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 의 믿음 | 06 생명스토리4월 3주 백부장의 믿음 1889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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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믿음을 본받는 성도 (눅 7:1~10) – 기독정보넷

백부장의 믿음을 본받는 성도 (눅 7:1~10) – 설교자 : 김양인 목사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었던 한 백부장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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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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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놀라신 백부장의 믿음 (2) – Faithlife Sermons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의 전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조금 다르지만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된 누가복음을 보며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같이 나누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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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ermons.faithlife.com

Date Published: 8/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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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능자를 믿은 백부장의 믿음 – 기존글_백업

예수님께 모든것을 믿고 맡긴 백부장의 믿음 마태복음 8장 5절부터 보면 예수님이 칭찬을 크게 하신 로마 백부장의 믿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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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ross91.com

Date Published: 3/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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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백부장의 믿음 – 에덴교회

백부장은 종을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죽였고, 유대인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희생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필요와 유익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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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loveeden.net

Date Published: 4/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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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10월 6일] 백부장의 믿음 – 국민일보

찬송 : ‘성도여 다 함께’ 29장(통 29)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누가복음 7장 1∼10절 말씀 : 백부장에게 사랑하는 하인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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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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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을 통해 본 진정한 믿음 – 유평교회

제 목: 백부장을 통해 본 진정한 믿음. 본 문: 누가복음 7장 1-10절. 설교자: 최 종 혁. 성경에는 66권의 책이 있고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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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믿음 – 샌디에고 온누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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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vision.onnuri.org

Date Published: 8/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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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백부장의 기이한 믿음 (누가복음 7:1-10) – Daum 블로그

로마 백부장의 기이한 믿음 누가복음 7:1-10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아마도 인간의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보다 행복한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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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생명스토리4월 3주 백부장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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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백부장 의 믿음

  • Author: 딸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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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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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전능자를 믿은 백부장의 믿음

예수님께 모든것을 믿고 맡긴 백부장의 믿음

마태복음 8장 5절부터 보면 예수님이 칭찬을 크게 하신 로마 백부장의 믿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러분이 알듯이 당시에 유대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이 예수님이 살고 있던 유대나라에 와서 통치하고 있었다. 이 백부장도 로마 사람인데 유대나라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라는 소위 요즘 군대용어로 하면 중대장쯤 될 것이다. 이 백부장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생겨 난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자기 하인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그 하인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확신이 마음에 들었다. 역시 똑같이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믿음이 백부장 마음속에 들어 간 것이다. 백부장의 마음은 예수님이 표현 하신대로 옥토이다. 자갈도 없고 잡초도 없는 그야말로 깨끗한 아주 비옥한 그런 마음 밭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 예수님께 와서 “주님, 제 하인이 병들었습니다. 고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요청을 한다. 그 때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8장 7절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그랬더니 8절,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내가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이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 8절,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고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백부장이 나타낸 믿음을 보면, 물론 그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자기 밑에 있는 부하들에게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할 때 정확하게 그 일을 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그렇게 명령을 할 때 하인들이 듣듯이 주님께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됩니다, 한 것이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 정말 특별한 믿음을 가진 분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 백부장의 믿음 가운데 말씀에 의지한 믿음을 볼 수 있다.

말씀에 의지한 백부장의 믿음

이 말씀을 주신 예수님의 그 말씀을 믿고, 말씀에 의지해서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는 믿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은 하는데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냥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다’ 고 믿는다면 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내가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어느 교회를 갔다. 그 교회 신자들이 정말 훈련을 잘 받은 신자들이었다. 내가 성경 몇 장, 몇 절을 읽어 주십시오 라고 하면 먼저 일어서는 분이 읽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들고 한 분이 일어섰다. 그리고는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정말로 ‘따아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큰 ‘대’자를 말하는 것이다. 큰 소리이다. “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5장 48절입니다!” 앉아서 읽지 않고 더구나 서서 소리를 지르며 읽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것이 옛날 중국의 황제가 보좌에 앉아서 앞에 사람에게 뭐라 뭐라 해라, 그러면 그 사람이 그 황제 옆에 서서 큰소리로 “이는 황제의 말씀입니다!” 옛날엔 스피커가 없었다. 목청 큰 사람이 앞에 나와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 앞에 전부 엎드리는 것이다. 복종이다.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복종하는 것이다.

이 땅의 황제가 아니고 “하늘의 황제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멘! 하고 말씀에 순종을 해야 되는데 우리는 그냥 보통 소리로 듣는다. 이 백부장이 나타낸 믿음은 놀라운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던 믿음이다. 자기 하인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믿은 것이다.

감히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고 너무나 감당할 수 없으니까 그냥 “말씀만 하시옵소서!”한 것이다. 황제가 말씀하면 100% 복종하는 것이다. 복종 안하면 죽는다. 절대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황제의 말씀은 절대적인데 우리는 그 절대적인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 백부장이 나타낸 믿음, 당시 로마의 군인이었던 이 백부장이 자기가 섬기던 황제가 있었지 않겠는가! 예수님 당시의 황제는 티베리우스 황제였다고 한다. 그 티베리우스 황제가 뭐라고, 뭐라고 했다면 다 예, 하고 굴복하는데 티베리우스 보다 훨씬 큰 하늘의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것이다.

백부장의 믿음은 말씀에 의지한 믿음인데 누구의 말씀인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하늘의 황제로 생각했던 그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그분이 말씀하시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없다. 누구의 말씀인데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다. 천사들이, 마귀가 모두 다 굴복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믿음을 이 사람이 나타냈던 것이다. 이 사람이 군인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축복이었다. 군대에서 상관이 명령하면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로마 황제가 말했다면 그것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믿음, 이 백부장이 나타낸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없다. 왜 그런가? 예수님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정 2절에, 평생 죄만 지은 중풍 병자를 보시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병이 아니라 네 죄가 다 용서되었다”했을 때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렸다. 저 사람 제정신인가? 어떻게 사람이 되어 하나님처럼 죄를 용서하는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이 마태복음 9장 6절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누구라는 것인가?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만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자기를 뭐라고 하는 것인가?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 해 보이신 것이다.

그 때에 6절 중간에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여기서 예수님이 증명해 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전능하신’이라는 말, ‘전능하신 하나님’ 이 말은 참으로 두려운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 함부로 쓴다. 여기 ‘전능하다’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솨다이’라고 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엘 솨다이’라고 한다. 이 ‘솨다이’라는 말의 어원은 여러 학자들이 어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엄마의 젖가슴’이다. 소위 어머니 하나님,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이다.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 여자는 연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전능한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 엘 솨다이의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죄에 빠졌든지, 어떤 질병에 걸렸든지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분이 누구인가? 이 땅에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이 마태복음 9장 2절에 “내가 네 죄를 사하였다. 걱정 하지마라”하고 말씀하신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서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증명해 보이겠다. 그 죄 때문에 생긴 그 질병을, 중풍병을 내가 고친다. 무슨 이야기인가? 죄의 뿌리가 뽑히면 죄의 나무에 열린 열매는 함께 없어지는 것이다. 내가 네 죄를 용서하노라! 하고 말씀하실 때, 그 죄의 나무에 매달린 모든 질병, 고통, 아픔, 슬픔, 눈물, 절망이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이 내가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죄를 없애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노라고 믿음을 주신 것이다. 그 믿음에 이 중풍 병자는 새사람이 된 것이다.

성경구절

9월 18일 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믿음

누가복음 7;1-10 2016. 9. 18 (주일 낮 예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지요? 2절에 보니까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백부장은 김부장이나 정부장처럼 성이 백씨인 부장님이 아니라 로마 군사 백 명을 거느린 로마 군대의 장교입니다. 이 백부장이 유대인의 장로들을 통해 예수님께 자신의 종을 좀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쳐주러 가십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다시 자기 벗들을 보내서 “주여! 여기까지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그러는 거예요. “내 종들도 내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데,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까짓 병이 떠나가지 않겠습니까?” 이 말이지요. 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감탄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을 하십니다. 사람들이 백부장의 집에 돌아와 보니까 당연히 종은 다 나았지요.

병이 나은 것도 좋지만 예수님께 인정받은 그 믿음 이 더 귀하지 않습니까? “백부장과 그 종은 좋겠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소유자 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백부장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1. (사랑)을 겸비한 믿음

2절 함께 봉독합니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아멘. 백부장의 부모나 자녀가 아니고 백부장의 종 이 병에 걸린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당시에 종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습니다. 사고파는 재산의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그를 가족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유대인의 장로에게 부탁을 합니다. “같은 유대인이니 장로님이 예수님께 가서 내 종을 좀 고쳐달라고 해주세요.” 대로마 장교가 자존심 상하게 식민지 사람들에게 그런 거 사정할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한 사람에게 말한 것도 아니고 몇 사람에게 부탁을 합니다. 가족도 아니고 자기 상전도 아니고 (종)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하는 걸 보면 그가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대인 장로들이 또 다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권력이 있는 백부장이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간 게 아니에요. 4절에 보니까 장로들이 예수님께 가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종의 병을 고쳐주는 게 합당하다는 거죠. 왜요? 5절 함께 봉독합니다. “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 아멘. 와! 이건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당시 로마 장교들이 집에서 수만리 떨어진 식민지 국가에 가서 근무하는 걸 좋아했겠습니까? 아니면 가족들이 있는 로마에서 근무하는 걸 좋아했겠습니까? 당연히 로마에서 근무하는 게 좋지요. 그런데 로마에 있지 않고 그 멀리까지 올 때에는 뭔가 이득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점령군 장교의 권세를 이용해서 식민지 백성들을 수탈하고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거죠. 그걸 통해서 진급도 하고. 보통은 그런 낙이라도 있으니까 수만리 이국땅에 와서 근무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오히려 식민지인 ( 유대 )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회당까지 지어주었다는 겁니다 . 정말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될 만큼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랑 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 그래서 두 말씀도 안 하시고 바로 그 집으로 가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 사랑 ) 이시기 때문입니다 .

9절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죠. 이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너희 중에서 이만한 사랑을 보지 못하였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욕심과 자기 이익을 위해서 믿는구나 . 너희 중에서 이 백부장과 같은 사랑의 믿음 을 찾아볼 수가 없구나 .” 이렇게 한탄하고 계시는 건 아닐는지요.

우리의 믿음이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믿음이 아니라, 특별히 나보다 어렵고,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사랑 하는 믿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믿는 것이다.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내가 돕고 내가 고쳐줄 것이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놀라운 일을 행할 것이다.”

여러분, 사랑은 희생입니다. 백부장은 종을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죽였고, 유대인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희생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의 필요와 유익을 위해서만 믿었던 아이 같은 믿음에서 벗어나, 백부장 같이 남을 위해 희생하는 수준 높은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겸손)한 믿음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6절 함께 봉독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 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멘. 백부장이 예수님을 뭐라고 부르지요? “ 주여 !” 라고 부릅니다. 8절에도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래요.

지금 로마군대 백부장이 일개 식민지 국가의 30대 초반의 청년에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건 마치 일제강점기 헌병대장이 동네 청년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게다가 로마시대에는 로마 황제 외에 다른 사람을 ‘주’라고 부르는 것은 반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로마 군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을 로마황제보다도 더 존귀하고 지고하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은 것임 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가 겸손 했기에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보는 안목이 열린 거죠 . 교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하면서 멸시했습니다.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랬지요. ‘가문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내가 너보다 훌륭하지’ 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메시아를 보고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정치적으로 바리새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겸손 했기에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믿음은 ( 겸손 ) 한 것입니다 . 왜냐하면 내가 잘 나서 잘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잘된 것을 알기에 잘 되면 잘 될수록 “이건 정말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게 됩니다.

반대로 ( 교만 ) 은 불신앙입니다 .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했다.”고 하니까 교만한 겁니다. 그 마음에는 벌써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만 있습니다. 그래서 잘 되면 우쭐하다가 넘어지고, 안 되면 낙심하다가 무너집니다. 잠언 18:12에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함께 봉독.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아멘.

주님은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 주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예수 믿으면 믿을수록 겸손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오래 믿었는데도 점점 교만해진다 그러면 뭔가 잘 못된 겁니다.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믿고 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주님이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주님이 친히 행하십니다.

3. (온전)한 믿음

7절, 8절 말씀 함께 봉독할까요?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아멘.

“나는 주님을 감당할 수 없는 지극히 작은 자인데, 이 구차한 곳까지 오실 필요 없이 그냥 거기서 말씀만 하시면 여기 있는 내 종이 나을 줄 믿습니다.” 그 말이죠. “내 종들도 내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데, 온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까짓 병이 당연히 떠나가지 않겠습니까?” 이 말입니다. 와! 이 믿음의 말 을 듣고 예수님이 감탄을 하신 겁니다.

백부장은 말로만 “주여! 주여”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진짜 믿었습니다 . 정말 겸손하고 온전한 믿음인지 아닌지는 순종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할 때, 온전히 믿을 때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면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문둥병이 걸려서 엘리사를 찾아갔던 아람의 군대장관 아시지요? 예. 나아만 장군 입니다. 엘리사가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어라.” 그랬더니 기분이 나빴어요. “우리나라에는 요단강만한 강이 없어서 여기서 씻으라는 거냐? 환부에 손을 얹고 안수라도 해줘야 도리가 아니냐?” 화를 냅니다.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국의 군대장관인데…” 자신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니 엘리사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교만하면 믿을 수가 없고 , 믿지 못하면 순종할 수가 없고 , 순종하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주님이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나아만 장군이 “안수라도 해 줘야지 무슨 요단강에 씻으라는 거냐?”고 불평하듯이 말입니다.

그저 내 방식대로 해주기만을 바라면서 내 생각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결과뿐만 아니라 ( 방법 ) 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게 진짜 믿음입니다 . 주님이 어떤 방법으로 인도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게 온전한 믿음입니다.

“근데요 목사님, 순종하기 너무 어려워요.” 이런 마음이 드는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생각을 좀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순종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허리가 아파서 어제 병원에 갔어요. 의사 말은 물론이고 나이가 어린 간호사나 물리치료사 말도 제가 얼마나 잘 듣는지 몰라요. 누우라면 눕고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혹시라도 잘못 들을까봐 집중을 해서 듣고 하라는 대로 착착 해요. 의사가 약 처방해 주면 그 약 봉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믿고 먹잖아요. 하루에 세 번 먹으라면 세 번 먹고, 식후에 먹으라면 식후에 먹고, 식전에 먹으라면 식전에 먹고, 정말 순종 잘합니다. 어떻게 내 머리로 다 이해가 안 되고, 내 생각하고 다른데도 그렇게 말을 잘 듣지요? 그래야 내 병이 나을 줄로 믿으니까 .

그런데 예수님 믿는 건 이상하게 내 고집대로 하려고 해요. “예수님 어떻게 할까요?” 묻기라도 하면 좋은데 묻지도 않아요. 예수님이 말씀하셔도 “예수님, 그게 아니고, 이렇게 해 주세요.” 오히려 예수님이 내 말대로 해주기만 바래요. 여러분, 의사가 환자 말대로 해야 병이 낫습니까? 환자가 의사 말 들어야 병이 낫습니까? 당연히 환자가 의사 말을 들어야 병이 낫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말 들어야 우리 인생이 잘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말씀 들어야 우리 인생이 잘 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는 거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겠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 보고 우리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게 훨씬 많아요. 그건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환자가 의사보고 내 말 들으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환자는 의사에게 증세만 이야기하고 의사가 처방해 주는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나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께 내 상황을 말씀드리고 “주님, 어떻게 할까요? 주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순종 하는 게 중요합니다 . 그렇게 할 때 주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9절 봉독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아멘.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인데도 겸손한 믿음이 있었는데 오히려 유대인들은 좀 안다고 교만했거든요. 사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유대인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겁니다 . 그래서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똑같은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8:12 함께 봉독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아멘.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이방인들은 오히려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 보좌에 앉아있는데 정작 본 자손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쫓겨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좀 안다고 ( 교만 ) 하여서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 이 유대인들 같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연륜이나 어떤 직분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백부장과 같이 오직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함으로서 주님께 칭찬받고 기적 같은 일들을 경험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가정예배 365-10월 6일] 백부장의 믿음

찬송 : ‘성도여 다 함께’ 29장(통 29)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누가복음 7장 1∼10절

말씀 : 백부장에게 사랑하는 하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인이 병들었나봅니다. 백부장은 하인을 고치기 위해 친분 있는 유대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하인을 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이고 로마군인 백부장이었지만 유대인을 사랑해 회당도 지어줬던 사람입니다. 주변에 유대인 장로도 있고, 벗들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인복이 많은 백부장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을 향해 이스라엘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과 병든 하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지만, 한 사람은 칭찬을 하고 또 한 사람은 죽을병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누가복음은 백부장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그의 믿음이 주는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누가 한 사람이 기록한 두 권으로 구성된 하나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 먼저 어떤 전조(前兆)를 보여주고 사도행전에서 명확한 결말을 맺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백부장 고넬료가 등장합니다. 고넬료를 통해 많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되는데 그 전조가 누가복음 7장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끝부분인 23장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말한 사람이 백부장입니다. 사도행전 마지막 장에서는 바울을 지키는(지켜주는!) 한 로마군인을 소개합니다.

누가복음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처음 언급된 곳은 5장 20절입니다.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언급된 곳은 7장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말씀에서입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치유를 의뢰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5장과 7장 사이에는 제자선택의 말씀과 안식일에 관한 논쟁, 그리고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같은 평지설교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결론 부분은 6장 후반부인데, 그 내용은 ‘듣고 행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란 단지 각 개인의 마음의 다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를 향한 행동까지도 수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7장의 백부장은 예수님을 뵙지 못했지만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무슨 일이든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의 힘을 믿은 것입니다. 말씀 그 자체만으로 큰 권능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곧 믿음이며, 그 믿음은 자신뿐 아니라 타자를 향한 것이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뵙지 못했지만 말씀의 권능을 믿은 백부장의 믿음처럼 오늘날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살고 있는 우리도 말씀만으로 우리가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굳게 지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기도문

남상준 목사(대전 소망루터교회)

백부장을 통해 본 진정한 믿음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눅7:9)”

여기 예수님을 놀라게 했던 믿음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놀라게’ 했다면 여기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 믿음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눅7:1-10)”

샌디에고 온누리교회

상세 본문

백부장은 오늘날 중대장(규모 100여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숫자는 작았으나 엄청난 기동력과 충성심이 확인이 되어야 오를 수 있는 자리로

급여도 많았고 오히려 천부장 보다도 인정을 받는 자리였습니다.

성경에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히브리 민족의 이야기 임에도 이방인이자 점령군의 장교인

백부장은 모두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피지배 민족인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일제시대 서울에 부임한 일본군 장교가

조선 백성들을 위해 많은 좋은 일을 한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종 하나가 병이들어 죽어가자

그는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해 예수님을 초청합니다.

백부장의 종은 그냥 종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가 그 종을 가치있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백부장은 점령지역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기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부탁을 받은 유대장로들이 그렇게 불편하게 여기는 예수님에게

백부장의 입장을 헤아려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에서 확인이 됩니다.

그런데 정작 백부장은 예수와 대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은 필요하지만 내가 로마의 장교인데

굳이 만날것 까지야 있겠는가 하는 태도를 가졌던 것일까요?

백부장은 자신의 종을 보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저는 주를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십시오. 그

러면 제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7:6-7)

이 말씀을 들은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도(믿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믿음은 보지 못했다’며 적쟎이 놀라셨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자신의 위에 상관이 있고 자신의 아래에 부하가 있어 나도 상관의 명령에 따라 행하고

내 부하도 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통해 예수님을 인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자신은 예수님을 천부장 보다 더 크고 높으신 분으로 믿고

말씀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백부장의 이 고백은 실로 위대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예수님과의 관계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부장이 자신의 직업과 자신의 자리를 통해 예수를 믿은 것처럼,

과학자는 연구와 결과를 통해,

음악인은 연주와 노래를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자신의 삶속에서 나온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오늘 나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로마 백부장의 기이한 믿음 (누가복음 7:1-10)

로마 백부장의 기이한 믿음

누가복음 7:1-10

철학자들이 하는 일이란 아마도 인간의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보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틴 부버 (Martin Buber) 라는 유대인 철학자가 있는데 , Ich und Du ( I and Thou 한국말로는 ‘나와 너’) 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 이 책은 사람들의 삶의 본질을 관계 , 만남 또는 대화 (dialogue) 로 이해합니다 . 곧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 대화를 나누며 ,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러한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 영어 번역본에는 “Primal Life Stand” 라고 되어 있는데 , 한국말로 번역하면 “ 기본적인 삶의 자세 ”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Martin Buber 가 기본적인 삶의 자세로 제시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 하나는 “I-Thou”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I-It” 관계입니다 . 곧 사람들은 I-Thou 의 관계 , 만남 , 대화를 하거나 또는 I-It 의 관계 , 만남 , 대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

I-Thou 관계는 상대방을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대합니다. 그리고 인격 대 인격의 상호적인 대화와 교제를 나누며 , 자신을 이 관계에 헌신하고 복종합니다 . 반면에 I-It 관계는 상대방을 하나의 객체로 , 쉽게 말해서 ‘ 물건 ’ 으로 취급합니다 . 그리고 일방적인 말이나 행위들을 가하며 , 상대방을 관리하거나 통제하려고 합니다 . 제가 이해하기로 , I-Thou 관계는 ‘ 나 ’ 와 ‘ 너 ’ 두 사람이 각각 교각 (bridge pier) 이 되고 , 그 위에 든든한 관계의 다리를 놓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이 든든한 관계를 통하여 진정한 만남과 대화와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하지만 I-It 관계에서는 교각이 ‘ 나 ’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다리를 놓을 수 없습니다 .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며 , 일방적입니다 . 그래서 상대방을 만나고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습니다 . 다만 상대방을 ‘ 수단 ’ 으로 이용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며 , 이를 위해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거나 상대를 통제하려고 합니다 .

오늘 우리는 한 로마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기이하게 여기시고 공개적으로 칭찬을 하실 만큼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 그가 예수님께 보여드린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이해해보려는 마음에 제 설교의 서론이 좀 길어졌습니다 . 백부장이란 그 수하에 백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는 로마군 장교를 말합니다 . 말하자면 군인입니다 . 그 당시 로마 백부장은 높은 사회적 지위 , 정치적 권력 , 경제적 부를 누렸다고 합니다 .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백부장도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 유대인의 회당을 지어주고 또 유대인 장로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할 만큼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 그런데 2 절에 보면 이 백부장의 “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 고 합니다 . 백부장의 높은 지위와는 달리 , 그 당시의 “ 종 ” 은 사람으로조차 취급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 그 주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 하지만 이 백부장은 그의 “ 사랑하는 종 ” 을 위해 , 예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 이것은 오늘 이야기의 모티브이기도 하지만 , 이 백부장의 믿음과 예수님의 은혜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단서이기도 합니다 .

본문은 병들어 죽어가는 이 종을 가리켜 “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 ” 이라고 소개합니다 . 백부장과 그의 종이 있습니다 . 그런데 이 관계는 소유하고 소유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 “ 사랑하는 ” 관계입니다 . 위에서 설명한 Martin Buber 의 말을 빌자면 , I-It 의 관계가 아니라 I-Thou 의 관계입니다 . 물론 백부장은 주인으로서 종을 “ 물건처럼 ” 소유하고 ,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또 지금처럼 병이 들어 죽게 되어 더 이상 “ 종으로서의 가치 ” 가 없어졌을 경우 , 내다버릴 수도 있습니다 . 하지만 백부장에게 있어서 이 종은 그런 “ 물건 (It)” 이 아니었습니다 . 백부장에게 있어서 “ 종 ” 은 자신과 똑 같은 성정을 가진 고귀한 인격이며 , 따라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상대 (Thou) 였습니다 . 비록 신분은 백부장과 종이었지만 , 이 두 사람 사이에 맺어진 관계는 I-Thou 의 관계이며 , 그 둘을 이어주는 다리는 진실한 사랑의 관계였습니다 . 그리고 이 사랑의 관계로 종과 이어진 백부장은 , 종이 아픈 만큼 자신도 아팠습니다 . 이렇게 아플 때 , 그는 이 관계를 힘들어하거나 끊지 않고 , 오히려 자신을 헌신하여 종을 섬겼습니다 . 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 그는 종과 맺어진 이 “ 사랑의 관계 ” 에 매우 충실하며 진실했습니다 . 굳이 표현을 하자면 이 백부장은 이 “ 종과의 사랑의 관계 ” 를 충실하게 섬기고 감당하는 또 다른 “ 종 ” 이었습니다 .

백부장의 이러한 진실한 태도는 그가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I-It 이 아닌 I-Thou 의 관계 속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 백부장에게는 당장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어가는 급박한 문제가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그를 치료하실 수만 있다면 , 단숨에 예수님께 달려가서 집으로 모셔와 종을 치료하시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 하지만 백부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백부장은 자신이 직접 주님께 가지 못하고 대신에 유대인 장로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셔서 종을 치료해 주시도록 간청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장로들의 청을 들으시고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 그는 다시 자신의 친구들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 “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를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 백부장의 말을 생각하면 , 그가 예수님을 “ 하나님의 아들 ” 로 믿고 경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는 자신의 다급한 필요를 따라서 예수님을 단지 “ 병을 치료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분 ” 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 만일 그랬다면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급히 집으로 모셔와 자신의 종의 병을 치료하시도록 했을 것입니다 .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아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 이는 그가 예수님의 “ 전부 ” 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백부장은 이 주님과 자신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I-Thou 의 관계를 맺었습니다 . 이 관계 속에서 자신을 한 없이 낮추고 주님을 한 없이 경외하였습니다 .

예수님께서 몸소 집에 오시는 것을 만류한 백부장은 주님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7b-8 절 말씀입니다 . “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 이 백부장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기이하게 여기시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예수님께서 이렇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후 그의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백부장의 종이 이미 건강해졌습니다 . 과연 백부장의 믿음대로 ,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그의 병이 나간 것입니다 .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 종에게 그렇게 강력하게 역사할 수 있었을까요 ? 물론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예수님의 말씀은 “ 능력의 말씀 ” 이 되지 못하고 , 허공에 퍼지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 하지만 이 백부장에게는 그 말씀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죽어가는 종을 치료하고 구원하는 능력을 발하였습니다 .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

Martin Buber 에 따르면, 세 가지 종류의 대화가 있다고 합니다 . 하나는 “ 진정한 대화 ” (genuine dialogue), 다른 하나는 “ 기술적인 대화 ” (technical dialogue), 마지막으로 “ 대화를 가장한 독백 ” (monologue disguised as dialogue) 입니다 . 기술적 대화란 객관적인 지식을 전달하고 이해하기 위한 대화입니다 . 교수와 학생이 나누는 대화 , 의사와 환자가 나누는 대화 등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 대화를 가장한 독백이란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것으로서 실상은 대화가 아닙니다 . 이에 비해 “ 진정한 대화 ” 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마음에 두고 살아있는 상호적 관계를 맺기 위한 진실한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하고 듣습니다 . 이러한 대화의 여러 다른 모습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가지만 주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말 , 자신이 하고 싶은 기도만 일방적으로 외쳐댑니다 . 방언 기도 , 철야 기도 , 금식 기도 , 통성 기도 가리지 않고 마구 쏟아냅니다 . 하지만 이것은 기도라기보다는 “ 독백 ” 에 가깝습니다 .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과 그 말씀이 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도 많이 하고 , 또 들은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도 합니다 . 하지만 , 예수님과 진정한 I-Thou 의 관계를 맺기는 원하지 않습니다 . 그냥 궁금한 것을 해소하고자 “ 대화 ” 를 나누고 , “ 정보 ” 를 교환하는 것입니다 .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 능력 ” 이 아니라 “ 지식 ” 으로 주어집니다 .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백부장은 예수님께 “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말합니다 . 이 주님과의 대화에서 , 그는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 자기 집에 모시기에도 감당할 수 없는 “ 하늘과 땅의 주 ”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 그리고 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엄위한 군령과 같으며 ,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음을 믿었습니다 . 그는 이렇게 주님과 “ 진정한 대화 ” 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

우리 크리스천들은 모두 말씀을 사랑하고, 또 말씀에 무한한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무슨 “ 신기한 주문 ” 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 말씀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고 나누시는 살아있는 대화입니다 . Martin Buber 는 하나님을 가리켜 “ 영원한 당신 ”(eternal Thou) 이라고 부릅니다 . 우리의 “ 영원한 당신 ” 되신 하나님과 진정한 사랑과 경배의 관계를 맺을 때 ,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 나 (I)” 와 “ 당신 (Thou)” 으로 만나며 진정한 대화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 그렇게 될 때 , 우리가 이제까지 글로 읽던 성경 말씀들이 하늘을 울리며 땅을 진동시키는 창조주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에 능력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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