리

믿음의 경주: 바울의 예

믿음은 해야할 경주를 하고 싸워야 할 싸움을 하는 것으로서 바울이 말하고 지시한 것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11-12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이 명령에서, 두가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1. 믿음은 실제로 싸움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2. 우리가 영생으로 불리기는 했으나 우리가 이를 붙잡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붙잡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epilavou”이며 이는 “잡다,꼭 붙잡다, 가지다”를 의미합니다. (스트롱 사전). 고린도전서 15:2 또한 “우리가 구원됨을 받고 있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단계에 있으며 이를 붙잡아 영생으로 향하는 중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시만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이것들을 자신에게 먼저 적용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빌립보서 3:8-15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찌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그리고 다시 고린도전서 9:24-27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은 본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리고 다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우리가 바울에게서 받은 이미지는 그의 목적을 성취한 후 현재 물러선 기독교인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다하는” 선수들의 그림을 얻고자 합니다. 허공을 가르는 자가 아닌 승리를 위해 그의 눈을 싸움에 두는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의 그림이며 그를 위해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삶 말미에서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6-8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우리가 보듯이, 바울에게 있어 믿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정적인 것이 아니며, 당신이 한번 들여놓으면 거래가 완료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당신은 물러앉아 자동적으로 결과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에게 있어 믿음은 싸워야 할 싸움이었으며 해야 할 경주였습니다. 영생은 우리가 이미 손에 넣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려진 것이며 우리가 손에 넣기 위해 달려가 잡아야 할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삶의 마지막에서 바울이 한것과 같은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바울이 본인이 이처럼 생각할 엄두를 마지막까지 내지 않은 것처럼 우리 누구도 상을 받았다고 간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가 한것처럼 믿음의 경주를 하고 또한 그가 우리에게 하라고 한것처럼 그를 따라하도록 합시다. (고린도전서 11:1).

타소스 키울라초글루

(Tassos Kioulachogl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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