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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8일 주일예배
종려주일에 예수님을 생각한다
마태복음 21:1-11
설교 : 류응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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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01) 의미와 설교 (9편) – 블로그 – NAVER

우리도 이 종려주일에 특별히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애통의 왕을 바라봅시다. 우리를 위하여 통곡하신 통곡의 왕을 바라봅시다. 가시면류관을 바라볼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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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3/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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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 mission – 종려 주일

성경에서 종려나무(the Palm)는 의, 아름다움, 승리등을 상징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의 첫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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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1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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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예수님의 마음을, 박조준 목사 – 코이네자료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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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inedata.tistory.com

Date Published: 12/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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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8일 종려주일, 주일설교 원고 – BKUMC 열린교회

마가복음 11:1-11 주님과 동행하는 길 1. 사순절기의 끝자락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 지키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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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kumc.org

Date Published: 10/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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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호산나를 부르는 사람들 : 자료실 – 베리타스

“오늘은 호산나를 외치는 종려주일입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불렀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5일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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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veritas.kr

Date Published: 9/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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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규의 종려주일 설교 – 예장뉴스

(2) 오늘 주일은 고난 주간(Holy Week)이 시작하는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실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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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pck-goodnews.com

Date Published: 5/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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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에 예수님을 생각한다, 류응렬 목사 (3/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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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종려 주일 설교

  • Author: 와싱톤중앙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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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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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01) 의미와 설교 (9편) : 네이버 블로그

종려 주일(悰櫚週日), Palm Sunday)

성경에서 종려나무(the Palm)는 의, 아름다움, 승리등을 상징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의 첫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이주일을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종려 주일은 그 옛날 서로마 교회에서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사(受難史)를 낭독했기 때문에 ‘고난의 주일’ (Dominica Passionis)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종려 주일은 이외에도 ‘꽃의 날’ 이란 뜻에서 Floridum, Dominica Florum 등으로 불리워졌으며, 부활절날 세례

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세례 지원자들과 과련하여 ‘세례 지원자 주일'(Dominica Competentium)이라 불리기도 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을 때마다, 지금 당장은 당신께 환호하는 무리들이 곧 당신을 못박으라고 돌변할 자들임을 아시면서도, 즉 며칠 후 당신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다만 그들 죄인의 죄값을 대신 치루사 구원을 주시려는 뜨거운 사랑으로 백성들의 환호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그리하여 바로 나를 위해 주가 당하신 노고와 고난이 그 얼마나 크고 감사한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새로이 깨달아야 하겠다. 더욱이 본래 제 2위 성자요 메시야이시면서도 초라하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속주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에 대해서 묵상하여야 할 것이다.

1. 시기

종려 주일은 십자가 수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공식 입성(入城)을 축하하는 날로,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하다. 그리이스의 일부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날로 보아 고난 주간에서 제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만왕의 왕이신 성자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입성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이셨으며, 이는 또한 마지막 주간에 당하실 시련의 시작이란 의미를 지니므로 일반적으로 동,서로마 교회는 종려 주일도 고난 주간에 포함시켰다.

2. 유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께서 자신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사야로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일주일 후에 있을 부활의 승리를 예견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백성들이 이날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든 것은 종려 나무가 승리의 상징이었고 그리스도를 승리의 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려주일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자료는 385년경의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이다. 이에 따르면 동로마 교회 중의 하나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로 종려 행렬 등이 행해졌다고 한다(3. 풍습 참조). 물론 서로마 교회들도 부활 주일 전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간을 갖기는 했지만 종려 행렬과 같은 축하 행사는 없었고, 그 성격도 축하 분위기를 지닌 동로마 교회의 행사와는 달리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

이 밖에도 6세기경 스페인의 의식서(儀式書)인 서고트 교회의 Liber ordinum에서도 종려 주일 행사에 대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의식서에는 종려 행진과 더불어 동로마의 교회에서 행하던 풍습들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5세기 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 주일 풍습이 서로마 교회에 유입되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다. 따라서 고난 주간, 특히 종려 주일의 행사는 대부분 동로마 교회로부터 서로마 교회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려 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의 축성의식(祝聖儀式)만은 그 기원을 서로마 교회에 두고 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에 행하는 축성의식은 초기에는 행해지지 않았으나, 후대에 와서는 종려나무 뿐 아니라 종려 행렬에 사용하는 꽃들에도 행해졌다(3. 풍습 참조).

중세 로마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에 종려나무의 축성의식, 종려 행렬, 그리고 완전한 애도의 성격을 띤 미사를 행하였다. 그러나 희랍 정교회에서는 이 주일을 고난 주간에서 독립된 주일로 정해 ‘환희의 날’로 기념하였다. 오늘날 희랍 정교회에서는 종려 행진을 하지는 않지만 종려나무 축성의식만은 계속해서 지키고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고난 주간 의식으로서의 종려 주일 행사들이 폐지 또는 간소화되어 오늘날에는 과거의 풍습과 행사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종려 주일의 의미는 잊지 않고 교회의 한 절기로 기념하고 있다.

3. 풍습

(1) 종려 주일 행진

종려 주일의 행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유래된 풍습이다. 이는 동로마 교회에서 보다 먼저 체계적으로 행해졌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종려 행진은 이날 오후 감람산에 위치한 교회에서 찬송과 화답송을 부르고 교훈서를 낭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때 주교(主敎)는 그리스도로 상징되어 나귀를 타고 맨 앞에서 행진하였고, 그 뒤를 종려나무 가지와 감람나무 가지를 든 아이들이 따랐다.

서로마 교회에서도 종려 주일 행진시에는 호산나 노래 등이 불리웠다. 이러한 찬양을 하는 가운데 종려나무 가지는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러한 종려 주일 행진은 중세 교회에서 흔히 행해졌던 것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은 이 축하 행렬은 행하지 않고 단지 인류를 위해 왕을로 오셨으나 고난당하신 예수의 정신만을 기리고 있다.

(2) 종려 나무의 축성 의식

축성(祝聖)이란 성례(聖禮)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구약의 성별 의식에서(출 40:9-15) 찾을 수 있다. 중세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에 축성 의식을 행했는데, 이렇게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을 추방하는 힘이 있다고 믿어졌다. 또한 이는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데도 능력이 있다고 믿어졌다.

종려 행진, 세족식(洗足式)등 많은 고난 주간 행사들이 동로마 교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종려나무의 축성 의식만은 서로마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종려가지의 축성 의식은 하나의 독립된 행사로 행해진 것인데, 동로마 교회의 영향으로 인해 종려 행진에 유입되면서부터 이러한 축성 의식은 종려 행진과 결합된 형태로 행해졌다. 이 의식은 보다 확대되어 나중에는 종려 행진에 사용하는 모든 꽃들에도 행해졌다.

종려주일 설교

제 목: 종려주일의 참 뜻

성 경: 마21:1-11 (신34)

<서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을 때, 나귀 새끼를 타시

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

습니다. 이 일과 이 날을 기념하는 것이 종려주일 행사입니다.

종려주일의 행렬은 감람산에서 비탈길을 내려와 기드론 골짜기를 넘어서 사

자 문(스테반 문)에 이르는 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저가 1993년에 성지에 갔을

때 이 비탈길을 걸어서 내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 비탈길은 차 두 대가 겨우

다닐만한 길인데 가운데 차 1대가 다니고 있었고 양편으로 관광객이 서로 밀리

면서 걸어갔습니다. 지금도 매주 천주교 단체에서 종려주일 행렬을 재연한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해마다 맞는 종려주일에 무슨 설교를 할까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

다. 종려주일은 매년 찾아오는데 본문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종

려주일에 대해 말씀도 했고 어떤 해는 고난주간의 시작이기 때문에 고난에 대

한 말씀도 했습니다. 종려주일에는 나귀와 종려나무와 호산나 찬송이 등장하기

때문에 금년에는 이런 것으로 종려 주일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의 참 뜻” 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나귀 새끼로 종려주일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마21:2-7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다같이 21:1을 일겠

습니다.

(마 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

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벳바게가 베다니와 예루살렘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 그

마을의 위치를 잘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 나귀 새끼를 빌려

오게 했고 제자들은 나귀등에 옷을 깔아 나귀를 탈수 있게 했고 군중은 호산나

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더 의미 있게 하는데는

몇 가지 요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다같이 21:2을 읽겠습니다.

(마 2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일을 하시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은밀하게 제자들에게 가르쳤지만 지금부터는 전 유대인들에게 메시야

되심을 공포하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위험천만할 행동이지만 택한 백성을 위해

서는 반드시 해야 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공포하려는 것입니다.

2. 나귀와 그 새끼를 빌려준 주인이 있었습니다. 다같이 21:3을 읽겠습니다.’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

리라 하시니

마가복음에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 11:5) 거기 서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

려느냐 하매

(막 11: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좋아한 분인 것은 분명합니

다. 복음은 이런 숨은 분들의 헌신으로 더 빛나게 될 것입니다.

3. 예언한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다같이 21:4-5을 읽겠습니

다.

(마 21: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슥 9:9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

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는 일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려는 것을 제

자들은 후에 알게 되지만 예수님은 미리 아시고 지시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

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

인 줄 생각났더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일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하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랑스럽게 이 일을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에

게 나귀 세끼를 타고 입성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거절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일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이보다 더 한 부끄러운 일이라 할

지라도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라면 주님은 능히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생명도 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4.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주님은 만민의 왕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비록 나귀 새끼를 타셨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입니다. 후에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백마를 타고 나타나실 것입니다.(계

19:11)

(2) 주님은 겸손한 왕입니다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이 되신 것이 주님의 겸손입니다. 나귀 새끼

를 타신 것으로 주님의 겸손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3) 주님은 평화의 왕입니다.

말은 정쟁을 위한 것이며 나귀는 평화를 위한 것입니다.

(눅 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이 찬송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가 한 노래와 같습니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러나 예수님을 거절하면 평화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예

루살렘이 마침내 주후 70년에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눅 19: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

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지금까지 나귀 타고 입성하신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

께 마음껏 찬양 드립시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경배 드립시다.

둘째, 종려나무를 흔들었던 일로 종려주일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입성은 세상 왕이나 개선장군의 입성과 같이 화려한 것이 아니지

만 백성들의 환호는 대단했습니다. 다같이 21:8을 읽겠습니다. 다같이 21:8을

읽겠습니다.

(마 21: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

에 펴고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한복음에서 그 나무를 종려나무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종

려나무 가지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왕이나

개선장군에 대한 경의의 표시입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이 환영한 것은

각기 다른 마음에서 환영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는 보통 270만명이 모

인다고 합니다. 로마 사람들은 반란이 일어날까 염려하면서 바라보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인기에 흠이 갈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유월절 양으로

예수님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당시 예수님의 입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1. 어떤 이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환영했

습니다.

(요 12:9)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오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2.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독립투사로 기대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다같이 21:10-11을 읽겠습니다.

(마 21: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

구뇨 하거늘

(마 21: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이렇게 환영하는 군중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맞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염원하면서 환영했습니다. 후에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보여줍니다.

(행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

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3.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하는 것이 바른 환영입니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

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

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

로 영접했습니까?

4. 예수님을 환영할 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1) 주님은 모든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

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일 4: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2) 주님은 사망 권세를 이길 승리자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단을 이길 승리자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

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예수님을 사망 권세를 이길 자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

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

님께 감사하노니

우리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맞는 바른 의미를 알고 종려주

일을 지켜야 될 줄 믿습니다.

셋째, 호산나 찬송으로 종려주일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다같이 21: 9을 읽겠습니다.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 호산나의 뜻은 “지금 구원하소서” 라는 히브리어에 대한 헬라어의 음역

입니다.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이 말은 우리 나라 표현을 빌리면 “메시야, 만세”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

다.

2. “호산나” 라는 말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을 유대 지도자는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마 21: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이런 찬송이 당연하다고 반박했습니다.

3.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열망이었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

하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

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4. 호산나로 주님을 맞는 바른 자세는 무엇입니까?

(1) 주님은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사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2) 주님의 이스라엘의 백성의 구원자,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이 이제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신을 타나내 보였습니

다.

(삼하 22:3)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

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을 거절하고 있지만 마침내 예수님은 전 이스라

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3) 주님은 만백성의 구원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주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 축복이 이방인에고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

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우리 모두 소리 높여 호산나 찬송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를 구원

해 주신 주님께 찬양을 드립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는 것으로 종려주일의 뜻을

가르쳐 주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입니다. 겸손한 왕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할 구

세주로 환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마귀와 사망 권세를 이길 승리자로 환영한

것입니다. 우리들도 승리자 예수님을 환영하십시다.

호산나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이제 주님을 메시야로, 이스

라엘 백성의 구주 되시며 만민의 구주 되신 예수님을 환영하십시다. 마음껏 주

님을 찬양하고 그리고 고난 주간에 주님과 함께 승리의 찬송으로 종려주일을

축하하십시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마음을

빌2:1~11

박조준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대환영을 한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하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기념

하는 ‘고난주일’이라고도 하는 날입니다.

언제인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이 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고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

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귀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

까?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이 시간 생각하는 가운데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말의 뜻을 우리가 잘 압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저 ‘부드러운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

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한 것은 비둘기의 순결성을 상징하

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둘기의 온유한 성품을 표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증거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소개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어린양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

하는 제물이란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냥 빈손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대속의 제

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

은 그 모습 가운데서 온유한 성품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양은 본래 그 성품이

온유합니다.

그래서 성품이 유순한 사람을 가리켜 양과 같이 순한 분이라고 합니다. 양은 다른 짐승에게

해를 당하는 일은 있어도 다른 짐승을 해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메시야

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거기서도 메시야를 가리켜 “양이 털 깎는 자 앞에 입을 열지 아니

함같이 잠잠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의 예언을 인용했는데,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하면서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심지가 꺼져 가면 아주 비벼 꺼버리고 맙니다. 갈대가 상하면 아예 짓밟아

꺾어버리고 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하시기 때문에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보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내는 나중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

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너희를 친히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주님을 생각할 때 그 온

유한 마음을 생각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할 때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온유한 마음을 가

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약한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강한 분이십니다. 그러

나 그리스도는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옛날 초대교회 때에 예수님을 그린 것을 보면 보통 양을 품에 안고 있는 목자의 모습을 그

렸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목자처럼 온유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

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아기 엄마들은 예수님이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축복해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에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린애들은

조용하지를 못합니다. 시끄럽습니다. 떠들어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생각에는 어린애들이

가까이 오는 것이 시끄럽게 보여서 귀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아이들

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늘나라에 있는 자들이 바로 이런 어린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고,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그 어린애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어떤 때는 문둥

병자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서 어루만져달라는 요청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손을 내 밀어 그 더러운 문둥병자를

어루만져주시고 고쳐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실 때입니다.

두 사람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 멀리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고 주님께 가까이 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면서 소리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

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따라오고 또 바쁜 행차인데 맹인들이 소리지르니까 시끄럽다고,

떠들지 말고 좀 잠잠하라고 야단쳤습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계속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들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때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

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달려오니까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어이냐?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맹인들이 뭐랬어요? “주여,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당장 그들의 눈이 볼 수 있도록 은혜

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보실 때 그냥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

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딱

한 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셔서 백성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한 것처럼 너희를 품으려 한 적이

몇번이나 되었더냐?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해

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인데, 그때는 돌 위에 돌 하나도 겹놓이지 아니할 정도로 다 망해버

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붙잡히실 때 옆에 있던 베드로는 홧김에 차고 있던

칼을 빼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다시 칼

집에 넣으라고 하시면서, 대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계하시고 조용히 체포당하

셨습니다. 그리고 법정에 끌려 다니시면서 많은 곤욕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 베

드로가 친히 기록한 대로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잠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못박히실 때에도 예수님

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성품을 보여주

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도 향기를 풍긴다”는 말이 있습

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이 온유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해치는 원수에게까지도 온유하셨습니

다.

이 말은 예수님이 약하셨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하셨습니다. 예수님

은 담대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의 온유한 마음은 죄를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

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 것은 그 온유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

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지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이깁니다. 온유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이 땅을 차지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는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일생을 가만히 돌이켜 살펴보며, 그의 생활 가운데 조금이라도 교만했다든

지 자기 자랑을 했다든지 하신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교만한 자취가 전혀 보이지 아니합니다.

가령, 예수님이 나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는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가 왕궁

에 나지 아니하시고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지만 마구간

에 나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보다 더 겸손하실 수는 없습니다.

나셔서 처음 누우신 보금자리가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젊어서 하신 생활 가운데도 사실

은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가난하게 지내셨

습니다.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

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만큼 가난한 사람은 오늘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한

벌뿐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옷 한 벌로 사시는 분은 아마 안 계실 것입니다. 갈아입을 것

은 있을 것입니다. 겨울 옷 가지고 여름까지 입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벌 옷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생 동안 사귄 사람들을 보면 어부 아니면 농부같이 별로 공부도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세력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교계에 나타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요사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목사들 가운데도 대통령이나 장관과 자

리를 같이하면 큰 대접받고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두고두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런데 예수님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원수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

앞에 선 것 외에는 권력자와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뭐라고 비난했습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

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나 부자의 친구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 무식한 사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의 친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33년 사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행동을 좀 달리하신 적이 꼭 한

번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따르는 사람들이 앞서고 뒤서면서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성

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좀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세히 보게 되면, 나귀 중에도 제일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

다. 유대 나라의 나귀는 우리 한국 나귀보다 더 작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예수님이 타신 나

귀가 작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이 땅에 거의 닿았을 줄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는 왕이시지만 겸손한 왕이십니다.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그렇습니다. 제자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사정도 모르고 “누가 우리

가운데 제일 높으냐? 누가 제일 크냐?” 하는 것 때문에 토론이 벌어지게 되고, 기분들이 상

해서 아주 어색한 분위기였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먼지가 너무 많아서 밖에서 들어

올 때면 꼭 발을 씻어야 했는데, 넉넉한 집에서는 종들이 주인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러

나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종이나 하는 일을 하나’ 해서 누구 하나 발을 씻어주려고 나서

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내가 왜 종이나 하는 발을 씻기는 일을 해’ 하고 생각하면

서 서로 눈치만 보면서 버티고 앉아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손수 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네 발을 내 놓으라. 내가 씻겨주마”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하나

씩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 되어서 제자들인 너희의 발을 씻겠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너희도 겸손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

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높은 분이시지만 그것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더러 겸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멸시의 눈을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비

유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서 청산유수처럼 기도를 잘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다 자기를 자랑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하늘을 향해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기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겸손하게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는 받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사야

57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거룩한 곳에 거처를 삼으셨지만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겸손한 심령을 부흥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지혜와 어진 것, 그리고

용기를 덕으로 생각합니다. 서양의 윤리를 보아도 이 세 가지에 ‘절제’ 하나를 더해서 소위

4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서 겸손을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르친 것만 아니고 예수

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주

셨습니다.

기독교 사상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덕을 말하

면서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한 말은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던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 준비했던 형틀에 자기가 목이 매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아주 교만해서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것을 건설

했다고 장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얼마 안되어 정신이 나가 미쳐 버리고 말았

습니다. 들로 나가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머리털은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었다가 죽어버렸습

니다. 벨사살 왕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빼앗아온 기명으로 고관대작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가, 바로 그날 밤 메대와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 베사살 왕을 죽였고 그 나라는 완전

히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잠언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의 어머니입니다. 교만하므로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

는 개인이나 나라나 반드시 망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교만할 조건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인데,

어떻게 받지 않은 것처럼 교만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제일 위대한 사람이 누굽니까? 아마 모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신약성경 중에도 예수님을 제외하고 누가 가장 위대

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예수 믿기 전

에는 아주 강퍅하고 교만했었습니다. 자기 이상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없다고 교

만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믿지 않는 사람은 쫓아다니며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님을 만나고 영접한 다음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주 겸손해졌습니다. 그의 신앙은 우리

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가 있었고 놀라운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할 정도로 겸손해졌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마음은 용서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여러분, 용서하기 위해서는 십

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얼마나 강퍅합니까? 사막과 광야 같아서 나무들이 가시가 돋쳤

고 건드리면 찌르고 고통을 줍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꼭 품으면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백합이 찔리면 향기를 더 발하는 것처럼, 우리가 찔리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우리 하나 하나가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초대

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승리의 입성

본문 마21:1-11

민병억목사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며칠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에 대해 성경은 의미 깊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벳바게 동리에 이르자 주님은 뜻밖의 지시를 하셨습니다. 동리에 들어가서 나귀새끼를 끌어오면 그 위에 타고 입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찍이 솔로몬을 기름 부어 왕으로 추대할 때 다윗 왕의 노새에 태워 행진했던 일을 연상케 했습니다. 더욱이 스가랴 선지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고 예언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평강의 왕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무리에 옹위되어 평화롭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예수님의 마음은 착잡하셨습니다.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으로 불리우는 예루살렘은 온통 투기와 외식으로 꾸며진 거짓 평화를 구가할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에 가까이 오신 주님은 우시며 안타까이 말씀했습니다. (예루살렘아)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눅19:42-44).

하나님과 누려야 할 평화를 잃은 백성에게 평화를 회복시키려 오신 평강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는 끔찍한 죄악이 장차 얼마나 큰 진노를 받을 것인가 생각할 때 주님은 연민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을 위해 위험과 고난, 죽음이 기다리는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음흉한 권력의 음모가 도사린 거대한 성을 향해 고독한 도전자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보기에는 무모한 짓이요, 실패로 평가되더라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실 확신이 있기에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이른바 육신으로는 두려워서 회피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 영적으로는 벌써 승리해 버린 영광을 바라보며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보여 준 승리가 무엇인지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며 은혜를 받읍시다.

1. 악과 증오에 대한 사랑의 도전이요, 승리의 입성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 후 한 주간의 생활은 무수한 충돌로 일관했습니다. 우선 성전에 들어가셔서 만민의 기도하는 곳인 아버지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책임자들을 질책하시며 뜰에 매놓은 양들과 비둘기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당시 종교계의 지도층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있을 외식자들󰡑이 라고 서슴없이 여러 차례 질책하시기도 했습니다.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을 비유하시면서 주인의 포도원을 탈취하기 위해 주인이 보낸 아들을 살해하는 포악을 저지르는 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얼핏보면 주님은 빨리 죽으시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통박하는 상대가 얼마나 악과 증오에 차 있는 무리임을 잘 아시는 주님입니다. 차라리 모른 체 아무 말도 않으면 미움을 증대시키는 어리석음을 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목숨을 내걸고 지도자들의 죄와 허물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는 저들의 미움에 대한 반발론 증오감을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충심의 발로였습니다. 급기야 미움이 극도에 달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용서를 빌어주시는 참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아첨하는 말보다 친구의 과오를 지적해 줌으로써 시정하도록 아픈 말을 해주는 용기와 사랑을 갖습니다. 때때로 성직자들이 부패한 정치권력에 대해 가차없는 질책을 쏟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또는 성직자의 본분 밖의 일이라고 입을 다물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직자는 나라를 사랑하고, 지도자들을 진정 아끼기 때문에 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이 충정을 모르는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구금하고 살해한 것처럼 옳은 깨우침을 거절합니다. 이런 결과가 두려워서 입을 다무는 크리스천은 악에게 진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상대의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성도는 진 것 같으나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악을 악으로 갚게 되는 감정을 극복하고 사랑과 선으로 갚으신 주님을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이 때에 비로소 악과 증오를 사랑으로 승리한 참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입성은 값진 고난을 향한 도전이요, 승리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고난을 좋아하지 않기에 성도들도 신앙을 통해 환난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주어진 고난이 의미 있고 값진 것일 때 이를 회피하려 한다면 패배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 속에 으레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의 기도는 바로 자기가 당해야 할 고난을 앞에 놓고 몸부림치는 절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의미 있고 값진 일이라면 순종하겠나이다.”라고 기도했을 때 그의 손등에는 피땀이 흘러내렸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스스로 고난을 택하는 일은 감상적인 선택이 아니요, 피땀을 쏟는 자기 희생이 수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육의 욕구만 따라 사는 자연인과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택하기도 하는 정신인을 구분해 보았습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 때문에 고난을 감수한 사명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힌 선지자들과 주님의 손에 잡힌 사도들이 한결같이 주어진 사명 때문에 고난을 받고 순교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이들을 패배자로 보지 않고 세상을 이긴 승리자들로 증거합니다. 히브리 11 : 38에는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 분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도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도전하심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신 승리의 입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축복을 받으려는 열심에 비하여 의미 있는 고난을 감수할 사명감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감당치 못할’ 성도들이 아니요, ‘세상을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오늘의 교회지도자들이 무겁게 느껴야 할 책임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4:1-2) 하며 고난에 대한 성도의 적극적인 자세를 교훈합니다. 바울 사도가 간증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겠노라.”는 자세로 의미 있는 고난에 도전하는 성도는 고난을 이긴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입성은 죽음을 향한 도전이요, 승리입니다.

퀴블로러스가 쓴 ‘인간의 죽음’이라는 글에는 인간이 죽음에 임하는 다섯 가지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정과 고립의 단계, 분노의 단계, 타협의 단계, 우울의 단계를 거쳐서 비로소 죽음에 순응하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이라면 죽음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의 용기란 대단한 것입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아끼는 마음으로 빌립을 통해 도피하실 방도를 제안했을 때 주님은 단호히 거절하시고 결연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 :24).그리고 이어서 사람이 자기 목숨을 아끼면 잃게 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아낌없이 내놓을 때 참 생명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인간 생명의 참된 가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에 도전할 때 빛을 발하는 젓입니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확증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겁내어 도피하셨다거나 사도들이 목숨을 부지하려 복음 증거하는 일을 기피했다면 아직도 온 인류 위에 사망귄세가 왕노릇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오늘도 죽음의 공포를 무기삼아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향해 도전하셔서 부활의 승리를 확증해 주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는 강하고 담대하여 승리합니다. 그리고 로마의 옥중에서도 생사를 초극한 신앙의 절정을 보여 준 바울의 간증을 우리의 간증으로 선언케 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 20-21).

우리는 오늘부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고난주간으로 지냅니다. 그러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주님을 뒤따르시기 바랍니다. 악과 증오가 도사리고 있는 도성, 무서운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도성,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서 있는 도성으로 주님을 따라 입성하십시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앞서가신 주님이 승리하시니 반드시 우리도 승리할 것입니다. 담대히 입을 열어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겁내지 말고 겟세마네의 주님을 따라 피땀 흘리는 기도를 힘씁시다. 죽음의 권세가 우리를 위협해도 담대하여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도록 온전히 헌신합시다. 주께서 부활하신 아침, 우리 모두는 환한 얼굴로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본문 마21:1-11

김명흥목사

종려주일은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이 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많은 다른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여리고를 지나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수님의 일행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벳바게라는 동리에서부터는 주님께서 나귀를 탔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제자들은 겉옷을 길에 펴고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을 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이와 같이 환영을 했습니다.

‘호산나’라고 하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은 승리와 축하를 의미하며 왕으로 영접하는 예절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입니다. 우리주님은 항상 자기를 숨기려는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 주신 후에도 아직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많은 무리가 와서 그를 억지로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날에는 주님의 태도가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제자들을 시켜서 나귀새끼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겉옷을 얹으니까 주님께서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무리들이 즐거이 부르는 호산나와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이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제자들을 책망하려고 할 때 주님은 “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태도에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이러한 장면과 행동으로 깊은 진리를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의 깊은 뜻을 세 가지로 생각하며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1. 주님께서 이러한 행동을 하신 것은 주님께서 만왕의 왕이신 것을 선포하신 행동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자신을 교훈과 생활과 이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곧 예언자로서, 구원자로서, 그 자신을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이 만왕의 왕으로 메시야인 것을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약성경에 예언한 그대로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스가랴 9 : 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는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왕으로서의 영접을 친히 받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중에 주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네가 왕이냐?”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왕으로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 드렸던 것입니다. 비록 유대인과 로마 군인들은 조롱의 뜻으로 행한 일이지만 홍포를 입히신 것도 왕의 상징이요, 갈대 홀을 드신 것도 왕의 상징이요, 가시면류관을 쓰신 것도 왕의 상징인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란 방패를 붙인 것도 왕의 표시를 나타내신 사실이 된 것입니다. 즉 종려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왕임을 선포한 날입니다.

2. 그러면 어떠한 왕이십니까?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셨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나귀를 타고 오면 그것은 언제나 평화를 의미합니다. 말은 전쟁 때에 사용하는 짐승입니다. 그러나 나귀는 평화로울 때 사용하는 짐승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호송한 무리들은 창과 검을 든 군인들이 아닙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든 농민들이었고 부녀자들과 아이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력으로 사람을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과 평화로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참으로 다스리시는 진리의 왕이요, 구원의 왕이십니다. 오직 사랑과 진리로 다스리시는 왕만이 영원히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한세기의 영웅이었던 나폴레옹이 그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외롭게 유배되어서 탄식한 고백의 말이 있습니다. “나는 칼로써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사랑으로 세계 만민을 정복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써 망하고 맙니다. 사랑은 실패가 없습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사랑은 이적을 가져옵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애통의 왕이요, 긍휼의 왕이십니다.

누가복음 19 :41~42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 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할 것을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태복음 23 : 37에서는 “예루살렘아, 예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애통의 왕, 눈물의 왕, 통곡의 왕, 탄식의 왕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로 인하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가슴은 터졌고 피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에 대한 그의 긍휼과 그의 자비로우심, 그의 사랑과 그의 애통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로 인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살을 찢고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평화의 왕이 애통하였습니다. 사랑의 왕이 통곡하였습니다.

우리도 이 종려주일에 특별히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애통의 왕을 바라봅시다. 우리를 위하여 통곡하신 통곡의 왕을 바라봅시다. 가시면류관을 바라볼 때 애통의 심정을 가져봅시다. 옆구리에 창자국을 바라볼 때 회개의 심정을 가져봅시다. 두 손에 못 자국을 바라볼 때 긍휼의 심정을 가져 봅시다. 두 발에 못 자국을 바라볼 때 통곡의 심정을 가져봅시다.

끝으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장차 나타날 심판의 예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심판의 왕이요, 최후 승리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17 : 14에서는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 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라고 하셨고, 요한 계시록 19 : 11에서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요, 눈물의 왕이요, 대속의 왕이요, 승리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모든 인류의 종말에는 심판의 왕으로 승리의 왕으로 나타나십니다.

이 땅에서는 지금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부분적으로만 실현됩니다. 천국의 백성들에게만 나타난 것입니다. 택한 백성들의 심령 속에만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의 왕권이 온 천하만민에게 강권으로 나타나실 때가 오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제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는 철장으로, 맹렬한 진노로 다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곧 심판을 의미합니다. 대심판의 왕으로 임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다스리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마지막에 청장으로 다스릴 때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의 종으로서, 왕의 신하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충성과 순종함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엄히 명하시는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과연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살아가십니까?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에 우리가 얼마나 순복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 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는데 과연 우리가 얼마나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습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최후명령을 하셨는데 과연 우리가 이 명령을 얼마나 준행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평황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사랑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장차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그의 사랑을 입을 것입니다. 충성을 다하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자는 영생의 축복이 따를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자는 십자가 후에 오는 부활의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마태복음 21:1-48

이원근 목사

마태복음 21장은 이제 드디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입성하신 뒤 성전에 들려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편 자신들만이 선민임을 자랑하며 예수님께 도전하는 유대인들을 책망하시고 그들에게 심판

이 있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고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하실 메시야라는 것을 더욱 드러냅니다.

1. 왕 되신 예수님의 전지하심과 지혜입니다.

1)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각 고을을 돌아다니시며 병 든 자를 낫게 하시고, 굶주린 자의 배를 채워 주시

며, 귀신들린 자를 해방시켜 주시고, 사악한 권력자들을 꾸짖으시자 그 소문은 예루살렘에까

지 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날 군중은 왕으로 대접

하며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호산나라고 외쳤는데, 이것은 󰡒나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

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2) 앞일을 밝히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 두 제자에게 자신이 타고 갈 나귀 새끼가 준비되어

있으니 그것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자 선

뜻 자기 나귀를 내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유월절 전야에 최후의 만찬을 준비할 때에도 있

었습니다(참조, 마26:17-19).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

다.

예수님은 인생의 앞길을 아십니다(시142:3).

미래의 일을 아십니다.(마20:17-19)

3) 악한 자들을 지혜로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권위 있는 말로 가르치시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시기해서 예수

님께 도전하였습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당신이 무슨 권세로 가르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

수님께서는 그 질문이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임을 알아차리시고는 그들이 대답하지 못할 질

문을 되받아 하심으로써 악심을 품은 자들의 말문을 막는 지혜를 발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지혜를 가진 하나님의 모사이셨던 것입니다(참조, 사9:6).

2. 왕의 분노와 심판입니다.

1) 성전 장사꾼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입성하시자마자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

문에 쭉 늘어서서 거룩한 제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는 장사치들을 향해 분노하시면서

그들의 상과 의자들을 뒤엎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을 시장으로 만들어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자

들을 향해 분노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의 어떤 사람도 성전 지도자들과 그 무리의 그러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의 속성을 정면으로 정죄하지 못했으나 성전의 주인 되신 예수님만은 그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사람 이외의 만물은 사람을 위해 있고 사람을 포함하는 만물은 하나님을 위해 있습니다. 예

수님께서 지나갈 때에 있던 무화과나무는 따라서 참 사람 되시고 참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

열매를 낼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예수님께 열매를 드리지 아니하였고 그 결

과 나무는 저주를 받아 고사했습니다.

이 기사는 예수님께 합당치 아니한 자, 곧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멸망당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심판권을 가지신 예

수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 줍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및 백성들이 세례 요한을 죽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

려 함으로 그 조상 때부터 짓던 악행, 곧 하나님의 의인들을 죽이는 죄악을 끊임없이 짓고

있다고 지적하신 뒤 그러한 죄악을 짓는 그들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선언하셨습니

다. 심판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따라서 심판을 선언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3.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책망하십니다.

1) 이방인보다 못함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비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빗대어 하신 비유입

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겠노라 약속하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바

로 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절했던 이방인이 먼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참조, 마2:1-12).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 유대인들의 가증스러움을 책망하셨습니다.

2) 의인들을 죽인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타국에 간 농부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의로운 선지자들을 죽인 사실을 폭

로합니다. 유대의 왕들과 백성들은 번번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하박국 등은 그 대표적인 선지자들이며 세례 요한의 죽음은 당시 유대인

들이 부인하지 못하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그 불의한 행실을 책망

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책망하신 것 중 가장 주목될 만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리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이리라는 것을 예언하신 뒤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아들을 죽

이는 것은 너무나도 큰 죄악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책망과 아울러 저주의 심판

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여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큰 죄악을 범치

말아야 하겠습니다(참조, 히6:6).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하시며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며 만유를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하나

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사랑의 주님이라는 것만 생각하여 만홀히 여기지 말고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심하여 그를 두려워하여 우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가운

데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종려 주일에 찾으시는 사람들

마21:1-11

최상익목사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루살렘 백성

들이 호산나하며 환영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 벳바게 마을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면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있을 터이니 끌어 오라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왜 나귀를 끌어가느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나귀를 끌어와 자신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예수님이 타시도록 하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했습니다. 온 예루살렘 백성이 나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하고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다른 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오신 사명과 뜻을 철저히 감추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종려주일을 통해서 자신을 공개석상에 뚜렷하게 나타내시므로 그 동안 여러 가지

각도에서 숨겨져 있던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르므로 이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찾으셨는가가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들

에게 귀중한 열쇠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에 “종려주일에 찾으시는 사람들” 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과연 어떻게 이 종려주일에 나타나고 있는가 스스로 바라보시고 깊은 회개와 결단을

가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고난 주는 이들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자신을 백성들에게 인기있는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첫 번째 이유는 예수

님에게 고난을 드러내 놓고 행할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시고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고 제자들에게 자

신이 그리스도이시고 세상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며 만인을 구원하실 뜻을 가르쳐 주시고도

비밀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공개적으로 입성하시고 많은 이들의 환영

을 받아 온 성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이신 것은 지금까지 예수를 해하고 싶어도 결

단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하여 예수를 죽이도록 하는 뜻이 종려주일에

담겨져 있습니다.

과연 이일로 인하여 예수를 핍박할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 가룟 유다 였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을 기다리는 과격파 캐리옷 당의 한 사람 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 다닌 것두 예수님이 전쟁의 왕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기를 바레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전쟁의 왕

이 타는 말을 타지 아니하고 평화의 왕인 나귀를 타시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하게 되었습니

다. 자신이 지금까지 바랐던 소원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때부터 예수를 떠날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은 30에 스승을 팔아 버리는 멸망

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2)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예수가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더러 내 놓고 적대행위를 하지 않으셨고 많은 백성들의 호응으로

인하여 예수를 처단하는 일에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

시고 예루살렘에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시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온 백성들의 사랑이 예수에게 가게 되고 자신들의 입지는 작아지게 될 것이 두

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소극적이든 이들은 적극적으로 예수를 제거할 생각과 결단을 가지게 되었

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찾으셔서 자신은 고난을 당하시지만 만민을 구원할 십자가의 고난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종려주일을 이루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때로는 반대자들의 손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그 피로 인하여 인류를 구원할 일을 이루시는 데에는 예수를 사랑

하는 이들로서는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이유없이 예수를 미워하고 그에게 고난을 줄

원수들의 손을 통하여 이 십자가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종려주일에 우리 예수님은 악하게 쓰일 사람들을 찾고 계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시 노릇을 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게 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가시 노릇을 하고 싶지는 않는가?

금년 종려 주일에 내가 쓰이는 쓰이는데 가룟유다처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악하게 쓰임받

는 이들을 찾으시는 우리 주님의 눈에 바로 내가 선택되는 것은 아닌가?

이 시간 우리는 우리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진 바람이 불면 우리는 옷깃을 더 튼튼히 여밉니다.

남을 찌르는 가시가 있다면 찔리는 사람은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신앙의 옷깃을 더 튼튼히

여밉니다. 남의 신앙을 튼튼히 여미는 일에 내가 남을 찌르는 가시로 쓰임 받는다고 하면

이 종려주일에 예수님에게 고난을 줄 사람을 찾으셨던 그 대상자에 바로 내가 해당된다는

불행한 결과가 됩니다.

이 뜻을 깨달으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은 남에게 고난을 주어 그 사람으로 더 큰 구원을 이루는 일에 쓰여

지는 자로 찾아지지 마시고 이 종려주일에 자신을 돌아보고 남에게 기쁨을 주는 성도의 길

을 걸어가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헌신하는 이들을 찾으셨습니다.

종려주일에 자신에게 고난을 주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악역을 찾으셨던 예수님은 두

번째로 찾으시는 사람은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귀한 것을 헌신하는 사람들을 찾으셨

습니다.

1) 나귀를 드려 헌신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3)

본문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쓰시겠다 라는 말씀에 두말하지 아니하고 헌신한 아름다운 모습을 성서는 증

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는 일이나 대신 무슨 이익을 추구하지도 아니하고 단

지 주님이 스시겠다는 말씀 한마디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이런 사람을 우리 주님은 오늘 이 종려주일에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한끼 밖에 없는 빵을 엘리야에게 헌신하여 3년 6개월 동안 축복을 받았습니

다.

사르밧에 그 과부보다 풍족한 사람은 얼마던지 있습니다.

그런데도 과부는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나를 택하여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빵을

달라고 하느냐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야속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하나 더 주셔도 시원찮을 텐데 하나 밖에 없는 것을 빼앗아 가십니까? 하지도 않았습니

다. 그리고는 그녀는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자식과 먹고 죽을 귀중한 빵을 엘리야에게 드

렸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이삭을 드려 헌신하였습니다.

다른 집에는 많은 자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이

삭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100세에 얻었으므로 이제는 더 얻을수 없는 귀중한 자식입

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3일길을 모리아 산을 향하여 걸어 가면서도 한마디의 불평이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묵묵히 자신의 가장 귀한 물건도 아닌 아들을 드려 헌신하는 모습을 발

견합니다.

이것이 헌신이고 이런 사람을 종려주일에 찾으시려고 이 종려주일을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님은 이 종려주일에 이런 헌신자를 찾고 계십니다.

종려주일을 맞으시는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이 아침에 우리 모두 여기에 여러분이 해당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겉옷을 드려 헌신한 이들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겉옷을 나귀위에 얹었고 백성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에 펴서 예수님을 환영

하였습니다. 겉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이러므로 겉옷을 드렸다는 의미는 자신의 명예

와 마음을 드렸다는 것을 표시하게 됩니다. 이 종려주일에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이런 헌신의 모습을 찾고 계십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손으로 못자국과 창 자국을 보아야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향하여 내 손과 발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키려던 자신의 고집과 자존심을 예수님 앞에 그 손과 발을 확인하

지도 아니하고 드린 참다운 헌신이었습니다.

그 뒤로 도마는 참 주의 일꾼이 되어서 인도까지 가서 전도하다가 예수를 위하여 헌신하며

순교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며 나의 시간을 달라고 하십니다 !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며 나의 물질을 달라고 하십니다 !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며 나의 봉사를 원하십니다 !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며 겉옷같은 우리의 자존심을 원하고 계십니다 !

그런데 우리는 바쁘다고,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것은 제가 먼저 써야겠다고, 이것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살면서 주님께 헌신하고 봉사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이 종려주일 아침 이 시간 우리는 나귀를 드린 이들을 생각합시다.

자신의 겉옷을 드려 자신의 명예와 마음을 서슴없이 땅에 깔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모두 참다운 헌시의 자리에 서셔서 헌신하는 자를 찾으시는 주님의 눈에 띄어지

는 종려주일 아침의 참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찬송하며 기뻐하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종려주일에 우리 주님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기뻐하는 이들의

속에서 만족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그사랑을 감사할 표현

이 찬송과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찬양하는 이들을 사랑하셨고 당연히 여기셨습니

다.

성전에서 아이들이 호산나하며 예수님을 찬양하자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하여 예수님

께 항의할 때,

그렇다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고 반박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는 그의 작품처럼 아름답지 못한 고난의 연속의 삶이었습니다.

10살도 되기 전에 부모님을 여의었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은 그를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었는데 결혼한자 13년만에 부인과 사별하였습니다. 재혼하여 두 부

인에게서 2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10명은 어려서 죽었습니다. 남은 자녀 속에는 20살이

넘어서 잃은 아들도 있고 정신박약가도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노년이 되어 이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고 뇌출혈로 쓰려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속 작곡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을 말입니다.

참으로 불후의 명작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면서도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

까?

바로 독실한 신자로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가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인 바하입니다.

그가 이처럼 심오한 믿음과 찬양의 세계를 알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인생의 고난을 누구보

다도 더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로부터 나온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 살을 찢는 고난의 삶 속에서도 그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삶으로만

살았고 그래서 불후의 명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귀한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바하와 같은 진실된 마음으로 찬양하고 기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찾으시려고 종려주일을 허락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일어나 호산나하며 기뻐하고 있습니까?

할 수없이 호산나 찬송하고 할 수없이 성가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종려주일에 참다운 호산나의 찬양을 하는 이들을 우리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이주님의 눈에 발견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아침 종려주일에 헌신하며 찬양하는 성도들을 찾으시는 사랑스러운 눈을 가지신 예

수님의 눈길에 한 분도 빠짐없이 헌신하는 성도, 찬양하는 성도로 발견되는 성도들이 되시

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

마21:1-9

문성준목사

[예화]

어떤 소년이 학교에 지각을 했습니다. 평소에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소년에게 지각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소년은 학교에 오는 도중

어떤 분이 동전을 떨어뜨려 그걸 찾는 것을 기다리다가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생

님은 물론 동전을 같이 찾아드리는 일도 좋지만, 학교에 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미

안하다고 말하고 지각하지 않게 와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의아해진 선생님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자기가 그 동전을 밟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찾기를 포기할 때까지는 올 수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우리들의 현실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답답합니

다.

먼저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세계 인구가 61억이랍니다. 그 중에 기독교 인구가 약 19억을 상

회한답니다. 가히 30%에 육박합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 나가도 3명이 지나가면 1

명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주변에서도 보면 전보다 근래에 와서 교인의

수가 많이 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툭’하면 어느 교회 출석하고, 만나보면 집사․장로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의 현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목사 또한 많습니다. 심지어는 미국의

신학교들이 한국 목사님들 덕분에 경영 수지를 맞춰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랍니다.

요즈음 카나다와 미국 서부 지역에는 교회를 맡지 않은 한국 무임 목사님이 2,500여명 정도

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말합니까? 세계와 함께 우리나라에 신자

가 많고, 직분자가 많고, 목사가 많은 것은 은혜스럽고도 고무적인 일이지 뭐가 잘못입니까?

아니요. 잘못 된 것은 없습니다. 신자가 많다는 것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수가 나면 온 사방

이 물입니다. 앞에도 물이고 뒤에도 물입니다. 그야말로 물난리가 납니다. 그런데도 홍수가

나서 동서사방이 물 천지가 되면 마실 수 있는 물은 없어집니다.

요즈음은 신자라고 믿고 기대하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습니다. 집사․장로라고, 목사라고

믿었다가는 낭패 보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넘쳐는 나는데 마실 물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

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下)”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입니

다. 신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다운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도우려고 기다리

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애써 찾을 때, 그가 지칠 때까지 밟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

상이나 신자나 모두 말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에서도 여기저기에서 ‘호산나’ 라고 떠드는 소리가 넘쳐납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아 나’를 음역한 것으로 본래 구원에 대한 ‘

간구’, ‘기원’을 포함하여 찬양이나 기쁨의 환호를 말합니다.

여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마치 시골 초등학교의 가장 행렬 비슷한 초라한 모습

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라고 부르는 구호의 홍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

려가지와 자신의 겉옷까지도 길에 펴며 ‘호산나’를 외쳤던 저들의 다수가 예수의 십자가 처

형을 찬성하는 소리로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패한 유대교적 전통과 세대를 거듭한 사

회적인 병리현상에 깊이 젖은 모든 사람들의 심리 속에 자리 잡은 고질적인 사고는 예수 그

리스도조차 그 틀에 집어넣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인 구세주로서 ‘호산나’를 부르

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건강한 신앙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건강한 예배자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병적인 사회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저들 또한 병적인 사고의 신앙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환호 속에는 진정한 인생의 주인을 만난 기쁨과, 진리와 의로 자신

들을 다스려 주실 왕에 대한 예의의 희열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통하여

자신들이 지금까지 민족적으로 바래왔던 그 어떤 것들을 얻고 싶은 욕망으로 충전되어 있었

습니다. 그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예수가 나서서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그 엄청난 능력으

로 어떤 일을 해도 상관이 없는 저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선택되었다고 믿는

자신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어떤 부적절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상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메시아가 오셔야 한다는 편견과 신념을 만족시켜주기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를 바라보며 ‘호산나’를 부르고 있으나 실인즉 저들에게 필요한, 자신들이

요구하는 그 편견과 신념을 만족시킬 우상을 만들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기억하십니까? 그 첫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 44:6).” 여기 이사야서를 비롯한 성경 여러 곳에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신 사상을 천명하

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우상

을 다른 이방 종교의 신상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남의 불상을 훼

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우상이 이방 종교의 신상을 가리키

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율배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유일신 되심을 천명하신 하나님께

서 다른 신상을 운운하시는 것은 그들의 신 자체를 인정하시는 자기모순일 수밖에 없기 때

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 계명을 통하여 우상을 만들지 날라고 하신 진의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해답은 출애굽기가 직접 제시합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

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출 20:23)”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신상은

절대로 다른 종교의 신상이 아니라,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습들로 하나님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만드는 그 어떤 틀 속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라

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세상의 유한한 것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표시할 수 있겠습니

까?

신약의 그 유명한 바울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사울이었을 때에 그 누구보다도 하

나님을 향해 열심이었지만, 그리고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신상을 만든 적은 없었지만, 그가

믿었던 유대교의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의 편견과 신념이 만들어 낸 하나님의

신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좌충우돌하고 다녔지만 오늘 ‘호산나’를 부르는

사람들처럼 우상 숭배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도대체 예수를 향해 참으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왕(王)으로 모시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니, 신자치

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분을 항상 주로, 왕으로 고백하지 않

습니까? 그러나 그 의미를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자신의 편견과 신념으로 하나님의 신상

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초청되어질 뻔했다가 주위의 반대와 당국의 초청 불허 방침으로 내한하지 못

했던 티벳 불교의 고승 딜라이 라마에 대하여 작년에 미국 CNN방송이 달라이 라마와 티벳

불교에 관한 특집을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달라이 라마가 티벳 불교의 특징을 설명

하면서 첫마디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대 외부에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가 있

다면 그대의 내적 마음이다.” 오늘날 서구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의 설법에 심취합니다. 그들

은 과학의 진보와 물질문명의 발달로 자신들이 이미 신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기에 더 이상

청교도적인 신앙과 외부의 창조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라파는 교회마다 텅텅

비고, 미주는 ‘호산나’를 부르나 사회악이 범람할 대로 범람한 겁니다. 저들은 이미 신이 되

어 있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는 달라이 라마야말로 오늘날의

자신들의 그리스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달라이 라마는 위대한 종교인일지는 모르지만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에 창조주가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비록 장삼 하나만 걸치고 한 평생을 살며 인

생을 연구해왔지만 결국 그는 진정한 주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언제나 자신

이 자신의 주인으로 행세하는 자에겐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계시하시지 않기 때문에 발견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헛소리하지요. 방자해지지요. 인생 그 자신이 창조주라

고… 그 자신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로마 카톨릭 교황이 교황으로 등극할 때 쓰는 모자에 박혀 있는 모든 보

석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요한 바오로 2세가 취임하던 그 때의 가격으로 우리 돈 65억 원이

랍니다. 교황이 타는 승용차는 독일 벤츠 사가 특별 제작한 자동차입니다, 보통 자동차는 타

려고 하면 낮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도 일단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벤츠는 교황

이 앞에 서면 자동차의 천장이 열리고 그대로 서서 자동차를 타면 곧 저절로 닫힙니다. 그

자동차에는 교황의 문양이 새겨져 있답니다. 그 왕관을 쓰고 그 왕의 옷을 입고서, 그가 진

정 예수를 주로 섬기며, 왕으로 모시며,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겠습

니까?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건 딜라이 라마이야기이고, 교황의 문제인데 왜 우리에게 따지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예수를 주로 부르는 우리를 보십시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참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누가 여러분을 오늘 이리로 부르셨습니

까? 당연히 그분을 주로 고백하니까 그분이 주인이시라구요? 그러나 우리보다 훨씬 먼저

그분을 알고 우리에게 그 신앙을 전해주었던 서구 사람들은 그걸 몰라서 오늘날 딜라이 라

마의 헛소리에 빠지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있지는 않으십니까?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편견과 신념의 틀에 예수님을 가두어 두고 그분을 향해 ‘호산나

‘ 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건 절대로 잘못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

내리라(3절).”

무엇이든 그분이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쓰시겠다면 무엇이든 내 놓습니다. 그것도 즉시 말입

니다. 그건 왕의 명령입니다. 내 인생의 절대 가치가 그분입니다. 거기엔 이유를 물을 필요

도, 사람의 편견도, 자신의 그 어떤 신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내 인생의 주인이신 그분의

말씀만 있을 뿐입니다. 나는 거기에 따를 뿐입니다. 비록 그분이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고 이

해 안 되는 입성을 하셔도, 그리고 나에게 따르라 하셔도 나는 이유를 달지 아니하고 거기

에 승리가 있는 줄 믿을 것입니다.

한때 왁자지껄 하는 형식으로 겉옷을 펴며, 요란스레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 펴며, 그렇게 그

분을 왕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는 그 많은 재물과 시간을 낭비하면서도 그분

을 위해 아주 작은 것을 드리고는 마치 할 일을 다 한 것 같은 모습의 외식하는 신앙으로는

그분을 향해 ‘호산나’ 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나 더 해드리고 오늘 말

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나라 국악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황병기 선생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1989년도에 정부가 에밀레 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해를 마지막으로 타종을 금지키

로 했기에 그 마지막 타종을 듣기 위하여 경주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타종을 위해 종각 위

로 올라 선 박물관장이 군중들 제일 앞에 서 있는 이 황 선생을 발견하고는 같이 타종을 하

자고 요청했습니다. 영광스럽게 생각한 황 선생은 함께 긴 통나무를 잡고 타종을 했습니다.

첫 번째 타종을 했습니다. 세계에서 여운이 제일 긴 에밀레 종을 그 여운이 끝난 다음에 다

시 치는데 황 선생은 세 번을 치고는 내려와 버렸답니다.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마당에 운

집한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성 때문에 막상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분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맞은 편에 있는 반월성 언덕으로 올라가십시오. 그러면

들립니다.’ 반신반의하며 올라간 황 선생은 놀랐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인간의 함성소리를

뚫고 신비스러운 종소리가 자기의 귀를 울리더랍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우리들 속에서 끓어오르는 온갖 욕망의

소리들을 하나님 앞에다 쏟아놓으며 떠들썩하는 정도에 머문다면, 그 순간에는 우리가 아무

리 ‘호산나’를 외치며 겉옷을 내고 나뭇가지를 길에 까는 척봉사를 해도 그것은 진정한 섬

김도 아니요, 오로지 자신의 자아만족에 불과할 것이며, 아마 그 순간엔 진리이신 주님의 음

성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인 맞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의 왕이십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신앙적인 편견과 신념의 틀에 그분을 가두

지 않았습니까? 이제라도 우리가 묵묵히 욕망의 소리를 내려놓고, 조용히 내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가치를 두며, 무엇을 하던 그분을 왕으로 섬기는 우선순위를

둘 수만 있다면 우리는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진정으로 ‘호산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될 것이며,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

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

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25).”

호산나

(슥 9:9-19, 막 11:7-10)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며 고난주일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주일이기도 하다. 흔히 예수님의 입성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하지만 승리의 입성이 아닌 실패의 입성이며 죽음의 입성처럼 보인다. 옛날 승전한 왕이나 장수가 말을 타고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며 초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라한 것이 아니라 겸손하신 것이다. 초라한 모습과 겸손한 모습은 다르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이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은 “호산나”를 불렀다. 호산나의 의미는 무엇일까?

1. 찬송이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시며 찬송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누가복음의 입성 기록에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가 첨가되어 있어서 예수님의 탄생 때의 찬송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의 입성이 죽음을 향한 걸음인데 기뻐하시고 찬송하신 것은 구세주의 사랑이다. 찬양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의무이고 예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작곡가 바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곡을 작곡한다고 하여 그의 모든 작곡 끝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의 약자(SDG)를 썼다고 한다.

2. 환영이다.

호산나는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의 소리이다. 나귀에 자신의 겉옷을 얹고 자기 겉옷을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를 불렀다. 극진한 마음으로 환영하였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병자들, 배고픈 무리들, 말씀을 들으려는 무리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단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과 왕과 로마관원과 같은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으셨다. 환영하는 것은 환영하는 사람에게 더 큰 영광이 된다. 예수님을 환영한 시므온이 더 영광을 얻었던 것처럼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성경은 말한다.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입성하시게 하면 구원의 은총이 있다.

3. 구원이다.

호산나는 “비노니 구원하소서”란 뜻이다.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비노니 구원하소서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근본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다. 그들이 병고침을 받았든, 말씀에 감동을 받았든, 어떤 느낌을 받았든 예수님을 환영하는 궁극적 목적은 누구나 구원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육적인 구원, 정치적 구원, 국가적 구원을 바랐을 것이다. 배불리 먹고, 로마에서 해방되고, 나라가 평온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이것 이상으로 영혼의 구원 즉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호산나 소리대로 입성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해방을 주시려고 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주님을 당시 사람들처럼 찬송하며 환영하며 구원을 구하자. 호산나는 당시의 소리가 아니라 우리의 소리가 되어야 하며 우리가 아니면 돌들이 호산나 할 것이다

예루살렘에 가신 이유

본문 욘4:9-11 눅19:28-40

유경재목사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활동하신 장소는 크게 두 곳으로 나타납니다. 한 곳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고, 또 대부분의 시간 동안 활동하신 갈릴리이고, 다른 한 곳은 시간적으로는 짧지만 그 비중과 의미에 있어서는 갈릴리 못지 않게 중요한 예루살렘입니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등 구원의 역사를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펼치십니다. 물론 때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시기도 하시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또 적대자도 있었지만 추종자의 기세에 눌려 별다른 반발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역의 전성기를 보내고 계셨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제자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가서 환영받을 곳도 아닌 예루살렘으로, 있다면 예수를 반대하던 자의 본거지가 있고, 기다리고 있다면 예수의 적대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받고 죽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실 리 없는 예수님이 왜 그런 무모한 길을 떠나셨을까요? 갈릴리에 그냥 있으면 더 많은 구원사역을 더 오랫동안 하실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유대인 남자라면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에 가야 했지만, 지난번처럼 그냥 조용히 들어가서 할 일만 하시고 조용히 나오실 수도 있었을텐데, 이번에는 왜 마치 왕이 행진하듯이 요란한 환영 가운데, 마치 제왕이 즉위하듯이 그렇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가장 단순한 대답은 죽기 위해서라는 것일 겁니다. 누가복음 8:31~33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아시면서,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선지자들이 이미 기록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수님께 맡긴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뜻에 순종해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고 그 일이 즐겁고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장면들을 보면,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도 죽음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모든 두려움과 고통을 감수한 채 말없이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요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예수님과 비교가 됩니다. 특별히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지내고 나오게 된 것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사흘을 지내시고 부활하신 것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과는 아무 상관없는 곳으로 가려다가 억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됩니다. 요나는 그리고 나서도 계속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예수님과 요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가 되는데, 특별히 이 점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비교가 됩니다. 요나는 그저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것도, 그 대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말없이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기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에게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셨을까요? 그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죄로 인해 죽게 되어 있는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해 그 아들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죽음의 장소, 예루살렘에 가신 것입니다.

정말로 예루살렘은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성전 체제의 본거지요, 정점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율법을 독점하여 그것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억압하고 착취하던 곳, 그뿐만 아니라 이방인이요 침략자인 로마와 결탁하여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훼손하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이름은 있지만 죽음이 지배하던 곳, 예루살렘으로 예수는 죽기 위해 가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장소 한복판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는 바로 그 곳,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곳,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세계에 부활의 복음이 선포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가시고기라는 물고기의 전설이 있습니다. 이 물고기는 크기가 작아서 큰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곤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시고기는 온 몸이 날카로운 가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잡아먹은 물고기 배를 가르고 나와 오히려 큰 물고기를 죽게 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그 죽음의 세력은 예루살렘을 찾아 온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시어 오히려 그 죽음을 정복하고 말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많은 사람의 환영과 추종에 안주하지 않고, 죽음을 위하여, 그리고 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 하나만 가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종려주일을 맞는 오늘,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세상이 혹시 예루살렘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예루살렘처럼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전 체제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구속하고, 억압하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오히려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아직도 갈릴리에서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이 늘었다고 해서 교회에만 파묻혀 사회를 외면하고 역사를 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순종하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있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향해 고난을 받더라도, 그러다가 혹시 죽게 되더라도 떠나라고 하십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생명, 부활의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mission

성경에서 종려나무(the Palm)는 의, 아름다움, 승리등을 상징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의 첫날이 종려 주일로 불리는 것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시는 예수를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이주일을 호산나 주일(Dominica Hosanna)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시 그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가 ‘호산나’라고 외친 데서 유래된 말이다.

종려 주일은 그 옛날 서로마 교회에서는 이날 그리스도의 수난사(受難史)를 낭독했기 때문에 ‘고난의 주일’ (Dominica Passionis)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종려 주일은 이외에도 ‘꽃의 날’ 이란 뜻에서 Floridum, Dominica Florum 등으로 불리워졌으며, 부활절날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세례 지원자들과 과련하여 ‘세례 지원자 주일'(Dominica Competentium)이라 불리기도 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을 때마다, 지금 당장은 당신께 환호하는 무리들이 곧 당신을 못박으라고 돌변할 자들임을 아시면서도, 즉 며칠 후 당신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다만 그들 죄인의 죄값을 대신 치루사 구원을 주시려는 뜨거운 사랑으로 백성들의 환호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하겠다. 그리하여 바로 나를 위해 주가 당하신 노고와 고난이 그 얼마나 크고 감사한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새로이 깨달아야 하겠다. 더욱이 본래 제 2위 성자요 메시야이시면서도 초라하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구속주요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에 대해서 묵상하여야 할 것이다.

1. 시기

종려 주일은 십자가 수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공식 입성(入城)을 축하하는 날로,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하다. 그리이스의 일부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날로 보아 고난 주간에서 제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만왕의 왕이신 성자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입성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이셨으며, 이는 또한 마지막 주간에 당하실 시련의 시작이란 의미를 지니므로 일반적으로 동,서로마 교회는 종려 주일도 고난 주간에 포함시켰다.

2. 유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께서 자신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메사야로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일주일 후에 있을 부활의 승리를 예견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백성들이 이날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종려 나뭇가지를 흔든 것은 종려 나무가 승리의 상징이었고 그리스도를 승리의 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종려주일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자료는 385년경의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이다. 이에 따르면 동로마 교회 중의 하나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로 종려 행렬 등이 행해졌다고 한다(3. 풍습 참조). 물론 서로마 교회들도 부활 주일 전에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간을 갖기는 했지만 종려 행렬과 같은 축하 행사는 없었고, 그 성격도 축하 분위기를 지닌 동로마 교회의 행사와는 달리 애도의 성격을 띠었다.

이 밖에도 6세기경 스페인의 의식서(儀式書)인 서고트 교회의 Liber ordinum에서도 종려 주일 행사에 대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의식서에는 종려 행진과 더불어 동로마의 교회에서 행하던 풍습들이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5세기 경 동로마 교회의 종려 주일 풍습이 서로마 교회에 유입되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내용이다. 따라서 고난 주간, 특히 종려 주일의 행사는 대부분 동로마 교회로부터 서로마 교회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종려 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의 축성의식(祝聖儀式)만은 그 기원을 서로마 교회에 두고 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에 행하는 축성의식은 초기에는 행해지지 않았으나, 후대에 와서는 종려나무 뿐 아니라 종려 행렬에 사용하는 꽃들에도 행해졌다(3. 풍습 참조).

중세 로마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에 종려나무의 축성의식, 종려 행렬, 그리고 완전한 애도의 성격을 띤 미사를 행하였다. 그러나 희랍 정교회에서는 이 주일을 고난 주간에서 독립된 주일로 정해 ‘환희의 날’로 기념하였다. 오늘날 희랍 정교회에서는 종려 행진을 하지는 않지만 종려나무 축성의식만은 계속해서 지키고 있다.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고난 주간 의식으로서의 종려 주일 행사들이 폐지 또는 간소화되어 오늘날에는 과거의 풍습과 행사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종려 주일의 의미는 잊지 않고 교회의 한 절기로 기념하고 있다.

3. 풍습

(1) 종려 주일 행진

종려 주일의 행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유래된 풍습이다. 이는 동로마 교회에서 보다 먼저 체계적으로 행해졌는데, 예루살렘 교회의 종려 행진은 이날 오후 감람산에 위치한 교회에서 찬송과 화답송을 부르고 교훈서를 낭독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때 주교(主敎)는 그리스도로 상징되어 나귀를 타고 맨 앞에서 행진하였고, 그 뒤를 종려나무 가지와 감람나무 가지를 든 아이들이 따랐다.

서로마 교회에서도 종려 주일 행진시에는 호산나 노래 등이 불리웠다. 이러한 찬양을 하는 가운데 종려나무 가지는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러한 종려 주일 행진은 중세 교회에서 흔히 행해졌던 것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은 이 축하 행렬은 행하지 않고 단지 인류를 위해 왕을로 오셨으나 고난당하신 예수의 정신만을 기리고 있다.

(2) 종려 나무의 축성 의식

축성(祝聖)이란 성례(聖禮)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것으로, 그 기원은 구약의 성별 의식에서(출 40:9-15) 찾을 수 있다. 중세 교회에서는 종려 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에 축성 의식을 행했는데, 이렇게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을 추방하는 힘이 있다고 믿어졌다. 또한 이는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데도 능력이 있다고 믿어졌다.

종려 행진, 세족식(洗足式)등 많은 고난 주간 행사들이 동로마 교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종려나무의 축성 의식만은 서로마 교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원래 종려가지의 축성 의식은 하나의 독립된 행사로 행해진 것인데, 동로마 교회의 영향으로 인해 종려 행진에 유입되면서부터 이러한 축성 의식은 종려 행진과 결합된 형태로 행해졌다. 이 의식은 보다 확대되어 나중에는 종려 행진에 사용하는 모든 꽃들에도 행해졌다.

이러한 축성 의식은 희랍 정교회와 카톨릭 교회에서는 오늘날에도 행해지고 있다.

4. 관련 성경 자료

(1)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관련 기사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마 21:7)

무리들이 종려 나무를 흔듦(요 12:13)

무리의 환영을 받으심(마 21:8,9)

어린이들이 호산나를 외침(마 21:15)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분냄(마 21:15)

(2)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증거하는 것

예수는 메시야이심(요 1:4)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왕이심(마 9:27)

겸손의 왕이심(빌 2:6,7)

평강의 왕이심(엡 2:4)

영광과 승리의 왕이 되심(히 2:9)

영원한 희생 사역의 성취자이심(마 20:28)

(3) 종려나무의 상징적 의미

의인의 번성(시 92:12)

아름다움(아 7:7)

승리(요 12:13)

우상(헴 10:5)

(4) 나귀 새끼의 상징적 의미

겸손(슥 9:9)

평화(요 12:15)

수고(삿 10:4)

희생(민 31:28-31)

(5) 주를 환호하던 군중들의 교훈

순진한 마음으로 메시야를 맞이함(마 21:8,9)

메시야 예수가 준 구원의 본질을 오해함(요 6:26,27)

메시야를 배척하고 죽이는 범죄를 자행함(마 27:21,23)

(6)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후의 사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마 21:18,19)

성전을 정화하심(눅 19:45-48)

권위에 대해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심(마 21:23-2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나무라심(눅 20:45-47)

과부의 연보를 칭찬하심(눅 21:1-4)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하심(눅 22:1-6)

최후의 만찬을 베푸심(마 26:17-30)

제자들의 배신을 예언하심(마 26:31-35)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마 26:36-46)

체포되심(마 26:47-56)

심문 받으심(막 14:53-72)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심(마 27:11-31)

십자가에 달리심(마 27:32-56)

무덤에 장사되심(요 19:38-42)

부활하심(막 16:6)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막 16:19)

(7) 왕으로서의 그리스도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는 왕으로서 오심(눅 1:32,33)

유대인의 왕으로서 오심(마 2:2)

전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되심(미 5:4)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왕이심(단 7:13,14)

겸손한 평화의 왕이심(슥 6:12,13; 9:9)

공의와 지혜로 통치하시는 왕이심(사 9:7)

(8) 그리스도의 겸손

하나님이면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심(빌 2:7)

비천한 곳에서 탄생하심(마 1:18-25)

조그마한 마을 나사렛에서 사심(마 2:23)

겸손히 부모님께 순종하며 섬기심(눅 2:51)

하나님이시나 사람에게 세례를 받으심(마 3:13-15)

제자들 중에 섬기는 자로 계심(눅 22:27)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마 21:5-10)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요 13:5-14)

사람들에게 고난과 모욕당하심(마 26:67-68)

성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심(빌 2:8)

(9) 그리스도의 평강

평강의 왕으로 예언됨(사 9:6,7)

십자가 대속 죽음의 결과로 얻음(골 1:20)

세상 것과 같지 않음(요 14:27)

(10) 그리스도의 영광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으심(요 17:22)

창세 전부터 가졌던 것임(요 17:5)

구약에서부터 계시되어져 옴(요 12:41)

성육신하시어 인간 가운데 나타내심(요 1:1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요 17:1,4,5)

스스로 자기 영광을 구치 않으심(요 8:50)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심(눅 9:32)

표적으로써 나타내심(요 2:11)

그의 고난은 영광받기 위한 것임(히 2:9)

영광 가운데서 승천하심(딤전 3:16)

하늘에서 영광 받으심(계 5:12)

영광 중에 재림하실 것임(마 25:31)

(11)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주요 묘사

사단에 대한 승리(시 110:1)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시 110:2)

죄에 대한 승리(마 9:6)

죽음에 대한 승리(딤후 1:10)

육체의 연약함에 대한 승리(히 4:15)

세상에 대한 승리(요 17:2)

스스로 지혜있다 여기는 자들에 대한 승리(롬 1:22)

(12) 성도가 찬양할 이유)

만물을 창조하심(시 148:5)

주의 인자하심(시 13:6)

주의 거룩하심(시 99:3,5,9)

주의 위대하심(사 24:14)

하나님의 역사(시 9:1,2)

하나님의 구원(사 61:3)

하나님의 지혜(롬 11:33)

주의 도와 주심(시 28:7)

기도에 응답하심(시 66:20)

주의 지혜와 권능(단 2:20)

기이한 일 행하심(시 107:8)

마땅히 할 바임(시 33:1)

5. 종려 주일 기념 예배 설교 자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막 11:1-10)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은 승리와 영광을 상징하는 종려 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의 입성을 환영하였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는 어떤 분인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① 평화의 왕이십니다(엡 2:4) – 하나님의 원수되었던 인류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죄로 인해 생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심으로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② 희생의 왕이십니다(갈 1:4) – 나귀를 타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고난의 사역을 완성하신 주님은 희생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끝까지 겸손한 자세로 사역을 감당하시고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철저히 희생하심으로써 온 인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③ 만왕의 왕이십니다(9,10절) –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왜냐하면 그의 구속 대상에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버려졌던 모든 이방인들, 즉 신약 성도들인 현재의 우리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 설교] 예수님의 마음을, 박조준 목사

종려주일 설교, 빌립보서 2장, 예수님의 마음을, 박조준 목사 설교

빌2:1~11, 예수님의 마음을 , 갈보리교회/박조준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대환영을 한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하고,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주일’이라고도 하는 날입니다. 언제인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마는, 특별히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이 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고 그 주님의 마음을 우리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귀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이 시간 생각하는 가운데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라는 말의 뜻을 우리가 잘 압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저 ‘부드러운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둘기 모양으로 임한 것은 비둘기의 순결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둘기의 온유한 성품을 표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증거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소개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어린양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이란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냥 빈손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양을 잡아 피를 흘리고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모습 가운데서 온유한 성품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양은 본래 그 성품이 온유합니다. 그래서 성품이 유순한 사람을 가리켜 양과 같이 순한 분이라고 합니다. 양은 다른 짐승에게 해를 당하는 일은 있어도 다른 짐승을 해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거기서도 메시야를 가리켜 “양이 털 깎는 자 앞에 입을 열지 아니함같이 잠잠하였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의 예언을 인용했는데,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하면서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나타낸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보통 심지가 꺼져 가면 아주 비벼 꺼버리고 맙니다. 갈대가 상하면 아예 짓밟아 꺾어버리고 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하시기 때문에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보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보내는 나중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너희를 친히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주님을 생각할 때 그 온유한 마음을 생각한 것입니다..사도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할 때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온유한 마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약한 분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강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온유한 마음의 소유자이셨습니다.

옛날 초대교회 때에 예수님을 그린 것을 보면 보통 양을 품에 안고 있는 목자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목자처럼 온유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아기 엄마들은 예수님이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축복해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에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린애들은 조용하지를 못합니다. 시끄럽습니다. 떠들어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생각에는 어린애들이 가까이 오는 것이 시끄럽게 보여서 귀찮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하늘나라에 있는 자들이 바로 이런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고, 어린아이를 영접하고, 그 어린애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어떤 때는 문둥병자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서 어루만져달라는 요청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친히 손을 내 밀어 그 더러운 문둥병자를 어루만져주시고 고쳐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실 때입니다. 두 사람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들이 멀리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고 주님께 가까이 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면서 소리질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따라오고 또 바쁜 행차인데 맹인들이 소리지르니까 시끄럽다고, 떠들지 말고 좀 잠잠하라고 야단쳤습니다. 그러나 맹인들은 계속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들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때 예수님은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달려오니까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어이냐?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맹인들이 뭐랬어요? “주여,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들의 간구를 들으신 주님께서는 당장 그들의 눈이 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보실 때 그냥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가 로마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딱한 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셔서 백성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한 것처럼 너희를 품으려 한 적이 몇번이나 되었더냐?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해서 예루살렘이 망할 것인데, 그때는 돌 위에 돌 하나도 겹놓이지 아니할 정도로 다 망해버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붙잡히실 때 옆에 있던 베드로는 홧김에 차고 있던 칼을 빼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다시 칼집에 넣으라고 하시면서, 대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계하시고 조용히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법정에 끌려 다니시면서 많은 곤욕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 베드로가 친히 기록한 대로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잠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못박히실 때에도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성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도 향기를 풍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이 온유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해치는 원수에게까지도 온유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약하셨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담대하셨습니다. 더구나 주님의 온유한 마음은 죄를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 것은 그 온유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산상보훈을 가르치실 때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지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이깁니다. 온유한 사람이 마지막에는 이 땅을 차지합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는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일생을 가만히 돌이켜 살펴보며, 그의 생활 가운데 조금이라도 교만했다든지 자기 자랑을 했다든지 하신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교만한 자취가 전혀 보이지 아니합니다.가령, 예수님이 나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는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가 왕궁에 나지 아니하시고 마구간에 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다고 하지만 마구간에 나신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보다 더 겸손하실 수는 없습니다. 나셔서 처음 누우신 보금자리가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젊어서 하신 생활 가운데도 사실은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으로 볼 때 가난하게 지내셨습니다.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만큼 가난한 사람은 오늘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벌 옷이 없었습니다. 한 벌뿐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옷 한 벌로 사시는 분은 아마 안 계실 것입니다. 갈아입을 것은 있을 것입니다. 겨울 옷 가지고 여름까지 입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벌 옷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생 동안 사귄 사람들을 보면 어부 아니면 농부같이 별로 공부도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세력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교계에 나타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요사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목사들 가운데도 대통령이나 장관과 자리를 같이하면 큰 대접받고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두고두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원수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실 때 빌라도 앞에 선 것 외에는 권력자와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뭐라고 비난했습니까?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나 부자의 친구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 무식한 사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의 친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33년 사시는 동안 사람들에게 보이시는 행동을 좀 달리하신 적이 꼭 한 번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따르는 사람들이 앞서고 뒤서면서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하면서 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좀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세히 보게 되면, 나귀 중에도 제일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유대 나라의 나귀는 우리 한국 나귀보다 더 작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작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이 땅에 거의 닿았을 줄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왕이시지만 겸손한 왕이십니다.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그렇습니다. 제자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사정도 모르고 “누가 우리 가운데 제일 높으냐? 누가 제일 크냐?” 하는 것 때문에 토론이 벌어지게 되고, 기분들이 상해서 아주 어색한 분위기였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는 먼지가 너무 많아서 밖에서 들어올 때면 꼭 발을 씻어야 했는데, 넉넉한 집에서는 종들이 주인의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종이나 하는 일을 하나’ 해서 누구 하나 발을 씻어주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내가 왜 종이나 하는 발을 씻기는 일을 해’ 하고 생각하면서 서로 눈치만 보면서 버티고 앉아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손수 대야에 물을 떠다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네 발을 내 놓으라. 내가 씻겨주마”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하나씩 씻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 되어서 제자들인 너희의 발을 씻겠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이 말씀은 한마디로 “너희도 겸손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높은 분이시지만 그것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더러 겸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멸시의 눈을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비유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서 청산유수처럼 기도를 잘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다 자기를 자랑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하늘을 향해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기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겸손하게 기도하는 세리의 기도는 받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겠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사야 57장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거룩한 곳에 거처를 삼으셨지만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겸손한 심령을 부흥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겸손을 최고의 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지혜와 어진 것, 그리고 용기를 덕으로 생각합니다. 서양의 윤리를 보아도 이 세 가지에 ‘절제’ 하나를 더해서 소위 4덕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면서 겸손을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르친 것만 아니고 예수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의 도, 종의 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기독교 사상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덕을 말하면서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한 말은 의미 깊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던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 준비했던 형틀에 자기가 목이 매달려 죽고 말았습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아주 교만해서 자기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것을 건설했다고 장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지 얼마 안되어 정신이 나가 미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들로 나가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머리털은 독수리 머리털처럼 되었다가 죽어버렸습니다. 벨사살 왕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빼앗아온 기명으로 고관대작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가, 바로 그날 밤 메대와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 베사살 왕을 죽였고 그 나라는 완전히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잠언에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의 어머니입니다. 교만하므로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개인이나 나라나 반드시 망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교만할 조건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인데, 어떻게 받지 않은 것처럼 교만할 수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교만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옵니다.그 가운데 제일 위대한 사람이 누굽니까? 아마 모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신약성경 중에도 예수님을 제외하고 누가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도 예수 믿기 전에는 아주 강퍅하고 교만했었습니다. 자기 이상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없다고 교만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믿지 않는 사람은 쫓아다니며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한 다음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주 겸손해졌습니다. 그의 신앙은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가 있었고 놀라운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할 정도로 겸손해졌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의 마음은 용서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여러분, 용서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얼마나 강퍅합니까? 사막과 광야 같아서 나무들이 가시가 돋쳤고 건드리면 찌르고 고통을 줍니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꼭 품으면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백합이 찔리면 향기를 더 발하는 것처럼, 우리가 찔리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우리 하나 하나가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초대하는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by 코이네 자료실

3월28일 종려주일, 주일설교 원고

마가복음 11:1-11

주님과 동행하는 길

1. 사순절기의 끝자락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 지키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2. 복음서에 보면, 요한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다른 복음서에서는 “나뭇가지”로 기록하고 있으니, 종려주일은 요한복음의 전통을 따라서 지키게 된 “절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4. 나뭇가지든, 종려나무 가지든,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마지막 길에 함께 한 것들입니다.

5. 오늘 말씀 이전에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셨던 지역은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아마 오늘날로 치면 변방 중의 변방,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소외된 지역의 상징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6.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서 보내셨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는 유월절 명절일 때 매년 가셨을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 특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이날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으로 왔을 테니, 예수님도 그리했을 것입니다.

7. 그런데, 오늘 등장하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특별합니다. 만약 이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리에 머무시고 그 근처에서만 말씀을 전하셨다면, 그렇게 유대교 지도자들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었고,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시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8. 그러니,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 개인에게도 큰 변화의 길 위에서 계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숨 막히는 결정적인 사건이 오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가시는 그 길에 끝이 어떤 상황으로 자신을 이끌고 갈지도 잘 아셨을 것입니다.

9. 다른 때와 달리 당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정면승부처럼 느꼈을지 모릅니다. 멀리서 들리던 예수님의 소문이 실제로 유대교 중심인 예루살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황에 예수님은 곧바로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협조자들에 의해 곧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10.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라고 소개된 곳은,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근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길을 나섰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마중 나온 곳이 벳바게 입니다.

11.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셔서 마침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나사로에게는 기적이었지만, 마리아와 마르다에게도 은혜였지만, 이 사건 더욱 예수님을 십자가처형으로 몰고 가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12. 그러니, 이런 정황 속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이 타고 가신 것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겉옷을 거리에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며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외쳤습니다.

14.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시는 그 길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뭇가지를 흔들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세상은 세상의 왕으로 예수님이 오실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15.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로를 살리신 소식이 마침 예루살렘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크게 소문이 났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 때문에 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수를 죽여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 것도 바로 이 사건 이후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16. 사람들이 몰려들 때, 예수님의 말 한마디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이 “밀알처럼 썩어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것은 곧 죽음과 고통의 길을 함께 가야한다”고 말씀하시고 무리들 가운데서 사라지셨습니다.

17. 이렇게 연결해 보면, 작은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은 “세상의 수많은 요구에 대한 거부”라는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18. 제자들 중에서는 실제로 예수님의 인기를 몰아서 세상을 뒤집어 엎을 힘을 기대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몰려든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을 마치 자기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실마리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19. 그런데, 그런 자들, 그들의 욕망이 충만할 때,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20. “세상의 욕망의 끝인 세상의 권세 있는 왕”에 대한 기대에 예수님은 “어린 나귀”로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 사람들이 몰려들고, 예수님을 세상이 주목할 때, 예수님은 앞으로 가실 “길”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길을 가면, 십자가로 자신의 삶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22. 그런데 그 길을 가시는데, 적당히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그 길을 가시면 편안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기대한 모습으로 들어가면 “그 길”을 피할지도 모르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의 요구에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준비된 길”로 가셨습니다.

23. 이 길 위에 우리들이 깊이 읽어야 할 말씀이 또 있습니다.

24.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에 보면, 바울이 고백하는 예수님이 가신 길에 대한 고백이 깊게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고백은 당시 초대교회가 노래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인데,

25. 빌립보서 2장 6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26.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길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음에도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을 당연히 생각지 않으셨다고”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27. 이어지는 말씀에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28. 바울의 이 고백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더 확고해졌을 것입니다.

29.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이라고 외치는 시간을 지나왔는데, 예수님은 그 공간을 스치듯 지나고 결국 하나님이 준비할 길로 향해 가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30. 사람들은 쉽게 인정합니다. 힘과 권력이 당연히 삶의 목적일 수 있다고들 생각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히려 거꾸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31. 바울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을 세상의 정점으로 나아가는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그랬고,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그 길을 바르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32. 그런데, 어느 순간, 사도행전에서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때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3. 예전에 교회학교 선생님 중에 ROTC 장교로 복무하셨던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대대장에게 한창 인정받고 있을 때, 대대 야간 행군을 이끄는 책임을 맡았다고 합니다. 미리 답사를 다녀온 후에, 한밤중에 대대를 이끌고 야간 행군을 나섰습니다. 모든 대대가 이 선생님의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밤길을 행군했습니다. 거의 목적지 고지에 이르렀을 때, 이 선생님이 문제가 발생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34.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산을 올라서 거의 정상에 올라온 것입니다.

35. 급한 마음에 대대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이 산이 아닌가 봅니다~”

36. 그 때 이후로 대대장의 신뢰는 무너지고 제대할 날만 기다리다 군생활을 마쳤다고 합니다.

37. 잘 못된 길을 가면, 돌아서 다시 가야합니다.

38. 바울은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잘 못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신 방향으로 삶을 정했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왕이라고 환호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몰려들 때 오히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에 바울도 동참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39.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방향은 스스로를 죽이셔서 우리를 통해 열매 맺는 것임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율법에 매몰된 신앙생활에 생명을 일으키는 방법은 세상 모두가 가려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향,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40.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에 함께 동행한다는 의미이고, 바울이 결심한 그 길에 동역자로서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41. 예수님의 그 길에 바울이 함께한 것처럼 우리들도 함께 그 길 위에 있습니다.

42.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방향에 몸과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과 동떨어져 우리들만 잘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듯,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에이전트, 또는 도구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43. 지난 주간, 연회에서 아시안 혐오와 차별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감독님과 몇몇 아시안 목사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고난 주간, 수요일 저녁 7시에 함께 예배하기로 했습니다.

44. 그때 나눈 대화 중에,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 즉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하고, 그 변화의 노력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서로 권면했습니다.

45. 개인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차별과 혐오의 문제는 세상이 정한 잘못된 방향에서 비롯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 이기주의와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결은 자신이 아닌 다른 타자를 통해 해결하려는 심리는 감히 인간이 인간을 가볍게 여기는 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끌고 갑니다.

46. 우리는 절대로 이런 삶의 방향을 반대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할 길, 바울이 삶의 방향을 바꿔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한 길이 바로 이런 방향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길 위에서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47. 종려 주일입니다. 곧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이 시점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께 환호했던 그때를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되짚어 보며 보내는 시간입니다.

48. 예수님이 가신 길은 우리들의 욕망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라도, 세상의 주목이 사라질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을 가셨다는 것입니다.

49. 신앙생활은 그리고 이 생활을 통해 우리들이 가야 할 길 그 너머에는 “내 소망과 꿈, 기대가 실현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배하면서 기대하는 그 너머의 길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그 자리에 거룩한 도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몸과 영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50.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각자 주어진 그 길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자리, 직장이나 생업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길로 우리를 부르셨는데,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신앙생활의 길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이 공동체에서 우리들이 가야할 길은 그 너머의 길은 “주님이 마련하신 그 길”입니다. 내 생각, 내 기대 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온 맘과 온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신앙생활의 길입니다.

51.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기쁘고 좋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 익숙한 시대에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를 낮고 낮은 자리로 몰아놓고 숨죽여 하나님의 뜻, 그리고 준비된 길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52. 거룩한 그 시간에 몸과 마음으로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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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호산나를 부르는 사람들

성경본문

이사야서 54:7-10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분노가 북받쳐서 나의 얼굴을 너에게서 잠시 가렸으나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 너의 속량자인 나 주의 말이다. 노아 때에,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내가 약속하였다. 이제, 나는 너에게 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너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겠다. 비록 산들이 옮겨지고 언덕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은총이 너에게서 떠나지 않으며, 평화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겠다.” 너를 가엾게 여기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아멘.

빌립보서 2:5-11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아멘.

요한복음서 12:12-19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아멘.

설교문

오늘은 호산나를 외치는 종려주일입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불렀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5일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다음 주일 새벽에 부활하십니다. 죽음을 시작하는 이스라엘의 왕, 온 백성의 왕이 오늘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이 이 왕을 보고 호산나하며 환영합니다. 호산나는 오늘만 외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축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항상 불렀습니다. 호산나는 주님, 우리를 살려 주세요.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세요 라는 뜻인데 이 말을 우리의 언어로는 “만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세를 부르는 백성들이 오늘 예수를 환영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인 요한복음에 보면 호산나 외칠 때 두 가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라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고 할 때 이 말은 하나님 찬양하자는 뜻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가 구원받고 기뻐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소서라는 말이며, 이 뜻이 호산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면 하나님은 당연히 영광 받으십니다. 저에게 복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하나님 영광 받으십시오 하는 기도가 훨씬 차원 높은 인간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정말 구할 기도가 있으면 간구하기 전에 하나님 영광 받으십시오 라고 기도하십시오.

온 백성에게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분의 이름이 메시아입니다. 백성들은 메시아로 오신 그분에게 복 받으세요, 영광 받으세요, 우리를 구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민족적으로, 정치적으로 한 분의 메시아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분은 다윗 임금입니다. 다윗 임금 때처럼 지금 우리의 로마 식민지를 거두어 주시고, 자유도 베풀어 주시고, 독립도 주시고,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주십시오. 백성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라는 말 속에 자신의 두 희망을 모두 표출합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메시아 오시는 이야기이며,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이야기입니다. 다만 둘 사이의 차이는 구약은 메시아, 신약은 그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신구약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구약시대에는 메시아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호산나 메시야, 호산나 그리스도! 이 두 분은 그분들이 하신 구원의 일을 통해 우리에게 영광 받으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아 이야기를 잘 모아놓은 책이 오늘 함께 봉독한 이사야서입니다.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은《메시아》를 작곡할 때 이사야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이사야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뺀 예수님의 이야기를 압축적이지만 아주 장엄하게 써 놓은 기도형 시입니다. 물론 다른 성경구절도 많이 있습니다만 특히 이사야서는 압축된 구절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도 헨델이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받고 이사야를 대본 삼아서 메시아 곡을 썼을 것입니다. 이 곡은 오라토리오 대서사시입니다. 출생 이야기, 고난 받은 이야기, 죽지 않고 살아서 승리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메시아 이야기를 듣고 싶으시면 헨델의《메시아》듣고 감동 받으십시오. 아주 훌륭한 해설서라고 생각합니다.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의 희망은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시면 당신은 영광 받으십시오 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 잠시 너희를 버렸지만 내가 큰 은혜를 베풀어 너희를 감싸 안겠다. 염려하지 마라. 내가 간다. 이 이야기가 호산나를 외치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가 오시면 백성들에게 어떤 구원을 베푸실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임신을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있느냐. 얼마나 힘들고 사회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살기가 고통스럽냐. 염려하지 마라. 해산의 수고를 경험하지 못한 여인들아 너무 고난 속에 빠지지 마라. 너희들은 엄청난 자녀를 낳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을 것이다. 메시아가 너희를 버린 남편이 아닌 너희를 용서하고 끌어안을 새로운 남편을 주신단다. 아니 메시아가 그대들의 남편이 대신단다. 그 메시아의 이름은 전능하신 주님이시다. 사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만 가지고 괴로워하지 말고, 침체되지 마라. 하나님 메시아의 역사는 세상의 관습을 넘고 세상의 뜻을 넘어서는 기적과 같은 기쁨의 역사를 만들어 주신다. 이사야 선지자가 다시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오시면 불쌍한 여인도, 계모가 자식을 죽이는 것과 같이 아이를 낳고 죽이는 세상에서 죽어가는 모든 불쌍한 아이들이, 불쌍한 여인들이, 아니면 종족주의 때문에, 여러 어려움 때문에 짓밟히는 수많은 남성, 청년, 노년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가 오시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구원을 받는다. 그 사람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그 사람의 남편은 하나님이시고, 그 사람의 아내도 하나님이시며, 그 사람의 자식도 하나님이시 때문이다. 하나님이 메시아란 이름으로 오셔서 세상을 완전히 구원하신다. 그 메시아 오심을 기다립니다. 메시아 신앙은 이렇게 싹텄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메시야 당신에게 복이 있으며,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옵소서.

오늘은 주일입니다. 이틀 전 예루살렘에서 걸어서 한 시간쯤 되는 거리에 있는 베다리라는 동네에서 예수께서 큰일을 벌이셨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를 사모했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던 곳으로, 그 가족의 버팀목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가족이 슬픔 가운데 있었습니다. 온 동네도 슬퍼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시다가 나사로의 죽음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나사로는 죽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지금 자고 있다. 그 영광을 보여주마. 예수는 나흘 동안 무덤 가운데 있었던 나사로를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랬더니 나사로가 무덤을 통해 나옵니다. 과부에게, 어린자식에게,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남편이 되어주고, 아버지가 되어 주어야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예수를 통해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이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온 소문이 세상에 퍼졌을 것입니다.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던 예루살렘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구약의 예언을 아는 사람들, 베다니 기적의 사건을 소문으로 들었던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메시아로 등극하는 예수를 맞습니다. 그 메시아를 맞기 위해 가장 최고의 선물인 종려나무 가지를 길바닥에 뿌립니다. 메시아인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 받으옵소서. 그 사람들은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 망해 가는 나라도 사시 세우시는 분, 무너진 집도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슬픔의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베다니에서 있었던 사건이 사람들을 움직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당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또 하나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만 구하지 마시고, 우리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우리 민족도 구원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다 흩어져있을때 다윗 임금을 통해 통일왕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윗 왕의 자손인 당신이 오셔서 이 땅에 평화를 주옵소서. 독립을 주옵소서. 자유도 주옵소서. 두 가지 기도의 제목이 오늘 호산나 외침 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호산나는 기도입니다. 삶의 외침입니다. 호산나는 희망의 결집입니다. 호산나, 이 땅을 하나님나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께서는 이런 희망을 갖고 오늘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승전가를 부르며 말을 타고 오셔야 하는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마병을 이끌고 승리한 장군처럼 큰 기마를 타고 오셔야 하는데 메시아는 그런 식으로 오지 않으십니다. 말 대신 어린 나귀를 타고, 투구와 갑옷을 입은 장군의 모습이 아닌 허름한 옷을 입은 작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 모습을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처럼 훌륭하고 전지전능하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그걸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오셔서 가장 못생긴, 가장 낮은, 가장 힘들게 살아가는, 가장 아파하는 사람의 모습이 되셔서 오늘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 메시아는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높은 곳에 계시지만 아주 낮은 사람이 되어서 오셨습니다. 그 메시아인 예수가 아주 힘없는 사람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 당시 두 가지 희망을 말했습니다. 혹시 입성하셔서 목표지점이 예루살렘 성전입니까, 아니면 로마 제국의 총독이 살던 안토니오 궁전입니까? 백성들의 희망은 메시아가 오셔서 왕권을 완전히 쓸어버리고, 새로운 독립 국가를 선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젤롯당 출신인 가롯유다의 희망은 예수께서 왕국을 향해서 갈 것이고, 완전히 뒤집을 것이며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라 실망해 예수를 팔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전으로 가 완전히 뒤집고, 썩어빠진 교회, 썩어빠진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말만 있고 실행이 없는 집, 장사꾼으로 바뀐 타락한 성전을 완전히 뒤집고 새로운 성전으로 만들자. 둘 중에 한 곳으로 갈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두 곳 모두 갔습니다. 궁전으로 가 빌라도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궁전을 뒤집은 것이 아니라 궁전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도 들어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셔서 도둑들아 하고 소리치면서 성전을 다 뒤집고 나서 내가 이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시며 성전을 엎은 것이 아니라 말만하고 나오셨습니다. 메시아로 등극한 예수는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가실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 밖으로 쫓겨나 해골이라 이름하는 골고다 언덕에 올라 가셨으며 그곳이 종착점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옆구리에 창도 찔리셨습니다. 피로 흘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진실은 가장 낮은 자가 가는 가장 처참한 죽음의 현장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이며, 이분이 메시아입니다. 백성들은 얼마나 실망해 겠습니까. 메시아를 맞았던 종려주일의 첫 출발과 예수께서 죽으신 골고다 언덕에서의 마지막 메시아, 두 메시아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두 모습이 똑같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사람과 똑같은 운명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운명, 즉 죽음을 같이 죽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벗어나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람과 똑같은 운명으로 함께 고난 받아서 사는 사람, 그것이 예수님의 목적지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이 다시 생겨납니다. 죽은 자를, 사람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를, 아픔의 역사를 다시 뒤집어엎으시고 부활의 새 역사를 만들어 주십니다. 부활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계획하십니다. 죄 된 인간으로는 죄를 다 없애지 않고는 그 인간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줄 수 없다. 안토니오 궁전이, 로마 궁전이 굉장하지만 죄악과 불의가 있는 곳에는 죄악과 불의를 없애지 않고서는 그 곳에 하나님나라를 만들 수 없다. 성전이 귀중하지만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니라 교권에 매이고, 부정에 매이고, 쓸데없는 것에 매이는 교회는, 성전은 하나님 나라 성전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무너뜨려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인간의 진심 속에 하늘 씨앗을 뿌릴 수 있지만 그 씨앗도 옥토에서만 자란다. 딱딱한 땅, 죄로 묶인 곳에서는 자랄 수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늘나라 세우고 청소하시려고, 성전을 정화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역사의 부조리를 다 없애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 메시아 왕국은 그곳에만 세워집니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에게 메시아 왕국의 주인이 되게 하시려고 대신 죄악을 지시고 없애 주셨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로마제국을 포함한 온 세상의 불의한 권력을 없애주시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려고 십자가에서 궁전도 끌어안고 죽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의 타락한 성전도 끌어안고 죽으셨습니다. 죽으시고 완전히 판을 바꾸어서 바뀐 판 속에 용서 받은 인간, 용서 받은 국가, 용서 받은 체제에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웁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골고다 언덕이고, 그곳에서 죽고, 모든 바탕을 새롭게 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뜻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 어떤 호산나를 외치고 싶으십니까? 진실로 구원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 나라를 세울 마음 속 깊은 곳에 바탕을 새로 마련하십시오. 예수님 말씀이 회개함 없이 하늘나라는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없애지 않고 그곳에 새로운 선의 나라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사항 일뿐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나는 사람이 되어, 세상이 되어, 자연이 되어 온 세계 현실이 이 땅에 왔다. 함께 죽자.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그대들 속에, 내 속에, 온 세상에 세우자. 그것이 부활의 선물입니다. 오늘 부활의 나라 원하시지요. 부활의 축복 원하시지요. 이를 위해 버릴 것은 버립시다.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읍시다. 없애 것은 없애시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세상, 새 사람을 통해서 부활을 주신답니다. 그것을 선물로 받으십시다. 온갖 질병도 내려놓읍시다. 새로운 치유의 역사도 받읍시다. 새 것,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만납시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금주 내내 회개하고, 주일날 함께 모입시다. 아멘.

하은규의 종려주일 설교

생각 나누기칼럼/기고/강연 하은규의 종려주일 설교 종려 주일(Palm Sunday)·사순절(Lent) 편집부 | [email protected] 승인 2013.03.24 09:03:21 “바보들의 축제” (The Feast of Fools) 구약의 말씀: 스가랴 9:9-10, 신약의 말씀: 마태복음 21:1-11 하은규 목사(한알의 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교회) [서론] 종려주일(Palm Sunday): 메시아적 평화의 증언 (1) “내가 에브라임(평양)에서 병거(핵무기와 미사일)를 없애고, 예루살렘(서울)에서 군마(모든 무기와 전쟁 장비)를 없애며, 전쟁할 때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온 세상)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리심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강(한강)에서 땅 끝 까지 이를 것이다.”(스가랴 9:10)

(2) 오늘 주일은 고난 주간(Holy Week)이 시작하는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실 때, 무리들이 앞서고 뒤서며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메시아, 왕으로서 입성하는 것으로 축제를 벌이며 예언자 스가랴가 그의 비전 가운데서 본 온 세상에 이루어질 메시아적 평화의 현실을 고대하며,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외치고, 환호하며 절규한 것을 기리는 주일입니다.

그로부터 20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이 부활주일을 기다리며, 함께 모여서 구약성서 스가랴 9장 9-10절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삶에 일어난 한 사건을 기리는 –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까요?

[1] “바보들의 축제”(The Feast of Fools)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때의 역사로 돌아가서 우리 모두 한번 그때의 정황을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는 무리 가운데는 대제사장,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의 권력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는 무리 가운데는 헤롯 당파와 산헤드린(Sanhedrin: 당시 최고 의결 기구인 70인 의회)의 의원들과 같은 정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는 무리는 권력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그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어중이떠중이 들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그는 권력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30대 초반의 청년으로서, 나귀를 타고 마치 왕인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어중이떠중이 민중들의 환호와 절규를 앞뒤로 하고 입성하고 계십니다. 로마의 황제와 장군들은 백마를 타고, 휘황찬란하게 장식을 한 군병들을 앞뒤로 하고, 양탄자를 밟고, 보무당당하게 행진하는데, 예수님이 타신 나귀의 발아래는 민중들이 깔아놓은 때와 냄새에 절은 겉옷들만이 널려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높은 자리에서 정치적, 종교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내려다본다면 그야말로 “바보들의 축제”의 모습일 것입니다. (3) 유럽의 중세 때에 “바보들의 축제”(The Feast of Fools)라는 요란스러운 축제와 행진이 있었다고 합니다. 억압을 받던 민중들이 지배 계층의 권력자들과 종교 지도자들, 심지어는 교황과 주교, 감독들을 풍자해서, 이상스러운 옷들과 가면을 쓰고 조롱함으로써, 자신들을 억누르는 억압과 착취의 일상성으로부터 해방을 체험하는 행사였습니다. 이런 “바보들의 축제”가 종교개혁 시대를 즈음하여 사라짐으로써 전제 군주의 등장과 독재가 시작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합니다. (4) 우리나라에서도 안동의 하회(河回) 마을에 보존되어 있는 “탈춤”을 통하여 양반과 부자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함으로, 그들의 삶을 억누르던 정치, 경제, 사회의 부조리로부터 해방을 체험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탈춤은“바보들의 축제”의 바로 한국판(版)의 모습일 것입니다. (5) 유럽의 “바보들의 축제”나 우리나라의 “탈춤”의 뿌리가 바로 우리가 오늘 드리는 종려주일의 사건에 있습니다. 종려주일의 사건 한가운데는 어떤 예기하는 미래로부터 오는 근원적 현실이, 억압의 일상성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의 현실에 가져다주는 “선취(先取)하는 해방”(a proleptic liberation)의 힘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 해방과 자유와 구원의 힘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의 사건 한가운데는 예수가 종말론적으로 가져다주실 구원이 현재화 되고, 그 구원을 무리들이 “호산나! ―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절규하며 갈구하고 있습니다. 대학로 민들레 영토의 시냇가에 심은 나무교회 움직이는 강단 [2]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1) 흔히 인간을 “도구를 쓰는 인간”(homo fabre)라고 말하고, 또는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라고 합니다. 간은 도구를 이용함으로써 노동하며, 문명을 건설합니다. 마르크스(Marx)는 노동(Work)의 신성을 가르치고, 노동하는 인간의 생산을 통해 얻어지는 부(富)의 공정한 분배를 통한 노동으로부터 소외가 없는 사회정의를 강조했습니다. 루터(Luther)와 칼빈(Calvin) 같은 개혁자들은 노동을 통한 근면을 강조함으로써 자본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사회를 가져오게 했고, 자본주의의 청교도적 윤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은 아퀴나스(Aquinas)나 데카르트(Descartes)를 통해 사유(思惟)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 신학과 철학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2) “도구를 쓰는 인간”(homo fabre)이나 “생각하는 인간”(home sapiens)을 넘어 현대에 와서 후이징가(Johan Huizinga)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이란 책을 통해, 노동과 사유 못지않게 유희(遊戱)가 인간의 한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인간은 놀이(play)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을 실현해 갑니다.

(3)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인 콕스(Harvey Cox)는 “놀이하는 인간”(home ludens)을 더 풀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놀이하는 인간”은 “축제를 즐기는 인간”(homo festivus)이고, “환상(몽상, 꿈)을 가진 인간”(homo fantasia)입니다. 축제는 과거를 기억(memory)하는 일입니다. 어느 사회나 국가의 공휴일(축제)은 과거에 일어난 그 날과 관련된 사건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가령 광복절과 같은 공휴일(축제)은 과거, 나라의 주권을 잃고, 독립을 되찾은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주권을 잃고, 다른 나라에 예속되는 과거의 수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미래를 다짐하는 현재의 축제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축제를 즐기는 인간”(homo festivus)의 단면입니다. 그날에 불꽃을 쏘아올리고, 파티를 엽니다. 환상(몽상, 꿈)은 미래를 기대(anticipation)하는 일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단체, 사회와 국가도 미래의 꿈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보다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 환상은 현재의 그 어떤 고난도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힘을 줍니다. 미래의 빛에서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바로 이런 면이 “환상(몽상, 꿈)을 가진 인간”(homo fantasia)의 모습입니다. [3] 궁극적(최고의) 현실에의 참여(Participation in Supreme Realism)

(1) 종려주일의 사건은 바로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모습입니다. “축제를 즐기는 인간”(homo festivus)과 “환상(몽상, 꿈)을 가진 인간”(homo fantasia)의 모습이 거기에 용해(溶解)되어 있습니다. 그 자신이 시간과 역사의 거리를 극복한 예수가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규정하며 예언자 스가랴가 꿈꾼 메시아의 평화의 궁극적 현실(the supreme Reality)을 그의 행동(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시는) 속에 현실화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모든 불의와 전쟁과 갈등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죄와 죽음의 힘을 이기신 왕으로 군림하고 계십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그러므로 종려주일의 사건은 성서의 문자(文字)로서만 박혀 죽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종려주일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한가운데 그 메시아적 평화가 현재의 사건으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2) 위대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기념비적 대작(masterpiece)인 교회 교의학 (Church Dogmatics)의 “화해론” 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말해줍니다. 바르트가 “화해론”을 쓸 때로부터 백여 년 전에 그의 고향 스위스 바젤(Basel)의 어느 교회의 부목사로 있던 아벨 부크하르트(Abel Burckhardt)는 독일어의 바젤 사투리로 어린이 찬송가를 작곡도 하고 편찬도 했습니다. 그 찬송가들의 가사 속에 크리스마스와 종려주일(Palm Sunday), 성금요일(Good Friday), 부활절(Easter), 승천절(Ascension Day), 성령강림절(Pentecost) 등등, 교회력에 따른 절기(節期, 축제) 때마다 그가 지은 찬송가를 부르면 마치 크리스마스와 종려주일, 성금요일, 부활절 등의 사건이, 자기가 살아가는 바젤에 아주 중요한 일로 다시 일어나는 것 같은 현실감을 느꼈다고 하면서, 어릴 때 아벨 부크하르트 목사의 찬송을 통해 신학의 씨앗이 그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해서, 그에게 헌사(tribute)를 드린다고 적으면서, 바로 크리스챤의 삶은 예수의 사건 속에 일어난 “궁극적(최고의) 현실에 참여”(participation in supreme realism)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3) 우리들은 바로 이와 비슷한 체험을 적어도 크리스마스의 어린이들이 펼치는 연극(play) 속에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성탄극 속에서 목동도 되고, 천사도 되며, 요셉도 되고, 마리아도 되어 아기 예수의 둘레에 모여듭니다. 최소한 그때에, 그 성극(聖劇)에 참여한 모든 어린이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모두 잊어버리고, 일상성의 삶에서 벗어나, 예수의 탄생의 궁극적 현실에 참여합니다. 자기의 존재도 없어지고, 세상의 현실도 없어지고, 예수의 현실에만 그들은 참여합니다. 종려주일 예배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요? 왕으로 오시는 예수의 궁극적 평화의 현실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모두 내버리고, 예수가 다스리는 그 평화와 구원의 현실에 환호하고, 소리 지르며 참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결론] 메시아적 평화의 증언과“선취(先取)된 해방”(a proleptic liberation)의 현실을 누리며···

(1) 종려 주일 예배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사건으로 성서에 문자화(文字化)되고 고착(固着)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환호하며 종려가지를 뒤흔드는 그 무리의 일원이 되어, 우리는 함께 “호산나!”라고 외치고 절규해야 합니다.“호산나!”는 찬양의 노래가 아닙니다.“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탄식의 절규입니다. 그리하여 메시아가 주시는 평화와“선취된 해방”의 현실을 누려야 합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2) 우리는 우리의 실존의 모든 억압으로부터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열등의식과 인정받지 못한다는 원망과 비난, 그 밑바닥에 놓여 있는 죄의 현실과 죽음의 힘으로부터 “선취된 해방”을 누려야 합니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3)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든 현실로부터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돈(맘몬)이 지배하는 사회로부터, 성공의 신화가 다스리는 사회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사회, 하나님의 의와 나라가 이루어지는 사회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취된 해방”의 현실을 실현해야 합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4) 우리가 놓여 있는 국내의 현실로부터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의 사회를 특징짓는 한 단어가 있다면 그 말은‘불안’일 것입니다. 새 정부는 실용주의 가치관을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삼아 국민들의 물질적인 행복과 성공의 기대에 편승하여 물신주의(物神主義)의 가치관을 더욱 퍼뜨리고 있습니다. 진실, 정직, 정의, 사랑과 같은 가치 보다 그 위에 돈의 가치는 더욱 더욱 힘을 더 얻어 가는 사회로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불안과 공허의 마음을 실용의 가치와 돈이 어루만져 고쳐줄 수 있겠습니까?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되어 냉전의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한반도에,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로 인한 위기와, 그것이 평화적인 인공위성이든 혹은 일본과 미국을 노린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이든 간에 로켓 발사 실험을 앞두고 세계는 의혹 가운데 지켜보며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5)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 스가랴 9장 9-10절은 선포하고 있습니다:“내가 에브라임(평양)에서 병거(핵무기와 미사일)를 없애고, 예루살렘(서울)에서 군마(모든 무기와 전쟁 장비)를 없애며, 전쟁할 때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온 세상)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리심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한강) 강에서 땅 끝 까지 이를 것이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함으로서 가져다주신 메시아적 평화의“선취된 해방”의 현실을 우리들은 불안하기만 한 현실 한가운데에 증언하고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와 이 세계가 놓여있는 세계의 현실 한가운데서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호산나)!”라고 외쳐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이루신 메시아의 평화의 증언자들이 되어야합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오늘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오시는 예수가 그의 평화를 이룩하시도록 우리는“선취된 해방”의 현실을 이 세계의 현실 한 가운데서 증언해야 합니다.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6)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하는 종려주일입니다. 나귀를 타고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신 예수님에게는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나의 삶과, 우리 교회의 삶과, 이 세계의 역사의 삶에 종려주일의“축제”와“환상”을 지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가 걸으신 “고난의 길”(via dolorossa)을 함께 걸음으로 이 고난 주간(Holy Week)을 교우 여러분들의 삶을 변하시키는 의미가 가득한 주간으로 맞으시고, 보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관련기사] 하은규의 사순절 묵상 하은규의 고난일 단상 최원영 장로님(1926-2012)을 추모 글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 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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