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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그러나 그는 착한 성품과 남들을 잘 돕는 태도로 인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나바’로 많이 불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땅과 재산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 많은 사람들을 도운 인물인데요,
그는 안디옥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으로 이끈 지도자이자,
바울과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 바울을 바울 되게 만든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바나바를 통해 이웃을 위로하고 보살피고 품어주는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의 권리를 망설임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하는 태도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박종길 #성경인물 #바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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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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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1)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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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함께 사역하다가 갑자기 동역이 깨지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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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4/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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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바울 과 바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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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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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는 왜 싸웠나?

I. 들어가며: 성경에 담겨있는 이야기들

1. 싸움

우리 참 많이 싸우면서 살아간다. 모르는 사람들 혹은 그다지 가깝지 않은 사람들과만 싸운다면, 그건 사실 크게 걱정할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와 싸우는가? 가장 친한 사람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투고 싸운다. 어제까지 “사랑해, 보고 싶어”를 속삭이던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가 오늘은 “네가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 서로에게 고함을 지른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와 다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다툰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하는 순간이 오는데, 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대로 표현하게 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다툼으로 나아가게 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사랑하는 관계일수록 마음은 가깝게 느껴지고 나의 생각과 감정을 조금 더 자유롭게 표현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다툼과 갈등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오히려 다툼과 갈등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먼 관계임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2. 성경에 있는 갈등과 다툼

성경은 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우리 삶은 시간∙공간∙인간으로 이루어지는데, 성경 전체에도 시간∙공간∙인간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개인∙가정∙나라라는 틀에서 살아가는데, 성경 전체에도 개인∙가정∙나라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앞서 말했던 ‘갈등과 다툼’이야기가 성경에는 가득하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 만큼이나 작은 것을 가지고 싸우고 다툰다. 성경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는 가장 큰 부분이다. ‘나만 이렇게 부족한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

우리는 흔히 ‘바울’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바울 신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대 대한민국 기독교계에서는 바울의 권위가 더욱더 견고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 대단한 바울이 자신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인 ‘바나바’와 싸웠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리고 그 싸움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인 ‘성경’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II.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1. 배경

바울과 바나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까운 동역자 관계다. 그 둘은 가까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 2년 동안 함께 전도여행을 하면서 매일을 붙어 다녔고, 매 맞고, 춥고, 배고픈 그 고통을 곁에서 함께 느껴가며 동고동락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도여행에 다녀온 이후에도, 그 둘이 어떠한 것을 경험했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역사하셨는지에 대해서 함께 간증한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간절한 목소리로 외친 그들의 간증과 믿음의 고백은 사도행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 하나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대해서는 이 글을 보면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던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게 된다. 이 두 믿음의 거장은 무엇으로 다투었을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고찰? 모두 아니다. 이 둘은 2차 전도여행의 인원을 꾸리는 것에서 다투게 된다. 그들의 다툼을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의 글에 있었던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차 전도여행은 사실 3명으로 시작했었다. 바울, 바나바 그리고 마가 요한. 그러나, 전도여행이 너무나 힘들고 고단하여 마가 요한은 중간에 전도 여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행 13:13)

2.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게 된 이야기(행 15:36-41)

안디옥 교회를 안정적으로 만들고 나서, 사도 바울은 지난 1차 전도여행 때 다녀온 교회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 교회들은 잘 지내고 있을지, 혹시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 지나친 핍박 속에 있지는 않을지… 수많은 고민들과 걱정들 끝에 사도 바울은 바나바에게 지난 1차 여행 때 다녀왔던 교회들을 다시금 방문하자고 말한다. 그렇게,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1차 전도여행 이후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가시적인 긍정적 결과물이 나왔기 때문에,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는 그들의 마음은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을 것이다.

바나바가 말한다. “우리 마가 요한도 데려갑시다.” 그러자, 사도 바울이 대답한다. “마가 요한은 1차 전도여행 도중에 우리와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하고 도중에 돌아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2차 전도여행에 데려간단 말이오?” 아마 바나바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마가 요한이 첫 선교 때 실수를 했고, 그것이 우리에게 큰 상처로 남은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난날 행동을 반성하고 다시 선교팀에 합류하겠다니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바울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꺾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번 전도여행에서 동역자들에게 등을 돌려 돌아갔던 사람이오, 어찌 우리가 그 사람과 또다시 전도여행을 떠난단 말이오?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올시다” 바나바와 바울의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성경은 그들이 이 대화를 기점으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라고 말한다. 말 그대로 대판 싸운 것이다. 그 이유는 ‘팀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 15:37-38)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 15:39-40)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와 각각 서로의 팀을 꾸려 2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함께 여행을 떠났고, 바울은 “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중간 합류, 추후 중요한 역할)”와 함께 여행을 진행한다.

Paul and Barnabas Arguing

3. 그 이후 이야기(딤후 4:11)

이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자신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마가 요한을 언급한다. “마가 요한을 내게 데려오시게, 그가 내게 유익하오”라고 말이다. 이 장면은 마가 요한이 추후 바나바와 얼마나 멋지게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동시에, 바울 역시 자신의 젊은 시절 과오를 생각하며 마가 요한과의 갈등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손을 먼저 내미는 장면이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11)

그런 바울의 기대에 부응하듯, 마가 요한은 신약의 4복음서 중 하나인 『마가복음』을 기록하며 그 누구보다 앞선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순교자의 삶을 산다.

Paul In Prison—Rembrandt, 1627, Stuttgart, Staatsgalerie

III. 나오며: 바울과 바나바의 ‘두 가지 리더십’

흔히 심리테스트나 성격 검사를 하면, ‘리더십’의 측면 혹은 ‘일’을 대하는 성격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분류를 한다. 그것은 바로 1) 관계 중심적인 성격과 2) 업무 중심적인 성격이다. ‘업무’를 받아 수행하거나 ‘단체’를 구성해서 일을 할 때에 크게 두 가지 성격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그 구성원들과의 ‘관계’에 더 큰 비중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는 사람과, 또 하나는 업무 자체의 달성과 효율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구분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이 둘 중 하나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분류는 결코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분류는 오늘의 이야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바울은 업무 중심적, 바나바는 관계중심적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관계 중심적’이십니까? 아니면 ‘업무 중심적’이십니까?

100번 심리 검사를 하면, 나는 100번 다 “업무 중심적”이라는 결과를 받는다. 나는 과업이나 목표 지향적인 편으로 우리가 오늘 살펴본 이야기에 나오는 바울과 굉장히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오늘 이야기에서 내가 바울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나도 바울과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리곤 중도 포기했던 요한을 함께 데려가자는 바나바를 향해 이런 말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전도 여행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게 있어서 ‘바나바’의 모습은 큰 교훈을 준다. 그 사람의 결과물(행함)보다 그 사람 자체의 가치(존재)를 바라보고 끝까지 믿어준 바나바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와 성향은 다르지만 바나바가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결정적으로 바나바의 그러한 믿음에 부응하여 마가 요한은 추후 기독교 선교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 바나바가 중도 포기자였던 마가 요한을 끝까지 믿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손에 들려있는 성경에 『마가복음』은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성경으로 말하다]② 바울과 바나바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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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말하다]②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에 관하여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사도 15:37~41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일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 다툼의 원인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동행케 할 것이냐를 두고 일어났다. 영어로 보면 다음과 같다.

“Now Barnabas was determined to take with them John called Mark. But Paul insisted that they should not take with them the one who had departed from them in Pamphylia, and had not gone with them to the work. Then the contention became so sharp that they parted from on one another. And so Barnabas took Mark and sailed ro Cyprus: but Paul choed Silas and departed, being commended by brethren to the grace of God. And he went through Syria and Cilicia, strengthening the churches.” Acts 15:37~41

한글 성경에는 마가를 데려가는 것이 ‘옳지 않은 일’로 되어 있으나 영어 성경에는 좀 더 확실하게 ‘절대 데려갈 수 없다’로 표현돼 있다. 밤빌리아에서 우리를 떠난 마가, 우리와 함께 사역을 마치지 않은 자를 데려가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강하게 표현돼 있다.

이별의 장면도 더욱 정나라한 표현으로 되어 있다. 한국어 성경에는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라고 되어 있다. 영어는 좀 다르다. ‘the contention became so sharp’. 그 논쟁이 심히 날카로웠다는 것이다.

논쟁 혹은 언쟁 contention 이라 함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자기 주장을 논하여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매우 날카로운 언쟁이 있었다면 바나바의 주장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논쟁의 내용을 거의 축소시켰고 상세한 설명을 편제했다. 오직 바울의 주장만 짤막하게 서술하는데 지면을 허용했을 뿐이다. ‘밤빌리아에서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려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바울의 기준만이 성경에 기록됐을 뿐 바나바가 어떤 이유를 댔는지 우린 성경만으로는 알기 힘들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분명 ‘심한 논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것 때문에 바나바가 자기 혈족을 생각해 조카인 마가를 챙겼다는 추측이 난무하는 것이다.

바울이 루스드라(위 두 그림 속 배경 도시)에서 앉은뱅이를 낮게 하매 무리가 이 이적을 보고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허메라고 부르며 그들을 위해 소와 화관으로 제사하려는 것을 말린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곳까지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초인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친 사건도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바나바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수준 낮은 인간이 아니다. 성경적으로 지식이 탁월하며 신앙적으로 재물을 초월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바나바를 육신의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상황이다.

우선 성경에 따르면 그는 현재 키프로스라고 불리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이이다. 이름은 요셉이다.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했다. 이 바나바는 번역하면 권위자라는 뜻이다. 왜 이런 별칭이라고 해야할까, 그에 대한 일컬음이 권위자라고 했는지에 대해선 사도행전에 자세히 나와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사도 11:22~26 중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나바의 사람 됨은 결코 혈육에 흔들리기보다 믿음으로 생긴 신앙의 도를 전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이를 우선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바울을 찾아가 만나서 안디옥에 데리고 온 사람이다.

바울이 큰 빛을 보고 소경이 되는 장면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이 큰 빛과 예수의 음성을 들은 뒤 변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자이기 때문에 그의 변화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그때 나타난 사람도 바로 바나바였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라는 내용을 살펴보면 바나바는 결코 육신의 겉모양과 그의 위치를 따지기보다 그 사람의 행동과 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지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특히 초대 교회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바나바의 돈에 대한 성품이 어떠함을 잘 알 수 있다. 믿는 무리 중에 핍절한 자가 없도록 가진 자들이 자기의 밭과 집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에게 가져오던 때였다. 바나바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도 밭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사도행전에는 중간까지는 바울보다 바나바의 이름이 앞선다. 그를 먼저 앞세웠던 것을 13장에 가서 바울의 이름이 먼저 거론되기 시작하고 그 뒤에 바울과 바나바와의 이별 뒤로 바나바는 사도행전에서 사라진다.

바울이 바나바의 이름보다 앞서게 된 사건은 바로 바보에서의 전도 이후부터다(사도행전 13장). 이때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바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바보에 이르기 전 살라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당시에 싸움의 발단이 된 요한(요한)이 바울과 바나바의 수종자로써 존재했다.

살라미에서 바보로 이동한 그들은 그 지역의 총독 ‘서기오 바울’에게 전도를 시작했다. 당시 거짓 선지자 박수가 전도를 방해하는 것을 보고 바울이(이때부터 성경에서는 사울에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를 저주하며 얼마 동안 소경이 된다고 했고 즉시로 그가 소경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총독 서기오 바울이 이를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기이히 여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하부터 본격적으로 ‘바울’이라는 이름이 사용된다.

바보에서 이들은 배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는데, 바로 이때 요한(마가)이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다. 바울이 본격적으로 사울에서 이름이 변경되고, 바나바보다 이름이 성경에서 앞서는 그 시점에서 요한이 떠난 것이다.

이후 바울은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서 엄청난 설교를 한다. 그 양만 구절로 따지면 13장 16절에서 41절까지 되며,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예수를 힘입어 죄 사함을 전하는 것,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에 이르지 못하는 불신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이 설교 이후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된다.

이후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앉은뱅이를 걷게 하는 이적도 행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 전에는 바울로부터 표적과 이적이 나타났다는 내용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루스드라 사람들이 이 앉은뱅이가 걷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제사를 하려고 할 때 바나바가 바울보다 먼저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보에서부터 바울이 앞서다 잠시 바나바의 이름이 이 사건 중에 먼저 앞서고 이후 모든 것은 바울의 이름이 앞선다. 둘 사이의 위치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로 보건데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는 그 다툼은 결코 일반적인 다툼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나바의 논쟁의 논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그도 분명 마가를 데려가야 한다는 데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혈육을 생각해 억지를 부릴 만큼 바나바가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바울이 사울에서 이름이 바뀌는 시점, 엄청난 설교를 한 시점, 이적과 표적이 나타난 시점이 있었고 어떤 변화가 바울에게 있었던 시점에 마가가 그들을 떠난다는 건 확실하다. 그것이 신비적 변화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전도의 왕성한 움직임과 명확히 하나님께서 바울을 쓰시기 시작하는 모습이 나타난 시점이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이후 바울은 마가를 자기의 전도 사역에 함께 하는 동역자로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가에 대한 형제로서의 용서를 하게 된 것으로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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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빌레몬서 1:24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로새서 4:10

“누구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 4:11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다툼이다. 인간들끼리 자기 소욕에 따라 다투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러면서도 마가가 다시 바울의 동역자로서 인정된 점에 대해서도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 많아진다. 빌레몬서와 골로새서는 바울이 마지막 여정인 로마에 갇혔을 때 쓴 옥중서신이다. 이미 바나바와 헤어진지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다. 그때 바울은 마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소개하기를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했다. 바나바를 인간적으로 함께 동역한 한 사람으로서 그를 기억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바울만큼 복음만 생각한 사람이 없지만 바울만큼 성도를 섬기는데 자기를 내어준 사람도 없다.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가를 바라볼 때 당연히 함께 동역했던 바나바를 기억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온 마가를 받아주고 함께 사역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바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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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관한 진실 (행 15:30-41) * 땅 끝까지 이르러

2019년 2월 10일 주일예배

✦ 땅 끝까지 이르러 – 사도행전 47 ✦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관한 진실”

(사도행전 15장 30~41절)

[ 들어가는 말 ]

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나 교회가 두 파로 갈라져 다투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격해져서 서로 밀치며 싸우기까지 해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고, 서로 뭔가 증거를 잡겠다고 비디오를 찍기도 하면서 아주 험한 모습들이 연출되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교회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새로운 목회자를 청빙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신학생이었는데, 그렇게 갈라진 다음 해에 원래 교회의 교육전도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몇몇 분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얼핏 들었습니다. “아이고 뭐, 성경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도 서로 싸우고 갈라섰는데, 우리야 그들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지. 그래도 결국 바울과 바나바도 한 팀에서 두 팀이 되었고, 그래서 세계 선교가 더 활발하게 됐잖아? 우리도 한 교회가 두 교회로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잘된 거지.”

과연 그럴까요? 정말 두 교회가 되었으니까 복음을 위해서 더 잘된 일일까요? 그리고 두 사람이 다투고 갈라섰다는 것이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대한 모든 것일까요? 정말 크리스천들도 싸우고 갈라져도 괜찮은 건가요? 우리가 싸워서 교회가 갈라지고 새로운 교회가 생길 때, 바울과 바나바 이야기를 하면서 ‘위대한 사도들도 그랬는데 우리 정도야 괜찮겠지’ 하며 합리화해도 되는 걸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점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그 동안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에 관한 진실을 함께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안디옥에 예루살렘 공의회의 편지를 전달하다

1) 크게 기뻐하는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크리스천들

주님을 영접한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할례 문제를 놓고 열렸던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가 끝난 다음, 예루살렘 교회는 유다와 실라로 하여금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가서 그곳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공의회의 최종 결정 내용이 담긴 편지를 직접 전달하게 했습니다(27). 공의회 판결 내용에 대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0절)

여기서 “그들”이란 안디옥 교회의 공동목회자인 바울과 바나바, 그들과 함께 갔던 몇몇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유다와 실라입니다. 그들은 안디옥으로 함께 가서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과로 나온 사도들의 편지를 전달합니다.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1절)

성경에는 “위로한 말” 앞에 숫자 1이 붙어 있는데, 아래쪽의 주를 보면 “또는 권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로하며 권면한 것을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판결 내용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유대인이 아니고 헬라 사람들인데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사 누가도 이 안디옥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운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와 실라를 통해 받은 편지에 담긴 공의회 판결 내용을 읽고 모두 기뻐합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2절)

여기도 “권면”이라는 단어에 주가 달려 있어서 “또는 위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간 유다와 실라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말씀 사역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말로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권면하고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하나님의 권면과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27절에서 “이 일을 말로 전하니라”는 것은 공의회 판결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해줄 뿐 아니라 이들이 말로도 설명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다와 실라는 먼 안디옥까지 찾아가 단지 공의회 판결 내용이 담긴 편지를 전해주는 택배기사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공의회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소상하게 설명해줌으로써 그들의 기쁨을 더 한층 크게 해주었습니다.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공의회 판결 내용을 읽고 또 들은 후, 너 나 할 것 없이 기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8절)

여기에서 “짐”이라는 것이 유대주의자들이 강조하던 할례이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들어온 크리스천들은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할례는 할례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된다는 말이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말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것은 이방인 역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모든 민족들을 위한 복음의 선포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하게 다가오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혁명적인 결정 내용이었습니다.

그 선포로 인하여, 그 동안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던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혼란스러워 하던 안디옥 교회의 크리스천들이 그것을 듣고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아주 크게 기뻐한 것입니다.

2) 안디옥에서 계속되는 사역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다와 실라로부터 이방인 크리스천의 할례 문제에 대한 예루살렘 공의회 결정 내용을 듣고 나서 모두 기뻐했습니다(31). 예루살렘 교회가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 격인데, 모교회가 예루살렘 공의회의 판결을 안디옥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직접 전하기 위해 파송한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야기하면서 큰 위로와 격려를 주었습니다. 공의회 내용을 편지로도 전달해주고 그것을 말로도 설명하며, 여러 말로 안디옥 이방인 크리스천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3절)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에서 한참 말씀 사역을 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34절은 “없음”이라고 되어 있고 거기에 또 주가 달려 있습니다. 그 주를 보면 “어떤 사본에 ‘실라는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성경의 원본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원래 성경을 쓰신 분들이 기록한 것을 계속 베껴 쓰고 또 베껴 썼으며, 신약성경도 계속 받아 적었기 때문에 원본은 없고 사본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에는 그런 내용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본에는 그 내용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그냥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한이 다 차고 나니까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전송을 받으면서 원래 파송을 받았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남아 계속 말씀 사역을 감당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5절)

이전에 안디옥의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2.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다

1)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 충돌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 결정 내용을 담은 편지를 들고 안디옥을 방문했던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안정기에 접어듭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헌신으로 안디옥교회는 크게 부흥했습니다. 즉, 안 믿던 사람들이 계속 믿고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1차 전도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뿐 아니라, 한때 안디옥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던 이방인 크리스천의 할례 문제도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깨끗이 해결되었습니다. 교회 역사상 첫 번째 공의회에서 훌륭한 결정을 내림으로 교회는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의 목회자 중 하나였던 바울에게도 어느 때보다 안정된 삶이 보장된 상황입니다. 마음껏 말씀을 전하고 함께 형제자매들과 기뻐하며 교제하고 예배하고 얼마든지 사역할 수 있는 편안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바울에게는 안정되고 편안한 삶 자체가 인생의 목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한 군데에 가만히 머물며 목회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이 바나바에게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각 성으로 다시 찾아 방문하자고 제안합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6절)

“며칠 후”라고 되어서 3일쯤 후에 가자고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한참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1차 전도여행 때 자신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갈라디아의 크리스천들을 다시 만나서 그들의 믿음을 다져 주고, 또 새로운 전도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제안에 대해 바나바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7절)

바나바는 즉시 마가도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마가는 1차 전도여행 때 같이 출발했던 사람이며, 바나바의 친척입니다. 마가는 성경의 마가복음을 쓴 바로 그 마가인데, 요한이라고도 하고 마가라고도 합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도 데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는 바울의 제안에 대해서 바나바도 그러자고 동의한 것인데,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려가자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을 보면 우리 한국어 개역개정성경에는 “바나바의 생질”이라고 되어 있는데, 조카라고 볼 수 있지만 원어를 보면 사촌동생도 됩니다. 그러니까 사촌 동생인지 조카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조카라고 보지만, 큰 상관은 없습니다. 직계 조카라기보다는 5촌 이상쯤 되는 조카인데, 어쨌든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들의 수행원으로 함께 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뭐라고 반응합니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8절)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자는 바나바의 제안에 대하여 반대 의사를 보입니다. ‘좋지 않다. 데리고 가지 말자.’ 1차 전도여행 초기에 마가가 구브로(사이프러스) 섬에서 떠나 밤빌리아 버가에 도착했을 때 전도 팀을 이탈했습니다. 물론 이야기하고 갔겠지만 ‘나는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하고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린 사람입니다.

사람의 일도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토록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간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바울이 판단한 것입니다. 이 길이 요즘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즐겁게 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강도의 위험과 홍수나 지진이나 기근 등의 위험이 있는 아주 힘든 길인데, 헌신되지 않고 한 번 자기들을 버리고 간 사람을 다시 데리고 간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고자 한 동사와,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동사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형이라는 것은 행동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나바가 한두 번 마가를 데려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바울은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2)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바나바는 계속 마가를 데려가자고 하고 바울은 안 된다고 계속 맞섰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39절)

안타깝지만 교회가 분열되어 갈라질 때 그것을 경험한 분들이 39절을 읽으며 엄청난 은혜를 받습니다. ‘이들도 이렇게 다투고 갈라지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도 괜찮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각자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상황을 가리켜 “서로 심히 다투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심히’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것은 disagreement, 그러니까 서로 동의하지 않고 일치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말 ‘다툼’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영어로는 disagreement로 번역되었는데 헬라어로는 ‘파록시스모스(paroxysmos)’입니다. 여기서 paroxysm이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발작’이나 ‘발열’이라는 뜻의 의학 용어입니다. 이 단어에는 ‘설전’이나 ‘불일치’라는 뜻이 있는데,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굉장히 흥분하면서 자기 의견을 내세우며 설전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치고받고 싸운 게 아니라, 말로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끝내 의견이 일치하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불일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갈라서고 맙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대단히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대체 바울과 바나바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초대교회 최고 지도자 그룹에 속한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며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2천 년 교회 역사상 최초로 이방 땅 안디옥에 세워진 이방인 교회의 지도자들이고, 교회 역사상 최초로 지중해 세계 전도여행에 오른 선교사들입니다. 그들은 최소한 1년에서 최대 2년 정도까지 소요된 것으로 추정되는 1차 선교여행 동안에, 온갖 고난과 위험 속에서도 완벽한 팀워크를 보여준 동역자들입니다. 또 그들은 율법을 따르며 할례를 받지 않는 한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안디옥 교회를 지켜 낸 복음의 일꾼이며 용사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며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편안한 안디옥에서의 삶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기꺼이 2차 전도여행을 다시 떠나려고 하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입니다. 사명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명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안 데리고 가느냐 정도의 생각의 차이는 극복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통로로 살기 위해 편안한 삶을 버리고 또 교회 지도자로서의 기득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의 자기주장은 내려놓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결별하고 말았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를 이루고 있던 바울과 바나바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다툼을 벌이다 끝내 결별했다는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슨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얼마든지 이렇게 다투고 갈라설 수 있구나’ 생각하며, 자신의 허물이나 모난 성품으로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치고 헤어지며 교회가 분열하고 갈라지는 것도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데 사용하는 본문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성경에 묘사된 바나바는 성품이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덕이 많고, 남을 세워주며,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남들에게 위로를 잘하고 권면을 잘하고 덕을 세우는지, 그의 이름이 바나바가 되었습니다. 원래 ‘바나바’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별명입니다. ‘위로의 아들’, ‘권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남을 잘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살기등등하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고꾸라지고 회심했을 때, 모든 크리스천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뭔가 수를 쓰는 거다.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를 잔멸하려고 위장전술을 펴는 거다.’라는 식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아니다. 주님께서 정말 이 사람을 이방인의 도구로 쓰시려고 부르셨다. 택하신 그릇이다. 주님께서 택하신 이 사람을 우리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며 설득하고 추천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사울을 받아들이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이 바나바입니다.

나중에 사울이 자기를 아무도 써주지 않으니까 고향에 가서 13년 정도 칩거하고 있었는데, 그런 사울을 불러다가 안디옥에서 자기와 함께 사역을 감당하며 펼치도록 장을 마련해준 사람, 데리고 온 사람, 기회를 준 사람, 발탁한 사람, 키워준 사람이 바로 이 바나바입니다. 1차 전도여행 때 원래는 ‘바나바와 사울’이었는데 중간에 ‘바울과 바나바’로 바뀝니다. 사울이 히브리식 이름이니까 이제 헬라 세계로 나아가 전도하기 위하여 바울로 이름을 바꿔서 나아갑니다. 그 바울을 앞에 세우며 ‘나보다 네가 더 잘한다. 네가 해라.’ 하고 앞세워준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 없이는 사도 바울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 바나바가 전도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제안합니다. 인간적인 정이나 상식으로 보면, 바나바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사람이 바울인데 그의 요청을 거절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피상적으로만 보면 바울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철면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바울이 나쁜 사람이어서 여기서 반대하는 것일까요?

38절을 다시 한 번 잘 보시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는 마가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1차 전도여행에서 구브로 섬에서 본토인 밤빌리아에 도착했을 때 마가는 버가에서 바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마가를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마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하며 정확히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하지 않고,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 합니다. 그 당시 헬라어 용법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인칭대명사(그)를 써서 말할 때와 고유명사인 이름(마가)을 넣어서 말할 때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만약에 바울이 여기서 ‘마가를 데리고 가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면, 이것은 마가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나는 마가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이전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안 됩니다. 이 사람이 변화된 다음이면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주 사소한 차이 같아도 이것을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나에게 미운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다 미워 보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하는 일 하나 하나를 놓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그냥 다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면 잘하는 것도 밉게 보이고 못하는 것은 더 밉게 보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면 잘할 때는 너무 예쁘고 못해도 예쁩니다.

한국 사람의 정서가 대개 그렇습니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은 분명히 좋은 것이고 잘하는데, 그래도 그냥 기분 나빠.’라는 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줍니다. 바울을 통해 그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마가라는 사람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을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람 자체와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하고,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잘못하는 것은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좋아한다고 다 괜찮다고 하거나, 미워한다고 다 싫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더 알 수 있지만, 바울은 마가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반면에 바나바는 ‘마가가 아직 변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 다시 한 번 기회를 줘서 같이 다니며 전도여행을 하다 보면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역시 바나바다운 태도 아닙니까?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이니까 다시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람을 데려갔다가는 아직 변화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어려워질 수도 있고, 이 사람 자체도 더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우리의 복음 사역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옳습니까? 바울이 옳습니까, 바나바가 옳습니까? 사실 둘 다 옳습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한쪽은 완전히 맞고 다른 쪽은 완전히 틀리면 결정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여기도 맞고 저기도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는 측면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겁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나와 당신은 다릅니다.’라고 하는 대신 ‘당신은 틀렸소.’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르다고 틀린 게 아닙니다.

이분들은 그것을 본 것입니다. 39절에서 ‘다툼’, ‘설전’, ‘불일치’의 의미로 사용된 헬라어 단어(‘파록시스모스’)는 성경에서 딱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한 번은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고, 다른 한 번은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는 이 단어가 본문 39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하게 걸어야 할 믿음의 길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0:24)

여기서 ‘격려’라는 말이 바로 본문 39절의 ‘다툼’과 같은 헬라어 단어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다툼’이라고 해놓고, 히브리서 10:24에서는 ‘격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한다는 것이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뜨겁게 열정을 가지고 격려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성도들끼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의 삶을 살 수 있게끔 서로 격려하고 도전해주어야 되는데, 대충 ‘열심히 살아보세요.’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정말 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열정을 가지고 격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격려’라는 단어가 여기서 ‘다툼’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것인데, 그렇다면 무슨 말입니까? 39절에서 ‘다툼’이라고 쓰인 단어가 ‘서로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고 되어 있는데, 물론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논쟁을 벌였지만 끝날 때는 감정이 상하여 보기도 싫다고 하며 탁 헤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면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으니까 나는 이 길로, 형제님은 저 길로 헤어집시다.’ 하며 헤어졌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39-41절)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에 의견이 엇갈린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헤어진 다음 먼저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1차 전도여행 때 갔던 구브로로 떠납니다. 본래 2차 전도여행의 취지가 1차 전도여행 때 갔던 곳들을 다시 방문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굳게 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자신의 고향이자 1차 전도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였던 구브로 섬으로 향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의 행선지를 다른 데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브로를 통해 1차를 갔던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육로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가며 시리아와 터키 중부지역(길리기아)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교회들을 견고하게 합니다.

이때는 예루살렘에서 온 실라와 함께 파트너가 되어서 2차 전도여행을 떠나는데, 원래는 이전에 갔던 곳을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시아를 조금 더 다니려고 했는데,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제는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아시아(터키) 쪽에만 머물지 않고 그리스 북부 쪽으로 넘어가게 되어서 그리스 남부까지 가게 됩니다. 원래 전혀 계획이 없었는데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성령께서 놀라운 인도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3차 전도여행 때는 유럽에서 더 많은 역사들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흔히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보거나 겪는 것처럼 정말로 심하게 갈라지고 서로 상종할 수 없어서 감정이 상하여 헤어지고 분열하고 결별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 9장 6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바나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을 권리’란 ‘노동하지 않을 권리’, 다시 말해 교인들로부터 생계비를 받을 권리를 의미합니다. 당시 전도자들은 선교지를 돌면서 교인들에게 자신의 생계비를 받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서 그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원래 자기는 천막 제조업자였기 때문에 천막 제조로 생계를 이어 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자비량 선교사를 가리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텐트메이커(tentmaker)’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나바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나바도 자신과 같이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여행 직전에 헤어졌는데, 결별한 후에도 계속 서로를 신뢰하는 동역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서로 다투고 결별했던 바울과 바나바는 그 이후에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보통은 나중에 화해했다고 보는데, 39절에서 ‘다툼’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서 10장에서는 ‘격려’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소수의 의견이기는 하지만, 어느 것이 맞아도 상관없습니다. 후에 화해를 했든지, 아니면 헤어질 때부터 뜨거운 격려 가운데 헤어졌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흔히 하는 감정적 싸움을 하고 서로 상종도 안 하게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주님의 뜻을 따라 동역하며 나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9절 이후에는 더 이상 사도행전에 바나바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 또한 바울을 여기서 공식적으로 파송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의 역사도 마치 바울의 손을 들어 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바나바와 마가가 여기서 사라졌다고 해서 그들이 실패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망할 수도 없고 실패할 수도 없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골 4:10)

바울은 마가를 영접하라고 골로새 교회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후서에서도 마가를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체포되어서 음습한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이제 다가오는 겨울을 바라보며 마지막을 예감하고 유언처럼 남긴 편지입니다. 실제로 디모데후서를 쓴 지 얼마 안 되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9~11)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직전에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했던 마가를, 긴 시간이 흐른 다음에 자기에게 데리고 오라고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이것은 그때 바울이 마가를 동역자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마가를 가리켜 “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비록 한때는 선교의 험한 길을 포기하고 도망갔던 사람이 마가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마가는 바울에게 유익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마가를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만들고 양육하고 세워준 인물이 누구였겠습니까?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마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동행하면서 그를 훈련시켰습니다. 양육했습니다. 세워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했던 바울에게까지 마침내 ‘이제는 그가 유익한 사람이다.’라고 인정을 받는 자리까지 올려준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바나바와 마가는 바울과 헤어진 다음에 더 이상 사도행전에 안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는 당장 눈앞에 결과가 없다고 쉽게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고, 뭔가 결과가 있다고 금방 성공했다고 하고, ‘잘났다 못났다’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때의 실수와 좌절과 실패까지도 다 품으시고 그것까지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한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은 정말 진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가장 최악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결국 좌절도 없는 것이고 실패도 없는 것입니다.

[ 나가는 말 ]

다시 한 번 정리해봅니다.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무책임한 청년 마가를 또 다시 데려갈 수는 없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자고 하는 바나바의 주장은 그 간격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각자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상대를 누르고 제압하고 부정하며 자기주장만 옳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의와 불의나 선과 악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는 같은 주님을 섬기고 있지만,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고 주님께서 부르신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와 너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다.’ 하며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길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즘 교인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서로 상대를 비난하며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결별을 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상대를 격려하며 헤어졌습니다. 자신들의 헤어짐으로 각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더욱 신비한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의 이런 결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아시아만 아니라 유럽 대륙으로 또 로마제국으로 복음이 나아가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 갇힌 바울은, 마가가 복음을 위해 책임 있는 일꾼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러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마가를 데려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무책임한 마가를 그냥 거부하고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마가가 책임 있는 일꾼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것, 그가 바로 설 수 있게끔 그에게 도전과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던 것을 이제야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말년의 바울이 가장 의지하는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의견 차이가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다 경험하지 않습니까? 하다 보면 서로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논쟁을 할 수도 있고 다툴 수도 있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갈라졌으니까 우리도 갈라질 수 있다.’라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졌어도 그것은 복음의 진보를 위한 헤어짐이었다는 것, 결코 감정적으로 골이 깊어져서 다시는 서로 안 보겠다고 결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다른 길이 있으니 다른 길로 가자고 결정한 것뿐입니다.

그들은 서로 격려하고 도전하며 헤어졌습니다. 의견이 달랐기에 같은 길로 가지는 않았지만, 각자 생각하는 길로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축복해주며 헤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금방 화해하고 계속 주님의 복음을 위해 나아갔습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달되었고 이렇게 우리가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복음을 위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격려하고 도전하며 주님께서 부르신 길을 충성스럽게 걸어감으로써, 우리를 통해 믿음의 후세대들이 많이 나오는 귀한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에서 배우는 지혜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대인 관계에서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관계 가운데 살기 때문에 크든 작든 상처나 고통이 오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대인 관계의 고통을 겪을 때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주라고 명령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그런데 믿지 않는 자들이나 다른 사람이 우리를 괴롭게 하거나 힘들게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같이 하는 동역자들 가운데 갈등이 생겨 고통을 주는 것은 참으로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함께 선교를 했던 동역자 관계의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차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선교 여행을 계획하는 가운데 마가 때문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나바의 조카였던 마가가 1차 선교 여행 때 밤빌리아에서 어떤 이유인지 자세히 모르지만 힘들어서 떠나버렸습니다. 바울은 이 일로 정신적 실망과 낙심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2차 선교 여행 때 바나바가 마가를 또 데리고 가려고 하자 바울이 반대하면서 서로 큰 갈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행 15:37-38). 결국 심한 말다툼을 한 후에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그의 고향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선교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행 15:39-41). 이러한 갈등은 각자의 성격 뿐 아니라 사역의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사역을 함에 있어서 관계 중심적이었지만, 바울은 사역(일) 중심적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나 사역을 하다가 보면 어디서나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사실 갈등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죄를 지을 수는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초대 교회의 지도자요 선교사란 직책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부정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심히 다투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고 포용하면서 합일점을 찾도록 노력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툼이라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갈등이 더 증폭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양보하거나 합의를 못하고 결국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갈등의 해결 과정에 있어서 두 사람이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사역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였다는 점은 또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록 갈등과 다툼으로 인하여 갈라져서 사역을 분립하게 되었지만,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역을 함에 있어서 크고 작은 갈등들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갈등 때문에 주어진 직무나 사역의 책임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줍니다.

마가가 미숙하여 갈등의 장본인이었지만 나중에는 그가 크게 성숙해지게 되었습니다. 마가의 변화된 삶은 갈등하는 사역자들에게 시사해주는 교훈들이 있습니다. 마가는 처음 바울의 선교 사역에 끝까지 동참하지 못할 정도로 유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지도 아래 그는 성숙해져서 하나님 나라와 선교 사역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가복음을 기록하였고 나중에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로 인정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cf. 골 4:10):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또 그는 사도 베드로를 영적인 아버지와 같이 잘 섬겼습니다(벧전 5:13).

이처럼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 그리고 변화된 마가의 믿음과 삶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 번의 실수가 실패자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수한 자에게도 재기의 기회가 필요합니다. 둘째, 바울과 같이 최고 지도자의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항상 겸손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지도자는 과거의 실수를 문제삼기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아야 합니다. 과오를 범한 자라도 변화될 수 있음을 믿고 잘 지도함으로 과오를 만회할 가능성을 주어야 합니다. 바나바처럼 마가의 실수를 잘 용납하고 이끌어주는 지도자가 없었다면, 마가는 교회에 유익한 일꾼이 되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각 사역자들로부터도 배울 점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마가로부터 실수가 있더라도 그것을 만회하도록 디디고 일어나 노력하는 자세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바나바로부터는 실수한 자라 할지라도 다시 격려하여 지도자로 키워내는 멘토링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그의 이름의 뜻처럼 권위자,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또 비록 목표 중심적으로 사역을 하기는 하였지만 나중에 마가를 다시 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린 비록 단절된 관계가 있었어도 다시 회복하고 다시 동역하는 인간 관계와 사역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역의 갈등이 있더라도 겸손과 사랑 가운데 끝까지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갈등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받음으로써 성숙한 사역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21)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

2차 선교여행에 마가 동행여부 놓고 바울-바나바 심하게 다퉈

바울이 비록 당대의 저명한 학자이기는 했어도 교회 안에서는 신참 선교사의 입장이었다. 그가 감히 나사렛 예수의 으뜸가는 제자이며 교회의 수장으로 존경받던 베드로를 면박한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고 예루살렘 총회에서 오히려 바울과 그 입장을 변호했던 베드로의 리더십은 과연 교회의 수장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거칠었던 베드로의 성품이 그토록 너그럽게 바뀐 것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베드로의 그런 자세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후 다시 나타났다. 안디옥에 돌아온 바울은 ‘할례 논쟁’의 경위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갈 1:1∼3)

예루살렘 총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바울은 이제 자신도 ‘사도’임을 스스로 강조하고 있다. 그의 거침없는 성품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서신의 수신자를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로 한 것에는 좀 문제가 있다. 그가 갈라디아의 일부 지역에서 선교하기는 했으나 그곳은 또한 베드로 전서의 수신자 명단에도 나와 있듯이 베드로의 선교 지역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1∼2)

당시의 지도를 보면 갈라디아는 남과 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바울은 남부 갈라디아에 속하는 비시디아,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에서 복음을 전했고 베드로는 본도에 가까운 아마시아, 젤라, 타비움 등 북부 갈라디아에서 전도했다. 바울이 남과 북을 구분하지 않고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베드로가 바울에게 선교 지역에 관계 없이 갈라디아의 모든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총회의 결과를 알리는 편지를 써서 보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자신이 좋은 문장으로 편지를 쓰기도 어려웠겠지만, 바울의 주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뜻에서 자신의 선교지까지도 포함해서 써 달라고 의뢰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베드로의 당당한 리더십이었다.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할례 문제’로 일어났던 혼란들이 일단 정리되자 이듬해인 AD 50 년 바울은 곧 제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한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행 15:36)

그러나 이 때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행 15:37∼39)

안디옥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꾼인 두 선교사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이 민망한 사건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것은 그가 마가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제1차 선교 여행에서 중도 이탈했던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려 했던 바나바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모든 제자들이 그랬듯이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는 종말론적 신앙의 소유자 바나바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준 높은 공부를 하고 돌아와 사업에만 열중하는 조카를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왜 그와 함께 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일까?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대목을 바울이 마가에 대하여 성실하지 못한 일꾼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나중에 쓴 바울의 서한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마가와의 동행을 원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전 7:7)

선교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물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나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또 그들을 돕는 여러 가지의 사역이 필요하고, 그 필요에 따라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다는 것이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고전 7:17)

또 바울은 ‘사업하는 자’에 대한 격려와 교훈도 잊지 않았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0∼31)

그리고 바울은 마가에게 주는 듯한 말도 남겨 놓았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9∼30)

마가는 후일 바울의 그 다음 대목을 감명 깊게 읽었을 것이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것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강론’이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후일 마가가 교역의 중심지인 고린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 이 서한을 읽었다면 그 감격이 어땠을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특히 다음 대목은 학자였던 바울이 마가에게 주는 말 같았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그러므로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과 은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바나바는 바울의 그런 태도를 섭섭하게 여겼던 것 같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39∼41)

그러나 마가가 안디옥에 사업을 벌여 놓고 있었다면 왜 다시 외삼촌 바나바를 따라 구브로로 갔던 것일까? 마가는 제1차 선교 여행에 그들과 동행하면서 특히 바보 즉 파포스 쪽에 지중해 진출의 교두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다시 구브로로 갔을 것이다. 외경 ‘바나바 행전’에는 바나바가 구브로에서 순교했다는 기사가 있고, 아직도 바나바의 기념 교회와 그의 무덤이 구브로에 남아 있으나 마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바나바 행전’의 저자가 마가라고 하기도 하나 그런 증거도 없다. 성경에서 마가가 다시 언급되는 것은 AD 62년 바울이 로마에서 골로새 교회로 보낸 서한에서다.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 4:10)

AD 50년 성경에서 사라진 마가는 AD 62년까지 12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김성일 작가

진리의 킹제임스성경 – 예수그리스도와 성경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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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행 15:37-38) 바나바는 마가라는 이름의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결심하였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자기들과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동역자 관계입니다. 바울이 회심하고 주님의 증인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바나바가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그를 변호해 주었습니다.

(행 9:26-27)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합류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다 그를 두려워하며 그가 제자가 된 것을 믿지 아니하되 바나바는 그를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주를 본 것과 또 그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마스쿠스에서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선포한 것을 그들에게 밝히 말하니라.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와서 함께 사역을 한 사람도 바나바입니다.

(행 11:25-26) 그때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나서 그를 만나매 안디옥으로 그를 데려오니라. 그들이 만 일 년 동안 그 교회와 함께 모이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니라.

하지만 그들은 다시 떠나는 2차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1차 전도여행에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했지만, 힘든 여행을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행 13:5) 살라미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회당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요한을 자기들을 섬기는 자로 두었더라.

(행 13:13) 이제 바울과 그의 일행이 바보에서 배 타고 떠나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르렀을 때에 요한은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조카인 마가를 함께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골 4:10) 나와 함께 갇힌 자 된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누이의 아들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는 너희가 명령을 받았으니 그가 너희에게 이르거든 그를 받아들이라.)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이 대립되어 격렬하게 싸우고 서로 헤어졌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자기 고향인 키프로스로 떠났습니다.

(행 15:39) 그들 사이에 다툼이 격렬하여 그들이 서로 갈라져 떠나니 이처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키프로스로 가고

바울은 동역자를 잃고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이 문제를 중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하나님의 은혜에 맡겼습니다. 이에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를 택하여 그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행 15:40-41) 형제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매 그는 실라를 택한 뒤에 떠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가며 교회들을 굳건하게 하니라.

같은 하나님을 믿고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함께 동역하던 말씀 사역자들 사이에도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계속 맞상대하며 서로 비방하고 공격하고 흠집을 낼 것이 아니라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낫습니다. 각자 주님의 일에 헌신하다 보면 언젠가 다시 화해하게 되는 날도 있을 겁니다. 바울은 나중에 마가와 관계를 회복하고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런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 겁니다.

(딤후 4:11) 오직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마가를 취해 데리고 오라. 그가 사역을 위해 내게 유익하니라.

출처. 부산제일성서침례교회, pastor. Moonsoo Kim ☞ http://www.fbb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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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다툼이 생겼습니다(행 15:36~41)

성숙한 신앙인격을 갖춰야 합니다

갈등과 다툼이 있어도 하나님 영광과 복음 위한 사역 계속돼야

▲ 최우종 목사(광주동신교회)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행 15:39)

요즈음 저에게 가끔 전화를 하여 고민을 호소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여성에게는 ‘갱년기’가 있는데 남성에게는 ‘갱놈기’가 있다고 웃기면서 고독하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 친구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공부를 잘해 둘 다 명문대학에 다닙니다. 그리고 부인은 보기 드문 미인입니다. 그리고 이 친구의 직장도 아주 건실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면 남부러울 것 없습니다.

사실 목사인 저는 같이 놀아주고 부대껴줄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도, 친구들이 그립다고 저에게 안타까움을 호소하곤 합니다. 친구를 위해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 친구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됩니다. 예전의 친구들과 함께 추억을 되새기며 더불어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누리고 동역하는 사역이라면 더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죽음을 무서워할까요? 물론 죽음 이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큽니다. 그렇지만 그 심리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죽음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자녀들, 배우자, 이웃들 등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인간관계로 말미암아 수많은 단절의 아픔을 경험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함께 사역하다가 갑자기 동역이 깨지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하던 중, 제1차 전도여행 당시에 세웠던 교회들을 다시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바나바가 바울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한 것이 다툼의 화근이 되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인데, 제1차 선교여행 때에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동행했다가 그만 도중에 포기하고 예루살렘 집으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선교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와는 달리 마가 요한과 동행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견으로 인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고, 갈등이 증폭되어 결국에는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갈라서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도 개인적인 일로나 또한 교회 안에서 사역을 하는 도중에 비슷한 갈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바나바와 바울의 갈등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일어나는 다툼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영적 교훈을 배우기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먼저 자신의 의견을 지나치게 주장하기에 앞서, 기도하면서 논리적인 대화를 통해 서로의 주장에 대한 장단점과 사역의 손익을 계산하여 좋은 합일점을 도출하려는 노력을 계속했어야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은 단지 사역의 목표와 사역의 방법 간의 관점에 대한 충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씀을 전했던 도시들을 다시 방문하여 성도들의 형편을 살피고 돌봄으로써 교회를 튼튼히 하려하는 일 즉 사역의 목표를 중시했고, 바나바는 사역의 목표보다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관계 중심을 지향했을 뿐입니다. 틀린 게 아니고 다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심히 다투다 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와 의견이 대립될 때에 내 생각과 다른가 같은가를 생각하기보다, 그 문제가 신앙의 본질적 문제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공격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것을 자꾸 절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다양성 안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할 때 그 교회는 건강한 조직, 힘과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2.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차선으로 은혜롭게 헤어지는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싸우고 갈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결별한 이후에도 서로를 향해 변함없는 신뢰와 존경을 보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6절에 보면, 바울이 바나바의 자비량선교를 칭찬, 변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훗날 바울은 자기와 바나바와의 결별에 원인을 제공하였던 마가 요한을 용서하고,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삼습니다(딤후 4:11, 골 4:10).

“세상 사람들은 술 한 잔 하면서 화해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한번 싸우면 결코 화해하지 않는다”는 말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말씀은 분쟁과 갈등으로 인해 성도들이 떠나가고 복음의 길이 막혀가는 한국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헤어짐에 마귀가 개입하게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개입하시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경우를 생각하십시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람과 롯의 소유가 많아 좁은 땅에서 함께 양들의 목초지와 안식처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목자들의 다툼은 심각해졌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이 다투는 모습을 다 보았습니다. 아브람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은혜롭게 실행했습니다. 우리들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대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갈등할 때에 불신자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졌지만 하나님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갈등의 해결에 있어서는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냈지만, 갈등으로 인해 사역을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각각 구브로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굳게 하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행 15:41)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을지라도 그 갈등 때문에 맡은 바 직무나 직책을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귀한 열매를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마가 요한의 관계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빌레몬서 1장 24절에 보면 바울이 마가 요한을 ‘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골로새교회로 보낸 바울의 편지인 골로새서 4장 10절 이하에 보면,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찾아오거든 거절하지 말고 따뜻하게 영접하라’고 하면서 그가 바울의 위로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마가를 골로새교회에 추천해서 목회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 4장 11절을 보면 자기가 있는 로마에, 자기의 일에 유익한 마가를 보내달라고 초청합니다. 마가가 신앙이 어렸을 때는 좀 문제가 있었지만 실수들을 통하여 신앙이 성숙해지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십자가 보혈의 복음과 접촉하여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사건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립니다.

본문의 교훈은 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고 또 교회적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은 이방 선교라는 중대한 과업을 위기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두 사람의 결별로 인해 이방인 전도 사역이 지연 내지 중단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 전도가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 결과적으로는 선교가 더욱 강력히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이자 로마 시민권을 갖고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실라(행 16:37)를 동역자로 하여 선교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동역자로 삼고 그를 훌륭한 선교자로 성숙시켰습니다. 이것이 왜 가능했을까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신앙과 인격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점과 연약함으로 인해 자칫 하나님의 교회가 큰 분란으로 빠질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신앙인격을 통하여 오히려 더 큰 성장을 가져오도록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부족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선시한다면, 바른 신앙인격을 가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약점조차 주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심히 다투어 갈라섰지만 끝내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해 매진했던 두 사람의 신앙 인격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크게 쓰임 받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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