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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참조: http://www.daewonsa.or.kr/coding/sub7/sub2.asp?bseq=20\u0026cat=-1\u0026sk=\u0026sv=\u0026page=1\u0026mode=view\u0026aseq=29066#.XlUhsCgza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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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해설 (반야심경의 현대적인 해석 및 번역) – 파란불

반야심경 해설 (반야심경의 현대적인 해석 및 번역) 부처님 오신날이면 꼭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이렇게 시작하는 반야심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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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uelight.tistory.com

Date Published: 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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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현대어, 고전 해설(펌)

지극한 깨달음을 이루도록 할지어다. 반야심경 해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는 크다(대), 많다(다), 초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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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ohan.org

Date Published: 1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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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현대 버전의 해설,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니?

반야심경 현대 버전의 해설,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니? 최근 다른 블로그에서 반야심경 해설해두신 글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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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한글 번역과 해석 – 브런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긴 이름이 붙은 이 경전은 줄여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 하는 데, 한자 260자의 본문을 가진 짧은 경전이다. 당나라 승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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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7/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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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현대어 번역.jpg – 클리앙

(불교에대해 관심있으시고 님처럼 호의적해석을해주시는분이 읽어주시면 … 반야심경의 현대적 오역”이라고 하기도 그런 이상한 글이네요….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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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lien.net

Date Published: 7/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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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현대어 풀이 – ZeddiOS

불교에 거부감이 드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종교강요나 그런말은 전혀없습니다 🙂 반야심경(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위대한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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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zeddios.tistory.com

Date Published: 9/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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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해석(설명) – 네이버 블로그

반야심경 해석. wwwlachel 2005.04.23 13:13. <본문>.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위대한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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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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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우리말 해석 3가지 – 다음블로그

반야심경-우리말 해석 3가지 1.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密多時(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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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현대어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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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반야 심경 현대 해석

  • Author: y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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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2. 2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CIybVPqk7Ok

반야심경 해설 (반야심경의 현대적인 해석 및 번역)

반야심경 해설 (반야심경의 현대적인 해석 및 번역 )

부처님 오신날이면 꼭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이렇게 시작하는 반야심경은 대반야바라밀다경 이라는 경전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 시대의 삼장법사 현장이 번역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의미는 글자그대로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심(핵심)을 간추린것 이라는 뜻 입니다.

그럼 대반야바라밀다경은 어떤 뜻일까요? “본래 갖추고 있는 위대한 지혜에 이르는 마음의 경” 이라는 뜻 입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을 말하는 것 일까요?

한자로 보면 어렵고 이 한자를 풀어놓은 글을 보아도 어려운데 이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글이 있어 옮겨 봅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멸도했느니라.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또한 그러하나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 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무엇에도 견줄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노니 주문은 곧 이러하니라. [가자 가자 진리를 향하여 가자 평안의 저 언덕으로 ] 깨달아지이다.

위키백과에서는 이렇게 해석 된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렵네요.

그래서 더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을 찾아 보았습니다.

해석이 쏙쏙 머리에 들어오지 않나요?

이 해석을 가사로 음반을 낸 사람이 있다고 하네요.

쉽게 풀은 가사로 노래를 하니 반야심경이 무거운 경전같지 않네요.

아래는 진짜 반야심경의 경전내용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게다가 부처님의 자비로 연휴까지 만들어주시네요. ^^

부처님 오신날 절에가서 절이라도 한번 하고 와야겠어요. ^^

이상 반야심경 해설 (반야심경의 현대적인 해석 및 번역)에 대한 글 이였습니다.

반야심경 현대 버전의 해설,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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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현대 버전의 해설,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니?

최근 다른 블로그에서 반야심경 해설해두신 글을 보았습니다.

예전에 쉽게 요즘식으로 번역해 둔것을 본 기억이 났고, 그걸 좀 찻아보고 가져와 보았습니다.

먼저 반야심경과 구 해설

을 먼저 첨부합니다.

마음이 편안해 지는 방법을 알고 싶니?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度 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도 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을 건너느니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감각ㆍ생각ㆍ행동ㆍ의식도 그러하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모든 법의 공한 형태는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실체가 없고 감각ㆍ생각ㆍ행동ㆍ의식도 없으며,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의식도 없고, 색깔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감촉도,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말하니 이러하니라.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 가자, 모두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 가자, 모두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 가자, 모두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반야심경 같은 경우는 받아들이는 분마다 다르겠지만,

모든것은 반복이다. 집착하지 말자,

깨닫지 못한 자들과 같이 부처님의 길로 가자.

정도로 생각됩니다.

한때 오유에서 유행했던

반야심경 현대어 번역

이라는 글을 첨부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존나 쩌는 방법을 알고 싶어?

누구라도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법의 힌트를 줄게!

좀 더 힘을 빼고 편해지는 거야.

고통도 괴로움도 전부 별 거 아닌 환상이니까.

안심해 이 세상은 허무한 거야. 아픔도 슬픔도 처음부터 텅 비어 있던 거야.

이 세상은 변해 가는 거야.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일도 가능하지 더러워질 때도 있고 안 좋은 일을 떠안게 될 때도 있고, 그렇다면 떠안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이 세상이 얼마나 별게 아닌지 알겠어?

괴로움이든 병이든 그런 거에 구애되지 마 보이는 거에 구애되지 마. 들리는 거에 매달리지 마. 맛이나 냄새가 다양한 것처럼 사람도 다양하잖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흔들리는 마음에 구애되면 안 돼. 그게 무라는 녀석이지.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겠지. 괴로운 일을 겪지 않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거기에 놓고 가. 미래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 무리해서 비추어 보려고 하지 않아도 갠찮아. 안 보이는 그 자체를 즐기면 되잔아?

그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녀석이지.

올바르게 사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명랑하게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보살로 살기 위한 노하우가 있어.

괴로워하며 살 필요 같은 건 없어.

즐겁게 사는 보살이 되는 거야.

아무런 두려움도 알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만 말야 적당한 공포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착각은 하지 마.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소리는 아니야. 꿈이나 공상이나 자비심을 잊지 마.

그걸 할 수 있다면 열반은 어디에나 있어. 사는 방법은 어느것 하나 변하지 않아.

단지 받아 들이는 방법이 변하는 것 뿐이지.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구.

이 반야를 기억해 둬 짤막한 말이야. 의미 같은 건 몰라도 돼. 사소한 것은 아무렴 어때?, 괴로움이 작아진다면 그거면 됐잖아? 거짓말도 터무니 없는 말도 다 받아들이면 괴로움도 사라지지. 그런 거야.

서론은 잊어버려도 돼.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둬. 내키면 한번 읊어 봐. 마음 속에서 읊어도 상관 없어. 알겠어? 귓구멍 열고 잘 들어..

읊어라. 마음은 사라지고 혼은 고요해지고 모든 것은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을 초월한 자가 될 지어니

깨달음은 그 때 얻게 되겠지. 모든 것은 이 진언으로 성취되리. 걱정하지 마. 괜찮아.

정확한 해석은 아니지만,

마음에 도움이 되는 느낌입니다.

흥미있게 보셨다면 공감(아래 하트) 부탁드립니다.

감사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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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한글 번역과 해석

반야심경은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가리킴이다. 그런데 대중적 인기만큼이나 오해도 깊다.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오해를 넘어 반야심경이라는 글을 통해서 스승이 진정 무엇을 가리키고자 했는지 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반야심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를 반야심경 해설서로 활용해서 반야심경을 해설한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를 읽고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관점에서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책이 없어도 반야심경 해설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반야심경을 좋아하는 모든 이들이 오해를 넘어 반야심경을 통해서 스승 석가모니가 진정 가리키려 하는 달을 직접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1장. 반야심경 한글 번역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긴 이름이 붙은 이 경전은 줄여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 하는 데, 한자 260자의 본문을 가진 짧은 경전이다. 당나라 승려 현장(玄裝)이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고대 인도의 불교 경전 반야바라밀다(प्रज्ञापारमिता, Prajñāpāramitāhṛdaya, 般若波羅蜜多, Heart Sutra)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수많은 불교 경전들의 핵심을 요약하면 반야심경이라고들 말하고 절에서는 아침 예불 때마다 반야심경을 낭송한다.

먼저 반야심경 전문을 보자. 다음은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 전문과 이 글에서 새롭게 번역한 한글 번역이다. 한글 번역은 “한글 반야심경 2020″이라 부르기로 한다.

** 첫 줄에 한자 원문, 다음 줄에 한글로 한자 음을 달고, 그다음 줄에 한글 번역을 달았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핵심이 되는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실체를 가리키는 깊은 진리의 표현이기에, 세상의 실체가 공함을 바로 보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 그 실체 닿느니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기에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그러하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공하기에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是故 空中無色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무수상행식

이렇게 공하기에 물질도 실체가 따로 없고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느니라.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으며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현상도 실체가 따로 없기에 본다는 것과 본 것을 의식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늙고 죽는 것이 없기에 늙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괴로움이 실체가 없기에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없고,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 또한 없느니라.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이렇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찾는 이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만을 바라야 하느니라.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러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어서, 모든 거짓 믿음을 넘어 어떤 의문도 남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느니라.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부처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을 온전히 끝내느니라.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니 명심하기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바로 보는 것만이 가장 신비하고 확실한 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방법이기에 능히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진실에 닿기에 헛되지가 않느니라.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래서 일러주리니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거라.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한글 반야심경 2020, 반야심경 한글 번역, 관음 옮김

해설에 필요한 기존 한글 번역을 찾아 적으려다 하다 마땅한 번역을 찾을 수 없어, 어쩌다 한글 번역을 새로 쓰게 됐다. 듣고 믿어왔던 반야심경과 너무 달라 많이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혹, 놀라거나 충격이 있다면 참 좋은 일이다. 마음이 동했다는 증거다. 모든 이해는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앎이 일어난다.

나는 한자에 무지하기에 한자에 얽매이지 않고 기존의 번역은 참고만 했다. 학문적 가치는 전혀 없을 것이기에 오해 없기 바란다. 이 한글 번역과 해설의 목적은 스승 석가모니가 반야심경을 통해서 찾고 있는 당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쉽고 바르게 전달해서 스승이 가리키는 곳을 직접 살펴보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도록 하는 데 있다.

보통 반야심경을 한자로 낭송하는 데 한 번씩은 이 한글 번역본으로 낭송하면 어떨까 한다. 물론 한자본이 낭송하는 맛이 있지만 뜻을 알기는 쉽지 않기에 가끔씩 한글 번역본을 낭송하다 보면 반야심경의 뜻이 깊이 다가올 것이다. 낭송이 와닿지 않으면 한글 본은 글로 읽으며 그 뜻을 가슴에 새기는 것은 어떨까. 아무튼, 다들 마음 가는 데로 하길 바란다.

어떤 형태로 접하든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이해가 싹트고 자라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반야심경, 프랑스의 한 박물관에 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반야심경이 좋았다. 한때 김영동 선(禪) 음반에 담긴 반야심경을 많이도 들었다. 예불을 올리며 반야심경을 낭송할 때면 그 소리가 참 좋았다. “아제 아제 바라 아제” 하는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은 손에 무엇을 향한 간절함인지는 모르겠으나 늘 간절함이 묻어났다. 이렇게 좋아하며 반야심경을 외우고 낭송을 그리했어도 그 뜻이 뭔지는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뜻은 잘 모르지만 가끔 몇몇 구절이 가슴에 꽂혀서 화두를 지닌듯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내게 반야심경은 하나의 화두 덩어리 같았다.

반야심경의 참뜻은 찾음이 온전히 끝나면서 확연히 드러났다. 그리고 어떤 오해들이 반야심경에 쌓여 있었는지도 같이 드러났다. 이 오해들을 바로잡고 반야심경의 참뜻을 바로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 고스란히 담겼다. 반야심경에 어떤 오해가 있고 그 오해를 넘어 스승이 반야심경을 통해 진정 무엇을 가리키려하는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와 함께 당신이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2장.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

가장 오해가 심한 반야심경의 핵심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실체를 가리키는 깊은 진리의 표현이기에, 세상의 실체가 공함을 바로 보면 모든 어려움을 넘어 그 실체 닿느니라.

반야심경의 핵심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절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아니면 마지막 부분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주문을 떠올린다. 하지만 반야심경의 핵심은 첫 구절이다. 여기서 핵심이란 반야심경이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요약한 글이라고 핵심이라고 말하듯 반야심경을 요약하는 구절을 말한다. 도덕경의 첫 구절이 도덕경 전체의 핵심이듯 반야심경도 처음 나오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가 핵심이다. 그리고 이 두 구절을 또 요약하면 첫 구절 “관자재보살”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핵심은 “관자재보살”이다.

관자재보살, 언어를 넘어서 가리키다.

도대체 “관자재보살”이 뭐길래 반야심경의 핵심일까?

“관자재보살” 다음으로 따라오는 반야심경의 모든 내용은 첫 구절 “관자재보살”을 설명하는 글이라고 보면된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부터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까지가 “관자재보살”을 설명하는 글이고 “무무명”부터 마지막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까지는 사리자로 대표되는 찾는 이가 “관자재보살”이라는 진리의 표현이 가리키는 진리에 직접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용이라고 보면된다. 물론 이런 구분은 설명을 쉽게하기 위함이지 원래 그런 구분이 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첫 설명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이다. “관자재보살”의 뜻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라는 말이다. 그리고 첫 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의 내용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데, “관세음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가 핵심적인 가리킴이니 이 가리킴이 가리키는 진리에 눈을 뜨기 바라며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고 일러준다. 이렇게 반야심경의 가장 중요한 도입부가 끝난다. 그리고 다음 줄부터 “사리자 색불이공”하며 사리자에게 풀어서 설명을 이어간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반야심경을 오해하지 않는다. 대부분 반야심경 설명이나 해설을 보면 이런 반야심경의 구조를 몰라서 글 전체를 오해한다.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 첫 줄의 한글 번역들을 한번 살펴보면서 어떤 오해가 있는지 살펴본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五薀]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 불교기록문화유산 사이트 에서 가져온 이운허 번역이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반야바라밀다(부처님의 지혜)를 행할 때 오온이 공(불법번역 4대 원칙상 공을 풀어쓰지 않음)한 것을을 비추어 보시고 온갖(일체) 괴로움과 재앙을 건넜다.”

– 위키피디아 사이트에 나온 번역이다.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大)를 행할 때에 5음(陰)이 공함을 비추어 보시고 모든 괴로움과 액난을 건너셨다.”

– 한글대장경 사이트의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에서 가져온 번역이다. 이 부분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는지 좀 더 살펴보기 위해 이야기로 풀어 쓰인 경전의 다음 부분도 가져와봤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큰 비구 대중들과 보살들과 함께 계셨다. 이때 부처님 세존께서 넓고 크고 매우 깊은 삼매[廣大甚深三昧]에 드셨는데, 그 때 모인 대중 가운데 관자재(觀自在)라 이름하는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있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하여 5온(蘊)이 다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는 모든 괴로움과 재앙에서 벗어났었다. 그러자 즉시 사리불(舍利弗)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합장하고 공손하게 관자재 보살마하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만약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이와 같은 물음을 마치자, 이때 관자재 보살마하살이 구수(具壽) 사리불에게 말했다.

“사리자여,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5온의 자성(自性)이 공함을 관(觀)해야 합니다.”

– 한글대장경 사이트의 ‘반야바라밀다심경’ 경전에서 가져온 번역으로 계빈국(罽賓國) 반야(般若)ㆍ이언(利言) 공역이라 되어있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께서 심원한 반야의 완성을 실천하실 때에 오온[五蘊 : 色(물질),受(감각),想(생각),行(의지),識(인식)]이 다 공(空)이라는 것을 비추어 깨달으시고, 일체의 고액(고통과 재액)을 뛰어넘으셨다.”

– 책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에 나온 도올 김용옥의 번역이다.

“Avalokiteshvara

while practicing deeply with

the Insight that Brings Us to the Other Shore,

suddenly discovered that

all of the five Skandhas are equally empty,

and with this realisation

he overcame all Ill-being.”

– 플럼빌리지 사이트에서 가져온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 스님의 영어 번역이다.

현장의 한문 번역을 포함해서 이런 여러 번역에서 잘 드러나는 한 가지 사실은 ‘관자재보살’을 한 사람 또는 한 사람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는 한 인물이 ‘반야바라밀다’라는 어떤 행위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세상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궁극의 행복을 얻었다는 말이다.

어떤 설명에서는 관자재보살을 석가모니 부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설명에서는 석가모니 부처 밑에서 깨달은 한 다른 스승이라고 말한다. 또 어디에서는 부처가 되기 전 단계의 깨달음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디에서는 열반에 들기를 잠시 멈추고 모든 중생을 사랑으로 구제하기 위해 힘쓰는 보살로 설명하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다양한 설명이 있지만 결국 의인화된 한 대상이라는 말이다.

불교 스승들은 불교 가리킴의 핵심을 두 글자로 짧게 불이(不二)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도 이 불이(不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위에서 살펴본 반야심경의 첫 구절 해석들은 불이(不二) 가리킴을 오해하는 전형적인 형태다. 불이(不二)는 단순히 “둘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아드바이타(Advaita, अद्वैत वेदान्त)라고 한다. 이 말은 종교나 지역이나 문화를 벗어나서 모든 궁극의 영적 가리킴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아드바이타를 영어로 번역해 난두알리티(Non-Dualty)라고 부르고 이것을 한자로 다시 번역해 비이원성(非二元性)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이원성이란 이원성(둘)을 부정하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세상의 일반적인 생각을 이원성이라고 부른다. 세상 안 모든 것이 이원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이것을 부정하며 그렇지 않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비이원성이다. 단순히 “세상의 실체가 둘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불이(不二)의 또 다른 표현이고 반야심경은 대표적인 아드바이타 가리킴이다. 이 “둘이 아니다.”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는 글이 반야심경이다. “둘이 아니다.”라는 이 평범한 말을 바로 이해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오직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이 온전히 끝났을 때 그 뜻이 바르게 환히 드러난다.

그런데 찾음이 끝나지 않은 선생들이나 깊은 이해가 없는 학자들이 번역하고 해설하고 가르치다 보면 늘 내용이 왜곡되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독립된 개체들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이원성의 시각에서 비이원성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많이 이해한다고 생각해도 찾음이 온전히 끝날 때까지는 이렇게 저렇게 오해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이해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로 전달될 수 있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찾는 이가 모든 믿음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뜰 때 어떤 언어나 생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이해가 일어난다. 이때 비로서 언어 넘어로 가리키고자 했던 스승의 의도를 알 수 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관자재보살’은 말 그 자체로 “둘이 아니다.”라는 삼세 부처들에게 드러난 지혜를 그대로 담고 있는 말이다. ‘관자재보살’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와 같은 무엇을 가리키지만, 담은 의미와 표현 방식은 조금 다르다. 또한 그 표현 방식이 참으로 예술적이다. 너무나 아름답다. 이 예술적인 아름다운 표현을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서 말해준다. 관자재보살이란 깊은 진리의 표현이란 말이다. “공에서 세상으로 나타나는” 언어로 표현하기 참 힘든 사실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발로키테스바라(अवलोकितेश्वर avalokiteśvara)다. 이것을 한자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로 번역했고 이것을 줄여서 관음보살(觀音菩薩) 또는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음을 관인(Guanyin, Guan Yin)으로 발음하기도 하고 티베트 불교에서는 첸레지(Chenrézik)라고 부른다. 또 그냥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로 시작되는 첫 줄을 이해하려면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에 붙는 수식어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세음보살(관자재보살)을 표현할 때 따라오는 수식어가 있다.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과 대자대비(大慈大悲) 관세음보살이다. 왜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라는 말이 붙었을까?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를 큰 자비심이라고 해석하며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는 신이라고 해석들 한다. 이 부분도 다시 들여다봐야겠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해석은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쩌다 천수천안일까? 천수천안은 천 가지 손과 천 가지 눈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관세음보살이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수많은 중생들을 도와주어야 되니 천 가지 손과 천 가지 눈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이 세상을 구제하는 신의 역할을 하는 존재일까? 스승이 가리키고자 하는 뜻이 이랬을까? 힘든 삶에서 벗어나고픈 대중의 바람은 일단 옆으로 밀어놓고 진정 스승이 무엇을 가리키고자 하는지 살펴보자.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는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즉 어떻게 반야바라밀다가 행해지는지를 보여주는 힌트다. 대중에게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설명해 주는 스승들의 해학이다. 사실 이것을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가리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설명할 “오온이 공함”을 당신이 바로 보면 그때 모든 어려움 “일체고액을 넘어” 관자재보살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를 하나의 화두 같은 가리킴으로 남겨두고 “오온이 공함”을 설명해나간다.

간단히 말해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모든 존재의 실체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은 사랑의 참뜻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가리키는데 이 또한 “둘이 아니다.”라는 불이(不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이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다른 모든 설명을 마친 뒤에 마지막 9장 ‘아드바이타’의 ‘찾음이 끝나다’ 글에서 비로소 관세음보살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이렇게 뒷부분에 배치한 까닭은 수많은 편견과 믿음을 먼저 내려놓지 않으면 관세음보살의 의미 바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글에서는 “천수천안”이 어떻게 아드바이타 가리킴을 표현하는지, 또 ‘대자대비’가 어떻게 아드바이타 가리킴이 되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절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 대웅전에 왜 관세음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 옆에 보현보살과 같이 모셔져 있는지 설명해나간다. 이 설명으로 7장 ‘세상을 살펴보다’에서 살펴본 세상의 실체와 8장 ‘나를 살펴보다’에서 살펴본 ‘나’의 실체를 5장 ‘길’에서 살펴 본 수행의 실체와 엮어낸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에서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로, 그리고 대웅전의 삼존불을 거쳐 선(禪) 불교에서 엔소(Ensō)로 표현되는 가리킴을 엮어 ‘둘이 아니다’라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 ‘반야’를 가리킨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을 설명하는 글이다. 사리자로 대표되는 찾는 이가 직접 반야에 눈을 뜰 수 있도록 안내하는 글이다. 그리고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는 이런 관세음보살을 설명하는 책이다. 책은 관세음보살로 시작해 관세음보살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 책을 쓰면서 책의 임시 제목을 “나는 관세음보살이다.”로 정했었다. 왜냐하면 나의 찾음이 “나는 관세음보살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끝이 났기 때문이다. 이 선언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면서 조금씩 깊은 이해로 당신을 안내한다. 책의 앞부분 ‘들어가는 말’부터 시작해서 1장 ‘끝의 시작’ 내내 이 선언을 조금씩 깊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따라오는 책 전체 내용을 통해서 어떻게 해서 이 선언이 궁극적 깨달음이고 찾음의 끝인지 설명하며, 책을 읽으며 찾고 있을 당신도 자신이 관세음보살이라는 변함없는 사실에 직접 눈을 뜨도록 안내한다. 이렇게 ‘일체고액’, 수많은 오해와 편견과 믿음을 넘어서 불이원성(아드바이타)의 앎인 ‘반야’에 눈을 뜨게 한다.

브라흐만도 비슈누도 시바도 둘이 아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알면 반야심경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쉬운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 왜 뜬금없이 관세음보살이 반야심경 앞에 등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반야심경은 도덕경의 구성과 비슷하다. 가장 어려운 핵심을 가장 앞부분에 두고 조금씩 단계를 낮추어 가며 설명해나간다. 비이원성의 핵심을 처음에 놓고 조금씩 이원성으로 내려오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모든 설명은 첫 문장을 찾는 이가 바로 이해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핵심 가리킴이 되는 관세음보살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왔을까? 어떻게 해서 이 개념을 시작으로 반야심경의 내용이 이어질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한 번 추측해보면 어떨까.

책에 보면 사진이 딱 한 장 들어가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이다. 책에는 흑백사진이 들어가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474쪽.

사진을 보면 관세음보살은 하나의 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행반야바라밀다의 예술적 표현이다. 그럼 이것이 불교에서 처음 나오는 개념일까? 석가모니가 처음 관세음보살을 언급했을까? 반야심경은 어찌 보면 관세음보살을 설명하는 글이다. 이미 관세음보살이라는 개념이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한 몸에서 여러 손과 눈이 나오는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상을 보면 이미 고대 인도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힌두교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보인다. 힌두교에서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 Sanskrit: ब्रह्मा)와 세상을 수호하는 신 비슈누(Vishnu, Sanskrit: विष्णु)와 파괴의 신 시바(Shiva, Sanskrit: शिव)를 최고의 3신으로 모신다.

이 신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아래에 위키피디아 사이트에 나와있는 각 신들의 그림과 사진을 모아봤다.

브라흐마 신 (Brahma on his hamsa) 출처: 위키피디아

비슈누 신 (Vishnu surrounded by his Avatars), 출처: 위키피디아

시바 신, Shiva meditating in the Padmasana, 출처: 위키피디아

느껴지는 게 없는가? 힌두교의 3신과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닮아있지 않은가? 종교적 관점을 걷어내고 오직 아드바이타 가리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힌두교의 3신과 관세음보살은 전혀 다르지 않다. 힌두교 문화권에서는 아마 아드바이타를 설명하는 스승들의 가리킴이 이런 3신의 형태로 변해서 전해졌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이라는 가리킴도 불교에서는 신의 형태로 전해진다. 이뿐만 아니라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찾음이 끝나다 (470쪽)’ 글에서 동정녀 마리아와 ‘삼위일체’설을 설명하면서 언급하듯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

티베트의 관세음보살 그림. Khanacademy.org에서 가져옴

아마 당시 인도 지역에 찾는 이들은 석가모니라는 스승이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니 찾아와서 궁금한 점들을 물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는 이미 널리 퍼져있던 브라흐마와 비슈누와 시바에 관한 여러 질문을 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스승에게 와서 질문하는 찾는 이들은 그때 널리 퍼져있는 가르침들과 사상들을 공부하고 와서 물었을 것이고, 늘 그렇듯 스승은 찾는 이가 집착하고 있는 편견과 거짓 믿음을 가리키며 설명했을 것이다.

석가모니는 3명의 신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찾는 이들의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석가모니는 이 3신들을 하나로 묶어 아발로키테스바라(अवलोकितेश्वर, Avalokiteshvara)라는 개념으로 찾는 이의 편견을 깨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반야의 가리킴으로 안내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석가모니는 이 개념을 자주 사용하면서 찾는 이들을 안내하다 보니 아발로키테스바라에 관한 다양한 가리킴이 전해졌을 것이고 나중에 자연히 제자들이 스승의 가리킴을 정리해서 경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전이 정제되어 반야심경이 되지 않았나 싶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이 첫 두 구절에 너무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이 부분이 핵심이기 때문이고 또 여기 너무 많은 오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여전히 남아있는 중요한 오해를 풀기 위해 이야기를 조금 더 끌고가야 겠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4장은 ‘가리킴’이다. 책을 읽지 않고 이 글을 처음 읽는 분은 “가르침”이라고 보통 하는 데 여기서는 왜 자꾸 ‘가리킴’이라고 하는지 의아할지 모르겠다. 책에서는 ‘가르침’ 대신 ‘가리킴’이라고 쓴다. 가르침은 배워서 알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친다면 가리킴은 당신이 직접 가서 보라고 알려주는 방향 표지판 같은 의미다. 그리고 모든 영적 스승의 말은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다. 물론 이 사실을 잘 알면 ‘가르침’이라 하든 ‘가리킴’이라 하든 전혀 문제없다. 늘 그렇듯 말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4장 ‘가리킴’에서는 이 가리킴의 본질을 깊이 살펴본다. 이 부분을 바로 알아야 오해가 없다. 스승의 가리킴에 대한 대부분의 오해는 가리킴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온다. 그리고 가리킴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반야심경의 핵심을 놓친다. 세상이 반야심경 첫 두 구절을 해석하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이 너무나 잘 드러난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서 “관자재보살”이 깊은 진리의 표현이지만 이것도 하나의 가리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글과 책에서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듯 보이나 사실 관세음보살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가르침이 아니다.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관세음보살이 가리키는 무엇은 말로 설명해서 알아듣고 알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책의 설명도, 반야심경도 그저 사리자가 직접 보고 일체고액을 넘어가도록 안내하는 하나의 가리킴일 뿐이다

가리킴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경전에 대한 오해가 없다. 반야심경에 대한 오해가 없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에 대한 오해가 없다. 관세음보살의 정확한 의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하반야바라밀다”다.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우리의 논리로, 생각으로 담아낼 수 없다. 세상의 어떤 무엇도 이것을 담아낼 수 없다. 세상 전체가 나오는 그 근원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은 깊은 진리를 가리키는 가리킴이다. 하나의 큰 화두다. 섣불리 그 뜻을 이해했다고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해했다고 하는 순간 화두는 사라진다. 좋은 스승의 가리킴을 잃는다. 모름은 모름에 두어야 한다.

가슴에 화두라는 씨앗을 품고

간절함이라는 물을 주면

언젠가 앎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책 4장 ‘가리킴’에서 말하듯 어쩔 수 없이 스승은 말로 가리켜야 한다. 대부분의 찾는 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이 이어진다.

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

오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 이 모든 존재가 공하다고 말한다. 이 사실에 눈을 뜨면 일체고액으로 표현되는 찾는 이의 모든 믿음을 넘어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가리킴이 가리키는 궁극의 진리에 닿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반야심경의 둘째줄부터는 이 “오온이 공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찾는 이에게 설명한다.

度一切苦厄

도일체고액

“일체고액”의 뜻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책 3장 ‘찾음’의 내용을 이해해야 한다. 3장 ‘찾음’에서는 찾음의 본질을 살펴본다.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찾는지 계속해서 물어본다. 찾음에 깃든 자신의 편견과 믿음을 바로 보게 안내한다.

반야심경은 종교적 내용이 아니다. 사리자로 대표되는 진리를 찾는 이에게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가리킴이다. 석가모니는 종교를 만들지 않았다. 반대로 기존 종교와 사상에 물들어 있는 편견과 잘못된 믿음을 가리키며 종교적 믿음을 극복하도록 도왔다. 그런데 불교는 종교다. 종교는 대중의 바람의 표현을 담는다. 그러하기에 또 대중의 바람에 부흥해야 한다. “도일체고액”의 번역에서 이런 종교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반야심경을 번역한 스님 현장은 종교인이다. 또 위에서 언급한 번역들은 다 대중적인 번역이다. 대중의 바람을 담는다. 대중의 가장 큰 바람이 뭘까? 여기서 나타나는 바로는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찌 안 그럴까. 그래서 현장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번역이 “괴로움과 재앙”을 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만, 틱낫한의 번역 만은 이런 대중의 믿음을 넘어서 있다.

“도일체고액”을 바로 이해하려면 찾음과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혼란을 극복해야 한다. 여기에 도움이 되게 5장 ‘길’ 마지막 부분에 ‘종교는 달을 가리키지 않는다’라는 글을 넣었다. 나도 그랬고 스승 로버트 울프와 나탈리 그레이도 그랬듯이 많은 찾는 이가 익숙한 종교에서 찾음을 시작한다. 그리고 종교의 편견을 극복한다. 대중의 바람과 ‘내’가 원하는 바람을 넘어서야 스승이 가리키는 달을 볼 수 있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로 표현되는 진리를 가리킨다. 핵심은 “둘이 아니다.”라는 비이원성이다. 아드바이타다. 세상을 넘어 세상의 근원을 가리킨다. 그런데 “괴로움과 재앙을 건너는 일”은 이원성의 해석이다. 극복해야 할 대상과 극복하는 ‘나’로 구분하는 이원성이다. 세상 안의 일이다. 이것은 석가모니와 같은 아드바이타 스승이 가리키는 바가 아니라, 반대로 정확히 극복해야 할 믿음이다. 이 믿음을 극복하지 않으면 ‘반야심경’이라는 배는 표류한다.

당신이 경배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스승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씌운 자신의 믿음인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3장 ‘찾음’, ‘마음의 평화를 찾는가’에서

3장. 아드바이타

공하다는 뜻을 설명한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기에 물질이 곧 공이고 공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동과 의식도 그러하니라.

이제부터 사리자에게 ‘오온개공’의 뜻을 설명해 나간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 말하고 이 말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조금 다르게 반복했다.

먼저 ‘오온(五蘊)’가운데 ‘색(色)’으로 표현되는 사물부터 이야기한다. 색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일컫는다. 컴퓨터, 책상, 집, 유리, 나무, 산과 바다, 공기와 하늘, 동물, 사람들, 모든 생명들, 해와 달, 별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가 단단한 어떤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공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공하다’는 뜻이 뭘까? 보통 ‘텅 비어있다.’라고 해석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공하다는 뜻을 담기에는 부족하다. 그냥 “아무것도 없다.(영어로 Nothing)”라거나 진공(Vaccume)이라는 뜻이 아니다. 공하다는 말은 우리가 가진 사물에 대한 편견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개체다. 우리의 경험상 분명히 맞는 말이다. 이렇게 경험이 안 되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으로 기능할 수 없다. 반야심경은 이 경험의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독립된 개체로 경험되는 ‘색’의 실체가 뭐냐는 거다. 독립된 개체로 경험되지만 그 실체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러한 까닭에 한글 번역에서 “텅 비어있다”가나 “아무것도 없다”와 같은 말을 쓰는 대신 한자어에서 비롯된 “공하다”는 말을 그래로 쓴다. “공하다”는 한글 사전에 있는 말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를 쓸 때나 이런 글을 쓸 때 가급적이면 쉬운 말을 쓰려고 노력한다. 가급적이면 대부분의 사람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려 노력한다. 가급적이면 쉬운 말, 뜻이 모호한 한자어가 아닌 한글을 쓰려 노력한다. 그런데 외래어나 한자어를 써야 할 때가 있는데, ‘아드바이타’나 ‘비이원성’처럼 찾는 이들이 전통적으로 쓰는 말을 써야 할 때가 그렇다. 이렇게 낯설어 보이는 말은 “둘이 아니다.”처럼 꼭 먼저 쉬운 말로 풀이해서 그 뜻을 먼저 알리려 노력한다. 쉬운 말이라도 그 뜻을 좀 더 정확히 하기 위해서 용어를 정의하기도 한다. 그래서 책에서는 ‘용어 정리’ 글에서 책에서 쓰는 몇 가지 용어들의 뜻을 명확히 정의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부분은 책의 7장 ‘세상을 살펴보다’에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색으로 나타나는 물질의 실체가 뭔지, 왜 “물질의 실체가 공하다.”라고 말하는지를 여러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먼저 첫 글 ‘실재와 개념’에서 ‘실재’, 즉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또 “실재가 아니라 개념이다.”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깊이 살펴본다. 왜냐하면 “공하다”는 말은 곧 “실재가 아니라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재와 개념’은 ‘공하다’의 뜻을 설명하는 글이다. 이렇게 먼저 ‘공하다’는 말의 뜻을 살피고, 왜 색이 공이고 왜 공이 곧 색인지를 설명해 나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하는 데 양자역학만 한 것이 없다싶어 글 ‘양자역학에서 얻는 화두’에서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을 통해서 색즉시공을 설명했다. 어쩌다 이 글이 너무 길어졌다. 양자역학의 내용 자체가 세상이 공함을 설명하는 데 중요하기에 첫 부분에 양자역학을 요약하는 부분이 길게 들어가서 그렇다. 물론 과학적으로 체계적인 글은 전혀 아니다. 왜 색이 공인지, 왜 공이 지금 이 순간 색인지를 아는 데 필요한 내용만 찾음의 관점에서 정리했다. 그리고 양자현상의 과학적 해석이 아닌 아드바이타의 관점에서 해석해서 글을 이어 갔다. 양자역학의 아드바이타적 해석이다.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을 지나서 ‘에너지와 움직임’ 글에서는 조금 다르게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한다. 양자역학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과학에서 물질의 가장 기본을 설명할 때 언급하는 에너지의 실체가 뭔지 살피며 왜 ‘색불이공 공불이색’, 물질과 공이 다르지 않는지 깊이 들여다본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색의 실체가 공인 것처럼 세상을 이루는 다섯 가지(오온) 가운데 나머지 ‘수상행식’도 실체가 공하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수상행식’이 가리키는 바는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이다. 오온이 공하다며 세상의 실체가 공하다 했더니 찾는 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라고 다시 묻는다. 세상에서 ‘나’만 쏙 빼고 공함을 받아들인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스승은 곧바로 “너도 마찬가지로 공하니라.”라고 가리킨다.

‘색’을 먼저 말하고 ‘수상행식’을 말하는 구성이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 세상을 먼저 살펴보고 ‘나’를 살펴보는 구성과 다르지 않다. 7장 ‘세상을 살펴보다’에서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면 8장 ‘나를 살펴보다’에서는 ‘수상행식’인 ‘나’의 실체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스승 발라의 이야기다. 한 번은 귀에 이어폰을 꼽고 스승 웨인의 삿상을 들으면서 바닥 페인팅을 하고 있었다 한다. 집중해서 페인팅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자신이 구석에 몰려 있었다. 바닥의 모든 부분을 다 칠했는데 자기가 서 있는 곳만 칠이 안 되어있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칠을 마무리할 수 없다. 그때 문득 이 상황이 진리를 찾고 있는 자기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한다.

세상 모두가 공하다는 것을 알아도 한 가지가 남는다. 세상을 보는 ‘나’다. 그럼 이 ‘나’는 무엇일까? 반야심경은 “수상행식 역부역시”라며 분명히 답한다. 이 글을 보는 당신의 실체는 공하다고.

스승은 이미 답했다.

문제는 이 답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느냐다.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공하기에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느니라.

색도 공하고 수상행식도 공하다. 그리고 또 색과 수상행식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도 공하다고 말한다.

是諸法空相

시제법공상

‘색’과 ‘수상행식’도 공하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오온이 공하다는 말의 뜻에서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색’과 ‘수상행식’의 상호작용인 법이다.

‘시제법’은 세상의 모든 법을 말한다. 그런데 이 법이 뭘까? 이 법은 오온인 ‘색수상행식’들 간의 작용이다. 이 작용 또한 공함을 말해야 오온이 공하다는 뜻을 온전히 설명한다.

물건을 떨어뜨리면 땅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여기에 만유인력인 중력이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중력 방정식으로 그 양을 정확히 측정할 수도 있다. 이 대단한 정확도 때문에 GPS 기능으로 오늘도 우리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이런 경험으로 우리는 분명히 이런 법칙에 뭔가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으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반대하면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을지 모른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우리는 이런 법칙에 실체가 있다는 믿음으로 신을 상상한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정말 매정하게도 어떤 믿음의 여지도 주지 않는다. 이런 법칙 또한 공하다 선언한다.

이런 법칙을 바로 번역하면 현상이다. 법칙은 어떤 정해진 무엇이 있다는 믿음이 깔린 말이기에 법칙이 아니라 ‘현상’이라는 말을 쓴다. 현상은 겉으로 경험되어 인지되는 정보다. 이 말은 수상행식이 공함과 통하는 내용이다. 또 이 말은 현상을 일으키는 색이 공하기에 당연히 그 현상도 실체가 없기에 공하다. 그래서 색이 공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래서 모두가 공하다. 이에 대한 설명은 반야심경의 다음 줄부터 좀 더 자세하게 나온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7장 ‘세상을 살펴보다’ 가운데 ‘양자역학에서 얻는 화두 (327쪽)’ 와 ‘에너지와 움직임 (356쪽)’에서 모든 현상이 공함을 어느 정도 설명한다. ‘에너지와 움직임’에서 말하는 움직임이 곧 현상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바로 보는 시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상행식이라는 ‘나’의 시점이 공하면 움직임 또한 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시공간은 개념이다 (365쪽)’ 글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공함을 살펴본다. 공간이 실체가 없으면 색이든 색들 간의 상호작용이든 다 실체가 없어진다. 공간의 공함을 살펴서 오온의 공함을 살펴본다.

그런데 양자역학이나 움직임이나 공간의 공함을 통한 설명 보다 현상의 공함을 설명하는 데는 꿈의 비유만 한 것이 없다. 이 꿈의 비유를 ‘꿈과 현실 (372쪽)’ 글에서 깊이 살핀다. 꿈을 통해 현상의 공함을 살피는 것은 과학이 없던 오래전부터 아드바이타 스승들이 즐겨 쓰던 가리킴이다.

다음 내용은 ‘꿈과 현실’에서 가져왔다.

영적 스승은 꿈으로 힘의 실체를 설명한다. 꿈에서 내가 돌을 던져 창문을 깼다. 물리학자들은 창문이 깨진 원인을 돌과 돌의 운동량으로 설명할 것이다. 꿈에서 창문이 깨지는 원인은 돌과 전혀 상관없다. 창문이 깨지는 현상에 영향을 주는 힘의 본질은 꿈 그 자체다. 돌을 던지는 나도 꿈이요, 돌도 꿈이요, 창문도 꿈이요, 돌이 날아가는 현상도, 창문이 깨지는 현상도 다 꿈이다. ‘무엇’에 영향을 주는 ‘무엇’은 없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영향을 준다는 설명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돌이 창문을 깼다”라는 말은 꿈이 나타내는 이야기지 원인과 결과의 실체가 아니다. 모든 영향의 본질은 꿈 그 자체다.

돌을 던져 창문이 깨지는 꿈의 비유는 안내자 마띠아스가 안내하면서 나에게 들려준 가리킴이다. 색과 수상행식과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이 모두 다 공함을 너무도 잘 나타낸다. 문제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그 세상을 바로 보는 자신이 꿈과 같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냐는 거다. 결국 다시 내 믿음의 문제다. 가만히 살펴보라. 참으로 많은 믿음이 보일 것이다. ‘일체고액’이 보일 것이다.

꿈의 내용이 아니라 꿈의 실체를 알려 한다.

지금 여기 실재하는 실체를 찾는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꿈과 현실’에서 가져옴

不生不滅

불생불멸

공하다는 의미를 바로 알면 너무나 당연히 새로 나타나는 것도 없고 새로 나타나는 것이 없기에 사라질 것도 없다. 꿈속의 내용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 그런데 꿈속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그러니 태어나고 죽는 모든 꿈속의 현상은 당연히 실체가 없다.

不垢不淨

불구부정

꿈 안에서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있지만 꿈속 모든 것이 공하기에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다 실체가 없다. 모든 현상이 공하면 이렇게 깨끗하고 더럽게 보이는 하나의 가치도 다 공한 것은 당연하다. 깨끗하고 더러운 것도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시점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가치다. 우리는 정해진 깨끗함과 더러움이 있다고 믿는다. 선과 악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정의와 부정에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지금도 이런 실체를 찾아 수많은 논문이 쏟아진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것 없다고 선언한다. 정해진 가치는 없다. 이것이 가치의 본질이다. 상대적 세상의 본질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는 가치의 본질을 살펴보면서 본격적인 가리킴을 시작한다. 2장 ‘찾음의 시작’의 첫 글 ‘누가 좋다, 나쁘다 하는가?’는 이 가치의 본질을 살펴보는 글이다. 가치의 본질은 6장 ‘단서’ 가운데 ‘행복, 있으라하니 있다’에서 다시 살펴본다.

不增不減

부증불감

현상이 공하니 늘어나는 현상도 줄어드는 현상도 다 공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에너지 보존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이 공하기에 에너지 보존법칙이라는 현상도 공하다. 다 꿈속의 내용이라는 말이다.

찾는 이 가운데 깊은 이해가 있는 이들은 이것으로 설명이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몇몇은 여전히 의문을 품는다. 여전히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런데..”라고 돌아와 스승에게 묻는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좀 더 쉽고 자세히 예를 들어 설명해야 한다.

반야심경의 다음부터 오는 “시고 공중무색”부터 “무의식계”까지의 내용은 “색과 수상행식과 법이 공하다.”라는 앞 두 줄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다.

是故 空中無色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렇게 공하기에 물질도 실체가 따로 없고 감각과 인식과 생각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느니라.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도 실체가 따로 없으며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그 현상도 실체가 따로 없기에 본다는 것과 본 것을 의식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없느니라.

‘시고(是故)’, “그러하기에”라며 앞의 두 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는 데, 색과 수상행식의 관계를 말한다. 우리는 색과 수상행식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즉, 세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나로 나눈다.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경험상 이 말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나와 너, 나아가 모든 사물에 어떤 경계도 없고 어떤 구분도 없으며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생활하는 데 나와 물건의 경계가 사라지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기능을 잃는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석가모니를 비롯해서 삼세 부처들이 이런 기능을 잃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면 도대체 반야심경에서 하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 말을 바로 이해하려면 ‘무(無)’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여기서 ‘무’는 그냥 없다가 아니라 실체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체가 따로 없다는 말은 이것들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둘이 아니다’라고 표현한다. 사실 이 말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결국 하나를 바로 이해하면 모두가 다 풀린다. ‘공’의 의미도 나아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의 의미도 다 드러난다. 모든 의미가 확연히 다 드러나지 않으면 여전히 모름의 자세에 있어야 한다. 섣불리 답을 내면 진정한 답이 드러날 기회가 사라진다. 사실 찾음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뭔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얻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이미 있는 믿음들을 내려놓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때문에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말이 나온다. 이 때문에 선심초심(禪心初心), “초심자의 마음으로 찾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는 ‘내려놓기 게임과 받아들임의 예술’ (161 쪽) 글과 ‘의문 아래 믿음을 가리키다’ (206쪽), ‘믿음을 거슬러 (313쪽)’ 글에서 이 부분을 깊이 살핀다.

잊지 말라.

깨달음의 과정은 얻는 과정이 아니라

내려놓는 과정이다.

실체가 따로 없다는 가리킴을 이해하려면, ‘실재와 개념’ (323 쪽)의 차이와 ‘존재의 뜻’ (380 쪽)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면 책 전반을 통해서 말하는 “실체가 따로 없다.”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 쓰는 ‘무’의 뜻을 바로 알 수 있다.

空中無色無受想行識

공중무색무수상행식

이 말은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와 같은 말이다. ‘공하다’는 말을 설명한다. 공하다는 말은 색도 따로 없고 수상행식도 따로 없다는 말이다. 분명히 여기 뭔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며 믿고 있듯 색과 수상행식이 따로 있지 않다는 말이다. 사물과 사물을 감각으로 받아들여 해석하며 인식하는 이 과정 자체가 공하다는 말이다. ‘과정’이라고 부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독립된 사물(색, 色)이 따로 있고 사물에서 나오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수, 受)’이 따로 있고 감각 기관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해석하는 인식(상, 想)이 따로 있고, 이 인식의 움직임인 생각(행, 行)이 따로 있고, 이 생각을 하는 의식(식, 識)이 따로 있어야만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반야심경은 이렇게 따로 독립적으로 있지 않다는 말을 한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을 감각(수, 受), 인식(상, 想), 생각(행, 行), 의식(식, 識)으로 번역하며 설명했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수상행식을 하나로 보는 게 좀 더 낫다. 과학에서 나누어 설명하지만 실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과학에서도 깊이깊이 들여다보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감각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인식이고, 생각이고 의식인지 구분이 없다. 그저 과학이라는 학문을 하기 위해서 구분할 뿐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실체에는 어떤 구분도 없다. 이런 구분이 없다고 반야심경은 계속해서 무(無)를 외친다.

그리고 “수상행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말 따로 떨어져 있다고 굳게 믿으며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물(색, 色) 또한 “수상행식”과 구분이 없다고 반야심경은 선언한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도대체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 말을 무시하지 못한다. 물질과 물질이 눈에 보이는 과정을 연구하다 보면 큰 벽에 부딪친다. 물질과 빛이나 소리의 파장과 이것이 인식되는 과정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도대체 물질이 뭔지 빛이 뭔지 소리가 뭔지 또 물질을 인식한다는 것이 뭔지 계속해서 물음표만 받아든다.

여기에 속 시원히 반야심경은 어디에도 “색수상행식” 각각 사이에 어떤 구분도 없다고 단언한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에 구분이 있고 하루하루 생활하는 우리에게는 당연히 구분을 해야 살아가지만, 깊이깊이 존재의 바닥을 들여다보면, 마하반야바라밀다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살펴보면, 어디에도 구분이 없고 우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 심지어 ‘나’를 포함해서 실체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여기 존재가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존재가 있다. 실체가 있다. 실체는 이뿐이라고 반야심경은 가리키는데, 이 모두의 실체는 오직 관자재보살이며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관자재보살의 작용(행심반야바라밀다) 일뿐이라는 거다.

이해가 깊은 찾는 이는 이미 “아하!”하고 무릎을 탁 쳤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에게는 경천동지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무슨 세상의 종말 같은 소리냐고 따질지 모른다. 그렇다. 당신이 아는 세상과 ‘나’의 종말이다. 이 종말로 반야심경은 이끈다. 그래서 진정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도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앞의 내용 “공중무색무수상행식”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한다.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따로 있다고 믿는 감각 기관들과 두뇌인 “안이비설신의”가 사실은 실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사물을 인식하게끔 정보를 전달해 주는 매개체인 “색성향미촉법”도 실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물이 인식될 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하나하나의 과정에 어떤 경계도 없다고 말한다. 과정을 구분하는 “안의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도 따로 실체가 없으니 과정 자체에도 경계가 있을 수 없다. 결국 “오온개공”부터 모두가 공함을 점차적으로 상세히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물체를 경험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또 맛보고 만져보며 물체를 인식하고 그 물체가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고 믿고 이렇게 인식하는 ‘나’도 하나의 개체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물체와 관련된 정해진 색깔이 있고 소리가 있고 향기가 있고 맛이 있고 감촉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나’라는 독립된 개체가 저 물건이라는 독립된 개체를 본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으로 색깔을 포함한 시각 정보를 물체에 반사되는 빛을 통해서 얻고 이 정보를 시신경이 두뇌로 전달해서 두뇌가 그 정보를 경험에 비추어 해석해서 형상을 그려내고 우리 안에 있는 의식이 이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그 물체를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리들은 과학자들이 알려준 대로 본다는 현상을 이해하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 우리가 사회생활하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사실일까?”라고 묻는 것이 아니다. 정말 정말 깊이깊이 진실로 ‘마하반야바라밀다’라는 진실의 바닥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것이 사실일까?”라고 묻는다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는 분명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답한다.

반야심경은 물체가 공하다고 말한다. 실체가 따로 없다는 말이다. 나아가 이 물체를 경험하는 감각들의 실체도 따로 없다고 말한다. 감각도 따로 없고 우리 감각으로 경험하며 실체가 있다고 믿는 물체의 색깔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이 모두 실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본다는 현상들도 실체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반야심경이 어려운지는 알았지만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일까?” 싶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정말 헛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찾는 이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다. 이해가 깊어 갈수록 내가 알던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다. 관세음보살은 시바 신으로 나타나서 당신의 세상을 철저히 부수어버린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당신이 알아오던 상식과 그 내용이 너무나 달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7장 ‘세상을 살펴보다’와 8장 ‘나를 살펴보다’에서 이 부분을 공을 들여 설명한다.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해야 아드바이타를 가리키는 반야심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책 7장 ‘세상을 살펴보다’의 마지막 글에 ‘존재의 뜻’이 있다. 이렇게 자꾸 실체가 따로 없다고 하니 ‘존재’의 의미 자체가 흔들린다. 앞에 있는 사과를 보고 인식하며 사과가 당연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과는 분명히 실체가 있어보인다. 그런데 반야심경은 사과(색, 色)도 사과를 인식하는 ‘나'(수상행식, 受想行識)도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사과의 실체가 따로 없다니. 그럼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도대체 존재가 뭐란 말인가?” 의문이 든다. 이 의문을 ‘존재의 뜻’에서 살펴본다. 정말 “안이비설빈의”가 존재하는지 “색성향미촉법’이 존재하는지 ‘안’과 ‘의식’사이에 경계가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의미를 살펴본다.

진정으로 마하반야바라밀다의 수준에서 “존재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서 어떻게 ‘색’도 따로 없고 “안의비설신의”도 따로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따로 없고 이들이 따로 없기에 이들 사이에 어떤 경계도 없는지 당신이 직접 살펴보도록 안내한다.

책 8장 ‘나를 살펴보다’에서 어떻게 사물이 공한지를 ‘수상행식’의 측면에서 ‘인식’이라는 이름으로 깊이 살펴본다. 세상을 보는 ‘나(수상행식)’가 정말 실체가 따로 있는지 깊이 살펴본다. 도대체 우리가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생각하는 어떤 믿음이 있길래 반야심경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힘든지 ‘숨어있는 가정 ‘나”와 ‘나에 대한 믿음’, 두 글에서 당신이 직접 살펴보도록 안내한다.

‘수상행식’ 또는 ‘의식’과 같은 뜻으로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 마음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마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마음이 결국 육체를 지나 독립된 ‘나’가 있다고 믿는 최후의 방어선이다. 우리가 실체가 있다고 믿는 이 마음이 정말 실체가 있는지 살펴보는 글이 8장 가운데 ‘마음’ 글이다.

그리고 따라오는 ‘인식’ (424쪽) 글에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와 가장 관련이 깊은 내용을 살펴보는데, 감각과 생각과 인식에 구분이 있는지 깊이 살핀다.

이런 내용이 받아들여지기는 참 쉽지 않다. 아무리 받아들이고 이해해도 결국 하나는 남겨둔다. ‘나’다. “안이비설신의”든, “색성향미촉법”이든, “안계”든, “무의식계”든, “색”이든, “수상행식”이든 이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받아들여도, 세상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갈아엎어도, 엄청난 수준의 깨우침이 일어나도 여전히 ‘공’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지막 장벽이 ‘나’다.

“안이비설신의”가 실체가 따로 없음을 알고 “색성향미촉법”의 실체가 따로 없음을 알고 어디에도 경계가 없음을 알고 오직 ‘참인식’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도, 여전히 “‘내’가 인식한다.”라는 믿음은 다시 돌아온다. “내가 관세음보살이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고 반야심경을 다 이해해도 결국 “‘내’가 관세음보살이다.”로 돌아온다. 이때는 ‘나’라는 실체는 따로 없어 공하고 오직 관세음보살만 있다는 “나는 관세음보살이다.”의 뜻이 아니다. “‘나’라는 독립된 이 실체가 세상 대단한 저 관세음보살이다.”라는 뜻으로 바뀌어 있다. 스승의 가리킴을 정반대로 뒤집어버렸다. 이 부분이 ‘고액(苦厄)’의 핵심이다. 가장 큰 어려움이다. 찾는 이가 이 어려움을 건너가도록 책 8장에 ‘인식하는가, 인식되는가?’라는 글을 넣어 깊이 살피고 9장 ‘아드바이타’에서 ‘깨우침, 끝나지 않는 여정’, ‘알았다, 놓였다’ 글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어려움의 바다를 건너갈 도구를 제공한다.

관세음보살을 만나려면 오온이 공함을 알아야 한다. 모두가 공함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일체고액을 넘어 관세음보살을 만난다. 모두는 말 그대로 모두 다. 어떤 예외도 없다. 정말로 말 그대로 어떤 예외도 없다.

결국 모두가 따로 실체가 없다는 말을 스승들은 간단히 “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드바이타’다. 그래서 책 마지막 장이 ‘아드바이타’다.

진실로 진실로 진실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존재하는 것이 뭘까?

7장 세상을 살펴보다 가운데 ‘존재의 뜻’에서

여기까지가 반야심경에서 “오온개공”에 관한 직접적인 설명이다. 이렇게 설명했다고 몇이나 알아들을까. 몇이나 이해를 할까. 몇이나 이해를 넘어 진리에 눈을 뜰까. 스승은 이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찾는 이가 찾음의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글을이어간다. 반야심경의 다음 글부터 끝까지는 이렇게 찾는 이가 이해하며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이다.

4장. 찾음의 본질

‘누가 무엇을 찾는다’가 아니다. 그저 찾음이다.

두 번째 줄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으로 시작해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까지 이어지는 내용은 첫째 줄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둘이 아니라는 반야바라밀다의 핵심을 설명한다. 즉 ‘공’하다는 말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번째 줄부터는, 그런 반야를 찾고 있는 찾는 이에게 드리운 여러 믿음을 지적하며 찾는 이를 바른 찾음으로 안내한다.

이 부분을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는 찾음의 본질과 길의 본질로 설명하는 데, 3장 ‘찾음’과 5장 ‘길’의 내용이 반야심경의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심지어 늙고 죽는 것이 없기에 늙고 죽는 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느니라.

공을 설명하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할까? 좀 뜬금없다고 느껴질 수 있는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찾는 이에게 찾음의 본질을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찾음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이전 줄까지 설명한 아드바이타 가리킴인 반야바라밀다를 바로 이해해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에 직접 눈을 뜰 수가 있기 때문이다.

책 3장 ‘찾음’에서는 찾음의 본질을 깊이 이야기한다. 찾음의 본질을 바로 알려주기 위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찾음에 대한 거짓 믿음을 가리킨다.

無明

무명

찾는 이는 깨달음을 얻어서 괴로움이 넘치는 이 세상을 벗어나 윤회를 멈추고 마음의 평화가 가득한 극락에서 영원히 사는 열반을 꿈꾼다. 이런 세상 최고의 목표인 열반을 내가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으로 명상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면서 깊이 공부해서 반야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무명을 없애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온갖 안 좋은 것들을 무명의 뜻에 갖다 붙인다. 그리고 이 무명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대단한 불교의 가르침으로 말이다. 부처가 아니면 다 무명에 빠져 있는 중생이다. 중생은 무명에 빠져있기에 수준이 낮다.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윤회를 계속하며 온갖 고통을 받아야 한다. 사람으로 계속 산다는 보장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온갖 무서운 지옥에 빠져 말도 안 되게 오랜 세월을 상상도 못할 고통을 받아야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렇게 중생은 벗어나야 할 상태이고 구제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부처나 보살 같은 신과 같은 존재가 이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해야 한다. 또한 중생들은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처와 보살과 그들의 가르침을 전하거나 매개하는 승려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이 사실일까?

반야심경은 여기에 명확히 답한다. “무무명 역무무명진”이라고. 심지어 “무노사 역무노사진”이라고 선언한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석가모니가 살아서 법을 설하고 있을 당시에도 찾아오는 수많은 찾는 이들이 “뭔가 얻을 것이 없을까”하는 믿음을 가지고 와서 물었을 것이다. 요즘도 스승의 삿상에 앉아 있으면 찾아와 묻는 사람들 대부분이 ‘뭔가를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를 스승에게 묻는다. 석가모니는 너무도 명확하고 칼같이 이 믿음에 답했을 것이다. “이런 거 알아서 네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이 답이 반야심경에 잘 정리되어 있다.

반야심경은 말한다. 반야라는 지혜를 모르는 세상 모든 중생들과 동물들과 식물들과 광물들과 다른 모든 물질까지도 이 지혜를 모른다고 해서 다를 것 하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무무명’의 뜻이다.

반대로 반야의 지혜에 눈을 환희 떠 부처가 되어도 다를 것 하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역무무명진”의 뜻이다.

이미 있는 그대로인데 뭐 바뀔 게 있겠는가? 이미 있는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뿐이다. 뭔가를 깨달아 뭔가를 얻고자 하는 찾는 이들에게 석가모니는 지혜를 모른다고 문제 될 것도, 안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고 말하며 찾는 이에게 자신의 환상을 바로 보라고 가리킨다.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스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깨달음으로 열반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말한다. “늙어 죽는다는 게 없기에 늙어 죽는 것을 벗어나는 열반 같은 것도 없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 어디 “환생”과 “열반”의 믿음을 갖다 붙일 수가 있겠는가. 여기 어디 “중생”과 ‘지옥’의 믿음을 갖다 붙일 수 있겠는가.

모두 다 없다고 말하는 데 무엇이 있어 환생하고 무엇이 무엇에서 벗어나서 열반을 얻겠는가. 없다 없다 없다, 공하다 공하다 공하다 하는 데 어디서 이런 믿음들을 스승의 가리킴에 갖다 붙일 수 있겠는가.

반야심경을 매일 독송하면서 이런 믿음을 두 손에 모아 바라고 있는 이들은 부디 자신의 믿음을 바로보기 바란다. 반야심경의 깊은 뜻을 어려운 말 뒤에 감춰 자신의 믿음을 키우지 말고 스승의 뜻을 바로보기 바란다. 반야심경에 나타나는 스승의 가리킴은 너무나 간결하다.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다. 전혀 어렵지 않다. 그저 그 가리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믿음이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있는 그대로 당연하고 괜찮다. “무무명 역무무명진”이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부분과 정확히 같은 뜻이 책에 있다. 1장 ‘끝의 시작’ 가운데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글에서 가져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자신이 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성령이며 부처이며 참인식이며 관세음보살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바닷속의 물방울은 다 바다다. 바닷속, 독립된 물방울은 없다. 그래서 모두가 절대 평등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실체는 둘로 구분되지 않기에 평등하고 말고도 없다. 그래서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이의 차이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해서 원래부터 깨닫지 못한 이는 없다. 깨달은 이도 없다. 깨달음도 없다. 겉으로 보이는 유일한 차이는 이 사실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만 있을 뿐이다. 몰라도 신경 쓰지 않는 이와 알고 싶어 하는 이만 있을 뿐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42쪽

“무노사 역무노사진” 부분을 이해하는 데 책 6장 ‘단서’ 가운데 ‘업과 환생하는 영혼’ 글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은 찾는 이에게서 드러나는 업과 환생과 영혼에 관한 믿음을 바로 보도록 돕는다.

無苦集滅道

무고집멸도

괴로움은 실체가 없기에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실체가 없느니라.

찾는 이의 환상을 가리키는 스승의 노력은 계속된다.

영적 수행을 한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마음의 평화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공부를 한다.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행복이다. 마음의 평화나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괴로움이 없기를 바라고 괴로움의 원인을 찾아 사라지게 하고 싶어서 사람들은 스승에게 와서 그 방법을 묻는다. 스승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니르바나(Nirvana, Sanskrit: निर्वाण, 열반, 해탈)라고 불리는 거창한 절대 평온의 상태에 있다고 믿고 묻는다. 이것은 괴로운 것이 싫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하지만 스승은 위로는 할 수 있을지언정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믿음을 붙들고 있으면 결코 있는 그대로의 반야를 볼 수 없기에 스승은 매정하게 믿음의 심장을 가리킨다. 이런 믿음을 도려내는 일은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이 따른다. 어찌 영원한 마음의 평화라는 달콤한 목표를 내려놓을까.

그래도 몇몇은 영원한 행복을 내려놓고서라도, 영원한 마음의 평화를 내려놓고서라도 나아가길 바란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너무 궁금해서 미치는 이들이 간혹 있다. 스승은 이들이 이 믿음의 장애를 극복하고 나아가도록 돕는다. 이런 “일체고액”을 넘어서 “오온개공”을 바로 보게 돕는다.

스승은 말한다. 어떤 괴로움도 실체가 없다고. 그러니 어찌 괴로움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이 있을까. 실체가 없는데 어찌 사라질 것이 있을까. 사라질 실체가 없는데 어찌 사라지게 할 방법이 있을까.

이 사실을 바로 알려면 찾는 이는 자신의 믿음을 바로 봐야 한다. 믿음이 거짓이라 증명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믿음이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믿음을 내려놓는다고 말한다. 믿음에 관해서 책 3장 ‘찾음’, ‘내려놓기 게임과 받아들임의 예술’ 글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방법을 찾는 이들의 믿음을 가리키기 위해 책 3장 ‘찾음’에서는 계속 묻는다. 정말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리를 찾는다고 가르침을 구하는 찾는 이에게 진리 뒤에 숨겨놓은 자신의 진짜 목표를 살펴보게 안내한다. 진리가 목적인지 수단인지 묻는다. ‘무엇을 찾는가? (136쪽)’, ‘안전의 보장을 찾는가? (138쪽)’ , ‘능력을 찾는가? (142쪽)’, ‘영생을 찾는가? (149쪽)’라고 계속해서 물어댄다. 마침내 ‘마음의 평화를 찾는가? (151쪽)’라며 마지막 보루를 건드린다. 당신이 믿고 바라는 ‘마음의 평화’의 실체가 있기나 한 것인지 참 아픈 부위를 가리킨다.

無智 亦無得

무지 역무득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없느니라.

스승은 다시 한번 말한다. 지혜가 따로 없기에 ‘당신’이 얻을 지혜란 없다고.

지혜는 있다. 반야는 있다. 진리는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있다. 다만, ‘당신’이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따로 없다. “얻어서 당신 가슴속에 숨겨둔 목표에 써먹을 지혜는 없다.”라고 스승은 분명히 말한다.

반야심경은 반야라는 지혜를 가리킨다. 궁극의 지혜인 마하반야바라밀다를 가리킨다. 그런데 “어떻게 지혜가 따로 없다고 하지?”라고 의아할 수 있다. 물론 지혜는 있다. 하지만 궁극의 지혜 반야는 당신이 이해하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고 말한다. 뭔가를 배우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말이 이해가 안 된다. 진리는 오직 가리킬 수만 있다. 그리고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상이 아니다. 당신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존재 모두의 근원이지 모두이다. 존재 자체다. 이 때문에 책 3장 ‘찾음’은 ‘찾는 이가 찾아진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래서 찾음의 길은 선이 아니라 점이라고 말한다.

하여튼 핵심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무무명”인데 어디 얻을 지혜가 따로 있을까. 석가모니는 당신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반야를 가리킬 뿐이다. 당신이 직접 눈을 뜨고 보도록.

‘무엇’을 찾는 한, 찾음은 끝나지 않는다. 찾는 대상이 한정되어 있으면 찾아져도 그 대상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찾아졌다고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이 여기 있다. 대상이 한정되고 그 무엇이 어떠할 거라는 고정된 생각이 있으면 찾아지는 것은 그 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찾음이 끝날 수 없다. 찾고자 하는 무엇은 사실, 이미 여기 지금 있다. 찾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찾음은 허상이다. 이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 찾음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그저 찾음이다’ 167쪽에서 가져옴.

위에 글은 책 3장 ‘찾음’ 가운데 마지막 글 ‘그저 찾음이다’ (165쪽)에서 가져온 글이다. 찾음의 본질이 뭔지 다시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내려놓기 게임과 받아들임의 예술’ (161쪽) 글에서 언급하듯이 찾음의 본질은 오직 나의 믿음을 내려놓을 때 드러난다. 믿음을 내려놓으면 스승의 가리킴이 들어올 공간이 드러난다. 그 공간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가득 찬다. 이미 가득차 있는 진리가 눈에 들어온다.

5장. 길의 본질

길은 선이 아니라 점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다.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이렇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으므로 찾는 이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만을 바라야 하느니라.

以無所得故

이무소득고

다시 한번 반야심경은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쐐기를 박아버린다.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늘 ‘아무것도’에서 예외를 만들어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뭔가 얻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아닌 특별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따라오는 ‘보리살타’의 번역에서도 잘 드러난다.

菩提薩埵

보리살타

보리살타의 해석이 앞으로 나오는 반야심경 해석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 ‘보리살타’를 다양하게 번역하는 데 대부분 보리살타를 관세음보살과 같은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석하면 반야심경의 전체 흐름이 일그러진다. 관세음보살, 즉 관자재보살은 첫 줄에 나오고 그 설명이 이어지다 “무무명”부터는 찾는 이에게 초점을 두고 이어가는 말이다. 이 부분은 찾는 이에게 초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관세음보살이나 다른 보살이 낄 곳이 아니다.

보리(菩提, bodhi, Sanskrit: बोधि)는 지혜나 깨달음을 일컫는 말이다. 살타(薩埵, Sattva, Sanskrit: सत्त्व)는 보통 사람을 일컫는다. 이를 합쳐놓은 산스크리트어 보리살타(菩提薩埵, Bodhisattva, Sanskrit: बोधिसत्त्व)는 지혜를 얻은 ‘깨달은 사람’ 또는 지혜를 깨닫고 싶어 하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부분은 깨달은 사람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해석이다. 다른 문헌을 살펴볼 필요 없이 바로 앞까지 계속해서 말하는 반야심경의 내용을 보면 오해라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무명도 없고 무명을 벗어나는 것도 없고, “무지역무득”, 얻을 지혜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또 한번 “이무소득고”, 즉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쐐기를 박았는데 어디 깨달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번역은 여전히 뭔가를 얻어서 깨달은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오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에서는 보리살타,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찾는 이’라고 부른다. 중생이나, 수행자나, 구도자와 같은 말을 쓰지 않고 책에서는 ‘찾음’이라 하고 ‘찾는 이’라고 쓴다. 반야심경에서 반복해서 이야기하듯 찾는 대상을 정해놓고 뭔가를 얻을 수 있다는 오해를 조금이라도 피해 보기 위해서다. “무엇을 찾는다”가 아니라 그냥 찾는 것이다. 또 한 번 이것이 찾음의 본질이다. 진정 반야로 가는 길이다.

사람들은 각자 큰 의문을 품고 진리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찾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진리를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依般若波羅蜜多

의반야바라밀다

그래서 찾는 이는 오직 ‘반야바라밀다’에만 의지해야 한다. 진리를 수단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다. 자신이 원하는 진리의 틀에 가두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정해놓은 진리가 아닌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만을 바라야 한다. 기억하라. 몰라서 찾는 것이다. 그러니 모름은 모름에 두어야 한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숨어있는 가정, ‘나” 394쪽에서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러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어서, 모든 거짓 믿음을 넘어 어떤 의문도 남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느니라.

故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라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어진다. 걸릴 것이 없는데 두려울 것이 있을까. 이때 비로소 오랫동안 세상에서 듣고 배우고 스스로 쌓아온 믿음들을 바로 보게 된다. 그렇게 믿음을 하나둘씩 내려놓을 수 있다. 믿음이라는 먼지들이 다 닦여 나가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진리는 늘, 한순간도 빠짐없이, 어떤 가림막도 없이, 너무도 단순히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이때는 어떤 의문도 없다. 의문이 기댈 수 있는 믿음이라는 기반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遠離顚倒夢想

원리전도몽상

진리를 수단 삼아 내가 원하는 다른 뭔가를 얻으려 하면 마음에 숨기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따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에 걸리는 집착이 일어난다. 뭔가에 집착하면 두려움이 일어난다. 얻을 것이 있으면 얻지 못할까 두렵다. 이 두려움에 여기저기 휘둘린다. 이런 전도몽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 전도몽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알고 모든 기대를 접는 것이다.

진리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뭔가를 얻겠다는 집착이 없으면 잃을 것이 없다. 그러면 두려움이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진리만을 바랄 뿐이다. 나의 편견과 믿음이 정해놓은 진리가 아니라 그저 진리가 그 무엇이든 간에 있는 그대로 찾고자 하는 간절함이 타오르면, 이때 비로소 ‘전도몽상’, 즉 모든 거짓 믿음이 멀어지며 자연히 내려놓아진다. 모든 믿음이 허상이었음을 바로 보게 된다. 그저 믿음이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로 보는 것이다.

전도몽상은 독립된 ‘나’와 독립된 사물들이 있다는 믿음이다. 반야심경은 이미 세상이 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도 공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로 알고 있다. 독립된 내가 있고, 독립된 사물이 있어서 내가 사물을 바라본다고 믿는다. 석가모니가 말하는 사실과 정 반대로 찾는 이는 믿고 있다. 그래서 전도(정반대로 뒤집힌) 몽상(환상, 즉 거짓 믿음)이라고 일컫는다.

이 부분과 따라오는 글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길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책 5장 ‘길’에서는 길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길의 본질은 찾음의 본질과 통한다. 찾음의 본질은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고 길의 본질은 얻을 것이 없으니 얻을 방법도 없다는 말이다. 원래부터 얻을 것이 없기에 뭘 얻고 말고도 없다는 말이다.

究竟涅槃

구경열반

아무리 이렇게 이야기해도 결국 또다시 뭔가를 얻으려 하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갈려고 한다. 이런 믿음은 ‘구경열반’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구경(究竟)은 최고 또는 궁극이란 뜻이고 열반(涅槃)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निर्वाण)의 음을 번역한 말이다. 열반을 부처가 모든 괴로움을 벗고 도달한 어떤 상태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렇게 도달한 세계를 열반의 세계라고 피안(彼岸 :저 언덕)이라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을 상상한다. 지금 여기가 아니기에 거기로 가야 하고 가야 하면 갈 방법이 있어야 한다.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최고의 방법을 찾고 최고의 주문을 찾아 이를 꾸준히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 만연한 수행자의 믿음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히 반야심경에서 그런 건 없다고 반복해서 지적하는 바다. 얻을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얻을 ‘나’도 ‘얻을 대상’도 공한데 뭐가 무엇을 얻는다는 말인가? 얻을 것이 없는데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전도몽상’이다. 그리고 이 ‘전도몽상’의 믿음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구경열반’이다. 모든 전도몽상이 사라지면 자연히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난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그저 오랫동안 쌓인 거짓 믿음으로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는 반야심경을 통해 이 사실을 사리자로 대표되는 찾는 이에게 일러주고 싶은 것이다.

뭔가 얻고자 하는 찾는 이를 위해 책 5장 ‘길’에서는 먼저 ‘깨달음의 전제조건 (220쪽)’이라는 것이 있는지부터 살펴본다. 그리고 전제조건을 충족 시키려 수행하는 이들을 위해 스승이 가리키는 ‘수행 (227쪽)’의 참뜻을 살펴본다. ‘구경열반’을 얻을 조건을 충족시키려 수행하는 이들이 무엇을 오해하는지 하나 둘 살펴본다. 그리고 수행으로 하는 여러 방법을 하나씩 살펴보며 어떤 믿음이 눈을 가리는지 찾는 이가 직접 보도록 안내한다. 그렇게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는 “의반야바라밀다”를 가리킨다.

길은 내가 가는 이 자리다.

다른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있다.

내가 지나온 흔적은 있다.

하지만 내가 가야 한다고 정해진 길은 없다.

길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길은 내가 가는 이 행위다.

길은 선이 아니라 점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부처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을 온전히 끝내느니라.

스승은 다시 한번 강조한다. 따로 얻을 것이 없으니 오직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게 하라고.

오랜 찾음이 끝났다. 찾아지는 것은 처음부터 너무도 선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찾음을 끝낸 모든 이에게 찾아지는 것은 다 똑같다. 다를 수가 없다. 수천 년 전의 석가모니나 예수든, 근대의 라마나 마하리쉬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든, 동양의 노자든 서양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든, 지구상의 스승이든 은하수 저 너머 외계의 스승이든,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들어가는 말’ 글 6쪽에서

찾음이 끝났을 때 너무도 명확이 이것 외에 어떤 다른 진리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찾음이 끝난 자연인에게 찾아지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연인, 즉 모든 부처는 앎이 다 똑같다. 이 때문에 수천 년 뒤에도 이렇게 반야심경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가 있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도 반야심경과 다 같은 내용이다. 다를 것 하나 없다. 다른 스승의 책도 다 마찬가지다. 가리키고자 하는 달이 어찌 다를 수 있을까. 다 똑같은 내용이다.

이 때문에 삼세의 모든 부처가 본 반야도 반야에 이르는 길도 다 같다. 결국 다 제자리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에 삼세제불은 오직 이 사실을 깊이 알고 어떤 바람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 만을 간절히 바라서, 모든 거짓 믿음이 멀어지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찾음을 온전히 끝내는 것이다.

다시 한번, 여전히 뭔가를 얻고자 하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은 많은 이들이 오해하겠지만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는 무엇이 아니다. 도달할 어떤 수준이 아니다. 그저 찾음이 끝나는 일을 일컫는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아는 일이다. 모두가 공하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일이다. 그리고 관세음보살과 하나 되는 일이다. 아니, 관세음보살과 처음부터 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의 의미가 온전히 드러나는 일이다.

이 일을 가리켜 책에서는 ‘궁극적 깨달음’이라고 일컫고 찾음이 끝나는 일이라고 ‘용어 정리(128쪽)’에서 정의한다. 그리고 ‘자연인으로 살아간다 (487쪽)’ 글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니 명심하기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바로 보는 것만이 가장 신비하고 확실한 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방법이기에 능히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어 진실에 닿기에 헛되지가 않느니라.

반야심경은 다시 한 번 반복하며 몇 번이고 강조한다. 다 공하니 뭔가를 얻으려 하는 모든 믿음을 내려놓고 오직 ‘반야바라밀다’, 즉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이거 말고는 어떤 다른 길도 없다는 말이다.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다.

여전히 뭔가를 얻고 지금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이들은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 어딘가 숨겨진 시크릿이 있을 것만 같다. 신비하고 대단하며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비법을 얻고 싶어 한다. 모두가 공하고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스승이 그렇게 몇 번이고 이야기해도 바로 자신의 믿음에 맞춰 그 뜻을 다르게 해석한다.

대부분의 찾는 이는 자신의 믿음을 쫓는다. 운이 좋게 삿상에서 스승의 가리킴을 받아도, 스승이 자신의 믿음을 지지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사실을 알면 다시 오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을 지지해 주는 선생을 찾아다닌다. 세상에는 자신의 믿음을 지지하고 옹호하고 더 견고히 쌓아주는 곳이 널려있다. 거의 다 그렇다. 그렇게 믿음을 붙잡고 뛰고 또 뛴다. 그렇게 세상의 수많은 수행자들이 다람쥐 쳇바퀴에 올라타 내려올 생각을 못 한다. 잡힐 것만 같은 자신의 믿음을 앞에 매달고 오늘도 헛되이 뛰고 또 뛴다.

다른 길은 없다.

오직 믿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주(呪)”라고 한자로 번역하고 주문이라고 한글로 옮기는 번역에 비법을 찾고 싶은 믿음이 강하게 베여있다. 이 주문을 세상 최고의 비법이라고 숭배한다. 우주 최강의 스승인 석가모니께서 직접 말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하고 좋을까. 비법을 원하는 나의 믿음을 충족시키려면 말하는 스승의 권위도 올려야 하고 비법을 담은 글의 권위도 올려야 한다. 그렇게 스승의 가리킴은 마하반야바라밀이 된다. 스승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특별한 존재로 포장해야 하니 싯다르타는 석가모니가 되고 세존이 된다. 수십 미터의 동상이 되어 금을 칠하고 앉아 있어야 한다.

한글 번역에서는 주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늘 말 자체에는 문제가 없지만 말에 담긴 당신의 오해를 덜기 위해 이런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찾음은 이미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는 일이다. 뭔가를 얻는 일은 없다. 얻으면 잃어버린다. 일시적이다. 그러면 진리가 아니다. 최소한 반야심경에서 가리키는 진리는 아니다. 반야바라밀다가 아니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어떤 가림막도 없이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은유도 비유도 없다. 말 그대로다. 이 진리에 눈을 뜨는 방법은 오직 얻을 것이 있고 진리가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이런 믿음이라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다. 믿음이 사실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없는 것을 증명할 길은 없다. 그저 자신의 믿음이 믿음에 불과하다는 이 사실만 바로 보면 믿음은 내려놓아진다. 눈을 가리던 먼지가 씻겨 나간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하면 체계적으로 찾는 이에게 알려줄까 고민한 결과 책에서 3장 ‘찾음’, 4장 ‘가리킴’, 5장 ‘길’을 써 내려갔다. 아무리 깊은 내용을 전한들 찾음의 본질과 가리킴의 본질과 길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한순간 다시 오해하고 왜곡되기에 아드바이타 가리킴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이 세 가지 본질을 먼저 이야기해야 했다. 세 가지 본질이지만 결국 다 같은 이야기다. ‘공’하기에 찾을 것도 가리킬 것도 가야 할 길도 없다는 이야기다. 반야심경에서 누누이 하는 이야기다.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래서 일러주리니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뜨거라.

故說

고설

그래서 일러준다고 한다. 앞의 내용을 잊지 말라는 말이다.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아는 데 도움을 준다는 말이다. 말을 해도 해도 꼭 쥔 손을 놓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해봐라는 말이다. 전도몽상해서, “그래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대단한 신비의 주문을 알려주겠다”라는 말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찾는 이들은 스승에게 참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질문하지만 대부분 ‘어떻게?’라는 방법을 묻는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깨달음의 전제조건에서

아무리 공하다, 얻을 지혜도 없다,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얻을 방법도 없다고 말해도 찾는 이는 또 묻는다. 그래서 그 사실을 ‘어떻게’하면 알 수 있느냐고. 또다시 방법을 묻는다. 한심해 보이나 다들 그러고 있다. 나도 찾음이 끝나기 직전까지 그러고 있었다. 찾는 이가 그렇다. 삼세제불은 다 찾는 이었기에 자신의 경험상 찾는 이의 이런 한심한 행동을 잘 이해한다. 그래서 “즉설주왈”, 일러주는 것이다.

궁극적 깨달음에 전제조건은 없다. 얻어야 할 것도, 버려야 할 것도 없다. 이미 있는 그대로에 더해야 할 것도, 덜어야 할 것도 없다. 이 ‘있는 그대로’ 안에서 많은 사람이 뭔가를 하고 있다. 뭔가를 하고 싶어 한다. 뭔가를 해야만 할 것만 같다. 스승은 “그냥 있으라”라고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스승은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라고 하지만, 당신은 완벽한지를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게 된다. 뭔가를 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찾음에서 뭔가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할 때는 어떤 목적도 필요 없다. 뭘 얻고자 함이 아니다. 누가 뭘 얻겠는가? 뭔가를 얻으려고 목표를 세우고 하는 모든 행위는 어떤 형태로든 부작용을 낳는다. 물론 이런 부작용도 가는 길의 일부이기에 사실 부작용이란 없다. 목표를 이루려는 모든 행위는 결국 모든 목표를 내려놓는 길로 가는 여정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 수행에서

찾는 이는 늘 다시 ‘어떻게’를 묻기에 스승은 어쩔 수 없이 뭔가 할 거리를 준다. 이렇게 주는 할 거리 중 하나가 주(呪), 즉 주문이다. 만트라다.

얻을 것이 없다고 알려주는데 계속 “어떻게 그 사실을 아나요?”라고 물으면 스승은 어쩔 수 없이 그럼 “얻을 것이 없다.”라는 말을 늘 반복해보라고 일러준다. “진리는 이미 여기 있다. 그러니 구할 것이 없다.”라고 스승이 말하면 찾는 이는 “그 사실을 어떻게 깨달을까요?”라고 또 ‘어떻게’를 묻는다. 그럼 스승은 찾는 이에게 이렇게 일러준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리는 이미 여기 있음을 알게 하소서.’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씩 반복하거라.” 이것이 주문의 본질이다.

반야심경에서 “즉설주왈”하면서 말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주문 또는 진언이라고 번역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만트라(Mantra, Sanskrit: मन्त्र)다. 반야심경에서 그렇게 얻을 것도 얻을 방법도 없다고 말해도 사람들은 뭔가 비법을 찾고 싶어 만트라를 신비한 마법으로 이해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옴(Oṃ, ॐ)”은 많은 사람들이 신비한 영적 힘을 지닌 소리라고 여기며 최고의 만트라라고 여긴다. 이 소리를 분석하고 이야기를 붙여 신의 영역으로 가져다 놓는다. 다들 부정하고 싶겠지만 정확히 반야심경에서 “그런 것은 없다.”라고 말하며 넘어서라고 하는 ‘전도몽상’이다.

만트라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마음이 이끌리는 만트라가 있으면 하라. 하지만 그 본질을 바로 알고 해야 한다. 그러면 만트라의 진정 신비한 힘이 깨어난다. 반복으로 익숙하게 만들어 앎을 일으킨다. 앎의 본질을 잘 아는 스승은 그래서 찾는 이에게 반복할 말을 일러준다.

처음에는 “이미 여기 있다.”라는 스승의 가리킴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는데 만트라를 계속 간절히 반복하다 보니 문득 스승의 말씀이 심장을 파고든다. 그리고 앎이 일어난다. “아하!”

이렇게 뭔가 알게 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나눌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한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만트라면 여기에 이야기를 붙여 만트라의 신비한 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만트라가 그 결과에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일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원인이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이 말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만트라의 힘이라 믿고 싶다. 그런데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면 특정한 원인이 있다는 믿음이 깔려있다. 이 믿음이 사실인지, 아니 사실이 될 수나 있는지 책 2장 ‘찾음의 시작’ 가운데 ‘어떻게 벤자민 버튼이 데이지를 만나게 됐을까?”에서 살펴본다. 이 믿음을 바로 봐야 스승이 반야심경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바로 볼 수 있다. 모든 장애 ‘일체고액’은 자신의 믿음이다. 밖에 있지 않다. 장애도 답도 다 ‘내’ 안에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점은 만트라를 외는 찾는 이의 간절함이다. 알고자 하는 찾는 이의 간절한 마음이다. 만트라는 그 의미를 알고 반복하면 좋겠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반복해도 상관은 없다. 뭐라고 반복하며 외치던 그 외침 속에는 여전히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간절함이 외면하고 싶던 자신의 믿음을 바로 보게 한다. 진정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라는 스승의 말을 받아들이게 된다. 진정 세상도 세상을 바라보는 ‘나’도 공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스승은 찾는 이에게 다음과 같이 반복해서 말하며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눈을 떠라고 일러준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한때, 많은 이들이 이 마지막 부분을 신성시하며 만트라는 번역하는 게 아니기에 뜻을 생각하지 말고 반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상 최고의 신비하고 대단한 주문이니 주문 자체에 뭔가 대단한 힘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런데 분명 반야심경은 그런 거 없다고 말한다. 혹여라도 그들의 믿음처럼 그런 것이 있었으면 오랫동안 중국이나 한국의 수행자들은 다 헛일한 샘은 아닐까.

산스크리트어를 비슷한 한자 음으로 음역하고 그 한자음을 다시 한글 음으로 옮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는 정확한 발음이 아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गते गते पारगते पारसंगते बोधि स्वाहा이고 IAST에서 나타내는 음운은 gate gate pāragate pārasaṃgate bodhi svāhā이고 IPA에서 나타내는 음운은 ɡəteː ɡəteː paːɾəɡəteː paːɾəsəŋɡəte boːdʱɪ sʋaːɦaː이다. 분명 우리가 발음하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랑 비슷하기는 하다. 비슷하다는 것도 이 발음에 익숙한 한국인이 보기에 그렇다. 고대 인도인이 들으면 전혀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혹, 우리가 바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정 반대의 말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미국 식당에 가서 보니 나이프는 있는데 포크가 없어서 “포크 좀 갖다 주실레요? Could you give me a pork?”라고 말하면 돼지고기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Folk의 “F” 사운드를 바르게 발음하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이 자주 실수하듯 한글 음대로 “P” 사운드로 “포크”로 발음하면 나이프 옆 포크가 아니라 돼지고기가 된다.

나와 너가 점하나 차이지만 정반대의 말이 되는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한국말이 서툰 남자가 한국 여자분에게 “너를 좋아한다.”라고 고백하려 한다. 차마 만났을 때 말은 못 하고 전화를 걸어 용기 내어 말한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여자분이 왜 전화해서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는지 몰라 황당해서 “… 응… 그래서?”라 반문한다. 남자는 바로 뭔가 잘 못된 걸 직감하고 전화를 서둘러 끊고 머리를 쥐어 뜯는다.

한국말이 어설픈 외국인이 택시를 잡아타고 가는데 기사분이 이리 가면 되냐고 여러 번 묻길래 택시 기사에게 여러 번 “계속 직진해 주세요.”라고 했더니 택시 기사분이 화가 나 보였다 한다. 한국인 친구가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보니 “계소키 직진해요.”로 들린다. 한바탕 웃고 나서 외국인 친구에게 욕같이 들렸을 수 있겠다고 일러준다. 자칫 욕 같은 이 말에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택시 기사분이 성질 있는 분이셨으면 가만있지 않으셨을 거라고 덧붙인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라고 한들, 콜라를 모르는 조선시대 수행자가 “콜라콜라 코카콜라 팹시도콜라 모지 사바하”라고 한들 뭐가 다를까.

우스게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뼈 있는 말이다. 흘려들을 소리가 아니다. 여전히 “혹시나.. 그래도..”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만히 자신에게 어떤 믿음이 있는지 살펴보라.

아직도 “그래도, 혹시나”하면서 뭔가 얻을 것이 없을까 하며 바라는 찾는 이는 마지막 부분을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행이라 여긴다. 스승은 오늘도 자신의 노력만을 탓하며 뼈 깎는 수행을 이어가는 수행자들이 안타깝다. 그래서 침묵으로 충분할 가리킴이 길어진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주문도 설하게 된다. 이 또한 다 있는 그대로인 것을 스승은 잘 안다.

반야심경의 마지막 이 부분을 바로 이해하려면 수많은 수행에 관한 환상과 믿음을 내려놓고 ‘수행’의 본질을 바로 알아야 한다. 수행은 뭔가를 얻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진리를 찾기 위해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 피안(彼岸)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표현이다. 이것이 수행의 본질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5장 ‘길’에서 이 수행의 본질을 자세히 살펴본다. 정말 스승이 말하는 수행의 참뜻이 뭔지를 알아본다. 세상 가득한 온갖 수행에 깃든 수행자의 믿음을 들쳐본다. 이 믿음들을 바로 보고 내려놓아야지 반야심경의 마지막 부분을 바로 이해한다. 반야심경에서 일관되게 반복해서 말하는 스승의 가리킴을 오해하지 않는다.

수행의 본질을 바로 알고 스승이 일러주는 내용을 한번 들여다보자.

揭諦揭諦 波羅揭諦

아제아제 바라아제

신비한 주문을 번역하면 안 된다는 한때의 믿음을 뒤로한 채 요즘은 이 부분을 한글로 번역해서 알리는데, 한글 위키피디아에 나온 다음 번역이 일반적이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 무한한 깨달음을 이루자.”

그런데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gone, gone, everyone gone to the other shore, awakening, svaha.”

(일단 직역해보면 “건너갔다, 건너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 깨달음이여, 사바하”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가자 가자 넘어가자, 모두 넘어가서..”라는 한글 번역에는 정확히 반야심경에서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는 믿음이 가득하다. 신비한 주문을 열심히 외워서 깨달음을 얻자는 믿음이 넘쳐난다. 이 말은 “지금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지금은 깨달음이 없다는 말이다. 또 이 말은 “여기는 아니다.”라는 말이다. 여기는 벗어나야 할 삼사라다. 현세상을 부정하고 이데아를 꿈꾸는 플라톤의 철학이다. 괴로운 삶을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나온 번역이다. 반야심경의 전체 내용과 맞지 않는 번역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 나온 산스크리트어의 영어 번역을 보면 반야심경 전체 내용과 흐름을 같이 한다. “건너갔다, 건너갔다, 모두가 저 너머로 건너갔다.”라는 반야심경의 뜻을 잘 품고 있다. 공하다, 얻을 것이 없다, 갈 곳이 따로 없다고 말하는 반야심경이 가리키고자 하는 바다. ‘나’만 저 너머로 간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이미 도착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말한다.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무무명 역무무명진”에서부터 “일체고진실불허”까지의 내용을 요약한다.

아직 스승의 말이 명확히 이해가 안 되고 받아들이기 힘든 찾는 이는 이렇게 요약된 내용을 되풀이하면서 기다린다. 스승이 왜 이렇게 내용을 요약해서 되풀이하게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일단 되뇌기 쉽게 핵심을 요약한다. 이미 자세한 뜻은 길게 앞에서 설명했으니 찾는 이는 요약된 내용의 본 뜻을 알고 있다. 요약을 반복하면서 가리킴의 본 뜻을 계속해서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풀이하는 까닭은 앎의 본질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반복이라 할 수 있다. 반복하면 익숙해진다. 익숙하면 문득 “아하!” 한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들 앎이라고 말한다. 물론 단순한 반복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반복할 때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그 뜻에 자꾸자꾸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다. 이것이 만트라다. 이것이 살펴보기다.

책 5장 ‘길’에서 ‘살펴보기’ 글을 보면 이 앎의 본질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 글에서 설명하는 ‘살펴보기’가 다들 알고 있는 위빠사나 명상이다. 위빠사나(Vipassanā, विपश्यना, 觀, Vipaśyanā)와 만트라는 본질적으로 같다. 같은 수행이다. 관심을 가지고 반복해서 살펴보다 보면 앎이 일어난다. 궁극적 깨달음이 일어난다.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일어난다.

앎의 본질을 바로 알면 결국 다 이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수행 방법은 본질적으로 같다.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다르지만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위빠사나나 만트라를 하나의 형태나 특정한 수행 방법으로 국한하면 오해가 생긴다. 책 5장 ‘길’에서 수행에 담긴 다양한 오해를 살펴본다.

娑婆訶

사바하

사바하(薩婆訶, svāhā, Sanskrit: स्वाहा)는 산스크리트어로 어떤 주문을 말한 뒤 마무리하는 통상적인 말인데 여러 번역을 통해 나타나는 의미는 간절함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렇게 찾음의 본질과 수행의 본질을 살피며 스승이 반야심경을 통해서 찾는 이에게 무엇을 가리키려 하는지 그 의도를 담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반야심경을 요약해서 찾는 이가 반복하기 쉽게 만든 말이다. 반복으로 오랜 믿음이 씻겨나가고 스승의 가리킴에 가슴이 열리도록 하는 말이다. 그렇게 문득 앎이 일어나게 하는 주문이다.

모든 헛된 믿음을 내려놓고 다시 보면 참으로 신비하게 앎을 일으키는 주문이며 당신의 가슴을 환히 밝히는 주문이며 최상의 주문이며 따로 다른 대단한 비법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이것만 집중하면 되는 주문이다. 그래서 능히 모든 오해와 믿음의 어려움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특정한 문장이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 그렇다는 말이다. 실체가 그렇다. 그렇게 공하다. 이 공을 통해 관자재보살의 실체를 본다.

이 주문을 문장으로 말하면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이다. 반야심경을 통해서 석가모니가 사리자에게 말하는 내용을 요약한 이 문장이 책의 제목이다. 글에서 책을 언급할 때마다 반복해서 일컫는 책 제목은 사실 당신을 위한 주문이다.

이미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뭘 얻을 필요도 건너갈 필요도 없다. 이미 모두 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모두 있다. 이미 있는 그대로다. 중생에게는 없고 부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모른다고 또, 안다고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여기 지금 모두 있기 때문이다. 중생도 없고 부처도 따로 없다. 사물도 사물을 바라보는 ‘나’도 당신이 믿는 모든 다른 세상도, 극락도 지옥도, 모든 신들도, 브라흐마도 비슈누도 시바도, 정말 어떤 예외도 없이 모두 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삼세제불이 정확히 아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눈을 떠라. 이 사실이 관세음보살이다. 이 진리가 관세음보살이다. 그렇게 관세음보살이 드러난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다.

“있다. 있다. 모두 있다.

바로 지금 여기 모두 있음에 눈뜨게 하옵소서.”

반야심경

6장. 가리킴의 본질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다.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핵심이 되는 말씀

반야심경은 진리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하나의 가리킴이다.

摩訶般若波羅蜜多

마하반야바라밀다

마하는 “궁극의”라는 뜻이고 반야바라밀다는 본문의 내용처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가리키는 가리킴이다. 궁극의 진리는 모든 믿음을 걷어내면 드러나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는 그대로의 진리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다’를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번역한다.

심은 핵심이라는 뜻이다. 핵심만 추려서 요약했다는 말이다. 영어에서는 이 마음 심자를 보고 하트 수트라(Heart Sutra)로 번역한다. 이때도 우리의 심장처럼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경은 스승의 가리킴이다. 말로 전하는 가리킴이 경이다. 이 경의 뜻에 오해가 없어야 반야심경을 바로 이해한다.

가리킴의 본질은 이야기다. 진리가 아니다. 도구다. 이 사실을 바로 알아야 오해가 없다. 반야심경을 대하는 기본자세가 바로 선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의 4장 ‘가리킴’에서는 이런 가리킴의 본질을 깊이 살핀다. 가리킴의 본질을 깊이 살펴 스승의 가리킴에 오해가 없도록 한다. 가리킴의 본질은 쉽다. 특별한 의미가 전혀 없다. 산을 오를 때 방향 표지판이 무엇인지 어떻게 보는지 알려주는 것과 다름없다. 아무리 간단해도 처음 보는 아이에게 한 번은 알려줘야 한다. 이건 가지고 노는 장난감도 아니고 목적지를 표시하는 것도 아니며 누구를 매다는 물건도 아니며 신성하다 숭배할 대상도 아니고, 그저 화살표 모양이 가리키는 곳에 무엇이 있고 그 길의 방향을 가리키는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그렇게 알면 그만이다.

가리킴의 본질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오해가 적다. 가르침이 아니라 가리킴이다. 목적이 아니라 도구다. 진리가 아니라 일회용이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4장 가리킴에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은 진리를 핵심만 요약해서 간결하게 가리키는 가리킴이다. 진리가 아니다. 믿고 따르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학문이 아니다. 스승의 가리킴이다. 찾는 이가 직접 보라고 방향을 알려주는 방향 표지판이다. 석가모니가 사리자에게 저기 달이 있다고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반야심경도, 반야심경을 설명하는 이 글도,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도, 다른 모든 스승의 말씀들도 다 마찬가지다. 하나의 가리킴이다. 하나의 이야기다.

이 모두가 가리킴이다.

진리가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이야기일 뿐이다. 헛소리다.

책 ‘진리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 있다’, ‘있는 그대로’에서

반야심경의 해설이 많은 이의 가슴에 와닿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반야심경이라는 가리킴을 통해 당신이 찾아온 그 무엇에 눈을 뜨기 바란다.

7장.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나는 반야심경이 좋았다.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한 구절이 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찾음이 깊어질 때 이 한 구절의 뜻이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가슴 깊이 닿은 가리킴들이 존재 전체로 퍼질 때 뜬금없이 어릴 적 되뇌던 ‘관세음보살’의 의미가 확연해졌다. 그리고 곧 “나는 관세음보살이다.”라는 선언과 함께 찾음이 끝났다. 그렇게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가 일어났다. 그렇게 “도일체고액”했다.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가 환히 드러났다.

반야심경은 그렇게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의 사다나다.

나는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 나다.

있는 모두가 관세음보살이다.

부디 도움이 되길,

관음 올림.

질문은 네이버 카페 – 삿상 게시판에서 할 수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advaita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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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현대어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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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불교는 아니지만, 불교의 사상을 굉장히 좋아해요.

얼마전에, 반야심경을 읽기 쉽게 현대어로 쓴 풀이를 봤는데, 정말 좋더라구요..

여러분들도 꼭 읽어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딱딱하지 않게 풀이가 되어있어서 읽기 편하실거에요 XD

불교에 거부감이 드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종교강요나 그런말은 전혀없습니다 🙂

반야심경(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 위대한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고싶어?

누구라도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법의 힌트를 줄게.

좀 더 힘을 빼고 편안해지는거야

고통도 괴로움도 전부 별 거 아닌 환상이니까.

안심해.

이 세상은 허무한거야. 아픔도 슬픔도 처음부터 텅 비어 있던 거야.

이 세상은 변해가는거야.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일도 가능하지.

더러워질 때도 있고 안 좋은 일을 떠안게 될 때도 있고.

그렇다면 떠안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이 세상이 얼마나 별 게 아닌지 알겠어?

괴로움이든 병이든 그런거에 구애되지마.

보이는 것에 구애되지마.

들리는 거에 매달리지마.

맛이나 냄새가 다양한 것처럼 사람도 다양하잖아?

아무런 도움도 되지않아.

흔들리는 마음에 구애되면 안돼.

그게 “무”라는 녀석이지.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이 일어나겠지.

괴로운 일을 겪지 않을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것들은 거기에 놓고 가.

미래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

무리해서 비추어 보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안 보이는 그 자체를 즐기면 되잖아?

그게 “살고있다”는 느낌의 녀석이지.

올바르게 사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명랑하게 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보살로 살기 위한 노하우가 있어.

괴로워하며 살 필요 같은 건 없어. 즐겁게 사는 보살이 되는거야.

아무런 두려움도 알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만 말이야.

적당한 공포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착각은 하지마. 무정한 사람이 되라는 소리는 아니야.

꿈이나 공상이나 자비심을 잃지마.

그걸 할 수 있다면 열반은 어디에나 있어.

사는 방법은 어느것 하나 변하지 않아.

단지 받아들이는 방법이 변하는 것 뿐이지.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구.

이 반야를 기억해둬. 짤막한 말이야.

의미같은건 몰라도 돼.

사소한 것은 아무렴 어때?

괴로움이 작아진다면 그거면 됐잖아?

거짓말도, 터무니없는 말도 다 받아들이면 괴로움도 사라지지.

그런거야. 서론은 잊어버려도 돼.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둬.

내키면 한번 읊어봐. 마음속에서 읊어도 상관없어. 알겠어?

『읊어라. 마음은 사라지고 혼은 고요해지고 모든것은 여기에 있고, 모든 것을 초월한 자가 될 지어니』

『깨달음은 그 때 얻게 되겠지. 모든 것은 이 진언으로 성취되리 』

걱정하지마.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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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해석(설명)

경전 반야심경 해석(설명) 달빛남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https://youtu.be/cBOGl2b4Gzk https://youtu.be/-3SCR__uCFE 일반 개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의 중심이 되는 경전으로《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략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으로, 당나라 삼장법사인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이다. 260자로 되어 있다. ​ <<세부 설명은 다음과 같다.>> 《대반야바라밀다심경》(大般若波羅蜜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또는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산스크리트어: प्रज्ञापारमिताहृदयसूत्र, 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핵심적인 이치인 반야바라밀다를 간결하고 명징하게 요약한 불교 경전의 정수에 해당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프라즈냐파라미타 흐르다야 수트라(Prajñāpāramitā-hṛdaya-sūtra)로 한자어 명칭에서 ‘심(心)’은 마음[心]을 뜻하는 치타(citta)의 번역어가 아니라 핵심 · 정수(精髓) · 정요(精要) · 에센스 또는 참된 앎[正知]을 뜻하는 흐르다야(hṛdaya)의 번역어이다.[1]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제목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반야바라밀다 또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의 핵심 또는 정요(精要)를 간추려 담고있는 경전’이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로 시작되는데, 두 《인왕경》 즉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과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에서 고타마 붓다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이란 복인(伏忍) · 신인(信忍) · 순인(順忍) · 무생인(無生忍) · 적멸인(寂滅忍)의 5인(五忍)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5][6][7][8] 5인(五忍)은 보살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의 수행계위인 10신 · 10주 · 10행 · 10회향 · 10지 · 등각 · 묘각의 52위 가운데 최초의 10신을 제외한 나머지 42위 즉 42현성(四十二賢聖)을 인(忍) 즉 지혜, 그 중에서도 특히 무루혜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크게 다섯 그룹으로 나눈 것으로, 따라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10신 즉 청정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상위의 42위의 보살 수행계위를 직접 밟아가 최종적으로 적멸인(寂滅忍) 즉 묘각(妙覺)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9][10] 즉, 본래 갖추고 있는 위대한 지혜(prajñā)에 이르는(pāramitā) 것을 말한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본래 갖추고 있는 위대한 지혜에 이르는 열쇠[心: 핵심]를 설하고 있는 경전’을 뜻한다. ​ ​ 반야심경 원문 및 해석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타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가碍 無가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 依 般若波羅密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삼세제불 의 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한글 반야심경] 위대한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 관자재보살께서 깊은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을 행하실 때,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가 모두 텅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났다. 사리자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또한 그러하다. 사리자여. 이 모든 사물은 그 성질이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과 판단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 시각의 영역도 없고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또한 어리석음이 다함 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없어짐,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능히 온갖 괴로움을 없애주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해주니, 주문은 곧 이러하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저 언덕으로 온전히 가면, 깨달음을 이루리라 반야심경 해석 wwwlachel 2005.04.23 13:13 <본문>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위대한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 <주석> 마하(摩訶) 산스크리트(Sanskrit)어 마하(maha)의 음(音)역으로 크다, 많다를 뜻하는 말입니다. 반야(般若) 산스크리트(Sanskrit)어 프라즈냐(prajna)의 음(音)역으로 생명 내부의 움직임 속에서 절로 솟아나는 지혜. 법의 이치를 깨달은 최상의 지혜를 뜻하는 말입니다. 어쩌면 원초적인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바라밀다(波羅蜜多) 산스크리트(Sanskrit)어 파라미타(parammita)의 음(音)역으로 완성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파람과 이타를 따로 떼어서 해석하면(param + ita)가 되고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상태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두가지중에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본문의 뜻에 크게 위배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 심(心) 산스크리트(Sanskrit)어 흐리다야(hrdaya)의 의(意)역으로 심장 또는 핵심이라는 뜻이 됩니다. 경(經) 산스크리트(Sanskrit)어 수트라(sutra)의 의(意)역으로 성전 또는 경전이라는 뜻이 됩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리다야 수트라(prajna paramita hrdaya sutra)라고 하는데 반야심경의 끝부분에 프라즈냐 파라미타 흐리다얌 사마프탐(prajna paramita hrdayam samaptam)이라고 되어있는 부분에서 사마프탐을 수트라로 바꾸어서 그것을 이 경의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본문> 觀自在菩薩 行 深般若波羅密多 時 관자재보살 행 심반야바라밀다 시 관자재보살께서 깊은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을 행하실 때 <주석>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산스크리트(Sanskrit)어 아발로키데스바라(AvalokiteSvara)를 현장스님이 의(意)역한 것으로써 구마라집스님이 번역할때는 관세음보살이라고 번역 하였고, 현장스님은 관자재보살이라고 번역하였다.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은 볼관, 세상세, 소리음 자로 번역하였으며 세상의 소리를 관찰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보살의 자비로움을 나타낼 때 그렇게 표현하고, 관자재보살은 볼관, 스스로자, 있을재 자로 변역하였으며 이 세상의 고통을 자유롭게 관찰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보살의 지혜로움을 나타낼 때 그렇게 표현한다. 관자재(觀自在) 산스크리트(Sanskrit)어 아발로키타(Avalokita)와 이스바라(isvara)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아발로키타(Avalokita)는 관찰한다는 뜻으로서 볼관(觀) 자로 번역되었고, 이스바라(isvara)는 자유롭게 존재한다는 뜻으로서 스스로자(自) 자와 있을재(在) 자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관자재(觀自在)라는 뜻은 세상의 고통을 관찰하는 것이 자유롭다 라는 뜻이 됩니다. 보살(菩薩) 산스크리트(Sanskrit)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음(音)역한 것으로써 bodhi(보디)와 sattva(사트바)의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보디는 깨달음을 뜻하고 사트바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보디사트바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세상의 고통을 관찰하는 것이 자유로운 깨달은 사람 행(行) 한자 행할행(行) 자로 행하다, 행동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심(深) 한자 깊을심(深) 자로 깊다. 라는 뜻이 됩니다.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 쉽게 말해서 6바라밀 중에서 마지막인 지혜의 바라밀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 라고 말합니다. 시(時) 한자 때시(時) 자로 시간을 나타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본문>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舍利子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사리자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가 모두 텅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났다. 사리자여. <주석> 조견(照見) 한자 비출조(照) 자와 볼견(見) 자의 합성으로 비추어 본다 라는 뜻입니다. 오온(五蘊) 산스크리트(Sanskrit)어 판크스칸다스(Panck-Skandhas)를 의(意)역한 것으로써 그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가지의 구성요소를 말합니다. 그 다섯가지의 구성요소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다섯가지가 있습니다. 조금더 자세히 설명 하자면 오온은 색온(色蘊)루파스칸다(rupaskandha), 수온(受蘊)베다나스칸다(vedanaskandha), 상온(想蘊)삼나스칸다(sam-jnaskandha), 행온(行蘊)삼스카라스칸다(samskaraskandha), 식온(識蘊)비즈나나스칸다(vijnana-skandha) 이렇게 다섯가지의 구성요소를 오온이라고 합니다. ​ 개(皆) 한자 모두개(皆) 자로 모두다, 모든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공(空) 한자 와 빌공(空) 자로 로 모두 텅비어있다는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공자에 대한 해석에 있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공사상 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 도(度) 한자 법도도(度) 자로 법도, 제도, 건너가다, 버리다. 라는 뜻이 됩니다. ​ 일체(一切)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사르밤(Sarvam)을 의(意)역한 것으로써 모두, 모든것 을 뜻합니다. 또한 일체(一切)는 한자 한일(一)자와 끊을절(切) 자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절(一切)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이 글자는 일절(一切)이라고 읽으면 잘못 읽는 것이고, 일체(一切)라고 읽는 것이 바로 읽는 것입니다. 일체라고 읽을 때는 끊을절(切) 자로 읽지 않고 모두체(切) 자로 읽습니다. 일체라는 말은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써 일체의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술집 간판에 안주일절 이라고 한글로 써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글자 하나로 그 술집 주인이 얼마나 무식한지를 잘 알수 있습니다. 안주일체라고 쓰는 것이 바로 쓰는 것입니다. ​ 고액(苦厄) 한자 괴로울고(苦) 자와 재앙액(厄) 자로 괴로움과 재앙이라는 뜻의 말입니다. ​ 사리자(舍利子)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사리푸트라(Sariputra)를 음(音)역한 것으로써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서 지혜 제일의 사리불을 다른말로 사리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 <본문>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니,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또한 그러하다. 사리자여. ​ <주석> 공(空) 공사상(空思想)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 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교리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서로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존재이므로, 그 모양이나 형태, 또는 그 성질이 전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 스스로의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아(無我)라고 하며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예를 들어 책상을 보고 아이들에게 저것이 무었이냐 라고 묻는다면 아이들은 책상 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책상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 하는가 하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책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몇 개의 나무토막과, 못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금방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페인트칠을 했으므로 페인트도 포함시켜야 되겠지요. ​ 그러면 책상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 하는가. 그것은 책상이 아니고, 나무, 못, 페인트 가 얽혀서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책상이라는 형태를 이룰 뿐이지 근본적인 책상이라는 자아(自我)는 없다는 것입니다. ​ 책상을 이룬 나무 또한 그렇습니다. 그것은 햇빛과, 물과, 바람, 그리고 각종 미네랄과 섬유질이 적당한 비율로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얽혀 있을뿐 나무라는 자아(自我)는 존재하지 않는 것 입니다. ​ 못도 그렇습니다. 원래 못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철(Fe), 산소, 탄소, 인, 망간, 등등의 혼합물질이 서로 의존하면서 얽혀 있는 관계일 뿐입니다. 못이라는 자아(自我) 또한 없다는 것입니다. 페인트 또한 석유의 끈적한 찌끄러기와, 각종 색소로 이루어져 있을 뿐입니다. ​ 더욱 깊숙이 들어 갈수록 모든 것이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아(自我)가 없으면 그것이 무아(無我)이고 무아(無我)는 바로 공(空)인 것입니다. ​ 잔디밭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잔디밭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잔디밭에는 흙,곤충,잡초,잔디,돌맹이,지렁이,애벌레, 등등 많은 것이 서로 얽혀서 잔디밭을 이룰 뿐입니다. 잔디밭이라고 하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 색즉시공이라는 말은 인간을 이루는 물질적 육체적 요소인 인간의 몸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사람 또한 70퍼센트의 물과 단백질,섬유질,지방질,각종 미네랄과 원소 등등 굉장히 복잡한 사물들이 서로 얽혀져서 사람이라는 형태를 이루고 있을 뿐 우리가 사람이라고 인식할수 있는 진정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자아(自我)가 없다고 말할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자아(自我)가 없으면 그것이 무아(無我)이고 무아(無我)는 곧 공(空)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육체는 곧 공인 것입니다. ​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우주만물이 모두 공(空)인 것입니다. ​ 사람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 곧 반야심경이 해야 할일이며 반야심경의 핵심입니다. ​ 그러나 공(空)이라는 글자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허무하다, 허망하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아웅다웅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너무나 허망하고 허무하다는 뜻이 됩니다. 세상이 모두 이렇게 허무하고, 인생이 모두 허무한데 무엇하러 이토록 힘들게 사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면서 허무주의에 빠져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空)자를 허무하다로 해석하면 않됩니다. 이렇게 공(空)사상을 허무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악취공(惡取空)입니다. 악취공이라는 말은 공(空)사상 중에서 사악한 부분인 허무주의를 취해서 생긴 일종의 자기도취적인 병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금기시 하고 가장 꺼려하는 것이 바로 이 악취공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수행을 게을리 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어 득도를 한 것처럼 도사흉내를 내면서 돌아다니는 스님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악취공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불교 초창기 무렵의 인도에는 자연과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물질적 요소로서 지(地, prthivi 땅), 수(水, ap 물), 화(火, tejas 불), 풍(風, vayu 바람)의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러나 부처님의 시대로 오면서 자연과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는 색(色) 하나로 이루어졌다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자연과 인간을 구성하는 정신적인 요소로는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의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물질이나 육체보다는 정신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 최근까지만 해도 서양에서는 인간은 육체와 정신 이렇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3~4천년 전부터 육체를 (땅, 물, 불, 바람)의 4가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또한 정신을(느낌, 생각, 행동, 의식)의 4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색(色) 산스크리트(Sanskrit)어 루파(rupa)를 의(意)역한 것으로써 인간의 물질적인 부분인 형체를 말합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중에서 물질적인 부분인 몸, 육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 수(受) 산스크리트(Sanskrit)어 베다나(vedana)를 의(意)역한 것으로써 정신적인 부분인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보고 딱딱할 것 같다 부드러울 것 같다 식으로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 상(想)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즈나, 삼나(sam-jna)를 그 의(意)역한 것으로써 정신적인 부분인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어떤 사물을 보고 좋다 나쁘다를 생각으로 구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 행(行)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스카라(samskara)를 의(意)역한 것으로써 정신적인 부분인 작용하는 것과, 정신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물을 보고 저것을 내가 갖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 생각하는것 자체가 마음속으로 하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 식(識) 산스크리트(Sanskrit)어 비즈나나(vijnana)를 의(意)역한 것으로써 정신적인 부분인 식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옆에 누군가 있으면 그 사람을 의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 또한 식별이요 의식이라고 봅니다. ​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 위에서 설명한 공사상과 색, 수, 상, 행, 식을 참고하면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공불이색(空不異色)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 색즉시공(色卽是空) 색이 곧 공이요. ​ 공즉시색(空卽是色) 공이 곧 색이다. ​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수,상,행,식, 또한 모두 그러하니라. 사리자야. ​ 역부여시라는 말은 중국인들의 줄임말 방식으로, 수학적으로 말하면 인수분해를 해놓았다고 보면 된다. 그것을 줄이기 이전으로 모두 돌려놓으면 다음과 같이 돌려놓을 수 있다. ​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卽是空 空卽是受) 상불이공 공불이상 상즉시공 공즉시상(想不異空 空不異想 想卽是空 空卽是想) 행불이공 공불이행 행즉시공 공즉시행(行不異空 空不異行 行卽是空 空卽是行)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공 공즉시식(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 사리자(舍利子) 위의 모든 내용을 간단하게 인수분해를 하면 다음과 같이 줄일수 있습니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본문> 是 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 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 모든 사물은 그 성질이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 <주석> 제법(諸法) 일체의 모든 법이라고 해석하며 일반적인 사물을 나타내는 말로서 식물, 동물, 무생물을 비롯하여 여기에 인간도 포함된다. ​ 공상(空相) 공한 모양, 공한 형태 불생불멸(不生不滅)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 부증불감(不增不減)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다. ​ ​ <본문>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와 판단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생각도 없으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생각의 대상도 없다. ​ <주석> 시고(是故) 옳을시 자와 옛고자의 합성으로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등으로 해석할수 있다. ​ 공중무색(空中無色) 공(空) 가운데는 색(色)이 없다. 여기서 색(色)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수, 상, 행, 식 또한 없다. 여기서 수, 상, 행, 식 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눈, 귀, 코, 혀, 몸, 생각 이 없다. ​ ​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빛,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할 수 있는 대상 이 없다. ​ ​ <본문>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시각의 영역도 없고 의식의 영역까지도 없으며, 어리석음도 없고 또한 어리석음이 다함 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 <주석> 乃至(내지) a 내지(乃至) z 라고 하면 알파벳 abcdefghijklmnopqrstuvwxyz 를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간단하게 A~Z 라고 표현할수 있다. ​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이 단어를 원래대로 풀어놓으면 눈의 경계도 없고, 귀의 경계도 없고, 코의 경계도 없고, 혀의 경계도 없고, 몸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도 없다. 라고 풀어 놓아야 합니다. 그것을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그러니까 눈의 경계도 없고 내지 의식의 경계도 없다. 라고 간단하게 인수분해 하여서 짧게 표현한 것입니다. ​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이 단어 또한 원래대로 풀어놓으면 無明(무명)도 없고 無明(무명)의 다함도 없다, 行(행)도 없고, 行(행)의 다함도 없다. 識(식)도 없고, 識(식)의 다함도 없다. 名色(명색)도 없고 名色(명색)의 다함도 없다. 六處(육처)도 없고 六處(육처)의 다함도 없다. 觸(촉)도 없고 觸(촉)의 다함도 없다. 受(수)도 없고 受(수)의 다함도 없다. 愛(애)도 없고 愛(애)의 다함도 없다. 取(취)도 없고 取(취)의 다함도 없다. 有(유)도 없고, 有(유)의 다함도 없다. 生(생)도 없고 生(생)의 다함도 없다. 老死(노사)도 없고 老死(노사)의 다함도 없다. 라고 풀어놓아야 합니다. 그것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그러니까 무명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없다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의 다함도 없다 라고 간단하게 인수분해 하여서 짧게 표현한 것입니다. ​ 이것은 부처님의 12연기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12연기법이란 12가지의 인연을 말합니다. 연기법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이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인연이 되어 저것이 있다.’ 라는 식으로 인연이 되는 연결고리를 12연기법 이라고 합니다. 12연기법에는 無明(무명), 行(행), 識(식), 名色(명색), 六處(육처), 觸(촉), 受(수), 愛(애), 取(취), 有(유), 生(생), 老死(노사) 의 12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 산스크리트(Sanskrit)어 드바-다상가-프라티티아-사무트파다(dva-dasa-anga-pratityasamutpada)의 의역입니다. ​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에 대한 설명 ​ 무명(無名, avidya):[밝지 않음.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을 때 눈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듯이, 사람의 마음 또한 밝지 않아서 어떤 그릇된 생각을 하고도 그것이 옳은 생각이라고 판단하게 되는데 그런것들을 통 털어서 무명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불교에서는 본다. 불교속담에 무명의 소치, 무지의 소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 여기서의 무명을 두고 하는 말 입니다.] ​ 행(行, samskara):[무명에 의해 그릇된 것을 옳은 것 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발생하게 되고, 그렇게 발생한 대상을 실재화, 구체화 하려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행 이라고 합니다.] ​ 식(識, vijnana):[행에 의해 실재화, 구체화 된 대상이 생성되면 그 대상에 대해 무의식적으로나 또는 의식적으로 분별하고, 식별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식 이라고 합니다.] ​ 명색(名色, nam-rupa) :[식에 의해 어떤 대상을 분별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인식에 의해 그것이 물질적 존재인지 비물질적존재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명색이라고 합니다.] ​ 육처(六處, sad-ayatana) :[명색에 의해 어떤 대상을 물질적 존재인지 비물질적 존재인지 판단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눈,귀,코,혀,몸,뜻에 의해 새롭게 그 대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교 에서는 육처라고 합니다. 육처를 다른 말로 육근 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물을 대할 때, 눈,귀,코,혀,몸,뜻에 의해서 그 사물을 판단하게 되는데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어떤 사물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부터는 인간이 내가 뭔가를 보고,듣고,냄새맡고,맛보고,만져보고,생각해 볼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전까지의 단계는 인간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발생하는 것 들입니다.] ​ 촉(燭, samsparsa):[육처에 의해서 그 사물을 인식하게 되면 색(色)·성(聲)·향(香)·미(味)·촉(燭)·법(法) 이 발생하는데 그것을 해석하면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지각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보고,듣고,냄새맡고,맛보고,만져보고,생각해 볼수 있는 것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촉 이라고 합니다. 모든 중생은 육처(눈,귀,코,혀,몸,뜻)로 인식하게 되면 반드시 촉(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촉이란 접촉을 말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접촉입니다.] ​ 수(受, vedana):[촉에 의해서 어떤 사물의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 이 발생하게 되어 그것을 느끼게 되면 그 대상에 대한 苦(괴로움), 樂(즐거움), 不苦不樂(괴롭지도않고 즐겁지도 않음)의 세가지 중에서 한 가지 이상의 느낌이나 감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수 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인식 할수 있는 모든 대상에는 언제나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3가지 감정중에 한가지 이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 애(愛, trsna):[수에 의해서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3가지 감정중에 어느 한가지의 감정이 발생하게 되면, 모든 중생들은 그 세가지 감정중에 즐거움을 줄수 있는 대상만을 끝없는 갈증같은 욕심으로 갈애(渴愛)하게 되고 그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 즐거움을 줄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즐거움을 줄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 부울수도 있습니다. 그것 을 불교에서는 애 라고 합니다. 여기서 애는 자비와 같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으로서의 사랑입니다.] ​ 취(取, upadana):[애에 의하여 그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쏟아 부었을때 그 대상이 자신에게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추구된 즐거움의 대상을 자기가 소유하기 위하여 어떤일을 하게 됩니다. 다른말로 그것을 취득하여 병합하는 작용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취 라고 합니다.] ​ 유(有, bhava):[취에 의해서 즐거움의 대상을 취하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중생은 그 소유하는 작업을 하게 된 대상을 결국 자신이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유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유 라는 글짜에 포함된 뜻은 있다(be), 된다(become)의 두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이 어떤 물질이면 소유하게 되면 있다, 없다 중에 있다가 되겠지만 그 대상이 어떤 물질이 아니고 생각이나 느낌라면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된다, 안된다 중에 된다가 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하는 존재(存在) 그 자체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형성 된 것입니다. ​ 생(生, jati):[유에 의해서 그것을 있다, 또는 된다로 소유하게 되면 그 사물이나 생각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생이란 단어는 모든 존재의 출생, 태어남을 뜻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생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이란,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갑자기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것도 아니고 없는것도 아닌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 생각 자체만으로도 죽지 않겠다는 생각을 태어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 노사(老死, jara-marana) :[생에 의해서 그 대상이 태어나게 되면 그대상이 그 무었이 더라도 결국 늙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노사라고 합니다. 이 노사라는 것은 단순하 게 사람의 육체가 늙고 죽는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이 태어나고, 또 늙고 죽는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생각만으로도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발생한 괴로움을 불교에서는 괴로움이 태어났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조차도 그렇게 태어난 괴로움이기 때문에 반드시 늙고 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이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것 그 자체도 불교에서는 태어났다가 늙고 죽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 ​ ​ 여기까지가 12연기법에 대한 설명의 끝입니다. ​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라는 말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이 엄청난 12연기법이 이라는 것 조차 반야심경에서는 모두 없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틀렸다고 부정하는 경전입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반야심경, 알고 보면 반야심경은 정말로 무서운 경전 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부처님이 깨달으신 12연기법을 ‘없다.’ 라고 말하는 반야심경의 내용대로라면 어쩌면 그것을 깨닫고 설파하신 부처님 자체를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본문>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 故 菩提薩陀 依 般若波羅密多 故 心無罣碍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 반야바라밀다 고 심무가애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없어짐,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 ​ <주석> ​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고집멸도 라는 말은 고집멸도가 없다는 뜻으로 이 말은 부처님이 설하신 불교의 사성제 또한 전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파하신 사성제에 대한 전면 부정을 뜻합니다. ​ 사성제(四聖諦) 산스크리트(Sanskrit)어 카투라-아르야-사티야(catur-arya-satya)를 그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괴로움(苦), 괴로움의 모임인 집(集), 괴로움의 사라짐인 멸(滅), 괴로움의 사라짐을 위한 길인 도(道) 이렇게 네 가지 있으니 그것이 곧 사성제(四聖諦)이다 ​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아는 것도 없고, 또 얻은것도 없다. 바꿔말해서 지혜도 없고, 얻은것도 없다. ​ 이무소득고(以無所得고故) 그러므로 써 아무런 소득이 없다, 얻은 것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 보리살타(菩提薩陀) 산스크리트(Sanskrit)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소리나는 대로 번역하였는데 그것이 보리살타이다. 보리살타라는 단어는 bodhi(보디;깨달음)와 sattva(사트바;사람)가 합쳐진 글짜로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본래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하기 이전에 보리살타였다고 한다. 그것을 줄여서 菩薩(보살)이라고 부른다. ​ 의(依) 의지하다. 의지하여. ​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 대 지혜의 바라밀, 참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육바라밀 중에서 지혜의 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글의 첫머리에 이미 설명했었다. ​ 심무가애(心無罣碍) 마음 심(心), 없을 무(無), 거리낄 괘(罣)(거리낄 가), 거리낄 애(碍)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 ​ ​ ​ <본문> 無罣碍故 無有空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 般若波羅密多 故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 반야바라밀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 <주석> ​ ​ 주의 거리낄괘(罣) 자를 작은물고기주(罜)자와 혼동하기 쉽습니다. 분명히 다른 글자입니다. ​ 무가애고(無罣碍故) 없을무, 거릴낄괘 거리낄애, 옛고, 거리낌이 없으므로 라고 해석한다. ​ 무유공포(無有空怖) 없을무, 있을유, 와 공포의 합성어로 공포가 있을수 없다. 라고 해석한다. ​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멀원, 이별할리, 뒤집어질 전, 뒤집어질 도, 꿈몽, 생각상, 원리전도몽상 이란 뒤집어진 꿈같은 생각을 멀리 이별하라는 뜻이다. ​ 자동차가 옆으로 누운 것을 보고 전도되었다고 말하는데 그 말이 반야심경에서 나온 말입니다. 완전히 뒤집어진 것은 전복이라고 합니다. ​ 구경열반(究竟涅槃) 끝낼구, 다할경, 자와 열반의 합성어로 마침내 열반에 이른다. 라고 해석한다. 끝낼 구(究)자는 마침내로 해석되었다. ​ 삼세제불(三世諸佛)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들 삼세(三世)란 과거, 현재, 미래 이 세가지를 삼세라고 한다. 삼세제불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 이라는 뜻이다. ​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처의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의 지혜(최상의 지혜)를 뜻한다. 산스크리트(Sanskrit)어 아누타라(anuttar; 무상(더할나위없이 높은)), 삼약(samyak; 정등(가장 올바른, 완전무결한)), 삼보디(sambodhi; 정각(궁극적인 깨달음))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音譯)한 것이다. 그것을 그 뜻에 맞게 의역(意譯)하여 번역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으로 번역됩니다. 지혜의 완성은 심오하고 가장 훌륭한 가르침 입니다. ​ ​ <본문>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능히 온갖 괴로움을 없애주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 <주석> 고지(故知) 그러므로 알아라. ​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 지혜의 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글 첫머리에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 시대신주(是大神呪) 크게 신비한 주문입니다. ​ 시대명주(是大明呪) 크게 밝은 주문입니다. ​ 시무상주(是無上呪) 위가 없는 주문입니다.(더할나위 없니 높은 주문입니다.) ​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어느것에도 비교할수 없는 주문입니다. 등등(等等)이라는 말은 등급을 메긴다는 뜻이 됩니다. 등급을 메길수 없는 주문이라는 뜻입니다. ​ 능제일체고(能除 一切苦) 능할능, 제거할제, 와 일체, 그리고 괴로울 고 자의 합성어 입니다.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 진실불허(眞實不虛) 참진, 열매실, 아닐줄, 허망할허,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 ​ <본문> 故說 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訶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해주니, 주문은 곧 이러하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 ​ <주석> 고설(故說) 그러므로 말하노라 ​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密多呪)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 즉설주왈(卽說呪曰) 주문은 곧 이러하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訶) 가테 가테 바라가테 바라삼 가테 보디 스바하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건너 가자 건너가자 넘어서 건너가자 모든 것을 넘어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자 그 곳에서 깨달음이 얻으리라 ​ 반야심경은 부정을 통해서 진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소승불교(근본불교)에서는 중생의 입장에서 부처님이 되기 위하여 부처님의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하느라,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 등이 있다고 긍정적인 관점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표경전인(반야심경)에서는 반대로 이미 완벽하게 깨달으신 관세음보살(관자재보살)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중생이라 할 것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그 방법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까지 합쳐서 총 270자에 불과한 반야심경에는 ‘아니 불(不)’자가 9자, ‘없을 무(無)’자가 21자, ‘비어있을 공(空)’자가 7자나 쓰였습니다. 반야심경의 본문은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긍정 표현은 거의 없고, “무엇은 무엇이 아니고, 무엇은 물론, 무엇무엇 까지도 없다.” 란 부정 표현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 ​ 108번뇌(百八煩惱) ​ (12처, 6근, 6경) 1 눈[眼] 형상[色] 2 귀[耳] 소리[聲] 3 코[鼻] 향기[香] 4 혀[舌] 맛 [味] 5 몸[身] 감촉[觸] 6 뜻[意] 법 [法] ​ 1 선하고 좋음(好) 2 모질고 악함(惡) 3 선하지도않고 악하지도 않음(平等) 4 괴로움 苦 5 즐거움 樂 6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음 捨(不苦不樂) ​ 1 과거 2 현재 3 미래 ​ (6X6)X3=108 그래서 108번뇌라고 합니다. ​ 육바라밀(六波羅蜜) 1.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는 산스크리트(Sanskrit)어 다나-파라미타(dana-paramita)의 의역으로 자기 소유물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 2.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사라-파라미타(sala-paramita)의 의역으로 계율을 잘 지니는 것을 뜻한다. 국가에는 법률이 있고 사회에는 도덕이 있다. ​ 3.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크산티-파라미타(ksanti-paramita)의 의역으로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이다. 인간은 조금만 욕된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곧 좌절되기 쉽다. ​ 4.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비르야-파라미타(virya-paramita)의 의역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 5.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디야나-파라미타(dhyana-paramita)의 의역으로 신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인간 존재에 대한 실상을 밝혀 인간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무지를 타파 하려는 종교적 특성으로 산란한 마음을 버리고 고요히 사색을 해야 한다. ​ 6.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산크리스트어 쁘라즈냐-파라미타(prajna-paramita)의 의역으로 최상의 지혜를 말합니다. 육바라밀에서의 반야바라밀은 보시에서 선정에 이르는 다섯 바라밀의 주도자이며 그들의 성립 기반이 되는 바라밀이라 할수 있다. ​ 팔정도(八正道) 1.정견(正見)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드르스티(samyak-drsti)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 2.정사유(正思惟)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삼카르파(samyak-samkalpa)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사유한다 또는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3.정어(正語)는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바크(samyak-vac)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네가지 선한 구업(口業)업을 뜻합니다. ​ 4.정업(正業)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카르마-안타(samyak-karma-anta)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일한다는 뜻입니다. 세가지 선한 신업(身業)을 뜻합니다. ​ 5.정명(正命)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아지바(samyak-ajiva)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생활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적당한 의식주를 구할 것이 권해지고 있다. ​ 6.정정진(正精進)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브야야마(samyak-vyayama)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 권해지고 있다. ​ 7.정념(正念)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스-무르티(samyak-smrti)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로써 바르게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 8.정정(正定)은 산스크리트(Sanskrit)어 삼약-사마디(samyak-samadhi)를 의미에 맞게 의역한 것으로써 바르게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라는 뜻으로써 삼매(三昧)라는 음역(音譯)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 ​ 십이처(十二處)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말한다. 십이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눈으로 물체를 느끼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 의식으로 지각하는 일을 말한다. ​ 육근(六根)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로서 6가지의 주관적인 인식작용 즉, 눈, 귀, 코, 혀, 몸과 생각을 말한다. ​ ​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으로서 6가지의 객관적인 인식작용 즉, 물질, 소리, 향기, 맛, 촉감과 법을 말한다. ​ ​ 삼법인(三法印)설인 모든 행은 무상하고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법은 무아요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은 적정하다열반적정(涅槃寂靜) ​ 석가모니부처님은 실존인물이라서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그 외의 다른 부처님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 존재를 의심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이라는 분들의 속성을 잘 이해하면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부처님이란 영원하고도 보편타당한 최고의 진리를 깨달은 분이며, 석가모니부처님도 그와 같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그 진리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시든 계시지 않든 간에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진리 자체가 부처님 이므로 그러한 여러 부처님들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 진리가 곧 부처님 이니라.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출처 : 반야심경 당나라 : 삼장법사(글)해석 : 김상열 ————————— 반야심경에 대한 나의 깨달음 커블랙홀(yssyss77) 2014.04.14 15:56 ■반야심경의 번역 <청담>스님의 설법을 묶어 만든책인 (해설 반야심경)-보성문화사-1996 에 다음과 같은 글이 함께 실려 있다. [범본 원서 2본과 그 음사본 1본 및 번역본 8본을 구하여 다 소개하고 비교 연구하여 반야심경의 뜻을 바르고 철저하게 파악할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범본 2본 /음사본 1본 ■한역본 8본 1.마하반야바라밀다대명주-요진천축삼장 구마라습 역-약본 2.반야바라밀다심경-당삼장법사 현장봉소 역-약본 3.반야바라밀다심경-엄빈국삼장 반야공이언등 역-광역본 4.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 마갈다국삼장사문법월중 역-광역본 5.반야바라밀다심경-동천축구사문 법월삼장 역-광역본 6.불설 반야바라밀다심경-당삼장법사 의정 역-약본 7.반야바라밀다심경-상도대흥선사 삼장사문 지혜륜봉 역-광역본 8.불설성불모 반야바라밀다심경-송서천역삼장조산대부시광록경 전법대사자신시호봉소 역-광역본 ◆한역본 8본의 구분 ▶광역분-경의 전체 구분을 3부분으로 하는데 서론을 불가의 구분으로 <서분序分> 본론을 <정종분正宗分> 결론을 <유통분>이라 한다. <광역본>은 법이 설하여질 때의 배경을 포함한 <서분/정종분/유통분> 등 모든 격식을 갖추어 법설을 하신 것을 말하고 위의 번역본중 3.4.5.7.8은 광역본이며 ▶약본-경의 본론인 <정종분>만으로 경經을 이룬 것으로 위의 번역보눙 1.2.6의 번역본을 말한다. ◆한역본 8본의 비교 *반야심경의 중요 부분인 오온의 본체 부분 번역으로 <범본>에는 <오온자성개공>으로 되어 있으나 8본의 한역본에는 1.구마라습 역-오음공 2.현장 역 -오온개공 3.이언삼장-오온성공 4.마갈제국 법월삼장-오온자성개공 5.동천축국 법월삼장-오온자성개공 6.의정-오온개공 7.지혜륜삼장-오온자재개공 8.시호삼장-오온자성개공 ▶1.오음공/3.오온성공/7.오온자재개공은 <범본>의 <오온자성개공>과 같은 맥락이나 2.현장 역/6.의정 역 에는 <자성>이 누락되어 있다. ▶<반야심경>(범본) 끝 부분에 《심경범본 자수字數 사백사십<440> 여자야》라고 기록 되어 있다. 현재 신역으로 이름한 당 현장 역에는 총 44글자가 누락 되어 있습니다. ★당 현장 역에서 누락된 부분이 요행히 <광역본>의 (마갈다국 법월 삼장본)과(동천축국 법월삼장본)편에 원본인 <산스크리트>본을 충실히 번역한 내용이 있어 <약본>과 연결하면 <빨간색의 글자가 누락분> 입니다. 1.제호 반야바라밀다 심경- ​ 2.서론=서분 ​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 <自性>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자성>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께서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삼매를 행하실때 음의세계의 무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모이는 5 단계인 색수상행식 각각의 단계의 <개체의 성들이> 모두가 공임을 훤히 비추어보고 모든 괴로움과 액난을 건너나니 3.본론=정종분 ㄱ)인因 舍利子 <諸菩薩摩하薩 應如是覺 色性是空 空性是色 > 사리자 <제보살마하살 응여시각 색성시공 공성시색> ​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識性是空 空性是識 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 <식성시공 공성시식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공 공즉시식 > 사리자여 <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와 같이 깨달아라 암흑물질의 성이 공이며 공의성이 암흑물질이니>암흑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암흑물질과 다르지 않으니 암흑물질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암흑물질로써 서로 받아 들이는 과정과 색깔 모양이 결정되는 과정과 삼합을 하는 과정과 알음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로써 <알음의 성이 공이며 공의 성이 알음이니 알음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알음과 다르지 않으니 알음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알음 이니라> ㄴ)연緣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불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執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사리자여 이전체적인 법공의 모양은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워 지거나 깨끗해 지는 것 도 아니며,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라. 이런 연고로 법성의 진공 가운데는 암흑물질이 없으며 서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색깔 모양이 결정되는 과정과 삼합을 하는 과정과 알음의 과정이 없으며 눈,,귀,코,혀,몸,뜻도 없으니 빛,소라,향내,맛,,닿음,기억도 없으며 볼 수 있는 주위가 없으니 생각할 범위도 없으며 밝지 못한 씨종자가 없으니 밝지 못한 씨종자가 다함 또한 없으며 늙고 죽는 것이 없으니 늙고 죽는 것이 다함 또한 없느니라. 괴로움과 집착과 사라져 없어짐과 다스릴 길도 없으며 슬기가 없으므로 또한 얻을 것이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연고로써 ㄷ)과果 ​ 菩提薩타 依般若波羅密多故 心無가碍 無가碍 故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것에 의지하는 연고로 아무걸림이 없는 마음이 되며 아무 걸림이 없는 연고로 두려움은 있을 수가 없으며 뒤바뀐 꿈의 생각을 멀리 떠나게 되니 궁극에는 열반에 이르게 되느니라 ㄹ)보報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뇩多羅三막三菩提 故知 삼세제불의 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뇨다라삼먁삼보리 고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것에 의지하는 연고로가장 높고도 바르며 넓은 평등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니라 4)결론=유통분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密多呪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면 마를 항복 시키는 힘을 갖게 되며 우주를 밝게 관찰하는 힘을 갖게 되며 우주 법계를 두루 비추는 힘을 갖게 되며, 우주 법계에 삼신으로 나타나는 힘을 갖게 되니 모든 괴로움을 능히 소멸할 수 있으며 진실되어 허망하지 아니하므로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주문을 설하노라 5)비밀주 卽說呪曰 즉설주왈 帝阿帝 阿波羅阿帝 波羅乘阿帝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곧 주문을 일러 주노라 가자 가자 천궁으로 들어가자 천궁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깨달음이여 스스로 이루기를 ★★간략 해설 ▶반야심경을 설한 시점 화신의 석가모니 설법구분 1. 화엄시-최초 3.7일->화엄경을 설하자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2.아함시-12년 3.방등시-8년 4.반야시-21년->소품반야=8.000송 대품반야=6.000송 5.법화열반시-8년 [반야심경]은 반야부에 속한 경이 아니라 [법화삼부경]으로 알려진 [무량의경][묘법연화경][관보현보살행법경]을 설하기 직전 설한 경으로 법화 사부경에 속하는 경으로 입법계에 들어가는 보살도 입문 경인 것 입니다. 1. 제호의 해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로 prajna/ 팔리어로 pawwa라고 하며 파야/반라야/발라/지양이라고 음역하며 혜慧,지혜智慧,명明이라고 번역 한다. 그러나 범어의 야나若那가 지智에 해당 되므로 지,혜,명을 갖춘말이 <반야>이다. 반야를 파자하면 <돌릴반>에 야<초두머리>+右=풀이 오른족으로 눕는다> 반야에서 축은 般이며 慧가되고 야는 범어의 야나가 되니 智가 된다. 智는 개체의 무명을 이름하며 <오온의 識이 삼합> 이후의 <오양=5靈>인 다섯 기초원소(중성자,양전자,양자,전자,중간자)중 양자를 이름 한다 智慧는 性을 말함이며 性은 五陽인 5가지의 靈의 집합으로 (게놈프로젝트>에서 이야기하는 24염기서열로 이름한 양자靈24개와 <안이비설신의>를 이루는 전자靈6개가 하나를 이룬 덩어리로써 性의 30궁이라하며,여래장 사상에서 이야기하는 [성명정性命精]으로 <마음의 근본 뿌리>이며 이를 <영혼>으로 이름 합니다. 이중 양자영6개와 전자영6개가 음양짝을 한것을 영의 몸으로서 靈身이라 한다. 이 영신이 6도 윤회의 를 쥐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부처님의 참된 나눔인 삼진10과 하나되어 40×1.000=40.000개의 유전자가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智慧明은 <견성성불>을 이룰때를 의미 하며 [지혜의 완성]을 뜻하는 말이다. ▶바라밀다 波羅蜜多는 범어로 paramita 팔리어로 parmi라 하며 바라밀,바라미타로 음역하며 도피안, 도무극,사구경으로 번역한다. 이 세가지를 합한 말이 <불국토>로써 실사인 <천궁天宮=은하성단>을 의미 하며 6도윤회의 길 중 천인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국토인 천궁=은하성단인 천궁으로의 도달 혹은 들어가는> 의 뜻을 지닌다. ▶심心=性 마음을 心이라 한다. 마음의 근본뿌리이며 실체를 성의 30궁이라 한다. 이를 <다르마의 구름>이라고도 한다. ▶경經 경은 범어로 sutro 팔리어로 sutta 음역하면 수다라,수타라 라고하며 계경,정경,관경으로 번역 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여 제호를 정리하면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마음을 다스리는 경> 2.서론=서분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 <自性>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자성>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며 / (행심)은 <광역본>인 (마갈다국 법월삼장이나 동천축국 법월삼장>본을 참고할때 -관자재보살의 行-으로써 [혜광삼매]의 행을 지칭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때문에 深 역시 깊다,깊은으로 해석 되기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삼매에서>라고 해석 할 수 잇는 것이다. 바라밀다시- 천궁에 들어갈때 조견오온 자성개공-조견은 환희 비추어본다. 개공은 모두가 공이라는 뜻이다. ■ 오온五蘊이란? 오음五陰이라고도 한다. 이는 오양五陽이 오온의 다음 단계 로서의 상대성을 갖기 때문 이기도 하다. 별들을 만들 수 있는 적멸한 경계에 6뿌리 진공이 생명력이 없는 암흑물질을 머금으면서 시작 되는 것 입니다. 오온五蘊의 온을 불교사전에 음陰,중衆,취聚로 번역하며 이 셋이 모여 하나가 된다는 뜻말이 온蘊이라는 뜻 입니다. 이 뜻은 양의 세계인 눈으로 보이는 현상세계의 상대적인 경계인 눈으로 보이지 않는 음陰 세계를 뜻하는 말이며 음 중 취를 종합하면 ★<보이지 않는 음의 세계에서 무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라는 뜻말을 가진 것이 온蘊 입니다. 따라서 오온은 음의세계에서 무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모이는 다섯 단계를 말하며 이를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이라하는 것 이며 반야의 해설을 근거로 할때 오온의 색의 단계부터 [반야공]이라 할 수 있으며 각각의 단계를 보면 1.색色-빛의알갱이인 6뿌리 진공空과 생명력이 없는 암흑물이 음양짝을 한 상태의 단계(◐) 2.수受-생명력이 없는 암흑물질이 생명력을 얻게되어 이를 받아들이는 단계(◑) 3.상相-상은 형상을 말하며 -모양과 모양이 가지는 능력-이라는 뜻말을 가지고 있어 암흑물질이 생명력을 갖고 자리한후 색깔(COLOR)로 나타남(=모양)과 동시에 분별력(모양이 가 지는 능력)을 갖게 되는 단계(◎) 4.행行-생명이 없는 암흑물질이 생명력과 Color를 띠고 분별력을 갖게되어(즉 생명력이 없던 암흑물질이 생명력과 모양과 모양이 가지는 능력을 갖게 됨을 말한다) 이들이 능력을 극대화하기위해 셋이 모여 하나가 되는 과정(삼합)을 행의 단계로 이름한 것이며(◎+◎+◎) 5.식識-행의 단계를 거쳐 셋이 모여 하나를 이룬 단계 입니다(⊙) 식識이 <현대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소립자 세계>에서의 <퀘크>이며 <글루볼>이<공空>이다. 순수 우리말에서 (식識=알음)(공空=알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오온은 생명력 없는 암흑물질이 완벽한 화육 조건을 갖춘 빛의 알갱이인 진공眞空 과 하나되어 진화하는 다섯 단계를 설명한 말씀 입니다. 오온의 흐름이 12연기이며 이는 모든 사물의 근원이 오온이라는 뜻과 같다.따라서 오온의 식을 일체종자식이라 한다. 이러한 식은 현대과학의 소립자 세계의 물리학 용어인[퀘크종류=암흑물질 15개]가 화육의 조건을 완벽히 갖춘 글루볼인 진공의 주머니 속에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오온의 식의 다음 단계가 [퀘크종류15]이 서로가 색깔과 모양이 비슷한 균형을 가진 것 끼리 셋이 하나되어 글루볼인 공과 다섯으로 모습을 들어내었을 때를 오양으로 이름 합니다. 이 오양이 다섯 기초원소로써 [중성자,양전자,양자,전자,중간자]인 것이며 만물을 잉태시키는 근본인 것 입니다. ■자성自性 -자신의 성/스스로의 성-이라 풀이하며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자신의 성인 스스로의 성을 말하는 것으로 만물<각각의 개체의 성>을 말씀 하시는 것 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오온>과 <자성> 두 용어만 확실히 이해하게 되면 심경 전체의 뜻 80%를 이해하게 됩니다. ■성性 ▶사전에 나오는 뜻 =①성품 ②목숨 ③성별 ④마음 ▶파자=심방변+生 심방에는 좌심방 우심방이 있으며 좌심방은 허파로부터 피를 받는 심장이며 우심방은 대정맥으로 부터 피를 받는 심장을 이름한다. 이로써 심장은 몸속의 탄소를 산소로 교체를 해주므로 육신을 살아 있게 만든다. 生 의뜻 ①낳을 ②살,삶 ③일어날 ④자랄⑤어조사 살아 있는 심장/심장이 살아 있다./살아있는 마음 /마음이 살아 있다. ▶경전마다 셀 수 없이 나오는 성性을 성품으로만 해설하게 되므로 이해가 안될때가 너무 많아서 ,성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품品이 있고 질質이 있고 실체가 있어야 [견성]있고 [성불]이 있는데 실체가 없는 뜬구름을 가지고 씨름하는 느낌을 지을 수 없는 것이 사실 입니다. 윤회도 마차가지고요. ▶최근 캐나다의 한국일보 2014.3.28 신문기사를 요약 소개하면 [생명체는 우주에서 왔고 최대 걸작은 두뇌 이다] 토론토대 문재식 교수가 발명한 특수 망원경을 통해 [생명은 지구에서 우연히 태어나 진화 했다]는 찰스다윈의 진화론은 20세기 후반까지 있었으나 그러나 전자 현미경이 등장하고 생명의 열쇠인 DNA를 수천만배 확대할 수 있게 되자 다윈의 진화론은 종말을 고해야 했다. 특수망원경으로 30억년이상 진화하지 않은 채 살아온 원시 [단세포]의 DNA를 분석해보니 그안에 염기가 800만개나 나왔다.이는 대도시의 전화번호부 5권의 분량 이다. 이러한 크기가 자연스럽게 우연히 생성되었을까 이에 따라 [과학자들은 생명체는 외계에서 유입된 DNA로부터 진화 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40억년전 우주에서 형성되어 지구에 스며든 DNA가 진화를 통해 지금과 같은 고등동물과 식물이 만들어 졌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그러나 두뇌는 이것을 훌쩍 뛰어 넘는다. 인간의 뇌는 250만년 이전에는 600g 에서 250만년 1Kg으로 20만년전부터 는 1.4Kg으로 커지며 진화했다. 정리하면 138억년전 탄생한 우주는 계속된 초신성의 폭발로 생명의 기초원소인 DNA를 만들어 우주에 심었고 그 최대의 결실이 뇌이며, 지능은 자연의 선택에 의한 진화가 아니라 우주의 진화의 신비가 우리의 두뇌와 같이 기거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래전부터 불러오는 [영혼]인 것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인간을 이루는 원소가 우주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사 이며 138억년이 된 원소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최근의[우주 배경복사]이론의 증명도 138억년전의 대폭발로부터 시작된 [빅뱅 우주론]을 증명하는 것으로 초기 우주 밀도가 파동이 되어 일어났음을 증명한 것이다. ▶1922년 아이슈타인의 [양자광 이론]에서 빛은 [회절현상]을 갖는 파장이라고 생각했던 이론을 깨고 [빛이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빛이 입자로서의 생명력을 갖는다는 것을 입증한 것과 같은 뜻이다. ▶또한 [표준 우주론]에서는 150억년전 어느때 [10의 마이너스34승Cm]밖에 안되는 소립자의 [무엇]에 의해 어떤 에너지의 작용에 의해 폭발이 있었다 이 폭발전의 [무엇]을 [천체물리학]에서 [진공眞空]이라 표현 한다. 진공에서 우주가 시작되고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과 인간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오온의 식의 단계에 있는 소립자인 15개의 쿼크와 그 쿼크를 둘러싼 글루볼인 공=진공이 오양인 기초원소로 태어나고 이 기초 원소의 결합[양자24+전자6]으로 性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법공을 표현함에 있어 적멸보궁을 법성法性이라하며 부처님에겐 불성佛性있고 인간에게나 만물에게 도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한다 이 불성이 바로 법성의 DNA인 인간의 성性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DNA의 염기서열 24개는 다섯기초원소중 양자24를 말하며 안,이,비,설,신,의를 이루는 6개의 전자가 결합하여진 물질이며 이는 좁쌀보다도 더 작은 빛의 알갱이 인 것 입니다. 양자가 진화를 하게 되면 중성자로 바뀌고 전자가 진화를 하게 되면 양전자로 전화이 되기 때문에 무명으로 이름한 양자와 전자가 인간의 성을 이루고 부처님들의 불성은 중성자와 양전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법성은 중성자가 진화한 반중성자의 자리인 것이다. ▶삼일신고[구막한국 5대 태우의 한웅-BC3512-3418-] 제2장 一神51자에 나오는 구절 [성기원도 절친견 자성구자 강제이뇌 ] 소리내어 기로써 원하고 기도 드리면 반드시 친견 할 수 있으니 [너의 성性으로부터 一神(하나님)의 아들을 찾도록 하라 너의 머리속에 내려와 있느니라.]해설 됩니다. 여기서의 자성은 인간들의 성{성,명,정]이며 [반야심경]의 <자성>과 같은 뜻이 됩니다. 소리내어는 <염불>과 같은 뜻이며 절친견은 (견성)의 의미이며 머리속에 내려와 있는 것은 여래장 사상의 불성인 [삼진三眞10]을 말하는 것 입니다.. 견성할때 보이는 대광명과 같은 빛의 덩어리나 흐름이 이를 증명해주며 단세포에 800만개의 염기가 대도시 다섯권의 전화 번호부의 기억용량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몸의 100억조개의 세포를 다스리는 성,명,정이 합쳐진 성의 30궁중 양자나 전자의 기억 용량은 우주의 모든 정보를 집어 넣을 수 잇는 어마어마 양 일 것 입니다.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3항 [보현보살은 몸의 분량이 가이 없으며 음성도 가이 없으며, 색상도 가이 없으며, 이 나라에 오고자 하면 스스로 마음대로 되는 신통에 들어 몸을 줄여서 하여금 작게하며….] –<묘법연화경>석묘찬 옮김-도서출판 위음왕 /묘법연화경-아나출판- 보현보살이 계신곳이 현재 우리들 지구가 속한 수미산 우주로 삼계중 [욕계]에속한 수미산으로 야마천,도리천,사왕천을 이름 하며, <마음대로 되는 신통에 들어 몸을 줄여서 작게하여> 가고자 하는 곳이[ 색계]의 무상천,무번천,무열천 으로써 [진공묘유로 이름한 곳으로 ]몸을 줄여 작게 만들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이라 말씀 하시는 것이다. 현재 인간의 육신을 꾸겨서 접을 수도 없고 나눌수도 없고 하여 갈 수가 없다. 이 뜻은 살아있는 마음인 성인<영혼>으로 작게 줄여서 라고 하는 것으로 불성의 DNA인 [성의 30궁인 양자24와 전자6]을 말하는 것으로 좁쌀보다 작은 빛의 알갱이로서 이것으로 현재의 육신을 벗고 [견성]한후 몸을 작게하여 들어 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즉 성인 영혼으로 몸을 작게 만들어서 들어 간다는 뜻 입니다. 이렇듯 자성을 포함한 44자를 삭제하게 됨에 따라 당 현장 신역의 [반야심경]에 <암흑물질이 곧 공 이다>라고 표현 함으로써 [악惡의 대명사인 암흑물질]이 스스로 식이 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 뜻은 얼마나 무서운가 [암흑물질의 대명사인 마왕 파순]이 우주를 만들었다는 뜻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신역으로 이름한 [반야심경]을 독송할때 마다 마왕을 염송 한것은 아닌지 헉!!! 또 업장은 얼마나 쌓였는지 아! 미치겠네 ■<신역>이 나온 배경 <천제의 나라> 계승 문제를 놓고 < 고구려>와 <수나라>가 <역사>논쟁을 통해 <고구려>가 승리하자 그 여파로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수나라 뒤를 이은 당나라 역시 당태종 <이세민>이 100만이 넘는 대군을 데리고 고구려를 침공 하였지만 결국 패하게 된다. 이를 [한단고기]-정신세계사-임승국 역의(고구려국 본기 6)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막리지는 정국,양만춘,등의 수만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위용을 갖추어 <장안-당나라 수도>에 입성하여[세민=당태종]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양자강 북쪽 상하이 까지 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에 개망신 당한 것을 갚기위해 당나라는 한반도의 삼국이 모두 <보살불교>를 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당나라 고조(이연) 재위 때(AD618-626) 당시 승려 였던 현장을 인도로 보내 당대 인도에 남아있던 모든 <불교관계서적>을 수집하여 오게 한다. 이때 당고조를 비롯한 만조백관이 두줄로 도열하여 열렬히 환영하는 장면이 <당왕실>기록에 전하여 온다. 왜 열렬히 환영 했을까?????????? 이후 승려들을 동원하여 번역작업을 <측전무후>때 까지 계속하며 <천수경-정식 경전이 아님>도 이때 측전무후가 승려를 시켜 만들게 된다. 아쇼카왕이 결집한 관세음보살을 구원자로 설정한 <상좌부 독각불교>를 당나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한민족 정신을 썩게 하기위해> <당나라 독각불교>로 고쳐 이를 신역으로 이름하고 당나라 독각불교로 경전 결집하여 한반도로 들여보내어– 당나라의 한반도 정복 야욕의 서막을 연 것이다. 정말 자신들의 입맞에 맞는 불교를 한반도로 들여보네 한민족 정신세계를 썩게하려 했다면 과연 어떨것인가 이후 고구려 멸망과 중원대륙에대한 지배 승계권은 어떻게 될까? 고구려 점령후 제일 처음 고구려 서고를 불태우고 관청과 사대부집 사찰을 을 뒤져 한민족 고대 역사기록을 모두 불태운 것은 한민족이 진정한 중원대륙 지배 역사를 없애버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불행히도 손오공과 삼장법사만 기억하지 신역으로 이름한 경전에 어떤 숨어있는 어떤 주문을 걸었을까 아예 모르고 있다.–수리수리마수리—뿅 이후 한반도의 한민족들은 <신역>으로 이름한 경전에 아직도 취해서 <미래세>를 보는 안목을 모두 빼앗겨 버련 것은 아닌지 참ㅇㅇㅇ…. 이렇게 중요한 <자성>을 포함한 44자의 글자를 빼버린의도는 바로 깨달은을 얻을 수 없도록하기 위한 비열함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런지… 더불어 고대한국의 4대 경전을 없애고 왜곡되게 전했던 것이 모두 한민족 말살을 위한 마침표는 아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중국의 漢족들은 아직도 한민족이 깨어날 것을 두려워해서 [동북공정]을 통해 한민족 역사를 말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한민족 불자 들이 <산스크리트어>어로 쓰여진 온전한 [반야심경]만 독송하여도 사대불교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현재의 사찰에서도 (원본)에충실한 반야심경 독송이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도일체고액-모든 고난에서 벗어 났느니라 서론=서분의 해설 관자재보살께서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삼매를 행하실때 음의세계의 무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모이는 5 단계인 색,수,상,행,식 <각각의개체의 성들이> 모두가 공임을 훤히 비추어보고 모든 괴로움과 액난으로부터 벗어 났느니라. 3.본론=정종분 가].인因-사리자 <제보살마하살 응여시각색성시공 공성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식성시공 공성시식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고 공즉시식> 이 뜻은 [성]의 <陽이 암흑물질>이며 <陰이 공>이되어 [반야공]인 [성]을 이루게 된다는 것 입니다. <사리자여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와 같이 깨달아라 암흑물질의 성이 공이며 공의성이 암흑물질이니>암흑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암흑물질과 다르지 않으니 암흑물질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암흑물질로써 서로 받아 들이는 과정과 색깔 모양이 결정되는 과정과 삼합을 하는 과정과 알음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로써 <알음의 성이 공이며 공의 성이 알음이니 알음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알음과 다르지 않으니 알음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알음 이니라> 나].연緣-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執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사리자여 이전체적인 법공의 모양은 생겨나는 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워 지거나 깨끗해 지는 것 도 아니며,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라. 이런 연고로 법성의 진공 가운데는 암흑물질이 없으며 서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색깔 모양이 결정되는 과정과 삼합을 하는 과정과 알음의 과정이 없으며 눈,,귀,코,혀,몸,뜻도 없으니 빛,소라,향내,맛,,닿음,기억도 없으며 볼 수 있는 주위가 없으니 생각할 범위도 없으며 밝지 못한 씨종자가 없으니 밝지 못한 씨종자가 다함 또한 없으며 늙고 죽는 것이 없으니 늙고 죽는 것이 다함 또한 없느니라. 괴로움과 집착과 사라져 없어짐과 다스릴 길도 없으며 슬기가 없으므로 또한 얻을 것이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연고로써 ▶법공은 오온이 시작되는곳으로 서론의 [일체고액]이 없는 자리 임을 말씀 하시는 것이며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있는 여섯뿌리인 안,이,비,설,신,의가 상대 경계인 빛,소리,향기,막,촉감,智인 기억을 만나게 되면 6식(=6알음인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의 경계가 만들어 지며 이를 18경계라 합니다. 이 18경계가 법성의 진공의 자리에는 없다 설하신 것이며,그러나 현상세계인 반야공의 세계에서는 18경계가 존재합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 입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은 [12인연법]에 관한 말씀 입니다. 무명,행,식-이 하나를 이룬 성의30궁=성명정=영혼으로 오양인 [양자24+전자6]의결합체로 성을 풀어서 말씀하신것이 무명,행,식인 것 입니다. 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 과정을겪는 것을 말 합니다. 이러한 성이 인간육신을 다시 가지고 태어나고자 할때 1.무명無明 –갓 태어나 밝지 못한 인간 씨종자로써 오양중 양자를 이야기 함 2. 행行–작용으로써 삼합(세번 합하여 모임)활동 3.식識(오온의 식이 아님)–양자가 삼합을하여 모인 알음알이인 지혜로 알음 덩어리로써 경전속에 수없이 등장하는 성性을 이름함 4.명색明色–명색은 명과 색이 합쳐진 이름이며 이름과 생김생김 이라는 뜻을 가짐 여성의 자궁속에서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는 것을 말함 5.육입六入–육입은 육근인 안이비설신의의 여섯뿌리가 자궁속으로 들어가며 이때 부처님의나뉨인 삼진도 줄기기 빛이 되어 들어옴 6.촉觸–정자 난자가 육근과 접촉하여 서로 확인하는 괴정 7.수受–정자 난자 육근이 자기 것인지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8.애愛–서로 아껴 사랑하는 단계로 합동작전을 시작 9.취取– 육신과 뇌와 뼈와 장부 그리고 감각기관과 마음을 이루기 위해 서로가 나누어 취하는단계 10.유有–취의 결과 태아가 골격을 갖춘 단계 11생生–10번째인 유의 과정 까지 과정을 거쳐 어머니가 임신한지 10개월만에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여 삶을 살아가는단계 12.노사老死—일생을 살다가 늙어서 죽는 것이다. 십이 인연법은 육신의 주인공은 성인 영혼인 것이며 이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육신은 옷갈아 입는 것과 같으니 집착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내용으로 연각승에 대한 가르침 입니다.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고집멸도 사제는 성문승을 위한 가르침으로 1-3인 석삼극으로해설하면 고가 1의자리가 되어 [모는 고통과 괴로움은 집착을 멸한 도의자리에 들어야 벗어날 수 있느니라] 3-1회삼귀일로 해설하면 1의자리가 도의 자리가 되므로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집착으로부터 일어나니 이를 멸한 자리가 도의 자리 이니라]라고해설되며 이때의 자리가{보살도}의 자리인 것 입니다. 나]의 연에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법성의 진공이 무위의 세계이며, 현존 우주인 현상세계는 유위의 세계로 <오온과 오양과 연각승을 위한 십이인연법과 성문승을 위한 사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역으로 깨우쳐 주시기 위한 말씀 입니다. 다].과果-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것에 의지하는 연고로 아무걸림이 없는 마음이 되며 아무 걸림이 없는 연고로 두려움은 있을 수가 없으며 뒤바뀐 꿈의 생각을 멀리 떠나게 되니 궁극에는 열반에 이르게 되느니라 ▶따라서 성인 영혼이 지헤의 완성을 위해 살아갈때 아무 걸림이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며,이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또하나의 자신인 성인 영혼을 모르고 육신의 삶이 전부인양 자신의 육신안에 있는 영혼을 도외시한 채 살아온 것을[뒤바뀐 꿈]으로 깨달음을 주신 내용 입니다. 이로써 열매르 얻게되는 것이 [열반]이라는 과를 얻는 다고 하시는 것 입니다. 라].보報-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것에 의지하는 연고로 가장 높고도 바르며 넓은 평등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니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을 말씀 하시는 것이며 아뇩다라= 무상=더 위가 없음을 말하며 샴막=정등=절대평등을 말하며 예]태양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빛을 주어 만물을 화육 합니다. 삼보리=정각=완전한 깨달음=인간의 성이 불성을 이루었을 때로 별과 같음을 의미 합니다. 4.결론-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면 마를 항복 시키는 힘을 갖게 되며 우주를 밝게 관찰하는 힘을 갖게 되며 우주 법계를 두루 비추는 힘을 갖게 되며, 우주 법계에 삼신으로 나타나는 힘을 갖게 되니 모든 괴로움을 능히 소멸할 수 있으며 진실되어 허망하지 아니하므로 지혜의 완성을 이루어 천궁으로 들어가는 주문을 설하노라 ▶만다라를 범어로 mantra라고하며 진언眞言,주呪,밀주密呪,명明으로 번역 합니다. ▶진언을 범어로 Dharani라하며 음역으로 총지總持,능지能持,능차能遮라고 번역 합니다. 때문에 4.결론부에 나오는 ★[주呪]는 진언의 음역에서 -총지總持=모아서 가지다.혹 모아서 지니다 -능지能持=능력을 가지다. -능차能遮=막을 능력 이라는 뜻을 가지집니다. 이 세가지 음역의 공통점은 [힘=力]을 뜻하며 원효성사께서도 [금강삼매경]에서 주呪를 힘으로 정확히 표현하고 계십니다. [고 이기영 박사]님의 [금강삼매경]<진성공품>에서 시대시주,시대명주,시무상주,시무등등주에 대한 주석을 다셨느데 이를 소개하면 화엄52위 구분에 있어 등각위는 [보살도 성취의 보살]을 이룬때로서 ◆ 등각위의 2가지 도到 가]대신주는 대신력이 있어 삼마의 원怨을 항복 시킨다. 삼마=번뇌마 오온마 천마 나]대명주는 대명조가 있어 사안의 경계를 두루 관찰한다. 사안=육안,천안,혜안,법안 묘각위는 보살마하살과 일불승을 이루는 때로서 ◆묘각위 2가지 도到 가]무상주는 사지가 구족하고 오안이 원만하여 법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춘다. 사지=대원경지,평등성지,묘관찰지,성소작지 오안=사안+불안 나]무등등주는 삼신으로 나타나는 무상보리이다 삼신=법신,보신,화신 고로 결론부의 해설은 위를 참조하세요 5.비밀주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곧 주문을 일러 주노라 가자 가자 천궁으로 들어가자 천궁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깨달음이여 스스로 이루기를 주문의 인도말은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 가테는 gata가타의 어미변화로 [간 사람][간 상태]를 의미하며 [가신 분][가자]로 번역 됩니다. 파라가테의 파라는 [넘어서][저쪽] 으로 즉 도到,도피안,불국토,천궁으로 통하는 말 입니다. 파라상가테의 [상]은 완전히로 번역 되므로 불국토=천궁으로 완전히 들어가자로 번역 됩니다. 보디=[깨달음}으로 번역 되며 스바하는 [스스로][이루기를]로 번역 됩니다. 이를 종합하면 《가자가자 천궁(=불국토)으로 들어가자. 천궁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깨달음이여 스스로 이루기를 》로 해설 됩니다. ■정리 본론부의 가]나]항의 인연이 현재 육신을 가지고온 인간의 본체인 성性인 영혼과 법공의 인연으로 이름합니다. 법공은 현존 우주를 감싸고 다시 암흑물질로 꽉차 있는 바깥에는 적멸보궁이 도사리고 있는 상태를 이름하며 현존우주인 적멸한 경계인 [대공]내에서 가]인因의 색色인 생명력이 없는 암흑물질이 나]연緣인 법공의 법성性과 만나 생명력을 얻는 性성(영+혼)으로 인연을 맺고 다]과果인 뒤바귄 꿈은 육신의 삶이 전부로 알고 육신안의 자신의 영혼을 무시한채 욕망에 따른 육신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 하며 육신에 집착하는 것을 멀리 떠나게 되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영혼의 진화를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어 긍극에는 열반에 이르는 과를 얻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됨을 가르치신 경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고서적 [정본]반야바라밀다심경-김현두역-도서출판 아나 해설 반야심경-청담 스님역-보성문화사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성법스님-민족사 한단고기-임승국역-정신세계사 이 중 [정본]반야바라밀다심경이 범어로 된 산스크리트어를 충실이 번역한 광역본을 바탕로 하였기에 중심 적으로 참고 하였습니다. 더깊게 알아보시려면 블로그 -아나법화 연수원-에 들어가시면 ★[정본]반야바라밀다심경에 대한 18편의 무료 강의가 있으니 참고 하시고 ★<불교란 과연 어떠한 종교 인가>도 같이 들으시면 이해가 더 잘되는 것 같으니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반야심경]의 소중한 뜻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시길 기원 드립니다.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정본]반야바라밀다심경-아나출판-/해설반야심경-보성문화사-/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민족사/삼일신고-아나출판/한단고기-정신세계사- 인쇄

시산회(詩山會)

반야심경 – 우리말 해석 3가지

1.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密多時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이유를 불법에 의지하여 – 자유자재로 보고 행하려는 사람이 크나 큰 지혜를 얻고자 할 때

照見 五蘊皆空度 一切苦厄 ( 조견 오온개공도 일체고액 )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 귀로 온갖 소리를 들으며 , 코로는 모든 냄새를 맡고 혀로 온갖 음식의 맛을 보며 , 뜻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부딪히게 되는 이 모든 것들로 부터 보고 느껴 생각하게 되지만 이 몸의 다섯 가지 기관 들은 모든 것들의 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야만 , 크나 큰 지혜를 얻게 되어 모든 것들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고 태어나고 , 늙어가며 , 병이 들어 죽게 되는 것과 몸으로 받게 되는 온갖 괴로움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니라

舍利子 ( 사리자 )

사리자여

이 몸의 다섯 가지 기관들은 모든 것들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서 크나큰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아

色不異空 ( 색불이공 )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의 참된 모습은 있는 듯 하지만 그 실체는 없는 것이며

空不異色 ( 색불이색 )

모든 사물의 실체가 없다고 하지만 모습으로 눈에 보여 그것으로 판단하게 되니

色卽是空 ( 색즉시공 )

그 모습은 실체가 없어 모습으로 눈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면서도

空卽是色 ( 공즉시색 )

볼 수 없는 것이 또한 모습으로 눈에 보이는 온갖 것들 이니라

受想行識 亦復如是 ( 수상행식 역부여시 )

이 몸이 태어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물을 보고 생각하며 알게 되었고 , 또 이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잘 알고 살아왔다 생각하겠지만 그것들의 실체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면서 모습으로 나의 눈에 보이게 되었느니라

舍利子 ( 사리자 )

사리자여

이 몸의 다섯 가지 기관들은 모든 것들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서 크나 큰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아

是諸法空相 ( 시제법공상 )

모든 법의 참된 모습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지혜를 얻기 전에는 볼 수 없고 설령 그 지혜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不生不滅 ( 불생불멸 )

그 모습의 실체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 없어지는 것도 아니니

不垢不淨 ( 불구부정 )

더럽게 되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또 깨끗하게 되어 보이는 것도 아니니 ,

不增不減 ( 부증불감 )

크나큰 지혜를 얻어 모습을 보게 되어도 늘어남도 아니며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

이렇게 모습이 없어서 볼 수가 없는 모든 것의 실체들을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이 몸의 다섯 가지 기관인 눈 , 귀 , 코 , 혀 , 생각들로는 모든 것들의 모습을 바르게 볼 수 없는 것이오니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

지혜를 보는 눈이 없으면 , 그 대상의 사물을 똑바로 볼 수 없고 지혜의 귀가 없으면 , 모든 것들의 참된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지혜의 코가 없으면 , 모든 것들의 참된 냄새를 맡을 수가 없고 지혜의 혀가 없으면 , 모든 것들의 참된 맛을 느낄 수가 없으니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몸으로 모든 것들의 실체를 부딪치게 되어도 올바르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되느니라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

또 ,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과 생각으로 , 미칠 수 없는 세상에 이르면 ,

無無明 亦無 無明盡 ( 무무명 역무 무명진 )

어리석음도 소용이 없으며 지혜로움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나 이것들은 다 살아오면서 배운 온갖 지식들이 걸림이 되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지혜를 얻게 하는 초석의 발판이 된다는 것이니

乃至 無老死 亦無 老死盡 ( 내지 무노사 역무 노사진 )

크나 큰 지혜를 얻게 되면 늙어서 죽는 것도 아무 소용 이 없고 늙어 죽음을 안다는 것조차 소용이 없게 되니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

살아가는 동안 , 몸으로 받게 되는 고통을 없애는 길도 없고 지혜를 얻었다고 생각 되어도 얻어지는 것이 없으며 , 얻어 진다는 사실조차 없게 되는 것이니 , 태어나고 늙어가며 병들어 죽게 되는 육신의 괴로움을 받게 되어도 빨리 이 크나 큰 지혜를 얻지 못하면 그 고통을 없애지 못하는 것이니라

普提薩他 依般若波羅密多故 (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

그러나 굳고 단단한 마음의 깨달음을 가져야 눈에 보이면서도 볼 수 없는 모든 것들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는 , 크나 큰 지혜를 많이 펼칠 수가 있게 되니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느니라 .

心無罣碍 ( 심무가애 )

이 크나 큰 지혜를 많이 펼칠 수 있도록 이 몸을 부지런히 닦아 나가야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고

無罣碍故 ( 무가애고 )

마음에 걸리지 않게 되어야만 지혜로 보게 되어 모든 것들이 존재하게 되며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

모든 것들의 참된 모습이 있고 없다 생각하던 사물의 실체를 보게되고 몸으로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그릇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마침내 열반에 들게 되나니 ,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 )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이 크나큰 지혜를 얻고 행하게 되어 태어나고 늙어가며 병들어 죽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

故知 般若波羅密多 ( 고지 반야바라밀다 )

그러므로 이 크나큰 지혜를 얻어 펼치고자 하면 이 주문을 알아야 하나니

是大神呪 ( 시대신주 )

이 주문이 지니고 있는 힘이 너무나 큼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이 늘 외우는 주문이며 ,

是大明呪 ( 시대명주 )

지혜를 얻게 해주고 이것보다 더 밝을 것이 없는 주문이며

是無上呪 ( 시무상주 )

지혜를 얻은 후에는 이것보다 더 높을 것이 없는 주문이며

是無等等呪 ( 시무등등주 )

이와 똑같은 주문은 그 어느 그 어디에도 없는 주문이니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

늘 외우게 되면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고 또 진실하여 그 공덕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

故說 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

이제 크나큰 지혜를 많이 펼칠 수 있는 주문을 말하리라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 → 세번

높고 또 높아 , 더 이상 펼칠 것이 없는 지혜를 얻어 이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크나 큰 지혜의 깨달음을 얻게 되기를 바라고 성취하도록 하소서

2.

* 운허 스님 / 조계종판

한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지느니라 .

사리자여 !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니라 .

사리자여 !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고 ,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으며 ,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3 번 )

3.

*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 개공 도 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을 건너느니라 .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 색 이 공과 다르지 않고 ,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니 , 감각 ㆍ 생각 ㆍ 행동 ㆍ 의식도 그러하니라 .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 모든 법의 공한 형태는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실체가 없고 감각 ㆍ 생각 ㆍ 행동 ㆍ 의식도 없으며 ,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눈도 , 귀도 , 코도 , 혀도 , 몸도 , 의식도 없고 ,

색깔도 , 소리도 , 향기도 , 맛도 , 감촉도 , 법도 없으며 ,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고 집 멸 도도 없으며 ,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삼세 의 모든 부처님들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 一切苦 眞實不虛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말하니 이러하니라 .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 가자 , 모두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 가자 , 모두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넘어 가자 , 모두 넘어가서 깨달음을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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