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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는 대한민국의 종교인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원로 목사 및 국민문화재단, 국민일보 명예회장 등을 겸임했다. 한국 개신교의 상징적인 원로 목사 중 한명으로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와 삼박자 구원론은 어마어마한 호응을 얻어 한국 개신교의 큰 양적성장과 부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산속에 호수가 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칠 때는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달 그림자, 별 그림자가 없다. 그런데 호수가 조용해지면 그림자가 보인다. 달 그림자가 생기고, 별 그림자가 생긴다. 인간도 호수와 같다. 자기 자신을 믿을 때는 달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 자기 한계를 깨달을 때 비로소 ‘성실’이 ‘경건’으로 바뀐다. 그때 신앙이 생긴다. 왜 그렇겠나. 내 인생의 짐은 내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실을 지나 경건으로 마음을 열겠습니다. 그게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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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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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매일의 하나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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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2.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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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4:23]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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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

본문 : 마4:23-25

2014.5.25.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설교자 : 박동진 목사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증거하실 때에 세 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Teaching)교사로, 전파하시는 (Preaching) 선교사로, 병들고 약한 자를 고치시는 (Healing) 의사가 되셨습니다.

이 모든 사역의 핵심은 회복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치료받고 회복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병을 앓고 있습니까?

1. 인간은 신체적인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2. 마음의 병도 있습니다.

3. 의식의 병도 있습니다

4. 영적인 병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질병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일단 사람은 이러한 병으로 인해 나날이 쇠약해지고 죽음과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병의 고통을 호소하며, 어떻게 하든 이 병을 고치고자 애를 씁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17절)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모든 병을 치료해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병든 몸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9:12)

그런데 예수님의 치료를 보면 단지 병만 고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열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경우를 보면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아픔의 현장에 함께 하시고, 그들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십니다.

병든이들이 주님을 찾아오기도 하고, 주님께서 그 현장에 찾아가기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병든 이들을 직접 만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병 때문에 기피하고, 외면할 때라도 주님은 그들을 박대하지 않고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며, 그 눈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주님께 치료받는 자들은 병 때문에 고생한 자신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께 버림받거나 저주받은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은혜를 받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의 능력으로 그 병을 깨끗하게 치료하십니다.

어떤 때는 말만으로도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특별한 치료의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병에 걸렸든지 주님께서 고치고자 하시면 여지없이 깨끗하게 치료되어 집니다. 죽음의 병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치료하시지 못하는 질병은 없습니다.

세 번째로 그들의 영적 정체성을 회복시켜줍니다.

열두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그 여인은 육체적인 질병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버림받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에서 피가 나는 병이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이며, 하나님께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손가락질까지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그 자존감은 완전히 바닥을 친 그런 불쌍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여인의 질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시면서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십니다. 주님의 이 말로 그녀는 병에서 치료될 뿐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그 사람의 마음의 병과 자존감까지도 치료해주셨습니다.

네 번째로 그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어엿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세워주십니다. 그 여인은 자신이 치료된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대중들에게 보이셨고, 그 여인이 치료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도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 여인을 부정하다고 멀리하지 말고 함께 어울려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주었습니다. 주님의 치료는 전인적이며, 그 인생을 새롭게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들었을 때에 그저 의술의 힘으로, 약의 능력으로만 치료하겠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병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치료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병원에 가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도 하나님의 치료가 되게 하고, 약으로, 자연치유로 어떤 방법으로 치료를 받더라도, 이 모든 치료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고백하며, 그 모든 치료의 방법에 주님의 능력이 임하며, 주님이 역사하시기를 기도하여서, 주님이 치료하셨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저 병만 치료받기보다 주님께서 우리의 전인을 치료하여서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시도록 맡겨야겠습니다.

by코이네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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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0821 치료하시는 하나님(1)

24. 치료하시는 하나님(1)

이사야 53장 4~5절, 사도행전 10장 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사람의 육신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므로, 육신에 비하면 영혼의 가치는 천배 만배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에나 영혼구원에 초점을 두고 항상 구령 열에 불타는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 금란교회의 제일 목표입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귀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육신의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사는 비결을 배우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믿는 자에게 병을 고쳐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병 고침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신유는 구속사업의 계획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주는데 죄와 병고와 질병에 대한 태도를 잘 계시해 줍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변함이 없음 같이 죄와 병고와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도 영원히 변치않습니다. 신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신유는 구속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5)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질고”(grief)라는 말과, “슬픔”(sorrows)이라는 말의 히브리원어는“병고”(sickness)와“질병”(diseases)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 병고와 질병도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7)고 기록했는데,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의 원인을 짊어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것은 우리를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게하기 위함인것입니다.“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나 마태나 베드로, 세 증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병 고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주석가는“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는 것은 육체의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병을 의미한다고 했으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의 영혼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재창조(recreate)하는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도“내가 그 속에 새 신(new Spirit)을 부어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겔11:19)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타락했기 때문에 죽은 영혼이므로 낡은 옷을 꿰매듯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야 하고(born again), 새로운 인간(new man)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했습니다. 병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은 “새 피조물”(new creation)이 되는 것입니다. 병 고침 받을 때는 이전 것이 다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침 받는 그 부분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코의 부스럼이 나았다고 하면 코의 부스럼만 없어지는 것이지, 코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영혼의 병 고침이 아니라 육체의 병 고침입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하고 이 말씀을 믿고 행동할 때, 질병도 도망가고 병은 낫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피 흘려주셨고 우리의 병 고침을 위하여 채찍에 맞았습니다. 믿고 기도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병 고침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2.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질병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에게 속한 어떤 것도 갖고 있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행 10:38)고 했는데,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은 모두 마귀에게 눌려 있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욥의 온몸에 악창이 나게 한 것도 사단이요, 재난을 가져와 온 재산이 다 날아가게 한 것도 사단의 짓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6절에 보면 안식일에 18년 동안 꼬부라져 펴지 못하고 지낸 여자를 고쳐주셨을 때,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비난하는 회당장에서 말씀하시기를“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18년 동안 지독한 관절염을 앓았던 모양인데 예수님은 사단에게 매였던 것을 풀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10:10)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도적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아니라 분명히 마귀입니다.

병마는 도적입니다. 건강을 도적질하고 기쁨을 도적질하고 다른 데 필요한 돈을 도적질해 갑니다. 예수님께서“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습니다. 죄는 마귀에게 속한 것이므로 예수님은 죄를 멸하려 오셨고, 질병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므로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도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행 10:38)고 했습니다. 병고와 질병은 마귀에게 속한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 받는 것과 같이 우리 육체의 병고도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마귀에게 항복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하고 질병을 물리쳐야 합니다. 결코 마귀에게 우리 몸을 내어주어선 안 됩니다. 꾸짖어 내어 쫓아야합니다.

3. 하나님은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신유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질병을 치료하실 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질병을 위하여 신유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고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의 문자대로 해석한다면“내가 애굽 사람에게 허락한(permitted 묵인)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병을 애굽에나 이스라엘에 준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단입니다. 즉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이 세상 신, 마귀입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치료하시는 분(healer)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게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수를 채우리라”(출 23: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잘 섬기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 병을 제하고 양식과 물에다 복을 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질문하기를“그러면 당신은 언젠가 병나서 죽지 않겠습니까?”고 하는데, 26절에“너의 날수를 채우리라”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육신의 수명을 다 채워 살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의 말씀대로 행할 때 질병을 없애주겠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살 때, 어린 아기나 젊은 사람이 죽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기한 전에 죽는 사람이 없게 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실 수가 있는 분입니다.

신명기 7장 13~15절의 말씀을 또 보십시오.“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우승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 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복주시고 번성케 하겠다고 했습니다. 또 뛰어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특히 13절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애굽에 내린 악질이 임하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게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모든 질병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한 것 때문에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불순종을 용서하는 것은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저희범과의 죄악의 연고로 고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7~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구약의 언약의 백성도 치료해 주셨는데, 더욱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치료하시지 않겠습니까?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고 했습니다. 더 좋은 언약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께서 더 잘 치료해 주십니다.

어느 93세 된 건강한 할머니가 간증하기를, 나는 40년 전 예수님을 영혼의 구세주로 영접함과 같이 그리스도를, 치료하시는 의사이신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 40년 동안 건강히 지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암 병이나 기타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교역자들)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4)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예수의 피로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음과 같이 우리의 질병도 치료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건강하게 삽시다. 병마를 대적하고 물리치며 삽시다. 예수께서“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물려줄 줄 알거든 하물며(How much more)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멘.

치료하시는 예수님 – 조용기 목사의 10분 방송설교 제2권 (영한대역) [갓피플몰]

[영한대역] Ten-minute Broadcast Sermons Vol.2

조용기 목사의 10분 방송설교 제2권

치료하시는 예수님-Jesus Who Heals Us

I am pleased that the twenty-six beautiful ten-minute broadcast sermons have been

published as an English book with Korean translation.

It is really wonderful to see the messages of Rev. Yonggi Cho finally available as a

book so that we can taste the depth and width of the Word, and read them again, for

we can’t be satisfied with listening to them just once through broadcasting.

If people read one sermon per week and practice the message, I am convinced that

the sermons will become great guidelines and vital energy to their lives of faith.

-From Words of Recommendation

그동안 조 목사님의 방송을 통한 10분 설교 중에서 주옥과도 같은 26편의 설교를 뽑아

영.한 대조 책으로 출판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방송을 통해 한 번 듣기만으로는 너무도 귀한 메시지가 이제는 책으로 엮어져서, 그 말씀의 깊이와 넓이를 음미하며 읽고 또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한 주에 한 편씩 읽고

한 주간동안 그 말씀에 따라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신앙생활에 크나큰 지침이 되고 활력소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천의 글 중에서

치료하시는 예수님! (마 4:23-25)

치료하시는 예수님! (마 4:23-25)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병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질병도 시대에 따라서 여러 가지 양상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병에는 다음과 같은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초적인 질병입니다.

이 병은 특별히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질병을 말합니다. 본문을 보면 각색 병자, 특히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이 나오고 있고, 또 사복음서를 보면 앉은뱅이, 귀머거리, 눈먼 자, 문둥병자, 혈루병자 등 많은 병자들이 예수께 찾아와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병들이 말하자면 원초적인 질병들입니다. 모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일차적인 질병들입니다.

이런 질병들은 대부분 무지하거나 가난한 시대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불결하거나 죄를 지어서 발생되는 질병들입니다. 또한 태어나면서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고 소경으로 태어난 것들은 모두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초적인 질병들입니다.

그래서 보면 이런 병자들은 대부분 갈릴리를 중심으로 많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곳이 그 시대에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낙후되고 가난하고 소외된 그런 곳에는 이 원초적인 질병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갈릴리 지역이 바로 그런 지역입니다. 거기에는 귀신들린 사람도 많았고 각종 병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의 기간을 활동의 근거지로 그 시대에서 가장 소외되고 낙후된 갈릴리 지역을 선택하시고는 3년 동안 그 지역을 중심으로 돌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시고 거기서 숱한 병자들을 고치시고 위로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 2차적인 질병도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질병들입니다. 이를테면 마음의 병이고 정신적인 병입니다. 사실은 이런 질병이 더 무서운 병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을 보면 이 같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각종 상처들로 인해서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초적인 질병들은 모두 수술을 하거나 약을 먹고 바르고 치료하면 쉽게 낫는데 이 같은 정신적인 질병들은 잘 낫지도 않고 또 쉽게 병명을 발견하기도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엑스 레이라는 것이 발명이 되어서 사람들의 몸 속에 있는 병도 훤히 들여다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시경이라는 것이 발명되어서 밖에서 몸 속의 내부 기관을 들여다보며 치료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다 요즘에는 단층 촬영이라는 의술까지 발전이 되어서 사람의 몸을 일부분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고 머리 끝에서부터 온몸을 단층별로 세밀하게 사진을 찍어서 병의 원인을 발견해 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그런데 이런 신비로운 기계들이라 할지라도 들여다볼 수가 없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속입니다. 여기가 병이 나면 고치기가 힘들어집니다.

오늘날은 이 마음이 병이 들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마음의 병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제2차적인 질병들입니다.

혹시 앞으로 의술이 발달되어서 사람의 마음속을 사진으로 찍어내는 시대가 온다고 하면 여러분의 마음속을 찍은 사진에 무엇이 찍혀 나올 것 같습니까? 아마 그렇게 된다면 대다수의 사람들 마음을 찍은 사진에는 시퍼렇게 멍들어 있는 마음이 찍혀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빨갛게 멍이 들어 있거나 구멍이 많이 뚫려 있는 모습이 찍혀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모두 마음에 한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많이 가진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슴이 멍든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까 칠순을 넘기고 50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가 이혼을 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아주 해학적인 이야기입니다 50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가 인생의 종착 지점을 눈앞에 두고서 왜 이혼을 해야만 합니까?

그런데 사연을 보니까 그 50년을 살아오는 동안 할머니가 한을 너무 많이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에 와서는 남편에 대한 신뢰마저 깨지게 되니까 그 한이 폭박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법원에서도 인정을 하고 그 이혼을 승인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한이 쌓였으면 그 나이에 이혼을 감행하겠습니까? 그 마음을 사진으로 찍어낼 수만 있다고 하면 아마 새파랗게 멍이 들어 있거나 빨갛게 멍든 사진이 찍혀 나올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한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침내 사람들을 억압합니다. 이것이 기쁨을 빼앗고 삶의 재미를 빼앗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에 병을 남깁니다.

이런 아픔들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하면 이 같은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고치시고 자유함을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갈릴리를 돌아 다니시며 각종 병자들과 약한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을 신유하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신유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를 말합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면 공장으로 끌고 가서 애프터스비스를 받듯이 오늘 현대인들은 모두 주님께로 나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예수께 나아가서 치료받아야 할 질병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 가야만 고쳐지는 그런 병입니다.

첫째는 영적인 치료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병이 들면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영적으로 병이 들면 먼저 짜증이 나고 재미가 없고 의욕이 없고 힘이 없습니다.

어떤 환자는 10년 동안을 이렇게 살다가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병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아파 죽겠습니다. 식욕이 없습니다. 욕망이 없습니다. 살맛이 안 납니다. 도대체 재미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면 이런 병을 모두 신경성이라고 합니다. 이런 병은 병원에서 고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질병은 모두 하나님이 고치시는 병입니다. 그래서 그 치료가 영적인 치료인 것입니다.

어떤 환자가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 병이 바로 이같은 신경성 질환입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시편 23편을 하루에 다섯 번씩만 읽으십시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읽고, 아침 먹고 읽고, 점심 먹고 읽고, 저녁 먹고 읽고, 잠자기 전에 한 번 더 읽으십시오.” 그 환자가 그 말씀 그대로 하루에 다섯 번씩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일주일 만에 그 병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 환자가 하루에 시편 23편을 다섯 번씩 읽어 가는 동안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 말씀 속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누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이 여인은 순간 느끼기를 “아, 이것은 나의 지난날의 모습이구나”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날 그 여러움이 없고 행복하게 살던 그 시절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이 말씀을 읽어 내려갈 때 이 여인은 무릎을 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나의 처지구나, 내가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는데 어쩌면 지금 나의 처지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까!”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말씀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구절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구절을 읽어 갈 때 이 여인의 마음속에서 비로소 따뜻한 기운이 돋아 났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솟아 나왔습니다. “아하! 이 다음 차례는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 내시는 단계구나, 그러면 내 잔이 넘치겠구나.” 그러고 나서 그 마음의 병을 깨끗이 씻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병을 약으로 고칠 수 있고 수술로 치료될 수 있는 일입니까? 그 병은 바로 하나님이 고치시는 병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예일 대학의 비처라는 교수는 이 시편 23편을 “성서의 나이팅게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영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을 되찾아 세상을 힘있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감정의 치료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감정에 의해서 발생된 질병들을 앓고 있습니다. 사람은 감정적인 존재입니다. 감정에 따라서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감정에 의해서 병을 이길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감정에 따라서 사람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이 감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의 삶을 살 수도 있게 하고 천국의 삶을 살 수도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면 이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독일을 여행하던 중 강가를 지나가다가 목이 말라서 강물을 떠 마셨습니다. 물을 마신 후 무심코 가다가 보니까 팻말이 하나서 있는데 그 팻말에는 “Poison”이라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말은 영어로 “독약”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그 팻말을 보자마자 순간 속에서 복통이 나고 뒤틀리고 아프기 시작하는데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어서 진찰을 받는데 의사가 자초 지종을 묻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해 주니까 하는 말이 “그 말이 영어로는 독약이라는 뜻이지만 독일 말로는 ‘낚시금지’라는 뜻입니다.” 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그 죽어 가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속이 편안해져서 깨끗하게 나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감정에 의해서 좌우되는 존재입니다.

또 마약 중독자를 붙잡아서 감호소에 수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약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죽는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그 중독자에게 단단히 약속을 시켰습니다. “이번 한번만 약을 놓아 줄테니 단단히 각오를 하라”고 결심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약 대신에 마약과는 상관도 없는 증류스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순간적으로 발광이 멈추고 잠시 후에 잠이 들더랍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얼마나 사람이 감정에 약하고 감정에 의해서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이 감정에 의해서 발생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 병도 모두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하는 질병들입니다.

셋째는 정신의 치료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가장 약한 부분이 바로 이 정신의 약함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만족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면 저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아름답고 행복했던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과거에 상처입었던 것들만 오래 오래 기억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정신이 얼마나 어둡고 침울하겠습니까?

어떤 심리학자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즐거웠던 시간이 더 많고 행복했던 시간도 많았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고난스러웠던 일들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니까 그 정신이 온전할 리가 있습니까? 그런 정신 속에는 모두 피해 의식이 가득 들어 있고, 옛날의 그 상처의 흔적들만 선명하게 새겨져 있어서 세상에 보기 싫은 사람들만 생각이 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질병들입니까? 이것이 지금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제 2차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들입니다.

그러면 이 같은 질병들은 어떻게 고침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약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술로도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주님으로부터 치료를 받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금 주님 앞에 나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주님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이를테면 지금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예배 시간에 신유를 체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것은 이렇게 매시간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이 시간들을 통해서 이 신유의 고침과 은혜를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 이 예배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 이 같은 영적인 질병으로 기쁨을 상실하고, 삶의 맛을 잃고, 감사한 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으면 이 시간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정적인 상처로 원망하는 마음과 미움의 마음과 한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주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질병으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일을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아침에 이 같은 치료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유의 축복을 체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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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심방 re: 예수님 병치료 하시는 내용의 성경구절들… : 네이버 블로그

예수와 병자들

제 1 절 세례요한에게 전하라 하신 여섯가지의 뜻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가르켜 제 스스로 증거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라”고 했고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자 의심이 생기고 회의가 찾아온다. 헤롯의 사적인 情事문제에 간섭하다 잡혀 옥에 같히게되는데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야가 정말로 당신 맞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게된다.

[마 11:2-6]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제 입으로 증거하고도 의심에 사로잡혀 그는 실족당하고 있다.(예수를 만난사람들-세례요한의 실족참조)

이에 대해 예수는 “그래 맞다” 가 아니라 위 성구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약속된 메시야가 오면 이와 같은 일을 할 것인데 이 일을 내가 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곧 메시아라 하는 말씀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어린양을” 증거 했지만 자기 자신이 깊이 自覺(자각)하고 한 증거가 아니었다. 예수는 세례 요한이 스스로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다.

그러면 오실 메시아는 이러한 육체적 병자나 치료하시기 위해서 오시는가?

인간의 영생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분인가? 말씀의 본 뜻을 알지 못하면 많은 오해를 낳는다.

세례요한에게 말씀하신 여섯가지 문제를 살펴보므로 메시야의 사명을 확인해보자.

예수께서는 육체의 질병을 들어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공생애기간 동안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신다.

예수는 병치료를 통해서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인가?다들 이렇게 알고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한 본질적 문제를 병치료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심을 깨우치자.

인간의 삶에서 질병은 생을 고단하게 하는 존재이며 인간은 질병을 두려워한다.

더구나 그것이 불치의 병이라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들에게까지 버림받는 소외감을 맛보게 하며 생명의 대열에서 낙오되어 오직 죽음을 기다려야 하며 절망만이 유일한 친구일 것이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나 인간이 존재하는 역사의 현장 어디에서나 의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우연의 한줄기 소망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왔다. 자신을 밴 태를 원망하고 무심한 하늘과 신을 비웃으며 눈물과 한숨으로 지새우는 수많은 불치의 병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길거리마다 나붙은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포스터에는 신유의 은사, 능력의 종, 모든 불치의 병 치료를 선전하며 병자를 부르고 있다. 성경에 예수가 그렇게 했고 자신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으니 오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였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아담 타락후의 인간은 영육의 조화와 균형이 깨어진 존재들이다. 인간의 내면은 고요하고 평안한 적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갈등하며 고뇌해야하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야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마음과 육체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온갖 신체적 질병을 유발시킨다.

처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건강한 인간이었다. 아담의 육체안에 생명의 본질인 생령은 생명의 무한한 의미를 자각하며 보다 높은 차원을 향해 날마다 도약하며 비상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에너지로 충만하였지 두려움과 공포에 불안한 실존이 아니었다.

타락하지 아니한 생명은 날마다 감격과 환희로 만물을 바라보며 그 속에 깃든 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발견하며 닮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하여 사단 마귀의 분열의 상대지혜가 들어온 인간은 불안의 늪에 허우적대며 절망의 무저갱을 향해 추락하며 권태와 무미 건조한 삶이 만유를 바라보니 만물 속의 깃든 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없고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영원한 생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인간이 본질적인 생명의 현상을 자각한다면 육체의 병마는 사라진다.

예수 영원히 사는 부활의 복음은 모든 육체의 병든자를의 근본적인 마음의 죽음의 병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복음이다.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면 사망에서 자유한 의식이되고 육체의 병마에서 놓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앞에 나아온 사람 중에는 치료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바리새인들의 낡은 종교의 무력함을 체험한 민중들은 예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고 새 생명으로 거듭났다.

모세의 율법 종교는 병든 인간을 치료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근본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율법에 정죄당하는 죽은 마음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율법에서 살아날 수 있는가?

이들을 살리는 것은 예수를 죽인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생명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그들을 살린다.

예수의 육체의 치료는 곧 죽은 영혼을 치료하셔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을 의미한다.

병의 치료가 아니라 새 생명을 얻었음의 상징이며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육신이 건강해진다.

이제부터 세레요한에게 말씀하신 참 뜻의 의미를 살펴보자.

제 1 절 소경이 보며.

[마 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을 소경이라 한다. 눈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음의 눈, 心眼(심안)과 肉眼(육안)이다. 인간은 마음의 눈이 멀어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려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인간은 진리의 빛을 볼 수 없으며 그 빛이 있음도 알지 못하는 영적 봉사이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靈盲(영맹)인을 開眼(개안)시켜 하나님을 보고 알게 하며 자기 자신의 실존적 존재를 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적 시력인 마음의 눈을 상실하였다.

메시아로,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영생을 주실 자로 오신예수는 자신을 알아보게 해주셔야 한다.

모든 사람들과 같은 人子로 육체를 가진 자로 오신 예수를 누가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는가?

예수는 본래 하나님이 주신 영적 시력을 회복하여 제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임을 깨닫게 하여야 하는 일이 첫 과제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또하나의 눈이 있음을 알려주시며 이 눈을 떠야 생명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영적 소경을 상징하는 자 하나가 성경에 나오는데 바로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이다.

그는 진리의 빛을 보지못하는 영적 소경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눈에서뱀의 비늘이 벗겨지므로 생명의 참 실상을 보게 되었다.

[행 9:17-18]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소경이라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참 생명을 볼 수 없는영적 소경을 말씀하심이다.

[요 9:3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들은 육신의 시력으로 하나님을 보려 하는 자들이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보아야 할 心眼(심안)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고 진리의 빛을 보아야 할 영안은 혼미 속을 더듬거리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 지도자들이라 하는 자들은 영적 소경이다. 자신의 꼬라지도 보지 못하고 천의 얼굴을 가지고 온갖 허위와 거짓으로 우상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을 소경이라고 불렀다. 현대의 바리새인은 누구인가?

[마 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 23:16-19]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우리는 먼저 마귀로 인해 이세상의 보이는 것만 볼 줄 아는 마음에서 영생의 빛을 볼 줄 아는 視力(시력)을 먼저 회복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으니 그에게 먼저 고침 받아 눈을 뜨자. 눈을 뜨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 이 글들도 알 수가 없다.

예수께서 맨 처음 하신 일은 맹인을 개안시켜 먼저 근본 죄와 사망을 알게 하며 참 생명의 하나님을 우러러 보게 하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율법의 죄는 알아도 근본 죄는 알 수 없다.

예수께서 많은 소경을 치료하심은 그들이 육적 눈을 뜬 것의 의미가 아니라 영적 눈을 떴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영적 소경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심이다.

세례 요한에게 전하라. 소경이 보며…..

육적 소경의 눈을 띄워주는 것을 두고 말씀함이 아니요 영적 소경임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영적 소경을 말하기 위해서 육적 소경의 눈을 띄우시는 것이다. 육적 소경의 눈을 띄우시는 것을 들어서 영적 소경을 말하고 너희 모두는 영적 소경이니 내 앞에 나와서 눈을 떠라라는 말씀인 것이다.

메시아가 당신이 맞느냐고 하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메시아가 와서 해야 할 일을 말해주므로 메시아가 맞다고 답변하시는 것이다.

제 2 절앉은뱅이가 걸으며

[마 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물론 이곳과 저곳을 가기 위해서 있는 길이 있겠고 道的(도적) 길도 있다.

길을 가자면 두 다리가 성해야 한다. 특히 먼 길을 가야 하는 사람에게 걸을 수 있는 다리가 튼튼하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일 수 있다.

(율법의 완성에서 오리와 십리 참조)

타락한 인간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道的(도적) 앉은뱅이.!!

그렇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道行(도행)이 정지되어버린 존재이다.

무릎과 발에 힘을 상실하여 하반신이 마비된 앉은뱅이가 되어 행위 없는 입만 떠벌이고 있는 격이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입만 살아 떠벌이고 행함이 없는 앉은뱅이가 많다 .

특히 종교에서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보면 특히 더하다.

[마 23:2-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말만 하고 행치 아니 하는 자들……

이들은 진리의 길을 가다 주저앉은 앉은뱅이가 되어 신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반신의 陽氣(양기)가 위로 솟구쳐 올라오니 辯士(변사)처럼 능란한 혀로 모세의 율법을 암송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들만 특허 낸 것마냥 떠들며 양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기독교 방송TV가 있다.

유명하다는 그들의 설교라는 것을 들어보라.

한편의 개그를 보는 듯하다. 교인을 웃기고 즐겁게 하기위해 온갖 세상 이야기에 아멘 할렐루야만 연발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면 불쌍하기 조차하다.

진리의 길을 가지 못하는 앉은뱅이인 줄은 모르고 입만 살아 나팔을 부는 목자라고 하는 사람이나 교인이나 입만 살아있는 앵무새들이다.

예수의 오신 목적은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과 악의 상대적 의식으로 참 생명 앞으로 도약할 수 없는 앉은뱅이 인간을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의 발에 복음의 신발을 신겨 주어 진리로 열린 문을 향해 달음질치는 動的(동적)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입만 살아 나팔부는 거짓 종교인 앞에 서 있지 말고 앞서가신 예수를 따라 대오를 가다듬고 勇猛精進(용맹정진)하게 행하자. 믿음과 행함의 두 다리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도약하자.

세례요한에게 전하라 하신 말씀, 앉은뱅이가 걸으며…..

아담 이래 생명을 잃어버리고 생명을 향해 걸을 수 없는 앉은뱅이 인류를 일으켜 세워 진리 생명 앞으로 가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세례 요한의 질문에 메시아가 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두번째 말씀이다.

주님은 육적 앉은뱅이를 치료하시므로 진리의 앉은뱅이를 말씀하고 있다

제 3 절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류는 나병환자.

썩어 문드러저 마귀의 형상을 한 현대의 문둥이들.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마 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로부터 나병은 하늘의 벌이라 했다.

이는 불치의 병으로 무엇으로도 치료할 수 없으며 그 전염성때문에 그 사회에서나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당해야하는 병이다. 타락한 인간은 모두 이러한 나병환자들과 같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마귀가 뿌린 나균으로 말미암아 그 형상이 흉악한 모습으로 일그러지게 되었다. 영원히 사는 신령체로써 神的(신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인간은 죄의 균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길을 잃어버린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환자의 일그러진 형상은 마귀의 형상이다라 할 수 있겠다.

진물과 피고름으로 얼룩진 모습은 죄의 나균으로 塗裝(도장)되고 化粧(화장)된 모습이다.

이와 같은 나병을 들어서 성경은 인간의 실존을 표현 하고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신것은 인간에게 이 사실을 깨우처주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성경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다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민 12: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칠 일간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 밖에 칠 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

[공동번역 ]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미리암의 얼굴에 아비가 침을 뱉았다면, 부끄러워 이레 동안 들어 앉아 있어야 하는 법 아니냐? 그러니 미리암을 진 바깥으로 내쫓았다가 이레가 지난 다음에 돌아오게 하여라.”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왜 발병하였는가?

공동번역의 표현은 정확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미리암이 문둥병이 발한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버지가 딸에게 침뱉은 것에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문둥병은 하나님이 미리암에게 침을 뱉으므로 발생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하나님의 자식들이다.

그들이 원수 마귀의 유혹을 받아 죄로 오염되자 하나님은 더럽다고 침을 뱉아 장막 (에덴)밖으로 쫓아내신 것이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문둥이임을 자각한 한 사람을 보자.

[마 8:1-3]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산상에서 복음을 말씀하시고 내려오는 길에 한 문둥병자가 예수에게 나아와 엎드린다.

“믿습니다 고쳐 주시옵소서.” 이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어서일까?

왜 “원하시면 치료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가?

이 문둥이는 많은 사람이 모인 대열에 끼일 수가 없어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예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大覺(대각)한 자가 되었다.

자신의 願(원)이 아닌 주님의 願 …..

내 자신이 아무리 치료받고 싶은 원이있다 해도 주님이 원하시는 원이 아니라면 어떠하겠는가?

“주여 원하시면 ….”

이 말은 깊은 영적 뜻을 담은 문둥이의 신앙고백이다.

타락한 천사는 자기의 願(원)을 행하려 하다 마귀가 되었다.

창조자의 뜻 창조자의 원대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 뜻 자기 원대로 하기 위하여 거짓말한 자이다.

자기 뜻을 행하려는 마귀에게 속은 아담은 그의 꼭두각시가 되었다.타락한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기 원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이다.

예수는 어떠한가? 그는 아버지의 뜻과 원대로 하기 위해서 이땅에 오시었다.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 아버지의 원이 무엇인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며, 문둥이를 치료하며……

예수 앞에 나아온 문둥이는 알았다.

자신의 뜻과 원은 무력하고 아무 소용이 없음을 오직 아버지의 원만이 우리 인간이 가야 할 길임을 말이다.

이 사실을 자각한 문둥이는 아버지 하나님의 원이 죽어가는 문둥이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당신을 보냈으니 당신의 원대로 해달라는 구원을 호소하는 것이다.

마귀의 뜻을 따라 행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문둥이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실존을 자각한 후 “주여 원하시면…”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원대로, 예수의 願대로 하는 인간으로 중생하였다.

자기의 원, 곧 마귀의 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원을 깨닫게 되었음의 고백을 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신다.

육신의 병든 자가 있는가? 먼저 아버지의 원이 무엇인지 깨달으라.

그러면 육신의 어떠한 불치의 병도 치료함을 받는다.

예수께서는 天刑(천형)인 문둥병을 들어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영적 나병에 걸려 신음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다. 자신이 온 것은 영적 문둥이를 고쳐 살리려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메시아가 와서 해야 할 일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침뱉으므로 생긴 문둥이를 다시 치료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이다.

그대의 원은무엇인가?

그대의 원을 구하지 마라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하시려는 원을 알고 그 원을 구하라.

제 4 절 귀머거리가 들으며

인류는 신과 대화할 수 있는 귀를 잃어버린 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귀가 없는 뱀들

귀머거리가 들으며.

[마 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인간이 가진 五官(오관) 중의 하나인 귀는 온전한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폭은 동물들의 세계에 비하면 지극히 단순하다.

인간은 파동에 의해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 귀는 있지만 신과 대화하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청력은 상실하여 영적 聾啞(농아)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지만 듣지 못하므로 침묵의 하늘만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듣는 것은 幻聽(환청)이며 마귀의 속삭이는 다른 복음인데 영적 귀머거리인 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다.

인간의 귀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라고 첨가해서 말씀한다.

예수의 비유의 말씀을 들을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의 말씀은 영적 귀를 가진 자들을 향해서 말씀하는 隱語(은어)이다.

바리새인들은 육적 귀는 밝은 자들이었다. 성경의 말씀이 난해하게 된 이유도 영적 귀가 열린 자들에게는 해독될 수 있는 반면 육적 귀를 가진 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마 13:9-10]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귀는 정해져 있다.

그들은 生來的(생래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

이들은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해버린 청력으로 세상 소리, 마귀의 음성이 제 아비의 음성인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음성을 들을 때 타락전에 아버지 하나님의 聲問(성문)을 기억하고 그 앞에 나올수있다.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본래부터 예수의 음성을 아는 양이 있고 모르는 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예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의 예정론이 아님) 이들은 제 아비 마귀의 음성만 들을 줄 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좇는자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음성을 알아듣는다.

이는 그안에 타락 전의 각인된 아버지의 음성을 구분할 수 있는 희미한 성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생을 사모하는 자는 그 길을 좇으며 그의 귀는 무수한 소리를 들어보며 가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되면 그순간 그음성을 어디선가 들은 것으로 그 기억을 되찾는 것이다.

영생을 찾는자는 영생을 말하는 소리를 좇아 나아오며 그 소리가 참임을 보증하는 성령을 받는다.

그 성령으로 인하여 닫힌 귀가 열리고 그 열린 귀로 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구원에 이르게 된다.

처음 성령을 받을 때 경험되어진 배에서 부터 밀려오는 의식의 소리를 다시 회복하라.

그것은 감사와 기쁨과 희열과 평안과 충만함이다. 이러한 의식은 일생을 사는 동안 무엇을 하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하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게 한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읽을 때에 그렇다 화답한다. (보혜사 성령에대해-성령받을때의 보편적현상참조)

진리의 말씀은 은어이기에 동류들만 알아듣는다.

同類(동류)들에게는 계시된 말씀이며 열린 말씀이므로 알아듣지만 異類(이류)들에게는 감추어지고 닫혀져 있는 말씀이 되어 이단자의 소리로 정죄한다.

예수의 말씀은 道(도)의 족보가 같은 자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임을 알라.

예수는 마귀의 다른 복음, 소음 공해로 청력을 상실한 제 양들의 청력을 회복시키어 본래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으며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육적 귀머거리를 치료하신다.

치료받은 귀머거리들은 먼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청력을 회복하고 예수 앞에 나아가 육적 청력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다. 귀있는 자는 아무리 난해한 성경도 해독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

이 글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마라.

마음에 들리는 음성에 귀를 귀울이라. 그리고 희열과 기쁨으로 역사되어지는 의식을 붙들어라.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기 위해서 타락으로 인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임을 깨우쳐 주시며 메시아의 일이 바로 이 일임을 세례요한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제 5 절 죽은 자가 살아나며.

성경이 말하는 죽음과 인간이 보는 죽음의 차이

자신이 죽은 자인것을 모르는 사람들

죽은 자가 살아나며…

기독교의 가장 큰 오류는 죽음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 있다.

이 죽음의 문제를 오해하고 있는데 생명을 어찌 알며 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예수를 어찌 알겠는가?

(참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무덤이란 무엇인가 참조)

죽음에는 두가지가 있다. 생물학적이고 법의학적인 죽음과 성경이 말하는 성경적 죽음이 있다. 죽음과 생명의 근본 문제를 알지 못하므로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도 오해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새 生命으로 오신 예수는 당시의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는가?

[마 8:21-22]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

사람이 말하는 목슴으로써 죽은 자나 현재 목슴이 살아있는 사람이나 모두 동일하게 죽은 자로 보신다.

[막 5:38-39]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눅 7:12-14]

성문에 가까이 오실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살아나라가 아님) 하시매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사람이 볼 때에 죽은 자이지만 예수는 산 자이므로 그가 다시 살 것이므로 죽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아담이후 모든 인간은 죽은 자들이다. 영원한 것에 비하면 천년을 아니 만년을 산다 해도 죽은 자이다.

단지 장수와 요절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영원히 생명으로 존재하는 그분 앞에는 아담이래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이며 앞으로 태어나는 자들도 죽은 자들이다. 본래 영원한 생명이 없어 죽은 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생물들도 죽는다고 생각한다. 생물들에게는 죽음이 없다. 단지 생성하고 소멸하고 다시 생성하고 소멸됨을 반복할 뿐이다.

아담은 생물학적으로는 구백세가 넘도록 살았지만 그는 영원한 생명이 없는 허깨비로 살았을 뿐이다.

선악과를 먹고 그의 속사람 생령은 즉시 죽었다. 허깨비로 산 인생이 천년을 산다해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없는 빈집이다. 본래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殿(전)으로 지음 받았으나 하나님이 전이 되지 못하니 귀신의 神殿(신전)이 되어 있다.

예수는 영이 죽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죄와 사망의 사슬을 깨뜨리므로 죄에서 인류를 속죄시키고 부활의 능력으로 영생을 주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를 부활시키겠다는 것이 約束(약속)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그 언약의 표로 성령을 주셨으니 이제 새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소망 중에 거하는 성도가 되라.

[공동번역 요 11:25-26]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수의 말씀 죽은 자가 살아나며……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담 이래 죄로 죽은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신이 귀머거리인 줄을 깨닫으라.

그리고 고침받기위해 예수 앞에 나아오라.

그는 기꺼이 치료의 성령을 주시리라.

귀가 열리거든 뱀들의 소리를 듣지 말고 심령 안에 들리는 그분의 소리를 따라가라.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히 10:16]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후에

죽은 자가 살아나며..

영원히 살지 못하는 죽은 자들이 예수의 복음을 듣고 살아날 것이다.

예수의 부활의 기쁜소식을 듣고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될 것이다.

메시가가 오심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죽은 영을 가진 자들을 살려주는 영으로 오셨다.

육신이 죽은 자를 살리러 오신 것이 아니다.

제 6 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물질적이든 심령에 부자든. 부자는 구원 받을 수 없다.

부자가 되어 물질로 구원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가난이라는 말의 상대적인 말은 부자이다.

우리는 “부자 되세요” 라는 말의 신드롬 속에 산다. 벼락부자를 소망하는 사람들로 복권 열기가 뜨겁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다.

병든 자에게는 어느 병원에 어느 의사가 병을 잘 고친다는소식이 복음이며 가난한 자에게는 부자되는 소식이 복음이다.

예수를 통해서 말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병치료도 아니며, 부자되는 것도 아니며, 출세하는 것도 아니며……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 손드세요!(별로 없음)

영생을 원하는 자들에게 복음이 된다. 영생을 원치 아니하는 사람하고는 상관이 없다.

이곳의 글들은 혼탁한 이 시대에 길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있다.

예수께서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斷言(단언)하신다.

그것이 물질적 부자이든 심령의 부자이든 자기라는 自我(자아)를 버리지 못한 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 居(거)할 수 있는 사람은 텅 빈 가난한 심령 속에 역사 하시기 때문이다.

지적 부자인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 버릴 때 그의 심령에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와 은혜가 충만히 넘칠 수 있었다.

마귀가 권세잡은 세상 나라에서 부자가 된 자들은 마귀와 야합한 우상 숭배자들이다.

私有慾(사유욕) 利己心(이기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속성과 성품이 아니다.

이는 마귀가 가져다 준 것으로 마귀는 이를 이용하여 인간을 노예로 삼고 있다

세상 나라의 온갖 양식으로 이미 배불러 있는 이때 누가 하늘의 만나, 생명의 양식(예수)을 먹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복음은 가난한 자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참 양식이며 참 음료이지만 배부른 부자들에게는 이단자의 잠꼬대요 백성을 선동하는 헛소리로 들린다.

마음이 가난한 자, 물질에 가난한 자, 예수가 하신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묻기를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됩니까?” 이러한 멍청하고 우매한 질문에 여기에서 설명한 여섯가지를 담아 賢答(현답)을 하고 계신다.

메시야가 아니면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병 치료의 역사 이면에 이는 본질적인 뜻을 모르니 신유라는 은사를 내세워 제 뱃속 채우는 사람들이 많다. 병치료에서 小醫(하의)는 몸의 질병을 고치고, 中醫 는 마음의 병을 고치며 大醫는 나라의 병을 고친다했다.

예수는 몸과 마음의 병을 동시에 고치고 세상 나라의 병을 하늘나라를 이루신 神醫(신의)이시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 시작되는데 마음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육신의 병을 고치겠다고 게거품을 물고 나팔부는 꼬락서니를 보니 왠지 서글퍼진다.

[잠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

[공동번역 잠18:14] 정신만 살아 있으면 병도 이긴다. 정신이 꺾인 사람은 희망이 없다.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

[공동번역] 마음이 즐거우면 앓던 병도 낫고 속에 걱정이 있으면 뼈도 마른다.

[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 공동번역] 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속에 걱정이 있으면 기가 꺾인다.

이러한 심령의 병을 놔두고 예수께서는 육신의 병을 고치자고 하셨겠는가?

예수의 말씀의 뜻과 병 치료의 역사 속에는 그것을 통해서 영적 병을 깨닫게 하시고 있음을 읽는 자는 깨닫기 바란다.(병자치료에 대하여-예수앞에 치료받은 사람들 이하 참조)

여덟가지福있는사람에서 자세히 기록했으므로 간단히 기록한다.(심령이 가난한 자 참조)

제 7 절 예수 앞에 치료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병자 치료에 대하여

예수앞에 치료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당신이 메시아냐 라고 묻는 세례 요한에게 주님은 그렇다라는 말씀으로 메시아가 와서 해야하는 일을 말씀하셨다. 그 일들은 먼저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염두에 두고 성경에 나오는 병자 치료에 대해서 대하지 않으면 이 글은 신유를 외치는 사기꾼들을 위한 말씀이 되고 만다.

예수께서는 3년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시는 일을 하게 된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병치료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면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어서 질병은 신체에 가해지는 직접적인 고통으로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치의 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사람은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목회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 능력을 부러워하고 구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능력을 구하기 전에 예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 참 뜻을 깨닫지 못하면 스스로를 멸망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예수의 행하신 병 치료의 역사는 절대 사랑이다.

절대 인간 이해에서 나오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행위였음을 먼저 알아야한다.

아담 타락 후의 인간은 죄라고 하는 병균에 오염되어 육체가 썩어가는 갖가지 병에 시달린다.

본질상 모든 인간은 병자(病者)와 환자(患子)들이다.

본래 인간 본체는 영육간의 조화를 이룬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선악의 상대적 의식의 정신분열증으로 인하여 이 조화가 깨어져서 병균이 들어오며는 그것을 이길 능력이 없으므로 육체의 병을 얻게된다. 상대적 의식은 내면 안에서 무엇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것이 쉽게 원하는대로 얻어지지 않으므로 내면의 의식은 갈등하며 모순과 이율배반의 정신적 고통이 신체의 면역기능을 저하시켜 질병을 이겨낼 힘을 상실하게 된다. 정신 건강은 육체 건강과 직결이 된다.

영생으로 나아가려는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된 인간은 내면에 갈등이 없는 영과 육이 건강한 인간이었다.

건강은 생명의 참된 현상이다. 두마음으로 분열되지 아니한 인간은 본래 생명을 향한 무한한 의미를 자각하고, 보다 높은 생명 현상을 향해 도약하며 웅비(雄飛)하려는 현상이다.

건강한 생명은 날마다 날마다 경이와 감격과 환희가 충만한 눈동자로 만유(萬有)를 바라보는 열려진 눈동자이다. 아담의 타락 자체는 곧 병든 생명이 된다.

마음의 욕구를 다 성취할 수 없는 인간은 불안의 늪에 허우적거려야 하며 절망의 심연 속에 권태와 우수의 눈동자로 만유(萬有)를 보며, 부조리한 生의 현장에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며 기다리는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인간 자체는 본질적으로 정신과 육체가 병이 들어 건강한 생명 현상에서 떠나 있는 존재임을 알자.

예수는 영원한 생명 자체이셨다. 예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을 치료하는 복음이다. 육체의 질병은 마음에서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해방되면 저절로 치료되는 병이다.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이 이 세상의 욕망을 일으키고 이 욕망을 이루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신체의 질병을 발생시킨다. 모두가 잘 아는 스트레스라고 하는것이다.

예수는 먼저 병든 영혼을 생명되게 하시므로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신다.

예수 앞에 질병의 치료 받은 것을 살펴보면 그들은 먼저 예수의 말씀 앞에 정신이 먼저 치료되는 새로운 생명이 내면에서 약동하는 체험을 하게 되고, 그 후에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신체의 병을 규명하여 그 병을 치료하게 되지만 성경은 인간 실존을 본래 병든 생명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 병든 생명을 먼저 살리는 것에서부터 육체의 질병은 치료가 되는 것이다.

생명의 대열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실존들을 향해 빛처럼 포근하고 따사롭게 다가선 예수?

그와 만난 모든 병자는 불안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절망의 심연에서 해방되어 생명이 날개 돋혀 날으며, 건강과 생명의 자유를 노래했다. 생의 부조리(不條理)와 무의미성(無意味性)이 사라지고 새 생명의 환희와 약동의 신생(新生)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들은 질병으로 인한 오랜 투병은 저주받은 삶을 원망하게 했고, 자기를 밴 태를 저주해야 했으며, 무심한 하나님을 비웃었다. 의지는 쇠약해지고 한 가닥 우연의 소망은 사라졌고, 마음과 성격은 일그러져 신경질적 냉소만 남게 되었다.

이 인간의 본질적 실존. 본질적인 인간 이해 없이는 인간 사랑이 없으며, 이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치료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나 자신을 통해서이다. 이 속에 구원이 있다.

구약은 넓은 의미에서 환자 수용소와 같다. 하나 같이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들의 모습이다.

환자들의 신음과 탄식, 울음과 원망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처절한 지옥이다.

모세의 율법 종교는 병든 인간을 치료할 수 없는 무력한 종교다.

모세의 율법은 죽음의 병에 걸린 인간에게 죽음의 병에 걸려 있음을 말해 줄 뿐이다.

죽음의 골짜기에 누워 생명의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인간에게 진리의 태양. 예수의 치료는 곧 구원을 의미한다. 죄에 오염되어 병든 인간은 예수와 만남을 통해 그들의 병이 치유되고 죄 사함을 받았다.

오늘날 종교의 현장에 일어나는 치료의 역사들이 과연 생명이 병든 인간을 치료할 수 있는가?

세상의 종교는 많이 있다. 그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는 많은 병 치료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다.

종교는 정신세계의 자유를 추구하여 정신적 억압에서 자유로울 때 육체의 치병의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곧 육체의 병은 마음의 병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서 성령을 받고, 마음에 환희와 기쁨이 오면 치료되는 것이 질병인 것이다.

이제부터 예수께서 병자를 어떻게 치료했고 왜 치료했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자.

제 8 절예수는 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는가?

오늘날 교회현장에서 목사는 누가 치료했다고 하는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은지라.”

[마 9: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은지라.”

[막 10:52 ]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병자들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예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아무리 능력이 있으신 예수라 하였을지라도 병자가 믿음이 없으면 치료하실 수 없다.

병자가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구약에 일어난 역사들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가 있었다.

예수께선 치료받은 자들에게 신유의 공로를 돌리셨지 자신의 어깨를 으쓱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의 능력의 겸손함을 깨달아 보자.

오늘날의 종교 현상을 빗대어 써보고 싶으나…… ‘거저 주라’ 하신 말씀 속에 멈춰 선다.

[마 10:7-10]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오늘의 종교 현장을 가볼 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선지자가 그립다.

무당판된 기독교, 개판이 된 말세의 종교계에 엘리야 시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칠천의 구도자는 어디 있을까? 종교로 인해 병든 심령을 치유하는 참 신비주의(神秘主義) 신유 운동이 일어나야겠다.

몇 개월을 끌어오던 병자 치료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모든 세상이 추위로 꽁꽁 얼어버린 계절이다.

이곳은 너무 춥다. 눈만 내놓고 다니는 길거리의 사람들. 마음들은 얼마나 삭막한 삭풍이 몰아칠까? 평균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도 가난한 백성들은 한 닢의 동전을 벌고자 몸부림치는 삶의 현장이, 예수 당시의 힘없고 가난한 백성을 떠오르게 했다.

이 곳의 글을 대하는 이는 기록하고자 하는 핵심을 깨닫기 바라며, 문자의 표현들은 하나의 수단일 뿐임을 알라. 하나의 수단은 또 다른 수단이 있음을 말한다. 수단은 본질이 아니니, 수단으로 본질이 왜곡되고 오해되지 않길 바란다. 이곳에서 기록된 말씀의 진면목은 예수는 철저한 인간 이해였고 그 속에서 긍휼과 자비가 나왔음을 알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않고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위에 기록된 치료받은 사람들은 모든 공동체의 조직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다.

또한 자기 현실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출구 없는 상황에서 출구를 찾고 있는 이들이었다.

병자들이 치료되어지는 현장에서 나 자신이 서 있었고, 내 자신이 병자 자신이 되었고 그들의 절망과 좌절이 내 좌절과 절망이었다. 그들의 소외와 고뇌와 고통이 내 자신이었다. 그 현장 하나 하나가 생생하게 보여지며, 이 글을 쓸 수 있게 하신 그 분께 감사한다.

제 9 절 왜 예수는 소문내지 말라 하는가? 그 이유

소문안나서 안달하는 교인들과 종교인들

예수는 왜 소문(所聞)을 내지 말라. 하시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을 자랑하고 소문나기를 원한다.

예수는 값없이 치료해 주고난 후 소문내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마 8:4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마 9:30-31 ]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저희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 하니라.”

[마 12:16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 하셨으니

[막 1: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막 3: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막 5:43 ]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막 7: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 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막 8:26 ]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날 사소한 병 하나가 치료되는 현장에는 이 일이 온 천하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목회자들은 장님인가? 각종 죽음과 불치병을 치료하시고도 이 일이 소문 안 나기를 바라시는 예수의 뜻은 무엇인가?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 였지만 소경, 벙어리, 문둥병이 치료 되었는데도 소문내지 말 것을 당부하는 예수의 말씀을 깊이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적과이적에대하여-모세와 예수가 행한 기적의 의미 참조)

첫째, 예수는 진리를 증거하러 오셨지, 병 고치려는 목적 때문에 오시지 않았다.

우리는 기적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과 참 기적의 의미를 알았다.

예수가 오신 참 목적은 복음 전파였다. 그러나 그 복음을 받아들일 자들이 돈 없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었으므로 복음 전파와 아울러 병을 치료하셨을 뿐이다. 병 치료가 목적이 아니요, 병 치료를 통해서 복음 전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매한 민중은 본말(本末)을 전도하여 복음을 듣는 귀는 어디다 두고 병 치료의 목적으로 모여들었다.

막 복음이 전도되기 시작되는 시점에서 진리의 증거가 병 고치는 일로 오해될 것을 우려하여 소문내지 말라 하였던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병 치료가 되면 복음이 잘 전파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병 치료를 목적으로 한 진리는 전도되지 않는다. 병 치료를 통한 복음의 전파는 인간의 사업이다.

진리의 전파 위에 치유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요, 병 치료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본질을 왜곡시켜 사심과 허망한 욕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둘째, 예수는 거품같이 부풀어진 인기를 원치 않으셨다.

고침 받은 자들은 간증(干證)을 할 때 과장된 수식으로 자기의 경험을 미화(美化)하고 포장(包裝)하여 전파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앞에 나오는 자들은 간증 속에 암시 받은 선입 관념을 가지고 예수와 대면하게 되므로 예수를 객관적으로 보는 순수한 마음의 눈을 상실하게 된다.

민중들은 진리를 받아들이려는 참 마음으로 오지 않고 병을 고치기 위한 이기적(利己的)인 마음으로 예수 앞에 나오는 것을 예수는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진리를 귀담아 듣고 복음을 들으면 병을 덤으로 치료받게 되는 법.

본래 진리를 듣지 않고 병만 고치려고 예수를 좇는 무리들이 당시에 많았다.

예수를 만날 때 어떤 선입 관념을 가지면 안 된다. 남들의 치유 받는 소문, 남들의 간증을 듣고 예수 앞에 나오면 예수에 대한 선입 관념이 우상이 되어 예수를 바라보므로 “자기 눈”은 상실하게 된다.

남들에게 들은 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진리를 찾아 헤메는 목마른 몸짓으로 예수 앞에 나올 때 예수의 전인격(全人格)과 만나 마음의 병을 치료받고 육체의 병을 치료받게 된다.

먼저 병 치료받은 소문이 나면 사람이 많이 모이고, 그러면 전도가 쉬워지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나, 구원은 하나님께로 나는 것이다. 어린아이 말 한마디, 자연의 사소한 변화 속에서도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는다.

억지되어지고 강요되어진 속에는 구원이란 없다.

구원은 오직 자아 발견을 통한 자각만이 가능하다. 남들의 소문, 남들의 경험, 남들의 간증 등 때문에 예수를 믿는 타율적(他律的)인 죽은 신앙이 아니라, 자기 경험, 자기 자각에 의해 예수가 구세주임을 고백하여 자율적인 신앙이 되어야 하겠다.

선전은 순수한 심령에 선입 관념을 형성하여 참 진리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예수는 소문내지 말라 하셨다. 온 세상 사람의 입에 자신의 병 치료 능력이 회자 되기를 원하고 언론매체를 통해 광고하길 좋아하는 목사들아 깨달아 보라.

구원은 내가 시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아 발견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타인을 비추는 거울이 되며 그 속에서 나오는 간증과 전도야말로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처럼 타인의 자아의 눈을 열어 믿게 한다. 내가 아무리 많은 말과 기적을 행해도 구원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으며 본인의 자각 속에서 이뤄질 뿐이다. 타인이 믿는 믿음에 내가 무리지어 있다고 해서 그 믿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 예수는 민중 위에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군림하려 하시지 않았다.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치병 능력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능력을 입어 치병한다고 오해하였고 예수를 마술사처럼 생각했었다. 바리새인과 달리 민중은 그 능력을 보고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추대하여 정치적 메시야로 등장시키려 했다. 예수는 온유한 선지자로 섬김 받으려는 자가 아니요, 섬기는 종과 같은 자리에서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 오셨지 인간을 업고 세상 나라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예수의 병 치료는 바리새인도 오해했고 민중도 오해했다.

예수는 오직 진리만 전파되기를 대망(大望)했을 뿐 치병(治病)의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치유 받은 사람들은 진리가 아닌 병 치료 소문만 전파하여 예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위 세 가지 이유에서 예수는 소문내지 말라 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온갖 부흥성회와 간증집회를 열어 자기를 과대 선전하여 모인 군중 위에 집단 최면과 자기 암시와 신념을 주입시켜 정신력의 기적을 일으키면서도 신념을 믿음으로 오해시키는 일들을 행하여 믿음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하고 있다.

우매무지한 기독교인들이 심령적 현상을 종교적 현상으로 오해하여 복음의 참 뜻을 왜곡시키고 있다.

인간의 정신세계 속에는 육체의 질병은 치유할 수 있는 정신력이 존재한다.

자기 암시와 최면술과 요가와 기공 치료 등이다.

“신유 충만, 능력 충만, 성령 충만의 나팔을 불고 광대처럼 외쳐대는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여. 구주 예수의 병자 치료의 참 뜻을 깨달으라. 복음전파가 아닌 병 치료가 목적이 되어버리고, 헌금 걷어내기 위한 부흥집회, 허망한 인기 까닭에 영혼이 침몰하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라.

세계 최대 집회, 세계 최대 교회 건물, 최대 교인 수. 예수는 소문날까 염려하였으나, 오늘날 소문 안날까 염려 하면서 메스컴의 물결을 타려고 광분하는 저들이 어찌 참 종인가?

성경 한 구절 읽어놓고 자기 자랑, 자기간 증, 자기 복음이 증거되는 기생충(蟲)들.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와 성경은 상표(商標)일뿐, 자기 과시로 가득찬 종교지도자들의 세계. 어디에서 예수를 만나며 진리를 찾을까?

자기 능력으로 행해지는 병자 치료에 대해 예수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하시니,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나는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병 치료의 역사들을 부인하거나, 도외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왜 소문나는 것을 원치 않으셨는가의 뜻 속에 읽는 이가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어 버린 오늘날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요,

참 진리의 증거 속에 치유와 각종 역사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임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제 10 절 지붕을 뜯는 친구들과 중풍병자.

그들의 행동은 곧 신앙의 고백이다.

지붕을 뜯은 중풍병자(中風病者)

[막 2:1-12, 눅 15:17-26]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복음서에 이 사건을 기록하게 하신 뜻은 무엇인가?

예수의 3년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개인의 집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적이 없고, 모두 들이나 산이나 회당의공개되어지고 열려진 장소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이곳의 사건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되어 밀폐된 장소에서 말씀을 하시게 되니, 소문을 듣고 모인 민중은 말씀을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중풍병자 한 사람이 친구들의 손에 떠메어 예수 앞에 왔으나, 모인 민중으로 인해 예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다.

집안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제한된 사람만이 예수와 동석할 수 있다.

예수와 동석한 이들은 바리새인, 서기관들로 민중 위에 군림하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으며 병든 민중은 초청 받지 못하여 집밖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다.

[막 2: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많은 민중이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상황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느 시대나 종교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독점하여 민중과 격리시켜 자기들만 전매 특허 받은 것처럼 민중을 속여왔다. 人의 장막(帳幕)을 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민중을 문밖에 격리시키고 자기들만 예수의 도(道)를 훔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힘없는 한 사람 중풍병자가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몸이 성한 많은 사람도 불청객(不請客)이 되어 문밖에 서성거리는데 사지가 마비된 중풍병자가 예수를 만날 길은 무엇인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그러면 포기하고 말아야 하는가? 중풍병자는 몸은 마비되어 있어도 정신과 영혼은 살아 행동하는 산 자였다. 바리새인은 몸이 자유로워도 정신과 영혼은 죽은 자들이다.

중풍병자는 자신을 메고 온 사람들에게 지붕을 뜯을 것을 부탁하였고, 자기의 지붕도 아닌 바리새인의 지붕을 뜯는 중풍병자의 용기있는 행동은 기상천외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희한한 행동으로 중풍병자는 예수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지붕을 뜯고 예수를 만나려는 중풍병자의 행동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의 행동은 상식을 초월한 행동으로 예수를 향한 믿음의 고백이 된다. 종교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만의 독점물로 인식하고 민중과 격리시켜 왔다.

화려한 석조건물을 짓고, 그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유(專有)한 종이요, 사자로 자처하면서 민중들은 강단 아래 두고 성전세를 받고 예배케 한다.

화려한 교회, 위엄있고 권위있게 장식된 말씀이 선포된다는 강단. 오직 하나님의 종이요, 사자인 자신만이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강단, 강단 아래 민중이 해야할 일은 성전세(稅) 격인 헌금을 내는 일 뿐이다.

교파와 교리의 웅대한 집을 짓고 하나님을 그 속에 유폐시켜 자기들의 사리(私利)와 사욕(私慾)대로 복음을 가위질하고 재단하여 기성복 복음을 만들어 비싼 값에 강매하여 팔아먹는 사기꾼이요, 도적놈들이다.

예수의 복음은 가난하고 소외되며 병든 민중 속에 있었지 교리와 신학의 옷을 입고 권위스러운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가 소수의 종교인들에게 독점되어 갇혀있을 때, 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이 유일한 방법을 대각하고 행동한 자가 바로 중풍병자였다. 이것은 지붕을 뜯을 수 있는 행동하는 믿음뿐이다.

낡은 종교의 지붕을 뜯고, 굳어진 기성교회를 뜯고, 아집과 독선과 오만으로 방패(防牌)한 신학체계(神學體系)를 만들어 그 속에 유폐된 신학의 지붕을 뜯어내는 길만이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제도화되고 의식화된 죽은 종교의 천정(天井)을 뜯는 용기와 결단과 믿음만이 예수를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오늘날도 진리는 갇혀져 있다. 이 갇혀진 진리 앞에 누가 나아갈 것인가?

중풍병자가 아니면 나아갈 수 없고, 그 방법은 지붕을 뜯어야 한다.

우리는 중풍병자가 되어야 한다. 사지가 멀쩡한 자는 문밖에 서성임으로 만족해야 한다.

내가 정신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중풍병자인 것을 인식한다면 그 치료자 예수를 만나야만 한다.

내 자신이 바로 영혼이 마비된 중풍병자요,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없는 정신과 영혼이 마비된 자임을 깊이 천작할 때 지붕을 뜯는 생명을 향한 몸부림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문밖에서 서성여야 한다. 지붕을 뜯고 내려오는 이 중풍병자를 예수는 정신적 영혼의 자유인이요, 육체가 자유로운 자유인으로 거듭나게 해 주셨다.

이 사건의 뜻은 너와 내가 정신적 중풍병자로 진리를 향해 갈 수 없는, 행동할 수 없는 자임을 말하고 있다.이것을 자각한다면 문밖에 서성거리는 신앙이 아니라, 지붕을 뜯고 예수를 만나기 위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행함(행동)을 통한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이 일어난 가버나움은 끝내 회개치 않으므로 저주받는 마을이 되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그 속에 하나님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깊이 깨달아 보라.

[마 11:23-24]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陰府)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제 11 절 소경 바디매오.

진정한 소경은 누구인가. 소경의 신앙고백을 보라!!

소경 바디매오

[막 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이 일은 여리고에서의 일이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는 소경이었는데, 그의 절실한 소원은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민중 속에 소외되고 버림받은 고독한 존재였고, 누구 한사람 동정(同情)하지 않고 주목하지 않는 무관심 속에서 쓰레기처럼 버림받은 맹인(盲人)이다.

그가 운집한 인의 장막 속에 싸인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의 대원(大願)은 예수를 만나 개안(開眼)하여 밝은 세상을 보고 생명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예수 앞에, 예수를 만나는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자각은 누구도 자기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요, 스스로 그 길과 통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그는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현 실존을 명백히 아는 그는 주위에 누구도 도와주지 않으며, 지금 현재 지나감을 붙들지 않으면 그에게는 다시 오지 않는 기회임을 알았다.

그가 예수를 만나는 유일한 방법은 절규(絶叫)였다.

생명을 다하여 의식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실존적(實存的) 부르짖음의 절규(絶叫)로 예수에게 신호를 보내는 길이다.

민중의 중구난방 떠드는 소음과 잡음 속에 서있는 예수에게 자기를 알리는 길은 절규뿐임을 그는 잘알고 있었다.

[막 10:46-48]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정말로 감동적인 한 장면이요, 구절이다.

소경이 예수를 부르는 소리를 민중들은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이 민중의 소리가 실존적인 생명의 고뇌를 안고 있는 자신에게는 허위의 소리임을 알았기에 무리들의 떠드는 소리를 압도해야 하는, 생명의 밑바닥에서부터 외쳐지는 고성의 절규를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그는 태어나는 날 울었던 외침 외에 지금까지 이런 외침을 외쳐보지 못하고, 늘 연약한 약자로서 숨소리한번 크게 내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구걸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억눌림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쳐야 할 때임을 알았다. 생명의 실상을 앞에 두고 좌절할 수 없었다. 후퇴할 수 없다. 예수를 향한 그의 절규는 예수를 향한 신앙고백임을 아는가? 그의 소리는 민중들의 소음을 뚫고 예수의 귓가에 강력하게 전달되었다.

민중들의 잡소리가 그의 처음 소리를 삼켜버려 듣지 못하였으나, 영혼의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비가(悲歌)와 같은 부르짖음으로 절규했을 때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지붕을 뜯은 중풍병자도 자기 실존의 발견에서 비롯되었고, 바디매오도 자신의 실존을 처절하게 인식하고 깨달음에서 구원은 예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죽은 인간을 살리는 것은 부활을 통한 예수밖에 없음을 실존적으로 느끼고 아는가?

바디매오의 절규는 구원과 생명의 실상을 앞에 두고 전력투구의 부르짖음이었고 버림받은 자기 존재를 예수에게 알리고 구원을 요구하는 처절한 함성이었다.

오늘날에 누가 어디에서 인간 실존을 깨닫고 절규하는 자가 있는가?

그를 부르시는 예수 ‘너와 나를 부르시는 주님’ 예수 앞에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라!!!

겉옷을 벗어 던지고 환희와 기쁨과 감격이 어우러져 뛰어나가는 것이 곧 구원의 실상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의 누더기 겉옷은 낡은 종교의 의상(衣裳)이었다.

죄에 더러워지고 율법에 의해 찢김 받고 동정으로 기워지고 앞 못보는 흑암과 무명에 때묻은 옷!

예수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 순간 맹인(盲人)은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옷을 훨훨 벗어버렸다.

더 이상 그에게는 그 옷이 필요치 않다. 너와 나는 예수의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가?

내가 빛 아래 있다고 할 때 내가 본다고 할 때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할 때 우리가 참 소경이다.

민중 속에 침몰 되었던 예수는 바디매오의 절규를 신앙고백으로 들었고, 메시아의 자비를 원하는 인간의 원(願)을 들었다. 그의 부르짖음은 예수 앞에서 절망의 절규가 아니다. 믿음이었고 찬송이었다.

[막 10:50-52]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 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소경의 대원(大願)은 무엇인가?

보는 것이다. 생명(生命)의 실상인 예수를 보는 것이요, 만물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진리의 눈이 개안되어 빛을 보는 것이다.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뜬 것이 아니다. 그의 개안은 진리를 향한 영원한 열림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며 그를 본다.

예수의 부르심 앞에 춤추며 뛰어나가는 감동적이고 감격적인 나의 실존을 보며, 구원의 기쁨이 무엇이며, 진리를 만나며, 생명을 만나는 기쁨과 환희가 무엇인가를 나는 그가 되어 느껴본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옴의 황홀함을 누가 아는가?

너와 내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참 소경임을 알 때 진리와 생명의 빛을 향한 절규가 나온다. 내가 본다고 하니, 참 소경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예수를 에워싸고 있으나, 예수를 만난 자가 아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만난 자는 그 많은 무리 가운데 유일한 소경 바디매오였다. 예수를 아는 것 같고, 본 것 같고, 만난 것 같으나, 아니다. 진리의 봉사임을 자각하고 실존적 고뇌와 몸부림만이 그를 만나게 한다.

[요 9:3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진리는 내가 진리에 대해 소경임을 자각할 때 진리의 빛을 보게 하신다.

제12 절 중풍병 하인과 백부장.

전쟁터의 잔인한 군인으로써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인의 병을 낫게 한 백부장(百部長)의 믿음과 겸손

성경을 대하면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랑을 말하는 너와 나는 이 백부장 앞에 고개 숙여야 하며 부끄러워해야 한다.

성경에는 기이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 이름 없는 백부장을 만나보자. 백부장은 로마의 군인으로 백 명의 군인을 거느리는 장교의 명칭이다.

그가 가버나움에서 예수 앞에 나아와 그의 하인의 병 낫기를 간청한다.

[마 8:5-9]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그는 참으로 겸손한 자였다. 그에게 하인이란 당시에 노예를 말하며, 노예는 인간상품(人間商品)이었다.

더군다나 불치의 병에 걸려 누워있는 하인은 노동력을 상실하여 쓰레기처럼 버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살벌한 전쟁 속에 연단된 군인의 마음 속에 이런 인간애(人間愛))가 남아있을까? 신기한 일일 뿐이다.

전쟁에서 생명의 값어치는 무가치한 것일텐데. 더군다나 병든 노예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나 그를 위해 당시 지배자인 로마 군인 장교가 예수 앞에 나와 간구할 수 있는 인격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고귀한 인품의 소유자로 인간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휴머니스트였다.

그의 양심 속에는 생래적(生來的)으로 하나님의 계명이 인각(印刻)되어 있다.

이방인이면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 하는 계명의 실천자였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판과 양심에 새겨진 계명을 실천하는 오염되지 않은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겸손은 구도자의 덕 중 최고의 덕(德)이 된다.

마귀는 교만함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그의 하수인인 종교꾼들은 절대 겸손할 수가 없다. 예수만이 겸손의 덕을 실천하는 완덕(完德)에 이르렀다. 백부장도 예수의 인격을 닮은 겸손한 자였다.

예수를 만난 일이 없으나, 그의 속에 생래적으로 십계가 새겨져 천성이 겸손한 덕을 갖춘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성경 속에서 나마 이러한 사람을 만나게 되니 기쁘지 않는가?

예수 앞에서 백부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았다.

자기 자신도 남의 手下에 있어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자신의 수하에도 사람이 있음을 알리고, 그 중 한사람의 병 낫기를 간구하였다.

이는 병든 자신의 하인이 종인 것처럼 자신도 수하사람으로 종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종이요 자신의 종도 종으로서 자신이 그를 자유케 할 수 없음을 알고 이 종을 자유케 하는 이는 예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백부장임을 내세워 식민지 백성인 예수를 명령하지 않았고 강제하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하인의 병을 진심으로 근심하여 치료해 줄 것을 간구했다.

[마 8:10-13]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조차 기이(奇異)히 여긴 믿음을 보라!!

이스라엘 전국을 다니며 천국복음을 증거하고 허다한 병자를 고쳤지만 항상 교만한 바리새인들, 건방진 종교인들, 비방만 하는 그들을 보아 온 예수는 백부장의 믿음과 겸손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부장의 큰 믿음. 그 믿음대로 하인은 치료되었다.

백부장의 믿음의 사건을 통해서 성경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가?

이 속에는 너와 내가 알아야 할 중대한 참 뜻이 숨어 있다.

성경에서 치료받은 허다한 병자는 자신이 직접 예수를 만남으로 나음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백부장의 하인의 경우는 예수와 만남을 통하지 않고, 무슨 신앙 고백을 하지 아니하고, 어떤 고뇌와 아픔을 하소연하지도 아니하였으나, 주인의 믿음과 겸손으로 치료받았다.

[마 8:13]”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많은 설교자들은 백부장의 믿음을 들어 설교하고 가르치지만 본질상의 참 뜻을 놓치고 있다.

이 치료의 사건 속에는 자아(自我)와 타아(他我)와의 연대의식(連帶意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인간 실존의 참 모습은 고독한 단독자(憺者)이다.

아무도 내 생명을 대신할 수 없고 내 삶과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실존의식이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도 내 병, 내 절망, 내 고독을 대신할 수 없고,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개인주의요, 타인과 투쟁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존적인 사고(思考)는 인간 이해의 한 측면일 뿐 전부가 아님을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백부장과 하인의 관계는 인간이 홀로 가야만 한다고 하는 생각을 수정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인간에게는 철저하게 혼자인 동시에 대화할 상대가 있고 교제할 이웃이 있다.

인간 실존의 본래적 참 모습은 위로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옆으로는 이웃과 대화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웃을 상실해 버린 존재들이 되었다.

백부장과 하인은 생존의 환경과 조건이 다른 독립된 개체요, 단독자였다.

아무런 혈연관계가 존재하지 않았고, 계급적으로 볼때 주인과 노예의 관계였고, 실존적으로 볼 때 자아와 타아의 고독한 관계 이상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생명에서 멀어진 나는 너의 고통과 절망을 대신할 수 없고 너는 나의 질병과 좌절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이 백부장으로 하여금 예수 앞에 하인의 병 낫기를 간구하게 만들었는가?

타인의 죽음을 내가 어찌할 수 있는가? 타인의 실존을 내가 끼어 들며 간섭할 수 있는가? 백부장은 자신이 자유인인 것 같으나, 사실은 종임을 알았다. 하인과 다를 바 없는 종으로 하인은 자신의 동료요, 이웃이요, 그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요, 그의 질병은 자신의 질병의 고통으로 자각하고 예수에게 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알았다. 그 앞에 하인의 병 낫기를 구하는 백부장의 고백이 하인의 믿음이요, 하인의 믿음이 백부장의 믿음임을. 혈연이 아닌 영연(靈緣)의 끈으로 연대되어 있는 존재임을 직시하고 백부장의 믿음, 곧 하인의 믿음대로 치료 받으라 하신다.

이것은 믿음은 하나로 내 믿음과 네 믿음이 별개가 아닌 공유되어질 수 있음을 말씀한다.

나와 남, 자아와 타인 사이에는 본래 교통하는 대화의 통로가 있었고, 인간 서로는 열린 존재로서, 남을 내 고독한 실존의 골방으로 초대할 수 있는 존재였는데, 타락으로 인간은 대화의 통로가 상실되고 교통의 방법을 잃어버린 채 서로가 자폐증에 걸린 환자가 되었다.

이웃이 없는 존재. 자기의 얼굴을 잃어버린 자들이며, 연대의식이 없는 실존으로 타아와 교통할 수 없는 단독자요, 이웃과 대화할 수 없는 고독과 인간 실존을 위해 예수는 오셔서 이웃 사람과 하나님과의 대화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는 고독한 인간 안에 오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대화의 통로를 마련해 주었고, 우리의 병과 절망과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은 예수와 인간을 연대시킨 끈이었고, 그의 복음은 닫힌 존재의 방에서 독백하고 몸부림치는 인간에게 대화의 방법을 제시해 주는 진정한 삶의 언어였다.

그는 고독에 몸부림치는 너와 나의 내면에 오셔서 너와 나를 알게 하고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로 말미암아 인간은 고독에서 해방받을 수 있었고, 절망하는 늪에서 나와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예수야말로 참된 우리의 이웃이다.

인간은 고독하면서 고독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고, 절망하면서 절망을 초극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시멘트 밀림, 고층 아파트의 밀실에 갇혀 이웃을 상실한 대화의 대상을 잃어 실어증에 걸린 우리에게 백부장의 사건은 하나의 출구(出口)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마련한 생명의 광장은 너와 나, 곧 우리의 광장이지 너와 내가 격리된 소외된 골방이 아니다.

우리의 광장. 사상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인간은 너와 내가 하나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본래의 자기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결론으로 이 사건 속에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본래 인간은 너와 내가 없는 하나였음을 나타낸다. 타락으로 누구도 내가 될 수 없는 철저한 나 혼자였으나, 이 나는 너를 필요로 하고 너는 나를 필요로 하는 우리가 될 때 너와 나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하고 현재 인간 실존이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不條理)한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다.

하인과 백부장은 모든 상황이 다른 극단의 존재로서 하나가 되었다.

실존의 극과 극단 사이에 아무런 장애가 진리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있으나, 진리의 하나님의 나라에는 극과 극이 만나 조화, 통일을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임을 알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구성원이 되어보라. 너와 내가 없는 유무상통하는 공동체. 이것이 천국의 모형이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질병 과 치유

HTM메세지

예수님께서 보시는 질병 과 치유

2016년 3월 1일 화요말씀치유집회 메시지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시는 치유사역, 우리가 바라는 치유사역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시는 치유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치유를 어떻게 보실까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선은 병든 것에 관해서 좀 구분할 줄 알아야 될 것 같습니다. 우리말로 병들었다 이렇게 말할 때는 같은 뜻 같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할 때는 질병 혹은 질환 이렇게 나누어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그 차이를 알고 계시는지요? 전체적으로 뭔가 정상이 아닐 때를 통틀어서 병들었다, 아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의 조직이나 기능에 유기적인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병리적으로 정상이 아닐 때는 우리가 질병이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disease’라고 말합니다.

한편으로 질환은 영어로 ‘illness’라고 말하는데, 한 개인의 육신적, 정신적인 문제를 포함해서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물리적인 것, 영적인 것을 다 포함해서 잘못된 것을 나타낼 때 질환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큰 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의 비정상적인 것, 예를 들어 어떤 암이 생겼거나 감기가 걸렸을 때 그 사람이 무슨 질병이 걸렸다라고 말하고, 그 부분을 병리학적으로 정상으로 고치는 일을 ‘치료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환경이나 식습관, 생활방식 등이나 이 사회가 문화가 잘못되어서 우리가 정상이 아니게 될 때는 질환이라고 부르고, 그 질환은 치료한다고 하지 않고 ‘치유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치료하셨느냐 치유하셨느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치유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암에 걸렸어요!”이러면 “뭐가 어째서 그렇고, 생리적으로 뭐가 문제이고, 면역체계가 부서져서 그렇고, 어떻게 하면 치유가 된다, 치료가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질병을 보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가 아프면 병리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치료받으려고 애를 쓰지만, 예수님께서는 질병을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질환을 치유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나서 과학이 이만큼 발달했는데도 치유 안 되는 희귀병이 얼마나 많은지요. 치료 안 되고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천 년 전에 예수님 앞으로 온 자는 다 ‘치유’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질병을 보는 관점과 예수님께서 질병을 보는 관점은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천 년 동안 의학이 발달했음에도 못 고치는 병이 여전히 수두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이 아니라 질환을 치유하는 방식으로 예수님 앞에 온 모든 자들을 다 ‘치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고 아는 지식만이 최고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방식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적인 지식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받아들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때부터 여러분이 어떤 질환을 앓고 있든 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이차원에 있는 존재는 삼차원을 이해도 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삼차원에 있는 존재에게 이차원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초자연계에 계시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아멘!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차원 안에서 과학을 통해서 더 많은 것들을 알고 그것이 진리라고 믿고 있지만,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 우리를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리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것을 만드실 수도 있고, 없애실 수도 있고, 바꾸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지식과 인식의 한계 안에서 뭔가를 바라고 뭔가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만난 자를 통해서, 즉 자녀들을 통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그 안에서만 살고 그 밖의 것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는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버리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버리고 내 방식을 버리고 바로 하나님과 교제할 때, 차원이 다른 초자연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 질병이든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케 하십니다. 여러분의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아멘!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가 맺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가난한 자는 돈이 없기 때문에 권력이 없기 때문에 소유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자, 의사에게도 갈 수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때도 없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좋은 소식입니다. 아멘!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과 기름을 물 붓듯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기름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에 걸린 자를 치유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10:38

오늘 이 시간에 어떤 말을 듣든지 어떤 기도를 하든지 여러분이 저를 보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바로 차원을 바꾸어서 이 자리에 계신 영으로 오신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날 때부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개인의 생리적인 조직이나 구조나 유기적인 관계가 잘못된 것을 병리적으로 고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도록 하시고 그로 인해 마귀가 멸절되게 하심으로 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뜻대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방식으로 우리를치유하셨습니다.

흑암의 권세,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포로 된 자에게 자유함을 얻게 하시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시며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눌린 자, 즉 그 마음의 상처와 쓴 뿌리와 자신에게 묶여 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자유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받는 그 놀라운 새로운 삶, 그것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이 손이 짧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고,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하나님의 통로를 막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의 치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질환의 치유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약을 먹어야 치료가 일어난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는 죄를 사함 받을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마귀가 떠나갈 때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치유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여기에 어떻게 하고 저기에 어떻게 하고 이렇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까? 그건 병원에서 할 일입니다. 그건 의사가 할 일입니다. 의사도 병원도 약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그 생각에 묶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성령이 나에게 임했습니다. 주님! 내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의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55:6-11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생각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삼차원에서의 생각과 길과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악 가운데 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날 때에 그때부터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분 앞으로 돌아오십시오. 아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1:21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의 삶에 묶여서 내 마음이 하나님과 생명적으로 교제하지 않고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삶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그분이 행한 것보다는 내게 부족한 것에 묶여서 늘 감사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허망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헛된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자기 배운 대로 자기 경험한 대로 살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생각이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여전히 흑암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마음이 어두워져서 여전히 이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로 침노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그의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한 번 그 나라를 경험하면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고, 자기 스스로는 알 수 없었던 이 모든 말씀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그 나라로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그 나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 오셨다면 오늘 다 내려놓으십시오. 질환의 치유를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계가 아니라 더 큰 단계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본래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피조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흑암의 권세가 이 땅을 사로잡았고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임으로 우리는 죄악 가운데 타락한 존재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강건케 하시는 길은 내 질병에 무슨 약을 먹고 어떻게 치료하고 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바로 다시금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그의 나라의 삶을 살 때, 즉 그의 의를 구할 때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 과학과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치유하지 못하는 질병이 그렇게도 많지만, 예수님께서는 수술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도 걸리지 않게 그분의 생명의 말씀으로 모든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도 모든 자가 그렇게 치유되는 것을 믿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차원을 삽시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삽시다. 그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남으로 가능합니다. 아버지는 영이십니다. 아버지는 사랑이십니다. 아버지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그분의 영광 안에서 그분의 마음에 일치가 될 때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무슨 질병이든 치료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피부에 작은 상처가 난 것과 폐암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그분에게 있어서는 둘 다 똑같은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아멘! 더 이상 마귀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로 침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누구든지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갈 자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아멘! 그분은 우리가 잃어버린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다시금 맛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인자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날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아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나의 잘못된 생각도 회개하십시오. 주님! 내가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 과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더 높은 놀라운 차원의 치유를 얻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에 의해서 온전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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