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루증 여인 의 믿음 | 송태근목사 누가복음 25강 \”혈루증을 앓던 여인\” /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상위 287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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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목사 누가복음 25강 \”혈루증을 앓던 여인\”
본문 – 누가복음 8:40-48
성경읽기는 지루하다? 성경공부는 어렵다? No!
좋은 선생님과 좋은 학생들이 함께 하는 즐거운 성경공부시간!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CBSBible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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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구명상 – 눅8:43-48 (혈루증 여인의 믿음) – 대구성서아카데미

혈루증 여인의 믿음. 눅8:43-48. 어느 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형편의 딱한 사정을 말했습니다. 12살 먹은 딸아이가 죽을 병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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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abia.net

Date Published: 8/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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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루증 여인의 믿음 (9 : 20 – 22)

92 ≈ 혈루증 여인의 믿음 (본문 : 마태복음 9 : 20 – 22) 서 론 :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 말씀에서 한 가련하고 비참한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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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amjoongsori.org

Date Published: 12/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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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 설교 – mission – 혈루증 여인의 믿음 (막 5:21-34)

여러분, 혈루증 여인의 믿음은 주님의 축복을 받아내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사랑의 말씀으로 구원을 선포하셨고, 실제로 불치의 병을 완전히 치유해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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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2/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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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난 사람들(3) 혈루증을 앓던 여인 – Olive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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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live.or.kr

Date Published: 1/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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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혈루증 여인의 믿음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결한 육신의 상태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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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7/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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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25-34 혈루증 여인의 믿음 – 소망의 바다

혈루증 여인의 믿음 막5:25-34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인이 병을 고쳐보려고 많은 의원을 찾아 다녔지만, 많은 괴로움만 받았고 있는 재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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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work.tistory.com

Date Published: 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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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기도 – 혈루증 여인의 믿음 – 아신신학연구소

그러나 믿음 생활(신앙생활)은 현재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믿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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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stsi.org

Date Published: 4/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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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그러나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에게 열두 해는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고난의 세월이었다. … 과연 오늘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 술을 만지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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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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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목사 누가복음 25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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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혈루증 여인 의 믿음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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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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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8:43-48 (혈루증 여인의 믿음)

1995.2.19.

혈루증 여인의 믿음

눅8:43-48

어느 날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에게 와서 자기 형편의 딱한 사정을 말했습니다. 12살 먹은 딸아이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가서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야이로가 왔을 때는 그의 딸이 아직 죽지는 않았는데 중간에서 지체 하다 보니 아예 죽어 버렸고, 나중에 가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중간에서 시간을 지체케 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어떤 여인에 관계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간에 어떤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인데 그 병은 거의 불치에 가까웠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의 뒤에서 그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혈루증이 즉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돌아보시면서 여러 사람들을 향해 “내 몸에 손을 댄 자가 누군가?”라고 물었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한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자, 항상 성질 급하게 행동하던 베드로가 앞에 나와 보충적으로 설명하기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렸기 때문에 떼밀려서 그렇게 된 것이지 누가 일부러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럴듯한 대답이었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서 당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걸로 보아 확실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혈루증이 치료된 여인이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편으로 무서워하면서 사람들 틈에서 빠져 나와 예수님께 그간의 자초지정을 상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이길래 자기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이 여인이 처한 상황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이 여인은 혈루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5:25-34과 마9:20-22에도 병행구로 나오고 있습니다만, 마가복음에 보면 이 여인이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병원에 드나들다가 자기 전 재산을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혈루증은 레위기서 15:19-33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대로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25절 이하의 말씀을 잠간 읽어보도록 합시다. <여인의 피의 유출이 그 불결기 외에 있어서 여러 날이 간다든지 그 유출이 불결기를 지나든지 하면 그 부정을 유출하는 날 동안은 무릇 그 불결한 때와 같이 부정한즉 무릇 그 유출이 있는 날 동안에 그의 눕는 침상은 그에게 불결한 때의 침상과 같고 무릇 그의 앉는 자리도 부정함이 불결의 부정과 같으니 이런 것을 만지는 자는 무릇 부정한즉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가지 부정할 것이요.> 여인의 하혈이 이렇게 엄격하게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12년 동안이나 피가 멈추지 않았으니 그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산을 다 날렸다는 마가의 증언도 사실에 가까운 것이며, 아마 그녀의 남편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12년 동안이나 가까이 갈 수 없는 여자와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찾아올 때 이 여인은 절망의 끝에 도달해 있을 때였습니다. 가정생활도 정상적으로 할 수 없었고 있는 재산도 다 없어진 상태에서 여인의 몸으로는 아무 해결책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이런 절망의 시간에 만들어졌습니다.

이 여인이 경험한 그런 절망의 시간들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 생각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적인 순간의 경험은 우리에게 참된 신앙을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기회를 잘 사용하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에이미 카미카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고자 할 때면 언제나 사탄의 강력한 종인 <절망의 악마>가 먼저 그 사람을 찾아와 그에게 온갖 종류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생각들을 불어넣으려고 애쓴다. 정말은 언제나 아래로 부터 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에 반해 위로는 언제나 위로부터 온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여러 시련과 아픔들, 혹은 절망의 사선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을 얻기 위해서는 일부러라도 절망적인 사건 속에 빠져 들어야 하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내면적인 세계의 눈을 바르게 떠서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의 현실이 절망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아무런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우리의 인생설계가 착착 진행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졌는데 다행히 중간에 뻗어 나온 나뭇가지에 매어 달릴 수 있었습니다. 우물 밑에는 독사들이 득실거리고 위에서는 호랑이가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나그네는 나뭇가지에 핀 꽃 속에서 꿀을 빨아 먹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생쥐들이 나뭇가지를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는가, 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그것이 사실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우리 곁에는 항상 절망의 그림자가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살아가다 만나는 어려운 일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죽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아시안 게임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송성일 선수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무얼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삶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이란 게 별게 있나 다 그런 거지!”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이 설교를 들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2. 혈루증으로 고통 가운데 빠져있던 이 여인은 오직 하나의 희망을 안고 예수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아마 소문으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야이로의 집으로 몰려가고 있는 예수님 일행을 발견하고 그 무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누가 볼까 염려하면서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깃을 손에 댔습니다. 그 즉시로 12년 동안 앓던 혈루증이 깨끗이 치료되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겸손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세입니다. 웬만했으면 12년 동안 병을 앓았기 때문에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그냥 예수님 앞에 넙죽 절하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텐데 이 여자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누가 나의 몸에 손을 댔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도 선듯 나서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할 수 없이 두려워하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뻔뻔스러움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사람 눈치 안보고 무조건 예수님의 이름으로 돌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불의한 재판장을 설득한 어떤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비유를 앞세워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적극적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좋은 말입니다만 그게 심해서 자기를 앞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큰 도시의 지하철이나 역전에서 큰 소리로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외치는 걸 용기로 생각한다면 문제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야밤중에 큰 소리로 기도한다거나, 남이 곤히 자고 있는 시간에 찬송가를 크게 틀어놓는다는 행위가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자기를 드러내는 게 아니가 감추는 것입니다. 소리를 작게 해야 하며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누룩처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순간에 주위를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복음이며 신앙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이 모습을 보고 오늘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자기 자신의 부족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닫게 됩니다. 도저히 자기를 드러낼 자신이 없습니다. 점점 더 겸손해 집니다. 우리는 조금만 마음이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되면 혼자서 세상을 다 구원해 낼 것처럼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이 모두 작아 보입니다. 교만과 용기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혈루증 치료가 마술이 아님을 복음서 기자들이 변호하고자 합니다. 모든 세대, 모든 종족에 이런 병의 치유는 항상 있어왔습니다. 지금도 무당들이 병을 고쳐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일련정종>은 노골적으로 어려운 병에 걸린 사람들만 찾아가서 치료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술이나 사이비 종교에서 말하는 치유는 단순히 치유에만 몰두합니다. 그가 얼마나 윤리적으로 사는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치유는 일종의 마술행위입니다. 복음서에서 증거되고 있는 많은 치유는 그런 것과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 합니다. 조금씩 경우는 다를지라도 환자와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본문의 혈루증 여인의 경우도 그러합니다. 그녀의 믿음은 예수님의 인격과 관계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그녀만이 예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특별한 인격적 관계,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경험이 정말 필요합니다. 이런 것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교회 형식에 충실하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믿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혈루증 여인이 그곳에 왔을 때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으며, 그 여인도 어떤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였고 기껏 가까이 간다는 것이 옷깃에 손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옷깃만 만졌든지 아니면 직접 손을 잡았던지, 혹은 예수님이 그녀에게 안수하였든지 그것은 이 자리에서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유일한 관심을 가졌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능력을 체험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대개 주변적인 일에 너무 관심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누가 회장이 됐는가, 누가 무슨 말을 했는가, 누가 믿음이 있다거나 없다는 그런 식의 일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일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끄고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대로 그런 면을 줄이고 예수님에 대해 집중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합니다. 많은 무리가 이동하고 있었지만 오직 예수님을 향해서만 마음을 쏟았던 혈루증 여인처럼 우리는 그분이 나와 무슨 상관인지 진지하게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할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의지를 가질 때만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은 혈루증 여인을 향해 “평안히 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여인은 이제 평안의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이란 곧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이 여인에게 구원은 혈루증이 치료된 데서 머문 것이 아니라 평안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점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육체적 질병을 치료받거나 집안이 잘되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이 잘못은 아닙니다만 더 중요한 구원의 세계는 영적이고 내면적인 평안입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안정되고 풍요롭게 살려는 것도 역시 내적인 평안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결국 혈루증을 고침받고 나아가 평안의 선물도 받게 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평안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세상 지식으로 살 수 없는 영적인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믿음 (막 5:21-34)

혈루증 여인의 믿음 (막 5:21-34)

오직 예수!

우리 주님은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친히 모진 고통을 담당하셨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죽어가는 어린 아이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에 가득한 고통과 고난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특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의 처지는 딱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병은 만성 출혈증으로서, 당시의 의술로서는 치료가 불가능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고생하며 고쳐보려고 애를 썼지만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아무런 소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포자기하며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이 때 이 여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분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여인은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만나러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 는 생각을 넣어주셨습니다. 여인은 사력을 다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습니다.

그리하여 이 여인이 가진 믿음은 주님의 능력을 이끌어 내었고, 놀랍게도 이 여인은 오랜 불치병으로부터 놓여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은 혈루증 여인을 동정하며 여인의 병 고침 받음을 축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여인의 혈루증과 같은 우리 영혼의 만성 질병이 없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 질병을 찾아내어 진단하고, 예수님께 고침을 받자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 우리는 본문에서 한 연약한 사람 속에 자리잡은 믿음이 어떻게 기적을 체험하게 하고, 그 사람을 어떻게 영웅적인 신앙인으로 만들 수 있는지 그 예를 보게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기적을 체험하는 시간, 믿음의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절망을 이기게 함

혈루증 여인의 믿음은 그에게 닥쳐온 절망적인 환경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절망을 이기는 믿음’ 이었습니다.

26절,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러분! 이 여인의 상태는 한마디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병에 시달려 온 세월이 열 두해였습니다.

12라는 숫자는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곱한 수로서 완전을 상징합니다. 길고 긴 세월 동안 고난 가운데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에도 종종 오진이나 의료사고들이 일어나는데, 당시에는 잘못된 진단이나 비과학적인 진료, 터무니 없이 비싼 치료비 등으로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고통을 주는 경우가 더욱 많았을 것은 자명합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혈루증에 대한 치료 방법으로, 마늘과 같은 식물에 포도주를 섞어 먹였다고 합니다.

또는 환자를 놀라게 하며 ‘너는 혈루에서 일어서라’ 라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이 여인도 많은 의원들에게서 이같은 치료를 받았을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이런 의사들의 치유조차 결과적으로 이 여인을 괴롭게 하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인의 병은 인간적으로는 완전히 치유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26절, 27절에는 여인의 형편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모두 분사형으로 나옵니다. ‘괴로움을 받았고’, ‘허비하였으되’, ‘효험이 없고‘, ’중하였던 차에‘ 등, 네 개의 분사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자신의 병으로 인해 받았었던 고통을 현실감 있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또 그 이후에 계속되는 ‘소문을 듣고’, ‘뒤로 와서’ 등의 분사는 예수님을 찾아온 경위를 설명해줍니다.

26, 27절에서 단 한개의 일반 동사도 사용되지 않고 분사만 여섯 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한 여인이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지난 12년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를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긴 호흡으로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돈도 모두 써버렸습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면서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쳤습니다. 죽음 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절망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은 당시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간주되어 사람들로부터 격리될 수밖에 없는 병이었습니다(레 15:19-33).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 상태였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불치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은 물론, 모든 재산마저 잃고 심지어 사회로부터도 버림받는, 그야말로 마지막 한계상황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더라면 성경의 인물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아 체념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어나 무리 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양 속담에 “결코 절망하지 말라. 절망은 치명적인 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절망은 믿지 않는 데서 오는 병입니다. 성도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절망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에게 닥쳐온 어려움은 어느 정도입니까? 혈루증 여인이 겪었던 절망적인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어떻습니까?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이 있다면 그 어려움이 여러분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주님을 믿음의 손으로 붙잡기만 하면 우리도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서현의 가족들은 절망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적극적인 행동을 하게 함

혈루증 여인은 믿음을 통하여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27절,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 여인이 취한 행동은 확실한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적극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여인은 12년동안이나 하혈을 했습니다. 아마도 주위 사람들이 냄새난다고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적극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냄새난다고 찡그리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옹위하고 있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병이 곧 나았습니다.

“그의 옷에 손을 대니”에서 ‘옷’은 원문 상 ‘옷의 가장자리’ 또는 ‘옷 가’(눅 8:44)를 말합니다.

“손을 댔다”(헵사토)는 말은 부정과거형이므로 옷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단 한 번만 스치듯이 옷 가에 손을 댄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여인의 병이 떠난 것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여인의 믿음과 그녀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인은 육체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3중고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섰습니다. 이것은 여인 속에 주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믿음을 크게 보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여기 ‘이는’ 에 해당하는 접속사 ‘가르’는 ‘왜냐하면 …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됩니다.

사실 여인이 예수께 다가가 그의 옷을 만지려고 하는 행동은 당시로서는 율법이 엄히 금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28절은 여인의 확고한 믿음을 묘사하는 문장입니다.

불치의 병으로 사회와 종교 공동체로부터 따돌림 받고,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불결하고 부정한 여인으로 냉대를 받았을 여인!

이 여인이 이처럼 위험한 행동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스치듯이 옷 가에 손이 닿기만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 등은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순전하고 결사적이었나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함일러라”(엘레겐) 라고 번역한 단어는 반복적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여인은 마음 속으로 ‘내가 그의 옷 가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계속해서 되뇌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적극적인 행동을 가능케 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지고자 하던 사람들은 이 여인 외에도 당시에 많이 있었습니다. 막 3:10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피해 배에 올라서 말씀을 전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주로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에게 탁월한 능력이 있어 그를 만지면 혹시 자기들의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여인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굳은 신뢰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손 만을 댄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간절한 마음과 신실한 믿음을 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34절). 할렐루야!

선교사 허드선 테일러(Hudson Taylor)가 처음 중국에 갈 때였습니다. 범선을 타고 항해하는 중에 식인 섬 해안 가까이 왔을 때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멈추었습니다. 뱃길을 바꿀 틈도 없이 배는 해안선 쪽으로 서서히 떠밀려 가고 있었습니다. 야만인들은 열렬히 축제를 고대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장이 테일러 선교사에게 와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달라고 간절히 원했습니다.

“좋소. 바람을 잡을 수 있도록 돛을 펴시오.”

선장은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돛을 펴는 것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라고 거절했습니다.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돛을 준비하지 않으면 나는 기도하지 않겠소.”

결국 두려움에 떨던 선장이 졌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돛을 올리고 기다렸습니다.

선교사는 특별 기도실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선장이 기도실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습니다.

“아직도 바람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렇소”

“이제 그만해도 되겠습니다. 배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허드선 테일러 선교사 같은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혈루증 여인이 가졌던 적극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기를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스런 형편이 닥쳐왔습니까? 더욱 적극적인 믿음으로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기도를 하더라도 더욱 적극적으로 하십시오.

집회에 참석하시더라도 더욱 적극적으로 하십시오.

전도를 하더라도, 봉사를 하더라도 더욱 적극적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적극적인 믿음을 가질 때 기적이 일어나고, 주님의 능력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3. 믿음 위에 임하는 주님의 축복

이제 이 믿음의 여인에게 베푸신 주님의 축복을 생각해 봅시다. 본서의 저자 마가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문학적이고 신앙적인 내용으로 여인의 치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혈루 근원’에서 ‘근원’에 해당하는 ‘페게’는 샘, 또는 우물이란 뜻입니다. 여인의 혈루증이 무엇 때문에 발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원인이 제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인은 이 사실을 즉각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여인이 자신의 옷 가에 손을 댄 사실을 즉시 아셨습니다. 수많은 접촉 가운데 여인의 행위만을 따로 구별하여 아신 예수님입니다. 여인의 믿음의 행위는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예수님은 여인의 고질병을 단숨에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예수님은 짐짓 엄한 어조로 장본인을 추적하셨습니다. 주님이 누구의 행동인지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사자를 곤혹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당시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 여인을 통해 예수님과 치유 사이의 매개는 오직 믿음 뿐임을 분명히 알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많은 사람 가운데 나오게 하시고 그의 믿음을 강조하심으로써 사람들이 그릇된 길로 나가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정하신 것입니다.

둘째,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여인의 믿음의 간증을 듣게 하여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자발적인 간증을 원하신 것입니다.

여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33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 아시는데 구태어 입으로 고백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마음 속의 생각과 공개적인 고백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인의 고백을 받으신 주님의 흡족한 마음이 다음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앞선 구절(25, 33절)에서 ‘여자’(귀네)라고 소개되어 있는 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께서 직접 사용하신 호칭은 ‘딸’(뒤가테르)이었습니다. 다음 절에 나오는 회당장의 딸을 가리키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신 것을 보면, 예수께서 이 여인을 얼마나 정감 있고 사랑스런 마음으로 부르셨는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에 의해 딸로 불리워진 이 여인은, 외경에 의하면, 후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실 때에 주님의 얼굴에 흘린 땀을 닦을 수건을 드렸고, 예수님 얼굴의 땀을 닦은 그 수건에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혈루증 여인의 믿음은 주님의 축복을 받아내는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사랑의 말씀으로 구원을 선포하셨고, 실제로 불치의 병을 완전히 치유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여인에게서 모든 고통의 그림자를 거두어 주셨고, 심령의 평안과 만족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주님의 축복을 받아내는 믿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여인의 믿음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이 여인이 가진 믿음은 1)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서는 믿음, 2)만인의 따가운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님께 나아와 옷 가에 손을 내미는 적극적인 믿음, 3)그리하여 주님의 관심을 받고 마침내 주님의 치유의 손길을 경험하는 축복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여인의 혈루증과 같은 영혼의 만성 질병이 없습니까?

아무리 고치려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숨은 고질병은 없습니까?

이 여인처럼 적극적인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와 고침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는 데에는 신앙생활의 연조를 따질 것 없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이라도 속히 기적을 가져오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 읽기와 듣기, 공부하기와 묵상하기를 힘쓰는 가운데 우리 속에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어려움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 모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예수님께로 가지고 나아와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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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루증 여인의 믿음 (막5:25~34절)열두해 혈루증 여인에 대한 사건은,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기 위해서 그 집에 가시는 도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여이로와 함께 가실 때,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 중에는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혈루병혈루증은 여성들에게만 나타나는 병으로 생리가 아닌 하혈하는 병입니다. 혈루증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는 병입니다. 혈루병은 당시에는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혈루병에 걸렸다 하면 절망에 이르는 병입니다.레위기서 15:15-30절에 보면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 여겼습니다. 이 병은 의식적으로 불결을 가져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환자와 접촉된 사람이나 물건까지도 다 부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여인의 부정한 하혈은 죄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혈루증, 소위 출혈병을 앓게 되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 바깥으로 쫓겨나 성 바깥에서 살아야 헸습니다. 사람들과 격리되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 병을 앓는 여인은 대개 남편에게도 이혼을 당했습니다. 가족들과도 헤어져야 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혈루병자는 공중 모임, 심지어 성전에 가는 것 까지도 금지되었던 것입니다.(레15장)혈루병자들에게는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도 고통이지만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격리를 당해야 하는 아픔 또한 컸습니다. 여인은 병 자체의 고통과 격리로 인한 외로움, 그리고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았다는 생각으로 인한 심적 고통 등으로 몹시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신앙공동체로부터의 부정한 여인, 혹은 불결한 여인, 천벌을 받은 여인이라는 꼬리표는 이 여인에게 심한 절망감과 수치심을 주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병은 절망과 소외일 것입니다.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26절에 보면, 혈루증 여인이 그 동안 받았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혈루병은 당시의 치료법에 입각해서 말하면, 고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눅 8:43) 혈루병은 절망에 이르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혈루병은 천형으로 여겨졌고, 심지어는 부정한 병으로 규정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당시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음에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돈을 들여서 병원에 갔지만 환자로 가지 못하고 죄인으로 가서 진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괴로움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인은 치료하느라 있던 재산마저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애초부터 치료가 되지 않는 병인데도 12년 동안을 이곳저곳 다녔으니, 가진 돈은 다 허비하였고, 남은 것은 피폐해진 몸과 지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동안 심적, 육적 괴로움만 당하고 가진 모든 재산은 다 허비하고, 병만 더 심해 진 것입니다.혈루증 여인의 믿음①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었습니다.(27절)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이 여인은 절망 중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해서도 소문으로 나마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들었던 소문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수치스런 병으로 고생하던 병자들을 고쳐주신 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 예수님께서 나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함을 선포하신 사건은, 같은 부정한 병을 앓고 있는 그녀에게는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이 여인에게 들려진 예수님에 대한 소문, 이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 사람에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온 인류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믿었습니다.롬10: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여러분들이 믿음을 갖기 원하신다면 예배 시간마다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심으로 매일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여인은 세상 것들에 두었던 모든 소망이 끊어져서 절망 상태에 있을 때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여인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온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질병도 낫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롬10:13-15절에는 구원의 공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전도자를 보내십니다. 전도자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고백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공식입니다.인간 편에서 볼 때 구원은 전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전도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막1:38절)“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 왔노라”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전도-를 위임하셨습니다.(막16:15절)“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도자의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5:18절)“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시는 직책을 주셨으니”그리고 성도들이 전도자의 직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행1:8절)“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가장 큰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전도란, 죄인인 인간들에게, 그래서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믿게 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②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순간 “내가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28절)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능히 죄인을 구원하실 구주로 믿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었습니다.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결한 육신의 상태나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이 낫을 줄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③여인의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한 믿음입니다.여인이 그의 믿음대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는 장애물이 있었습니다.첫째,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에워싸며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뚫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둘째, 율법의 장애물입니다. 여인은 율법에 의해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 찍힌 병자요, 하늘의 천벌을 받은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더욱이 유출병자는 부정하여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만지는 모든 것은 부정이 타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만져서는 안 됩니다. 여인에게 장애물은 율법의 장애물이었습니다.셋째, 자신의 장애물입니다.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피를 흘림으로 몸이 극심한 빈혈로 망가졌고, 뼈만 남은 몸을 이끌고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그러나 여인은 이러한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사력을 다해서, 그리고 마지막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부정한 병으로 사람들과 격리되어야 한다는 정결법을 어겼다는 죄책감과 혹시 자기를 아는 사람들을 만날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육체의 약함이라는 한계를 넘어 예수님께로 가까이 갔습니다. 장벽이 심하게 느껴져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낫다는 생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믿었습니다.(28절)④여인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여인은 소문 그대로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생각뿐인 믿음이 아니었고, 입술만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약 2:17) 믿음을 좇아 행하는 산 믿음이었습니다.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이론적인 그런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사실상, 여인이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데는 가로막는 여러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수치감과 부정적인 생각 등도 극복하기 어려운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장벽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그녀에게는 더 이상 장벽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예수님로 나갔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믿음을 좇아 행동한 여인은 완전히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순간, 12 년간의 한 많은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믿음의 결과①여인의 믿음은 그를 구원했습니다.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순간 혈루 근원이 곧 말라 버렸습니다.(29절) 스스로도 병이 나은 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간 줄 아시고 무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제자들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데 옷에 손을 댄 사람이 한 두 명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행동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인은 두려워하여 떨며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여인은 부정한 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들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율법을 어긴 것 때문에 군중들을 무서워며 떨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말씀드렸습니다.(33절)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구원을 받습니다. 치료를 경험합니다. 인생이 새로워집니다.②예수님께서 여인을 딸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믿음은 이 여인과 예수님을 연결시켰고, 그리고 하나님과의 빼앗길 수 없는 흔들릴 수 없는 관계 속에 들어갔고, 그녀는 하나님의 딸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시작했습니다.또한 예수님께서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께서 여인을 사랑스런 마음으로 부르신 호칭입니다. 여인이 비록 부정에 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들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법을 어기고 예수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은 다른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은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르신 것입니다.③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인에게 그 작은 믿음을 대단히 크게 칭찬하시고 그녀를 축복하셨습니다.④평안을 주었습니다.여인은 “평안히 가라”는 말씀을 통해서, 육체의 병이 낫는 것 이상으로 큰 평안과 격려를 얻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질병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수치심과 서러움이 단숨에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평안히 가라”는 문자적인 뜻은 ‘평안을 향해 가라’입니다. 이제 그녀 앞에는 수치와 고통과 괴로움과 불안 대신에 평안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너는 평안의 땅을 향해 가라. 네 인생은 새로워졌느니라. 약속 의 땅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라는 축복의 메시지입니다.“평안”은 히브리 인사말이며, 고전어에서는 적대적인 무리 사이의 휴전 혹은 적의의 해소라는 뜻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평안”은 전쟁과 다툼에 반대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회복된 올바른 관계, 마음의 평안 또는 고요 등을 의미합니다.평안이 내적인 의미의 것이든 외적인 의미의 것이든 간에 근본적으로 먼저 죄를 용서받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율법이 죄 때문에 양심을 비난하고 두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된 평안을 얻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안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의 결과로서의 주어지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안인 것입니다.⑤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의 병은 ‘천벌’, ‘괴로움’, ‘재앙’ 등의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하신 선언은 여인이 완전히 구원받은 것에 대한 보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을 고침 받으러 온 여인에게 육신은 물론 영혼까지 구원해 주셨습니다.우리에게 여인이 지나온 12년 세월처럼, 완전히 망가져 포기한 인생의 문제가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아야 하겠다는 미미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체 바꾸어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인처럼 예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겨자씨’만큼 만이라도 있다면 그 믿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이 축복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고, 믿음이 평화를 줍니다.

마가복음 5:25-34 혈루증 여인의 믿음

혈루증 여인의 믿음 막5:25-34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인이 병을 고쳐보려고 많은 의원을 찾아 다녔지만, 많은 괴로움만 받았고 있는 재물도 다 허비하였지만 병은 낫기는커녕 더 중하여졌던 때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자기 병이 나으리라 믿고 만져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열 두 해 동안 자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여인이요, 처음에는 돈이 있어 돈에 기대했었지만 돈 떨어지니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여인이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황금 만능주의로 돈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하고 과학과 의학이 발전한다 해도 인간이 병을 정복할 수 없고 죽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소망 없는 이 여인은 예수님 만나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1. 복음을 들었습니다. (25-27절)

1) 세상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26절)

① 재물보다 예수님을 더 믿읍시다. 돈 있을 때는 예수님보다는 돈을 더 믿고 의지하며, 열심히 돈을 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돈은 없어지고 병은 더 중하여 이제는 돈도 없지만 돈이 있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다하다 안되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지 말고 재물 허비하고 손해보고 고생하기 전에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행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

② 인생길에 고난은 언제나 찾아옵니다. 이 고난 앞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여인은 낙심하고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려 병든 몸 가지고 찾아 나섰습니다. 믿는 우리는 어려울수록 더욱 소망가지고 주님께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풍랑이 클수록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음성으로 알고 예수님만 의지합시다.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을 믿읍시다.

(고후1:9)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

2)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27절) 들어야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와서 앉아있어도 귀를 막고 듣지 아니하면 은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왜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 아니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①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축구 경기나 자기가 좋아하는 텔레비죤 연속극을 늦게까지 졸지 않고 보고 잡니다. 노름하는 사람, 노름하면서 자는 것 보았습니까? 상대편이 속이지 아니하는가 하고 눈 크게 뜨고 밤새워 노름하여 눈이 빨개지도록 돈 따려고 자지 아니합니다. 우리 하나님 말씀을 여러분은 연속극 보다 노름하는 것보다 관심이 없기 때문에, 눈 뜨고도 그 생각은 논밭에 있고, 주일날 마음은 남의 집 잔치 집으로 향하여 빨리 끝나야 가겠는데 설교는 왜 이리 길게 하나 합니다.

(잠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

(렘25:4)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

② 가치를 작게 보기 때문입니다. 누가 돈버는 방법을 그것도 억만 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졸던 사람도 눈이 번쩍 떠서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다시 들으려 할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 먹고살기 어려울 때, 떡 이야기만 해도 귀가 번쩍 뜨이고, 제삿날에는 떡 먹고 자려고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자면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떡 보다도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졸고 가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고, 화와 복이 이 말씀에 있다고 믿으면 자던 자도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 돈버는 이야기는 잘 듣지만, 성경에 복 받는 비결이 다 있는데, 그것은 옛날이야기로 알아 말씀을 등 뒤로 돌립니다.

(신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③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목사가 대언(代言)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데 사람의 말로 받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옛날 왕이 말하는데 그 앞에서 졸 수 있습니까? 목이 몇이라도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라는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환상중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고넬료가 하인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왔을 때, 33절에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 라고 하였습니다. 분명 베드로 앞인데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

3) 전하는 전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없는 이 여인에게 누군가 예수님을 전하므로 그가 듣고 예수님께 오게 되었습니다. 나다나엘도 빌립의 전도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하는 자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듣는 중에 믿음이 생겼고 그 믿음은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요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

(롬10: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2. 행하는 믿음 (27-28절)

1) 소문 듣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들었어도 집에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아니합니다. 듣고 끝나는 것은 모래 위에 집 짓는 행위입니다. 설교들을 때는 그 말이 옳다고 또는 참 좋은 말씀이라고 인정할지라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아니하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꿈에 기와집 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꿈속에서는 좋았는데 꿈 깨고 일어나 보면 헛것입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게 하려면 듣고 행합시다.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

2) 예수님 앞에 가는데 장애물을 뛰어넘었습니다.

① 불신의 장애물입니다. 12년 동안 세상 것 다 해 보았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자라보고 놀란 사람 솥 뚜겅만 보아도 놀란다고 지금까지 의원에게 병을 고치려 해보았으나 그때마다 기대는 무너진 여인인데도 예수님께 믿음가지고 왔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안 되었어도 우리 주님은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

② 육신의 장애물입니다. 12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며 병은 더 중하여 졌다했으니 병들어 약한 몸 가지고 예수님께 오는데 지금같이 택시나 자가용이 있는 시대가 아니니 그 여인이 예수님께 가는 것은 온 힘을 다해서 주님께 간 것입니다. 어느 성도는 아프다 하기에 교회 와서 기도하라 했더니 아파서 못 온다고 합니다. 아픈데 병원에는 어떻게 갔느냐고 했더니 택시 타고 갔다고 하기에 그럼 교회도 택시 타고 오면 되지 아니하느냐 했더니 병원은 병원이니까 택시 타고 가지만… 하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병원보다 안 믿는 불신을 봅니다. 이 여인은 의사들로 인하여 지금까지 속았지만 예수님은 자기 병을 치료해 주실 분으로 믿고 몸의 불편의 장애물을 넘어 예수님께 왔습니다.

(잠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

③ 부정한 여인의 장애물입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血漏症)의 (피 흘리는 병) 부정한 여인으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여인으로 더욱 그는 예수님 곁에 가서도 안 되며 더구나 옷을 만져서는 안 되는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 하시고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말할 때, 두려워하여 떤 것은 부정한 여자로서 예수님의 옷을 만진 일과, 만지자 병이 나았으니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두려워하는 경외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존재이지만 긍휼을 힘입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막5: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3) 무리에 섞여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27절)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 만나려 무리 가운데 섞였습니다. 그들과 한 무리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거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부정한 자로 감히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어 예수님 뒤로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본문의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와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도 듣고, 병 고치는 것 구경도하였습니다. 오늘 여기 여인은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예수님과의 접촉이 이루어진 여인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 와서 찬송하고 말씀 듣고 헌금하고 끝나면 가는 것으로 예배를 마치지 말고, 예수님 만나고 가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믿음의 사람 됩시다.

(사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

(계11: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

3.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1)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마태복음 8장6-10에 백부장의 믿음이 소개됩니다. 백부장이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백부장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시면 많은 사람들은, 그리 허락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 가십시다. 그리고 중풍병이니 특별기도로, 안수를 하시되 한번 기도한다고 중풍병인데 낫겠습니까? 적어도 몇 번은 해야지요 하겠지만, 백부장은 ‘주여 !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여기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고 병 나았다는 소문을, 듣지도 보지도 아니했으며, 이치적으로 옷 만진다고 나겠습니까? 어떤 교인은 믿는다고 죽을병이 났나요? 합니다. 이 여인은 28절에”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2) 믿음으로 옷에 손을 댄 것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31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 하되 ”

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가려고 서로 밀다보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자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이 하려는 마음은 얼마나 좋은 마음입니까 ? 옷에 손을 대기까지 가까이 했지만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해서 옷까지 만질 정도로 가까이 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대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교회와 예배드린다고 다 은혜 받는 것이 아니요, 기도하면 다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여인처럼 믿음으로 만져야 합니다.

(약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

② 연결하되 온전히 연결해야합니다. 옛날 바람이 부는 날에는 전기가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것은 선 연결 부분을 지금은 전기선을 겹치게 하고 연결 쇠를 씌우고 압축기로 누르면 한 덩어리가 되어 온전히 연결되지만 옛날에는 한전 공사 직원이 선 연결할 때 손으로 선을 돌려 감아 연결하니 잘 연결된 것 같은데 전기가 통하지 아니해서 바람이 부는 날에는 전기가 왔다 갔다 했습니다. 라디오도 처음에는 소리가 잘나오다가 선을 납땜하여 연결된 것이 잘 접촉이 되지 아니해서 두드리면 나오는 라디오가 많았습니다. 라디오를 열고 쳐다보고 만져 봐도 틀림없이 선이 연결된 것 같은데 실상은 접촉 불량입니다. 그래서 맞아야 듣는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면서 온전히 예수님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선이 연결된 것 같은데 불이 오지 않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계신 것 같은데 어느 때는 불통이 되는 것은, 선이 접촉 불량인 것처럼 온전히 주님 안에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

③ 옷을 믿음 가지고 만져야합니다.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여기 사람이 많아 밀다보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지 누가 고의(故意)로 손을 대었겠습니까? 라고 하였지만 오늘 이 여인은 다른 사람과 고의(故意)로 옷에 손을 대였습니다. 어쩌다 옷에 슬쩍 스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옷에 손을 대였습니다. ‘내가 이 옷에 손만 대어도 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그런 믿음으로 만졌습니다. 예수님이 만지라고 말씀하시지도 아니했으며, 그는 부정한 여인으로 예수님이 들어 주시겠는가 라고 의심하지도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치료해 주실 것을 믿고 만졌습니다. 우리는 기도 할 때 염불하듯이 하지 말고 기도하면 틀림없이 주님이 들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려나 하며, 마치 겸손한 것 같으나 불신의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사40: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

(약1:6-7)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3) 옷을 만졌는데 예수님이 치료했습니다. (30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니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이 나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여인은 옷을 만지면 옷에 신통력이 있어 치료되리라 하고 만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은 옷만 만져도 예수님이 능력이 한이 없으시니 입은 옷에까지 그 능력이 흘러나와 자기 병이 나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안수기도해도 목이 젖혀지도록 누르고, 그것도 모자라 등을 정신 나도록 두드려야 혹시나 병이 나을까 하고, 어느 분은 안수하는 손 끌어다가 아픈 당처(當處) 위에 대는 것을 보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을 만졌으니, 예수님이 쳐다보시지도 아니했지만 주의 능력이 치료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출15:8)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

(마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

4) 예수님의 선언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 ”

① 딸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 딸아’ 라는 말에는 예수님은 그녀를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백성으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되게 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②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구원받은 자에게 하나님은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고 은혜 받으면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평안히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아비의 마음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③ 병에서 놓여 건강할 찌어다. 우리는 병 치료만을 원하고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므로 병보다는 죄가 용서받는 것이 중요하고, 오늘말씀에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하고 다음에 “병에서 놓여 건강할 찌어다” 병으로 고생하더라도 죄 사함과 구원은 받아야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있어서 구원도 받고 병도 났기를 축원합니다.

(마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 “

나의 신년 설교론

지난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에는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설교학 운동’(New Homiletics)이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이란 포스트모더니즘과 여러 가지 사회 문화적 변동에 의해 설교의 권위가 도전받는 상황에서 일어난 설교의 혁신 운동이다. 이 운동은 획기적인 패러다임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것은 듣든지 말든지 무조건 선포만 하면 그만이라고 하는 예전의 권위적이고 조금은 무책임한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 ‘어떻게 하면 들리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나온 운동이다. 왜냐하면 들리지 않는 설교는 설교일 수 없으며,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기 때문(롬 10:17)이다.

서구의 설교학에서 1970년대 이후 기존의 모든 권위가 부정되는 다양한 문화 전통의 흐름 속에서 심각한 강단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제시된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아직도 대부분의 설교들을 소위 ‘삼지창 설교’로 알려진 ‘3대지 설교’ 형식의 명제적이고 논증적인 설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강단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청중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청중도 더 이상 권위적이고 명령적으로 일관하는 설교에 대해 그 귀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이 이런 변화에 민감하지 못하고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는 이미 맞이하고 있는 강단 위기의 높은 파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럽의 교회들처럼 가라앉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새해에 설교자들이 귀납법적이고 이야기 중심이며, 복음을 경험케 하는 ‘새로운 설교학’에 귀를 기울여 새로운 설교학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설교의 형태들에 대해 배우고 시도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새로운 설교학 운동과 다양한 설교의 형태들에 대해 배우고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두 책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주승중, 「성경적 설교의 원리와 실제」(서울: 예배와설교아카데미, 2006). 김운용,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서울: 장신대 출판부, 2004)]. 따라서 필자는 설교의 형식을 귀납적인 방법과 연역적인 방법을 절충하고, 전통적인 해석 설교의 형식에 이야기식 설교를 가미한 설교를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끝부분에서 복음을 경험하는 순간이 무엇인지를 시도해 보았다.

본문 연구

본문 이해를 위한 해석(눅 8:42b~48)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에 대한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보다 크고 긴 이야기들 중에 삽입돼 있다. 왜 그랬을까? 왜 누가는 보다 크고 중요한 이야기인 죽은 자를 살리신 이야기, 즉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의 중간에 이름 없는 부정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삽입한 것일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단 필자는 본문을 읽는 순간에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께서 가실 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눅 8:42b).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이다. 여기에 ‘옹위하다’(개역), ‘밀려들다’(개역개정)라는 ‘쉬네프니곤’의 뜻은 ‘완전히 질식시키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들었는지,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그분을 거의 질식시킬 정도였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자 혈안이 되어 예수님께서 거의 숨도 못 쉴 정도로 몰려들어 그분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를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손을 댄 자를 알 수 있겠느냐(45절)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눅 8:43).

그녀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다. 혈루증이란 여인이 끊임없이 하혈을 하는 일종의 부인병이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다(레 15:25~33).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지는 것도 부정하며, 혈루증을 앓는 자는 성전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남편으로부터 보통 이혼을 당하고, 공중 모임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그녀는 진실로 고통스러운 열두 해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 ‘아무’라는 말은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의사들을 가리키는데, 마가는 그녀가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를 받으면서 많이 견디어야’(막 5:26)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12년 동안 의사들로부터 치료를 받았으나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한 채 가진 재산만 탕진하고 말았다. 그녀는 12년 동안 그렇게 하혈하면서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육체적 고통과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사회적 고통 그리고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종교적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누가가 야이로의 딸을 살린 사건과 오늘 본문의 사건 속에서 똑같이 ‘열두 해’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누가는 두 사건을 함께 소개하면서 똑같이 열두 해라는 기간을 말하고 있을까? 사실 두 사건에 있어서 열두 해라는 기간은 겉으로 드러난 의미는 다르게 보이지만, 그 속의 진정한 의미는 같다. 즉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 있어서 열두 해는 별 걱정 없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아 온 세월이었다. 그러나 혈루증을 앓아온 여인에게 열두 해는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고난의 세월이었다. 이렇게 두 사건에서 겉으로 보이는 열두 해의 의미는 다르지만, 사실 누가가 열두 해라는 숫자를 통해 보여주려는 의미는 같다.

열두 해라는 수사학적 어구는 12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완전수를 의미하는 것처럼, 누가는 열두 해라는 숫자를 통해 두 사건이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절망이 참 소망과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즉 이 사건에서 야이로의 딸의 풍요로운 삶 가운데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는 이제 막 꽃피우려는 어린 소녀의 열두 해를 절망으로 몰아넣었고, 혈루증으로 한 여인을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절망과 고통은 주님의 은혜로 참 소망과 생명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누가는 여기서 12라는 완전수를 통해 그들이 누리게 될 온전한 회복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 8:44).

그녀는 ‘예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다. 이는 그녀가 혈루증으로 인해 부정한 여인이라는 사회적 낙인 때문에 감히 공개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설 수 없는 처지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옷 가’에 해당하는 말은 ‘투 크라스테두 투 히마티우’인데, ‘크라스페두’는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술’을 의미하고 ‘히마티우’는 외투를 뜻한다. 즉 여인은 예수님께서 걸치신 옷자락 끝에 있는 술에 손을 댄 것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선 이것을 ‘fringe of His cloak’라고 분명히 번역한다. 우리 말 성경 새번역도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 술에 손을 대니”(눅 8:44)라고 번역해 원문의 뜻을 충실히 했다.

그 당시 유대인의 겉옷은 네모 반듯하고 머리를 내놓는 구멍이 있었으며, 그 옷의 네 귀에 술을 드리우고 푸른 실로 장식했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이 겉옷에 달린 술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술 달린 옷은 제사장과 같은 권위와 위엄이 있는 사람들이 입었는데, 따라서 이 술은 아무나 만질 수 없었다. 그리고 옷에 달린 술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만지도록 허락을 받았거나 오로지 가족들만 만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 부정한 여인은 해선 안 될 일을 한 것이다. 그녀는 허락도 없이 만져선 안 되는 것을 만진 셈이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 가의 술을 만질 자격이 없었다. 율법에 의하면 그녀의 이런 행동은 예수님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런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런 행동을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정해지지 않고 오히려 여인의 부정을 정결케 하셨다. 곧 그녀의 혈루증은 ‘즉시’ 그치고 말았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눅 8:45).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옷 술에 손을 대었는지 알고 계셨다. 다만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자신을 만진 그 여인이 이제 더 이상 숨지 말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자신을 내보이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선포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과 그녀 사이에 벌어진 놀라운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예수님,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가 밀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만진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그렇다. 실제로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밀고 당기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스치며, 심지어 예수님과 몸을 부딪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 어떤 변화도, 치유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간절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진 그녀에게로만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이 흘러나갔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눅 8:46).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알았다고 말씀하신다. ‘앎이로다’의 원어인 ‘에그논’이란 단어는 시제가 과거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그때, 곧 여인이 자신의 옷 가에 손을 댄 그 시점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많은 신체적 접촉이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참된 믿음의 손을 가진 여인이 있음을 아시고 감격하시고 그녀를 보길 원하신 것이다.

“여자가 … 떨며 나아와 …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눅 8:47).

그녀는 떨고 있었다. 자신이 부정한 여인으로서 허락도 없이 예수님을 만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뒤로 와서 몰래 만졌던 것이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 분명히 책망받을 만했고 비난받을 만했다. 그래서 그녀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무안을 당하고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는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에게서 학대당했고 의사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했으며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멸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모든 것들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만지는 즉시 병이 나았다는 것을 만인 앞에 고백했다는 사실이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8:48).

여기서 ‘딸아’라는 단어는 ‘뒤가테르’인데, 이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부르는 호칭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표현되고 있으며,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딸을 향해 표현한 단어와 같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 같은 호칭으로 부르신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야이로가 당장 죽어가고 있는 외동딸을 향해 한없는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부르는 ‘딸’이라는 그 단어, 그 딸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고 아픔이기에 회당장이라는 체면도 모두 팽개치고 시골 출신 청년 랍비에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바로 그 심정으로 부르는 ‘딸’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 부정했던 여인을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딸’이라는 한 마디 속에 예수님께서 이미 그녀의 불손한 행동을 용서하시고, 자신을 만질 자격이 있음을 인정해 주신 것이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고 용서할 뿐 아니라, 언제라도 나를 만질 수 있는 나의 가족으로 너를 이미 받아들였다’라는 것이다. 즉 이 호칭은 여인이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모두에게 선포하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는 말이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경험하게 된다.

본문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에서 한없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으면서 온갖 종류의 고통을 당하던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도 수많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도 예수님의 주변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주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교회로 몰려든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사실 이런 모습들은 우리가 주님께 손을 대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새벽 기도 시간에 혹은 매주일 주님 앞에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예수님께 손을 대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믿음으로 손을 대는 것은 아니다. 과연 오늘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 술을 만지며, 그분이 주시는 기쁨과 치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런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죄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고통과 문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딸아’, ‘아들아’라고 불러주신다.

설교문

예수님의 가족이 된 여인(눅 8:42b~48)

들어가는 말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이 들어 있는 누가복음 8장에는 예수님의 사역, 교훈, 천지를 잔잔케 하신 이야기, 무엇보다 죽은 자를 살리신 놀라운 이야기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 속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이름 없는 여인의 작은 이야기가 하나 끼어 있습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본문의 중심에 서 있지도 않고, 그리 길지도 않습니다. 누가복음 8장에서 이 여인의 이야기는 겨우 본문에 끼어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보다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 보다 대단한 이야기인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의 중간에 겨우 끼어들고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한 여인의 짧은 이야기가 대단하고 중요한 이야기의 틈바구니 속에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본문이 속해 있는 누가복음 8장 전체를 읽고 묵상하다가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왜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대단한 이야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있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초라한 여인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기에, 이렇게 대단한 이야기의 맥을 끊고 들어와 있는가?” “복음서의 기자는 왜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를 단숨에 끝내지 않고, 초라하고 무기력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 사이에 삽입하고 있는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고통 받는 한 여인의 이야기

이런 질문을 갖고 이제 우리는 이 여인에게 한 번 관심을 기울여 봅시다. 이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비참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 축에도 낄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여인은 크나큰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병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녀는 12년 동안 계속해 혈루증을 앓아 왔습니다(43절). 혈루증은 지속적으로 하혈하는 증세를 보이는 부인병의 일종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또한 율법(레 15:25~37)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 정죄되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마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혈루증을 앓는 환자는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싸매고 있어야 했고, 역겨운 냄새를 감춰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여인은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를 받으면서 많이 견디어야’(막 5:26) 했습니다. 그녀는 병을 고치려고 모든 노력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한 채 여러 병원에 수많은 치료비만 갖다 바쳐야 했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엄청나게 발달한 오늘날에도 종종 오진이나 의료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는 잘못된 진단, 비과학적 진료, 터무니없는 비싼 치료비의 요구 등으로 인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가 더욱 많았음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많은 의사들로부터 수많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가진 것들을 모두 병 고치는 일에 쏟아 붓고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막 5:26). 소유한 것들을 전부 병 고치는 데 허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하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었고 모든 것들을 잃어버린 상태인데, 오히려 병은 더욱 심각해져 갔습니다(막 5:26). 이렇듯이 그녀는 건강도, 돈도, 희망도 잃어버린 채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피를 흘리며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육체적 고통,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사회적 고통,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돼 버린 종교적 고통, 그렇게 많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만진 여인의 이야기

그런데 그녀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모든 병을 고치시고 악귀들을 쫓아내시며, 놀라운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파하시고 말씀으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며,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는 분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지막 희망을 붙들게 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진다면 나의 병은 나을 수 있을 텐데.’

이제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필사적으로 최후의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녀의 필사적인 행동은 마음 속 깊이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능력의 예수님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밉니다. 필사적으로 손을 뻗칩니다. 예수님을 만지려는 그녀의 노력은 희망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녀는, 마지막 소망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손을 내뻗습니다. 정맥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손으로 양로원에 가끔씩 찾아오는 자녀들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미는 노인의 손과 같이 내뻗습니다. 앞으로 내뻗은 그녀의 연약하고 창백한 손은 예수님의 권능을 만지는 ‘고통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그 창백한 손을 뻗어 예수님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 만짐은 도시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스쳐 지나가듯이 슬쩍 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명성이 있는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부수고 만져서는 절대로 안 되는 사람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만지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드디어 그녀가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만졌고 그 즉시로 피가 멈췄으며 그녀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는 ‘즉시’, ‘즉각적으로’, ‘일순간에’의 뜻인 ‘파라크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즉시로 하혈이 멈췄고 그녀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과 대면한 여인의 이야기

예수님께서 ‘그 즉시로’ 자신에서 권능이 빠져나갔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해 누가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는지, 누가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도록 한 것인지를 알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짤막하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녀를 찾아라’는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누군가 예수님을 살짝 만진 것이 대수인가 싶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 밀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만진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제자들은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에 온통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마치 소중한 친구보다 더 특별하게 생각하듯이, 자신을 만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그녀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놀라운 드라마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이 문제에 아무 관심이나 흥미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 주의를 기울이시고 주님의 겉옷자락이라도 만진다면 자기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여인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시며 그녀를 돌보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위에 있던 군중을 둘러보셨습니다. 군중 속에 있는 그 믿음의 여인이 누구인지 계속 찾고 계십니다.

그때 여인이 자발적으로 나아옵니다. 이제 그녀는 병 고침을 받고 새롭게 되었으며, 질병으로부터 해방감을 맛보면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 사실을 복음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모든 사실을 아뢰었다”(47절).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부적절하게 예수님을 만진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곳에 불쑥 끼어들었던 것입니다. 남들 같으면 권능의 주님을 만질 수 없는 순간에 그녀는 남몰래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두려움으로 떨며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짊어져야 했던 고통과 자신의 생명을 살리신 예수님에 관한 권능 그리고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와 새롭게 된 것에 대해 털어놓습니다. 주님 몰래 행한 일들을 고백합니다.

그녀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나아왔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요? 다른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는 그녀가 부정한 몸으로 주님을 만진 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무안을 당하고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병들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았고, 의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며, 심지어 종교 지도자들조차 그녀의 병든 몸을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끌어낸 믿음을 가진 그녀를 마주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을 꾸짖거나 창피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를 비난하거나 학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녀가 해선 안 될 일을 함부로 한 것에 대해 야단치시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가 만짐으로써 자신의 체면이 상하거나 자신의 성결함이 더렵혀지거나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지 않을까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순간에 오직 그녀와 그녀의 미래에 대해 온 관심을 기울이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된 여인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예수님께서 지금 그녀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딸아’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사용했던 ‘딸’이라는 단어를 예수님께서 지금 이 여인을 향해 사용하십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 정말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본문 44절에서 여인이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옷 가’라는 단어는 ‘크라스페두 투 히마티우’입니다. ‘크라스페두’는 ‘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달린 부속물’ 즉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술’을 말하고, ‘히마티우’는 ‘외투’를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이 말을 ‘fringe of His Cloak’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성경 새번역도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니”(눅 8:44) 즉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 끝에 달려 있는 술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겉옷에 달린 술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제사장과 같이 권위와 위엄이 있는 사람들만이 술 달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을 아무나 만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옷에 달린 술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만지도록 허락을 받았거나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그녀는 도저히 만져선 안 되는 것을 만졌습니다. 더구나 그녀의 몸은 부정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이 여인과 접촉이라도 하게 되면, 그도 부정한 사람으로 되고 맙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권위를 상징하며,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는 옷 가의 술을 만진 것입니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었습니다. 행하면 안 될 일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엄청난 책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고 두려워 떨고 있는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딸아’ 하고 부르십니다. 야이로가 죽어가는 외동딸을 향해 한없는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부르는 ‘딸’이라는 그 단어, 그 딸을 잃는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기에 회당장이라는 체면도 팽개치고 시골 출신의 청년 랍비에게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그 심정으로 부르는 ‘딸’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 예수님께서 부정했던 여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따라서 ‘딸’이라는 단어는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이름을 모르니까 일반적으로 부르는 ‘딸’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단어는 실제로 아버지가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부녀지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첫 마디에서 벌써 예수님께서 그녀의 불손한 행동을 용서하시고, 그녀가 자신을 만질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녀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언제라도 예수님을 만질 수 있는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딸아’라는 한마디 속에서 소외된 여인을 향한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계속해 칭찬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음성과 함께 그녀를 보내십니다. 거룩함을 가지고 가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샬롬과 함께 가라. 이제 더 이상 피흘림도 없이, 생명을 빼앗아 가는 혈루증도 없이, 더 이상 아무 도움과 희망을 주지 못하는 의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필요도 없이, 소중한 재산을 탕진하고 빈궁해질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평안과 함께 가라. 충만하여 건강하고 기쁨에 넘치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가라. 이제 그녀는 모든 속박으로 온전히 해방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똑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 이야기

이렇게 본문의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본문에서 좀 더 엄청나고 멋진 이야기 같이 보이는 회당장 야이로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영향력 있는 사람과 그의 딸에게도, 가련한 한 여인에게 행하셨던 것과 동일한 일을 행하십니다. 회당장의 딸에게 무엇을 더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여인은 회당장이 받았던 것과 똑같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다시 허락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안에선 이 여인도 영원토록 중심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녀는 엄청난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이제 예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이 되었고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권능의 영역 안으로, 예수님의 가족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이 여인의 이야기가 죽은 자를 살리는 이야기의 맥을 끓고 중간에 끼어들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는 이 여인의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들과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이 여인의 이야기는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기에,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고 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서도 가던 걸음을 멈추신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여기에 끼어든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는 대단한 이야기들 사이에 끼어든 것도 아닙니다. 차라리 그녀의 이야기는 주님께 그 큰 이야기들을 멈추게 할 정도로 중요한 주님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마음을 알았던 누가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다가, 이 여인의 이야기로 큰 이야기의 맥을 과감하게 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이야기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소중하게 여기심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마치 온 세상에서 ‘나’ 하나만을 사랑하시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누가 나의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이야기를 보면 수많은 군중이 주님을 옹위하고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옹위하다’라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무리들이 그분을 질식시키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즉 무리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니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몰려들어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옷자락을 스치거나 주님과 몸으로 부딪히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또 그들 중에 혈루증을 잃던 여인과 같이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병들고 문제 가운데 고통당하는 자가 어찌 이 여인뿐이겠습니까? 아마 그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주님을 따라 갔을 것입니다. 때로 주님의 옷을 스치며 주님의 몸과 부딪히면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이 여인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녀만이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에워싸 밀고 당기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교회로 밀려갑니다. 함께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모두 우리가 주님께 손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새벽 기도회를 통해, 매주일 주일 예배를 통해 그렇게 주님께 손을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믿음으로 손을 대는 것은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예배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며 그분이 주시는 구원과 치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믿음 없이 습관적으로 예배당에 나와 그리스도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 우리 주님과의 영적 접촉이 끊어져 생명을 상실한 교회들, 그곳에는 아무리 주님을 에워싸고 따른다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해도 그 어떤 변화나 치유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 중에 믿음의 손으로 자신을 만지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우리 중에 말 못할 고민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자신의 힘과 능력과 지식과 경험과 모든 것들을 동원해 보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뿐이어서 한숨 짖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우리의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가정의 문제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병고 그리고 경제적 문제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있습니까? 혹은 우리 중에 해선 안 될 일을 하고 두렵고 떨림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시간에 우리도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 술을 잡으십시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 술만 만졌는데도, 주님의 딸이 되어 12년 동안 앓던 난치병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주님의 옷 술을 만진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몸에서 흘리신 구원의 피를 믿음으로 먹고 마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은 옷깃을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만졌어도 구원받았는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믿음으로 받아먹으며 성령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한 몸이 된 우리야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우리 모두가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이 아닌 주님의 손을 꽉 붙잡읍시다. 그리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이렇게 대답하십시다.

‘주님, 제가 만졌습니다. 저의 병든 육체가 치유되길 원합니다. 제 마음의 상처를 고침받기 원합니다. 병들어 있는 제 영혼이 회복되길 원합니다. 제 마음의 죄악들을 씻음 받길 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만졌습니다. 제가 주님의 피 묻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사랑하는 음성이 우리에게도 들려올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모든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네 모든 문제에서 놓여 자유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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