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 장 설교 | 기도해야 그가 삽니다 (창세기 20:1-18)_주일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181202 153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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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해야 그가 삽니다 (창세기 20:1-18)
주일예배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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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실패와 넘치는 은혜(창 20장) – 유평교회

본문 : 창세기 20장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인 20장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별명과 전혀 어울리는 않는 아브라함의 실패를 볼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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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1/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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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장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새벽기도 설교

본문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남방 그랄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이주 직후 아브라함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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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tynch.kr

Date Published: 7/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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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9(화) “창세기 20:1-18” / 작성: 김순식

본문 창세기 20장 1-18절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아브라함이 남쪽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할때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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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3/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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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월 19일. 창세기 20장. – 하늘품은교회

창세기 20장.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1. 본문은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임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위기에 처하게 된 상황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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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3/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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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말씀 및 설교 영상 – 인생을 망치는 편견 < 창세기 20장 1절 ...

창세기 20장 10절 말씀인데 이 구절은 두 사람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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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eolinchurch.com

Date Published: 9/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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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노승수의 강해설교/창세기강해. 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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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ewisnoh.tistory.com

Date Published: 7/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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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1설교 / 창세기20장8-18절 / 네수치를가르게하였노라

창세기 20장 8-18절.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라. 가나안 땅에서의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인 사라를 애굽 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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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1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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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창 20:1-18) – 하나님의 …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eSB6iiZCfUM?t=3525. 2020년 6월 7일 주일예배 … (창세기 20장 1~18절). [들어가는 말]. 어떤 실수를 반복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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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pccoh.org

Date Published: 7/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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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변명 그리고 기도 (창세기 20:1-18)

요즈음 저희가 묵상하고 있는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 19장에서는 롯, 20장에서는 아브라함이 깊은 골짜기로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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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hyang.de

Date Published: 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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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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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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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실패와 넘치는 은혜(창 20장)

주제 : 반복되는 실패와 넘치는 은혜

본문 : 창세기 20장

설교자 : 이병권

오늘 본문인 20장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별명과 전혀 어울리는 않는 아브라함의 실패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의 실패가 있는 곳에 또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반복되는 실패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후, 마므레에 거하던 아브라함은 네게브라는 지역을 거쳐서 그랄이라는 곳에 거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예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 했던 일을 반복합니다. 어떤 일입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일입니다.

애굽의 일로부터 대략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전쟁에서 승리를 허락하시기도 하셨고, 그의 간구에 응답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신앙의 레벨이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믿음의 분량이 자라서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이전과는 다른, 뭔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실망스럽게도 아브라함은 25년 전과 똑같은 일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 거짓말의 결과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서 사라를 데리고 갑니다.

지금 사라의 나이가 90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가 이해하기 좀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사라가 타고난 동안에다 방부제 미모였는지 아니면 특별한 피부 관리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하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라가 정말 예쁘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파는 비겁한 행동을 다시 반복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의 나이로, 여러 경험을 하며 연륜을 쌓았지만, 자신에게 어려움이 생기자 똑같은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좀 한심해 보이십니까? 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나도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 자신도 아브라함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경험하는 실패들, 그 중에 많은 것들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전에 했던 실패를 또 다시 반복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 많습니다. 사실 나를 얽매이게 만들고, 나를 무너뜨리는 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습관적인 죄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사투리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쓰니까 여러분은 제 고향이 경상도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계시겠지만, 제가 편하게 별 생각 없이 말하면 사투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쌀’을 ‘살’로 발음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못 알아듣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더 익숙하고 편한 게 있습니다. 죄도 그러합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특별히 나에게 더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또 넘어집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특별히 약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과한 욕심 때문에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죄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권위에 반항하는 태도가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과 부딪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부딪치고,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딪칩니다. 위에 있는 권위에 따르지를 못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반복해서 실패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한번 팍하고 터트리고 나서, 자신은 뒤끝이 없다고 말합니다. 뒤끝이 없는 것은 좋은데, 앞 끝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뒤끝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이 문제입니다. 남의 말을 함부로 해서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되는 겁니다. 반복되는 같은 종류의 잘못들, 알지만 또 다시 실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어떤 사람에게는 성적인 유혹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약한 부분입니다. 자신에게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며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이렇게 또 다시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한 번은 봐 줄 수 있었지만 두 번은 안 된다. 이제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이렇게 하셨을까요?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또 다시 아브라함의 편에서 일을 진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고를 수습하시는 겁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3)

아비멜렉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사라를 데려왔다가 자신이 죽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4-5)

아비멜렉의 이 말은 아브라함이 소돔을 중보하면서 하나님께 했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범죄하기 전에 미리 그를 막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돌려보내라고 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7)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선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선지자라는 단어가 여기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선지자로서 할 일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도 소돔을 위해 기도했었고, 지금 이 시점에서도 선지자로서 기도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일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실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서 또 다시 불순종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의 선지자의 자격을 무효화 하거나, 그 역할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알고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8절에서 16절까지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아비멜렉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아비멜렉이 믿음의 조상 같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같습니다. 조금 헷갈리기도 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9-10)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방인 아비멜렉에게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혼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왜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묻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라함에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우리가 자주 그러는 것처럼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11-13)

아브라함은 이곳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브라함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8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그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사라가 아브라함의 이복누이로 아내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브라함이 사라를 이복누이라고 말한 것은 상대를 속이고 사라가 아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의도한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하는 말들은 핑계일 뿐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대처하는 태도에 있어서, 상황을 탓하고, 사람을 탓하고, 변명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우리는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나의 잘못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에서 돌이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애통함으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설픈 핑계와 구차한 변명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못했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바로 알 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변명은 이렇게 끝나고, 아비멜렉의 행동이 이어집니다. 아브라함의 온전치 못한 변명에 비해서 아비멜렉의 행동은 파격적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의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합니다. 그는 사라를 돌려보내고 양과 소와 종들을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줍니다.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애굽 사건에 이어 또다시 재산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이 신문에 나온다면 어떤 제목으로 나올까요? ‘아내를 팔아서 부자가 된 아브라함’ 별로 기쁘지도 않고, 떳떳하지도 않은, 찝찝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의 보상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거주 할 수 있는 땅을 제공하였고, 사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당시의 방법대로 은 천개를 줍니다. 특별히 16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사라의 남편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거짓말을 따라서 ‘오라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은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의 마음을 뜨끔하게 했을 것입니다.

잘못은 누구나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잘못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비록 상대의 거짓말 때문에 잘 알지 못하고 실수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필요한 보상을 다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을 말하며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핑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잘못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보상 이후 아브라함은 선지자로서 하나님께 아비멜렉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패와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의 실패가 그분의 은혜를 없이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연약함이 그분의 은혜를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습니다. 우리가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크기를 넘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브라함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지금도 반복되는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더 큽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자녀가 몇 번 잘못했다고 인연을 끊자며 집에서 쫓아내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다면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혹시 아브라함처럼 실패하셨습니까? 그것도 같은 잘못을 또 저질렀습니까? 이제 좀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또 넘어지셨습니까? 고쳐지지 않는 나쁜 습관 때문에 좌절하고 계십니까? 그렇다 하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죄가 있다면 진심으로 자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당신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주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용서가 죄의 모든 결과를 없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죄의 결과로 오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귀의 거짓말과 송사에 넘어가지 말고, 변함이 없으신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이 넘치는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서로에게 은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없는 은혜를 받은 우리가 오히려 은혜에 대해서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가장 쉽게 범하는 죄가 다른 사람을 향한 정죄와 비판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는 것처럼,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잊어버리고 스스로를 괜찮다 생각하며 별것도 아닌 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관대하도록 합시다. 나의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도록 합시다. 사실 가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면서도 때로는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릅니다.

빌리 그래함의 아내인 루스 사모님이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혹시 사모님은 남편과 이혼을 생각해보셨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루스 사모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저는 이혼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살인은 여러 번 생각해봤습니다.’

가장 많이 사랑하며 서로에 대해서 용납해야 할 부부 사이라 하더라도 은혜를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낳은 자녀라 하더라도 은혜로 대하고 사랑으로 품어주기가 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지만 사랑하기 힘들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향해 판단하며, 정죄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랑하는 일이고, 서로에게 은혜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향해 마음을 넓히고 사랑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사랑을 담아서 말하고 은혜를 베풀도록 합시다. 서로에 대해서 친절히 대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은혜를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잘하려고 하지만 또 넘어지고 자주 실패하는 우리를 인내하시고 받아주시며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아침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죄와 실패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0장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새벽기도 설교

본문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남방 그랄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이주 직후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아비멜렉의 첩으로 빼앗길 뻔한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24년 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 자기 마음대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여 나아갈 때 실패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교훈해 줍니다.

여러분, 성경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 세상은 악한 마귀가 권세를 잡고 있어 악의 세력이 범람하고 있는데 성도 스스로는 이들의 공격을 이겨낼 힘이 없다’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를 대적하여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비록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그의 약속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품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혹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그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더욱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혜요,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3-7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사라가 아비멜렉의 첩이 되어 정절을 잃을 상황이 되자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도록 방치해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인류 구속을 이루어가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아브라함 또한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하고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비록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도우심과 인도함 없이는 구원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게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언제나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것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도우심과 인도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인하여 자신을 자랑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되며 항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사라를 범하려다 꿈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경고를 받은 아비멜렉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모든 신하를 불러놓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한 아비멜렉의 겸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하고 고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등 또 다른 죄를 범하기 일쑤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인이었고 자신의 권위를 생명과 같이 여기는 전제 국가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하들을 불러 놓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참된 용기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자였습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고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국가의 안위까지 보장받는 은총을 입게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나 깨달았을 때,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이 잘못을 범할 때 그 잘못을 숨기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용서하셨듯이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인으로서의 진설된 삶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 대신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자기 아내의 정절을 가볍게 여기고 거짓말을 하는 등의 매우 세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믿음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이었던 아비멜렉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아비멜렉을 향한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이 택함 받은 성도라도 세상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속적인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게 될 때 버리워져 사람들에게 밟히듯이 성도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삶을 살게 되면 세상의 조롱거리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가 세상에서 조롱받는 것은 그를 불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구원의 빛을 발하는 것은 물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2016/08/09(화) “창세기 20:1-18” / 작성: 김순식

본문 창세기 20장 1-18절

찬송가 15장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아브라함이 남쪽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할때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속임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죄로 잿더미로 변하는 놀라운 심판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백세가 되기까지 수차례 나타나서 말씀하시고 예언하시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셨습니다.(3절)

하나님은 비록 아브라함이 실수했을지라도 직접 개입하셔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필요하다면 꿈에서라도 나타나셔서 위기를 막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 때문에 너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을 건드리기만 하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고 일종의 협박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사실 아비멜렉은 잘못이 없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시험 들기에 딱 알 맞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아비멜렉의 편에 서지 않고 불의한 아브라함의 편에 섰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편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랄만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택한 백성들에게는 편애라고 느낄 정도로 그들의 편에 서십니다. 그러나 자기 집의 아들이 아무리 못된 짓을 한다고 해서 옆집에 있는 모범생 학생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과 같이 결국 자기 아들의 편에 서는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공정하냐 불공정하냐의 문제라기 보다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녀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속여서 이렇게 된 것이지 자신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비멜렉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항의하는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절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너를 막아 내게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저지른 죄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저지른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지른 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현몽하신 이유를 ‘그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려함’이라고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라의 몸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먼 훗날 사라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기 때문에, 그리고 사라의 몸에서는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기 때문에 그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그 여인을 범하지 말고 빨리 돌려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아브라함이 실수해서 이렇게 되었지만, 그 여인을 범하지 말고 빨리 돌려보내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라의 몸을 보호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네가 그 여인을 범할 때에는 정녕 너와 네 가족이 다 죽을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착하고 의롭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 받고 사랑 받는 까닭은 택함을 받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가 우리의 자녀 되었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택하셨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잘났건 못났건 간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8~10절에,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항의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불러서 따졌습니다. “내가 도대체 너에게 무슨 해를 끼쳤고 무슨 원한을 샀기에 네가 나와 우리나라를 큰 죄에 빠지게 했느냐?”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질문이었습니다.

11~13절에서 아브라함이 이 질문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첫 번째 이유는 이곳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혹시 누군가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나를 죽일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보다 좀 더 황당합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 여인은 나의 이복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누이였습니까 아니면 아내였습니까? 누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인척관계에 있어서 누이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더라도 사라는 ‘누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아내이고 누이는 누이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아브라함이 아내와 이렇게 약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셨을 때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둘이서 한 약속이지 이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잘못 판단하면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피해를 보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이렇게 변명하는 아브라함에게

14~16절에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 되었느니라”

아비멜렉이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하고 있으며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은 변명하고 거짓말하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에게 형편 없는 이유로 자기를 속여 하나님께 엄중히 야단 맞게 한 아브라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보내서 그를 후대했습니다.

17~18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부인과 은 일천 개를 받은 아브라함은 너무나 미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사라를 데려 갈 때부터 닫아 두셨던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다시 다 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연약함을 아시고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성, 우리의 윤리, 우리의 선행에 상관 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이에 상관 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아브라함만 실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 보면 사라도 거짓말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 다 거짓말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실수가 많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절대 선택과 절대 사랑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녀 삼아주십니다.

두 번째 사실은 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선택 받은 사람과 똑 같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동일한 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구약의 최초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의 기도로 네가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인데도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으라고 명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후대한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잘못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이기에 양과 소와 노비와 은 일천 개를 그의 아내와 함께 돌려 보냈으며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택한 자의 중보기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롯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집의 닫혔던 태를 모두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택한 자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택한 자의 기도는 가정을 살릴 수 있습니다.택함받은 자의 기도를 통해 이 민족을 고치시며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함 받은 자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해야할 이유가 있다면 택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젊어서나 나이가 들어서나 죄악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를 사랑하시고 자녀삼으셨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일치 않고 지켜나가게 하시고, 주님 주시는 능력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히는 자녀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속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아브라함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3. 아브라함의 거짓말에 대하여 아비멜렉이 취한 행동은 무엇인가요?

4. 본문을 통해 깨달을 수있는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

(작성:김순식)

매일말씀묵상. 1월 19일. 창세기 20장. > 매일말씀묵상

창세기 20장. 하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1. 본문은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임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위기에 처하게 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12장의 사건과 달리 하나님의 약속의 땅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2. 아브라함은 또다시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비겁한 모습을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11 절 )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아비멜렉 앞에서 말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도 그는 동일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물론 인간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그렇습니다.

3. 그러나 아브라함의 더욱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는 “ 세상을 두려워함 ” 입니다 . 그로 인하여 습관화된 죄된 본성입니다 . 세상 어디를 가나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으므로, 아내 사라로 인하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하고, 더 중요한 아내로서의 신분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아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세상에서의 고독 , 두려움 , 이질감이 아닐까 합니다 . 인간 내면 더욱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무의식에 가까운 자기 방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써 당하는 위험을 모든 기독교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의식 수준 그 이상의 더욱 고착화되어버린 , 습관화 되어 버린 , 본인조차도 알지 못한 채 , 굳어버린 죄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

4. 아브라함은 지금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지금은 12장의 때와 사정이 다릅니다. 자신과 사라를 통하여 후사를 주실 것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 더욱 사라의 태를 보호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라를 이방인에게 내어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방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그 안에 자리잡은 오래 묵은 죄와 연약함을 처리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 다시 한 번 이방인 앞에서 그의 죄악의 수치가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 그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 오래된 죄와 맞닥뜨리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이 죄의 처리가 불가피함을 보이셨습니다 . 소돔과 고모라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이방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던 아브라함이, 이방인 앞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5.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의 실패와 연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사라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심으로 사라의 태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수치를 드러나게 하심과 동시에, 그가 가지는 복된 지위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라 칭하신 것입니다 (7 절 ). 선지자라 칭함을 받을만한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그 어느 때보다도 아닙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앞에서 아브라함의 지위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해주시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모든 세상 나라와 이방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격 없는 아브라함이 기도하니 하나님의 복이 다시 열렸습니다 (17-18).

6. 롯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원하신 것처럼, 아비멜렉의 경우에도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과 그의 집의 태를 다시 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수 있지만 ,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이 선지자임을 알리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은혜와 축복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그래서 자신에게 허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에게 예를 다하였고, 아브라함에게도 호의를 다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만민이 복을 얻게 하시겠다고 하셨던 그 복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고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동일한 죄를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결단하면서 여전히 늘 지었던 그 죄를 다시 반복하며 살아갑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죄를 짓지 않고 살만도 하지만 여전히도 동일한 죄를 반복하며 사는 것은 세상이 참 무섭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 있음을 믿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그 은혜의 날개 안에 살아가도록, 그러한 중에 죄를 끊으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생을 망치는 편견 < 창세기 20장 1절부터 18절>

설교영상 https://youtu.be/xbbNEgMGxzE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이 한 구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0장 10절 말씀인데 이 구절은 두 사람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약간의 추궁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럼 아브라함이 무엇을 잘못하였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0장 2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데려간 이유는 자신의 아내를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들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비멜렉에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창세기 20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은 남편이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네가 죽으리라는 말은 원문을 보면 너를 보라 라는 감탄사로 그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네가 죽으리라는 말인데 이 말은 너는 죽은 자이다 또는 죽어가고 있는 자이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지금 살아 있지만 죽은 자이며 죽어가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면 시기의 문제지 피할 수 없고 도망할 수 없기에 너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일은 아비멜렉에게는 큰 공포와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두려움과 공포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변호하는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십니까? 아비멜렉은 자신의 삶이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로 자신이 죽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에 다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돌려보내면 죽이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만나서 묻는 10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데 창세기 20장 11절을 보면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편견이 나오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누구 한데 물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생각은 아내를 아비멜렉에게 빼앗기고 되찾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가 남들을 속이는 이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는데 첫째는 그가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는 말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즉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자신의 아내를 지킬 수가 없는 분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 하고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이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에 때문에 보고 듣는 것과 부딪히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도 이것은 어쩔 수 없어, 하나님도 해결하지 못하시지, 내가 믿는다고, 기도한다고 해서 내 상황이 좋아지거나 문제가 해결 될 수 있겠어라는 절망이 이미 학습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신앙이 무기력감에 빠져서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편견이 얼마나 강한지 아브라함은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는 애굽왕 바로에 의해서 한번 자신의 아내를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책망하고 징계하심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다시 돌려 받게 하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 환경이 바뀌었다고 하나님의 약속이 변경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8장 14절을 보면. 여기서 기한이 이를 때에 라는 말은 1년 후에 라는 말입니다. 그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누구에게 하시는가 하면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내년 이 맘 때에 너는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을 때까지 죽을 수 없는 자이며, 그의 아내 사라는 아비멜렉의 아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들을 반드시 낳을 것이기에 결코 다른 이의 아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 약속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그가 하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이런 불신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것이야 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을 보면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에서 명철은 understanding 또는 insight 로 번역 되는데 너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이해나 판단력이나 분별력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적용하면 너의 편견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어리석은 편견을 버리고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편견을 극복하는 길이며 우리의 삶이 온전해지는 길입니다. 편견은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내 안에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날마다 직시하고 주의하며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창세기 20장 강해, 두 번째 겪는 씨의 위기의 의미

노승수 목사

창세기 20장은 창세기 12:10-20의 애굽 기사의 반복처럼 보인다. 12장은 바로와 관련한 기사이고 20장은 에비멜렉과 관련한 기사라는 차이점을 제외하면 둘은 같은 내용, 곧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기사다. 이를 두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같은 사건의 다른 자료의 기사의 배치라고 본다. 내용의 유사성 때문에 각기 다른 전통의 기사가 편집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좀 더 본문을 유심히 보면, 독특한 지점이 있다. 예컨대, 12장의 기사는 3절의 예언의 성취이자 씨에 관한 계시 후 닥친 첫 번째 위기라는 점이다. 이 사건 후 아브람과 롯 간에 분쟁이 생기고 갈라선 후(13장), 발생한 전쟁에서 롯을 구하고 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 계시를 듣는 사건으로 이어진다(14장). 그리고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신칭의의 거듭남을 경험한다. 16장을 통해서는 혈통의 씨가 참 씨가 아니라 성령의 씨가 진짜 씨라는 점을 계시하고 17장에서는 할례언약을 통해서 마음의 할례, 곧 성령을 보증하신다(엡 1:13, 행 1:4, 갈 3:14). 18장에서는 이삭의 출생의 약속과 심판의 중보가 그리고 19장에서는 심판이라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다시 12장과 같은 행태의 사건으로 돌아 간 것이다. 이는 바로가 꿈꾼 두 꿈은 하나이며(창 41:25), 이 두 사건이 거듭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기 때문이다(창 41:32). 12장에서 바로 기사가 있고 난 후에 15장에서 약속이 있었던 것처럼 20장에서 아비멜렉 기사가 있은 후 그 구체적 징표인 이삭이 출생한다(21장). 16장에서 이스마엘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 것처럼 21장에서는 이스마엘을 내쫓는다. 성령의 약속 후에(18장), 19장에 심판이 오는 것처럼 이삭의 출생 후에 22장에서 모리아 산에서 심판이 온다. 창세기 22:2의 모리아 산은 역대하 3:1에서 보면 예루살렘이며 다윗이 계시를 받은 타작마당이다(대하 3:1). 이 장소는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이다(대상 21:15 비교). 이 타작마당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그 진노가 누끄러뜨려지고 화목케 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며 이 장소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바울은 이 진노의 누그러뜨림을 로마서 3:25에서 화목제물로 묘사했다. 마태복음 3장의 세례요한, 곧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 구약 계시로서 그리스도를 최후로 묘사한 요한은 바로 이 타작마당의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을 그린다. 그리스도의 길을 바로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지실 적을 예표한 것이다. 그가 오해한 것은 이 심판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에게 이뤄질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서 아브라함의 삶의 계시를 살펴보는 중에 두번의 반복은 이 일이 확정되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바로 18-19장에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로서 또 그 일에 아브라함이 정의와 공도로 함께 다스릴 것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었다면 22장의 모리아산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준비하심을 계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데라 톨레도트로서 아브라함의 기사는 12-19장과 20-22장으로 나뉠 수 있고 그 기점이 되는 사건이 바로 씨에 대한 위기와 침습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 통치의 도래이며 이 통치는 바로 죄를 진멸하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도가 시행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없기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구원얻을 길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주듯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선에 이르러 구원을 이를 수 있는 이가 없고 하나님의 의의 조건을 충족할 이도 없다. 이로서 우리 운명은 진노의 길 외에 달리 다른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진노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지난주 배웠던 19장의 사건 역시 진도 중에서 하나님의 세심하신 살피심과 아브라함의 중보로 드러난 대로 자비하심이 롯의 구원의 과정에서 보여진 것처럼 그 계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일, 곧 자비의 구원이 펼쳐진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이 길에 무임승차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나눈 그 사랑에(요 17:24)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믿음으로 연합하는 길 외에는 없다(롬 6:5). 그래서 믿음은 바로 이 구원 역사를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며 그의 약속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다.

그런 점에서 20장의 사건은 단순히 12:10-20의 반복이 아니라 계시의 점증으로 읽어야 한다. 12장에서는 단지 부르심을 입은 구도자였다면(15:6에서 중생함), 20장에서는 선지자로 소개된다(20:7). 아브라함의 이런 면모는 이미 19장에서 드러났으며 이 중보는 그리스도의 예표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가 된 것은 바로 15:6의 이신칭의의 사건으로 거듭나고 18장의 할례언약으로 성령을 보증으로 약속받는 사건 후의 일이다. 그의 중보로 진노가 거둬질 것이라는 계시가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주어진다(20:7). 이에 따라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의 집이 치료된다(20:17).

여기에 더해 20:3-6에서 보듯이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몽하셨다. 미리 막으실 수 있는 일이지만 사태가 벌어진 후에 수습을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문제 곧 사라를 누이라 소개하는 문제에서 사라와 이미 합의를 오래 전에 본 상태다(20:11-13). 사단의 궤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비상한 간섭으로 아브라함과 사라로부터 날 씨를 보호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태의 열고 닫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깨닫게 하신다. 그들이 처음에 생각하던 것처럼 21장의 이삭이 단지 혈통에 의한 출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출생이라는 점을 이 아이러니한 사건을 통해서 교훈하신다. 아마도 사라가 임신이 임박하면서 전에 임신할 수 없었던 상태, 곧 생리가 끊어진 상태가 개선되면서 노파가 아니라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회복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아비멜렉이 유혹을 받았을 것이고 이런 일이 생길 때 부부가 통상적으로 해오던 것을 해온 것뿐이다. 우리가 교훈 받아야 할 부분은 선한 일이 가까이 올 때, 악한 일도 함께 온다는 것이다. 이 시험에서 신실한 자가 승리한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이 일에 개입하심으로 이것이 단지 혈통의 출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가 약속의 후사를 잇는 사건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서 하나가 되어 자라갔다(엡 4:13). 이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의 복이며 우리가 누릴 영적 지위를 보여준다. 정의와 공도를 행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문제도 아브라함과 나누셨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상의 태의 열고 닫음과 망하고 일어섬이 아브라함의 기도에 달렸다. 우리를 이런 자리로 부르신 것이며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누리는 영적 지위가 이와 같다.

191201설교 / 창세기20장8-18절 / 네수치를가르게하였노라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0장 8-18절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라

가나안 땅에서의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인 사라를 애굽 왕에게 내어주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아내라는 것을 속이고 누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의도 가운데서는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이기 때문에 사라를 자신의 아내로 소개하면 혹이라도 사라의 아리따움을 보고 자신은 죽이고 아내는 취하여 갈 거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든 거짓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모습은 아닙니다. 분명 사라는 자신의 이복 누이이긴 하지만 결혼을 통하여 아내가 되었다면 아내로서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을 숨기고자 또 다른 사실을 가지고 은폐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분명 인간의 부패성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애굽 왕이 자신의 후궁으로 삼기 위해서 데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동침하지 못하도록 애굽 왕에게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 난 뒤 그가 살던 곳에서 다시금 이동하여 네게브 땅,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로 옮겨오게 되었을 때 애굽에서 실수했던 동일한 실수를 다시금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연단하시면서 믿음에 믿음을 더하셨는데, 창세기 20장에서는 마치 애굽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처럼 동일한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연약한 존재 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넘어졌던 것에 또 넘어집니다 . 개들이 토한 것을 먹는 것처럼 우리 역시 토한 것을 먹고 또 먹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반복적입니다 . 죄를 짓고 난 뒤 하나님께서 분명 교훈하셔서 죄를 회개하지만, 회개했다고 해서 더 이상 동일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은 죄를 또 짓고 또 짓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미움보다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더 크십니다 . 때로는 징계하시는 일도 있지만 히브리서가 잘 증거 하고 있는 것처럼 자녀이기에 징계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만드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히12:8). 반면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일반 은총이라고 불리는 내용도 있지만, 그런 은총보다 죄에 대한 진노가 더 큽니다. 모든 사람에게 내리시는 일반적인 은총의 내용이 있지만, 그들이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처럼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일일이 진노하시고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 오래 참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 저들의 죄를 밝히심으로 저들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도록 하십니다.

혹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들에게는 미움보다 사랑을. 어떤 자들에게는 은총보다는 진노를 내리시는 것이 어떻게 공평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공평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것을 공평이라고 한다면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날씨의 변화를 통해 어떤 나라는 비가 많이 오고, 어떤 나라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그런 나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다른 모습으로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 되었지만 그 가운데 일부를 구원하셨다고 할 때 죄에 대하여는 벌을, 선에 대하여는 복을 약속하신 것이 공평입니다.

특별히 선에 대하여 복을 약속하셨다고 할 때 그 선을 그의 아들 안에서 이루시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에 대하여 얼마나 큰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본래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을 통하여 죄책을 제거하시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가운데 역사하시되 은혜의 방편인 말씀을 사용하셔서 믿음 안에서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사건을 볼 텐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죄악 속에서도 자신의 뜻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꿈이라는 방식을 통해 아비멜렉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는데, 8절을 보시면 “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고 기록합니다. 꿈의 방식이지만 꿈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효력 있게 하신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달리 말하면 꿈을 통해 들었던 말씀이 거짓이 아님을 그 마음에 새기셨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대하여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 왕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 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증거 합니다(히1:1-2a). 구약의 경우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데, 이때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은 구약과 같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신 그런 방식은 아니라는 이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는 꿈을 통해 말씀하시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할 때 신약에서는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그리고 목사와 교사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이해도 있습니다. 다만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는 비상직분입니다. 신약 시대에 한시적으로 있었던 직분일 뿐입니다. 때문에 지금도 그와 같은 직분이 있는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항존직분으로서 목사와 교사를 세우셨는데, 바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말씀사역자인 목사를 통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길 기쁘게 여기셨는데, 이방인 왕조차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종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말씀사역자들의 말씀을 통해 순종하도록 하는 역사를 펼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방 왕은 자신이 꾼 꿈의 내용이 두려워 순종하는 역사를 보여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으로 말미암은 두려움을 주셔서 순종하게 하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다만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은혜와 감사와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는 역사도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비교해서 말한다면 저들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역사가 있지만, 우리는 두려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많은 부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역사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꿈의 방식을 통해서 효력을 발휘하신 하나님이라면 , 동일하게 말씀 전파의 방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반드시 효력을 발휘하십니다 .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은 결코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썩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라는 것입니다. 썩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마치 살아 역사하는 것처럼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있는 것이고(벧전1:23 참조), 그래서 거룩해져가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요17:17 참조).

어쨌든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두려움을 주셨을 때 아비멜렉은 그 일의 자초지정을 확인하고자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왕이라 할지라도 탐욕의 마음으로 한 사람 이상의 아내를 두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거짓을 고함으로 아내가 아닌 누이인 줄 알았다는 측면에서는 억울할 수 있는 입장 이기도 합니다. 그가 거짓을 고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하였는지를 묻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이후 말씀을 통해 말하게 되지만, 지금 아비멜렉의 질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그것도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자신과 자신의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한 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 물론 처음부터 그랄 왕이나 그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인식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그런 인식 가운데 있었다면 그나마 그랄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도덕적으로 볼 때 소돔처럼 심각한 그런 상태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을 붙들어주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본래 그런 인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고 난 뒤 그 마음에 두려움을 주셨을 때 이런 죄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십니다. 이방 나라의 왕으로 있지만, 그래서 여호와의 도를 배우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이방 나라의 왕조차 무엇이 죄인지를 인식하도록 하십니다.

나아가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면 그의 아내를 취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을 뻔하였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이 사건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 많은 부분 아브라함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사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죄는 숨기되 죄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으면 씌웠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마치 무죄하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처신할 때가 많습니다. 아비멜렉의 자세가 그런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주 봤던 본문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미 꿈속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신 사실입니다. 6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물론 이 일까지 하나님의 역사로 있어서 곧바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그의 행동을 제어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일인 것처럼 돌리는 방식인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조금 전에 남의 아내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본래부터 죄에 대한 인식이 있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두려움으로 인하여 그런 인식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많은 부분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랄이라는 성은 본래부터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는 것을 죄로 여겼고, 그런 법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양심을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레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 나를 속였느냐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의 질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살핀 이유와 같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에 아내라고 하면 자신은 죽이고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는 취하여 가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에 거짓을 말했다 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그랄 왕이나 그 나라 백성에게 정당한 평가를 돌린 것이냐 ? 그렇지 않습니다 . 왜냐하면 지금 아브라함의 생각은 지레짐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 12장의 내용 속에서도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십계명 중 아홉 번째 계명은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거짓을 말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지 말라는 명령은 적극적으로 하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거짓이 아닌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아브라함은 참된 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짐작한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아브라함의 이 말은 거짓을 증거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제 9계명,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할 때 이 계명이 가지는 개요가 이웃의 선한 명예를 깎아 내리지 말고 그것을 유지시켜 주는데 있는데, 지금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자신이 잘못한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가?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인정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경감시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의 아내인 사라가 실제 자신의 이복 누이라고 말합니다 . 물론 이것 자체는 사실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한 가지 사실을 가지고 다른 한 가지를 숨기려고 한 것이라는 측면에서는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 나아가 이복 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내가 되었다면 아내로서 아브라함 옆에 있는 것이지 이복 누이로서 옆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당연히 아내로 소개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이 아니라 거짓일 뿐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혹은 자신의 죄를 좀 가볍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못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숨기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면서까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죄를 좀 더 가볍게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속였다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자신의 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속이는 죄까지 더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결코 모르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런 저런 핑계 대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죄를 숨기고 죄를 경감시키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핑계 대다가 또 다른 죄를 더하기 때문에 죄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끊어냅니까?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끊어내야 합니다. 솔직함으로 끊어내야 합니다. 이런 저런 핑계, 변명으로 숨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을 때 사람들이 행하는 바가 다른 사람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서 죽이기까지 하는 이 내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소돔의 죄악상을 생각하면서 마치 이와 방불한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 보면 실제 인간의 본성이 이런 모습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같은 경우는 사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나마 사람들의 양심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자손 중 라멕이라는 사람처럼 자신에게 상처를 줬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의 율법 해석처럼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함을 주면 실제적인 살인은 아닐지라도 마음으로 미워하거나 욕하는 일 등을 생각해보면 하나님 앞에서 누가 살인자라는 죄명을 벗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곳에는 얼마든지 사람들이 죄악을 향해 질주할 수 있다 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방금 말씀드린 라멕이라는 인물이 행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23절을 읽어드리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이런 외형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 일들로 비일비재합니다.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일이 해결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결코 죄악을 향한 질주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악을 향해 질주할 뿐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럴 수 없습니다 . 무엇보다 우리 안에도 부패성이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주심으로 그 길을 막고 계시다 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죄악 속에서 보호하시고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내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죄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무겁게 합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해 보십시오. 미워하는 마음이 어떻게 즐겁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마음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말씀을 통해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 생각해 보시고, 나아가 죄에 대한 징계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멸망시키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유가 되어 죄에 대하여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고, 싫어하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13절을 보시면 “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 여기서는 자신의 삶이 나그네 인생임을 밝힙니다. 나그네 인생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날지 모릅니다. 많은 부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아리따운 아내로 인하여 자신의 목숨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서 어디를 가든 아내를 아내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라비와 누이 관계로 말하자고 이미 말했다는 겁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올 때부터 그렇게 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는 첫 번째 실수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자신의 죄악을 경감시켜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받은 바에 대하여 다시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올바르게 처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은 12 절의 자세와 같이 자신의 죄를 조금이나마 경감시키려고 하는 의도 에서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그 말이 옳은가 판단해야 합니다 .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베푸신 그런 은혜를 그랄에서도 동일하게 베푸십니다. 14절을 보시면 “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 한편으로는 자신이 죄를 지을 뻔한 일에 대하여 보상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인 줄 모르고 데려왔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보상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두려움도 있었다 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지난주 본문인 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때문에 아브라함을 후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잘못으로 판단하자면 아브라함의 거짓이 앞섰기에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지자인 아브라함을 후대하게 되었던 것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12장과 동일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우리가 심는 것은 죄악과 관련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죄악에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 거기에 긍휼을 더하신다 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징계가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만,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항상 징계로만 대하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무엇보다 반복되는 죄에 대해서조차 이런 모습으로 있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한이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이유로 자신의 반복적인 죄악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주의를 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과 비교해 오늘 본문이 약간 차이가 있는 것은 애굽 땅에서는 소유를 가지고 애굽 땅을 떠나게 되었다면, 그랄 왕은 계속해서 머물러도 좋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 앞서 그에게 두려움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두려움은 선지자인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이 될 수도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너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면 산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 이런 이유에서 그랄 왕은 양과 소, 종들을 줄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살 수 있도록 까지 후대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양과 소, 종들을 줄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신 결과가 저쪽은 잘못했고 이쪽은 잘못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비멜렉이 주는 자로 있다고 해서 아비멜렉은 잘못, 아브라함은 받는 자로 있다고 해서 아브라함은 잘못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잘못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백성에게 관대하게 행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신다고 해서 많은 것을 주시는 것이 곧 내가 잘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분명 잘못이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관대하심이 그 죄악을 덮는 일까지 있는 겁니다.

이어 16절을 보시면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 이미 남편임을 알고 있지만 사라에게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만 속인 것이 아니라 아내인 사라 역시 아브라함을 오라비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창20:5 참조). 그리고 이런 표현을 통해 사라의 잘못도 드러내십니다. 즉 수치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말 번역은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이때 ‘그것으로’라는 말이 우리말 번역에서는 ‘은 천 개’를 가리키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오라비인 아브라함이라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히브리어 원문은 3인칭 대명사 단수로서 번역에 따라서는 ‘그’도 될 수 있고, ‘그것’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이때 사라의 수치를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은 천 개인가, 아니면 사라가 오라비라고 한 아브라함인가? 칼빈은 사라의 남편인 아브라함이 그의 수치를 가리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너는 아브라함을 오라비라 하였지만 그런 거짓된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네가 오라비라고 말한 그 사람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요, 그를 통해 그의 수치스러움이 가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방 왕을 통해 아브라함과 사라를 책망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 된 자가 이방인으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자기 백성이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정신 차리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아내 된 사라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이 남편인 아브라함이라고 할 때 우리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신부된 우리는 점과 흠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보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못한 모습으로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책망을 받을만한 모습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랑 되신 남편으로 통해 그 수치를 가리십니다. 아내의 수치를 신랑이 가립니다. 이것이 신부된 교회의 감사 내용입니다. 수치스러움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인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수치를 다 가려주십니다. 가려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한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방 나라 왕에게 받고 있는 대접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셨기 때문에 대접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거짓이 드러났다면 대접이 아니라 보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보복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꿔주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사건이 아름답게 마무리 되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비멜렉과 그 집안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는데,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 이것은 앞선 본문 7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신 바에 대한 것입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한 것으로 인하여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시는 벌을 내리셨던 겁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았다고 할 때 그것을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일인가? 그래서 이 사건이 하루 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을 요하는 그런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사라를 데리고 있었던 시간이 그만큼 길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라를 보존하신 일이 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할 때 하루아침에 그것을 확인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시간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미결로 남겨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간 것이 큰 잘못으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바로 그런 인식이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 일에 대하여 이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응답 하시사 닫으셨던 태를 열어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20장의 내용을 보고 있지만, 21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리브가를 맞아 아내로 삼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조차 아내 리브가의 아르따움으로 인하여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똑같은 거짓을 고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부전자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인간의 부패성이 얼마나 깊고 반복적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삭에게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반복적인 죄악 된 모습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반복되는 죄악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긍휼을 자기 백성에게서 거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 외에 내놓는 것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죄, 죄, 죄만을 내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죄악 속에서 우리는 지키십니다.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풀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은혜를 기억하는 자로 있다고 할 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주의 명령에 순종하되, 금하신 것을 금하고 명하신 것을 행하는 자로서 주 앞에 서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창 20:1-18)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eSB6iiZCfUM?t=3525

2020년 6월 7일 주일예배

✦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13 ✦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20장 1~18절)

[ 들어가는 말 ]

어떤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른 경험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했지? 다시 이런 일을 하나 봐라. 다시는 이런 실수를 안 해야지.’ 하고는 또 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만약 그런 경험이 있으시다면, 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우연입니까? 아니면 어쩌다 보니까,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까?

사실은 그 부분이 자기 내면의 약점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심장이 뛰고 어쩔 줄 모르는 부분, 굉장히 긴장되고 불안해지는 부분, 또 자기 삶에서 반복되는 실수를 저지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다가 또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 부분에 대한 상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아직 다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몇 주 전부터 아브라함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로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그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수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는 가운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조금씩 믿음이 자라가고 성숙해진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이 많은 문제들과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그런 상황들을 그가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얻기 위하여 그의 삶을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살펴보았던 12장에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왔는데 거기 기근이 드니까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 갔을 때 사람들이 사라로 인해 자기를 죽이고 빼앗을까봐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오히려 애굽 왕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겼던 경험을 했습니다. 그 당시 고대사회에서 남의 여자를 강탈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염려한 아브라함이 나름대로 수를 쓰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스스로 꾀를 냈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아브라함을 위기에서 구하시고, 오히려 많은 재물과 짐승과 종들을 얻어서 애굽에서 나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때로부터 25년이 흐른 시점인데, 25년이 지난 지금 아브라함은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때 애굽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에 뭔가 문제가 남아 있었다는 것, 아직 상처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아브라함의 반복된 실수의 진짜 원인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1절)

19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다음, 아브라함은 원래 살던 중부 세겜 지역으로부터 남방으로 이사하는데, 남쪽 광야에 가까운 가데스와 술 사이에 있는 그랄로 갑니다. 나중에 이곳이 블레셋이고 상당히 남쪽 광야에 가까운 곳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 결과도 똑같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2절)

그랄에 와서도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갑니다. 왜 이때도 또 누이라고 했습니까? 뒤의 11절에 보면 그가 그곳 사람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혹시 자기를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이 데려가는데, 큰 위기에 빠진 겁니다. 애굽에 갔을 때는 아직 그 약속을 받지 않은 때인데, 바로 얼마 전에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내년 이맘때쯤에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깁니다. 그러면 이삭을 어떻게 낳습니까? 그러니까 엄청난 위기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후손이 나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때 또 다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3절)

아브라함과 사라가 서로 ‘오빠 동생’이라니까, 그랄 왕 아비멜렉은 별 생각 없이 사라를 취하여 들이게 되는데,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너는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남의 아내를 취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때 아비멜렉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4-5절)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주님은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했고 사라도 아브라함이 자기 오빠라고 했으니까, 아비멜렉은 그냥 순수하게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했다고 대답합니다.

아비멜렉의 이러한 말은 사실입니다. 아비멜렉이 잘못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사라가 자기 누이라고 했을 때 왜 그것을 무조건 믿고 맞아들입니까? 나이가 90이 된 여인이 왜 지금껏 혼자인지 알아보지도 않습니까? 또한 아비멜렉은 이미 아내와 첩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또 다른 여인, 그것도 나이가 많은 여인에 대해 욕심을 부립니까? 그러니까 아비멜렉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곧 약속의 후사를 낳을 사라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보호를 해주어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를 방패로 삼아서 자기가 보호를 받겠다는 것부터가 잘못입니다.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해서 빼앗기는데, 애굽에서 그렇게 호된 경험을 하고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좀 이상합니다. 왜 또 아브라함이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지 사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 잘못 생각하더라도 25년 전에 그토록 호된 경험을 했는데 또 이러겠습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아브라함이 똑같은 실수를 또 범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마음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이 그의 약점이고 콤플렉스였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새로운 곳에 가거나 새로운 사람들에 둘러싸이게 되면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고 내 아내를 빼앗아 갈 것이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하자. 그러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90세가 다 된 자기 아내를 누가 빼앗아 간다고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해도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 사라는 정말 할머니(90세)입니다. 그 당시 나이로도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그런데 ‘내 아내를 빼앗아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거의 병적 수준이고, 굉장한 강박 관념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왜 이런 병적일 정도의 강박 관념을 가지게 된 것입니까? 왜 그랬나를 정확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자라면서 가정환경과 주변 환경에 따라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 중에는 이곳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지만 1세들 중에는 없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고 해도 이방인이고, 심지어 이곳에서 태어나 날 때부터 시민인 우리 2세들도 온전한 미국인으로 취급받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완전히 영어권이고 한국말도 잘 못하지만 겉모습만 보고 미국 친구들이 악의 없이 “Where are you from?”이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민자나 유학생으로 이 땅에 와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보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에만 사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도 이민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이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땅에서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불안정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까 두려움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도 물론 있었겠지만, 특히 가나안 생활을 통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러한 증상이 굉장히 심합니다. 이전에 자기 조카 롯이 소돔에 살다가 그돌라오멜이라는 왕이 연합군을 이끌고 와서 소돔 사람들을 잡아갔을 때,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기른 318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가서 물리치고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용맹한 군사들이 300명 이상이나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누가 와서 감히 자기 아내를 빼앗아 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지나친 망상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애굽에 갔을 때도 그랬고 이제 그랄에 와서도 그렇고, 이집트에서의 경험 때문에 군사들을 길러서 이제는 강력한 군사력도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의 방랑과 나그네 생활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이민 온 지가 올해 가을이면 34년이 됩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산 시간이 한국에서 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오래 되신 분들이 우리 교회에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 미국에 와서 교회에 가보고 느낀 것 중 하나는, 이민교회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상당히 많이 바뀌고 발전도 많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동남부 쪽에 있었는데, 교인들이 교회를 너무 자주 옮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만났을 때는 이 교회 직분자였는데 1년 후에 만나니까 다른 교회의 직분자였고, 또 그 1년 후에 만나니까 또 다른 교회의 직분자가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이 너무 이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런 것을 못 보았는데, 미국에서는 정말 사정이 있어서 옮기는 게 아니라 주로 다투고 싸우고 갈라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겁니다.

다투는 일도 정말 별 것 아닌 일이나 이슈가 될 수 없는 일로 열을 내며 싸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나중에 보니까 한국에서 제가 몰랐던 것이지 한국에도 많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민교회에 그런 일이 더 많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나도 이민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될 텐데, 이거 무서워서 하겠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 와서 15년 이상 여러분과 함께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민교회에서 일어나는 그런 현상들에 대해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특히 미국생활에 끼지 못하는 열등감과 소외감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혹시 갑자기 잘못 되면 어떡하나?’ 하는 긴장과 불안이 항상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는 것은 항상 불안하고 피곤합니다.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더라도 그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저번 주에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라는 사람이 백인 경찰관에 의해서 목이 눌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약탈과 폭동은 많이 잦아들고 평화로운 시위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어제도 뉴스를 보니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뿌리가 깊습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아프리카 노예 제도로 인해서 흑인들의 마음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상처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흑인은 이렇다.’라고 하거나 백인도 종류가 많기 때문에 ‘백인은 이렇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다.’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노예로 끌려와 산 것이 상처로 남아 있고, 불안과 두려움의 상처가 있습니다. 이게 쉽게 치유가 안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붙들었는데, 흑인영가를 보십시오. 그 가사와 음정이 심금을 울립니다. 그런 것은 그냥 나온 음악이 아닙니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늘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금 직장생활을 잘 하시는 분들도 ‘코로나도 그렇고 실업자가 많은데 언제 내가 잘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시대 때부터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함께 나그네 즉 외국인을 돌보라고 계속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이고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계층인데, 외국인을 그들과 똑같은 급으로 쳐주신 겁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는데, 그 아픔을 알면서 너희와 똑같은 고통을 당하는 너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착취하면 안 된다. 돌봐주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의 상처란, 마음속에 부적절한 두려움이 자주 찾아오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마음의 평안이 없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고통을 받는 마음입니다. 사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렇게까지 놀라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데, 과거에 받았던 어떤 상처 때문에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형태로 숨어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상황에서 부적절하게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이 두려움의 증상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이라는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이민자가 그렇습니다. 어릴 때 왔거나 2세, 3세는 그렇지 않은데 1세들에게 상처가 많습니다. 특히 1.5세가 가장 그렇습니다. 12~14세쯤에 온 그들에게 상처가 많습니다.

결국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거나 안정감을 잃어버리는 순간 갖게 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과거의 어떤 경험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마음속에 남아 있다가 부적절하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묵상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히 그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두려움의 상처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내가 들고 가고 지고 가면, 언젠가는 그것이 눌리고 눌리고 눌리다가 뻥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처리하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개입과 해결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하니까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가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25년 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겼구나?’ 하며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라 그렇게 한 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가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사실 이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한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방법을 썼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아내 사라를 빼앗겼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바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로 함께 해주십니다. 이 상황은 아브라함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울부짖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아비멜렉에게 병을 주시고 꿈에도 나타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아비멜렉이 결백을 주장했습니다(4-5). 그런데 나중에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비멜렉도 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가 모르고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자기 누이라고 했고, 또 사라도 아브라함을 자기 오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6절)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순수한 마음으로 한 줄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를 막아 범죄하지 않도록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아비멜렉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7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하시고 또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아비멜렉은 지금 아브라함을 해칠 수도 있고 간단히 죽여버릴 수도 있으며 그냥 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비멜렉과 그에게 속한 자가 다 죽을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하시며 초강수로 나오십니다.

“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8절)

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비멜렉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신하들을 불러 간밤에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그러자 모두 다 두려워합니다. 아비멜렉은 이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불러 왜 이렇게 행했느냐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9-10절)

아비멜렉이 지적하는 것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에게 잘못하거나 죄를 범한 것도 없는데 자기들로 하여금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주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래서 또 물으며 대답해보라고 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의 대답은 참으로 구차하고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1절)

그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봐 그렇게 했다고 대답합니다.

조금 전 언급한 두려움의 증상들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가 ‘지나친 불안과 걱정’입니다. 별 일도 없는데 불안감이 늘 떠나지를 않는 겁니다. 때로는 다 평안한데도 아무 이유도 없이 더 심하게 두려워집니다. 무엇인가 무너질 것 같은 격렬한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은근한 두려움까지, 여러 두려운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는 중에 실제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필요 이상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실은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도,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거나 기정사실로 여기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의 상처가 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아내가 아이들을 위해 내일 싸주어야 것을 깜빡 사오지 않아서 그로서리에 가서 사오겠다고 하며 나갑니다. 저녁 8시쯤 나갔는데 9시가 되도록 안 들어옵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이왕 나갔으니까 여기도 가서 사고 저기도 가보면서 끝날 시간까지 일을 보고 오려는 것인데, 남편은 20~30분이 지나니까 걱정이 됩니다. 9시가 되었는데도 안 들어오니까 상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나갔다가 차가 와서 꽝 받아 교통사고가 나고, 앰뷸런스가 와서 실려 가고,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거기서 죽고, 그러면 장례는 어떻게 하나? 우리 애들은 어떻게 하나? 그럼 나는 재혼을 해야 하는 건가, 안 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그 순간 아내가 들어오는 겁니다. 쓸데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내가 잠깐 나갔다 오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재혼하는 것까지 상상하고 있으니 말이 안 되는 건데, 이런 것이 실제로 우리 가운데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딱 이겁니다. 아내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생각했다는 것은 완전히 자기 혼자 생각입니다. 혼자만의 상상입니다. 지금 자기에게는 강력한 군사들도 있는데 아내를 어떻게 빼앗아가고 어떻게 자기를 죽입니까?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하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또 다른 증상은 ‘책임 전가’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당신 잘못이다’ 하고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여러 특징들 중 하나가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통 생각에 ‘저 사람은 고집이 정말 세다.’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게 두려움이라는 상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상처를 가진 사람은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잘못했다고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겁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고 합니다. 책임 전가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자신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니고 그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내가 그랬다.’ 하고 책임 전가를 합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언급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더 기가 막히고 황당합니다.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2절)

실제로 사라는 자기 이복누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합리화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로 생각하고 지금까지 같이 살았습니까? 그것이 사실이라도 사라는 ‘누이’로서 산 것이 아니라 ‘아내’로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13절)

이걸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 안에 있는 그 두려움 때문에 강박 증세를 보이면서,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자기를 오라비로 부르라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절을 잘 보면, 하나님이 아버지 집을 떠나 두루 다니도록 하신 것에는 순종해서 갔습니다. 훌륭합니다. 그런데 가기는 갔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다닌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다른 ‘두려움의 상처’의 증상인 ‘제자리걸음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가 늘 흔들리는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도 알고 믿습니다. 때로는 아주 신실하게 잘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이 생기면 믿음이 막 흔들리는 겁니다. 혹시 자기가 버림받거나 벌을 받아 무너지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와 불안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것이 기쁨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 성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신앙의 기복이 심합니다. 좋을 때는 좋은데, 갑자기 뚝 떨어지거나 잠수를 탑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심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려우신 하나님, 나를 야단치고 벌을 주는 엄한 아버지 같은 하나님, 멀리 계신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두려워하는 마음의 또 다른 증상인 ‘집착과 중독’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내적치유에서 ‘포로 된 상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려움에 의한 집착은 ‘무너지지 않기 위한 집착’입니다. 상처 중에 굶주림의 상처가 있는데, 항상 갈망하고 채워지지 않아서 늘 채우고자 하는 집착이 굶주림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의한 집착은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구해도 근본적인 안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대상을 향한 집착과 중독이 됩니다.

그래서 술, 도박, 마약, 게임 등에 중독되기도 하고, 물질이나 높은 학벌이나 성공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바로 가족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게 집착하고, 자녀에게 집착합니다. 이런 집착이 커지면서 피해 망상적인 감정에 시달리게 되는데, 건강이나 사고에 대한 지나친 염려가 그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처럼 망상적인 생각, 지나친 생각을 하는 겁니다. 또 조금 전 그 어떤 사람처럼 상상을 하는 겁니다. 배우자가 나갔다 안 들어오면, 자녀가 나갔다 안 들어오면, 상상의 나래를 펴서 그 다음 계획까지 다 세워놓는 겁니다. 지나친 염려는 집착입니다.

아브라함이 딱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또 사라를 보호하기 위해 집착합니다. 사실은 사라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자기가 두렵기 때문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집착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사라에게 집착했는데,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인 사라가 무너질까봐 깊이 염려하다가 그런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은 이전에 자기가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잘못했는데 그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다. 그런데 지금은 가나안 땅을 떠난 것이 아니고 남쪽에 걸쳐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괜찮지가 않았습니다.

이번에 그랄로 간 그 자체는 불순종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사라를 누이라고 한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왜 잘못입니까? 자신의 두려움에서 나온 집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깊은 불안과 두려움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자기를 보호하는 벽을 친 것이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또 다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우리 모습과 비슷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읽고 묵상하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합니다. 성경지식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고 결단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삶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탁 벌어지면 그때는 다 알고 있어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러니까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수를 써보지만, 오히려 더 안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으면 되는데 그걸 못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원인은 불안과 해결되지 않은 두려움의 상처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무조건 믿기만 하라는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최선을 다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 먼저 맡긴 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맡기지 못한 채로 불안해하며 나름대로의 방법을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실 오늘의 핵심은 두려워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인데 어떻게 두려움이 없습니까?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얼마나 두렵습니까? 지금 시위가 벌어지고 폭동과 약탈이 벌어질 때 비즈니스를 거기서 하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은 ‘네가 두려워하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너는 지금 누구를 두려워하느냐?’ 이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상황을 두려워하는가?’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4-16절)

모든 것을 정리하면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종들을 줍니다. 또 사라를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좋은 대로 택하여 살라고 소위 영주권도 줍니다. 그리고 사라에게는 “오라비”(16) 아브라함에게 은 천개를 주어서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풀었다고 하며 이제 다 선하게 해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은근히 뒤끝이 있는 사람입니다. ‘네 남편 아브라함에게 줬다.’라고 하지 않고 ‘네 오라비에게 줬다.’라고 합니다. 굉장히 뒤끝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너희들 잘못이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두려고 하는 의도도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17-18절)

그러니까 이때 여인들만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비멜렉도 병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도 병이 들도록 하심으로 사라를 보호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분명히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붙들어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개입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아브라함이 잘못되지 않도록 또 사라가 잘못되지 않도록 보호해주십니다.

[ 나가는 말 ]

여러분, 하나님은 두려움의 상처를 갖고 있던 사람인 아브라함을 계속해서 빚어 나가십니다. 두려워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시고, 위기에 빠질 때 개입하셔서 건져주십니다. 또 다시 아브라함이 두려워할 때 또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시며 그의 마음을 돌보아주십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아브라함이 진짜 믿음의 조상이 되도록 키워주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도 있을 이 두려움의 상처가 치유 받고 해결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하나님을 나의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움의 상처를 치유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온 우주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하거나 안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야말로 두려운 마음에 대한 치유의 길입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하고 계십니까? 감염될까봐, 그래서 아플까봐 또는 죽을까봐 걱정이 되십니까? 또 지금 시위가 벌어지고 미국에 난리가 나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계십니까?

그런데 진짜 두려움의 원인은 코로나바이러스나 그런 시위나 폭동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뭔가 내 안에 있는 다른 것,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다른 것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하나님과 제대로 동행하지 못하고 예배에도 소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맡기며 살지 않는 한, 평생 두려움은 우리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나의 삶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내 방법대로 하거나 내가 알아서 나아갈 때 잘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보십시오. 자기 마음대로 갔을 때도 많은 금은보화를 얻고 종들도 얻고 짐승들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평생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계속 살다가 인생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매 순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살아갈 때,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자세로 살아갈 때,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의 평화와 위로와 소망을 누리며 진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누리면서 그 복을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려움, 변명 그리고 기도 (창세기 20:1-18)

두려움, 변명 그리고 기도

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창세기 20:1-18 개역개정)

1. 서론 (인생의 산과 골짜기)

사람의 삶은 땅이나 바다와 같습니다. 평지를 걷을 때가 있는 가하면 높은 산을 오를 때가 있고 아주 깊은 골짜기로 내려갈 적도 있습니다. 자랑스럽고 기쁠 때가 인생의 가장 높은 곳이라면 창피하고 슬플 때는 깊은 골짜기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의 에베레스트는 어디입니까? 반면 저희의 마리아나 해구는 어디일까요? 모든 사람에게는 산과 골짜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깊은 곳에 어떻게 빠져드는가? 거기서는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입니다. 빠져나오지 못하면 거기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하려고 했던 일이 실패하면 깊은 골짜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성공하면 높은 봉우리라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조금 달리 말합니다. 깊은 골짜기에서도 찬송하며 기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은혜의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이고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인해 거짓말이나 변명을 하고 있는 자리가 인생의 깊은 골짜기라 말합니다. 그 말은 맞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면서도 거짓말과 변명으로 무너져가는 지를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수치심을 무릅쓰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조차 여기서 빠져 나오는 사람이 있고 못 빠져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즈음 저희가 묵상하고 있는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 19장에서는 롯, 20장에서는 아브라함이 깊은 골짜기로 떨어졌습니다. 롯은 못 빠져 나오고 아브라함은 빠져 나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이를 나누고 그 안에서 복음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2. 창세기 19장 (롯의 절망)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에 자기 소원대로 소돔이라는 도시에 가서 살았습니다. 알고보니 나그네로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서 강제로 동성애를 할 정도로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아 실수다!’ 그러나 계속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을 멸망시킬 때에 롯은 두 천사들에 의해 구출됩니다. 그런데 롯은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처럼 방주를 만든 적도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한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가족 전체가 구원의 기회를 잡았지만 아무도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노아의 가족은 전체가 방주를 타서 목숨을 살렸지만 롯의 아내는 소돔에 두고온 것이 아까워 뒤를 바라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고 사위들은 롯의 말이 농담인 줄 알고 무시하다가 죽었습니다. 노아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고 롯은 하지 말라고 직접 경고 받은 것도 못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롯 자신조차 마지막 순간에 하도 주저하고 지체하여서 천사들이 반 강제로 소돔에서 쫓아냈다고 성경은 적고 있습니다. 생각이 어리석고 미련한 미련퉁이가 아니라 자기가 가졌던 것에 미련이 많은 미련퉁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특징은 은혜와 저주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롯은 살아남은 것을 은혜가 아니라 저주로 여겼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산 속 동굴에 홀로 숨습니다. 그리고는 탄식하고 술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소돔에서 하나님이 롯을 살리실 때에는 그의 나중도 구원하시겠다는 뜻이겠지요. 이것이 롯의 은혜입니다. 허나 그는 자기 생각에 갇혀서 숨습니다. 롯이 숨었다는 동굴은 롯만의 자기 세상을 뜻합니다. 롯의 두 딸도 그 안에 갇혀 세상에서 자기들과 함께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절망하고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동침할 생각을 합니다. 두려움과 절망은 유전됩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동굴에 갇혀 은혜도 저주로 해석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위치(Position)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대화하고 응답받을 수 있을 때에 사람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을 구원인지 은혜인지 심판인지 경고인지를 구별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3. 창세기 20장 (아브라함의 두려움과 변명)

창세기 20장도 아브라함의 밑바닥을 보여 줍니다. 그랄이라는 나라에서 아브라함은 예쁜 아내 때문에 살해당할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너는 내 아내라 하지 말고 누이라 하라고 거짓말을 시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의 왕이 그녀를 데려갑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창세기 12장과 너무 비슷해서 (그때는 배경이 이집트와 파라오 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과 원래는 하나의 이야기 아니였을까’ 말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요. 오늘 본문의 주제는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한번 하는가?’ 입니다. 아닙니다. 여러 번 합니다. 왜 그런가요? 두려워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그랄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1986년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중에 폭발했습니다. 수사 결과 밸브 부품의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엔지니어들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보고할 경우 우주선 발사가 자기들 때문에 연기되어 불이익을 받고 출세에 지장이 생길까봐 두려워서 이야기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습니다. 1982년 미국에서 여객기가 추락해서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조사결과 부기장은 기장이 비행기 출발을 계속 늦추어서 엔진에 결빙이 생기는 것을 보고 이미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말 못한 이유는? 부기장이 고집 세고 거만한 기장과 이야기 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지프 그레니가 지은 책 ‘결정적 순간의 대면 – 순간의 대화가 인생을 좌우한다’의 내용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두려움이 없는데요.’ 아니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더 정확히는 자기 자신 안의 기준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못 참아 하고 사고를 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거칠음을 보고 두려움에 눌려 있었습니다. 이미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우리 인생에도 이런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안되면 한국가지 뭐… 안되면 때려치고 다른 것 생각하지 뭐…’ 가만히 보면 그것은 대안(Variante)이 아니라 도망칠 준비입니다. 사람이 실수를 반복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이 문제를 뒤집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4. 그리고 아브라함의 기도

여기서 저희는 아비멜렉도 아브라함도 사라도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주목해서 보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인해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하고 거짓말까지 하는 아브라함을 계속 붙들고 계실까요? 하나님은 자신이 준 꿈을 믿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그 이상이 소멸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 꿈꿉니다. 그리고 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씁니다. 때로는 무너져 가는 것을 속절없이 바라봅니다. 그 과정이 어렵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꿈을 사람이 받은 경우는 좀 다릅니다. 그 사람이 어리석거나 무능하거나 두려워해서 무너지는 순간에도, 변명하여 살아남으려는 비겁함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하나님은 자신이 주신 꿈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생각한 꿈과 생존 경쟁에 지치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서 하나님의 꿈을 받기 원합니다. 그것은 몽상이나 상상(Fantasie) 아니라 기도 가운데만 받습니다.

두 번째는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멸망하는 소돔에서 롯을 끄집어 내신 이유도 아브라함의 집요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가 뭐냐구요? 생각보다는 단순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한 직장에 사장과 두 사원이 있습니다. 한 사원은 사장의 생각을 끊임없이 이해하려 하고 일을 하면서 계속 보고 합니다. 사장이 하라는 대로 하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판단될 때에는 반대도 합니다. 사장의 생일도 챙기고 다른 직원의 경조사도 챙깁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그런 거 없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일할 뿐이고 일을 하면서도 보고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안되면 나가지 뭐’ 이 두 직장인의 나중은 어떻게 될까요? 뻔하지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이를 인정하셔서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선지자다’ – 선지자란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그랄왕 아비멜렉도 결국은 아브라함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하나님과 이야기 좀 해보라고… 내가 문제가 있다고…’ 그가 아내 사라를 데려갔던 이유 중의 하나는 자녀가 없어서 였습니다. 이를 위해 이 방법 저 방법을 써 보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기도하자 그에게 자녀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워하며 변명했지만 결국 기도로 그들에게 존경받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는 그렇게 믿는 자의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5.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우리를 수치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두려움을 이기에 하는 믿는 자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비겁한 자라도 그가 기도하는 자일 때에 인생의 깊은 골짜기에서 빠져 나오게 하십니다. 허나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기도해도 자식이 없더만 아비멜렉의 자식 없음을 위해 기도하니 그 왕에게는 주셨어. 이는 아브라함의 반복되는 수치야. 수치… 기도하는 자는 결국 자기 일은 해결 못해. 남의 일만 해결하지…’

생각해봅시다. 이런 말은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들으시던 말입니다. ‘남은 구원하던 자더니 자기는 구원 못하네. 스스로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나 비꼬던 자들이 모르던 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꿈을 마음에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시기에 부활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바로 그 생명의 씨앗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결국 정해진 시기에 자녀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마차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매달립시다. 그분께 꿈을 받고 이를 키우며 살아갑시다. 세상이 생각하는 성공과 실패에 시달리는 삶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이상을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세상이 주는 수치와 두려움에 변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그곳에서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합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를 기대하며 두려움과 변명을 넘어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진 출처 : https://pixabay.com/de/berge-alpen-berchtesgaden-bayern-352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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