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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bauhaus from A to Z – 네이버 블로그

카테고리 이동 박영우 건축가 Young Woo PARK, aia, ncarb · I is for Johannes Itten. · 스위스 태생의 화가인 요하네스 이텐은 바우하우스 개교시 최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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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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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서 설립했다가, 1925년 데사우로 옮겼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건축의 집’을 의미한다.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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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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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공룡 실내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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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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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디자인의 시작 ‘바우하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의 유리외벽, /bauhaus-dessau

독일 베를린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적한 마을 데사우(Dessau). 이곳에는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세운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가 자리하고 있다. 바우하우스 건물의 모든 외벽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이야 전면 유리 파사드가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1926년 바우하우스 건물이 처음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혁신적인 건축언어였다.

마흔 세 살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고자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바로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이다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 자체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담고 있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926년 12월 4일 바우하우스 건물의 준공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데사우를 방문했고 이들은 현대 건축디자인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자 바우하우스 건물에 불이 켜지면서 장관이 펼쳐졌다. 격자 모양의 구조가 선명히 드러나고 유리 파사드가 빛을 뿜어내면서 지금까지 본적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의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짓다’는 단어 ‘Bauen’(바우엔)과 ‘집’을 뜻하는 ‘Haus’(하우스)의 합성어이다. 바우하우스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Weimar)이다. 마흔 세 살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고자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바로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이다. 바이마르의 평범한 공공건물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 예술학교에서는 미술뿐만 아니라 금속가공, 목공 등 공예와 관련된 전 분야는 물론 공연과 무용에 이르는 모든 예술 교육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가 색채 교육을 책임지면서 순수 미술에서 추구했던 미학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가전이나 가구에 접목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에게는 창작을 위한 충분한 자유가 주어졌고 수많은 실험들이 어떠한 제도적 방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바이마르에서 순탄하게 시작된 바우하우스는 1925년 위기를 맞이한다. 그해 바이마르 시의 정권을 잡은 극우정당은 학교를 폐교할 목적으로 재정 지원에 대한 전면 중단을 결정하였고 바우하우스는 불가피하게 이전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과 기술을 접목해 일상의 물건이나 심지어 기계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새로운 산업 미학을 만들어낸 바우하우스. 1919년 독일의 역사적인 도시 바이마르에서 처음 문을 열었던 바우하우스는 극우정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재정 지원이 끊겨버렸고 존폐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도시 데사우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데사우는 독일 산업의 전진기지로 도시의 정체성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재정적 지원은 물론 학교 건축을 위한 넉넉한 부지도 기꺼이 마련해 주면서 그로피우스의 종합예술학교 이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데사우 시당국이 그로피우스에게 학교 부지로 제안한 곳은 도심에서 벗어난 넓은 벌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제약 없이 건축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는 바우하우스의 작업실 공간. /bauhaus-dessau

그로피우스는 새로운 터에 자리하게 될 예술학교를 설계하면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에 따라 각 공간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지만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통합적인 건축을 소개한다. 그 시대에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나 형태에 구애를 받지 않고 쓰임에 적합하지만 자유롭고 통합적인 구조로 공간들을 배치하였다. 학교는 미술학교를 위한 건물은 물론 기술학교, 사무공간, 식당과 기숙사 등의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로피우스는 각각의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통일성은 보여주되 지루하지 않도록 대칭적 구조를 피하고 크기와 높이에 변주를 가했다. 그렇다보니 바우하우스 건축물의 전체 구조는 여느 건축물들과는 달리 좀처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건축물들은 구조적으로 대개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내부를, 하나의 공간에서 다음 공간을, 부분에서 전체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렇지 않다. 학교를 구성하는 개별 건물들은 형태뿐만 아니라 크기나 구조 또한 모두 달랐기 때문에 외관의 피상적인 관찰을 통해 내부를 읽을 수 없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건축 구조와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직접 걸어 다니며 공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바우하우스를 건축하면서 그로피우스의 고집이 강하게 드러난 부분은 디자인이다. 바우하우스의 기본적인 건축철학은 ‘집과 가구는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 따라 문고리를 비롯해 전등이나 심지어 전기 스위치와 같은 소소한 대상들까지도 건물 전체 디자인에 맞게 세심하게 제작되었다. 바우하우스에 사용될 조명들은 재학생들에 의해 직접 제작되었다. 각 층과 공간은 그 용도와 성격에 따라 다른 색으로 칠해졌다. 이렇게 기능성과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미적 감각까지 더해 진 바우하우스 건물이 탄생한 것이다.

1933년 나치가 데사우 시의회를 장악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바우하우스는 베를린에서 다시 문을 열었지만 나치의 탄압에 위협을 느낀 발터 그로피우스는 이듬해인 1934년 영국으로 망명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현대건축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바우하우스가 베를린으로 이전해 버리고 데사우의 건물은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나치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역겨운 건축’이라고 폄하한다. 1945년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데사우는 동독에 편입이 되었다. 동독 정부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독일 건축의 전통을 파괴하는 흉물로 취급했지만 완전히 철거를 하지는 않았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동독 내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1976년 바우하우스는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동서로 나누어진 독일이 다시 통일을 이루고 바우하우스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일부는 학교로 일부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그는 ‘예술은 탐구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탐구는 발견을, 발견은 창조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창조가 탐구에서 비롯된다면 그 토양이 되는 것은 ‘자유’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통해 남기고 간 위대한 예술정신도 역시 자유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바우하우스 – 건축편집자 editing x architecture

이 학교는 그랜드-듀칼 작센 순수미술학교와 그랜드-듀칼 작센 예술공예학교의 합병으로 새로 부설된 건축학과를 위해 1919년 4월 1일 바이마르에서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설립됐다. 그 뿌리는 1906년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이 설립하고, 벨기에 아르누보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1863~1957)가 감독한 예술공예학교에 있다. 반 데 벨데가 벨기에인이라는 이유로 1915년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을 때, 그는 그로피우스, 헤르만 오브리스트(1862~1927), 아우구스트 엔델(1871~1925)을 가능한 후임자로 추천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지연과, 순수예술과 응용예술 화해의 사회-경제적 의미와 기관의 책임자에 대한 긴 논쟁 끝에(학교의 존립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문제로 남아 있던 문제),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라는 두 기관을 통합하는 새로운 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 1919년 4월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의 전시회 팜플렛에서 그로피우스는 “장인과 예술가 사이의 오만한 장벽을 높이는 계급 구분 없이 새로운 장인 길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선언했다. 그로피우스의 신조 ‘바우하우스’는 건물과 전근대 석공 길드인 바우휘테를 모두 참조한다. 초기 의도는 바우하우스가 결합된 건축 학교, 공예 학교 및 예술 아카데미가 되는 것이었다. 스위스 화가 요하네스 이텐(1888~1967), 독일계 미국인 화가 라이오넬 파이닝거(1871~1956), 그리고 독일 조각가 게르하르트 마크스(1889~1981)는 그로피우스와 함께 1919년에 바우하우스의 교수진을 구성했다. 이듬해에는 독일의 화가, 조각가, 그리고 극장 워크숍을 이끄는 디자이너 오스카 슐레머(1888~1943), 그리고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 1922년 합류한 러시아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를 포함하여 그들의 계급이 올라갔다. 바우하우스에 있어 격동의 해인 1922년에는 네덜란드 화가 테오 반 되스버그(1883~1931)가 데 스틸(“더 스타일”)을 홍보하기 위해 바이마르로 이주했으며, 러시아 구성주의 예술가이자 건축가인 엘 리시츠키가 바우하우스를 방문했다.

바우하우스 bauhaus from A to Z

G is for Gropius.​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는 1919년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1910년 전후해서 피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한다. 당시 미스와 코르뷔지에도 같이 있었다. 그후 아돌프 마이어와 사무실을 차린다. 유명한 유리커튼월의 파구스 공장 fagus factory 을 설계한다. 그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설정한 선언문도 썼다.

” 바우하우스는 예술 arts 과 공예 crafts 를 하나로 묶어 새로운 건축의 근간으로 한다. 조각, 회화, 응용미술, 그리고 수공예는 새건축의 영원한 구성요소이다.”

그는1928년 바우하우스를 떠난다. 나치의 폭정을 피해 영국으로 피신하였다가 1937년 미국으로 영구 이민한다. 하버드 GSD의 건축학과장이 되어 신건축( 소위 모더니즘)을 가르치며 유명 후학들을 길러낸다. 아이엠페이, 폴 루돌프, 필립 존슨 등 수많은 유명 건축가들이 그의 제자이다. 협업을 강조한 그는 제자들과 TAC이라는 사무실도 병행한다.

바우하우스(Bauhaus) 100년… 예술·디자인·건축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 제안한 정신혁명이었다

↑ 데사우 시절의 바우하우스 교사(校舍). 1925~1926년 지어졌다.

by 김지지

바우하우스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독일은 지금 ‘바우하우스 축제 중’이다. 600여 개의 기념 행사가 쏟아지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정신과 성취를 알아본다.

“기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다. 기계 제품에 인간의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미술과 공예와 건축을 종합한 독일의 바우하우스(1919~1933) 학교는 현대 산업디자인과 모더니즘 건축의 산실이다. 이 바우하우스 설립의 직접적인 연원을 좇다 보면 독일 근대 디자인 운동의 선구자 헤르만 무테지우스(1861~1927)와 맞딱뜨린다.

그가 활약한 20세기 초, 독일은 영국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강대한 산업국가였다. 그러나 예술적 독창성과 상업적 활용면에서는 영국에 뒤졌다. 독일은 질시 어린 눈으로 영국을 주시하다가 1896년 건축가이자 공무원인 무테지우스를 주영 독일대사관의 문화 담당관으로 런던에 파견했다. 무테지우스는 대사관 직원(1896~1903)으로 근무하면서 영국의 합리적인 주택 건축과 참신한 공예품 생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물이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영국의 주택’(1904년)이라는 3권짜리 책이었다.

무테지우스는 영국의 공예와 건축물에서 받은 감명을 독일에서 미술공예학교를 진흥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그의 주도로 건축가·디자이너·기술자·공예가·기업인들이 규합된 ‘독일공작연맹’이 1907년 가을 뮌헨에서 발족했다. 미술과 공예와 공업을 결합해 더욱 향상된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다른 국가들과의 산업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자는 게 설립의 목적이었다.

그는 수공예를 전통 장식의 모방에만 의존하는 구습으로 치부하며 산업화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예의 기준으로 규격화(표준화)를 역설했다. 그러면서 산업화 시대의 규격화는 생산 증대뿐만 아니라 예술적 질도 담보해야함을 강조했다. 이후 디자인은 전통 공예에서 산업 예술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초대 교장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독일공작연맹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 건축가 겸 디자이너 페터 베렌스(1868~1940)였다. 그는 1903년 뒤셀도르프 지역의 미술공예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전통 공예와 기계 생산을 조합하는 방향으로 교과과정을 재구성했다.

1907년부터는 독일 최대 가전 회사인 ‘아에게(AEG)’의 디자인 고문으로 활동했다. 베렌스는 상품 디자인, 인쇄물, 건물 등에서 독창적인 디자인을 제시하고 기업 로고, 광고, 전구, 건물 등 회사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심미적 결정을 감독했다. 사실상 세계 최초의 브랜드 컨설턴트였다. 베렌스가 설계한 AEG 터빈 공장은 현대적인 건축의 전형으로 극찬을 받았다. 당시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는 훗날 세계적인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르 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이 포진했다.

이중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에게 주어진 운명은 10여 년 후 건축·디자인 전문학교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로피우스는 독일 베를린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뮌헨 공과대(1903~1907)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졸업 후 독일공작연맹에 가입·활동하고 베렌스 설계사무소에서 근무(1907~1910)했다. 그때의 경험은 “기계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고 기계 제품에 인간의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미술가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예술과 기술 통합하고 실현의 장으로 미술과 산업 연결하는 바우하우스 구상

기능과 실용을 중시한 그로피우스의 미의식은 1911년 그가 처음 의뢰받아 설계한 라인강변 알펠트에 있는 파구스 제화공장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전체 10개 동으로 지어진 이 공장 단지는 근대건축과 산업디자인의 발전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건물로 인정받아 2011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 실력을 인정받아 1915년 작센대공국이 문화도시 바이마르에 설립한 조형예술학교와 공예학교 교장에 발탁되었다. 그는 산학을 연계한 혁신적인 학교 체제를 시도했으나 기존의 아카데미 교육 방식에 젖어 있는 교수들과, 수공업을 고집하는 장인연맹의 반대에 부닥쳐 실패했다.

그로피우스는 1918년 11월 독일제국이 공화국으로 바뀌고 사회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급진적 예술가 단체인 ‘그룹 11월’과 ‘예술을 위한 노동회의’ 등에 가입·활동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조국의 새출발을 돕기 위해서도 팔을 걷어붙였다. 이런 그에게 바이마르시가 젊은 세대에게 실용적이고 지적인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로피우스는 1919년 4월 1일 조형예술학교와 공예학교를 통합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의 문을 열고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다. ‘바우하우스(Bauhaus)’는 독일어로 ‘건물(haus)을 짓는다(bau)’는 뜻의 ‘하우스바우(Hausbau)’를 도치한 이름이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창립 선언문에서 “이제 미술가와 공예가 사이에 가로놓인 높다란 장벽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집단을 만들자. 건축과 조각과 회화를 하나의 통일 속에 포용하고… 새로운 미래의 건축을 창조하자”고 역설했다. 예술과 기술을 통합하고 그 실현의 장으로 미술과 산업을 연결하는 바우하우스를 구상한 것이다. 그로피우스는 미술과 공예가 건축으로 귀결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바우하우스 건축학과는 1927년 설치되었다.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 교육 제시

바우하우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의 건축을 지배한 것은 화가·판화가·조각가·건축가의 고등교육을 목적으로 설립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였다. 보자르식 건물에서, 강철 지주(支柱)는 무거운 석재 뒤에 숨겨져 마치 석재가 건물의 중량을 지탱하는 것처럼 보였고 콘크리트 외장은 화려한 장식 속에 감춰졌다. 건물 거의 모두가 로마 궁전이나 고딕식 대성당 같은 아름답고 웅장한 것들과 어딘지 닮아 있었다. 그로피우스는 이러한 건축을 ‘현대의 후퇴’로 생각하고 옛 건축 교육 대신 20세기 산업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전인 교육을 제시했다.

바우하우스에는 학교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교수(선생)와 학생이라는 전통적인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수와 학생 간의 일방적인 위계와 차별도 없앴다. 가르치는 사람은 중세의 길드 전통에 따라 장인으로 불리고 배우는 사람은 수준에 따라 직인이나 도제로 불렸다. 바우하우스는 천재의 감각에 의존하는 예술적 감각과, 숙련을 필요로 하는 장인의 기술을 통합하는 데 진력했다. 통합의 이유는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직공과 고귀한 예술가의 구분을 없애는 데 있었다.

학생들은 6개월간 형태와 색채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배우는 예비 과정을 마친 뒤 합격 판정을 받으면 도제로 등록되어 자신이 선택한 공예나 기술 분야에서 3년간 엄격한 훈련을 쌓았다. 그로피우스는 예술적·장인적·공업적 기술을 종합하기 위해 라이오넬 파이닝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하네스 마이어,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건축가들을 바우하우스로 초빙했다.

1925년 바이마르에서 탄광 도시 데사우에 둥지 틀어

바우하우스에 새로운 변화가 시도된 것은 1923년이었다. 그해 교수로 합류한 헝가리 태생의 예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의 제안에 따라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향을 중세주의와 낭만주의적 공예 중심에서 산업디자인 중심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1923년 8월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는 이러한 전환을 입증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바이마르 시민들은 바우하우스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고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더욱이 바이마르 지역 의회는 바우하우스의 혁신적 실험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지역 공예가들은 산업체들과 긴밀한 협력을 주장하는 바우하우스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기에 바우하우스가 공산당이나 유대인과 관련이 있다는 비방까지 난무했다.

결국 1924년 그로피우스에게 사임 압력이 가해지고 바우하우스의 재정 지원까지 삭감되면서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바우하우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는 데사우,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 여러 도시가 괜찮은 유치 조건을 제시해 그 가운데 1925년 사회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는 탄광 도시 데사우에 둥지를 틀었다.

데사우는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의 산업화를 데사우에 실현하는 것으로 기대에 부응했다. 1926년 10월 완공된 바우하우스 교사(校舍)는 이러한 활동의 출발점이었다. 교사는 강의실, 공방, 극장, 식당, 체육관, 스튜디오, 사무실, 기숙사를 서로 연결하고 옥상에는 정원이 있는 복합 건물로 꾸며졌다. 특히 그동안 유럽과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지어진 뾰족한 지붕의 전통적인 건물들과는 달리 비대칭적인 평면 구성, 평평한 지붕, 흰색으로 칠한 벽, 길 쪽으로 나 있는 수평적인 창문 등으로 설계해 당시의 건축 문화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교수들의 사택으로 지어진 4채의 ‘마이스터 하우스’ 역시 현대 기능주의 건축의 획기적인 건물로 평가받았다. 바우하우스 교사와 마스터스 하우스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낯익은 물건 가운데 바우하우스 디자인 꽤 많아

바우하우스의 유산은 건물로 한정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낯익은 물건 가운데 바우하우스에서 디자인한 것이 꽤 많기 때문이다. 벽을 따라 위아래에 찬장을 붙여놓은 싱크대, 쇠파이프로 만들어진 의자 등의 가구, 이동식 벽, 조립식 건축 자재, 소리를 흡수하는 천 등이 그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작업장에서 생산된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24년 첫 선을 보인 ‘바겐펠트 램프’ 디자인으로, 산업사회의 유리와 금속을 거실로 들여와 호평을 받았다. 장식없는 단순함과 튼튼함과 재료의 실용성을 인정받아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에 대량 제조되어 유행했다. 이는 바우하우스의 실험적 디자인이 성숙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가장 잘 알려진 바우하우스 제품은 마르셀 브로이어가 디자인한 ‘바실리 의자’와 ‘캔틸레버 의자’다. 특히 ‘바실리 체어’는 안락의자의 혁신을 가져왔다. 자전거의 철제 프레임에서 영감을 얻어 의자에 최초로 강철 파이프를 썼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 2월 “할 일은 다했으니 앞으로 건축에 전념하겠다”며 교장에서 물러났다. 하네스 마이어가 후임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공산주의 이념을 가르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 시 당국에 의해 1930년 여름 해임되었다. 뒤를 이어 부임한 3대 교장은 기능주의 옹호자인 미스 반 데어 로에였다. 그는 마이어의 정치 성향이 남긴 흔적을 지워나갔으나 1932년 데사우의 시정을 장악한 나치가 “볼셰비즘과 퇴폐주의를 만연시킨다”며 바우하우스를 폐쇄하는 바람에 바우하우스는 다시 베를린으로 세 번째 이사했다. 하지만 베를린 바우하우스 역시 나치 정권의 탄압과 게슈타포의 감시로 인해 1933년 4월 자진 폐교했다. 14년 동안 33명의 교수와 1,250명의 학생이 배출되었다.

학교 폐쇄는 교수와 학생들을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세계 도처로 분산시켜 오히려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1937년 하버드대 건축학과로 자리를 옮겨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미국에 이식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에서 건축과 교수로 활동하며 많은 건축가를 배출했고 라슬로 모호이너지는 시카고에서 ‘뉴바우하우스’ 운동을 전개했다.

바우하우스 출신 교수와 학생들이 전파한 바우하우스 철학은 전 세계 건축 동향에 영향을 미쳤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도 1933년부터 바우하우스 형식의 건물이 4,000여 채나 건립되었다. 이 건물들은 200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바우하우스는 현대사회의 시각 환경을 바꿔놓고 현대건축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라기보다는 지도자로 바우하우스라는 교향악단을 세계 최고로 키운 위대한 지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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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의 로고

슈타틀리헤스 바우하우스(독일어: Staatliches Bauhaus), 혹은 줄여서 바우하우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에서 설립·운영된 학교로,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 등과 관련된 종합적인 내용을 교육하였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서 설립했다가, 1925년 데사우로 옮겼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건축의 집’을 의미한다. 1933년 나치스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기 전까지 14년간 운영되었다.

바우하우스의 양식은 현대식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또한 이어지는 예술, 건축, 그래픽 디자인, 실내 디자인, 공업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역사 [ 편집 ]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1918년, 도이치 제국이 붕괴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1919년, 바이마르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학교가 합병하여 ‘국립 바우하우스 바이마르’가 설립되었고, 초대 교장으로 그로피우스가 취임하였다.

이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가 폐쇄되어, 1925년에 데사우로 이전, ‘데사우 시립 바우하우스’가 되었다. 데사우의 교사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것으로, 모더니즘 건축으로서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 시기에 정식 건축과정이 설립되어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조형분야를 종합한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로피우스는 1928년 교장직에서 물러나, 하네스 마이어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마이어는 과격한 기능주의자로 예술을 집단사회의 표현으로서 모든 사람을 위해 서로 규정된 객관적 질서로 이해하여 생활이나 기능을 떠난 기하학적 형상을 부정하였다. 그는 1930년에 해임되어,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교장에 취임하였고, 정치적 변동으로 인해 1932년에는 학교가 폐쇄되었다. 이후 베를린으로 이전하여 사립학교가 되었지만 결국 1933년, 나치에 의해 폐쇄되었다. 미스 등은 미국에 망명하여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전하였다.[1]

1996년에는 바우하우스의 바이마르와 데사우의 건물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이념 [ 편집 ]

교육 [ 편집 ]

바우하우스 교육의 최종 목표는 건축을 중심으로 각기 분산된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는데 있었다. 이와 동시에 “건축가와 조각가, 화가, 우리 모두는 공예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주장대로 공예와 순수미술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 창립 당시의 목표였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는 학교 내외의 복잡한 상황과 갈등 속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데, 교육이념의 문제점과 변화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2]

첫째, 초기의 바우하우스에는 건축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전쟁 후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공간과 재료의 부족이라는 어려움에 처했고, 따라서 특별한 시설이 요구되지 않는 이론과목에 집중했다. 따라서 그로피우스가 가장 중요시하던 건축 교육은 1927년에야 비로소 실행되었다.

건축 [ 편집 ]

바우하우스의 건축이념과 구성 원리는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로 협동작업의 개념으로 조각가, 화가, 건축가 사이의 예술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협력과 설계자인 건축가, 시공자, 기술자와의 수평적인 협력체제로서 서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두 번째로 형태의 문제를 거부하고 시각적 순수성의 정확한 재료 및 구조 기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 내면적인 생명력의 근원은 그 시대의 구조 기술이며 기술의 참된 실현이 건축의 초월된 의미로 확장될 때 건축은 그 시대의 역사로서 내적구조의 결정체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시대정신이 요구되는 프로그램의 정확한 이해와 경제성을 통하여 건축문제의 해결이 가능하였고 이러한 경제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재료 및 모든 부재의 규격화, 표준화로 연결되며 공업생산 된 부재는 협동 작업에 의한 현장조립으로 마감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간 개념에 관한 것으로 개별적인 특성과 목적에 의한 ‘합목적성’개념과 시각적인 다양성에 의한 ‘시·공간’개념을 들 수 있다. 전자의 개념은 기능주의적 공간 구성과 공간의 정의, 그리고 목적에 맞는 공간의 부피와 크기에 의해 나타나고 후자의 개념은 형태들의 상호관입과 시점의 다양성에 의해서 표현된다. 형태의 상호관입은 고전적인 건축법칙을 부정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3]

디자인 [ 편집 ]

바우하우스는 실용성에 대한 목표는 있었지만 일관된 디자인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을 담당하던 예술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디자인관에 따라 다양한 예술적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 이유로 세 번에 걸쳐 지역을 옮기면서 외부적 영향도 받았기 때문이다. 1기(1919-1924)는 수공예를 강조하였으며, 자연과 재료에 대한 연구에 힘썼다. 2기(1925-1931)는 실생활 제품에서 공간까지 디자인을 확대하였고, 디자인의 기능성과 공공적 구조주의를 지향했다. 이는 사회주의적 디자인으로 발달하게 된다. 3기(1932-1933)는 표현주의적 예술을 추구하였으며,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도록 가르쳤다.[4]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표준을 만드는 것에 전념했다.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표준형의 의미는 만들기 쉬운 공장생산품의 의미가 아니라 문명사회에 있어서 최고수준의 원형을 의미하며, 우수한 품질을 가지며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예술을 산업제품이라는 현실과 잇고자 하는 점에서 예술과 수공업, 산업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이너들은 이상적인 용도에 알맞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제품형태를 위한 탐구과정에서 오늘날 기능주의의 고전이라 불리는 불멸의 디자인들을 탄생시켰다.[5]

新바우하우스 [ 편집 ]

폐쇄 이후 학교의 체제를 지닌 바우하우스의 후신을 자처하는 기관으로는 미국의 뉴 바우하우스와 독일의 울름조형대학을 들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자들은 미국으로 대거 이주, 미국디자인 교육에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고, 모홀리 나기는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하면서 바우하우스식 교육을 신대륙에 이식시켰다. 뉴 바우하우스는 재능 있는 학생들을 요구했으며, 수공업 또는 기계공업 제품의 디자이너, 박람회, 무대, 전시, 상업미술, 타이포그래피, 사진 등의 디자이너, 그리고 조각가, 화가, 건축가의 양성을 목표로 했다. 모홀리 나기는 과거 독일에서의 교육 경험을 토대로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교육 프로그램을 기초로 하여 커리큘럼과 조직을 구성했으나 개교 후 일년도 되기 전에 재정상의 이유로 학교를 폐쇄하게 된다. 그러나 뉴 바우하우스는 일리노이 공과대학에 합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6]

또 다른 바우하우스 출신의 막스 빌은 울름조형대학을 설립하여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전후의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수용하고자 하였으며, 디자인의 학문화를 추구하였고 건축을 포함한 모든 디자인의 과학적인 개발을 위한 분화구가 되었다.[1]울름 조형 대학은 독립적인 산업 디자인 기업처럼 기능했다. 이 학교는 가전업체 ‘브라운’, 항공사 ‘루프트한자’ 등과 연계해 디자인을 발표했다. 브라운사 오디오 기기와 루프트한자 CI 등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디자인이었고 성공적인 산·학 연계 사례였다.[7]

영향 [ 편집 ]

바우하우스가 끼친 영향을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다녔던 학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상자 같은 건물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콘크리트 기둥들이 있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사각형 창문들로 메웠다. 회색 바닥의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긴 복도를 걸어 나오면 학교 앞 문방구에는 원색적인 공중전화가 있다. ⋯ 씻고 다듬고 데우기 좋게 최적의 동선으로 계획된 싱크대가 있고, 옷을 종류별로 나눠 효율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붙박이장이 있으며, 금속 프레임에 가죽 옷을 입힌 안락한 소파가 있다. 눈앞에는 둥근 벽시계와 무지Muji의 네모난 CD 플레이어가 걸려 있다. 이 모든 디자인의 출발점은 ‘바우하우스’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8]

이처럼 바우하우스에서 생산한 전등, 벽지, 가구와 같은 산업제품들, 그리고 타이포그래피 등은 그 단순하고 세련된 형태와 구성으로 현대 디자인의 고전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술 대학 커리큘럼이 바로 90년 전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생활 속의 디자인’이라는 문구를 직접 실천함으로써, 학교를 넘어 하나의 건축·디자인 양식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9]

교육 [ 편집 ]

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는데,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은 다른 나라들이 참고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즉, 오늘날 세계 각지의 미술대학의 교과과정 중에는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을 따른 것이 많다. 보통 1, 2학년까지는 구성, 소묘 판화, 해부학, 색채학 등을 이수하고, 3학년부터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도안(현재의 시각디자인), 염색공예, 도자기공예, 금속공예를 이수한다. 특히 금속, 요업, 섬유재료학 등은 화공계 교수에 의해 지도되며, 이렇게 재료학에 대한 비중이나 전공과목에 전문 기능인을 두어 교수의 수업을 보조하도록 꾀한 점은 공방 작업에 기초를 둔 조형분야의 유기적 연계와 창조적 전개를 유도한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10]

건축 [ 편집 ]

바우하우스의 절제된 기하학적 형태와 건축에 대한 경제적, 기술적 이익에 대한 관심 등은 국제건축양식의 모태가 되었고, 교육적 차원에서 이식된 바우하우스의 건축디자인 원리 및 이념은 현대건축의 급변하는 추세 속에서 그 전개발전을 계속해왔다. 1960년 이후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바우하우스 건축디자인 원리의 현대적 전개방식은 과학기술의 형상적 상징화, 기술공학적 해결방식의 추구, 건축구성요소 공업생산의 보편화, 기능복합체로써의 건축구성 기하학적 추상성의 계승 등으로 요약된다.[11]

다이슨사의 진공청소기

또한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던 루드비히 힐버자이머는 현대도시계획의 주요 이론가 중 한사람으로, 그가 최초로 도시를 연구한 것 중에는 “고층도시”라는 개념이 있다. 두 가지 레벨로 층을 이룬 것으로 저층부는 공방, 경공업, 시장, 차고 등으로 사용되며 상층부는 도시근로자의 아파트로 사용되고 있다. 실내공간, 가구, 설비의 표준화 덕택에 도시생활자들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방 하나만 들고서도 이사를 갈 수 있다는 개념이 등장하였다.[12]

이러한 개념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포스트모더니즘 시기에 들어서 많은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초기 주장을 발표한 후 40년 후인 1960년대에 “고층 아파트 블럭의 반복은 과다한 단조로움을 가져왔다. 모든 자연은 축출되었다. 나무와 풀밭들이 배제되었다. 결과는 메트로폴리스라기보다는 네크로폴리스로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의 불모지 풍경. 모든 면에서 비인간적이다”라고 밝혔다.[13]

디자인 [ 편집 ]

바우하우스는 이전의 장인의 시대에서 산업 디자인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의 역할을 하면서 현대 디자인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유지된 학교이지만, 이후 현대 디자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특징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처럼 단순화되고 기능적인 형태미로 드러난다. 기능을 따른 형태의 디자인을 보여주는 예는 요즘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이슨의 청소기다. 이 제품은 최대의 기능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요소만을 남김으로써 독특한 외형을 자랑한다. 청소기가 동작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외형을 디자인함으로써 남성적이고 간결하면서도 복잡한 형태의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14]

철학 [ 편집 ]

화려한 언어와 수사로 장식하는 기존의 철학을 반대하는 관념인 논리실증주의에 영향을 주었다.[15]

공감각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형태와 색채의 정확한 상응 개념 인지시켰다. 또한, 색채가 언어보다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시각언어임을 강조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다. 건축을 주축으로 하여,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하였으며, 독일 공작연맹의 이념을 계승하여 예술창작과 공학적 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하였다.[17]

애니 알버스

재료의 특성과 그것이 지닌 형태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모홀리 나기와 그로피우스를 완벽하게 보조하였다.

요하네스 이텐

대비원리를 기초로 한 조형교육을 실시했다. 기능적인 요소 위에 개인적인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였고, 다양한 질감, 형태, 색채, 명암을 이용하여 평면과 입체를 다루게 하였다. 또한, 갖가지 대비의 성질을 인식시키는 것이 교육의 기본이 되었는데 특히 재료와 질감의 연구에 역점이 주어졌다.

자연만물이 유래한 기본적인 형태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였으며, 색채, 형식, 형상, 기법 등을 훈련시켰다. 학생들에게 형상 제작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발전시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바우하우스의 3대 학장직을 맡았으나, 나치의 집권으로 더 이상의 자유로운 근대 디자인 교육이 불가능하게 되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듬해에 일리노이 기술대학(IIT)의 건축과 교수로 초빙되어 활동하기 시작했고, 바우하우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미국의 현대건축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18]

피에트 몬드리안

게르하르트 막스

군타 슈퇼츠

갤러리 [ 편집 ]

각주 [ 편집 ]

생활이 된 디자인 바우하우스Bauhaus 1

바우하우스, 그것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말하고 향유하는 디자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1919년 산업 생산에 적합한 예술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독일의 한 조형 대학의 이름이었던 것이 하나의 양식style이 되어 우리 생활 곳곳에 드러난다. 건축이며 가구며 그릇까지 그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디자인의 본질만큼은 벗어날 수 없었다. 요즘 같은 디자인 과잉 시대에도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며 이상적인 생활상을 꿈꾸게 만드는 이것. 모더니즘이란 신기류를 만들어낸 이 엄청난 기운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바우하우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바우하우스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미술의 ‘인상파’나 ‘입체파’보다 중요한 현대 조형 개념을 낳은 바우하우스는 독일에서 개교한 지 불과 14년(1919~1933) 만에 폐교된 디자인 학교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14년은 전 세계 디자인 교육의 근본을 바꿀 만큼 강력한 것이었죠. 어디 그뿐인가요. 바우하우스와 아무 관련 없을 것 같은 우리들조차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우하우스의 어떤 유산을 물려받은 걸까요?

바우하우스의 에피소드가 하나 전해집니다. 바우하우스는 두 부류의 선생을 고용했는데, 하나는 순수 예술가이고 다른 하나는 공예가였습니다. 이 학교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는 두 직업군의 선생을 동등하게 대우하고자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지요. 월급은 똑같았지만, 예술가들이 먼저 월급을 받았고 며칠 뒤에 공예가들이 받았습니다. 며칠 차이가 뭐 그리 대단할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극심한 인플레로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오르던 독일에서는 그 며칠 차이로 수입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에피소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해줍니다. 바로 당시 독일이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가난했다는 사실입니다. 독일은 패전으로 산업이 피폐해진 데다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이웃 나라들에게 지불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어떻게 하면 민중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라는 절박한 문제를 그 어떤 국가보다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요.

그런 고민이 ‘기능주의에 따른 합리적인 기계 미학’이라는 바우하우스의 양식을 탄생시켰습니다. 이것은 질 좋은 물건을 대량으로 만들어 더 많은 이들에게 공급하려는 착한 뜻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는 조립식 숙소를 만들어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려는 이상을 가진 건축가였는데, 그는 당연히 20세기 초에 대량생산된 새로운 재료인 강철과 유리에 주목했습니다.

대량생산에 적합한 디자인이란 단순화되고 규격화되어야 합니다. 장식적이고 복잡한 형태는 비용을 추가로 발생시키므로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기초 형태를 연구하게 됩니다. 바로 원,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의 형태인데요. 그리고 이 기초 형태를 이용해 모든 디자인을 합니다. 색도 단순화하고. 그런데 이런 형태는 자연을 모방한 구상적인 형태가 아니라 추상적인 형태입니다. 공예가보다 추상화 능력이 뛰어난 예술가들이 월급을 일찍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바우하우스가 일찍 폐교 조치를 당한 것은 그들의 사회주의적 이상이 당시 정권을 잡은 나치와 상반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바우하우스의 선생들과 그 이념을 주입받은 학생들은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죠. 특히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이 학교의 교장이자 모더니즘의 아버지들이 최고의 산업 국가인 미국으로 감으로써 바우하우스 이념과 양식은 세계 표준이 됩니다. 이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을 발굴했습니다.

전 세계, 특히 산업화와 효율적 기업 운영을 열망한 도시들은 바우하우스 양식을 전폭 지지했습니다. 강철 구조와 유리로 된 사각 박스 건물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게다가 모든 미술 학교가 바우하우스의 기초 조형 이론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양식을 체득하게 됩니다. 오늘날 모든 건물 속의 규격화된 사무가구, 기하학 형태의 단순한 조명과 아무런 장식이 없는 깨끗한 벽면, 사열하는 군대처럼 줄이 딱딱 맞는 신문과 잡지의 레이아웃, 그래서 왠지 순수해 보이는 우리 주변의 모든 디자인이 바로 바우하우스의 유산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을 때로는 지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고상한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마음, 그런 착한 뜻으로부터 비롯된 바우하우스 양식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장식적이고 비효율적인 예술이 과잉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적인 생활양식의 하나로 우리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글 김신(월간<디자인> 편집장)

순수한 건축의 결정체라 칭송받은 바우하우스 학교 건물(오른쪽)과 발터 그로피우스의 집(왼쪽).

학교와 무지 CD 플레이어의 뿌리는 같은 것이었다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축물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의 느낌. 그곳은 디자이너들에겐 성지였다. 도끼다시(인조석 물갈기: 학교나 공공 기관 건물에 흔히 사용되는 바닥 시공법)의 느낌과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인 요소들…. 그 공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당시로 돌아가 영화에서처럼 복도에 서서 정장을 입은 젊은 신사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는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 갔다. 오늘날의 디자인을 지배하는 그 엄청난 에너지가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물과 공간. 이미 그 시대 안에 세상 모든 디자인에 대한 답이 있었다. 진정한 디자인은 바우하우스 시대에 이미 다 나왔고, 우리는 그것의 포장만 계속 바꿀 뿐이다.” _ 마영범(인테리어 디자이너)

“내가 다녔던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학 옆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바우하우스 주택 단지가 있다. 그곳을 드나들며 바우하우스는 생활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때 만들어진 제품들은 지금까지도 사용되며, 이케아나 폴리엠 같은 대중적인 브랜드부터 무명 씨의 디자인조차도 바우하우스 양식을 따라 하고 있지 않은가? 화려하진 않지만 강한 내구성과 기능성, 편리성을 갖춘 오브제들이다. 난 그 바우하우스 주택의 초인종을 누르며,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이것이 진정한 바우하우스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_ 사보(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바우하우스는 최고의 기능주의다. 남산 하얏트 호텔 앞에 있는 ‘갤러리 빙’이란 건물을 보라. 건축가 김원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엄격한 그리드(모눈종이처럼 공간을 나누는 일정한 비례)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드란 결국 전 세계가 엄격한 질서 속에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놓은 하나의 프로그램인데. 갤러리 빙은 땅속에서 솟구친 다이아몬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평면, 입면, 단면을 쪼개 보면 모든 것이 엄격한 삼각형의 그리드 속에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우하우스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유리와 철골을 사용해 건물을 지은 것이며, 그리드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어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바우하우스 양식은 그렇게 미국의 현대 건축을 탄생시켰고 그것이 다시 우리나라의 삼일 빌딩(청계천 2가에 있는 현 대우정보통신 건물)과 같은 건축물을 세웠다.” _ 이용재(건축 평론가, 대통령자문 건축문 화선진화위원)

“내가 다녔던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학 옆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바우하우스 주택 단지가 있다. 그곳을 드나들며 바우하우스는 생활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때 만들어진 제품들은 지금까지도 사용되며, 이케아나 폴리엠 같은 대중적인 브랜드부터 무명 씨의 디자인조차도 바우하우스 양식을 따라 하고 있지 않은가? 화려하진 않지만 강한 내구성과 기능성, 편리성을 갖춘 오브제들이다. 난 그 바우하우스 주택의 초인종을 누르며, 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보며 이것이 진정한 바우하우스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_ 사보(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바우하우스는 최고의 기능주의다. 남산 하얏트 호텔 앞에 있는 ‘갤러리 빙’이란 건물을 보라. 건축가 김원 선생이 설계한 것으로, 엄격한 그리드(모눈종이처럼 공간을 나누는 일정한 비례)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드란 결국 전 세계가 엄격한 질서 속에서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놓은 하나의 프로그램인데. 갤러리 빙은 땅속에서 솟구친 다이아몬드의 형태를 띠고 있다. 평면, 입면, 단면을 쪼개 보면 모든 것이 엄격한 삼각형의 그리드 속에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우하우스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유리와 철골을 사용해 건물을 지은 것이며, 그리드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어 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바우하우스 양식은 그렇게 미국의 현대 건축을 탄생시켰고 그것이 다시 우리나라의 삼일 빌딩(청계천 2가에 있는 현 대우정보통신 건물)과 같은 건축물을 세웠다.” _ 이용재(건축 평론가, 대통령자문 건축문 화선진화위원)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멘토바우하우스 4인방

바우하우스는 디자인의 역사요, 하나의 양식이다. 그런 바우하우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여기 소개하는 네 명을 먼저 알아야 한다. 오늘을 이끄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은 이들의 영향 아래 성장했다. 바우하우스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1883~1969)

바우하우스의 설립자로 1919년부터 1928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장을 지냈다. 세계 건축의 4대 거장 중 한 명으로 독일 데사우Dessau에 있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도자기, 벽지, 가구 등과 같은 대량생산품에는 건축에서 유래된 기능적이고 통합적인 양식이 적용되었다. “예술, 공예, 건축을 가르는 경계는 사라져야 하며, 예술가들은 특히 산업계와 일하기 위해 적절히 훈련 받아야한다”고 주장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1886~1969)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 교장을 지냈다. 발터 그로피우스와 함께 세계 건축의 4대 거장에 속한다. 바르셀로나 의자와 같은 기념비적인 디자인을 남겼으며 나치 정권의 압력으로 바우하우스 폐교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과 주임교수로 일했다. 20년 동안 이 학교에서 미국 현대 건축의 기틀을 마련했고, 유리, 철골조를 활용한 건축의 표본을 만들었다. 오늘날 미국 건축계를 이끌고 있는 건축가들을 키워냈으며, 그의 건축은 한국에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1902~1981)

1920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학생의 신분으로 강관 의자와 같은 역작을 만들며 독특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후 1925년 바우하우스가 정치적 이유로 독일 데사우로 이전하게 되면서 가구 공방의 책임교수로 임명되었다. 1937년에는 지도교수였던 발터 그로피우스의 초청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게 된다. 그는 미스나 발터와는 달리 가구 디자인을 건축보다 먼저 생각했다. 유럽과 미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미국 건축을 이끌어가는 유명 건축가들의 스승으로 더 높이 평가받았다.

마리안네 브란트

Marianne Brandt(1893~1983)

바우하우스 내의 금속 공방은 바우하우스에서도 가장 생산적인 곳으로 꼽혔는데, 바로 이곳 출신의 대표적인 디자이너가 마리안네 브란트였다. 그는 남성의 영역이었던 금속 가공 분야에 뛰어들어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내구성이 뛰어난 금속 제품을 만들어냈다. 젊은 시절 디자인에서 거둔 성공이 다시 되풀이되지는 않았지만 그가 1920년대에 디자인한 작품들이 아직까지 알레시와 같은 세계적인 회사들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바우하우스 제품을 만날 수 있는 곳

aA 디자인 뮤지엄_ 엄청난 양의 유럽 빈티지 가구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aA 디자인 뮤지엄에서는 1920년대 당시에 디자인된 마르셀 브로이어의 가구들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동시대를 풍미했던 가구 디자인의 거장들이 남긴 디자인과 그 안에 담겨온 시간의 켜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 문의 02-3143-7312

Sabo 숍_ 빈티지 디자인 컬렉터로 바우하우스 시대의 생활상을 수집하고 있는 사보. 이곳은 갤러리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사보의 공간이다. 깨끗한 벽에 아름답게 진열해놓은 갤러리가 아닌, 직접 만져보고 당시의 생활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사보의 티셔츠도 마치 바우하우스 시대에 살던 사람의 옷처럼 진열되어 있다.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 문의 02-324-1484, www.sabolim.com

다다도프_ 오피스 및 생활 가구를 선보이고 있는 ㈜다다도프의 매장에서는 1900년대 초반의 현대적인 가구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인테리어 컨설팅도 해주고 있는 이곳에서는 미스 반 데어 로어, 마르셀 브로이어,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가구를 판매하며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생산되며 인기를 얻고 있는 거장들의 대표 제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 문의 02-511-7918, www.dadadof.co.kr

eBay_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온라인 옥션 사이트 이베이에서는 다양한 빈티지 제품을 만날 수 있는데, 그중에는 바우하우스 제품들도 상당수 있다. 아직 컬렉션 아이템으로 발굴되지 않은 것들도 많이 있어 저렴한 가격에 좋은 바우하우스 디자인을 발견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빈티지 마니아 디자이너들이 애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www.e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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